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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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
(1392年~1894年)
大조선국
(1894年~1897年)
( 됴? ) ( ) ( 귁? )
( 땡? ) ( 됴? ) ( ) ( 귁? )

 

1392年 ~ 1897年
문장
王室 印章
引張
(1884年頃 ~ 1897年)
수도 漢城府 [a] 北緯 37° 35′ 東京 127° 0′  /  北緯 37.583° 東經 127.000°  / 37.583; 127.000
政治
政治體制 專制君主制
國王
1392年 ~ 1398年
1400年 ~ 1418年
1418年 ~ 1450年
1567年 ~ 1604年
1724年 ~ 1776年
1776年 ~ 1800年
1863年 ~ 1897年

太祖 (初代)
太宗
世宗
宣祖
英祖
正祖
高宗 (말대) [b]
領議政
1392年 ~ 1398年
1408年 ~ 1412年
1431年 ~ 1450年
1592年 ~ 1598年
1779年 ~ 1785年
1884年 ~ 1894年

정도전
河崙
黃熙
류성룡 [c]
서명선 [d]
심순택
국성 全州 李氏
歷史
 ? 建國 1392年 8月 5日
 ?  大韓帝國 으로 國號 變更 1897年 10月 12日
지리
位置 韓半島
面積 222,300 km 2
內水面 比率 2.8 %
人文
共通語 中世 近代 韓國語
漢文 [e]
共通文字 漢字 , 한글
데모님 朝鮮人
民族 韓民族
經濟
通話 (1633年~1892年)
(1892年~1897年)
宗敎
國校 儒敎
其他 宗敎 佛敎
巫俗信仰
道敎
로마 가톨릭교회
東學
기타
現在 國家 大韓民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朝鮮 (朝鮮, 文化語 : 李氏朝鮮, 吏曹)은 韓半島 에 있던 옛 國家 이다. [1] 1392年 李成桂 가 建國하여 [2] 1897年 高宗 稱帝建元 으로 大韓帝國 이 세워질 때까지 [3] 存續하였다. 首都는 只今의 서울特別市 漢陽 이었고 [4] 鴨綠江 豆滿江 을 境界로 滿洲 沿海州 와 國境이 있었다. [5]

朝鮮의 政治 儒敎 의 한 갈래인 性理學 을 支配 理念으로 삼아 [6] 士大夫 를 根幹으爐韓 中央集權 敵人 官僚制 로서 運營되었다. [7] 朝鮮의 國王 은 理論的으로 專制君主 의 地位를 지녔으며 스스로를 節制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兩班 官僚와 妥協하여 政治를 運營하였다. [8] 兩班 官僚는 初期에 勳舊派 士林派 로 나뉘어 葛藤을 보였으나 [9] 中期 以後 士林派가 得勢하였고 以後 여러 政派로 나뉘어 競爭하는 朋黨 政治 를 形成하였다. [10] 朝鮮 中期에서 後期에 걸쳐 四色黨派로 굳어지던 朋黨 政治는 性理學의 學風과도 密接한 聯關을 맺고 있어 禮訟論爭 [11] 이나 湖洛論爭 [12] 과 같은 主題가 政治의 尖銳한 爭點으로 浮刻되기도 하였다. 19世紀에 이르러 勢道 政治 가 登場하면서 朋黨 政治 體制는 衰落하였다. [13]

朝鮮의 軍事 는 初期 五位 體系로 編成되어 있다가 以後 地域 據點을 中心으로 防禦 體系를 構築한 鎭官制 와 이를 補完하는 制勝方略 을 核心으로 하였다. [14] 이러한 戰略은 壬辰倭亂 을 거치며 급작스런 외침에 맞서기 어렵다는 點이 浮刻되어 訓鍊都監 을 始作으로 五軍營 의 中央軍을 두고 [15] 各道에 束伍軍 을 두어 地方을 防禦하는 形態로 變化되었고 [16] , 軍事的 目的으로 設置되었던 備邊司 가 常設化 되면서 議政府 를 제치고 實質的인 政治 議決 機構로 變化하였다. [17] 朝鮮軍의 兵力은 初期 부터 兵役을 지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番을 서는 形態로 定着되었으나 兩班들의 兵役 忌避가 極甚하였고 이에 影響을 받아 良人들도 되도록 軍布를 代納하고 兵役을 代身하고자 하는 風潮가 일어 朝鮮 後期 以後 實際 兵役에 服務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良民이나 賤人들이 많아 束伍軍은 賤隸軍이라고 蔑視 받을 地境이었다. [18] 이는 朝鮮 末 여러 危機에서 제대로 된 軍事的 對應을 할 수 없는 要因으로 作用하였다.

朝鮮의 支配層이었던 兩班은 地域에 割據하며 土地를 所有한 地主 로서 農業 을 優先하는 經濟 政策을 펼쳤다. 이에 따라 朝鮮의 經濟 貨幣 보다 現物에 依存하는 모습을 보였고 相當數의 交換이 相互間의 好意에 依해 膳物을 주고받는 互惠經濟의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國家의 租稅 受取와 分配, 商品의 交換 等이 婚材하는 모습을 보였다. [19] :175-192 朝鮮 前期 및 中期의 商業은 禁亂廛權 이 주어진 獨占的 商人들이 主軸이 되어 이루어졌고 [20] 보다 자유로운 商業活動은 禁亂廛權이 廢止된 신해通功 以後에 이루어졌다. [21] 貨幣의 원활한 普及은 朝鮮 後期 日本으로부터 莫大한 구리를 輸入한 뒤에야 可能하였다. [22] 後期에 들어 民間이 運營하는 手工業이 發達하여 [23] 오늘날에도 地域 名産物로 꼽히는 韓山모시 [24] , 全州市 負債 [25] 와 같은 物品들이 登場하였다. 朝鮮 後期에는 全國的인 商業網이 發展하면서 利益을 目的으爐韓 商業 活動이 活潑해졌고 [26] 朝鮮 後期 登場한 五日場 과 같은 正規 市場은 오늘날에도 傳統 市場의 形態로 이어지고 있다. [27]

朝鮮의 主要 運送 手段은 江과 바다를 利用한 水雲 이었다. 主要 交通 要地에 漕倉 을 세워 稅穀을 保管하였고 漕運船 을 통하여 漢陽까지 運搬하였다. [28] 陸地의 交通路는 驛站 을 두어 國家의 主要 連絡網으로 삼았고 [29] 全國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9 - 10 個의 道路를 運營하였다. [30]

朝鮮의 公式的 身分制 良人 賤民 灣을 區分하는 良賤制 였으나 [31] , 實際로는 兩班 , 中인 , 良人 , 賤民 等으로 細分化 되어 있었다. [32]

朝鮮의 文化 는 여러 이웃 文化의 受容과 獨創的인 發展이 交叉되며 形成되었다. 오늘날 韓國의 代表的 傳統 文化로 손꼽히는 韓屋 , 韓服 , 韓食 等은 大部分 朝鮮 後期에 完成된 文化를 基盤으로 하고 있다.

