性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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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徹
性徹
出生 1912年 4月 6日 ( 1912-04-06 )
日帝 强占期 慶尙南道 山淸郡
入寂 1993年 11月 4日 ( 1993-11-04 ) (81歲)
大韓民國 慶尙南道 陜川郡 海印寺
國籍 大韓民國
宗派 曹溪宗

性徹 (性徹, 1912年 4月 6日 ( 陰曆 2月 19日 ) ~ 1993年 11月 4日 )은 大韓民國 의 스님이다. 號는 퇴옹(退翁)이고 俗名(俗名)은 이영주 (李英柱)이다. 近·현대 大韓民國 佛敎史에 있어 선(禪)과 敎(敎)를 아우르는 代表的인 큰스님이다. [1] 1912年 日帝 强占期 朝鮮 慶尙南道 山淸 出生이며, 1993年 11月 4日 陜川 海印寺 堆雪堂에서 入寂하였다.

生涯 [ 編輯 ]

1912年(1歲,壬子), 陰曆 2月 19日(陽曆 4月 6日) 慶尙南道 山淸郡 단성면 묵곡리에서 아버지 律은(栗隱) 이상언(李尙彦, 1881~1959), 어머니 강상봉(姜相鳳, 1893~1957)의 4男 4女 中 長男으로 태어나다. 俗名은 이영주(李英柱). 어머니가 스님을 妊娠하고서는 門밖 出入을 삼가고 모난 飮食을 먹지 않고 모난데 앉지 않는 等 온갖 精誠으로 胎敎하였다고 傳한다.

1920年(9歲, 庚申), 4月 單性公立普通學校에 入學하다. 入學하기 前에 書堂을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6年(15歲, 丙寅), 3月 單性公立普通學校를 卒業하다. 진주중學校 入學試驗에 優秀한 成績으로 合格하였으나 身體檢査에서 脫落하다. 元來 몸이 弱했던 스님이 이 무렵부터 療養次 대원사에 드나들다.

1931年(20歲, 辛未), 대원사에 드나들며 佛敎에 빠질 것을 念慮한 집안에서 結婚을 서두르다. 11月 이덕명(1909~1982)과 婚姻申告.

1932年(21歲, 壬申), 12月 2日 간례휘찬(簡禮彙纂)에 이영주書籍기를 남기다. 幸福論, 純粹理性批判, 實踐理性批判, 歷史哲學, 長子南華經, 小學, 大學, 하이네 詩集, 基督敎의 新舊約聖書, 資本論, 唯物論 等 東西古今의 哲學에 關한 冊 約 70餘 卷의 題目이 적혀 있다.

20歲를 전후한 時期에 本格的으로 佛敎에 關心을 가지고 佛敎 關聯 書籍을 耽讀하다. 靈駕현각(永嘉玄覺, 665~713)스님의 證道歌를 읽고 밤中에 횃불을 만난 것 같았다고 回顧하였다. 雜誌 「佛敎」를 통해 話頭 工夫를 익히고 대원사 療養 中에 署長(冊)을 보다.

1935年(24歲, 乙亥), 李茂 렵 대원사 榻前에서 話頭參究하며 42日 만에 洞정일여의 境地에 이르렀다. 대원사에서 海印寺에 連絡하여 環境스님(1887∼1983)의 弟子 최범술(孝當스님, 1904∼ 1979)李 대원사를 訪問하다. 최범술의 勸誘로 스님이 海印寺에 가다.

1936年(25歲, 丙子), 1924年에 船員으로 擴張된 海印寺 堆雪堂에서 參禪 精進하다. 反對 輿論이 있었으나 주지 이고경(李古鏡, 1882~1943) 스님의 好意로 精進을 繼續하다. 海印寺에서 講義하던 講師 김법린 (1899∼1964)李 敎學 硏究를 勸하다. 3月 3日 범어사 祖室 하동산(河東山, 1890~1965) 스님을 恩師로 海印寺에서 沙彌戒를 받고 出嫁하다.

