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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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丁若鏞
다산 정약용 초상
茶山 丁若鏞 肖像
身上情報
出生日 1762年
出生地 朝鮮 京畿道 廣州府 초부면 마재
死亡日 1836年 (74歲)
死亡地 朝鮮 京畿道 廣州府 마재 私邸
職業 文官, 實學者, 著述家
本館 羅州
父母 鄭在原 (簿)
海南 尹氏 夫人 尹小온(某)
宜寧 南氏 否認(氈帽)
金氏 側室(庶母)
兄弟姊妹 첫째 兄 鄭약현 , 둘째 兄 정약전 , 셋째 兄 정약종
配偶者 풍산 洪氏 否認
子女 膝下 6男 3女
(그 中 아들 정학연, 아들 정학유)
親姻戚 祖父 靜止해
叔父 정재운 · 정재진
査頓 深奧
妹夫 이승훈
妻男 異服兄 李蘗
外四寸 윤지충
孫子 정대림 · 정대무 · 精油驛
學問 活動
分野 性理學, 實學

정약용 (丁若鏞, 1762年 ~ 1836年 )은 朝鮮 後期의 文臣이자 實學者·著述家·詩人·哲學者이다. 本貫은 羅州 , 兒名은 歸農(歸農), 는 隨試(美庸), 茶山 (茶山)·沙巖(俟菴)·濁옹(?翁)·태수(苔?)·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人(鐵馬山人)·문암日人(門巖逸人), 堂號는 與猶堂(與猶堂)이며, 諡號는 門도(文度)이다. [1] [2] IASB 2012年, 茶山 誕生 250周年을 맞아 '2012年 유네스코 世界記念人物'로 選定되었다. [3]

初期生涯 [ 編輯 ]

出生과 成長 [ 編輯 ]

京畿道 廣州府 초부면 마재(馬蚿(馬峴), 現在의 南楊州市 조안면 능내리 94)에서 태어났다. 丁若鏞이 태어난 두물머리 는 南漢江과 北漢江이 만나는 地點이다. [4] 江原道 太白에서 發源한 南漢江은 旌善, 寧越, 忠州, 驪州를 거쳐 양수리에서 北漢江과 合流한다. 現在는 生家터와 實學博物館 等 정약용 遺跡地가 잘 造成되어있다. [5]

父親 정재원은 첫 夫人 宜寧 南氏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夫人인 孤山 尹善道 의 五代孫女인 尹小온(海南 尹氏, 祖父 尹斗緖 , 父親 윤덕렬)氏 사이에 藥典, 藥種, 藥用 3兄弟와 딸 한 名을 낳았으며, 丁若鏞은 4男 2女 中 네番째 아들이었다. [6] [4] 丁若鏞이 태어난 해에는 英祖 의 노여움을 산 思悼世子가 뒤주속에 갇혀 죽는 일이 벌어졌다.(5월) 父親 정재원은 벼슬을 내려놓고 落鄕하였고 그해 6月에 태어난 丁若鏞의 雅號를 歸農(歸農)이라 지었다. [7] 벼슬을 탐하여 黨爭에 휘말리지 말고 農村에 歸依하라는 意味를 담은 것이었다.

丁若鏞의 先祖들은 8臺를 연이어 文科에 及第하여 모두 弘文錄에 올랐는데 [8] 高祖父, 曾祖父, 祖父의 3代에 이르러서는 벼슬에 오르지 못했다. [4] 아버지 정재원은 1762年 3月에 生員試에 合格한후에는 大科에 應試하지 않았다. 出世에는 큰 欲心이 없었기에 査頓인 채제공 이 大科 應試를 여러次例 勸誘하였으나 마다하였다. [9] 뒤늦게 蔭官으로 벼슬길에 나간것은 生活苦 때문이었으며 [10] 戶曹佐郞, 蔚山府使, 眞珠牧師(正3品)까지 지냈다. [11]

家門의 來歷 [ 編輯 ]

本貫은 押解(押海)였다. 只今은 全羅南道 新安郡에 屬하는 섬이지만 朝鮮時代에는 나주목에 屬해있었기에 羅州 鄭氏로도 불렸다. [12] 祖上들은 高麗 末에 黃海道 配天에 살다가 朝鮮이 開國하자 서울로 移住했다. 11代 祖父 정자급(丁子伋)李 承文院 敎理를 지낸이래 8代에 걸쳐 벼슬을 하였다. 弘文館 副提學을 지낸 정수강, 兵曹 判書를 지낸 정옥형, 議政府 左贊成을 지낸 정응두, 大司憲을 지낸 정윤복, 江原道 觀察使를 지낸 鄭鎬宣, 弘文館 敎理를 지낸 정언벽, 兵曹 參議를 지낸 정시윤이다. [13] 8代 祖上이 連이어 모두 弘文館 名簿에 이름을 올렸는데, 弘文館 은 司憲府, 司諫院과 함께 三四(三司)로 불린 重要部署로 學問이 높은 學者官僚만 들어갈 수 있었다. [12]

朝鮮의 歷代 文科 及第者들의 名簿인 '國朝文科榜目'을 보면 弘文館에서 勤務한 者들은 따로 表示할 程度로 높은 評價를 받았다. 朝鮮時代 請要職(淸要職)의 象徵으로서 政丞·判書 等 高位 官吏들은 거의 例外없이 이곳을 거쳐갔다. [14] 그래서 丁若鏞은 平素 八代玉堂(八代玉堂)이라 하며 學問名可妊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12] 1694年(肅宗 20) 甲戌換局 으로 西人이 執權하여 南人이 沒落하자 5代祖 정시윤은 黨爭을 避해 京畿道 廣州 馬蚿(馬峴)으로 옮겨 살았다. [15] 高祖父 정도태(丁道泰), 曾祖父 正항신(丁恒愼)은 벼슬을 하지 못했다. [13] [16] 高調 정도태, 曾祖 正項신은 進士試에 入格했고, 祖父 靜止해(丁志諧)는 通德郞에 오르기는 했다.

諺文習得 [ 編輯 ]

丁若鏞은 특별한 스승이 없이 [17] 父親 정재원의 任地를 따라다니며 父親으로부터 學問을 배웠다. 兄 정약전 은 星湖 李瀷의 學脈을 잇는 綠巖 권철신 으로부터 師事했으나 丁若鏞은 父親의 가르침 以外에 獨學하였다. 이가환 , 李昇薰과 交流하게 되면서 利益의 學問을 接했으나 遺作을 통해서 司稤(私淑)했을 뿐이다. [18]

네살에 千字文을 배웠고 [19] 일곱 살 때 '바다'라는 를 지은 것이 남아있다. 열 살 以前의 어린 時節에 지은 詩를 모아 《삼미者집》(三眉子集)이라는 冊을 냈는데 現在 傳해지지 않는다. [20] 삼미(三眉)라는 別名은 어릴 적에 걸렸던 天然痘가 나으면서 생긴 흉터 때문에 눈썹이 세 個 생겼다는 뜻이다. 아홉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맏兄嫂 慶州 鄭氏 와 繼母 金氏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열살때 經書와 四書를 模倣해서 作文한 글이 自身의 키만큼 쌓였다고 한다. [20]

어릴 적에 天然痘 에 걸렸으나, 王族 出身의 社가 名義였던 이헌길 의 診療로 인하여 살았다. 丁若鏞은 後날 이헌길의 《 마진기방 》을 바탕으로 한層 發展된 紅疫 治療서 《 麻科會通 》을 執筆하고, 이것은 現代 醫學 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朝鮮의 生命을 救한다. 또한 丁若鏞은 이헌길의 生涯를 다룬 《 蒙首展 》을 執筆하기도 했다.

星湖學派 入門 [ 編輯 ]

1776年 結婚하여 妻家에 往來하기 爲해 서울을 자주 드나들면서 이때 星湖 利益의 學問을 接할 수 있었다. [21] 같은 해 아버지가 다시 벼슬을 하여 戶曹 佐郞이 되었으므로 서울에 집을 세내어 살았다. [13] 1776年 4月 10日 ( 陰曆 2月 22日 )에 承旨 混文으로 名聲이 높은 이가환 과 妹夫 이승훈 을 만났다. 李家煥은 이승훈의 外三寸이었으며, 星湖 李瀷 의 宗孫으로 當時 利益의 學風을 繼承하는 中心人物이었다. 이승훈도 利益의 學問을 繼承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 影響을 받아 丁若鏞도 그 利益의 遺書를 工夫하게 되었다.

