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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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응모
出生 1883年 1月 3日 또는 9月 29日
朝鮮 平安北道 定州郡 同率面 小巖洞 또는 정부면 성내동
死亡 1950年頃으로 推定
不明
死因 不明
居住地 平安北道 定州郡 同率面-> 京城府 -> 京畿道 楊州郡 議政府邑
性別 男性
國籍 親日派
本館 溫陽
別稱 號: 啓礎(啓礎), 춘해(春海)
學歷 漢學 數學
職業 敎師, 辯護士, 商人, 言論人, 企業人, 社會運動家, 政治家
父母 아버지 방계준, 어머니 온양박씨
配偶者 承繼도, 이인숙, 배영옥, 노효용
子女 딸 방재숙, 아들 방재욱·방재선·房再孝·방재규, 방재윤 (量子)
親戚 兄 放鷹곤
三寸 房계묵
養孫子 방일영
養孫子 방우영
査頓 윤치호

방응모 (方應謨, 平安北道 井州 , 1883年 1月 3日 또는 9月 29日 ~ 1950年 8月 推定)는 日帝强占期 의 敎育者, 言論人, 法曹人, 企業人이자 日帝强占期 大韓民國 의 言論人이며 政治人으로 代表的인 反民族行爲者다. 號는 춘해 (春海)이고, 뒤에 啓礎 (啓礎)로 고쳤다.

1922年 東亞日報 井州 支局을 引受해 支局長을 지내다가 1924年 金鑛業에 뛰어들어 큰 富를 얻게 되었다. 1932年 6月 朝鮮日報 에 入社하였고 以後 營業局長이 되어 조선일보의 販賣網을 掌握하게 되고 經營權을 引受하면서 1933年 3月 조선일보 副社長이 되었다. 1933年 7月 부터 1950年 7月 까지 終身으로 朝鮮日報 의 社長을 歷任하였다. 1935年 創刊한 月刊雜誌 ' 趙匡 (朝光)'은 親日 論難이 있다. [1] [2] [3] [4] [5] [6] [7] 言論界에서 活動하면서도 事業家의 길을 함께 걸었고, 敎育 奬學 活動을 하였으며, 1945年 光復 直後 朝鮮在外轉載同胞구제회 拷問과 建國準備委員會 委員으로 活動했다. 安在烘 의 推薦을 받아 韓國獨立黨 中央常務委員과 獨立促成國民會 總務部長을 歷任하기도 하였다. [2] [8]

解放 政局에서 金九 의 財政的 後見人으로 이봉창 , 尹奉吉 , 백정기 等 三醫司 遺骨 奉還 事業과 信託統治 反對 運動 等에 參與하여 活動했다. 大韓民國 樹立 以後 社會民主主義 政治家인 趙素昻 社會黨 을 結成해 文敎政策委員長으로 選出되었다. 1950年 5月 30日 第2代 大韓民國 國會議員 總選擧에 出馬했으나 次點者로 落選했다. [9] [10]

1950年 6月 25日 韓國 戰爭 이 勃發했지만 避難을 가지 않고 서울 自宅에 머물다가 1950年 7月 6日 拉北되었다. 拉北 後 行跡은 "1950年 9月 28日 트럭에 실려 가다 美軍機의 攻襲을 받아 死亡했다"라는 證言만 있고 確實히 밝혀진 것은 없다. [4]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成長 [ 編輯 ]

방응모는 1883年 (高宗 20年) 1月 3日 또는 9月 29日 平安北道 定州郡 同率面(後날의 정주시 고암면) 小巖洞 바우머리 部落 또는 定州郡 정부면 성내동 425番地에서 방계준(方桂準) 과 溫陽 朴氏(溫陽朴氏)의 둘째 아들로 出生하였다. 本來는 溫陽 方氏 의 後孫 [11] 이었으나 平安北道 로 移住한 뒤 집안은 沒落했고 아버지 방계준은 가난한 선비로 農業으로 겨우 生計를 꾸려 나갔다. 그가 어려서 살던 定州郡 同率面 小巖洞 바우머리 部落은 온양 方氏의 集姓村이었고, 小庵同意 아랫마을인 足指골은 承氏 집안의 集姓村이었다. 방응모의 위로 親兄 방응곤이 있었는데, 後日 朝鮮日報 의 四柱가 되는 방일영 방우영 兄弟의 아버지 방재윤 의 生父, 卽 그들의 할아버지가 바로 방응모의 親兄 放鷹곤 이었다. 어려서 그는 마을의 독장산을 자주 올랐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 集中力이 남달리 뛰어난 反面 固執이 셌다는 評이 있다. [12] 그의 三寸 房계묵(方啓默) 은 그의 固執있는 氣質을 두고 저놈은 쇠작두 말고 나무 작두로 잘라 죽여야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한다. [13] 그러나 親戚들의 야멸찬 말들이 그에게 傷處를 주거나 影響을 미치지는 않았다 한다. [14] 또한 그의 幼年時節을 본 이들의 證言에 依하면 그가 태어날 當時 胎夢도 없었고, 神童이라는 말도 별다르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어려서 貧困한 家庭環境으로 방응모는 正規 學校에는 入學하지 못하고, 16歲 때까지 書堂에 드나들며 漢學을 익혔다. 書堂에서 漢學을 배우던 中 그가 어느程度 實力이 優秀하다고 認定되자, 스승인 승창率은 暫時 방응모에게 어린아이들을 돌보게 한 後 자리를 避하곤 했다 한다. [15] 그는 홀로 司書六卿 을 耽讀, 讀破하였다. 21歲 무렵 暫時 書堂 勳章을 지내기도 했다.

1896年 獨立協會 의 活動 消息을 接하게 되었다. [16] 兄 방응곤이 禮拜堂에 다니게 되자 [17] , 그를 통해 신문물의 存在를 認識하게 되었다. 그 뒤 偶然히 京城府 에 갔다가 신문물을 보고 衝擊을 받아 17歲에 獨學으로 新學問과 日本語, 中國語, 數學 等을 讀破하였다. 幼年時節 書堂의 性理學 스승이던 승창率의 親戚인 勝市營(承時榮)과 조氏(趙氏)의 딸 承繼度와 結婚했다. 첫 아들은 夭折했고, 둘째 아들 亦是 1902年 9月 콜레라 가 猖獗하자 死亡했다. 그는 結局 親兄 放鷹곤의 勸告로, 放鷹곤의 세 아들 中 둘째 아들인 방재윤을 養子로 入養했다. 그러나 방재윤은 後日 1940年 나무 심기 事業에 出張갔다가 入院한 病院에서 看護師가 注射를 잘못 놓아 死亡하였다.

結婚한 다음 해에도 그는 工夫를 한다며 冊만 사다 읽곤 했고 [18] , 否認 承繼도는 生計를 위해 몸소 나섰다. [18] 否認 承繼도는 親戚 가운데 콩을 싸게 넘겨주는 이들ㅇ이 있어 그 콩으로 豆腐를 만들거나 콩나물을 키워 장사를 하였다. [19] 그의 아내 承繼도는 男便에 對한 믿음이 絶對的이었고 탓을 하거나 家出하지 않았다. 以後 그는 書堂 勳章으로 招聘되었으나, 그가 가는 마을의 旣存 勳章, 漢學者들은 그를 敵對的으로 對했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一部 地名이 있었으나 自身의 스승의 자리를 侵害할 수 없다 하여 그는 自身의 洞里의 勳章일은 辭讓하였다. 그는 마을을 나가 新學問을 하는 親舊들과 어울렸다. [20]

出家와 復歸 [ 編輯 ]

1901年 結婚 後 3年 만에 그는 忽然히 집을 떠났다. [21] 이미 그와 承繼徒에게는 아들 하나가 태어나 있었고 또 하나의 아들이 妊娠 中이었다. [21] 當時 兩班 官僚들이나 識者, 地域 土豪들은 自己 아들들, 동생들과 딸을 日本 으로 留學을 보냈다. 어느程度 餘裕가 있는 집안도 아들 中 한 名을 日本으로 留學보냈으므로, 그도 留學을 願했지만 家庭 環境賞 學業을 할 수 없었다. 그는 脫出하고 싶은 心情으로 放浪하였다. 1901年 그는 아내에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忽忽單身 길을 떠났다. [22] 그가 아무 말없이 家出하자 夫人 承繼도는 豆腐를 팔고 저녁에 집에 와 보니 그가 없었다. 그가 冊을 求하러 暫時 먼 길을 나간 것으로 알고 밥床을 차려 놓고 기다렸으며 [23] , 그로부터 며칠 後 男便의 家出을 알게 되었다. [23]

2年을 기다렸지만 방응모는 돌아가지 않았고, 아내 承繼도는 돈을 마련하고 사람을 사서 男便의 行方을 찾았다. 當時 全國을 돌아다니는 방물장수들이 副業으로 請託을 잘 處理해주고 있어 承繼도는 自身이 시집올 때 받은 金가락지를 用役費로 내놓 [24] 았다. 3個月 만에 방물장수는 방응모가 咸鏡道 의 어느 마을에서 書堂 訓長을 하고 있다는 消息을 傳해주었다. 承繼도는 그 길로 사람을 사서 男便을 찾아가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24] 1903年 咸鏡道의 書堂 勳章 일을 그만두고 定州郡 으로 되돌아왔다.

啓蒙 運動 [ 編輯 ]

1903年 否認 承繼度의 勸告로 歸家한 방응모는 "百姓이 깨우쳐야 되는데 [25] "라는 말을 혼자 읊조렸다 한다. 島山 안창호 와 南江 이승훈 이 演士로 돌아다니며 愛國 啓蒙 講演과 文盲들의 敎育, 夜學 事業을 하였고, 여기에 感動받은 靑年들이 書堂과 夜學을 열고 文盲들과 女性들에게 한글 敎育을 하였다. 島山 안창호 의 講演과 南江 이승훈 의 講演을 찾아다니며 듣다가 感動받은 방응모 亦是 敎育, 啓蒙에 參與하였다.

1904年 9月 콜레라 가 傳染病으로 流行할 때 두 아들을 잃었다. 否認 承繼도는 病으로 京城儀典에서 腹部 手術을 받은 것이 잘못되어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다. 두 아들을 잃은 虛脫感을 이기려 더욱 더 自身의 信念을 具體化하는데 沒頭하였다. 방응모는 가끔 知人을 집에 데려와 술床을 놓고 이야기하면 對話 가운데 民立 大學을 세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오가곤 했다. [26] 곧이어 그는 井州邑內의 정주읍靑年會와 期成會에 加入하여 活動하였다.

그는 血氣만으로 나서서는 안된다고 보고 부지런히 所聞들을 接하고 나름대로 失政 分析도 하였다. 1907年 7月 14日 헤이그 에 密使로 派遣된 李儁 이 現地에서 死亡했다는 消息을 接하기도 했다. [27] 그는 靑年會의 活動에 沒頭하였으나, 農繁期에 작은 일손이라도 더 必要했던 洞里 老人들은 젊은 아이들이 일은 하지 않고 무슨 모임이다 하여 어울려 돌아다니는 꼴 [27] 을 否定的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모임 構成員들 亦是 "意識 自體가 아직 前近代的이었고, 事故의 分化를 겪지도 않은데다가, 이들의 組織 活動이 氣分 좋으면 나오고 氣分 나쁘면 빠져 버리는 것이 例事"라 靑年 모임들은 모두 失敗하고 말았다. 靑年團體의 失敗에 挫折하고 다시 歸鄕했으며, 이때 그는 춘해(春海)라는 雅號를 스스로 지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가 定着하기를 바라고 정주읍 事務所 所在地인 정주읍 성내동에 집을 얻어 주었다.