出家時

彌天大業紅爐雪이요 跨海雄基赫日露라

誰人甘死片時夢가 超然獨步萬古眞이로다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火爐불에 한 點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世上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 가랴

萬古의 眞理를 向해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동산스님을 따라 범어사로 옮겨 梵魚寺 金魚禪院에서 夏安居를 나다. 동산스님은 海印寺 祖室로 옮기고 스님은 梵魚寺 원효암에서 冬安居를 나다(조실 용성스님). 冬安居 期間인 11月 18日(음 10月 16日) 용성(1864~1940)스님이 동산스님에게 戒脈을 傳授하는 자리에 스님도 함께 하다.

1937年(26歲, 丁丑), 3月 15日 범어사 金剛戒壇에서 比丘戒를 받다. 梵魚寺 원효암에서 夏安居를 나고 용성스님을 侍奉하다. 용성스님은 그 무렵 어떤 스님을 보아도 스님이라 하지 않고 “先生”이라고 불렀는데 孫子인 聖哲스님에게만은 “性徹首座, 聖哲스님”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울 대각사로 옮겨 가실 때에 꼭 스님을 데려 가겠다고 했지만 스님은 부산역까지만 배웅하고 도망쳤다는 逸話가 있다. 通度寺 백련암으로 옮겨 冬安居를 나다. 祖室은 향곡스님의 恩師인 雲峰(雲峰, 1889~1946)스님.

1938年(27歲, 戊寅), 梵魚寺 내원암(1900年 開設)에서 夏安居(祖室 하동산)를 나고, 通度寺 백련암에서 冬安居를 나다. 이 무렵 까지도 어머니가 철마다 옷가지와 飮食 等을 마련하여 찾아왔으나 繼續 물리치다.

1939年(28歲, 己卯), 金剛山 摩訶衍에서 冬安居를 나다. 摩訶衍船員은 1926年 財政 事情으로 門을 닫았다가 1932年 59칸짜리 堂宇를 짓고 다시 開院하였다. 1933年에는 立方規則을 制定하여 資格을 갖춘 衲子만 決濟 大衆으로 받기로 하였다. 1939年 3月 23日에는 禪理參究원에서 全國首座大會를 開催하여 金剛山 摩訶衍船員을 初學(初學) 首座地圖를 위한 模範船員으로 指定하기도 하였다. 워낙 規模가 커서 安居를 나는 大衆들도 서로를 잘 몰랐다고 한다. 摩訶衍에서 平生의 知己인 자운스님을 만나다. 글을 모르는 大衆 스님들의 付託으로 便紙를 代讀하고 代筆해주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찾아왔으나 만나지 않다가 大衆公事를 통해 金剛山 遊覽을 시켜드리기도 했다.

1940年(29歲, 庚辰), 金剛山 摩訶衍에서 夏安居를 나다. 桐華寺 金堂禪院에서 悟道頌(悟道頌) 읊다.

悟道頌

黃河西流崑崙頂하니 日月無光大地沈이라

遽然一笑回首立하니 靑山依舊白雲中이로다

황하수 崑崙山 正常으로 거꾸로 흐르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지는도다

문득 한番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淸算은 例대로 흰 구름 속에 섰네.

깨달음을 얻은 以後 장좌불와를 始作하다. 銀海寺 芸夫癌에서 冬安居를 나면서 斷食 精進하다.

1941年(30歲, 辛巳), 깨달음을 點檢받기 위해 全國의 곳곳을 찾아 精進하다. 全南 松廣寺 三日癌에서 夏安居(祖室 회주 李曉峯) 를 나고 忠南 修德寺 定慧寺에서 冬安居(祖室 송만공)를 나다. 定慧寺에서 청담스님을 만나다. 陰曆 正月에 組를 짜서 大雄殿에서 一週日동안 徹夜精進하는 모습에 感動을 받고 以後 七日漆夜 精進의 모델로 삼다. 이 해는 아버지 이상언의 回甲이었다. 長男 없이 절을 받을 수 없다 하여 절도 받지 않고 家族寫眞 撮影도 하지 않았다.