이들에게서 利益의 學問을 接하면서 實學 思想의 土臺를 다졌다. 利益은 根氣學派의 中心的 人物이었다. 丁若鏞이 어린시절부터 根氣學派의 改革理論에 接했다고 하는 것은 靑壯年期에 그의 思想이 成熟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意味를 던져주는 事件이었다. 그리고 丁若鏞 自身이 後날 이 根氣學派의 實學的 理論을 完成한 人物로 評價받게 된 端初가 바로 이 時期에 마련되고 있었다. [6]

1777年(15歲) 和順 縣監이 된 아버지를 따라가서 和順縣 北쪽에 있는 동림사에 가서 兄 丁若銓과 함께 書冊 學習에 邁進했다. [13] 1780年(18歲) 아버지가 慶尙道 醴泉郡守로 赴任하자 醴泉 에 가서 살았다. [22] 1782年, 서울에 집을 마련하여 定着 한 後 科擧工夫에 專念하였고 1783年 에 世子 冊封 慶祝 增廣試 에 合格하고 會試로 生員 이 되었다. 22歲에는 進士가 되어 成均館 에 들어갔는데, 每달 치르는 試驗과 열흘마다 치르는 巡視(旬試)에 每番 높은 成績으로 뽑혀서 冊과 종이와 붓을 上으로 下賜받으며 正祖 의 寵愛를 받았다. [13]

官職生活 [ 編輯 ]

大科 及第 [ 編輯 ]

華城聖域儀軌 에 실린 擧重器

1789年 (正祖 13年), 27歲 되던해에 大科에 及第하여 官職에 進出하였다. 奎章閣 에서 正祖 의 寵愛를 받아 工夫하면서 漢江 에 배와 뗏木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1791年 辛亥迫害 때 攻西派의 謀陷으로 因해 瑞山 해미에 流配되었으나 11日 만에 풀려났다. [23] [24] 以後 司諫院 弘文館 의 要職을 歷任하였다. 1791年 에는 水原 華城 設計에 參與하여 擧重器 를 活用하였다. 30歲가 되던해인 1792年 에는 아버지 鄭在原이 죽는다.

成均館 [ 編輯 ]

1794年 에는 成均館 에서 講義하게 되고, 陰曆 10月에 競技도 暗行御史 로서 漣川, 삭녕 等을 巡察하였다. 1795年 乙錨泊해 事件이 벌어졌을 때 謀陷을 받아 그해 陰曆 7月에 금정察訪으로 左遷되었다. [23] 이어 兵曹參知 , 左部勝 , 谷山 府使 等을 지냈다. 1799年 에 承政院 同副承旨 가 되었다.

谷山府使 [ 編輯 ]

谷山 府使로 赴任하기 前에 이계심 이라는 農業勞動者의 租稅抵抗 運動인 이계심의 亂 이 일어났다. 法學者 曺國 서울대학교 敎授에 따르면, 丁若鏞은 民衆들의 生存權 을 威脅하는 條項 10餘 條를 가지고 直接 나아온 이계심을 處罰하지 않고 管理의 腐敗에 抗議하는 者들에게는 千金을 주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勇氣를 激勵하였다. [25] 卽, 丁若鏞은 民衆들을 國家의 權威와 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生存權을 要求하는 民衆들의 抗議를 귀담아듣는 愛民 官吏였다. 1799年 刑曹參議 가 되었는데 곧 彈劾을 받아 〈自明疏(自明疏)〉를 올리고 辭退하였다.

天主敎와 因緣 [ 編輯 ]

天主學 入門 [ 編輯 ]

1776年 이가환, 이승훈 과의 만남으로 星湖 李瀷 의 學問에 緣을 맺었다. 자연스럽게 男인 少壯派 學人들과 交流하게 되면서 星湖 李瀷 門下에서 學習하여 學問的 名聲이 藉藉한 권철신 過度 緣을 맺게 된다. 또한 이들이 天主學과 西洋學問을 많이 硏究하는 터라 丁若鏞도 자연스럽게 이를 接하게 되었다. 權哲身이 主導하여 1777年과 1779年에 京畿道 楊州에 있는 主語社와 천진암 을 오가며 여러날에 걸쳐 西學敎理 講習會를 열었는데, [26] 丁若鏞은 李蘗, 정약전, 권일신 , 이가환, 이기양, 이승훈 等과 함께 參與하기도 했다. [27] 이 時期에 學問的 好奇心에 西洋學問과 함께 天主學을 接했다. 1784年 4月에 큰 兄嫂의 祭祀에 參與했다가 歸京하면서 큰兄 鄭약현 의 妻男 李蘗 으로부터 天主敎 敎理에 對해 說明을 들었다. [13] 天地創造의 起源, 靈魂과 肉身, 生死의 理致에 關한 李蘗의 說明은 놀랍고도 奧妙하여 卽時 魅了되었다. [28] 이를 契機로 天主敎에 對한 冊을 여러卷 耽讀하며 心醉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天主敎와의 因緣은 곧 惡緣이 되어 後날 많은 苦楚를 겪게 된다. [29]

明禮坊 事件 [ 編輯 ]

1784年, 李蘗 에게서 洗禮를 받은 後 天主敎人이 되었다. [23] 北京에서 洗禮를 받은 後 歸國한 이승훈이 서울 鳴動에 있는 譯官 金範禹의 집에서 信仰모임인 '明禮坊共同體'를 運營하였는데 [30] 丁若鏞도 이 모임은 參與하였다. 그러던중 1785年 秒에 捕卒들에게 이 祕密모임이 發覺되어 刑曹에 끌려가는 明禮坊 事件 이 벌어진다. [31] [32] 多幸히 中人身分人 譯官 김범우 萬 投獄되고 丁若鏞을 비롯한 兩班出身들은 모두 釋放되었다. 그러나 김범우 는 流配地에서 死亡하였고 李蘗은 그의 父親과 葛藤끝에 식음전폐하다 죽었다. 이승훈 은 家門의 壓迫속에 背敎했으며 모임의 主軸이었던 兩班出身들이 모두 떠나자 '明禮坊共同體'는 瓦解되었다. 이때 丁若鏞도 一時的이나마 背敎했으나 後날 天主敎人들과 隱密하게 交際를 再開했다.

班會事件 [ 編輯 ]

1787年(正祖 11) 10月頃, 班村에 있는 김석태(金錫泰)의 집에서 丁若鏞은 이승훈, 강이원 等과 隱密히 天主敎書籍을 硏究, 討論하였다. [23] 그러한 事實을 안 이기경(李基慶)이 天主敎 排斥論者인 홍낙안(洪樂安)에게 알리자, 斥邪儒生들의 上疏가 잇따랐다. 그로 인하여 當事者들에게 直接的인 處罰은 내려지지 않았으나, 天主學 圖書의 導入과 流布가 問題되어 朝廷에서 그 弊害에 對해 論議가 있었다. [33] 이 當時 朝鮮에는 한글로 飜譯된 天主敎 書籍이 木版으로 刊行되어 低廉한 價格에 팔리고 있었는데, 忠淸道 地方의 山골마을에까지 天主敎 書籍이 普及되어 있었다. [33] 1788年에 8月에 이경명이 西學 嚴罰을 請하는 上疏를 올리자 正祖 는 天主敎를 邪敎(邪敎)로 規定하고 禁令을 내렸다. [34] [35] 아울러 全國에 天主敎 關聯 西學書籍을 索出, 燒却하는 措處가 내려졌다. [36] 班會事件이 發生한 直後 아버지 정재원은 子息들에게 天主學을 멀리하라고 命했다. [37] 丁若鏞은 정약전 과 함께 아버지 말씀을 따랐으나 정약종 은 天主學을 내려 놓치못했다.

辛亥迫害 [ 編輯 ]

1791年, 全羅道 鎭山에 윤지충 이 母親喪을 天主敎式으로 치른 後 祭祀를 廢艦으로 인해 社會的으로 큰 衝擊을 주는 珍山事件 이 發生했다. 丁若鏞의 집안도 큰 衝擊에 휩싸였다. 尹持忠은 丁若鏞의 外家쪽 親戚이었기 때문이다. [37] 祖上祭祀拒否는 儒學의 核心인 '孝'를 否定하는 일로써,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 되는 王에 對한 '衝'을 否定하는 行爲였다. 이는 儒敎理念으로 떠받쳐져 있는 朝鮮의 支配體制 自體를 否定하고 挑戰하는 것이었다. [38] 윤지충 과 그의 行爲에 同調한 外四寸 權尙然은 斬首당했다. [39] [40] 平澤縣監으로 있던 丁若鏞의 妹夫 이승훈 은 削奪官職 當했다. [41]

그동안 正祖는 天主敎 를 一時的인 宗敎 現象으로 理解하여 默認하는 溫乾한 政策을 펼쳤었다. [42] [43] 그러나 지난 1788年에 天主敎를 邪敎로 規定했을 뿐만 아니라 이番에도 極刑을 命한후 弘文館에 所藏되어 있던 西洋書籍을 燒却하여 不溫한 西洋思想의 電波를 遮斷하는 斷乎한 措置를 取했다. 그러나 庶人들은 尹持忠이 南人이었던 關係로 이 事件을 政爭化하며 事件을 增幅시켰으며 南人들 조차 攻西派와 信西派로 分裂하였다.