朝鮮은 5百餘 年 동안 이어진 國家로 그 사이 世界의 歷史 近世 에서 近代 에 이르는 커다란 變化를 겪었다. 朝鮮 亦是 이 期間 동안 안팍의 變化를 겪으며 政治, 經濟, 社會, 文化 等의 各 部分에서 時期別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에 따라 朝鮮의 時期를 電氣와 後期 또는 初期, 中期, 後期로 區分한다. [33] 時期에 對한 區分은 아직 學界 全般에서 明確히 整理되어 있지는 않으나 大略的으로 建國 및 體制 整備가 이루어진 15世紀 - 16世紀 初盤 까지를 初期로 보고, 士林의 登場과 朋黨 政治가 形成된 16世紀 中盤 - 17世紀를 中期로 보며, 18世紀 初 - 19世紀의 時點을 後記로 본다. [34]

建國과 國號 [ 編輯 ]

明나라와 葛藤을 빚던 高麗 [ 編輯 ]

高麗 元나라 의 勢力 弱化와 明나라 의 建國으로 國際 政治 地形은 크게 變化하였다. 國內에서는 새롭게 政治勢力으로 成長한 新進士大夫 性理學 에 立脚한 國家 運營을 主張하고 있었다. 新進士大夫는 정몽주 와 같이 高麗의 改革을 통해 自身들의 政治 以上을 實現하려는 穩健派와 정도전 과 같이 易姓革命 을 不辭하고자 하는 急進派가 對立하였다. 이들은 遼東半島 에 對한 進出을 놓고 明나라와의 外交 關係를 놓고 葛藤을 빚었고 搖動의 征伐을 위해 出陣하였던 李成桂 威化島 回軍 을 통해 實權을 掌握하였다. [35]

古朝鮮을 根據老漢 國號 [ 編輯 ]

李成桂를 中心으로 權力을 잡은 新進士大夫 急進派는 처음에는 國王을 交替하고 高麗의 國際를 維持하였으나, 結局 李成桂가 國王으로 卽位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새 나라는 明과의 關係 속에서 國號를 朝鮮이라 定하였다. 國號의 決定은 古朝鮮 을 根據老漢 朝鮮과 李成桂의 故鄕에서 由來한 花翎(和寧)을 候補로 세우고 明나라에서 決定하는 模樣새를 갖추었다. 國號가 朝鮮으로 決定된 것은 箕子朝鮮 의 事例를 들어 朝鮮을 中國의 藩國으로 認識하고자 하는 明나라와 檀君朝鮮 以來의 獨自性을 意識한 新進士大夫의 意志가 折衷된 것이다. 이에 따라 朝鮮 國王 은 對外的으로 中國의 冊封을 받는 形態로 在位하였으나 實際로는 獨立的인 世襲에 依해 繼承되었으며, 朝鮮의 國家 制度 亦是 獨自的인 國風을 維持하였다. [36]

建國 初期 朝鮮은 對內外的으로 不安한 政局이 持續되었다. 外交的으로는 明나라의 洪武帝 가 朝鮮의 主權을 認定하지 않으려는 態度를 보였고 內部에서는 王子의 亂 과 같은 分裂과 杜門不出 과 같은 一部 士大夫의 새 王朝에 對한 反感을 다독여야 하였다. 朝鮮은 外交에서는 明과의 事大를 强化하고 內部에서는 王權의 確立과 分裂을 克服하기 위한 活動이 必要하였다. 明나라에 對해서는 永樂帝 의 卽位 以後 事大 外交 關係가 樹立되어 對外的 不安을 解消할 수 있었고, 內部的으로는 民本 思想과 天命을 앞세워 새王朝 建國의 正當性을 强化하였다. [37]

朝鮮의 國書와 外交文書는 國名을 조선국(朝鮮國)으로 表記하였다. [38] 大조선국(大朝鮮國)이라는 名稱은 1876年 釜山港 阼階 條約 締結 以後 使用되었다. [39] 한便 李氏 朝鮮(李氏朝鮮), 또는 吏曹(李鮮)라는 表現은 日帝强占期 日本의 造船社 整理 事業으로 形成된 것이다. 韓國은 解放 以後에도 이 用語를 별다른 批判없이 使用하다가 1970年代 後半에 들어 民族主義的 視角에서 批判하기 始作하였고 最近에는 거의 使用되지 않는다. [40]

國體 및 理念 [ 編輯 ]

朝鮮은 專制君主的인 國王이 主權을 行使하는 王國이었지만 實際 運營은 性理學的 理念에 따른 官僚制로 이루어졌다. [41] 建國 初期에는 많은 部分에서 高麗의 制度를 繼承하였으나 漸次 새로운 國家 制度를 整備하였고 《 經國大典 》을 통하여 이를 明文化하였다. [42] 性理學은 儒學의 한 갈래로 宋나라 時期 形成되어 韓國에 傳해졌다. 成立 時期 性理學은 陽明學 , 訓詁學 等의 다른 留學 갈래들과 競爭하는 理論이었다. 그러나 朝鮮에서는 性理學만을 참된 學問으로 認定하고 留學의 다른 流派들은 排擊하였다. [43]

性理學이 獨占하는 國家 理念의 樹立은 以後 朝鮮 內의 性理學 發達과 함께 士林派 가 形成되는 이념적 背景이 되었다. [44] 朝鮮의 政治는 性理學 學派와도 깊게 連結되어 있었고 學派의 首長으로서 자리잡은 儒學者는 비록 現職 官僚로 있지 않더라도 强한 影響力을 行使하였다. [45] 朝鮮 後期에 들어 實學 을 主張하는 儒學者들이 性理學의 限界를 克服하기 위해 다양한 代案을 생각하였으나 그들 亦是 性理學의 울타리를 完全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46] 한便 性理學의 틀을 벗어나는 西學 이나 東學 과 같은 움직임은 斯文亂賊 으로 排擊되었다. [47] [48]

歷史 [ 編輯 ]

朝鮮은 5百餘 年 동안 이어진 國家로 그 사이 世界의 歷史 近世 에서 近代 에 이르는 커다란 變化를 겪었다. 朝鮮 亦是 이 期間 동안 안팍의 變化를 겪으며 政治, 經濟, 社會, 文化 等의 各 部分에서 時期別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에 따라 朝鮮의 時期를 電氣와 後期 또는 初期, 中期, 後期로 區分한다. [33] 時期에 對한 區分은 아직 學界 全般에서 明確히 整理되어 있지는 않으나 大略的으로 建國 및 體制 整備가 이루어진 15世紀 - 16世紀 初盤 까지를 初期로 보고, 士林의 登場과 朋黨 政治가 形成된 16世紀 中盤 - 17世紀를 中期로 보며, 18世紀 初 - 19世紀의 時點을 後記로 본다. 이러한 變化는 壬辰倭亂 丙子胡亂 의 兩란을 起點으로 朝鮮의 時期를 前後 兩分하였던 旣存의 區分이 지나치게 外的 要因에 依存的이라는 批判에 따른 것이다. 이에 反해 初中後의 三分 方法은 士林의 登場 等 內的 變化를 主要 原因으로 삼고 있다. [34]

朝鮮 初期 [ 編輯 ]

世宗어제 訓民正音

朝鮮 初期는 政治的으로는 李成桂 의 建國에서 《 經國大典 》의 完成과 士林의 登場에 따른 各種 士禍 가 있었던 時期로 생각할 수 있다.