安昌浩의 啓蒙 講演에 感動받은 南江 이승훈 이 1907年(隆熙 1年) 8月 김덕용(金德鏞)을 招聘하여 定州郡 갈산면 익성동 烏山에서 新式 敎育을 하는 小學校 過程의 學校 姜名義숙을 세우고 算數, 受信, 歷史, 地理, 體操를 가르쳤고, 그해 12月에는 中學校 過程인 五山學校 를 세우고 學生 7名을 처음 받아들여 開校했다. 1908年에는 五山學校 에 學生들이 모여 3個 半으로 編成되었고, 定州郡 出身의 春園 이광수 가 五山中學校의 敎師로 招聘되어 蹴球, 野球, 테니스, 排球 等을 地域에 처음 紹介하였다. 방응모는 어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學校에 入學해 新學問을 接했다. [28] 그는 이승훈 과 意氣投合해 民立 大學을 세우는 運動을 推進했지만 朝鮮總督府 平安北道 靑 學務局에서 承認을 拒否하여, 大學 設立에 失敗했다.

1911年 에는 新式 學校에서 敎師로 一時的으로 敎鞭을 잡았으나 그만두었다. 11年 정주읍內 辯護士 事務所에 就職, 1914年 까지 代書業에 從事했다. 1915年 自身의 집을 利用해 旅館業을 始作했다. 1915年 방응모는 정주읍內에 農村振興會를 組織하고 周邊 地域에 支部를 設立했으며, 邑內에서는 維持 靑年들과 內外 遊學하는 學生들을 糾合해 靑年指導와 農村 振興에 參與했다. [29] 定住農村振興會에 參與한 전우현(全禹鉉)은 中央高等普通學校 1回 卒業生으로 보성전문학교 를 中退하고 故鄕에 내려와 있었다. 방응모와 같이 農村振興會 活動을 하던 그는 五山學校 의 校監으로 招聘되었고, 전우현을 통해 1915年 조만식 을 紹介받았다.

言論, 企業 活動 [ 編輯 ]

啓蒙 活動과 言論 活動 [ 編輯 ]

1915年 부터 1924年 방응모는 地域 知識人들, 留學派 靑年, 啓蒙 靑年들이 모여 民立大學 設立運動을 하는데 參與했고, 民立大學期成會 平安北道支部에서 活動하면서 民立大學期成會 中央會 中央委員 조만식 等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言辯과 容貌가 되었던 그의 旅館에도 손님들이 몰렸고, 그가 "2百원도 좋고 5百원도 좋다며 보태달라 [30] "고 하면 寄附金을 내는 이들이 있었다. 代身 하룻밤을 依託하려고 그의 旅館을 찾은 이들에게 無料 宿食을 提供하기도 했다. [30] 1919年 井州 에서 3.1 萬歲 運動 이 벌어지자, 그도 萬歲 運動에 參與하였다. 그러나 朝鮮總督府 刑事들의 눈을 避해 방응모는 萬歲運動을 하다 재빨리 몸을 避해 禍를 면했다. [31]

1920年 4月 民間 新聞紙가 開設되었다는 所聞을 듣고, 정주읍內 定住普通學校 앞에 開設된 東亞日報 社 정주분國을 자주 찾아 東亞日報 를 購讀했다. 방응모에 依하면 當時 정주읍의 人口는 7~8千名이었고, 東亞日報社 定州郡分局에서 刊行하는 東亞日報 新聞은 總 100餘 部라 했다. 그는 親舊 전우현과 그의 紹介로 만난 조만식 을 통해 조만식 의 日本 留學 親舊인 인촌 金性洙 를 紹介받았다.

1922年 6月 東亞日報 정주분國을 引受하여 分局長에 就任 했다. 6月 9日에는 定州郡 地域 體育行事로 테니스 大會를 開催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정주분國을 經營하는 同時에 그는 農村 啓蒙運動 等에 積極 投身하여 人望을 쌓았다. 처음 몇番은 親舊 전우현의 資金을 빌려 不足分을 메우기도 했다 [32] 한다. 1922年 6月 19日 [33] 東亞日報 本社를 說得하여 井州分局을 東亞日報社 定住地國으로 昇格시켰다. 東亞日報社 支部長 在職 詩 그는 전우현과 함께 意氣投合하여 民立 大學 設立 資金과 農村振興會 會員의 旅費와 會費를 捻出하기 위한 目的 및 當時 敎師도 없이 難關에 處했던 五山學校 의 再個校를 위한 "五山學校의 復興 運動을 目標로 한 財團法人 促成 基金 마련" 等을 計劃했다. 總督府의 認許可 拒否로 失敗한 大學 設立 資金은 고스란히 五山學校 의 復活과 復校 資金으로 投入되었다. 1920年 1月 에 京城刑務所에서 假釋放된 조만식 이승훈 을 만났고, 다시 曺晩植이 烏山學校를 맡으면서 學校는 다시 正常 運營되었다.

1923年 東亞日報 定州郡 分局이 支局으로 昇格되자 井州 支局長으로 東亞日報 定住支局을 經營하였고, 같은 해 7月 女性들의 社會參與와 平等權 伸張을 위한 女子敎育會의 結成에 參與하였다. 以後 大規模 水害가 나자, 定州郡 水害救濟會를 結成하여 奉仕活動에 加擔하기도 했다. 1923年 4月 조만식 · 송진우 · 安在烘 · 金性洙 等의 主導로 民間 資本으로 大學校 設立을 推進하기 위한 組織인 朝鮮民立大學期成會가 結成되자, 방응모는 民立大學 期成會에 參與하여 民立大學期成會 定州郡準備會 執行委員으로 活動하였으며, 5月 에 朝鮮民立大學期成會 定住地方支部가 設立되자 期成會 定住地部 常務委員을 맡았다.

정주분國이 支局으로 昇格되면서 그는 支局長으로 다시 隣近地域에 分局을 設置하고 分局長의 人事에도 關與했다. 1926年 東亞日報 社 定住地富의 管轄知人 龜城君 에 東亞日報社 龜城君分局이 新設, 設置되고 素月 김정식 李 代表子路 任命되었다. 한便 東亞日報 本社에서는 밀린 代金을 繼續 督促했고, 狀況이 如意치 않아 代金納付가 어려워져 東亞日報 本社는 그의 契約金에서 代金을 깎았다.

繼續되는 未收金의 累積으로 東亞日報 社 本社에서 定住支局으로 本社 職員들을 調査次 派遣하기도 했다. [34] 1925年 12月 23日 에는 支局 運營의 어렵다는 事情을 新聞의 事故를 통해 밝히며 購讀者들의 외상代金을 請求하는 內容을 東亞日報 地方版에 싣기도 했다. [35] 그는 동아일보 本社를 찾아가 通事情을 했는데, 이때 만난 群山 出身의 東亞日報 營業局長 김철중(金鐵中)과 사귀게 되었다. 방응모의 人品을 알아본 김철중은 後日 방응모가 鑛山을 運營할 때 日本 留學을 보냈던 自身의 아들 김선태(金善泰)를 방응모의 鑛山에서 電氣 技術者로 일하도록 周旋하기도 했다. 1927年 5月 26日 東亞日報社 定州郡支部長에서 물러나 東亞日報社 顧問으로 推戴되었다.

鑛業 經營과 조선일보 入社 [ 編輯 ]

1924年 五山學校 校監으로 있던 전우현이 방응모와도 顔面이 있던 金鑛 採掘業者 두 名을 데리고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自身들이 봐 둔 山이 있다고 방응모에게 紹介했다. 그눈 宣川郡 의 地域 有志이자 최창학 의 親舊이며, 그가 동아일보 支局長으로 알게 된 이봉찬을 찾아갔다. 漢學者로 알고 있던 그가 金鑛 投資를 提議하자 "漢文이라면 빼지 않고 알려고 드는 漢學 訓導가 어떻게 金鑛을 [36] " 하느냐 하였지만, 이봉찬은 그에게 金鑛, 鑛山에 對한 知識을 알려주었다. 이봉찬은 그에게 鑛山 知識을 알려주며 최창학 의 所有地 中 廢鑛을 빌리는 法을 알려주었다. 방응모의 됨됨이에 感服한 듯, 그의 수많은 質問에 적잖은 忠告를 自任해주었다. [37] 이봉찬은 최창학 에게 방응모를 紹介하는 便紙를 數次에 걸쳐 보내주었다. [37] 이봉찬은 방응모의 親舊들이 봐 둔 坑道를 賃貸받도록 도와주었다. 이봉찬은 방응모의 漢學 實力과 사람됨을 알아보고 있어, 資金을 쾌히 빌려주었다. [37]

以後 鑛産業에 뛰어들어 1924年 여름 鴨綠江 邊의 최창학 所有 廢金鑛人 平安北道 朔州郡 외남면 교동 다릿골意義 朔州 校洞鑛業所 를 찾아가 10미터 程度 땅을 파고 金脈을 發見했다. 바로 朔州 校洞鑛業所를 引受, 經營을 擴大하였다. 이때 만난 同業者의 딸이자 親舊 전우현의 조카딸인 이인숙(李仁淑) 을 만났다. 本妻 承繼道가 두 아들을 잃고 腹部 手術이 잘못되어 아이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방응모에게도 수많은 仲媒가 들어왔다. 子息들을 病으로 잃은 것이 自身의 不察이라고 본 承繼도는 그에게 작은 夫人이라도 들이자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 [38]

이인숙과의 사이에서 1925年 아들 방재욱(方在旭)을 얻었다. 그러나 셋째 아들 방재욱 亦是 1926年 4月에 어린 나이로 夭折했다. 1927年 東亞日報 定住地國 支局長에서 물러나 顧問을 맡았다.

1926年 방응모에게 鑛山 事業을 提案했던 두 親舊가 손을 털고 나갔고, 그의 家族은 돈이 없어 쌀 代身 좁쌀로 좁쌀粥을 먹으며 延命해야 했다. 방응모는 定州郡 에 사는 비슷한 또래의 먼 親戚 방상진을 찾아가 도움을 要請했고, 방상진과 일꾼 대여섯 名, 그리고 後妻 이인숙의 親庭 쪽에서 얻어온 土地文書를 얻어 資金을 마련, 朔州 다릿골 鑛山으로 가서 다시 金鑛을 採掘했다. 金脈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出沒하는 馬賊떼에게 소와 器具를 掠奪當했다. 同時에 빚쟁이들의 督促에 시달렸으나 1926年 7月 地下 300m 地點에서 金脈을 確保했다. 以後 年間 300kg의 을 生産, 그는 屈指의 鑛山業者로 成長해 金脈을 찾아 벼락富者가 되었다. 그는 방상진을 校洞金鑛 總監督에 맡겼다. 이때 그는 최창학 에게 賃貸料에 利子를 쳐서 보내주었다.

그때까지 첫 夫人 承繼度가 豆腐를 팔아 家族의 生計를 維持하고 있었다. 그는 美國産 포드 T型自動車 를 타고 錦衣還鄕했다. 1928年 방응모는 自身의 雅號인 춘해를 딴 춘해 奬學會를 만들고 奬學生들의 모임인 이심회를 만든다.< ref>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148페이지</ref> 그 해에 방응모는 校洞地域에 派出所 支所를 誘致하였고, 마적 段에 시달리던 住民들은 그의 頌德碑를 세우기도 했다. 1928年에 그는 議政府 직동, 흥선大院君 의 別莊이 있던 곳 바로 뒤에 位置한 建物을 買入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한용운 , 홍명희 를 자주 招待했다.