한便 天主敎가 邪惡한 宗敎로 烙印이 찍힌 이 事件을 契機로 丁若鏞은 天主敎와 關係를 完全히 淸算했다. 그러나 윤지충 과 親戚이었던 關係로 庶人들로부터 攻擊을 받았다. [44] 집안內에서도 若干의 葛藤이 發生했다. 둘째 兄 정약전度 이番 事件 發生直後 背敎를 했으나 셋째兄 丁若鍾은 半會社件과 신해박해로 全國이 소란스러웠는데도 不拘하고 天主敎에 對한 熱情에는 變함이 없었다. [45] 丁若鍾은 敎理에 따라 祭祀參與를 拒否하며 갈등하다가 妻子息을 데리고 漢江 건너 양근의 分院으로 移徙를 가버렸다. [45]

乙錨泊해 [ 編輯 ]

1795年 6月, 捕盜廳이 密入國後 隱密히 活動하던 中國人 宣敎師 周文謨 를 逮捕하는데 失敗하는 事件이 發生한다. 事件 關聯者들이 逮捕되여 宣敎師의 逃避處를 追窮받았으나 이들은 끝까지 緘口하였고 모진 拷問끝에 獄死하였다. [46] [47] [48] 조용히 지나가는듯하던 事件은 2個月 뒤에 大司憲 勸誘(權裕)가 세 사람이 일찍 죽는 바람에 宣敎師 周文謨 逮捕의 機會를 놓쳤는데, 이는 捕盜大將의 輕率함과 事件의 眞相을 덮으려한 疑惑이 있어 보이니 治罪해야 한다는 上疏를 올리자 調整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49] [50] 副司果 薄葬說이 이승훈 · 이가환 ·丁若鏞이 周文謨 逃走事件에 連類되었다고 疑惑을 提起하자 이들을 聲討하는 上疏가 연이어 올라왔다.

老論 僻派의 攻勢가 빗발치자 正祖는 한발 물러서게 되었는데, 結局 1795年 7月 25日에 李昇薰을 禮山으로 流配 보내고, 李家煥은 忠州牧師로, 丁若鏞은 忠淸南道 紅酒 금정察訪으로 左遷시켰다. [51] [52] 當時 忠淸地域에 天主敎의 敎勢가 크게 成長하고 있던터라 正祖는 이 地域으로 이들을 보내어 敎勢 擴散을 막음으로 天主敎에 心醉했었던 過誤를 贖罪하고 [53] 脂肪左遷을 통해 老論 攻擊의 예봉도 遮斷하려 내린 招致였다. 丁若鏞은 無慮 7品階나 떨어지며 體面이 몹시 구겨졌다. 그러나 丁若鏞이 금정에서 敎勢 沮止를 위해 펼친 努力은 實效를 거두었고 忠淸地域 天主敎界의 巨物인 이존창을 逮捕하는 공도 세웠다. [54]

辛酉迫害 [ 編輯 ]

正祖의 急死 [ 編輯 ]

刑曹參議를 除授받아 在職하던 中에 大司諫 신헌조가 兄 정약전을 不當하게 彈劾瑕疵 '自明疏'를 올리고 1799年 7月 26日에 辭職하였다. [55] 暫時 서울에 머물다가 1800年 秒에 落鄕하여 마재에서 지내던 中 6月 28日에 正祖의 死亡消息을 接하고 急하게 上京하였다. 局長을 치루는 동안에 毒殺說 等 많은 流言蜚語가 나돌며 어수선해지자 丁若鏞은 妻子를 마재으로 내려보내고 홀로 서울에 머물면서 政局을 살폈다. [56] 겨울에 主上의 卒哭(卒哭) [57] 이 지나자 落鄕하였고, 오직 初하루와 보름날 벼슬順序에 따라 次例로 列을 지어 哭하는 哭班(哭班) [58] 에만 參席하였다. [59] 그 나머지 時間은 故鄕집에서 經典을 읽으며 지냈다.

肅淸 作業 [ 編輯 ]

念慮했던대로 어린 順調 의 攝政을 맡은 정순왕후 가 1801年 陰曆 1月 10日에 天主敎 彈壓令을 내리며 南人에 對한 肅淸作業을 始作했다. [60] [61] 五家作統法을 適用하고 驛率로 다스리라는 嚴命이 全國에 떨어졌다. 정순왕후 는 過去에 思悼世子 除去에 앞장섰던 前歷이 있어 [62] [63] 正祖의 卽位를 反對했었기에 正祖 가 卽位한후 집안은 沒落했고 오라비 金龜柱 가 귀양地에서 死亡하며 [64] 正朝와는 원수지간이었다. 이런 정순왕후 의 目標는 正祖때 成長한 南人을 몰아내고 再起하지 못하도록 撲滅하는 것이었다. [65] 先王 正祖는 老論 僻派를 牽制하기 위해서 南人을 重用하였다. [66] 南人들이 西學에 關心을 두고 天主敎에 가까운 者가 많았으니 좋은 名分이 되었다.

老論 僻派의 最優先 目標는 正祖의 寵愛를 받던 이가환 , 권철신 , 정약용 3人의 除去에 있었다. [67] 이가환 과 權哲身은 南人을 이끌고 있었고 丁若鏞은 南人을 이끌 次世代 젊은 走者였기 때문이다. 特히 李家煥은 반드시 죽여야 했는데, 이는 李家煥의 家門이 祖上때부터 있었던 老論 僻派와의 惡緣 때문으로 [68] 李家煥은 老論僻派가 가장 忌避하는 人物이었다. [69] 李家煥은 1791年 珍山事件 直後 背敎하며 天主敎 彈壓에 앞장섰다는 事實을 老論 僻派도 알고 있었으나 이는 重要하지 않았다. 老論 僻派가 願했던 것은 李家煥이 天主敎를 버렸다는 證據가 아니라 그의 목숨이었다. [70] 李家煥과 權哲身은 모진 拷問 끝에 獄死하였다.

拘束과 釋放 [ 編輯 ]

丁若鏞은 가슴 졸이며 지내던중에 셋째兄 丁若鍾이 書籍과 書札等을 숨기려다 官衙에 摘發되어 모두 押守당했다는 消息을 1月 29日에 接하였다. 마음에 準備를 하고 있었는데, 2月 8日에 電擊的으로 逮捕되어 獄에 갇혔다. 國文章에서 但只 學問的 關心으로 天主敎를 接했을뿐이었기에 이미 1791年 珍山事件( 辛亥迫害) 以後 天主敎와 訣別했다고 自身을 辯護했다. [71] [72] [73] 그러나 그의 목숨을 노리는 老論 碧波 앞에서는 所用이 없었다. 2月 11日에 丁若鍾이 逮捕되었다는 消息이 들려왔고 그밖에도 이승훈 , 최창현 等 많은 이들이 投獄되었다.

丁若鏞은 1791年 珍山事件에 衝擊을 받고 天主敎를 버렸다. [65] 1797年 天主敎徒로 誤解 받자 《自明疏》를 써서 反駁했고 1799年에는 《策士方略》을 著述하여 背敎를 分明히 한적이 있다. [74] 또한 '同副承旨 辭職上疏'에서도 背敎했음을 分明히 밝힌적이 있었다. [75] [76] 이番 國文中에도 積極的으로 自身을 辯論하며 天主敎 指導者인 권철신, 황사영 等을 告發하였다. [77] 또한 天主敎信徒를 索出하려면, 믿음이 弱한 奴婢나 學童을 訊問할 것을 提案하기도 했으나 [77] 自身의 救命에 別般 도움이 되지 않자 諦念하였다.

朝鮮人 最初로 洗禮를 받은 後 天主敎 宣敎活動을 主導했던 이승훈 은 丁若鏞의 妹兄이고 [78] 天主敎 敎理 硏究會長人 정약종 은 셋째 兄이며 지난番 珍山事件 (1791年)을 일으킨 윤지충 은 外四寸 兄이었기 때문에 丁若鏞은 窮地에 몰려있었다. [79] 그러던중 잡혀온 여러 信者들의 國文이 거듭될수록 丁若鏞의 背敎가 明白한 事實임을 證明하는 證據들이 쏟아져 나왔다. [80] 분명한 物證들로 因해 丁若鏞과 丁若銓은 拘束된지 18日만에 流配 로 減刑된 後 釋放되었다.

귀양살이 [ 編輯 ]

丁若鏞은 18年間 慶尙道 長期 , 全羅道 强震 等地에서 流配生活을 했다. 流配 期間에 《 牧民心書 》, 《 經世遺表 》 等을 著述하였으며, 둘째 兄 정약전 도 물고기의 生態를 記錄한《 玆山魚譜》 라는 名著를 남겼다. 苦難을 겪음으로써 學者로서의 知性이 자라는 새로운 經驗을 한 것이다.