李成桂의 建國은 性理學的 理想에 따른 政治 實現이라는 新進士大夫 의 要求와 함께 元나라 北元 으로 물러나고 明나라 가 樹立되는 國際秩序의 變化에 對한 國內 勢力의 葛藤이 함께 맞물려 일어난 事件이다. 元나라 干涉期가 길어지면서 高麗는 元나라의 駙馬國으로서 王族과 權門勢家 亦是 元나라와 緊密한 關係에 있었기 때문이다. 北元과 名에 對해 等距離 外交를 펼치던 공민왕 이 弑害된 後 高麗와 明나라의 關係는 急速히 惡化되었고, 考慮는 故土回復을 名分으로 요동 征伐을 計劃하여 明과의 戰爭을 試圖하였다. [49] 明나라가 名實相符한 中國의 敗者라는 認識 아래 急進的 新進士大夫와 손을 잡은 李成桂는 威化島回軍 을 斷行하여 實權을 掌握하고 以後 朝鮮을 建國하게 된다. [35]

朝鮮의 建國 初期 새로운 王朝의 政治 秩序를 두고 많은 葛藤이 벌어졌다. 王子의 亂 은 再上程値를 具現하려한 정도전 等과 王權 中心의 政治 運營을 主張한 李芳遠 의 葛藤이 原因으로 結局 李芳遠이 卽位하여 國王 中心의 政治를 施行하게 되었다. [19] :19-20 王權과 神權의 葛藤은 以後로도 繼續되어 世祖 簒位 亦是 이러한 葛藤이 背景이 되었다. [50]

한便, 朝鮮 初期는 各種 制度와 文物을 整備하는 時期였다. 世宗 은 《 訓民正音 》을 頒布하는 한便 [51] 全國을 調査하여 《 世宗實錄地理志 》를 作成하는 等 [52] 여러 改革的인 措置를 斷行하였다. 이 時期 四群 六鎭 이 朝鮮의 領土로 編入되어 朝鮮의 領土는 오늘날 韓半島의 地理的 境界와 類似하게 되었다. [53] 朝鮮의 國家 運營을 위한 法典인 《 經國大典 》銀 世祖 時期 準備되어 成宗 卽位 初 頒布되었다. 以後 朝鮮은 《 續大典 》과 《 大典會通 》 等의 補完 體制를 追加하였으나 甲午更張 에 이르러 廢止될 때까지 《經國大典》을 公式的인 法制로서 維持하였다. [54]

朝鮮 中期 [ 編輯 ]

壬辰倭亂 初期 戰鬪를 描寫한 東來府殉節도

制度의 整備가 一段落 된 成宗 時期 朝鮮의 國王은 安定된 政局의 運營과 함께 强力한 王權을 發揮할 수 있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연산군 의 暴政은 節制되지 않는 專制君主의 王權에 對한 反感을 가져왔고 中宗反正 이 일어나면서 士林派 가 政治의 中心에 들어서게 되었다. [55] 以後 士林派는 在野의 學緣을 바탕으로 政治를 主導하게 되었다. 學派와 政治의 連繫는 後日 朋黨 形成의 重要한 原因이 된다. [56]

中宗反正 以後 政治를 主導한 士林派는 조광조 의 果敢한 改革이 挫折된 後 몇 次例의 士禍 를 겪으며 浮沈이 反復되었으나 結局 朝鮮의 政治 實權을 掌握하게 되었다. 士林의 政治主導는 反對的으로 王權의 制約을 의미하였고 朝廷의 公式的인 會議인 輪對에서 군약신강(君弱臣强)이란 表現이 登場하기도 하였다. [57] 그러나 朝鮮의 國王은 理論的으로 어떠한 制約도 받지 않는 絶對君主였기 때문에 스스로 節制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臣僚의 支持를 받고자 하였다. 함부로 權力을 휘둘렀을 境遇 언제든 反正이 일어나 廢位될 危險이 있었기 때문이다.

士林派가 政治를 主導하게 된 後 士林 內에서는 學派와 人脈에 따라 朋黨 이 形成되었다. 먼저 同人 西人 의 分裂이 있었고, 다시 北人 , 남인 , 老論 , 少論 의 思索政派가 形成되었다. 이들은 政治的 事案의 結果에 따라 政局을 主導하기도 하고 밀려나기도 하는 競爭的 關係였다. [56]

朝鮮 中期의 가장 큰 事件들 가운데 壬辰倭亂 丁卯胡亂 , 丙子胡亂 等의 戰爭이 있다. 朝鮮은 轉貸人 高麗 時期와 달리 比較的 安定的인 國際 關係가 持續되는 時期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國境의 자잘한 衝突이나 初期의 倭寇 侵入과 같은 所要가 아닌 큰 戰爭은 드물었다. 壬辰倭亂은 比較的 平穩하였던 朝鮮 社會를 크게 뒤흔든 戰爭으로 以後 朝鮮의 政治, 社會, 文化에 큰 變化를 가져왔다. [58] 壬辰倭亂 以後 國際 情勢 變動期에서 朝鮮의 政治는 다시 王權과 神權이 갈등하여 광해군 이 廢位되는 仁祖反正 이 일어나게 된다. [59]

後金 이 무너진 明나라를 代身하여 中國을 統治하게 된 淸나라 의 建國 亦是 朝鮮에 큰 影響을 주었다. 後金은 明나라와의 戰爭 以前에 後方인 朝鮮을 억누르고자 丁卯胡亂을 일으켰고 以後 淸나라로 이름을 바꾼 뒤 일어난 丙子胡亂에서 朝鮮은 丁丑하성 으로 請에 屈服하게 되었다. [60]

朝鮮 後期 [ 編輯 ]

江原道 旌善郡의 한 마을에 어떤 兩班이 살고 있었는데 그 兩班은 性品이 어질고 글 읽기를 매우 좋아했다. …… 그러나 그 兩班은 워낙 집이 가난해서 해마다 나라에서 管理하는 糧穀을 꾸어다 먹었는데 그렇게 여러 해를 지내다 보니 어느덧 官家에서 빌려 먹은 糧穀이 1000席이 다 되었다.

兩班傳 [61]

後期에 들어 朝鮮은 많은 變化를 맞았다. 戰後 復舊를 위해 發行되기 始作한 空名帖 等은 身分制의 區分을 흐리게 하였고 [62] 朝鮮 後期 地方의 兩班 相當數는 家勢가 기울어 一般 百姓과 다를 바 없는 沒落 兩班으로 殘飯(殘班)이라 불렸다. [63] 한便 常平通寶 가 本格的으로 流通되면서 商業 活動과 各種 産業이 發展하였고 比較的 財力있는 洋人들이 兩班으로 身分上昇을 꾀하여 17世紀 後半 地域에 따라 10 ~ 20 %의 比率을 보이던 兩班의 人口 構成比는 19世紀 初에 이르면 30 ~ 80 %까지 크게 增加한다. [64] 兩班은 各種 賦役과 軍役이 免除되었기 때문에 財力 있는 良人은 어떻게든 兩班으로 登錄되고자 하였다. 朝鮮 後期의 身分制 混亂 中에는 奴婢 出身 後孫이 免賤과 空名帖을 통해 兩班으로 登錄된 境遇도 있다. [65]

禮訟 論爭은 國王에게도 士大夫의 嘉禮(家禮)를 强制하여 國王 亦是 性理學的 禮法에 從屬된 存在라는 點을 確認하면서 臣僚들에 依한 官僚制가 鞏固하게 굳어졌다. [66] 肅宗 時期 朋黨은 典型的인 政治 活動의 形態로 굳었다. 肅宗은 各 政派와 때로 協力하고 때로는 牽制하며 政治를 運營하여야 하였다. 肅宗은 還國 을 통해 自身이 이러한 政治 狀況에서 主導權을 갖고자 하였다. [67] 張禧嬪 의 登場과 죽음은 이러한 政治 狀況과 密接한 關聯이 있었다. [68] 肅宗 卽位 時期 朝鮮의 朋黨은 漸次 老論 이 政治 運營에서 莫强한 影響力을 發揮하는 形態로 變化하여 갔고 이들의 影響力은 警鐘 時期 警鐘의 아우였던 연잉군을 前例에 없던 王世弟로 封하게 되면서 絶頂에 達했다.