1932年 방응모는 校洞光山乙 135萬원이란 巨額에 日本 中外鑛業株式會社에 賣却 했다. 그 뒤 1932年 6月 부터 朝鮮日報 營業局長으로 活動하다 1933年 3月 朝鮮日報 의 經營權을 引受 하여 副社長에 就任하였다.

그는 校洞鑛業所를 運營하며 모은 財力을 바탕으로 副社長 在職 中 朝鮮日報 의 大株主가 되었으며, 1933年 7月 8代 使嗾 조만식 으로부터 朝鮮日報 를 引受하여 第9代 朝鮮日報 使嗾로 就任, 活動했다. [39] [40] 방응모 就任 以後의 初代 副社長은 이광수 , 主筆은 서춘 이었다.

言論, 事業 活動 [ 編輯 ]

社會事業과 朝鮮日報 引受 計劃 [ 編輯 ]

金鑛 事業에 成功한 그는 營林, 造林 事業에도 投資하였다. 방응모는 配偶者 承繼度에게서 더 以上 아들을 얻지 못하자 첩 이인숙을 통해 아들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인숙은 아들을 낳았으나 이 아들은 곧 死亡하였다. 아들을 잃은 이인숙은 承繼度의 도움을 받다가, 그해 6月 방응모가 있는 鑛山으로 가 生活하였다 . 承繼도와 이인숙을 통해 子女를 얻지못하자 42歲가 되던 해인 1924年 親兄인 放鷹곤 의 둘째 아들 방재윤 을 養子로 入養시켰다.

親조카이자 養子가 된 방재윤은 結婚하였고 以後 孫子 방우영 , 房筆英, 방일영 과 孫女 방순영, 방숙영, 방선영 等을 낳았다. 방응모는 孫子 우영과 일영의 이름을 直接 지어주었다 한다. 그는 방재윤의 長男에게 으뜸으로 映畫를 누리라는 뜻의 일영이라 이름을 지어주었고, 둘째 아들에게는 筆英, 셋째 아들에게는 兄과 같이 映畫로宇라는 뜻으로 우영이라 지었다. 방재윤 은 小學校 敎師 職을 辭退하고 朝鮮日報 에 入社하였고, 방응모가 經營하던 鑛産業 의 一部도 물려받았다. 그러나 방재윤은 1940年 鑛山 現場에 나갔다가 病에 傳染되어 病院에 入院했다가, 看護師 注射 를 잘못 놓아 방응모보다 먼저 死亡하였다. 방응모는 自身이 鑛山 等을 갈 때는 唯獨 어린 孫子 방일영 을 恒常 帶同했다고 한다.

방응모와 그의 奬學金을 받던 學生들. 가운데 앉은 이가 방응모이고, 서있는 이들 中 왼쪽에서 두 番째는 방응모의 兩者 방재윤.

1930年 배영옥과 結婚하여 딸 방재숙을 얻었다. 1932年 鑛産業을 整理하였고 言論事業을 비롯하여 育英事業과 造林 및 干拓事業 等을 벌였다. [41] 또한 孤兒院과 社會福祉團體에 後援金을 支援하면서 人望을 얻기도 했다. 朔州 地域에서는 그의 頌德碑가 세워지기도 했다.

1932年 그는 水原郡 팔탄면 노하리 一帶의 갯벌에 日本人이 數次例 뚝을 쌓다가 失敗했다는 情報를 얻고 임삼진을 통해 朝鮮總督府에 許可를 要請하였다. [42] 干拓 事業은 以後 1935年 부터 始作되었지만 1932年부터 隱密히 着手되어 왔다. [42]

1932年 6月 15日 朝鮮日報 社에 入社, 朝鮮日報 營業局長이 되었다. 그해 11月 23日 조만식 李 社長에 재선임될 때, 그는 朝鮮日報 副社長에 推戴되었다. [43] 조선일보는 用地 購入이 어려워 빚을 얻어 쓰면서 버텨오던 中 證券去來所 에 다니던 東來 사람 임경래에게 빚을 졌고, 임경래는 이를 根據로 조선일보에 版權을 主張했다. 조선일보 記者들과 임경래의 葛藤은 繼續되어 1932年 6月 1日 조선일보 記者들은 會社에 온 임경래를 强制로 끌어냈다.

1933年 무렵 방응모가 朝鮮日報 引受에 나서기 前부터 그는 한용운 을 위한 일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고 支出하였다고 한다. 只今의 성북동 222番地 언덕에 萬海를 위해 기와집 한 채를 지어주었는데 심우장(尋牛莊)李 그것이다 . 또한 萬海가 日帝의 配給을 拒否해 生活이 어렵게 되자 萬海에게 生活費를 支給했던 방응모는 萬海가 病席에 누운 1944年에는 治療費를 志願해주기도 했다. [44] 그 外에도 방응모는 萬海 韓龍雲·벽초 洪命憙 等과 함께 새해가 되면 백천溫泉에도 같이 다녀올 程度로 두터운 親分을 맺었다. [45] 1935年 7月에는 京城 태평로1街에 새 社屋을 竣工하는 한便, 出版部를 新設해 〈趙匡〉(1935. 10)·〈女性〉(1936. 6)·〈少年〉(1937. 4) 等의 月刊 雜誌를 次例로 創刊했으며 [41] 運營하였다. 한便 1932年 교동 鑛業所를 整理하여 賣却하였다.

방응모의 鑛山 賣却을 日本 政府 側에 알리고 다리를 놓은 것은 高일청(高一淸)이었다. [46]

1932年 上下의 훙커우 公園 事件 으로 逮捕된 안창호 의 赦免 歎願과 寶石을 위해 努力하였다. 安昌浩가 尹奉吉 을 使嗾했다는 證據가 없으며 그가 테러行爲를 指示했다는 證據 資料나 文件이 없다는 것이 방응모의 안창호 歎願 理由였다. 그러나 總督府 警務局長은 그의 안창호 釋放 提案을 鄭重히 拒絶한다. 1936年 東方文化學院(뒤에 崇文中學校·高等學校 財團)을 設立하고 理事長에 就任 하였다. 1939年 9月 에는 〈조선일보〉의 朝刊 1回, 夕刊 2回의 1日 3回 發行을 始作하기도 했다. [41]

朝鮮日報 引受 過程 [ 編輯 ]

안창호,방응모 共著 十二名家 書帖 (1936年)

그가 조선일보를 引受하게 된 計器로는 曺晩植 等의 勸告로 조선일보를 引受하게 됐다 한다. 주요한 等은 그에게 日本에게 넘어가느니 그가 조선일보를 引受하는 것이 옳다고 繼續 說得했다. 조병옥 주요한 等은 조만식에게 眞摯하게 朝鮮日報 運營 問題를 熟議하였고, 그 渦中에 그의 이름이 나왔다. 1932年 무렵 조선일보는 私債業者 임경래에게 版權이 넘어가 있었다. 조만식 側은 版權을 賃貸하기 위한 費用을 支拂했다. [47]

1932年 8月 부터는 그가 조선일보를 引受한다는 所聞이 돌았다. 1932年 12月 조만식 은 방응모에게 6個月間의 經驗을 바탕으로 朝鮮日報 를 引受하라고 積極 說得하였다. [48] 12月 末 방응모는 朝鮮日報 引受 意思를 正式 表明, 朝鮮總督府 에서는 引受 資金의 確認을 要求했다. 방응모는 이때 資金을 提示 못했다. [49] 1932年 6月 15日 임경래는 조선일보사에서 쫓겨나자 京城府 명치정 2정목 82番地에 同順泰 빌딩에서 論說委員 신일용 等을 迎入해 4面짜리 夕刊 조선일보를 發行했고, 조선일보사 社員들은 安在烘 名義로 조선일보를 繼續 發行했다. 이로서 市中에는 2種의 朝鮮日報가 刊行되었다. 葛藤은 그해 11月 23日에 仲裁되어 社長에 조만식, 副社長에 임경래, 營業部長 兼 專務에는 조병옥, 編輯局長에는 朱耀翰을 임명하여 두個의 朝鮮日報 를 統合시켰다.

1933年 初 그는 金鑛과 鑛山을 完全히 賣却하고, 朝鮮日報 를 買入하기 위해 4千원이 入金된 通帳을 朝鮮總督府에 提示하였다. 總督府는 版權 問題나 資金 問題는 複雜하다며 旣存의 인가 拒否를 撤回, 從來의 認可를 取消하고 그에게 認可를 다시 내 주었다. 1933年 1月 16日 그는 正式으로 朝鮮日報 를 引受했다. 또한 그는 조선일보가 用紙, 印刷機構 不足으로 진 빚을 모두 淸算하였다.

京城府 에서 生活하면서 방응모는 스스로 사투리를 標準語로 바꾸는 練習을 꾸준히 했다. ㅈ을 ㄷ으로 發音하는 平安道 特有의 發音은 完全히 고치지를 못했지만 語法 만큼은 正確한 敬語體를 驅使하게 되었다. [50] 또한 朝鮮日報 買入 過程에서 金鑛 中繼 等을 成事시킨 高逸淸에게 收益의 10%를 주겠다고 約束한 것보다 15萬 원을 利子로 쳐서 支給하였다. 同時에 교동 鑛山 等 鑛山 退職者들에게도 慰勞金을 보내주었다. 自身이 任命한 鑛山 總監督 방상진에게는 5萬원을, 監督 방흥석에게는 3萬 원, 財務擔當 이왕백에게 3萬 원, 鑛山 管理擔當 노의근에게 3萬 원을 주었고, 電氣技術者로 勤務한 김선태 等에게는 6萬원을 주었다. [51]

火星 노하리 干拓 事業 [ 編輯 ]

1932年 京城 에서 朝鮮日報 引受를 準備할 무렵 或은 光山乙 處分할 計劃을 세우면서 방응모는 全國에 干拓地를 物色하고 있었다. 그가 傳해들은 干拓 候補地 中에는 水原 노하리(現 華城市 노하리)도 있었다. 水原郡 팔탄면 노하리 一帶의 갯벌은 日本人 技術者들이 세番을 挑戰해서 失敗한 곳이었다. [52] 방응모는 1935年 朝鮮總督府 로부터 山尺地 埋立 許可를 承認받았다. [53]

방응모에게는 그때 교동 金鑛을 판 資金 135萬원 中 35萬원을 鑛山 處理 資金으로 支出했고, 나머지 1百萬원 가운데 50萬원은 朝鮮日報 社에 投資된 돈이었다. 조선일보社로 投資된 資金 50萬원을 除外한 나머지 50萬원에서 팔탄면 노하리의 干拓 事業 投資金과 造林 事業 投資金이 나온다. [54] 1935年 늦은 봄부터 서포리와 노하리 쪽의 山을 깎고 흙을 실어 날라 둑을 메우는 일을 推進했다. [55]

1935年 방응모는 京畿道 水原郡 팔탄면 노하리의 干潟地 325町步(9萬 5千 坪)의 땅을 造成하는데, 1km의 堤防을 싸호고 바다를 막아서 생겼다. [56] 1935年 朝鮮總督府 의 埋立 許可가 나오자 방응모의 故鄕 定州郡 에서 17 家口가 移住해 왔다. 1937年 堤防 工事가 完工된 以後 貯水池 工事, 排水路 工事, 停止 工事, 鹽分 除去 作業 等이 4,5年間 繼續되었다. 이때 干拓地에 農場을 하나 마련하여 房 農場이란 이름을 붙였다. [57] 그는 1百萬 坪의 農場을 임삼진에게 管理시켰다. [58] 또한 서포리에서 노하리까지 直線距離로 1km를 連結하는 工事를 推進했다. [59]

鹽分이 漸次 빠지면서 農事가 제법 되기 始作한 以後 이 곳은 7年間 凶作을 했던 적이 한 番도 없는 農土로 變했다. [60] 방응모 頌德碑는 干拓 事業이 完成된 이듬해인 1938年 10月 팔탄면 維持와 小作人들에 依해 세워졌다. [61] 以後 干拓 事業으로 얻은 땅에서 벼 1千 2百 가마가 生産되었으며 參與하는 小作人은 2百20餘 號에 이르렀다. [62]

朝鮮日報 引受와 經營 [ 編輯 ]

1933年 1月 16日 그는 正式으로 株式會社 朝鮮日報 社를 創立, 1月 18日에 發表된 創立 趣旨書에는 創立委員長 방응모, 創立發起人 방응모, 조만식, 高일청 外 等이 參與했다. 一旦 그는 조만식 을 社長으로 任命하고 自身은 副社長으로 있다가, 그해 3月 13日 다시 副社長에 就任했다. 4月 25日 編輯人 兼 發行人이 되고, 4月 29日에는 조선일보의 朝刊, 夕刊制 發行을 復活, 確定시켰다. 1933年 7月 10日 總督府로부터 조선일보社의 法人 登錄 承認을 얻어냈다. 7月 10日 조만식 의 辭退로, 朝鮮日報 代表理事 社長에 就任했다. 1933年 그는 自身의 雅號를 춘해에서 啓礎로 바꾸었다. 그는 有能한 文人, 筆陣의 參與를 이끌어내기 위해 賞金 1千 원을 걸고 作家를 迎入하였다.