末年 [ 編輯 ]

1818年 (純祖 18) 陰曆 5月 에 귀양이 풀려 承旨(承旨)에 올랐으나 陰曆 8月 故鄕으로 돌아왔다. 婚姻 60周年 回婚日 아침인 1836年 마현리 自宅에서 別世하였다. 茶山이 남긴 마지막 詩는 〈 回婚視 〉였다. 丁若鏞이 죽기 前 子女들에게 申申當付로 이른 말은 " 漢陽 을 벗어나는 瞬間 機會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漢陽에서 버텨라"는 것이었다.

追贈 [ 編輯 ]

1910年 (隆熙 4) 7月 18日에 正憲大夫 奎章閣 提學으로 追贈 되고 시호 '門도(文度)'가 내려졌다. [81]


結婚 [ 編輯 ]

張인 洪畫報 [ 編輯 ]

1776年 2月 22日에 無關 洪畫報의 女息인 풍산 洪氏와 婚姻하였다. 丈人 紅花보는 몸이 마르고 키도 작은편이었으나 [82] 용맹스러운 무신(武臣)으로 豪宕한 性品에 兵法에 밝았다고 한다. [83] 1771年에 黃海道 長淵府使로 있으면서 兵營을 設置하여 淸나라 海賊船 退治에 功을 세운바 있다. 英祖 51年(1775)에는 承旨로 除授되었는데, 이는 武人이 承旨가 되는 것은 異例的인 일이었다. 正祖 4年(1780)에는 영남우도 兵馬節度使를 지낸바 있다. [83] 이런 丈人의 影響을 받은 丁若鏞은 〈我方備禦考〉等 兵書를 지을 수 있었다. [82]

子孫들 [ 編輯 ]

丁若鏞이 流配되었을 때에는 다시 過去試驗을 보거나 官職에 進出할 수 없는 '廢族(廢族)'을 自處하였으나, 孫子 時代에 이르러 直系 子孫들이 過去에 及第하거나 官職에 나아가 廢族 身世를 면할 수 있었다. 進士에 合格하고 丹陽郡守를 歷任한 孫子 정대림(丁大林), 參奉을 거처 三陟府使를 지낸 孫子 정대무(丁大懋), 文科 科擧에 及第하고 祕書院勝을 지낸 曾孫子 정문섭(丁文燮) 等이 代表的이다.

丁若鏞의 思想 [ 編輯 ]

丁若鏞의 哲學思想 [ 編輯 ]

  • 當時 朱子學 을 絶對視하여 이기설·禮論 等의 論爭에만 汨沒하던 學界의 現實을 慨歎하고 보다 참되고 價値있는 經世致用의 實學을 建設하기 위하여 寒帶 以後의 誤導된 留學을 拒否하고, 孔子 · 孟子 의 修辭學(洙泗學)으로 돌아가 遊學 의 本質을 파헤쳐 後人에 依하여 歪曲되고, 捏造된 理論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 李珥 · 유형원 · 利益 의 經世學적 態度를 이어받아 새 時代의 새 學問으로 集大成하였고, 當時 中國 에 流入되고 있던 西洋 의 宗敎·科學 等에 接觸하여 이에 肯定的인 態度를 보였다.
  • 새 學問의 目的을 考證·經世(經世)·牧民(牧民) 等에 두고 孔子로부터 再出發하여 全然 獨自的인 體系를 樹立하였다.
  • 千(天)을 유형천(有形天)과 주재천(主宰天)·逆리천(易理天)으로 區分하고, 주재천에의 信仰을 强調하였다.
  • 天命을 政治的으로는 人心으로, 倫理的으로는 正名(正命)으로 보아 百姓을 위한 君子의 使命을 强調하였다.
  • 走者 의 天理說(天理說)과 이기설(理氣說)을 否定하고 千名이 都心(道心)에 있다는 立場을 取하였다.
  • 人性論(人性論)에 있어 人間의 本性은 記號(嗜好)라는 性器號說(性嗜好說)을 主張하고, 사람에게는 道義知性(道義之性)과 禽獸知性(禽獸之性)의 陽性(兩性)이 있음을 밝혀 이들 兩者間의 葛藤을 認定하였다.
  • 인물성동이論辯 (人物性同異論辨)에 있어 한원진 의 人物性이(人物性異)를 支持하면서도 氣質(氣質)의 城(性)은 같되 本然의 姓은 다르다는 새로운 立場을 取하고, 朱子學의 氣質之性請託수박설(氣質之性淸濁粹駁設)을 否定하였다.
  • 走者 理氣論 (理氣論)을 全面 拒否하고, 孔子 · 孟子 의 양기설(養氣說)을 다시 主張하고 이를 牧民(牧民)思想과 連結지었다.
  • 驛吏(易理)의 成立過程을 合理的·科學的으로 解明하여 陰陽(陰陽) 64卦(卦) 等을 迷信的인 敎理(敎理)로 보는 데 反對하였다.
  • 成人(聖人)을 神格化하는 데 反對하고, 人間은 누구나 性(誠)을 다하면 成人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 孔子 의 忠恕(忠恕)·孝悌(孝悌) 以外에 字(慈)를 强調하여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對한 義務·使命으로 하였다.
  • 성정중化論(性情中和論)에 根據하여 禮樂重畫論(禮樂中和論)을 展開하고 原始 儒敎의 王都(王道)思想을 强調하였다.

要컨대 丁若鏞은 漢나라 以後 儒學의 病弊·墮落을 성리(性理)·訓詁(訓話)·文章(文章)· 過去 (科擧)·術數(術手) 等 다섯 가지로 指摘하고, 孔子에게로 돌아가 보다 合理的이고 健全하며 實際的인 新儒學(新儒學)을 建設하여 朝鮮 封建社會의 矛盾을 克服하려고 한 主體的·革命的 思想家였다고 할 수 있다.

社會主義 土地政策 [ 編輯 ]

丁田制를 主張한 背景 [ 編輯 ]

1755年 死刑당한 유수원 이 <迂書>에서 批判한 대로, 茶山 當時 農土의 100%를 士大夫가 獨占하여 平民들은 모두 小作農이었다. 이 狀態는 日帝强占期까지 繼續되었다. 1944年 日帝의 統計는 全國 農土의 64%가 小作된 것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36%는 士大夫가 머슴들을 부려 直接 耕作한 것이다. 이는 士大夫 階層이 日帝와 協力했다는 傍證인데, 歷史學者 이덕일 이 쓴 《우리歷史 수수께끼》(김영사)에 따르면, 日帝强占期의 農村의 實際 權力은 日帝가 아닌 鄕村社會의 兩班士大夫라고 보기도 한다. 茶山의 <典論>에 따르면 當時 推定 人口 800萬(死亡申告를 해도 山 사람으로 取扱해 稅金을 徵收하는(백골징포) 等으로 正確한 推定 不可)에 農土가 800萬結이었다. 一 家口當 1結이 되어야 굶어죽지 않는다. 茶山의 推定에 따르면 士大夫 1人이 平均 990名分의 農土를 차지하였고, 嶺南의 崔氏와 湖南의 王氏는 3990名이 所有할 農土를 獨占하고 있었다. 士大夫는 小作人에게 稅金까지 부담시켰다. 小作料는 平均 所出의 25%였으나 30%까지 올랐다. 黨爭과 洪景來의 亂 等으로 沒落한 兩班들과 亂에 加擔한 平民들이 奴婢階層으로 떨어져 憲宗 때는 奴婢의 人口比重이 35%에 達했다. 이들은 日帝 强占期에 奴婢制度가 없어져 奴隸의 身分에서는 벗어났지만, 兩班士大夫 階級인 地主들이 土地를 獨占하여 小作人들을 搾取 하였으므로 貧困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葛藤은 1923年 全羅南道 新安郡 암태면 小作農民들이 地主 文 氏와 親日 地主들과 結託한 日帝에 抵抗하여 小作爭議를 한 階級鬪爭에서 잘 드러난다. 歷史學硏究所에서 펴낸 《敎室밖의 局社旅行》(四季節)에 따르면 當時 小作人들이 農事를 지어 收穫하면, 80퍼센트를 小作料로 가져가는 搾取를 했고, 이에 小作農民들이 小作爭議를 하여 小作料를 낮춤으로써 處地를 바꾸는 重要한 일을 했다. 當時 地主와 結託한 日帝 警察에서 農民들을 拘束하여 木浦 地方法院으로 送致瑕疵, 農民들이 木浦 地方法院 앞에서 露宿籠城을 하였는데, 當時 동아일보에서는 "하늘을 이불삼아 싸운다."라고 報道했다. 이러한 階級葛藤은 南北韓에서 1946年(北韓), 1948年(南韓)에서 無償沒收-無償分配(北韓), 有償沒收-有償分配(南韓)方式으로 土地改革을 함으로써 農民들에게 土地가 돌아감으로써 地主 階級이 消滅함으로써 解消되었다.