正祖 時期 祝聖된 水原 華城

老論의 支持로 卽位한 英祖 는 지나치게 莫强해진 老論을 牽制하고자 蕩平策 을 提示하였다. [69] 後任인 正祖 思悼世子 의 죽음 以後 王世孫으로서 卽位하였고 政局은 碧波 詩派 로 나뉘어 있었다. 正祖는 王權이 보다 强化된 形態의 蕩平策人 峻論 蕩平 政策을 實施하여 旣存의 朋黨 政治는 이에 따라 再編되었다. [70] 한便 老論 內部에서는 淸나라와의 關係와 地方 兩班의 地位 等이 背景이 된 湖洛論爭 이 일어나 또 다른 葛藤 要素로 作用하였다. [71]

19世紀 勢道政治 가 들어서며 朋黨 政治는 終結되었다. 勢道政治는 正祖가 王權의 强化를 目的으로 始作하였으나 政治權力이 血緣을 통한 特定 家門에 集中되면서 많은 副作用을 낳았다. [72] 勢道政治 家門으로는 安東 金氏 [73] , 풍양 조氏 等이 있다. [74] 60餘年 間 持續된 勢道政治 時期 朝鮮은 안팍으로 많은 問題에 逢着하여 있었고 高宗 이 卽位하여 흥선大院君 이 實權을 잡은 뒤 革罷되었다. [75]

朝鮮 後期는 한便으로 여러 危機가 高調되던 時期이기도 하였다. 對外的으로는 異樣船 이 出沒하기 始作하면서 西歐 帝國主義 의 影響力이 朝鮮에 까지 미치기 始作하였고 [76] 對內的으로는 全地球的인 小氷期 의 影響으로 更新大飢饉 이나 을병대기근 과 같은 飢饉을 겪었다. [77] 여기에 朝鮮의 制度에 따른 矛盾인 三政의 紊亂 이 더해지면서 壬戌農民蜂起 와 같은 民亂 이 持續的으로 發生하였다. [78]

朝鮮의 內部敵 問題를 解決하려는 試圖는 實學 의 硏究, 西學 의 受容, 東學 의 樹立 等으로 展開되었으나 結局 解法을 찾지 못하다가 東學 農民 革命 으로 表出되었으나 外勢가 介入된 鎭壓으로 失敗하였다. [79] 外部的인 問題인 西洋의 接近에 對해서도 斥和碑 를 세우며 强勁하게 拒否한 興宣大院君의 斥和論과 새로운 文物의 受容을 主張한 開化派 의 葛藤은 自主的인 解決策을 찾지 못하고 不平等條約인 江華島條約 을 통해 强壓的으로 展開되면서 以後 衛正斥邪派 의 登場과 外勢에 對한 無條件的인 拒否가 일어나는 背景이 되었다. [80]

안팍의 어려움이 쌓인 가운데 1897年 高宗의 稱帝建元 으로 朝鮮의 歷史는 大韓帝國 으로 승계되었다. [3]

政治 [ 編輯 ]

朝鮮의 政治 性理學 을 理念으로 하는 中央集權 敵人 官僚制 로 運營되었다. [81] 朝鮮 國王 은 理論的으로 專制 君主 였으며 王權과 臣僚의 權限이 緊張과 妥協 속에서 調整되어 國政에 反映되었다. [82] 朝鮮의 政治 體系와 構造는 《 經國大典 》으로 集大成되어 官僚 體制가 規定되었고 [42] 다양한 層位의 論爭과 葛藤 속에 이를 實際的으로 適用하였다. 朝鮮 前期의 主要 葛藤은 國王과 臣僚들 사이의 權力 形成을 두고 일어났고 中期 以後 士林派 의 登場은 朋黨 政治 의 發展으로 이어졌으며 後期의 湖洛論爭 과 같이 性理學의 理解에 對한 學問的 差異에서부터 朋黨의 人脈과 實際 政治的 爭點이 뒤섞인 獨特한 政治 地形을 만들어내었다. [83]

王權과 新券 [ 編輯 ]

英祖 의 御眞

朝鮮은 理論的으로 國王이 絶對的 主權을 지녔다는 點에서 專制君主制 의 面貌를 보이며 臣僚의 影響力 또한 크게 作用하는 官僚制 社會였다. [84] 兩班 을 基盤으로 한 士大夫 官僚制는 國王과 臣僚들의 統治 機構를 통하여 政治的 發言權을 가질 수 있었고 그 體制는 《經國大典》에 依해 規定되었다. [85] 國王이 絶對的인 前提 君主로 尊重되었으며 臣僚를 掌握하지 못하면 反正 이 일어나거나 各種 逆謀와 叛亂이 發行하였기 때문에 國王은 스스로를 節制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臣僚와 妥協하여야 하였다. 朝鮮은 建國부터 新進士大夫 에 依해 主導되어 王權에 對한 牽制와 宰相權의 主導가 두드러진 가운데 이루어졌다. [19] :19-20 朝鮮의 國王은 여러 次例 王權의 强化를 圖謀하였고 臣僚들과 適當한 線에서 妥協하기도 하였다. 王子의 亂 은 正宗을 앞세운 鄭道傳의 宰相權 于先 思想과 王의 直接 統治를 이루고자 한 太宗의 衝突이었으며 [19] :20 以後 世祖의 簒位 亦是 비슷한 衝突의 性格이 있다. [86] 朝鮮은 前期와 中期, 後期에 따라 各各의 政治 爭點과 地形이 變化를 겪었으나 王權과 神權의 緊張과 妥協은 持續的인 政治의 主要 原動力 가운데 하나였다.

官僚制 [ 編輯 ]

朝鮮의 政治는 官僚에 依해 運營되었고 이러한 官僚의 選拔은 主로 過去 制度 를 통해 이루어졌다. [87] 過去는 文科 [88] , 武科 [89] , 그리고 各種 技術職을 뽑는 雜科 [90] 가 있었다. 高麗時代부터 이어져 오던 僧侶 選拔 試驗인 勝과 는 朝鮮 初까지 維持되었으나 崇儒抑佛政策 으로 廢止되었다. [91]

官僚의 選拔에는 過去 制度 以外에도 有力한 人物이 推薦하는 薦擧, 功臣이나 王族의 子孫에게 官職을 하사하는 淫書 等의 方法이 있었지만 過去를 통한 選拔이 가장 普遍的인 方式이었다. 朝鮮의 文人들은 淫書 制度에 對해 否定的인 認識을 보였으나 國王과 高位 官僚 모두 自身들의 特權을 維持하기 위한 方便으로 삼았다. [92]

登用된 官吏들은 職位에 따라 從9品에서 正1品까지의 18段階에 이르는 品階 가 주어졌다. [93] 王族이나 功臣 等에게는 爵位가 授與되는 封爵 이 있어 男性 王族의 境遇 軍, 大君 等의 爵位가 주어졌고 女性 王族은 公主, 翁主 等의 爵位가 주어졌다. 王妃의 아버지에게는 府院君의 爵位가 주어졌다. 功臣에게도 軍의 爵位가 주어졌으나 世襲되지는 않아 高麗 時代의 貴族 身分과는 性格이 달랐다. [94]

한便, 朝鮮의 官僚制 第一 下部에는 衙前 을 비롯한 여러 下級 官僚들이 있었다. 이들 相當數는 給料 없이 勤務하였고 過去 試驗의 應試가 制限되어 中인 階級을 形成하였다. [95] 朝鮮은 强力한 中央集權制의 實施를 위해 地方 鄕里의 經濟的 地位를 抑壓하고자 하였다. 國家의 給料가 없는 鄕里는 自身 所有의 土地에서 나오는 所出과 함께 邑, 里 單位로 賦課되는 稅金에 自身의 몫인 邑徵分(邑徵分)을 收取하여 經濟的 基盤으로 삼았다. 鄕里의 이러한 追加的인 收取는 規定에 없는 任意的인 行爲였지만 慣行으로서 容納되었다. [96] 朝鮮 後期에 이르러 鄕里의 이러한 收奪은 民亂의 原因이 되기도 하였다. [97]

朋黨政治 [ 編輯 ]