이때 그는 東亞日報 를 비롯한 다른 新聞社의 筆陣들을 스카웃, 迎入했는데 이 中 이광수 等 一部는 自身이 먼저 勤務하던 新聞社 社主들에게 아무런 同意나 諒解를 求하지 않고 방응모의 스카웃 提議에 應하고 移職, 非紳士的이라는 指彈을 받기도 했다.

1933年 9月 14日 總 資本金 50萬원의 資産으로 株式會社 조선일보사가 法人 登記를 마쳤다.

1934年 3月 25日 이광수 를 비롯하여 서춘 , 김동진 , 함상훈 , 신태익 等을 朝鮮日報 로 迎入해 왔다. 그 外에도 定州郡 出身 言論人, 作家들이 조선일보로 많이 오게 되었다. 以後 東亞日報 와 갈등하게 되었다.

1933年 8月 東亞日報 號外에 依하면 "조선일보가 平安道의 돈을 가지고 와서 平安道 사람을 中心으로 新聞을 해나간다는 바람에 남달리 愛鄕心이 많은 平安道 讀者들은 東亞日報 를 버리고서 조선일보로 쫓아가게 된 것이 그곳의 大勢인 模樣이다. [63] " 하였다. 동아일보 地上의 消息通은 이광수, 서춘의 議員 解職 使令이 地上에 나타났고 이튿날 消息通은 "그 두 사람은 방응모가 정주신門을 만들겠다고 조선일보로 데려갔지 [64] "라고 하였다. 동아일보의 反應에 어떤 人事는 "동아일보에는 要塞 潭陽郡 사람이 세 사람이나 들어갔지. 방응모가 井州 사람만 쓰면 송진우 라고 潭陽 사람 못쓸라구? [65] "라고 하였다.

그밖에도 市中에는 그가 안창호 朝鮮日報 로 迎入하려 한다는 所聞이 돌았고, 이는 그대로 윤치호 에게도 傳해져 尹致昊 日記 에 실리게 되었다. 尹致昊는 방응모가 迎入한 이들 中 이광수 의 딱한 事情을 配慮해준 金性洙 송진우 에게 一切 通報 없이 조선일보로 移職한 李光洙를 비토하였다.

李光洙가 조선일보로 옮겨와 副社長職에서 9個月 勤務했다. 當時 朝鮮一步 內部에서는 文某 라는 이가 李光洙의 登場으로 自身의 立地 弱化를 憂慮해 오랫동안 李光洙를 내보내려 凶計를 꾸몄다고 한다. 李光洙는 1934年 5月 25日子로 突然 辭任하였다. [66] 文某는 그에게 오히려 잘 됐다는 式으로 말하다가 방응모에게 호되게 魂이 났다. 그리고 文某로 하여금 卽時 金剛山 에 들어가 李光洙를 다시 데려오게 했다. [67] 그러나 李光洙는 아들 봉근(當時 8살)의 死亡 等으로 失意에 빠졌고, 1935年에 가서야 李光洙를 조선일보 顧問이자 筆陣으로 재迎入하게 됐다.

慈善 寄附와 社會事業 活動 [ 編輯 ]

그가 新聞社를 運營하게 되자 "덕대 出身의 新聞社 社長"이라는 蔑視的인 視角도 나타났다. [68] 그러나 이런 蔑視的인 視角은 日本의 監視를 약화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한다. [69] 1933年 여름 當時 釜山에 駐在하고 있던 朝鮮日報 사 記者 오재동이 日本人이 찍은 구포 地域 一帶의 水害 現況 필름을 入手해 조선일보 本社로 올려보냈다. 동아일보 支局長 當時 定州郡 水害救濟會를 組織해본 經驗이 있던 그는 水害地域 救濟 活動을 計劃, 모임을 組織한다.

1933年 6月 4日 朝鮮一部 副社長으로 在職 中 個人 名義로 1千 원을 寄託하고, 會社 名義로 5百원을 내 救護金을 嶺南 水害地域에 보냈다. [70] 그해 7月 21日 西海岸 地方에 颱風이 올라와 鎭南浦와 平壤에 고깃배 3百餘 隻이 行方不明되었다. 이 颱風은 東海에도 暴風雨를 몰아붙였다. [70] 방응모는 水害 救護隊를 組織 活動을 支援하고, 物資를 支援했다.

1933年 11月 이광수 와 함께 2週間 日本 言論界를 視察하고 돌아왔다. 歸國 後 보성전문학교 에서 主催하는 全國雄辯大會에 後援金을 寄託하였다. 그러나 동아일보에서는 多少 冷淡하게 反應했다.

1934年 5月 5日 어린이날을 記念해 그는 新聞社 飛行機를 띄워 에어쇼를 進行하였다. 無料로 開催한 飛行機 에어쇼에는 第6回 서울 幼稚園 園遊會 祝賀 飛行으로 開催되었고, 2千餘 名의 幼稚園 어린이 및 學父母, 3萬 名의 觀衆들이 모였다.

1933年 當時 방응모는 個人的으로 1萬 2千餘 원을 奬學金으로 支出했다. [71] 그는 學生 奬學金 支援을 繼續 推進, 1933年 12月 12日에는 그의 奬學金을 받고 學業을 마친 學生들이 이심회라는 이름으로 組織되었다. 그는 이심회를 통해 奬學生 支援, 奬學生 모임 等으로 組織을 다져나갔다. 이심회는 다시 모임을 鉏중회(序中會)로 이름을 바꾸고 繼續 維持되었다. 書中回로 名稱을 바꿀 當時의 會員 數는 60名이었다. 그의 奬學生 모임이자 奬學財團인 書中會는 朝鮮日報 가 强制 廢刊된 뒤 1940年 以後 西中會議 奬學財團的 性格은 東方文化學院으로 移轉되었다.

1934年 6月 2,3日 사이 延坪島 近海에 큰 暴風雨로 早期 잡이로 몰려 있던 漁船 1千5百尺이 破損되고 漁夫 2百名이 失踪 되며 負傷者가 140名이 나타났다. 이때 그의 名義로 1百원, 社員 一同이 37원 45錢을 모아 救護金을 現地로 보냈다. [72] 7月 21日에는 三南 地方에 暴雨가 쏟아지자 榮山江 流域과 金海 地域이 물바다로 變했다. 방응모는 飛行機 를 動員, 水害 救濟 事業을 實施했다. [73] 이때 水沒地區에 孤立된 이들에게는 飛行機로 빵을 실어다가 空輸하게 했다.

陸路로는 寺院 10名을 急派하여 取材 活動을 벌였는데, 社員이 金海 支局長과 함께 現地로 車를 몰아 寫眞을 찍고 나오다가 길이 모두 물에 잠겨 自動車가 물에 휩쓸릴 뻔하기도 했다. 방응모는 앞장서서 記者들을 내려보내고 督勵했다. [74] 三南 地方의 水害와 關聯해서 조선일보社가 5百 원, 방응모 個人 名義로 5百 원, 社員 一同이 70원을 내어 1070원의 救護金을 募金하기도 했다. [75]

그는 人材 養成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베풀었지만, 집안 食口에게는 恒常 儉素하고 素朴하게 살 것을 强調하여 그의 家族이 닭 한마리 먹어 보지 못했다고 한다. [76] 이는 子婦 이성춘과 同行했던 그의 한 親舊와, 梨花女大와 東國大學校 敎授를 歷任한 박봉주가 證言하였다. 그밖에도 兒童文學家 윤석중 , 國會議長 민관식 等이 그가 家族에게 勤儉節約했다고 證言하였다.

押收 筆禍 事件 [ 編輯 ]

1934年 4月 1日 朝鮮總督府 警務局은 非常時를 理由로 在鄕軍人會 會員과 靑年團員에게 警察訓鍊을 實施하도록 하는 案을 전(全) 朝鮮 警察署長會議에 提案했다. 그러자 조선일보의 어떤 記者들은 警察力의 增加를 糾彈하는 <警察力과 허생(許生)>이라는 題目의 論說을 실어 押收됐다. [77] 그러나 押收 事態를 만든 이들에 對한 處罰을 加하지 않았다. 그는 '言論 經營人의 位置에 서서 編輯에 對해 干涉을 하지 않았다 [78] '는 것이다. 또한 '新聞 押收로 인해 編輯局 職員들이 社長의 눈치를 보았는데 너무 意外여서 놀랐다. [79] '는 證言도 있다.

1934年 여름 文字普及 運動을 再開하고, 같은 해 11月 24日부터 30日까지 열린 朝鮮博物展覽會를 主催하였다. [80] 朝鮮日報 社에서는 1930年부터 한글元本 敎材를 發行, 文盲 退治 運動을 展開해 나갔다.

少年雜誌 開設 및 奬學 事業 [ 編輯 ]

1935年 그는 朝鮮一步 15周年 記念 및 새 社屋 落成을 記念하여, 新聞 文化 展覽會를 12日間 開催하였다. 그해 6月 11日 高速輪轉機를 輸入해온 뒤, 새 社屋敷地를 마련하여 6月 12日부터 7月 6日 태평로 1街에 새 社屋을 建立, 落成하였다.

1936年 그는 少年에게도 雜誌를 읽게 하겠다며 少年雜誌를 始作, 題目도 少年 이라는 이름으로 發刊하였다. 조선일보의 姊妹誌인 少年 지를 發刊하면서 筆陣으로 윤석중 等을 迎入했다. 윤석중은 日本에 留學가서 工夫를 좀더 할 생각을 방종현과 百席 에게 말했더니 이 뜻이 그대로 방응모에게로 傳達되었다 한다. [81] 1939年 4月에 日本으로 건너간 윤석중은 방응모의 養孫子 방일영 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한다. 윤석중 은 日本 留學 時 방응모로부터 月 30원의 奬學金을 支援받았다. 윤석중에 依하면 "나는 이것 말고도 마해송 을 통해 얼마동안 30원씩을 더 받았어요. 아마도 방일영 과 같이 있었기에 月 30원 以上의 惠澤을 받은 것 같았어요. 나는 1943年 봄 徵用狀을 받고 避해서 歸國했지요 [82] "라 하였다.