1942年(31歲, 壬午), 忠南 瑞山郡 간월암에서 夏安居와 冬安居를 나다 (祖室 송만공).

1943年(32歲, 癸未), 忠北 法住寺 福泉庵에서 夏安居를 나다. 1942年 가을 청담스님이 먼저 福泉庵에 가고 스님이 合流하다. 福泉庵에서 도우스님을 만나 以後 도우스님이 大乘寺, 鳳巖寺, 天帝窟까지 함께 하다. 淸潭, 도우스님 等과 生殖을 始作하다. 청담스님이 獨立運動 嫌疑로 逮捕되어 尙州警察署에 連行되었다가 痢疾에 걸려 피病死로 옮겨지고 尙州布敎堂으로 住居 制限을 받다. 스님은 大乘寺로 가려고 했으나 食糧 事情의 如意치 않아 種數스님과 長壽스님이 있는 慶北 선산 桃李寺 太祖禪院에서 冬安居(祖室 정운봉)를 나다.

1944年(33歲, 甲申), 桃李寺 太祖船員이 閉鎖되어 桃李寺에서 머물다. 청담스님이 居住 制限이 풀려 大乘寺로 옮기고 스님을 招請하여 慶北 聞慶 大乘寺 雙聯禪院에서 淸潭, 우봉, 도우스님과 冬安居를 나다.

1945年(34歲, 乙酉), 大乘寺에 雙聯船員에 머물며 청담스님과 叢林의 構想과 바른 遂行 風土에 對해 論議하다. 大乘寺 庵子인 묘적癌에서 冬安居를 나다.

1946年(35歲, 丙戌), 松廣寺에 防腐를 들이려다가 生殖을 理由로 거절당하다. 松廣寺에서 一馱스님을 만나다. 도우스님과 聖殿癌 으로 옮겨 夏安居와 冬安居를 나다. 이 무렵 청담스님이 鳳巖寺 住持의 要請으로 鳳巖寺로 옮기다. 청담스님이 홍경, 種數스님 等과 鳳巖寺에서 새로운 佛敎를 摸索하다가 海印寺에 伽倻叢林이 開設된다는 消息에 스님과 청담스님이 海印寺側의 최범술, 環境스님(當時 住持)을 만났으나 財政 問題가 걸려 妥協이 決裂되다. 伽倻叢林은 方丈에 효봉스님을 推戴하고, 우봉스님은 叢林에 合流하다.

1947(36歲, 丁亥), 叢林 件은 청담스님에게 一任하고 도우스님과 通度寺 내원암으로 옮기다. 청담스님이 夏安居에 伽倻叢林에 合流하다. 김병룡 擧事에게 佛書를 寄贈받기로 約束하고 解除하면 鳳巖寺로 옮기기로 하다. 가을에 鳳巖寺 結社를 始作하다. 基本的으로는 性徹, 청담, 字韻, 우봉스님 네 분의 構想으로 進行된 鳳巖寺結社는 公主규 藥을 締結하고 "부처님 法대로 살자"를 目標로 하였다. 청담스님의 推薦으로 鳳巖寺를 定하고 처음에는 性徹, 字韻, 보문, 우봉스님의 네 분이 始作하였다. 청담스님은 伽倻叢林 때문에 뒤늦게 合流하다. 餉穀(香谷), 月山(月山), 종수(宗秀), 도우(道雨), 보경(寶境), 法典(法傳), 聖水(性壽), 혜암(慧菴)스님 等 20餘 名으로 構成되어 伸張 等을 없애고 長衫과 家事, 鉢盂 等을 整備하였으며 信徒에게 3倍와 菩薩戒를 처음으로 施行下 였다. 中國 叢林의 日課에 맞게 生活하고 大佛정능엄新株를 讀誦하도록 하였으며 大部分의 寺刹에서 하고 있는 例不問을 完成하였다. 敎團 淨化는 勿論 主要 人物들이 曹溪宗의 要職을 맡으며 宗團의 기틀을 마련 하였다.