朝鮮 中期 以後 士林派 가 政治의 中心에 들어서며 朋黨 이 形成되며 朋黨 政治 가 發達하였다. 初期에는 이른바 勳舊派 와 競爭하였던 士林派는 몇 次例의 士禍 를 겪으며 危機를 맞기도 하였으나 結局 勳舊派를 退出시키고 朝鮮 政治의 核心 勢力으로 登場하였다. 朋黨은 同人 西人 의 分化로 觸發되어 以後 남인 , 北人 , 老論 , 少論 等이로 分化되었고 英祖 時期 思悼世子의 죽음을 두고 碧波 詩派 가 생기기도 하였다. [98] 同人과 西人이 갈라선 朋黨의 發生은 朝廷의 要職을 둘러싼 人事權의 掌握이 表面的 理由였으나, 兩班 階層의 人口 增加에 비해 官職의 數가 固定되어 있는 現實과 各種 政策의 施行에서의 對立 等이 背景에 있었다. [56] 한便 이러한 朋黨 政治의 發生에는 持續的인 王權의 弱化가 하나의 原因이 되었다. 反正을 통해 推戴된 王의 境遇 反正功臣의 影響力을 無視하기 어려웠고 壬辰倭亂과 丁卯胡亂, 丙子胡亂을 거치면서는 民心의 離叛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臣僚와 妥協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

統治 機構 [ 編輯 ]

朝鮮의 統治 機構는 國王을 頂點으로 地域의 鄕里에 이르기까지 촘촘하게 構成되어 있었다. 統治機構는 서울과 地方을 나누어 京官職과 外官職으로 區分할 수 있고 [99] [100] 隨行 任務에 따라 國王의 直轄 部署, 議政府 管轄 部署, 地方 行政 部署로 區分할 수 있다.

                                     
    國王    
   
  宗親府     競演  
돈녕부    
忠勳府  
儀賓府   義禁府     承政院  
中樞府    
     

地方 行政 組織

兵營 兵馬節度使
水營 水軍節度使
司憲府     司諫院  
   
   
內禁衛     五衛都摠府  
兼司僕    
   
 
  議政府    
   
             
李朝   好調   禮曹   兵曹   刑曹   共助

? 忠翊府
? 內侍府
? 尙瑞院
? 宗簿寺
? 司饔院
? 內需司
? 掖庭署

? 內資寺
? 內贍寺
? 司䆃寺
? 司贍寺
? 軍資監
? 濟用監
? 司宰監
? 豐儲倉
? 廣興倉
? 典艦司
? 平市署
? 司醞署
? 義盈庫
? 長興庫
? 司圃署
? 養賢庫
? 五部

? 弘文館
? 藝文館
? 成均館
? 春秋館
? 承文院
? 通禮院
? 奉常寺
? 校書館
? 內醫院
? 禮賓寺
? 掌樂院
? 觀象監
? 典醫監
? 司譯院
? 世子侍講院
? 종학
? 昭格署
? 宗廟署
? 辭職書
? 빙고
? 典牲署
? 司畜署
? 惠民署
? 圖畫署
? 活人署
? 歸厚署
? 私學
? 文昭殿
? 延恩殿
? 京畿 능전

? 五位
? 訓鍊院
? 司僕寺
? 軍器寺
? 典設司
? 世子翊衛司
? 世孫衛從司

? 掌禮院
? 典獄署

? 尙衣院
? 繕工監
? 修城禁火司
? 典涓司
? 掌苑署
? 조지서
? 와서

地方 行政 機構 [ 編輯 ]

朝鮮은 全國을 八道 로 나누어 統治하였다. 서울의 周邊은 東洋의 오랜 傳統에 따라 京畿道 로 불렀고, 다른 行政 區域은 그 度에서 가장 代表的인 두 都市의 이름의 머리글字를 合하여 만들었다. 例를 들어 慶尙道는 慶州 尙州 의 앞글字를 붙여 부른 이름이다. 朝鮮 八道는 아래와 같다.

朝鮮 八道
이름 廳舍 位置 備考
京畿道 競技監營 敦義門 밖에 있다가 水原 으로 移轉
平安道 平壤
咸鏡道 咸興 咸吉道에서 名稱 變更
黃海道 海州
江原道 原州
忠淸道 忠州 監營 以前에 따라 忠功度, 공청도 等으로 名稱을 變更한 履歷 있음
全羅道 全州
慶尙道 尙州

道 밑으로는 部, 郡, 목, 現 等의 下位 地方 行政 區域을 두었다. 이 가운데 부는 特別히 重要한 據點으로 道의 首長인 觀察使 와 같은 品階 人 種2品의 府尹을 派遣하였다. 各 下位 地方 行政 區域의 守令은 모두 中央에서 派遣하여 中央集權的 統治體系를 이루었다. [101] 《經國大典》은 守令의 任期를 5年으로 規定하고 있으나 實際로는 그 보다 交替 時期가 더 짧았다. [102] 地方 行政 區域 守令의 品階는 아래와 같다. [101]

地方 行政官의 品階
行政區域 官吏의 名稱 品階
觀察使 種2品
府尹 種2品
大都護府 府使 情3品
牧師 情3品
都護府 府使 種3品
郡守 種4品
縣令 種5品
縣監 種6品

軍事 [ 編輯 ]

1780年 무렵 製作된 全羅右水營의 《右水營前震度牒》에 收錄된 鶴翼陣度

朝鮮은 原則的으로 15歲 以上 60歲 未滿의 모든 男性에게 兵役의 義務가 있었지만 實際 運營은 매우 複雜하였다. 軍役을 實際로 擔當하는 정인과 이들의 軍役에 必要한 經費를 負擔하는 보인의 編成은 朝鮮의 獨自的인 兵力 運營方式이었다. [103]

兵力 [ 編輯 ]

朝鮮의 良人 은 原則的으로 모두 兵役의 義務가 있었다. 軍役을 비롯한 各種 賦役은 萬60歲에 終了되어 그 以上의 나이든 사람은 老人 으로 여겼다. [104] 軍役을 지는 사람들은 다시 정인과 保人을 區分하였다. 實際 軍役을 치르는 사람들은 정인으로서 番을 돌아가며 服務하여야 하였고 이들의 服務 費用은 保人을 두어 負擔하게 하였다. [105] 朝鮮의 兵役이 이러한 模樣을 띄게 된 것은 高麗 時代 있었던 軍逆轉 을 廢止하였기 때문이다. 高麗 時代에는 軍逆轉의 産物로서 兵力 維持 費用을 充當하였으나 軍逆轉이 없던 朝鮮 前期에는 이를 民間의 負擔으로 轉換하였다. [106] 朝鮮 後期 均役法 의 施行 以後 軍逆轉이 다시 設置되었으나 常備軍의 增加와 國防 費用이 늘어나자 財政은 늘 不足하였다. [107]

朝鮮의 兵力은 基本的으로 番을 돌며 勤務하는 番喪制로 運營되었다. [106] 番의 體系는 軍宗마다 달랐는데 陸軍의 境遇 8 個의 組로 나뉘어 한 番에 2 個月을 勤務하는 8番 2삭上體(八番二朔相遞)였고 水軍 은 2番 1삭上體(二番一朔相遞)로 1年 中 6 個月을 勤務하여야 하였다. 이때문에 水軍이 되는 것을 忌避하여 兵役의 義務가 있는 良人 中에도 勢力이 없는 사람들이 主로 水軍이 되었다. [108] 兵役은 무척 고된 賦役이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忌避하고자 하였다. 財力이 있는 良人은 代價를 支拂하고 自身을 代身하여 軍役을 설 對立(代立)을 세웠으며 結局 國家도 實際 軍役 代身 軍浦 를 納付하는 榜군水泡(放軍收布)를 容認하게 되었다. [109] 軍役은 元來 兩班 에게도 附加되었으나 漸次 特權化 되면서 兩班은 軍役을 지지 않게 되었다. 兩班은 《經國大典》의 學者 育成 措置였던 成均館 鄕校 의 儒生에 對한 軍役 免除 措置를 利用하였고, 軍捕虜 無關 名譽職을 얻어 軍役을 代身하기도 하였다. 閑良(閑良)은 元來 軍役을 지지 않는 사람을 뜻하였던 말이다. [110]