그는 理念이나 出身과 相關 없이 奬學生을 選拔했는데, 支援 事由가 妥當하다 하면 바로 學費를 부쳐주었다. 1940年 廢刊 때까지 月 60원씩 70餘 명에ㅔ게 每月 學校로 送金해서 찾아 쓰게 했다. [83] 이 中에는 김기림 , 문동표 , 박치우 , 百席 , 李源祚 , 이갑섭 , 정근양 等이 있어 鉏중회 會員으로 活動하기도 했다.

永興 造林 事業 [ 編輯 ]

방응모는 1935年 4月 12日 朝鮮總督府 를 통해 咸鏡南道 永興郡 一帶의 國有林에다 造林 事業을 벌일 計劃을 세우고, 國有林野 貸付를 申請한다. [84] 當時 朝鮮 總督 禹카치 카츠시게 는 이 申請을 받아들여 4個月 만인 1935年 8月 27日 에 臨政 103號로 造林 事業을 許可했다. [85] 朝鮮總督府 臨政 103號의 桶虛葬 文書에 依하면 咸鏡南道 永興郡 斷俗山의 國有林과 月陰令, 七十令의 國有林, 그리고 향산리의 國有林 等을 8~10年 間에 걸쳐 조림하기로 되어 있다.

그가 國有地를 賃貸해서 나무를 大大的으로 심은 곳은 永興郡 선흥면 자산리 산 6-2, 태화리 산 64, 斷俗山 3의 國有林 1470梃 3段 3墓補宜 面積에 對한 조림은 1935年 8月부터 滿 8年間 總 302원 28원의 貸付料를 물고 弔臨하는 것이고, 永興郡 선흥면 자산리 산 157-2, 성리 山 6, 남흥리 山 10, 서상리 산 89, 태화리 산 232, 향봉리 山 5, 향산리 山 87 인풍리 산 136, 용남리 산 3-1, 용신리 산 72, 용수리 산 61, 향산리의 國有林 3493梃 6段 9墓보는 1935年 8月부터 10年間 694원 30錢의 賃貸料를 내고 弔臨하는 것이며, 선흥면 태화리 산 158, 인풍리 산 83-1, 산 83-2, 산 83-4, 산 83-7, 산 83-9, 受賞里 산 22, 용수리月陰令 산, 용반리 산 22, 산 37, 용산리 山 1番地, 용반리 산 45, 산 50, 원각산 용산리 山 81, 鷹峯 1 等을 包含하는 5843梃 9段 3墓補宜 面積에는 1935年부터 滿 10年間 1158원 3錢의 賃貸料를 내고 조림 하는 것이었다.

방응모는 永興郡 선흥면 성리 外 12個 里의 林野 造林 事業을 實施하기 위하여 啓礎社林業部라는 專擔 部署 를 두고 事業 主任으로 아들 방재윤을 앉혀 管理 責任을 맡겼다. [86] 咸鏡南道 永興郡 선흥면 性理로부터 12個 里의 面積 1萬 8百 情報는 1情報當 3千 坪으로 計算한다면, 3240萬 坪 의 面積이 된다. [87] 1936年부터 서상리 산89-1의 34町步에 朝鮮소나무 4萬 그루를 심기 始作, 선흥면 성리 270=2에 밭 519坪, 27-1에 垈地 151坪 等 670坪의 土地를 確保하여 根據地로 삼고, 苗圃 團地를 運營했다. 이 苗圃 團地에서 落葉松과 梧桐나무를 大量으로 再拜했다. 苗圃 團地에서 나오는 苗木이 不足하자 京畿道 水原 의 富國원이라는 苗木床에서 苗木을 購入하여 서상리 산 89의 134情報와 性理山 6의 5町步에 落葉松 1百萬 그루를 심었다. 苗木이 不足하자 다시 永興郡 度量리에 따로 3千 坪의 土地를 買入, 여기에 씨를 뿌려서 나무를 기르게 했으며 방재경에게 責任을 맡겼다.

이때 天然 雜木 保有 面積도 破惡할 兼 再測量을 實施했다. [88]

1936年부터 1941年까지 9萬 5039원을 投資하여 造林 事業을 꾸준히 해 나가자, 當時 日本 의 조림會社 스미도模寫 林業部가 30萬원에 사겠다고 提議해왔다. [89] 그러나 방응모는 이를 斷乎하게 拒絶했다. [90] 그밖에도 後日 美軍 第2師團이 駐屯하게 되는 그의 別莊 周邊에 밤나무와 뽕나무를 심었다.

1939年 8月 朝鮮總督府 農林局長은 事業 不振이라는 理由로 植栽 苗木의 供給이 원활하지 못한데 原因이 있다며 永興 逆轉 앞의 6段步 苗圃를 擴張하라 하였고, 優良殊妙를 生産하기 위해서 咸鏡南道 山林會議 斡旋을 받아른 等 具體的인 干涉을 하기 始作했다. 그러나 이는 火田民 430號와 내림地 居住 34號를 내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방응모는 壓力에 屈하지 않고 繼續 造林事業을 推進해나갔다. 1940年 5月까지 咸鏡南道 永興郡 선흥면 성리 外 12個 리에 包含된 10807町步에 329萬 2002그루의 나무가 植栽되었는데, 朝鮮宋, 落葉松, 赤松, 梧桐, 밤나무 等 5種을 심고 키우는데 7萬원이 投資되었다. [91] 그의 造林事業이 成功하자, 朝鮮總督府는 1941年 1月 8日子로 咸鏡南道 永興郡 所在 斷俗山의 3外 5個 國有林 賃貸地에 關한 詩業方針과 細部的 事業計劃書를 作成해서 1月 13日 午前 中으로 持參, 臨政과 處分系로 出頭하게 했다. [92] 그는 스美圖謀 社로 賣却하라는 要求를 1941年까지 繼續 拒絶하며 繼續 造林地를 지켰다.

1941年 봄 延人員 1318名을 動員하고, 1845원 20錢을 들여서 나무 35萬 7700그루를 심었다. 그러나 總督府의 干涉은 심해져서 1941年부터 1943年까지 每年 每月별 朝鮮宋, 落葉松, 赤松, 梧桐, 밤나무 等 5種의 나무를 심는 計劃書를 提出하라는 公文이 繼續 날아왔다. [93] 林業事業部와 造林 事業은 1945年 光復 直前까지 繼續되었고 김봉원 等의 代理人을 隨時로 現地에 보내 事業進行을 直接 把握하였다.

東方文化學院 財團 設立 [ 編輯 ]

방응모는 1936年 房農場의 所有權을 基本 資産으로 하는 財團法人 東方文化學院(東邦文化學院)을 設立했다. [94] 東方文化學院은 學校 法人으로 認可된 財團 法人으로, 그뒤 高階學院과 因緣을 가지고 1936年부터는 寶城高等普通學校 를 後見下였다. 그러나 얼마 뒤 分離되었다. 그뒤 방응모 奬學生인 鉏중회 會員들을 위한 방응모 奬學事業을 主管하였다. [95] 1940年 조선일보가 廢刊되자 태평로 舊 朝鮮日報 社屋 안에 東方文化學院의 看板을 달고 趙匡 지 雜誌를 繼續 發行하는 粗鑛舍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96]

日帝 强占期 後半 [ 編輯 ]

中日 戰爭 戰後 [ 編輯 ]

中日戰爭 開戰 直後인 1937年 7月 11日 에 열린 朝鮮日報 幹部會議에서 主筆 서춘 이 '日本軍,中國軍, 蔣介石 氏'等으로 쓰던 用語를 '我軍,皇軍,지나, 蔣介石'으로 고치고 日本 國民의 立場에서 論說을 쓸 것을 主張했다. 이에 對해 編輯局長 김형원 과 營業局長 金光守 가 積極 反對를 하기도 했으나, 방응모는 '日章旗抹消事件으로 東亞日報 가 이미 몇 十萬 원의 損害를 보았을 뿐 아니라 3.1 運動 때처럼 新聞이 民衆을 指導할 수 없다'면서 서춘 의 立場을 支持했다. [97] 한便으로 방응모는 修養同友會 事件 으로 投獄된 안창호 朝鮮日報 에 迎入하려 努力하였다. 그러나 安昌浩는 獄中에서 얻은 肝疾患과 肺疾患 等으로 苦生했고, 診療費 等을 隨時로 支援하고 問病했음에도 出獄後 얼마 뒤에 死亡한다.

1933年 이심회(以心會:後에 序中會, 방응모奬學會 等으로 名稱이 바뀜)라는 奬學會를 만들어 國內 大學生과 海外留學生들에게 學資金을 支給하기도 했으며, 財團法人 東方文化學院(東方文化學院:只今의 숭문중·高等學校 前身)의 理事長職을 맡기도 했다. [41] 또한 自身의 莫大한 財源을 들여 1936年부터 咸鏡南道 永興郡 一帶에 當時로는 想像하기 어려운 大單位 造林事業을 벌였으며, 그 前 해인 1935年 부터는 京畿道 水原郡 팔탄면 一帶에서 萬 2年間에 걸친 干拓事業을 벌이기도 했다. [41]

1937年 12月 24日 안창호 는 病保釋 判定을 받고 裁判所가 指定한 現 서울대학病院 人 경성제국대학 病院에 入院하고 있었다. 安昌浩의 入院 中에 시중을 든 사람으로는 安昌浩의 外조카 김순원과 靑年 박정호 두 사람이었고, 나중에는 이응준 將軍의 夫人 李正姬가 끝까지 至誠껏 看護하였다. [98] 안창호 는 病床에서 病院費 問題로도 苦楚를 겪었다. 이 때문에 조만식 은 日本 警察로부터 安昌浩의 病院費를 대지 말라는 警告를 받았음에도, "내가 먹고 살면서 그 先生을 돌보지 않을 수 없다"며 頑强히 拒絶하고 安昌浩를 도왔다고 한다. 入院費는 10日마다 120원씩 나왔다. 安昌浩의 看護를 같이 도와주던 이응준 將軍 夫人 이정희는 10日마다 計算되어 나오는 病院 入院費로 安昌浩 先生이 괴로워하는 表情을 지켜볼수 없었다고 陳述하였다. [99] 방응모는 5百원의 手票 한 張을 安昌浩에게 傳達하였다. 50日間의 入院費였다. [100] 그러나 안창호 1938年 3月 10日 밤 12時 경성제국대학 病院에서 殞命하였다.

1938年 3月 12日 安昌浩의 葬禮는 曺晩植의 主管 下에 조촐하게 치러졌다. [101] 當時 방응모는 日本警察의 沮止에 應하지 않고 自家用으로 葬禮行列을 뒤따르겠다고 固執하여 總督府 警察에서 完曲維持시켰다 한다. [102]

鄕土文化 調査 事業과 國産品 愛用 運動 [ 編輯 ]

1936年 봄 老産 이은상 이 찾아와 鄕土 文化 調査 事業을 같이 벌이자고 提案하였다. [103] 이은상 에 依하면 '總督府가 까탈스럽게 壓迫하는 통에 直線的인 抵抗은 어렵고 하니 文化運動 次元에서 우리의 正統性을 發掘할 目的으로 提案했다. [104] ' 한다./ 방응모는 돈과 關係 없이 해보자고 同意하였고. [105] , 事業은 1938年 2月에 들어서 始作되었다.

방응모는 鄕土文化 事業委員會를 社屋에 開設하였다. 1938年 2月 16日 서울 조선호텔에서 모임을 열고 鄕土文化 調査 事業의 槪要를 發表하였고, 朝鮮 各 地方의 연ㅇ혁, 地勢, 由來, 沿革, 山川, 査察, 鄕校, 書院, 名勝古跡, 民俗, 民謠, 춤, 方言, 俗談, 神話, 傳說, 人物, 土産品 等에 對한 文化 資料를 實際로 踏査, 調査하여 13卷의 冊으로 發表할 計劃이었다.