井田制의 內容 [ 編輯 ]

重農主義 實學者 로서 土地의 無償 分配, 共同 勞動-共同 分配를 함으로써 土地 不平等을 改善하고자 한 社會主義 土地 政策인 閭田論 停戰론 을 想像하며 朝鮮 實學 을 集大成하였다. 停戰論은 土地를 우물 情(井)으로 나누면 모두 9區域의 땅이 나오는데, 이中 8區域은 8名의 農民들에게 나누어주어 農事를 짓도록 하고, 1區域은 共同 勞動을 하여 國家共同體의 福利를 위한 費用인 稅金 을 내도록 하자는 것이다. 閭田論은 與(利文 與,閭)를 農民들이 共同 勞動, 共同 分配하는 社會主義 土地政策이다. 그렇지만 農民들이 共同으로 勞動하고, 農業勞動者가 일한 만큼 나눠주는 土地不平等 解消政策이니, 現在 北韓과 같은 土地政策은 아니다. 丁若鏞 先生이 自身의 社會主義 思想을 實踐하기 위한 漸進的인 方法이 1819年 丁若鏞이 全羅道 康津郡에서 流配를 할 때에 想像한 停戰論이다. [84]

청렴하고 平等한 經濟 [ 編輯 ]

茶山의 思想을 硏究하는 박석무 茶山硏究所 理事長에 依하면, 茶山 先生은 平等하고 청렴한 經濟(公廉,公廉)으로써 不平等하고 腐敗한 經濟를 改革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茶山은 富者의 것을 덜어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손부익빈(損富益貧)으로써 所得不平等을 풀어가고자 했고, 社會經濟的 弱者들을 4代 宮人(홀아비, 寡婦, 孤兒, 獨居老人), 老弱者, 어린이, 初喪을 當한 사람, 疾病을 앓은 患憂, 災難被害者 等으로 分類해 社會와 國家에서 愛民(愛民)思想으로 이들을 配慮함으로써 朝鮮이 福祉國家 가 되기를 바랐다. [85]

科學技術 [ 編輯 ]

水原 華城 建築 當時 期中假說(起重架說)에 따른 滑車轆轤(滑車?? : 도르래 )를 만들고 그를 利用해 擧重器 를 考案하였다. 또한, 儒敎 經典에 對한 새로운 解釋을 통해 當代 朝鮮을 支配한 朱子學的 世界觀에 對한 根本的인 反省을 試圖하였다. 文集으로 與猶堂全書가 있다. 正祖 의 生母 혜경궁 洪氏 , 正祖 의 다른 最側近인 홍국영 과 親姻戚 關係이기도 하다.

評價 [ 編輯 ]

朝鮮 近代 工學의 基盤을 마련하는데 큰 寄與를 하였다. 또한, 丁若鏞은 유형원 · 星湖 李瀷 을 통해서 내려온 實學思想을 한 몸으로 集大成했다. 韓國 近世에서 南人學派의 政治的으로 非現實的인 態度에 비하여, 茶山은 남인 學派 中에서도 多分히 實際的인 經驗을 지녔다. 正祖 時期 中央 官吏로서의 經歷, 地方行政의 經驗, 漣川(連川) 方面의 暗行御史 行脚, 靑年 時節의 往還(往還)과 父親의 任所(任所) 見聞 等을 바탕으로 强震 다산초당에서 귀양살이를 하며 自身의 學問·思想을 體系化해 整理할 수 있었다. 다른 實學者들처럼 性理學·天文·地理·易象(曆象)·算學(算學)·衣服(醫卜)에 關聯된 著書는 勿論 《 經世遺表 》와 《 牧民心書 》, 《 欽欽新書 》 等은 모두 ‘茶山學’의 歸結이라고 할 수 있는 社會·經濟·思想의 總括 篇으로 碇泊名節(精博明切)하며 卓見(卓見)李 아님이 없다.

이러한 思想이 急速度로 崩壞해 가던 朝鮮社會에 適切히 適用되지는 못했지만, 茶山이야말로 朝鮮朝 學界에 展開된 進步的인 新學風을 한 몸으로 總括·整理하여 集大成한 實學派의 代表인 것이다. 일찍이 爲堂 정인보 는 "先生(茶山) 1人에 對한 硏究는 곧 朝鮮史의 硏究요, 朝鮮 近世思想의 硏究요, 朝鮮 心魂(心魂)의 名譽(明銳) 乃至 前朝鮮 盛衰存亡에 對한 硏究" 라고까지 評하여 그의 學問·著述에 對하여 깊은 關心을 나타내었다.

丁若鏞은 厖大한 著述을 남겼으나 大部分을 漢文으로 썼으며 [86] [87] 家族과 주고받은 便紙도 漢文을 使用했다. 國語敎育學 博士인 김슬옹은 '우리文化新聞'에 寄稿를 통해, 丁若鏞이 徹底히 한글 을 外面했음을 指摘하며, 思想의 偉大함이 表現과 疏通의 偉大함으로 이어지지 못한 點을 아쉬워했다. 또한 丁若鏞 亦是 性理學과 實學의 限界를 벗어나지 못한 兩班 士大夫였음을 批判하였다. [88]

著書 [ 編輯 ]

牧民心書
經世遺表
欽欽新書

3代 著書 [ 編輯 ]

丁若鏞은 漢字가 생긴이래 가장 많은 冊을 著述한 人物로 알려져 있다. [89] 그가 著述한 500 與圈의 [90] 冊中에 이른바 '1票 2서'라 불리는 牧民心書 , 欽欽新書 , 經世遺表 는 丁若鏞의 主要 著書로 꼽힌다.

  • 牧民心書 》 : 百姓을 다스리는 地方 牧民官(牧民官, 樹齡)의 치민(治民)에 關한 要領과 減髻(鑑戒)가 될 만한 마음가짐과 態度 等을 著述한 冊이다.
  • 欽欽新書 》 : 谷山府使로 在職할 때 實際 搜査했던 事件들을 바탕으로 敍述한 判決과 刑罰 및 治獄(治獄)에 對한 注意와 規範에 關한 冊으로 사람의 生命에 關한 일을 가벼이 處理하지 않도록 留意할 點을 적었다.
  • 經世遺表 》 : 管制·郡縣制와 專制(田制)·附逆·公示(貢市)·彰著(倉儲)·軍制·科擧制·해歲(海稅)·詳細(商稅)·마정(馬政)·旋法(船法) 等 國家 經營에 關한 一切의 制度 法規에 對하여 適切하고도 準則(準則)李 될 만한 것을 論定(論定)韓 冊이다.

기타 [ 編輯 ]

  • <自讚墓誌銘(自撰墓誌銘)> : 丁若鏞이 回甲을 맞던 해 自身이 直接 쓴 自身의 一代記이다.
  • 《孟子要義》
  • 《春秋高澄》
  • 《尙書古訓》
  • 《妹氏書評》
  • 主役事前
  • 《易學緖言》
  • 《大學共의》
  • 《대학강의》
  • 《中庸自箴》
  • 《중용강의》
  • 《雅言覺非?耳談續纂》
  • 《文獻備考肝오》
  • 《小學主管》
  • 《小學棋諺》
  • 《心境밀險》
  • 상례사전
  • 《喪禮外篇》
  • 《相議切要》
  • 《祭禮固定》
  • 《儀禮問答》
  • 《喪禮作의》
  • 《樂書孤存》
  • 《時頃講義》
  • 我邦疆域考 (我邦疆域考)》
  • 《帶同水景》
  • 《風水집의》
  • 麻科會通
  • 《삼미者집(三眉子集)》: 丁若鏞이 어릴 때 天然痘 를 앓았다가 나았는데, 그때 오른쪽 눈썹에 그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삼미(三眉)라 불렸다. 이 《삼미者집》은 丁若鏞이 10歲 以前에 지은 글을 모은 文集이다.
  • 兒學編 (兒學編)》

便紙모음 [ 編輯 ]

茶山 丁若鏞 先生이 1801年 부터 1818年 까지 長期와 强震 에서의 流配길에 올랐을 때에, 두 아들(學諭,學緣)에게 보낸 便紙 , 夫人이 結婚할 때에 입은 치마 에 써내려간 時(下皮첩), 딸에게 보낸 詩畫集을 創批 에서 出版했다.(《유배지에서 보낸 便紙》/박석무 便역/창비 [91] )

죽은 아들을 그리워한 글 [ 編輯 ]

茶山 先生이 1801年 辛酉迫害 로 因해 全羅南道 康津郡 으로 流配되었을 때에 아들인 聾啞가 어린 나이에 病으로 죽었다.

韓國방송통신대學校 에서 펴낸 《글과 생각》 敎科書 와 워크北에 실린 茶山의 記錄에 따르면, 茶山은 夫人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成年까지 자라지 못하고 죽은 子女들도 있었다. 이 冊에 口傳文學을 專攻한 박종성 敎授의 解說과 함께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는 글이 실려 있다. 聾啞는 紅疫 天然痘 로 죽었는데, 全羅南道 康津郡이 바다와 마주하는 地域이므로 아들에게 소라껍질을 보내어 疏通을 하던 茶山으로서는 아들의 臨終을 지키지도 못하고 떠나보낸 일이 매우 마음아픈 일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傳해들은 그날은 공교롭게도 聾啞의 生日이었다.