番喪制로 運營되는 兵力은 五位 五軍營 과 같은 中央軍의 境遇 全國에서 上番하는 入番君을 받아 運營되었고 [111] 地方의 兵營과 水營은 有進群(留鎭軍)을 받아 運營하였다. [112] 한便 中央軍은 常時的인 兵力이 必要하여 繼續하여 勤務하는 職業 軍人인 長番軍(長番軍)을 運營하였다. [113]

兵力 維持를 위한 費用은 보인이나 防水軍布를 통해 걷는 軍浦 等으로 充當하였다. 朝鮮 後期 中央軍인 五軍營 의 運營을 위해 三手米 를 別途로 걷었다. [114]

編制 [ 編輯 ]

朝鮮軍의 基礎 編制는 超(哨)로 大略 100 餘 名의 人員으로 構成되어 있었고 初의 隸下에는 大(隊)와 오(伍)가 있었다. 가장 작은 規模의 集團은 오로 5 名의 兵卒로 이루어졌고 6 個의 오가 모인 代는 30 名 規模였다. 3 個의 代가 모여 하나의 秒를 이룬다. 초의 指揮官인 哨官은 種9品의 武官이었고 [115] 隸下의 代와 吳의 腸은 管理가 아니라 一般 兵士에서 가려 뽑은 者들이었다. [116]

5個의 초가 모여 1個의 社(司)를 이루었고 社의 指揮官은 種4品의 把摠 이었다. [117] 다시 4 個의 社가 하나의 軍營 을 이루었다. 軍營의 指揮官인 令狀(營將)은 情3품이었다. [118] 朝鮮 前期의 鎭官制 에서는 主要據點에 陣을 마련하고 陣營을 設置하였기 때문에 鎭營將(鎭營將)이라고도 하였다. 朝鮮 水軍 의 境遇 水營 을 따로 設置하였고 指揮官은 水軍節度使 였다. [119]

朝鮮은 初期에 地方의 主要 據點에 陣을 設置하고 地域을 防禦하는 鎭官制를 運營하면서 큰 外敵의 侵入이 있을 때는 各 陣들이 協力하는 制勝方略 을 戰略으로 삼았다. [14] 그러나 壬辰倭亂 을 겪으면서 一時에 侵攻해 오는 外敵을 防禦하는데 限界를 겪었고 以後 《 紀效新書 》에 따른 三手兵 의 育成과 中央軍의 强化를 推進하였다. [120] 朝鮮 後期 中央軍으로는 訓鍊都監 을 비롯한 五軍營 을 두었고 各 誌에는 束伍軍 을 비롯한 地方軍을 두어 防禦하게 하였다.

經濟 [ 編輯 ]

常平通寶 는 朝鮮의 代表的 貨幣이다.

朝鮮의 經濟 農業 中心의 自給的 地域 經濟를 基盤으로 한 가운데 個人 間의 互惠를 바탕으爐韓 膳物과 扶助, 國家의 租稅 受取와 資源의 公的 分配와 함께 市場에서 이루어지는 商業 經濟가 婚材되어 있었다. [19] :175-192 이러한 狀況은 以前 王朝인 高麗 가 國際 貿易을 비롯한 商業 活動에 積極的이었다는 點과 比較된다. [121]

經濟 活動은 크게 보아 生産 消費 , 그리고 둘 사이를 連結하는 交換·流通을 擔當하는 商業 으로 區分지어 생각할 수 있다. 朝鮮은 中期 以前까지 生産은 農業을 中心으로 한 自給 體系를 中心으로 進行되었고 消費는 많은 部分이 相互 互惠에 依存하였다. 유희춘 의 《 미암집 》에는 별다른 對價 없이 膳物로서 받은 物品이 總 2,855 回 記錄되어 있다. [19] :175-176 朝鮮의 互惠 經濟는 電氣에는 個人間의 親分에 依한 膳物의 形態로 進行되다가 後期로 들면 鄕約 , 두레 等의 集團에 依한 共同 扶助의 性格이 强化되었다. [122] 이러한 慣行은 오늘날에도 結婚이나 葬禮에 賻儀金을 내는 形態로 韓國 文化 에 남아있다. [19] :176

朝鮮은 農業 中心 國家로서 土地는 가장 큰 資産이자 經濟 基盤이었다. 朝鮮의 國土는 理論的으로 國王 이 最終的인 主人으로서 沒收와 配分 等의 處分을 내릴 수 있었지만 高麗 末 공민왕 時期의 科田法으로 私有地가 再分配 된 以後 [121] 朝鮮 初까지 賣買價 禁止되던 土地는 世宗 臺에 이르러 去來가 認定되었다. 이는 當時 이미 定着된 土地 去來 慣行을 國家가 認定한 것이다. 耕作地의 主人인 前週(田主)는 自身의 土地를 國家의 아무런 規制 없이 賣却하거나 贈與, 또는 相續할 수 있었다. [123]

朝鮮의 工業은 크게 보아 官廳에서 自身이 必要한 物品을 製造하며 餘裕分을 市場에 流通하는 境遇와 專門的인 匠人이 製作하여 販賣하는 境遇로 나눌 수 있다. 朝鮮은 各種 物品을 製造하는 工場(工匠)을 《工場안》(工匠案)에 登錄시켜 官營 手工業 體制로 吸收하였다. 그러나 中期 以後 官廳에 登錄되지 않은 匠人의 生産과 販賣를 默認함으로써 官營 手工業은 漸次 民營 手工業 體制로 轉換되었다. [124]

朝鮮은 商業 活動에 對한 規制가 嚴格하였다. 國家가 指定한 品目은 六矣廛 等의 市廛을 통해서만 供給되었고 사사로이 장사를 하는 亂廛은 禁亂廛權 으로 禁止되었다. 禁亂廛權은 朝鮮 後期까지 維持되다가 正祖 時期 신해通功 으로 廢止되었다. [125] 朝鮮 中期까지 國際 貿易은 中國과의 去來는 使臣 行次와 함께 同行하는 公貿易이 主를 이루고 日本과의 去來는 倭館 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이러한 構造에서는 譯官 과 같은 管理가 自身의 職位를 利用하여 莫大한 富를 거머쥘 수 있었다. [126] 그러나 壬辰倭亂 以後 日本과의 公式的 貿易 去來는 크게 減少하였고 中國과는 公貿易 以外에도 事務役이 盛行하면서 輕傷 , 松商 , 萬象 과 같은 商人 組織이 出現한다. [127]

朝鮮은 商業의 比較的 늦은 發達과 現物貨幣 使用의 日常化로 주화 亦是 後期에 들어서야 一般化 되었다. 朝鮮 中期까지 貨幣 發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 주화를 製作할 구리가 不足한 理由가 컸다. 이러한 問題는 日本에서 大規模 구리 鑛山이 開發되어 朝鮮의 九里 輸入이 원활해진 뒤에야 解決되었다. [128] 肅宗 以後 發行된 常平通寶 는 朝鮮의 代表的 貨幣가 되었다. [129]

交通 [ 編輯 ]

朝鮮은 大規模 運送을 水雲 에 依支하였고 主要 運送手段은 漕運船 이었다. 陸路는 9-10 個의 幹線 道路가 있었고 驛站 을 두어 國家의 通信에 使用하였다.