1938年 3月 5日부터 방응모는 各 地方에 責任調査원을 보냈는데, 李殷相은 全羅南道에, 文一平은 京畿道, 황의돈은 平安北道 等에 責任調査원으로 派遣되었다. 그리고 現地에서 올라오는 報告書를 鄕土文化를 찾아서 라는 題下로 조선일보 紙面에 連載케 했다. [106] 그러나 이 事業은 朝鮮總督府의 中指로 1940年 中斷되었다.

1938年 4月 25日부터 조선일보社 大講堂에서 朝鮮 特産品 展覽會를 開催하였다. [107] 觀覽客의 數는 10萬 名이 넘었고, 當初 10日 豫定인 5月 4日을 넘겨 4日을 延長한 끝에 5月 8日에 幕을 내렸다. [108] 行事 中 조선일보社 建物 空터에 假設舞臺를 만들어 演藝人들을 招請하고, 山臺都監, 鳳山탈춤, 꼭두각시춤, 盲人才談, 짠지牌, 걸궁패, 박춘재 才談 等의 公演을 涉外하고, 가까운 府民館에도 8度 女流 名唱 競演大會, 古典舞踊大會, 春香傳, 沈淸傳 等의 판소리 大會 等을 5月 4日까지 進行했다. [109] 1938年 4月부터 방응모는 조만식 等과 함께 國産品 弘報 運動을 펼쳤다. 조선일보社의 社屋 建物이자 廢刊 以後에도 그가 所有하던 태평로 建物에 朝鮮 各地의 特産品 弘報 팜플렛과 油印物, 寫眞 等을 展示하고 市中에 弘報하였다. 그는 朝鮮側産品 展覽會, 愛讀者 贈呈用 極東 時國支道 發刊 等을 推進했다.

조선일보 廢刊 事件 [ 編輯 ]

日本의 戰爭이 激化되면서 朝鮮總督府 公報局은 朝鮮日報 東亞日報 1940年 에 强制로 廢刊措置 했다. 鑛山을 팔아서 自身의 모든 것을 조선일보에 바쳤던 방응모는 큰 絶望과 挫折을 느껴야 했다. 韓龍雲은 ‘新聞이 廢刊되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로 始作하는 詩를 지어 방응모를 慰勞했다. [45] [110] 東亞日報 에는 金性洙 外에도 장덕수 송진우 가 있었지만 그에게는 조선일보 廢刊을 막기 위해 總督府와 交涉할 人物도 없었다.

1938年 2月 朝鮮總督府 의 言論統制政策에 協助하기 위해 朝鮮 內 日刊新聞 25個社로 組織된 朝鮮春秋會議 創立에 創立發起人으로 參加했고, 조선춘追悔 幹事로 活動했다. 같은 해 7月 “國民精神을 總動員하고 內鮮一體 全 能力을 發揮하여 國策 遂行에 協力하여 聖殿(聖戰)의 窮極的 目的을 貫徹”하기 위해 組織된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의 勃起에 參與했고, 그날 結成된 京城聯盟 創立總會에서 相談役을 맡았다. 9月부터 朝鮮防空協會 京畿道聯合支部 評議員을 지냈다. 10月에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이 主催한 非常時 國民生活 改善을 위한 第1回 生活改善委員會에서 第2部(儀禮와 社會風潮 刷新部) 委員으로 委囑되었다. 그러나 1938年 10月부터 朝鮮總督府는 조선일보의 新聞用紙를 檢閱, 統制하기 始作했다.

1938年 6月 14日 방응모는 音樂學校나 音大를 갓 卒業한 新人 音樂人을 紹介하는 新人音樂會를 府民館에서 開催한다. 그러나 新人音樂會는 朝鮮總督府의 禁止 要請으로 3回만에 中斷된다. 38年 11月 26日부터 5日間 府民館과 조선일보 本社 大講堂에서 朝鮮映畫 鑑賞會, 朝鮮映畫 展覽會, 朝鮮 映畫 시나리오 懸賞募集의 3個 行事를 主催했다. 그러나 亦是 3年만에 總督府의 壓力으로 中斷되고 만다.

1939年 2月 朝鮮人의 軍事動員을 위한 志願兵 參加를 督勵하기 위해 組織된 京城府志願兵後援會 拷問에 推戴되었다. 7月에 英國 打倒를 主張하며 全國 次元에서 積極的 背泳運動을 벌이기 위해 結成된 背泳同志會 (排英同志會)의 相談役으로 選出되었다. 1940年 3月 雜誌 《趙匡》의 發行人으로 就任했다.

1940年 4月 30日 永興 啓礎辭任事業部 責任者로 있던 兩者 방재윤이 看護師가 잘못 놓은 注射로 死亡했다. 食中毒으로 病院에 실려가 注射를 맞았다가 쇼크死하였다.

兩者 再閏을 잃고 나서 그는 虛脫感을 뽕나무 로 달랬다 [111] 한다.

양근환 이 釋放되어 20年만에 歸國하였다. 그는 막걸리 마실 돈도 없어 방응모를 찾아갔다. 朝鮮日報 祕書室에 양근환이라는 이름 석자의 名銜을 내밀면서 "나는 방응모 社長을 알되, 方 社長은 나를 모르겠지만 이렇게 찾아왔소"라고 하였다. [112] 방응모는 卽時 巨額의 手票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113]

1940年 5月 朝鮮總督府 總督 미나미 지로 가 放送談話로 創氏改名을 勸告했다. 그러나 그는 父母에게 물려받은 姓氏를 이제 와서 내 마음대로 바꿀수 없다며 創氏改名 은 頑强하게 拒絶했다. 1943年 화신백화점 店員 出身인 노호용과 結婚하였다. [114] 1940年 6月 初 명월관 料亭에서 豫約손님을 받을 때 흰 更紙로 飮食을 덮은 것을 보고 트집잡았다. 日本 警察 幹部들은 床에 덮인 흰 更紙를 보고 이것이 어디서 나왔느냐고 따졌고, 食堂 主人은 東亞日報社 에서 破紙를 購入해 쓴다고 對答하자 統制物資인 新聞用紙는 配給制로 供給되는데, 이 用紙를 不法處分했다 하며, 이것을 經理不正으로 몰고 갔다. [115]

그러나 조선일보에 트집이 잡힐 일이 나타나지 않자 總督府는 全國 面事務所에 조선일보 新聞 購讀을 拒絶하도록 命令을 내렸고, 同時에 朝鮮말을 쓰는 民願人에게는 일을 處理해주지 말도록 하게 했다. [116] 朝鮮總督府는 송진우 의 預金通帳을 問題삼았다. 송진우 名義의 銀行貯金이 동아일보의 8百餘 個의 支局과 分局을 통해 募金된 獨立運動 資金이라며, 그리고 동아일보 幹部들이 백운장이라는 料亭에서 會食을 한 것을 金性洙 집에서 祕密結社를 組織하려 했다는 等의 理由로 백관수 동아일보 社長을 電擊 拘束했다. [117] 동아일보는 백관수가 拘束된지 10日 만에 서울 鍾路警察署에서 東亞日報 重役會議를 열고 廢刊申請했다. [118] 總督府는 朝鮮日報에도 自進 廢刊을 勸告했고, 1940年 8月 9日 編輯會議를 主管, 8月 10日 조선일보의 肺奸計를 내고, 8月 10日子로 廢刊하였다. [119]

雜誌 發行 活動 [ 編輯 ]

新聞 强制 廢刊 뒤 방응모는 看板을 粗鑛舍로 바꿔 걸고, 社屋은 東方興業株式會社로 登記를 變更해서 維持했다. [120] 以後 그는 趙匡 雜誌 發行에 專念했다. 1943年 8月 頃 日本 中央大學의 豫科를 마친 방일영 이 入社 [121] , 筆陣으로 參與했다. 朝鮮日報 가 廢刊된 後에도 방응모는 벽초 홍명희 父子에게 持續的으로 生活費를 대주었다. [122]

1940年 俗談大辭典, 조선창極死, 朝鮮時調詩學, 朝鮮料理學, 世界名人傳 上中下 等을 發行했다. 以後 造船社化 等을 發刊했는데 多量의 部數로 刊行하여 다시 黑字가 되었다.

1943年 平安北道 井州에 있는 夫人과 며느리를 비롯한 家族 全部를 上京시키고, 서울 忠正路驛 邸宅을 賣却, 東大門밖 南山 밑 兩社골에 傳貰집을 얻는다. 그리고 故鄕의 99칸 韓屋을 헐어 楊州郡 議政府에 옮겨 지었다. [123]

1944年 孫子 방일영 이 學徒兵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방응모는 孫子의 學兵 徵集을 斷乎히 拒否했다. 방응모는 百方으로 學徒兵을 避할 수 있는 口實을 찾으려고 硏究하다가 京城府 의 有名한 醫師 백인제 를 찾아갔다. [124] 백인제 는 처음에 難處해했으나 방응모의 거듭된 懇請으로, 곤란합니다 라는 말만 되풀이하다가 結論은 孫子 방일영 의 生살을 칼로 째는 手術을 決定했다. 방일영 에 依하면 "나의 왼쪽 뺨의 귀 밑에서 턱까지 生살을 째는 手術이 始作되었다. [125] " 한다. 이로 因해 방일영 의 徵集은 延期되었으나, 菌이 들어가서 네 番이나 手術을 더 했다 한다. [126] 그러나 楊州郡守 김정제가 찾아와 學兵 問題를 繼續 擧論하였다. 그는 할 수 없이 방일영을 徵集이 免除되는 面書記로 들어가도록 合意했다. [127]

1944年 6月 29日 萬海 한용운 이 死亡했다. 그는 심우장을 찾아가 3百원을 내놓았다. [128] 當時 쌀 10가마가 100원이었지만, 심우장은 當場 現金 1원이 없었는데 巨額이라서 놀랐다 한다. [129]

1944年 아들 방재선 을 얻었다. 그가 바로 現在 朝鮮一步 四柱 一家와 財産權 紛爭을 벌이고 있는 방재선이다. 以後에도 방응모는 노호용과의 사이에서 房再孝, 방재규 等 두 아들을 出産하였다. 1944年 9月 軍需産業體人 朝鮮航空工業株式會社 設立에 創立發起人으로 參與하고, 以後 朝鮮航空工業 監査에 被選되었다.

光復 以後 言論 및 政治活動 [ 編輯 ]

光復 直後 [ 編輯 ]

1946年 3月 殉國3義士 遺骸奉還日 金九 , 爲堂 정인보 等과 함께

1945年 8.15 光復 後에는 8月 末과 朝鮮在外轉載同胞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 拷問과 建國準備委員會 委員에 選出되었다. 그러나 9月 安在烘 等이 左傾化되는 建準 體制에 反撥하여 建準 을 脫退瑕疵 방응모 亦是 建準 을 脫退하였다.

9月 2日 美軍政 이 駐屯하자, 방응모는 輪轉機를 찾기 爲해 廢刊 當時의 證憑書類를 美 軍政廳에 提示하였으나 消息이 없었다. 總督府는 조선일보 廢刊 直後 引受한 輪轉機를 경성일보사에 옮겨서 設置했다. 그는 東方文化財團 外 4個 事業所를 敵産으로 把握한 美軍政을 說得하고, 社屋 問題도 解決하였다.