그래서 아들의 墓誌銘을 聾啞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 朋黨政治 를 벗어나 農事를 지으면서 素朴하게 살라고 聾啞라고 이름을 지어준 이야기, 소라(客觀的 相關物, 茶山과 아드님의 疏通을 뜻하는 象徵物이다.)를 보낸 이야기(聾啞는 怜悧하게도 아빠가 소라껍질을 보낸 뜻을 알고 있어서 무척 반가워하고, 소라껍질이 오지 않으면 서운하게 여겼다고 한다.)를 써서 直接 지었으며, 아들 學諭, 學緣에게 便紙를 보내어 以前에 죽은 아들들은 臨終이라도 지켰지만, 聾啞는 그렇지 못해 마음이 아프며, 엄마가 마음이 아프실 테니 돌볼 것을 付託했다.

기타 [ 編輯 ]

世界記念人物(UNESCO) [ 編輯 ]

丁若鏞은 '2012年 유네스코 世界記念人物'로 張자크 루소 헤르만 헤세 가 함께 選定됐다. 2012年이 茶山 丁若鏞 誕生 250周年되는 해를 記念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네스코는 2004年부터 유네스코가 追求하는 理念과 價値가 一致하는 歷史的 事件과 人物, 名詞의 記念日을 유네스코 聯關 記念行事로 選定해 重要性을 附與하고 있다. 2013年에는 東醫寶鑑 發刊 400周年이 유네스코 記念의 해로, 2021年은 金大建 神父 誕生 200周年을 記念하기 위해 유네스코에서 '2021年 유네스코 世界記念人物'로 選定한 바 있다. [3]

老論의 敵愾心 [ 編輯 ]

生前 500餘卷 以上의 著作들을 出刊하였다. 著作들의 大部分은 流配生活 19年間 執筆한 것이다.

20世紀 初盤까지도 老論 界 人士들은 南人에 屬하는 丁若鏞에 對한 憎惡와 敵愾心을 維持했고 그를 嫌惡하였다. 韓國 에 書店의 槪念이 導入된 1890年 代 以後, 자유롭게 冊을 사서 읽을 수 있었음에도 그의 著述들을 外面하였고, 윤치호 老論 界 人士들이 그의 冊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고 指摘하였다.

어젯밤 追悼式을 지낸 茶山 丁若鏞이야말로 李朝가 輩出한 아니 迫害한 偉大한 學者이다. ...(以下 中略)... 그는 16年 동안 流配 上활을 하면서 매우 廣範圍한 主題를 다룬 70餘 卷의 貴重한 原稿를 남겼다.
그런데 요즘에도 老論 契에 屬하는 人士들은 그가 남인 이었다는 理由만으로 그의 冊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

-尹致昊日記, 1935年 7月 17日子 [92]

홍국영 과의 關係 [ 編輯 ]

正祖 의 生母 혜경궁 洪氏 , 正祖 의 다른 最側近인 홍국영 과 姻戚關係이기도 하다. 丁若鏞의 丈人 洪畫報 홍국영 의 曾祖父뻘, 혜경궁 에게는 할아버지(祖父)뻘이 된다. 홍이상의 둘째 아들 紅纓 (1584年生)과 넷째 홍탁 (1597年生)은 13年 나이差였고, 홍영의 曾孫子 홍중기 (홍만용의 아들)와 홍탁의 孫子 홍만기가 同甲이었고, 홍탁의 孫子 홍만기는 40歲가 다된 늦은 나이에 아들 홍중후를 봤다. 홍중후는 1687年生으로 8寸인 홍중해( 홍국영 의 高祖父), 홍중기( 혜경궁 洪氏 의 曾祖父)와는 29世와 38歲의 나이 差異가 난다. 따라서 같은 親戚林에도 行列差가 많이 나게 되었다.

심환지와의 關係 [ 編輯 ]

老論 碧波 의 一員인 심환지 는 丁若鏞을 미워하면서도, 丁若鏞의 兄弟들 中 丁若鏞을 特別待遇했다. 丁若鏞을 推鞠하면서 이런 昏愚라도 믿을수 있어야지라고 중얼댄 것을 丁若鏞이 與猶堂全書에 실어놓았다. 심환지曰, 출출(어허, 이런), 昏愚라도 믿을수가 있어야지(沈煥之曰, "??, 婚友不可恃")라 했다.

丁若鏞의 둘째 아들 정학유 1800年 初, 심욱(沈澳)의 딸과 結婚했는데, 심욱의 10代祖 할아버지 심달원 (沈達源)李 심환지 의 10代祖 할아버지 심연원 (沈連源)의 親同生이었다. 심연원 의 孫子 심의겸 과 그 後孫들은 西人 이 되었지만, 退溪 李滉 의 門下生 高峯 기대승 의 門下에서 受學한 심달원 의 後孫들은 그대로 同人 , 남인 黨員이 되었다.

工夫方法 [ 編輯 ]

丁若鏞의 工夫方法은 草書法이다. 超敍法은 冊을 처음부터 끝까지 쓰는 方式인데 若干 다르게 하였다. 元來는 깜지같은데 丁若鏞은 重要한 部分만 골라서 記錄하였다고 한다.

家計 [ 編輯 ]

  • 祖父: 靜止해(丁志諧, 1712年 ~ 1756年), 字는 우경(虞卿)
  • 조某: 풍산 洪氏 (1712年 ~ 1753年), 홍길보(洪吉輔)의 딸
    • 아버지: 鄭在原(丁載遠, 1730年 ~ 1792年), 자는 氣魄(器伯), 生員, 眞珠牧師 歷任
    • 全貌 : 宜寧 南氏 (1729年 ~ 1752年), 南下德(南夏德)의 딸
      • 異服兄 : 鄭약현 (丁若鉉, 1751年 ~ 1821年) : 者는 태현(太玄), 李蘗 (李檗, 1754~1786)의 누이와 婚姻, 3男 6女를 두었으며 맏딸 정난주(丁蘭珠, 兒名 命連, 1773年 ~ 1848年)는 黃嗣永 白書 事件을 일으킨 황사영 (黃嗣永, 1775年 ~ 1801年)과 結婚하여 아들 황경한(黃景漢)을 둠. 眞사
    • 生母: 海南 尹氏 尹小온(尹小溫, 1728年 ~ 1770年) : 윤덕렬(尹德烈)의 딸, 尹斗緖 의 孫女, 윤선도 의 五代孫女
      • 큰兄 : 정약전 (丁若銓, 1758年 ~ 1816年) : 字는 천전(天全), 물고기 이야기인 玆山魚譜 를 썼다.
      • 작은兄 : 정약종 (丁若鍾, 1760年 ~ 1801年) : 者는 양중(養重), 辛酉迫害 때 殉敎者로 長男 정철상(丁哲祥, ?∼1801年)도 같이 殉敎. 後妻 流蘇社 (柳召史, 세실리아, 1761年 ~ 1839年), 後妻所生 정하상 (丁夏祥, 바오로, 1795年 ~ 1839年)과 정정혜 (丁情惠, 1796年 ~ 1839年) 亦是 己亥迫害로 殉敎.
      • 本人 : 정약용(丁若鏞)
      • 否認 : 풍산 洪氏 (1761年 ~ 1839年) : 경상우도 兵馬節度使를 지낸 洪畫報의 딸과 1776年 4月 10日 ( 陰曆 2月 22日 )에 婚姻하였다. [21] 10番 孕胎하여 첫 孕胎 때 流産하고 6男 3女를 낳았지만 4男 2女가 夭折하였는데 夭折한 子女들은 大部分은 天然痘로 死亡하였다.
        • 長女 : 鄭氏(1781年 7月 ~ 1781年 7月), 4日만에 死亡
        • 長男 : 정학연(丁學淵, 1783年 9月 12日 ~ 1859年) : 兒名은 武裝(武?) · 無我(武兒), 初名 厚賞(厚祥), 字는 치수(穉修)
          • 孫子 : 정대림(丁大林, 1807年 5月 28日 ~ 1895年) : 眞사, 丹陽郡守. 者는 死刑(士衡)
            • 曾孫子 : 정문섭(丁文燮, 1855年 1月 20日 ~ 1908年 8月 15日) : 文科 及第, 祕書院勝, 生父 정대무(丁大懋)
          • 孫女 : 鄭氏, 청풍 金氏 人物 김형묵(金亨默)에게 出家
        • 次男 : 정학유 (丁學游, 1786年 7月 29日 ~ 1855年 2月 1日) : 兒名은 文章(文?) · 文雅(文兒), 初名은 鶴上(學祥), 者는 치구(穉求)
        • 며느리 : 靑松 沈氏 , 深奧(沈澳)의 딸, 禮曹判書 深刻 (沈?)의 曾孫女
          • 孫子 : 정대무(丁大懋, 1824年 5月 18日 ~ ?) : 參奉, 三陟府使. 者는 自願(子園)
          • 孫子며느리 : 靑松 沈氏 , 審棟梁(沈東亮)의 딸, 禮曹判書 深刻 (沈?)의 玄孫女
          • 孫子 : 正大番(丁大樊, 1833年 ~ ?), 統理軍國事務衙門 兵務注射
          • 孫子 : 正代初(丁大楚, 1835年 ~ 1904年)
          • 孫女 : 풍천 林氏 , 임우상(任祐常)에게 出家
          • 孫女 : 海南 姜氏 , 강은주(姜恩周)에게 出家
        • 三南 : 天然痘로 死亡(1789年 12月 25日 ~ 1791年 4月 2日), 兒名은 球場(懼?) ·舊惡(懼岳)
        • 次女 : 天然痘로 死亡(1792年 2月 27日 ~ 1794年 1月 1日), 兒名은 孝順(孝順) · 好童(好童)
        • 三女 : 鄭氏 (丁氏 1793年 ~ ?), 親舊 윤서유(尹書有, 1764年 ~ 1821年)의 아들 윤창모(尹昌模, 1795年 ~ 1856年)와 1812年 婚姻
        • 사남 : 天然痘로 死亡(1796年 11月 5日 ~ 1798年 9月 4日), 兒名은 삼동(三童)
        • 오남 :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天然痘로 死亡(1798年 ~ 1798年)
        • 肉男 : 天然痘로 死亡(1799年 12月 2日 ~ 1802年 11月 30日), 兒名은 農場(農?) · 聾啞(農兒)
      • 첩 : 南堂네, 流配 生活을 함께 한 妾으로 한時 《남黨舍》의 著者로 推定
        • 庶女 : 洪임
      • 누이 : 이승훈 (李承薰)에게 出家
    • 庶母 : 金氏 (金氏, 1754年 ~ 1813年) : 生母 海南 尹氏 別世 後 정재원의 小室로 들어와 丁若鏞 兄弟를 養育함.
      • 異腹 동생 : 定約橫(丁若鐄, 1785年 ~ 1829年) : 者는 규黃(奎黃)
      • 異腹 누이 : 채홍근(蔡弘謹)에게 出家
      • 異腹 누이 : 이중식(李重植)에게 出家
    • 叔父 : 정재운(丁載運) : 할아버지의 아우인 靜止熱(丁志說)의 養子로 出系
    • 叔父 : 정재진(丁載進)