道路 [ 編輯 ]

朝鮮의 道路網

增補文獻備考 》에는 9個의 幹線 道路가, 《 大東地志 》에는 10個의 幹線 道路가 記錄되어 있다. [130]

朝鮮의 幹線 道路
이름 時點 終點 主要 經路 備考
第1로
燕行路
敦義門 義州 漢陽 敦義門- 洪濟院 - 高陽 - 坡州 - 長湍 - 開城 - 衿川 - 평산 -차령-금교-서흥-日數-鳳山-動線令-舍人巖- 黃州 -具現-中華-大同江- 平壤 -巡按-숙천- 按酒 -가산-定州-곽산-先天-鐵山-용주- 義州 中國과의 交通路
第2로
關北로
興仁之門 咸鏡北道 서수라 漢陽-다락원(樓院)-만세교-金化-金星-淮陽-鐵嶺-安邊-元山-文川-高原-永興-定評-咸興-北靑-理性(利城)-마운령-摩天嶺-吉州-明川-京城-富寧-霧散-會寧-終聲-穩城-慶源-慶興-서수라
第3로 興仁之門 江原道 評해 漢城-망우리-평구역-양근-地平-原州-안흥驛-芳林驛-珍富驛-횡계역-大關嶺-江陵-三陟-蔚珍-평해
第4로 崇禮門 釜山 漢陽-漢江-판교-龍仁-양지-광암-달내(達川)-忠州-鳥嶺-聞慶-유곡역(幽谷驛)-낙원역(洛原驛)-낙동眞(洛東津)-大邱-淸道-密陽-荒山驛-梁山-東萊-釜山
第5로 崇禮門 統營 漢陽-漢江-판교-龍仁-양지-광암-달내(達川)-忠州-鳥嶺-聞慶-유곡역-檻倉-尙州-비천-星州-玄風-上布陣(上浦津)-칠원-함안-鎭海-固城-統營
第6로 崇禮門 統營 漢陽-동작나루-果川-彌勒堂-유천(柳川)-청호역(菁好驛, 水原)-진위-성환驛(成歡驛)-天安-차령-公州-魯省-恩津-여산-三禮-全州-오수역(獒樹驛)-南原-雲峯-涵養-晉州-泗川-固城-統營
第7로 崇禮門 濟州 漢陽-第6로-삼례역-금구-태인-정읍-장성-나주-영암-해남-관두량-바닷길 (海路)-濟州
第8로 崇禮門 保寧
忠淸水營
漢陽-第6로-소사-평택-요로원(要路院)-곡교천(曲橋川)-신창-신례원(新禮院)-충청 水營
第9로 敦義門 江華島 漢陽-楊花渡-陽川-金浦-통진-江華

驛站 [ 編輯 ]

馬牌

造船은 主要 要地에 驛站 을 두어 國家에 必要한 陸路 交通 施設로 利用하였다. 驛站은 王命과 公文書의 傳達, 使臣 往來에 따른 迎送과 接待, 公共 物資의 運送, 通行人의 糾察 等을 擔當하였다. 高麗 時代부터 이어져온 交通 施設로 朝鮮 時代에는 世祖 機器 體制가 整備되어 41 力道에 543 속驛이 存在하였다. 驛站의 管理를 위해 軍役을 代身하는 驛民을 두었고 歷史를 두어 事務를 보게 하였다. [131] 公務를 위해 움직이는 管理는 馬牌 를 지니고 驛站에서 말의 支給과 交換을 要請할 수 있었다. [132]

水雲 [ 編輯 ]

韓半島는 山地가 많아 近代 以前 時期 圓滑한 陸上 交通을 確保하기가 어려웠다. 特히 많은 量의 穀物을 한 番에 運送하는 것은 水雲 에 依支하여야 하였다. 朝鮮은 全國의 交通 要地에 漕倉 을 設置하여 隣近의 稅穀을 貯藏하고 漢陽까지는 漕運船 을 利用하여 運送하였다. 漕運船이 利用한 數로는 크게 보아 西海岸을 利用하는 해로와 漢江을 利用하는 水路가 있었다. 慶尙道, 全羅道의 稅穀은 洛東江과 榮山江 等을 利用하여 바다로 나온 뒤 西海岸을 따라 北上하고 다시 漢江 河口를 利用하여 漢陽에 닿았다. 한便 原州, 忠州 等의 內陸地는 漢江을 利用한 水雲이 이루어졌다. [133]

社會 [ 編輯 ]

朝鮮은 王族 , 良人 , 賤民 의 區分이 있는 身分制 社會였다. 朝鮮의 公式的 身分制 良人 賤民 灣을 區分하는 良賤制 였으나 [31] 實際로는 兩班 , 中인 , 良人 , 賤民 等으로 細分化 되어 있었다. [32] 朝鮮의 身分制는 細部 身分에 對한 明確한 區分도 없고 各自가 맡은 職業인 直譯이 固定되어 있던 것도 아니란 點에서 이웃한 日本 의 身分制와 달랐고, 實際로 별다른 身分의 區分이 없던 中國의 制度와도 달랐다. 朝鮮의 身分制는 明示的으로 規定되지는 않았으나 慣習的으로 作動하는 많은 制度와 連結되어 있었다. [134]

兩班은 世代를 거듭하여 官僚를 擔當함으로써 스스로 特權化된 階層으로 婚姻 , 學緣 等을 基盤으로 다른 階層과 區分되는 社會 階級 을 形成하였다. [135] 中人은 地方의 鄕吏 를 비롯하여 議員, 譯官 等의 技術職에 從事하는 階層으로 이들의 身分 上昇은 매우 制限的이었다. [136] 人口의 大多數를 차지하던 洋人은 主로 農事에 從事하였으며 各種 稅金의 徵收, 國家 勞役의 動員, 兵役의 負擔 等을 떠안았다. [137] 朝鮮의 賤民은 轉貸人 高麗 時期의 鄕, 소, 部曲 等의 境遇와 달리 地域 全體가 賤民으로 指定되는 境遇는 없었으나 如前히 社會의 一部를 이루고 있었다. 官廳에 所屬된 官奴 나 個人의 種으로 부려진 私奴婢와 같은 奴婢 , 白丁 과 같은 특수한 職業을 지닌 사람, 男사당 과 같은 在人(才人) 等이 賤民에 屬했다. [138] 이러한 身分의 區分은 甲午更張 을 契機로 公式的으로 革罷되었으나 [139] 社會의 差別은 20世紀 初까지도 남아있었다. [140]

結婚과 家族의 構成에서 一夫一妻制 가 原則이었으나 財力이 있는 男性의 境遇 을 두는 境遇가 많았다. 結婚 은 個人 間의 結合이라기 보다 家門 의 結合으로 理解되었기 때문에 公式的인 아내 는 오직 한 名만이 認定되었고 重婚할 境遇 處罰받았지만, 妾의 境遇에 對해서는 별다른 制約이 없었다. [141] 兩班의 境遇 結婚은 人生의 主要 通過儀禮인 冠婚喪祭 가운데 하나였고 家門이 決定한 바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妾을 들이는 것은 男性이 主導權을 行使하였다. 朝鮮 初期에는 本妻가 새로 들인 賤民 出身의 妾을 殺害하는 等 兩班 女性의 抵抗도 相當하였으나 中期인 中宗 時期 國家의 强力한 介入으로 이러한 行爲가 處罰되면서 妻의 反撥은 制限的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142]

“쇼人이 坪ㅅㆎㅇ 셜운 바ㄴㆍㄴ, 大監 졍긔로 堂堂ㅎㆍ온 남ㅈㆎ 되여ㅅㆍ오니 부ㅅㆎㅇ모휵지은이 깁ㅅㆍㅂ거ㄴㆍㄹ, 그 父親을 父親이라 못ㅎㆍ옵고, 그 兄을 兄이라 못ㅎㆍ오니 엇지 社ㄹㆍㅁ이라 ㅎㆍ오리잇가.”