10月 1日 조선일보 編輯委員會를 構成하고, 新聞 復刊 運動을 推進했다. 朝鮮總督府의 廢刊 指示 當時 議政府로 옮겨놓은 一部 活字 子母音이 잘 保管되어, 그해 11月 23日 조선일보를 復刊시키고, 서울신문사 社屋에서 朝鮮日報 復刊號를 刊行하였다. 以後 朝鮮社會問題對策中央協議會 中央委員을 거쳐 10月 16日 李承晩 (李承晩) 等의 主導로 獨立促成中央回 가 結成되자 督促에 加入하였다.

11月 臨時政府 要因이 歸國하자 金九 가 이끄는 韓國獨立黨 에 入黨했다. 12月 安在烘 의 推薦으로 韓國獨立黨 의 中央常務委員으로 選出되어 3~4個月 동안 活動했다. [130] 그 뒤 大韓國民總會 發起人, 大寒獨立愛國금헌聖會 發起人 等으로 活動하였다.

朝鮮日報 復刊 및 軍政期 活動 [ 編輯 ]

臨時政府 各州이자 韓獨黨 黨首 金九 . 방응모는 韓國獨立黨 의 中央常務委員과 黨 財政部長으로 參與했고, 金九 의 反託運動과 3義士 遺骸 奉還 때 資金을 댔다.

11月 朝鮮日報 紗를 復刊시켰다. 그러나 한동안 조선일보의 印刷는 서울新聞社 에서 刊行하게 되었다.

1945年 12月 23日 午後 2時 金九 가 主管하는 殉國先烈追念大會에 參與하였다. [131] 殉國先烈追念大會 委員으로 選出되었다. [131] 金九 가 모스크바 3上會談에 反撥, 强力한 反託運動을 推進하자 參與, 12月 30日 結成된 信託統治反對 國民總動員委員會 中央委員이 되었다. [132]

1946年 2月 26日 서울新聞社 工務局 從業員들이 조선일보의 印刷를 拒否해버렸다. [133] 그동안 默示的으로 妨害가 慇懃히 있었다. 表面上의 問題는 賃金 問題이나 內容上으로는 조선일보에 對한 朝鮮共産黨의 示威의 一種이었다. 사흘間의 交涉 끝에 2月 28日에 가서야 26日子와 27日子를 溯及해서 印刷하여 新聞을 한꺼번에 發行하였다. 그러나 3月 1日과 2日에 또다시 印刷를 거부당해 結局 休刊하였다. [134] 조선일보를 경성일보사로 옮겨서 印刷하기로 하고 3月 5日子로 事故로 讀者에게 알렸다.

1946年 2月 大韓獨立促成國民會 副會長에 選出되었고, 3月 1日 美軍政은 방응모에게 경성일보사 管理人으로 委囑했다. [135] 그러나 用地難으로 한동안 新聞 發行에 어려움을 겪었다.

4月 29日 金九 , 김창숙 , 金性洙 , 오세창 等과 함께 서울運動場에서 尹奉吉 義士 追慕會議 創立 發起人의 한 사람으로 參與하였다. [136] 그해 5月 造船工業俱樂部 顧問에 委囑되었다. 6月 29日 民族統一總本部(民族統一總本部) 10人協議會 委員으로 選出되었다. 1946年 6月 15日 午後 5時 40分 서울驛 에 마중나가 서울驛 에 到着한 三醫司 遺骨을 迎接하였다. 이어 太古史(太古寺)에 마련된 殯所에 參席하였다. 桐 6月 29日 民族統一總本部 協議員에 指名되고, 1946年 8月 韓國獨立黨 中央執行委員에 選出되었다. 8月 25日에는 韓國獨立黨 中央常務委員의 한 사람에 選出되었고 [137] 1946年 9月 獨立促成國民會 總務部長에 選出되었다.

1945年 光復 直後 서기원이 그를 찾아왔다. 서기원은 그때 京城農商實踐學校의 同窓會로부터 이 學校의 校長이 되어 달라는 付託을 받은 것이다. 방응모는 서기원의 提議를 받아들여 1946年 8月 28日 東方文化學院 理事長으로 崇文商業學校를 引受, 財團 理事長이 되었다. 後日 방응모가 6.25 戰爭 中에 拉北된 後 東方文化學院과 숭문중,高校의 財團은 최용진이 運營하다가 다시 1978年 방일영 에게 引受되었다.

1947年 1月 21日 第5回 創立委員會를 本社에서 開催하고 2月 23日 株式會社 조선일보사 株主創立總會를 열고 代表理事로 推戴되었다. 그러나 共同投資 經營者로 참여시킨 專務 이종민과의 軋轢이 發生했다. 이종민과의 葛藤이 深化되자 그해 8月 3日 방응모는 一旦 辭職書를 提出했다. 1947年 8月 10日 풍문여고 講堂에서 開催된 韓人新聞記者協會에 參席, 民族靑年團 에서 言論界 功勞者로 方應謨, 金性洙, 薛義植을 指定하여 賞을 施賞받았다. [138] 9月 13日의 臨時 株主總會가 緊急 召集되어 會社 運營 問題가 論議되고, 이때 取締役을 재선임할 때 다시 選任되었다. 그러나 이때 專務 이종민은 再選任에서 除外되었다.

金九와의 訣別과 萬年 [ 編輯 ]

以後 韓國獨立黨 中央常務委員 [139] , 黨 財政部長 等을 맡기도 했으나, 1948年 1月 以後 金九 의 路線 變更과 함께 그를 支持하던 勢力이 떨어져 나가서 朝鮮日報 도 金九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140] 그러나 金九와의 訣別이 괴로웠던지 방응모度 直接 나서서 <金九先生의 意見에 對한 우리의 取할바 態度>라는 글을 發表하기도 했다. [140]

1949年 趙素昻 이 結成한 社會民主主義 性向 政黨人 社會黨 에 入黨해 棟當 文敎政策委員長으로 推戴되었다. [141] 이듬해 1950年 第2代 國會議員 總選擧에서 京畿道 楊州郡에 出馬했으나 次點者로 落選하였다. [142]

1949年 議政府 可能東 別莊에 심은 뽕나무들이 茂盛하게 자랐다. 承繼度의 親戚 僧院號에 依하면 "할아버지(方應謨)는 사람들을 시켜 뽕나무를 2年間 키우게 했습니다. 탐스럽게 뽕나무가 자라니까 이番에는 織造 機械를 들여 織造 工場을 세우겠다고 하셨다. [143] " 한다. 그러나 그의 紡織工場 設立 計劃은 6.25 戰爭으로 霧散되고 만다.

1950年 6月 25日 韓國 戰爭 이 勃發했지만 避難을 가지 않고 서울 自宅에 머물다가 1950年 7月 6日 拉北되었다. 拉北 後 行跡은 "1950年 9月 28日 트럭에 실려 가다 美軍機의 攻襲을 받아 死亡했다"라는 證言만 있고 確實히 밝혀진 것은 없다. [4] 1950年 8月 開城 松嶽山 附近에서 美軍의 爆擊에 犧牲되었고 甚한 爆擊으로 屍身을 찾을 수 없어 墓도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44] [145] 南韓에서는 1955年 7月 7日 生死不明期間 滿了로 인해 失踪 處理되었다.


1950年 6月 25日 韓國 戰爭 이 勃發하자 周邊에서 避身하라고 勸했지만 '自身이 무슨 罪를 지었느냐'며 頑剛하게 버티다가 1950年 7月 6日 京畿道 楊州郡 時鈍면 可能리(現, 議政府市 가능동 ) 自宅에 들이닥친 朝鮮人民軍 에 依해 끌려갔다.

事後 [ 編輯 ]

서울 鍾路에 있던 兩者 방재윤의 두 아들 방일영 방우영 은 방응모의 첩 이인숙이 찾아가 避身하라고 勸告하여 遑急히 避身했다. 9月 28日 開城市 北쪽을 지나 黃海南道 瑞興郡 에서 트럭으로 强制 北送되었다. 以後 9月 28日 美軍機의 攻襲을 받아 死亡한 것으로 알려졌다.

7月 6日 그의 行方不明處理가 되고, 방응모의 死後에도 朝鮮日報 는 그의 名義로 發行되었다. 1952年 4月 28日 조선일보는 發行人兼 編輯人을 장기영으로, 印刷人을 방일영으로, 방응모는 名譽社長으로 名義變更하여 休戰 後 繼續 發行하게 되었다. 1954年 4月 30日 第8回 朝鮮日報 定期株主總會에서 張基榮 社長이 辭退하면서, 名譽社長 방응모가 社長으로 推戴되고, 發行人 兼 代表取締役에 방일영이 選任되었다. 以後 失踪 後 1959年 에 法的으로 死亡 處理되었다. 그리고 1970年 까지는 조선일보는 그의 이름으로 發行되었다.

1970年 2月 19日 朝鮮日報 定期株主總會에서 방응모 理事를 辭退를 受理하였다. 그의 被爆死亡 事實은 1970年代 以後 脫北者들을 통해 大韓民國에 紹介되었다.

親日行爲 疑惑 [ 編輯 ]

日帝 戰時體制機 活動 [ 編輯 ]

日帝 强占期 末期 言論人으로서 總督府體制에 協力한 記錄과 活動이 多數 記錄이 있다. 1933年 3月 朝鮮日報 經營權을 引受하고 副社長職에 就任했을 當時 같은 달에 高射機關銃 購入費用 1600원을 軍에 獻納하였다. 그는 1935年 親日 雜誌 《 趙匡 (朝光)》을 創刊하였고, 1937年에는 京城放送局 第2放送에 出演하여 日帝가 中國의 베일을 絶滅케하여 極東平和를 지키려고 한다는 講演을 하였다. 1940年代부터 조광에 集中的으로 親日 論說을 寄稿하고 時局 講演에 參與하여 戰爭 支援을 督勵했다. 1942年 6月에는 '徵兵令 實施에 一層 더 感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發表하였다. [146] 愛國금차回 (1937), 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 (1938), 臨戰對策協議會 (1941), 조선임전보국단 (1941) 等 代表的인 親日 團體의 會員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그는 이런 行跡으로 인해 解放政局 김승학 이 作成한 親日派 名單 에 記錄되어 있고, 2002年 民族正氣를 세우는 國會議員모임 이 發表한 親日派 708人 名單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選定해 發表한 民族問題硏究所의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 모두 包含되었다.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우리 朝鮮日報 는 다른 어떤 新聞도 따라오지 못하는 確固한 信念에서 非國民的 行爲를 斷然 排擊하여 終局까지 조선일보社가 이미 定해놓은 方針에 한뜻으로 邁進한다.