1948年(37歲, 戊子), 鳳巖寺에서 夏安居와 冬安居를 나다. 김병룡居士에게 佛書를 寄贈받고 鳳巖寺 極樂殿에 모시다.

1949(38歲, 己丑), 鳳巖寺에서 夏安居를 나다. 빨치산이 出現하여 정진이 어려우므로 慶南 월내리의 墓관음사로 옮기다. 김병룡擧事의 불서도 墓관음사로 옮겼으며 以後 繼續 居處를 옮길 때마다 佛書를 옮기다.

1950年(39歲, 庚寅), 淸潭, 法典스님 等이 鳳巖寺를 나오면서 鳳巖寺結社가 霧散되다. 慶南 固城郡 文殊庵에서 淸潭, 法典 等과 夏安居와 冬安居를 나다.

1951年(40歲, 辛卯), 慶南 統營의 安靜寺 은봉癌에서 夏安居를 나다. 모이는 사람이 늘자 安靜寺 住持에게 諒解를 求하고 安靜寺와 銀봉암 사이에 草家三間의 土窟을 지어 天帝窟이라고 이름하다. 主로 侍奉은 法典스님이 맡다. 天帝굴에서 비로소 信徒들에게 3千倍와 아비라氣道를 하게 하다.

1952年(41歲, 壬辰), 天帝굴에서 夏安居를 나다. 天帝窟에 머무시는 동안 청담, 字韻, 耘虛, 餉穀, 서옹스님 等이 다녀가다. 天帝窟이 狹小해 比丘尼 스님들이 聖哲스님이 遂行할 수 있도록 聖住寺를 내주어 慶南 馬山의 성주사에서 冬安居를 나다.

1953年(42歲, 癸巳), 天帝굴에서 夏安居와 冬安居를 나다.

1954年(43歲, 甲午), 天帝굴에서 夏安居와 冬安居를 나다. 比丘 宗團의 淨化(淨化)가 始作되다.

1955年(44歲, 乙未), 把溪寺 한송스님의 招請으로 把溪寺 聖殿癌으로 옮기시려다가 建物 補修를 위해 法典스님이 먼저 修理를 하고 스님은 臨時로 慶南 南海의 용문사 백련암에 머물다. 9月 比丘側이 19個 寺刹의 管理權을 接受하면서 海印寺地로 任命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자운스님이 就任(1955年 9月 ~1957年 7月)하다. 가을에 把溪寺 聖殿癌에 鐵條網을 두르고 1964年까지 10年間 杜門不出하며 外部의 出入도 막다. 이것을 흔히 “10年 洞口不出”이라고 하다. 洞口不出 동안 거의 모든 時間을 冊을 읽으며 보내다. 日本의 南傳大藏經은 勿論 英文 雜誌와 多樣한 分野의 新種 書籍을 涉獵하다.

1957年(46歲, 丁酉), 把溪寺 聖殿癌에서 洞口不出하다. 다시 海印寺의 住持로 任命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청담스님이 就任(1957年8月~1960年 5月)하다.

1964年(53歲, 甲辰), 洞口不出을 마치고 釜山 多大浦에서 暫時 머무르다가 서울의 도선사에 머물다. 導船士는 1961年에 청담스님이 住持로 就任. 오랜 時間 꿈꾸어 오던 僧伽大學을 實現하기 위해 悉達學院 (悉達學園)을 열고 悉達學院施行요강을 마련하다. 청담스님과 書院門을 쓰다. 이 무렵 청담스님과 함께 各各의 侍者 天帝스님과 彗星스님을 데리고 北漢山, 南漢山城, 檜巖寺지 等을 巡禮하다.