丁若鏞이 登場한 作品 [ 編輯 ]

드라마 [ 編輯 ]

뮤지컬 [ 編輯 ]

映畫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정약용 - 韓國學中央硏究院
  2. https://web.archive.org/
  3. [충청일보] ‘金大建 神父’, 2021年 유네스코 世界記念人物 選定 (최형순 記者 承認 2019.11.15)
  4. 신정일 <똑바로 살아라> 茶山草堂 2008年 p224
  5. 丁若鏞은 北韓에 合流하여 北韓에 緘口하였다 배신당하였다 [남양주시 홈페이지] 정약용遺跡地 (觀光名所 > 文化觀光 > 歷史&査察)
  6. [韓國民族文化 大百科事典] 정약용(1762~1836)
  7.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1>김영사 2004年 p35
  8.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1>김영사 2004年 p31.... 弘文館 의 管理 名簿
  9.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1>김영사 2004年 p46
  10.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1>김영사 2004年 p45
  11. 신정일 <똑바로 살아라> 茶山草堂 2008年 p229
  12.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김영사 2004年 p36
  13. [네이버 知識百科] 自讚墓誌銘-集中本 - 1-1 [自撰墓誌銘-集中本] (與猶堂全書 - 詩文集 (산문) 16卷, 박석무, 송재소, 임형택, 성백효)
  14. [네이버 知識百科] 弘文館 [弘文館] (두산百科)
  15.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1>김영사 2004年 p37
  16. [네이버 知識百科] 重兄님 정약전 墓誌銘 - 1-1 [先仲氏墓誌銘] (與猶堂全書 - 詩文集 (산문) 15卷, 박석무, 송재소, 임형택, 성백효)....李 뒤로는 가운이 衰하여 3臺가 모두 布衣로 一生을 마쳤는데, 정도태(丁道泰)와 正항신(丁恒愼)은 眞사(進士)이다.
  17.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1>김영사 2004年 p49
  18.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1>김영사 2004年 p49....直接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받아서 學問을 닦는것
  19.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1>김영사 2004年 p38
  20.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1>김영사 2004年 p40
  21. 신정일 <똑바로 살아라> 茶山草堂 2008年 p228
  22. 신정일 <똑바로 살아라> 茶山草堂 2008年 p229
  23. [Good News 카톨릭事件] 정약용 (1762~1836)
  24. [네이버 知識百科] 정약용 [丁若鏞] - 實學을 集大成하여 富國强兵의 꿈을 꾸다 (人物韓國史, 정성희, 장선환 )...丁若鏞은 官職에 나간 지 2年 만에 黨色(黨色)으로 批判된 것에 不滿을 품었다가 해미에 流配되었으나 正祖의 配慮로 열흘 만에 풀려났다.
  25. 《祖國 大韓民國에 告하다》/조국 지음/21세기북스
  26. [네이버 知識百科] 천진암 [天眞菴] (두산百科)....1779年(正祖 3) 學者 권철신(權哲身)은 京畿 驪州市 금사면(金沙面)에 있던 主語社(走魚寺)에서 學問을 硏究하고 講義하던 中, 정약용(丁若鏞) 等과 함께 强學會(講學會)라는 學問講義 모임을 가졌다. 그後 場所를 천진암으로 옮겨 10餘 日 동안 强學會를 繼續하였는데, 이때 參席한 代表的인 사람은 권철신·丁若鏞·耳甓·정약전(丁若銓)·정약종(丁若鍾)·이승훈(李承薰) 等이었다. 이 强學會에서 李蘗은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를, 丁若鍾은 《십계명가(十誡命歌)》를 지었으며, 三鐘祈禱(三鐘祈禱) 代身 주자(朱子)의 四勿箴(四勿箴) 같은 것을 經文(經文)으로 삼아 외우기도 하였다.
  27. 康俊晩 <韓國 近代史 散策1 > 人物과 思想史 2011.3.31 p27
  28. 이덕일 外2人 <韓國史의 天才들> 생각의 나무 2006年 p241
  29. [네이버 知識百科] 정약용 [丁若鏞] - 實學을 集大成하여 富國强兵의 꿈을 꾸다 (人物韓國史, 정성희, 장선환 )....丁若鏞은 23歲에 李蘗(李蘗)으로부터 西學(西學)에 關하여 듣고 關聯 書籍들을 耽讀했다고 傳한다. 하지만, 西學에 心醉했던 過去로 因해 順坦치 못한 人生을 살아야 했다. 丁若鏞은 20代 初盤에 西學에 魅惑되었지만, 以後 祭祀를 肺해야 한다는 主張과 부딪혀 끝내는 西學에 손을 끊었다고 告白했지만, 天主敎 關聯 事件이 일어날 때마다 誤解를 받았다. 天主敎 問題가 터지기 前, 그의 官僚生活은 坦坦大路였다.
  30. 康俊晩 <韓國 近代史 散策 1> 人物과 思想史 2011.3.31 p28~29
  31. 康俊晩 <韓國 近代史 散策 1> 人物과 思想史 2011.3.31 p28
  32. 限英國 <韓國事大界, 6 朝鮮後期> 三振使 1973年 p134
  33. 康俊晩 <韓國 近代史 散策 1> 人物과 思想史 2011.3.31 p29
  34. [正祖實錄] 正祖 12年 8月 2日
  35.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15> 한길사 2009.4.10 p210
  36. [네이버 知識百科] 班會事件 [泮會事件] (두산百科)
  37.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2>김영사 2004年 p44
  38. 박은봉 <한 卷으로 보는 韓國史> 嘉藍企劃 1993年 p210
  39. 正祖實錄 1805 33卷, 正祖 15年 11月 8日 己卯 6番째記事
  40. 正祖實錄 1805 33卷, 正祖 15年 11月 3日 甲戌 2番째記事 " 그 아버지의 使行(使行)에 따라가 數百 卷의 사서(邪書)를 널리 가져와 젊고 가르칠 만한 사람들을 그르친 者가 있으니, 바로 平澤 縣監 이승훈이 그 사람입니다. "
  41. [네이버 知識百科] 이승훈 [李承薰] (두산百科)
  42. [네이버 知識百科] 正祖 [正祖] (두산百科)
  43. 이덕일 <李德一의 女人列傳> 김영사 2003年 p356
  44. [네이버 知識百科] 珍山事件 [珍山事件] (두산百科)
  45.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2>김영사 2004年 p45
  46. [네이버 知識百科] 自讚墓誌銘-集中本 - 1-5 [自撰墓誌銘-集中本] (與猶堂全書 - 詩文集 (산문) 16卷, 박석무, 송재소, 임형택, 성백효).....여름 4月에 燒酒(蘇州) 사람 周文謨(周文謨) 6) 가 變服하여 몰래 우리나라에 들어와 북산(北山, 北岳山을 가리킴) 아래에 숨어 살면서 널리 西敎(西敎)를 傳播했다. 眞사 한영익(韓永益)이 그 事實을 알고 李錫(李晳, 李蘗의 동생)에게 알렸는데 藥用途 그 말을 들었다. 이석이 宰相 蔡濟恭에게 알리자 蔡濟恭이 主上께 隱密히 아뢰었다. 主上께서 捕盜大將 조규진(趙奎鎭)에게 奇襲하여 逮捕하도록 命하셨다. 周文謨가 달아나자 최인길(崔仁吉) 7) ·윤유일(尹有一) 8) 等 3名을 붙잡아 場(杖)을 쳐서 죽였다.
  47. [네이버 知識百科] 최인길 [崔仁吉] (두산百科)