? 元山에서의 巡廻 講演 [147]

反民族行爲 論難 [ 編輯 ]

방응모를 親日派 로 봐야 하는지에 對해서는 論爭의 餘地가 남아 있다. 조선일보 經營 以前에는 公式的으로 알려진 방응모의 活動이 거의 없었고, 拉北된 뒤 消息이 끊겨버린 까닭에 本人이 抗辯할 수 없는 狀況에서 相對的으로 짧은 期間 동안의 行跡만으로 親日派 與否를 判斷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後孫들이 影響力 있는 朝鮮日報 言論社의 四柱를 맡았기에 그의 立場에서 敍述한 記錄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例를 들어 1980年 發刊된 그의 電氣 《啓礎 방응모》(조선일보사) 等에는 '그가 民族主義的 先覺者'로 描寫되고 있다. 방응모가 親日派가 아니었다고 主張하는 一部勢力側은 그가 創氏改名을 하지 않았다는 點을 論據로 드는 境遇가 많이 있다. [148] [149] 또한 韓國淨土學會 顧問이자 서울 정토사 住持였던 朴雪山 (1918~2007)李 學徒兵에 끌려가기 直前인 1943年 12月 28日 밤 서울驛에서 스스로 왼발을 線路에 올려 발가락을 切斷해 徵集을 忌避하자 방응모는 萬海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入院한 雪山을 걱정하면서 入院 中 조선일보 記者를 통해 돈을 傳達한 것은 勿論 退院할 때 돈을 傳達하고 뒤를 보살폈다고 한다. [150]

2010年 12月, 방응모 關係者들 및 朝鮮日報側은 '親日反民族行爲者 決定을 取消해달라'며 法院에 낸 訴訟에서 原告 敗訴 判決을 받았다. 法院은 "1944年 朝鮮航空業 創立發起人으로 活動한 部分에 對해 親日行爲로 判斷한 部分을 取消하지만 나머지 活動에 對해서는 親日 行爲로 認定된다."라고 判決했다. 그 理由인 卽 "방응모는 1933年 朝鮮一步 社長으로 就任해 國民總力朝鮮聯盟 慘事, 조선임전보국단 移徙 等으로 活動하며 親日活動을 벌였으며, 1937年 京城放送局 時局講演에서 日本帝國이 極東平和를 確立시킬 것이라는 內容의 講演을 하고, 1938年 朝鮮總督府의 言論統制政策에 協助하기 위해 組織된 朝鮮春秋會議 發起人 兼 幹事로 活動하기도 했다. [151] "는 것이다.

2012年 1月 12日 서울高法 行政7部는 房 前 社長의 孫子인 방우영 조선일보 名譽會長이 行政安全部를 相對로 낸 親日反民族行爲 決定 處分 取消 請求訴訟에서 ‘日帝 强占下 反民族行爲 眞相糾明에 關한 特別法’의 親日 行爲 判定 條項에 비추어 房 前 社長에게 適用된 모두는 親日 行爲로 認定된다고 判決했다. 裁判部는 “民族的 指導者로서 比重이 큰 만큼 그로 인한 責任도 무거울 뿐 아니라 苦難의 時期를 겪은 民族으로서 그 歷史를 反省하자는 立場에 설 때, 房 前 社長의 여러 行態는 反民特別法에서 規定한 親日反民族行爲의 類型에 屬함을 否定할 수 없다”고 밝혔다. 1·2審 裁判部는 房 前 社長이 自身이 運營하던 雜誌 <趙匡>에 日帝 侵略戰爭에 同調하고 內鮮一體를 强調하는 文藝物과 日帝 侵略戰爭에 協力할 것을 注文하는 論文을 揭載하는 等의 ‘親日’ 行爲를 했다는 點을 認定했다. 또한, 2審 裁判部는 日本의 戰爭 遂行을 돕기 위해 設立된 軍需 製造業體 ‘朝鮮航空工業’의 發起人과 監査를 지낸 것은 “監査는 業務執行에 關與할 수 있는 莫强한 權限을 가진 機關으로, 房 前 社長이 이 會社를 運營했다고 볼 수 있다”는 理由로 親日이라고 判斷했다. [152]

기타 [ 編輯 ]

敎育者인 아들 방재윤 은 自身의 子女 敎育에 嚴格하였다. 그러나 방응모는 오히려 아들 再閏을 나무라기도 했다. 방응모에 依하면

"그 놈만은 가만 놔둬도 잘 클꺼야. 내레 社듀를 보니까니 그 놈은 디가 먹을 거는 가지도 태어난 놈이디. 놔 둬. 놀 때 熱心히 놀아야 훌륭한 사람도 된다. [153] "며 아들을 말리기도 했다.

奬學 事業 [ 編輯 ]

방응모는 奬學事業을 推進하여 苦學生들을 後見, 支援하기도 했다. 啓礎의 奬學事業人 書中會는 1934年부터 始作해 1950年 韓國戰爭까지 繼續 [154] 되었다.

家計 [ 編輯 ]

  • 아버지 : 방계준(方桂準)
  • 어머니 : 溫陽 朴氏
    • 兄 : 放鷹곤(方應坤)
    • 配偶者 : 承繼도
      • 아들 2名 腰絶
    • 配偶者 : 이인숙(李仁淑, 1901年 ~ ?)
      • 아들 : 방재욱(方在旭, 1925年 ~ 1926年 9月)
    • 配偶者 : 배영옥(裵英玉)
      • 長女 : 방재숙(方在淑)
    • 配偶者 : 노호용(盧鎬龍)

知人 [ 編輯 ]

그는 한용운 , 최남선 , 정인보 , 홍명희 等과 親分關係를 形成하고 어울려 지냈다 한다.

金九 韓國獨立黨 의 財政的 後見人 役割을 하였다 하며, 尹奉吉 이봉창 백정기 三醫司 遺骨奉還式 때 金九 , 정인보 等과 撮影한 寫眞이 있다. [155] 그리고 1945年 11月 23日 조선일보가 復刊되자 白凡 金九는 '有志者事竟成' 뜻을 지닌 者 成就할 수 있다'는 親筆 揮毫를 보내며 祝賀했다. [156] 한便 임꺽정 의 著者인 벽초 홍명희 가 방응모로부터 經濟的 支援을 받으며 그와 깊은 親分을 맺었다는 主張이 있다. 《 趙匡 》 1938年 11月號엔 洪命憙가 病中에 있는 방응모를 慰勞하며 지은 漢詩가 방응모의 答詩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한다. [157] 또한 안창호 의 祕書室長을 지낸 獨立有功者 구익균 은 방응모와 安昌浩가 親密했다는 主張을 했다. [158] 또한 朴雪山에 따르면 1943年 萬海 韓龍雲에게 學徒兵으로 끌려가게 되었음을 알리려 심우장으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韓龍雲과 방응모가 바둑을 두고 곁에서 鄭寅普가 訓手를 두고 있었다고 한다. [159]

1930年代~1940年代 방응모에게서 奬學金을 支援받은 學生 모임인 書中會議 會員들의 그의 人物評은 "첫 印象은 좀 깡마른 모습이었으나 意志가 剛한 人物 [160] "이라는 評을 남기기도 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 編輯 ]

  1. 안은필. 朝鮮日報가 가장 빛나던 時期, ‘安在鴻 時代’ Archived 2015年 6月 3日 - 웨이백 머신 . 國民TV. 2015年 4月 1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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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한홍구 "朴正熙는 恐怖와 欲望의 政治를 했다" . 프레시안. 2015年 4月 13日.
  4. "김일성 將軍 만세" 외쳤던 朝鮮日報 1950年 6月28日 號外 . 미디어오늘. 記事入力 2015年 3月 4日. 記事修訂 2015年 3月 5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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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啓礎 방응모와의 友情도 여러 篇의 詩로 表現해 - 1等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9. 정지환. '方應謨 韓獨黨 財政部長' 報道는 <朝鮮>의 典型的인 歷史 捏造 事例 . 오마이뉴스. 2002年 4月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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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방응모 - 韓國學中央硏究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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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조선일보는 1932年 7月에 曺晩植을 社長으로 迎入했지만, 曺晩植은 거의 平生을 平壤에서 살아왔던데다 서울에서 活動하기에는 適應을 잘하지 못했다. 曺晩植은 新聞社 經營難과 地域感情의 酷毒한 試鍊을 받은 채 9個月만에 退社했다. 그리고 조만식 後任으로 1933年, 방응모를 社長으로 推戴하기에 이르렀다.
  40. 《韓國史 市民講座 第47輯, 代表的 獨立運動家 12人》,일조각. p145
  41. 방응모 - Daum 百科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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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이때 조선일보사 營業局長職은 조병옥 에게 넘겼다.
  44. 萬海가 일송 先生 5日葬 치른 事緣
  45. 萬海와 啓礎 방응모 先生 - 1等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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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朝鮮日報 70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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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25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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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00페이지
  87.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00페이지
  88.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02페이지
  89.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03페이지
  90.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03페이지
  91.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05페이지
  92.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05페이지
  93.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0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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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7. “示唆IN 2009年 11月 21日子” . 2016年 3月 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4月 28日에 確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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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60페이지
  103.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50페이지
  104.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50페이지
  105.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51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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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54페이지
  108.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55페이지
  109.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55페이지
  110. 붓이 꺾이어 모든 일 끝나니 이제는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지고 아, 쓸쓸하고 쓸쓸한지고 亡國 서울의 가을날 漢江의 물도 흐느끼느니 울음 삼켜 흐느끼며 臙脂를 外面한 채 바다 向해 흐르느니
  111.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11페이지
  112.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84페이지
  113.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85페이지
  114. 正式 結婚이 아니라는 主張도 있다. 그에 依하면 첫 夫人 承繼도와 둘째 夫人 이인숙이 當時 살아있었던 點을 든다.
  115.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73페이지
  116.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73페이지
  117.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73~374페이지
  118.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74페이지
  119.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75페이지
  120.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81페이지
  121.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81페이지
  122.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84페이지
  123.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87페이지
  124.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93페이지
  125.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93페이지
  126.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94페이지
  127.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94페이지
  128.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95페이지
  129.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396페이지
  130. 一角에서는 방응모가 '韓獨黨 財務部長으로 지냈다.'는 主張이 있는데, 이는 1947年부터 韓獨黨 財務部長을 맡은 신창균이 全面 否定했다. 白凡 祕書와 '眞짜' 韓獨黨 財政部長의 育成證言. 參考.
  131. 아! 悲運의 歷史現場 京橋莊(1993, 白凡思想實踐運動聯合)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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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3.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436페이지
  134.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43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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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 "故尹奉吉義士의 記念式 오늘, 發起人會 열고 準備", 東亞日報 1946年 4月 23日子 2面, 社會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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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 韓國史데이터베이스
  140.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2卷〉(人物과사상사, 2004) 68~70쪽.
  141. 1949年 7月 6日子 東亞日報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42. 韓國史데이터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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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 신준영 (2002年 7月 1日). " 누워서도 南쪽하늘만 보십니다" - 平壤時 신미리 在北桶協 特設墓地” . 民族21. 2014年 4月 2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5月 15日에 確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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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9. "日帝 末期 啓礎는 時局講演에 나설 것과 創氏改名을 執拗하게 강요받았으나 그때마다 默默不答으로 拒否하며 所信을 지켰다." 《朝鮮日報》 (2001.3) 朝鮮日報 社長列傳 - 啓礎 방응모便, 《한겨레》 (2001.3.30) 朝鮮日報, 日章旗를 新聞題號 위에 Archived 2005年 4月 21日 - 웨이백 머신 에서 再引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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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7. ‘林꺽정’으로 되살아난 獨立運動의 魂!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주간조선 1827號 200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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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 朴雪山 저 <뚜껑없는 朝鮮 歷史 冊> p.226 圖書出版 三藏(1994)
  160. 이동욱, 啓礎 방응모 (방일영文化財團, 1996) 256페이지

參考 資料 [ 編輯 ]

  • 反民族問題硏究所 (1994年 3月 1日). 〈방응모 : 言論 내세워 日帝에 阿附한 敎化 政策의 下手人 (문영숙)〉. 《淸算하지 못한 歷史 2》. 서울: 청년사. ISBN   978-89-7278-313-8 .  
  • 강준만의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1(康俊晩, 人物과사상사, 2006)
  • 강준만의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2(康俊晩, 人物과사상사, 2006)
  • 강준만의 韓國現代史散策:1950年代篇 1(康俊晩, 人物과사상사, 2006)
  • 民族 啓蒙의 礎石 방응모(이동욱 저, 地球村, 1998)
  • 啓礎 방응모展(啓礎展期間行爲, 조선일보사, 1980年)
  • 啓礎 방응모(이동욱, 방일영文化財團, 1996)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