《洪吉童傳》

妾은 良人을 맞이하는 境遇도 있었지만 官妓 와 같은 賤民을 맞이하고 免賤시키는 境遇도 있었다. 朝鮮은 從母法 으로 어머니의 身分이 子息에게 代물림 되었기 때문에 賤民 女性에게서 태어난 子息은 賤民으로 登錄되었다. 妻에게서 태어난 赤字와 妾에게서 태어난 庶子 사이에는 差別이 存在하였다. [143] 妾이 賤民일 境遇 子息도 賤民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144] 境遇도 많았다. 嫡庶差別 은 朝鮮時代 兩班 社會의 痼疾的인 問題로 弊端이 끊임없이 擧論되었지만 結局 없어지지 않았다. [145]

朝鮮은 중기를 넘기면서 漸漸 더 家父長制 모습을 보였다. 朝鮮 初期 兩班 사이에서 相續과 祭祀의 奉行에는 男女 差別이 없었으나 어느 時點에서 女性이 排除되었다. 朝鮮 後期에 이르면 結婚한 女性은 "出嫁外人"으로 取扱되었다. [146] 性理學的 倫理의 强調는 女性이 男便과 死別한 以後에도 再婚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147] , 甚至於 男便을 따라 죽는 巡査(殉死)를 助長하는 雰圍氣마저 있었다. [148] 그러나 이러한 嚴格한 家父長制的 家族 構成은 地域마다 偏差가 있었으며 兩班이 아닌 사람들은 보다 離婚이나 再婚이 自由路機 때문에 朝鮮 全體에 걸쳐 一律的으로 施行되는 强力한 制度는 아니었다는 主張이 있다. [149]

文化 [ 編輯 ]

正月大보름 에 먹는 五穀밥과 나물, 부럼

文化 는 한 社會의 生活 樣式 全般을 일컫는 槪念으로 [150] 朝鮮 亦是 衣食住 를 비롯한 社會 여러 分野에서 獨特한 文化를 形成하였다. 朝鮮의 文化 가운데 相當數는 오늘날 韓國 文化 의 바탕이 되었다. [151] 韓半島를 비롯한 中國, 日本을 包含한 東아시아는 地理的으로 이웃하고 있고 三國時代 以來로 繼續하여 서로 交流하여 相當한 文化的 類似性을 보이면서도 各自 獨自的인 發展을 통한 獨特한 文化를 이루었다. [152]

오늘날 韓服 의 모습은 朝鮮 後期에 定型化 된 것이다. [153] 朝鮮의 衣服은 철릭 의 境遇와 같이 같은 形態의 옷이라도 時期에 따라 차츰 다른 모습을 보였다. [154] 韓食 의 境遇 보다 다양한 要素들의 混合과 發展을 보인다. 朝鮮 中期 以後 고추 와 같은 外來 香辛料가 普及되면서 김치 亦是 큰 變化를 겪게 되었다. [155] 傳統的인 住居 空間인 韓屋 은 地域에 따라 環境에 適應하여 發展하였다. 추운 겨울이 긴 中部 및 北部의 韓屋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四方으로 집을 짓는 閉鎖的인 모습을 보이고 더운 여름이 긴 南部의 韓屋은 日子(一字) 模樣의 開放的인 構造에 너른 마루를 지녔다. [156]

社會的 關係의 變化나 經濟의 變化 亦是 文化의 變化를 가져왔다. 詩를 짓고 文集을 만드는 일은 朝鮮 初期 및 中期까지 主로 兩班의 文化였지만, 後期에 들면 良民들이나 賤民들도 文學 活動을 하게 되었다. 書堂 이 一般化되면서 庶民들도 敎育을 받을 수 있는 機會가 擴散되었고, 한글 小說 等이 널리 流行하면서 讀者層도 늘었기 때문이다. 탈춤 , 판소리 와 같은 새로운 文化는 庶民들과 密接한 關係 속에서 發展하여 兩班들의 것과는 다른 庶民들의 바램을 담고 있었다. [157]

朝鮮은 各種 節氣 名節 에 따른 歲時風俗 을 지니고 있었다. 特히 설날 , 正月大보름 , 韓食 , 端午 , 秋夕 , 同志 等의 節氣에 여러 가지 놀이를 즐겼다. 이 가운데 몇몇은 오늘날에도 如前히 韓國人 의 主要 風俗으로 남아있다. [158]

年表 [ 編輯 ]

朝鮮 時代의 代表的인 事件에 對한 年表는 아래와 같다.

朝鮮時代 年表
國王 鳶島 事件
太祖 1392年 建國
1394年 漢陽 遷都
1398年 第1次 王子의 亂
定宗 1400年 第2次 王子의 亂
世宗 1446年 訓民正音 盤浦
世祖 1455年 世祖贊尉
成宗 1485年 經國大典 》 完成
연산군 1498年 戊午士禍
中宗 1506年 中宗反正
1519年 己卯士禍
明宗 1555年 乙卯倭變
1559年 임꺽정 出沒
宣祖 1583年 이탕개의 난
1592年 壬辰倭亂 勃發
1594年 訓鍊都監 設置
1597年 丁酉再亂 勃發
광해군 1608年 昌德宮 竣工
1617年 仁穆大妃 廢妃
1619年 강홍립 淸에 投降
人組 1623年 仁祖反正
1624年 李适의 亂
1627年 丁卯胡亂
1636年 丙子胡亂
顯宗 1659年 己亥 禮訟
1674年 甲寅禮訟
肅宗 1680年 庚申換局
1689年 己巳換局
1694年 甲戌換局
1712年 白頭山 定界碑 세움
英祖 1727年 丁未換局
1728年 李麟佐의 亂
1736年 續大典 》 刊行
1762年 무고의 玉
1772年 蕩平策 實施
正祖 1776年 奎章閣 設置
1780年 홍국영 逐出
1791年 辛亥迫害 , 신해通功
順調 1811年 홍경래 의 난
憲宗 1846年 프랑스 세실除毒 艦隊가 國書 傳達
哲宗 1860年 東學 誕生
1862年 壬戌農民蜂起
高宗 1866年 丙寅迫害
1866年 제너럴 셔먼號 事件
1867年 景福宮 再建
1871年 辛未洋擾
1876年 江華島 條約
1882年 壬午軍亂
1884年 甲申政變
1894年 東學 農民 革命 , 甲午更張
1895年 乙未事變
1897年 稱帝建元

各州 [ 編輯 ]

內容主

  1. 1395年 까지는 漢陽 이라고 불렀다.
  2. 1895年 1月 12日부터 1897年 10月 12日까지 國王 稱號 代身 大君主 라는 稱號를 使用하였다.
  3. 1592年 6月부터 1593年 11月까지는 최흥원 이 領議政이었다.
  4. 數次例 免職 및 罷職, 辭退가 反復되었다.
  5. 文魚

參照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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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省錄 (日省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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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mmoners in Early Yi Dynasty Civil Examinations(Choe Yong―ho,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33―4, 1974)

The Reform Efforts and Ideas of Pak Yong―hyo, 1894∼1895(Lew Young―Ick)

  • Korean pation in Government in Late 19th Century Korea; The Contribution of the Independence Club, 1896∼1898(Vipan Chandra, Ph.D.dissertation, Havard University, 1977)
  • Fukuzawa Yukichi on Korea(Pak SeongRae, Journal of 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 45, 1977)

Korean―Japanese Politics behind the Kobo―Ulmi Reform Movement, 1894∼1896(Y.I. Lew, The Journal of Korean Studies, 1981)

  • The Abacus and the Sword-The Japanese Penetration of Korea, 1895∼1910-(Berkerley, Los Angeles and London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5)
  • 春秋館 官員들 (1413). 《 太祖實錄 》.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朝鮮 兩班社會의 成立, 經濟體制의 解弛"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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