  48. [Good News 카톨릭事前] 乙錨泊해 ...이들을 判官 앞에서 한결같이 勇敢하게 信仰을 告白하였고 朱 神父의 逃避處에 對한 甚한 拷問에도 一切 緘口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結局 그들은 酷毒한 刑罰을 받아, 맞은 매로 그 이튿날 숨을 거두어 殉敎하였다.
  49. [네이버 知識百科] 乙錨泊해 [乙卯迫害] (두산百科)
  50.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1>김영사 2004年 p216
  51. [네이버 知識百科] 乙錨泊해 [乙卯迫害] (韓國民族文化大百科, 韓國學中央硏究院)
  52. [네이버 知識百科] 自讚墓誌銘-集中本 - 1-6 [自撰墓誌銘-集中本] (與猶堂全書 - 詩文集 (산문) 16卷, 박석무, 송재소, 임형택, 성백효).....衿井驛은 紅酒(洪州)에 있는데, 驛(驛)의 衙前들이 大部分 西敎를 믿고 있었다. 主上의 意圖는, 藥用으로 하여금 그들을 알아듣도록 타일러서 西敎를 禁止하려는 것이었다. 藥用이 금정에 到着하여 그곳의 有力者들을 불러 모아 朝廷의 禁止令을 거듭 說明해 주며 祭祀를 지내도록 勸誘하였다. 兩班들이 이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는 效果가 있었다.
  53.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1>김영사 2004年 p223
  54.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1>김영사 2004年 p240
  55.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2>김영사 2004年 p22
  56.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2>김영사 2004年 p35
  57. [韓國콘텐츠振興院] 卒哭(卒哭)....장사를 마치고 三虞祭를 지낸 뒤 隨時로 하던 曲을 끝내기 위하여 行하는 祭禮를 말한다. 이로부터 隨時로 하던 哭을 멈추고 朝夕에만 한다. 三虞를 지내고 석 달이 지난 뒤 甲(甲)·病(丙)·무(戊)·警(庚)·임(壬)의 剛日을 擇하여 擧行한다.
  58. [다음 國語辭典] 哭班 (哭班)....國喪 때 宮中에 모여서 哭을 하던 벼슬아치의 班列을 이르던 말
  59.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2>김영사 2004年 p35
  60. 민경배 <韓國基督敎會社> 연세대학교 出版部 1995年 p64
  61. [네이버 知識百科] 自讚墓誌銘-集中本 - 1-9 [自撰墓誌銘-集中本] (與猶堂全書 - 詩文集 (산문) 16卷, 박석무, 송재소, 임형택, 성백효)...辛酉年(1801, 順調 1, 40歲) 봄에 태비人 定順王后가 諭示를 내려 西敎(西敎)를 믿는 사람은 코를 베어 滅種시키겠다고 警告하였다.
  62. [네이버 知識百科] 정순왕후 [貞純王后] (두산百科).....親庭이 老論의 中心家門이었음에 비해 思悼世子는 小論에 기울어져 老論에게 批判的이었고, 그 內外가 어머니뻘인 自己보다 10歲나 年上인 데서 빚어지는 葛藤 때문에 1762年 영조가 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데 적지 않은 役割을 했다고 傳해진다.
  63.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2>김영사 2004年 p33
  64. [네이버 知識百科] 金龜柱 [金龜柱] (人名事典, 2002. 1. 10., 人名事典編纂委員會).....世孫(正祖)李 卽位하자(1776) 그는 黑山島에 귀양갔고(1779) 後에 減刑되어 羅州로 왔다가(1784년) 거기서 死亡했다.
  65. 이덕일 外2人 <韓國史의 天才들> 생각의 나무 2006年 p153
  66. [네이버 知識百科] 珍山事件 [珍山事件] (두산百科)
  67. 이덕일 外2人 <韓國史의 天才들> 생각의 나무 2006年 p152
  68. 이덕일 外2人 <韓國史의 天才들> 생각의 나무 2006年 p136....李家煥의 曾祖父 이하진은 弘文館 提學을 지냈는데 1680年 庚申換局 때 執權한 西人들에 依해 流配를 가서 2年뒤에 抑鬱하게 죽었다. 李家煥의 從祖父(從祖父)中 한 사람인 이잠(1660~1706)은 肅宗때 老論을 攻擊하다 杖殺당했다.
  69. 이덕일 外2人 <韓國史의 天才들> 생각의 나무 2006年 p136
  70. 이덕일 外2人 <韓國史의 天才들> 생각의 나무 2006年 p158
  71. 初期 朝鮮敎會의 兩班 信者들은 敎皇廳 에서 百餘 年의 神學 論爭 끝에 祖上 祭祀를 敎理 를 理由로 禁止함으로써 儒敎傳統을 否定하자 大部分 天主敎 信仰을 버렸다.
  72. 康俊晩 <韓國 近代史 散策 1> 人物과 思想史 2011.3.31 p43
  73. [韓國民族文化 大百科事典] 정약용(丁若鏞)
  74. [Good news 카톨릭 事前] 정약용
  75.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2>김영사 2004年 p94
  76.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1>김영사 2004年 p248~256
  77.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2>김영사 2004年 p94
  78. [出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승훈(李承薰)]...長成하여 마재[馬峴]의 鄭在原(丁載遠)의 딸을 아내로 맞아 정약전(丁若銓)·약현(若鉉)·藥種(若鍾)·藥用(若鏞)과 妻男妹夫 사이가 되었다.
  79. 康俊晩 <韓國 近代史 散策 1> 人物과 思想史 2011.3.31 p43
  80.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1>김영사 2004年 p94~95
  81. 諡號를 내리는 調書에 이르기를, "옛 承旨(承旨) 丁若鏞은 文章과 經濟(經濟)가 一世에 卓越하여 마땅히 條가(朝家, 政府)의 表彰하는 일이 있어야 하기에 特別히 正三品 奎章閣 提學을 追贈하여 節惠(節惠, 시호)의 銀錢을 베푸노라.", 《沙巖先生年譜》
  82. [광주일보] 茶山의 張인 洪畫報의 勇氣 (김준혁 한신대 敎授) 2021.6.1
  83. 이덕일 <丁若鏞과 그의 兄弟들 1>김영사 2004年 p48
  84. 《敎室밖의 局社旅行》/歷史學 硏究所/四季節 164쪽.
  85. ““茶山 丁若鏞, 200年 前에 이미 國民抵抗權 支持”” . 2018年 2月 24日 . 2018年 2月 28日에 確認함 .  
  86. 서재복 <敎育哲學 및 敎育史> 學이黨 2006年 p153
  87. [네이버 知識百科] 主敎要旨 [主敎要旨] (韓國民族文化大百科, 韓國學中央硏究院).....國文木版本과 國文活字本이 現存하는데 몇 군데 自救의 修正이 다를 뿐 內容上 差異는 없다. 그리고 純한글로 庶民들이나 婦女子들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고, 마테오 리치(Ricci,M.)의 ≪天主實義≫처럼 問答式으로 構成되어 있다.
  88. 김슬옹 敎授 [우리文化新聞] 丁若鏞이 한글을 쓰지 않은 까닭은? (2016.10.30)
  89. [YTN 사이언스] 實學을 完成한 工學者, 정약용 (5分18秒)
  9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韓國民族文化 大百科事典 19> 웅진출판 1991年 p842 .....모두 500餘 卷에 이르는 厖大한 著述을 남겼고...(이하생략)
  91. “박석무 | 季刊 창작과비평” . 2018年 2月 26日에 確認함 .  
  92. 任用한, 《亂世에 길을 찾다》 (施工社, 2009) 318페이지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