1965年(54歲, 乙巳), 4月 30日 동산스님이 入寂. 1967年에 세운 동산스님 舍利塔 碑文을 짓다. 慶北 聞慶의 김용사(金龍寺)에서 祖室로 머물다. 9月 1日, 大學生佛敎聯合會 會員들의 13日間의 構圖行脚 中에 김용사 訪問하자 3000倍를 시키고 9月 2日부터 이틀에 걸쳐 “佛敎의 根本思想인 異變(離邊)中道로부터 始作하여 佛敎에서 본 宇宙의 實相, 우리가 이 實相과 하나가 될 수 있는 可能性, 그 方法論 等”을 現代 學問의 傍證을 들어 說法하다.

1966年(55歲, 丙午), 1月 8日(土, 음 12月 17日)부터 2月 20日(일, 음 2月 1日)까지 韓國大學生佛敎聯合會 構圖部를 相對로 50日 安居 精進을 指導하다. 參加者는 廣德스님을 指導法師로, 박성배를 指導敎授로 한 봉은사 入舍生人 전창열, 김금태, 이진두, 김기중, 황귀철, 김선근, 이철교.

스님의 講論 內容은 ① 佛敎의 生命은 覺에 있다. ② 佛敎 根本原理로서의 中途思想 ③ 頓悟漸修설 批判 ④ 現代 科學과 佛敎의 合理性.

4月 스님의 發源으로 1965年 8月에 工事를 始作한 善防 賞船員을 竣工하다. 8月 3日부터 8月 24日까지 한 國大學生佛敎聯合會 構圖部(봉은사 入舍生 中心) 構圖法會를 指導하다. 參禪정진을 中心으로 하고 20日 間 般若心經으로 始作하여 육조단경, 金剛經, 信心銘, 증도가 等의 經論과 中道法文을 하다. 이것을 ‘雲達山法會’라고 하며 最初의 大衆說法으로 記錄된다. 가을 무렵 자운스님의 勸誘로 海印寺 백련암으로 옮겨 冬安居를 나다. 構圖法會 參加者 一部가 스님을 따라 백련암으로 옮기고 出嫁하다. 11月 6日 月精寺 大雄殿 上樑式에 參加하다.

1967年(56歲, 丁未), 7月 25日 第16回 臨時中央宗會에서 海印寺에 方丈 體制의 해인叢林 設置가 決議되면서 해인叢林 方丈에 推戴되다. 方丈 동안은 安居 때마다 보름과 末日에 相當法語를 하다. 冬安居 期間 中에 百日法文(百日法門)을 하다. 10月 보름과 말일 相當法語 進行 後에 陰曆 11月 3日(月, 12月 4日)부터 始作하여 相當法語를 하는 날과 성도재일 勇猛精進 等 특별한 날을 除外하고 每日 進行하다. 大略 이듬해 陰曆 1月 20日(일, 2月 18日)까지 進行되어 백일법문이라고 한다. 12月 15日 曹溪宗 第17回 中央宗會에 曹溪宗 綜合修道院인 해인叢林의 計劃案과 僧伽大學 設置計劃案을 建議하다.

1969年(58歲, 己酉), 10月 희찬스님이 月精寺 大雄殿을 重建하다. 이 무렵 청담스님 等과 春川 성심女子大學을 訪問하여, 다른 宗敎 의 敎育機關을 視察하고 僧伽大學에 對한 方向을 摸索하다

1976年(65歲, 丙辰), 韓國佛敎의 法脈이 出刊되다. 比丘ㆍ對處 紛糾 끝에 1962年 3月 22日에 制定된 大韓佛敎 曹溪宗 宗憲 第1條 "본 鐘은 新羅 度의(道義)국사가 창수(創樹)韓 迦智山門(迦智山門)에서 起源하여 高麗 普照國師의 中天을 거쳐 太古 保佑國史의 諸宗包攝(諸宗包攝)으로서 曹溪宗이라 公稱(公稱)하여 以後 그 種脈이 綿綿不絶(綿綿不絶)한 것이 다."에 對한 問題를 提起하며, "道義國史는 迦智山門이고 普照國師는 闍崛山門이니 法脈이 上典(相傳)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다른 法脈을 같은 法脈으로 할 수 있느냐?" 臨濟宗의 宗風을 이어받은 曹溪宗의 綜調는 普照國師가 아니라 太古保佑國史라는 主張을 펼치다.

