이차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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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
慶州 栢栗寺 터에 있었던 이차돈 關聯 記念碑
법명 이차돈
出生 506年
入寂 527年(22歲)

이차돈 (異次頓, 506年 (智證王 7) [1] ~ 527年 (法興王 14) [2] 9月 15日 ( 陰曆 8月 5日 [3] [4] ))은 新羅 법흥왕 (法興王)의 謹愼이자 佛敎 殉敎者이다. 거차돈 (居次頓)이라고도 하며, 《三國遺事》에는 厭髑 (厭觸 또는 ?觸), 異處 (伊處), 妻도 (處道)라는 다른 이름 表記도 紹介되어 있다. 新羅의 佛敎 傳來 過程에서 있었던 在來 宗敎와의 葛藤을 象徵하는 人物로 韓國 歷史上 最初의 殉敎者로 꼽힌다.

『三國史記』의 이차돈 [ 編輯 ]

『三國史記』 [5] 에는 佛敎 를 公認하였다는 記錄과 함께 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을 引用하여, 法興王이 佛敎 를 公認할 當時 大臣들 [6] 의 反對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고 [7] 이때 異次頓이 나서서 佛敎를 公認할 것을 積極 主張하며 [7] 自身을 죽임으로서 王의 威嚴을 세우고 臣下들의 反對를 가라앉힐 것을 請했다.

이에 王은 大臣들을 모아 놓고 佛敎를 公認할 지의 與否를 議論하였고, 大部分의 大臣들이 反對하는 가운데 異次頓이 나서서 贊成하였다. 王은 大臣들이 모두 反對하는데 이차돈 혼자서 贊成하는 것은 不當하다며 그를 處刑할 것을 命했다. 異次頓은 죽기 直前에 "部處께서 계신다면 내가 죽은 뒤 移籍(異蹟)李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의 목이 베여 떨어지는 瞬間 붉은色이 아닌 흰色의 피가 한 길 넘게 솟구쳤고,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꽃비가 내렸다. 大臣들은 以後 佛敎를 받아들이는 것에 어떠한 反對를 하지 못했고, 法興王은 佛敎를 公認하게 되었다고 한다.

『三國遺事』의 이차돈 [ 編輯 ]

《三國遺事》勸第3 興法(興法)第3 '원종흥法厭髑滅新'組는 헌덕왕 (憲德王) 9年( 817年 )에 作成된 《촉향분예불결사문(?香墳禮佛結社文)》과 《向前》의 두 가지 資料를 引用하였다. 佛敎를 公認하고자 했으나 臣下들의 反對에 부딪친 法興王에게 사인(舍人) 厭髑이 나아가 "거짓 命令을 傳한 罪를 물어 神을 刑罰에 處하여 목을 베시면 萬百姓이 모두 服從하여 敢히 下敎를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請했다. 王은 厭髑의 말대로 온갖 刑틀을 갖추어 놓고 臣下들을 불러 "寡人이 절을 짓겠다는데 왜 일부러 늦추느냐?" 라며 꾸짖었고, 臣下들은 怯에 질려 그런 일이 없다고 辨明했다는 記錄과 함께, 主席으로 處理된 《向前》에는 거꾸로 厭髑이 王命을 내세워 절을 지으라는 뜻을 臣下들에게 傳하자 臣下들이 달려와 王에게 反對하고 나섰고 王은 厭髑이 王命을 거짓으로 傳達했다며 厭髑에게 責任을 물었다고 傳하고 있다. [8]

王은 厭髑을 불러 꾸짖은 뒤 處刑했고, 厭髑은 죽음을 앞두고 "大聲法王(大聖法王)께서 佛敎를 일으키고자 하시므로 나 自身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世上의 因緣을 버리오니, 하늘은 상서로움을 내리시어 사람들에게 두루 보이소서"라고 盟誓하였다. 그의 베어진 목에서 흰 젖이 한 길이나 솟구치고 하늘은 어두워지면서 夕陽이 그 빛을 감추었고 땅이 흔들렸으며 비가 떨어지는 等 온갖 自然現象들이 일어났으며, 베어진 厭髑의 屍身은 北邙山 西쪽 고개에 묻히고 아내가 그의 冥福을 위해 雌雛史를 지었다고 傳하고 있다. 이 자추社가 세워진 땅은 《向前》에 따르면 厭髑의 목이 베여 날아가 떨어진 자리였고, 자추社는 後날 栢栗寺 (栢栗寺)라 불리게 되었다.