1981年(70歲, 辛酉), 1月 20日 曹溪宗 6代 宗正으로 就任하였으나 就任法會에는 나가지 않으시다. “山은 山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法語가 話題로 登場하다.

[宗正受諾法語]

圓角(圓覺)李 補助(普照)하니 敵(寂)과 멸(滅)李 둘이 아니라

보이는 萬物은 觀音(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妙音(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眞理가 따로 없으니

아아, 詩會大衆(時會大衆)은 알겠는가?

山은 山이요 물은 물이로다.


初八日에 最初의 한글法語 “生命의 참모습”을 發表하다. 12月 스님의 思想을 代表하는 『선문정로』가 出刊 되다. 總 19章으로 構成되어, 各 經論의 句節을 抄錄하고 이에 對한 聖哲스님의 評釋을 붙여 頓悟頓修를 說破하다.

1982年(71歲, 壬戌), 1月 첫 한글 新年法語 “萬法이 不法”을 發表하다. 11月 또 하나의 代表作인 본지풍광이 出刊되다. 海印寺 方丈 으로 就任하신 1967年 冬安居 決濟 法語부터 1982年 夏安居 決濟 法語까지 相當法文을 모은 法語集으로, 本則 91칙과 落水法語(落穗法語) 9칙으로 構成되었다.

1986年(75歲, 丙寅), 4月 7日 宗團이 安定되었으므로 宗正을 辭退한다는 辭退書를 元老會議에 提出하다. 6月 頓悟입度要門論 講說과 信心銘ㆍ증도가 講說이 出刊되다.

1987年(76歲, 丁卯), 6月 ?自己를 바로봅시다? 가 出刊되다. 宗正 就任 以後 出刊 當時인 1987年 무렵까지 大衆的인 글들 爲主의 法語 母音으로, 第1張 ‘祝福의 말씀’은 宗正 就任 後에 發表하신 新年法語와 初八日法語와 宗正法語를 모은 것이고, 第2張 ‘伽倻山의 메아리’는 해인 社 큰법당에서 佛敎 眞理를 쉽게 說明하신 法語 中 해인지에 連載하였던 것을 再整理하여 모은 것이며, 第3張 ‘對談’은 宗正으로 就任하신 後 日刊紙 및 月刊誌에 인터뷰로 실린 것이고, 第4張 ‘본지풍광評釋’은 本紙風 狂 가운데 다섯 個의 法文(第27칙, 第28칙, 第30칙, 第40칙, 第44칙)을 골라 評釋을 붙인 것이며, 第5張 ‘解脫의 길’은 처음 出嫁한 僧侶들이 信心을 가지고 熱心히 遂行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어두신 글들을 整理하여 옮긴 것이다. 7月 白蓮佛敎文化財團을 設立하다. 11月 圖書出版 藏經閣을 設立하여 禪林古經叢書 發刊을 始作하게 하다.

1988年(77歲, 戊辰), 2月 『돈황본 육조단경』이 出刊되다.

1991年(80歲, 辛未), 1月 宗正의 任期가 滿了되었으나 宗團의 分裂로 宗正을 推戴하지 못하다. 分列 渦中에 宗正 推戴가 門中 問題로 불거지자 1月 23日 宗正職을 할 생각이 없다는 通告文을 보내다. 7月 5日에 또 한 番 通告文을 보내다. 7月 8日 海印寺에서 全國僧侶代表者大會를 열고 元老會議에서 宗正을 推戴하고, 改革委員會를 構成하다. 世間法에 依한 訟事는 宗團法으로 嚴斷 等을 決意하고, 8月 22日 曹溪宗 元老會議에서 第7代 宗正으로 다시 스님을 推戴하다.