《三國遺事》 權踶3 榻牀第4에는 興輪寺(興輪寺)의 金堂에 新羅 佛敎의 成人 10人의 昭詳이 東西 壁에 安置되었는데, 東쪽 壁에 西쪽으로 보도록 安置된 다섯 床 가운데 하나가 厭髑이었다고 傳하고 있다.

異次頓의 家計 [ 編輯 ]

異次頓의 家計는 正確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王族인 것으로 推定되며, 星氏는 金氏라는 說과 朴氏라는 說이 存在하며, 金氏 說에 依하면 奈勿王 (在位: 356年 ~ 402年 )의 아들 習步 葛文王 (生沒年 未詳)의 後孫이고, 朴氏 說에 依하면 訖解王 (在位: 310年 ~ 356年 )의 後孫이 된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三國遺事』에는 그가 死亡하던 法興王 14年(527年) 當時 22歲였다고 記錄하고 있으며 이 記錄에서 異次頓의 生年을 逆算해볼 수 있다.
  2. “記事” . 異次頓이 死亡한 해는 三國遺事(527年) 三國史記(528年)으로 死亡한 月, 일은 같으나 年度가 다른데, 527年의 境遇 異次頓의 殉敎한 害를 中國의 佛敎史(達磨大師가 禪宗을 中國에 傳한 해)와 엮기 위해 主張하게 된 年度라는 主張이 있다.  
  3. 『三國遺事』 卷3, 「興法」, 원종흥法 염촉멸신
  4. 『三國遺事』에 引用된 「向前」에는 新羅에서 고을의 長老들이 每달 異次頓의 期日 아침이 되면 興輪寺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 날이 8月 5日로 死因(異次頓)李 不法을 위해 목숨을 바친 날 새벽이었다고 說明한다. 헌덕왕 9年에 該當하는 黨 원貨 12年 (817年)에 新羅의 佛敎界 人士와 高位 大臣들이 異次頓의 무덤을 修理한 날도 8月 5日이며, 興輪寺의 領袖(永秀)라는 禪師가 每달 5日에 異次頓의 무덤을 禮佛하고 焚香할 香徒들을 모아 契를 맺고 지은 것이 『촉향분예불결사문』으로, 『三國遺事』가 異次頓의 行跡을 記錄하는 主要 資料가 되었다.
  5. 『三國史記』 卷4, 「신라본기」4, 法興王 15年(528)
  6. 當時 大臣들의 이름은 『三國遺事』 卷3에 空木(工目), 알공(謁恭) 等이라고 나온다.
  7. 韓國史 > 古代社會의 發展 > 三國의 成立과 發展 > 古代文化의 發展 > 異次頓의 殉敎 , 《 글로벌 世界 大百科事典
  8. 《三國遺事》는 法興王이 異次頓에게 命하여 지은 절인 興輪寺(興輪寺)는 千경림(天鏡林)이라는 숲이 있던 자리였고, 法興王 14年 정미(527年)에 처음 터를 닦은 뒤 22年 乙卯(535年)부터는 本格的인 工事를 始作하는데 천경林의 나무를 베어 公社에 充當했으며 주춧돌과 돌函까지도 천경林에서 가져다 썼다고 說明한다. 천경林은 이름에서도 보이듯 在來의 薦新 崇拜와 關聯이 깊은 곳이었으며, 佛敎를 받드는 것을 反對하는 臣下들 大部分은 이러한 在來의 土俗信仰을 崇拜하고 있었기에 이를 王에게 抗議한 것이다.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