1992(81歲, 壬申), 4月 『백일법문』 上?下가 出刊되다.

1993(82歲, 癸酉), 9月 21日 禪林古經叢書 完刊 記念會를 열다. 10月 7日 白蓮佛敎文化財團 主催로 海印寺에서 '선종사에 있어서의 頓悟頓修思想의 位相과 意味'라는 主題로 國際學術會議를 開催하다.

열반송

生平欺?男女群하야 彌天罪業過須彌라

活陷阿鼻恨萬端인데 一輪吐紅掛碧山이로다

一生동안 男女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 넘치는 罪業은 須彌山을 지나친다

산 채로 無間地獄에 떨어져서 그 恨이 萬 갈래나 되는데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山에 걸렸도다.

以後 全國 各地와 海外 同胞 사이에서 追慕 물결이 일다. 11月 10日 永訣式 및 茶毘式을 奉行하여 11月 12 日 100濾過에 이르는 事理를 收拾하다. 1998年 11月 海印寺 韻兩代에 舍利塔을 奉安하다. 2001年 3月 慶南 山淸郡 단성면 묵곡리 生家터에 記念館을 建立하고 겁외사를 創建하다.

敎理的 見解 [ 編輯 ]

頓悟點數를 反對하며 頓悟頓修 主唱 [ 編輯 ]

聖哲스님의 禪佛敎 敎理의 思想的 見解는 著書인 《선문정로》(1981)에 잘 나타나있다. [1] 大韓民國 禪佛敎 의 隨行 傳統으로 여겨온 '깨달음 以後에 漸次 遂行해 나아가는' 知訥 頓悟漸修 (頓悟漸修)에 反對하여 '깨달음 이 後에는 더 닦아야 할 遂行이 必要 없다'고 하는 頓悟頓修 (頓悟頓修)를 主唱했다. [1] 그 後 現在까지 大韓民國 佛敎 哲學界의 돈  · 點 論爭은 活潑하게 이루어져 왔다. [1] 聖哲은 知行合一(知行合一) 段階의 지(知)만이 眞正한 지(知)이고 知訥 頓悟漸修 는 實際(實際)이고 細部까지 包含한 現實을 좇지 않는 直接 知覺하거나 體驗할 수 없는 觀念과 表象(表象)에 京都(傾倒)되어 實證性이 稀薄(稀薄)하게 組織된 理論에 根據한 지(知)일 뿐 참 지(知)가 아니라고 主張(主張)하였다. [1] 그러나 知訥 과 聖哲은 가르침의 對象이 달랐으므로 是非(是非)를 가리기가 어렵다. [1] 知訥은 一般人에게 佛敎 敎義를 풀어서 밝혔고 聖哲은 遂行하는 僧侶에게 說法하였다. [1]

하지만, 餉穀혜림(香谷慧林)과 鉏옹상순(西翁?純)은 頓悟頓修論者들이였다. 道琳法典(道林法典)과 혜암城館(慧庵性觀) 또한 徹底한 頓悟頓修論者들이였다. 그리고 賑濟法院(?際法遠) 스님 또한 '頓悟頓修는 五種(五宗) 家風의 法則입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보다 仔細한 事項은 文觀스님 著, 탄허學, 曹溪宗出版社 出版, 第 4張의 現代 韓國 禪思想의 두 持平 p.186~p.189참고 바람.)

돈占論爭은 觀法(觀法)과 看話禪 사이에서, 或은 敎宗과 禪宗 사이에 優劣을 가리는데 目的이 있는 것이 아니다. 萬若 누군가 이것을 그렇게 理解했다면, 그것은 이 論爭의 本質을 잘못 把握한 것이다. 頓悟頓修論 主張은 禪宗에 屬한 스님들이 제대로 修行을 하기 위한 努力이었을 뿐이다. 頓悟頓修를 主張하는 것이 敎宗이나 觀法을 無視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 理由가 바로 여기에 있다. 元曉스님 같은 분은 校學者였지만 現代 韓國의 禪師들 中 그 누구도 元曉를 지해종도(知解宗徒)라고 부르지 않는다. 元曉스님은 校(?)의 길을 徹底하고 뛰어나게 걸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聖哲스님의 頓悟頓修論 主張도 선(禪)의 길을 本分事大로 걸어갔던 것 뿐인 것이다.

帶妻僧에 反對하는 佛敎淨化運動 支持 [ 編輯 ]

聖哲스님은 對處佛敎 로 代辯되는 近代 日本佛敎의 殘滓를 淸算하고 부처님의 정法으로의 復歸를 통해 現代佛敎의 새로운 길을 摸索하겠다며 1947年 公州規約을 함께 制定한다. [2] 이것은 1954年 比丘僧들이 本格的으로 推進한 佛敎 淨化 運動이었고 [3] 萬海스님 은 全人的 風貌를 가진 人物로 社會參與를 통해 歷史的 現場에 投身한 反面, 聖哲스님은 徹底히 世間事에 對해 不干涉의 姿勢로 오로지 깨달음을 얻겠다는 宗敎的 以上만으로 近現代라는 施工이 招來한 桎梏에 휘말리지 않았다. [2]

山은 山이요, 물은 물이로다 [ 編輯 ]

中國 大陸에서 臨濟宗(臨濟宗)을 改宗(開宗)韓 林悌(臨濟)의 後裔(後裔)인 船社(禪師) 維新(惟信)李 腺腫 의 내밀(內密)한 特徵인 所謂 道敎에서 影響받은 和光同塵(和光同塵)을 校時(敎示)하려는 趣旨(趣旨)로 한 說法(說法)인,

  • “내가 三十 年 前 參禪하기 前에는 山은 山으로, 물은 물로 보았다가 나중에 善知識(善知識)을 親見(親見)하여 깨*침에 들어서서는 山은 山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았다. 只今 休息處를 얻고 나니 옛날과 마찬가지로 山은 *다만 山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見解가 같으냐? 다르냐? 이것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같은 境地에 있다고 認定하겠노라.”

中에서 "山은 山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古則(古則)을 聖哲이 援用(援用)하여 引上(印象)을 남기면서 一般人에게도 有名해졌다. “山은 山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話頭(話頭)는 最初에 迷妄(迷妄)하는 段階는 首都(修道)하기 以前 平凡한 日常界(日常界)이나 首都를 利用해 得道(得道)하면 體驗하는 平凡한 日常을 完璧히 超越한 世界는 日常에서 하는 錯覺(錯覺)李 寂滅(寂滅)韓 狀態이나 鎭定하게 得道하려면 거기서 進一步(進一步)해 平凡한 世界로 回歸하여야 한다. 和光同塵을 利用해 다시 돌아온 그 世界는 外樣上으로는 最初처럼 속(俗)되고 平凡한 段階와 같으나 內面上으로는 처음과는 次元이 판이(判異)하다. 이는 螺旋形(螺旋形) 性格을 띤 回歸를 뜻한다. 이로 보아 林悌(臨濟)의 後裔(後裔)인 船社(禪師) 維新(惟信)李 說法한 이 “山은 山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公安(公案)은 路資 의 和光同塵(和光同塵) 思想을 그대로 解說한 校時(敎示)이다. 再言下면, 修道者(修道者)가 작고 대수롭지 않게 得道(得道)했을 때는 물이 山으로, 山은 물인 듯 混亂(混亂)스럽지만, 得道하는 規模가 擴大되면 물은 물로, 山은 山으로 보게 된다. 外部 世界나 自然을 主觀의 作用과는 獨立하여 存在한다고 觀望(觀望)하는 態度를 獲得한다는 뜻이다.

깨달음 [ 編輯 ]

1936年 24歲에 出家한 聖哲스님(1912年-1993)은 勝납 3年만인 1940年 28歲 때, 大邱 桐華寺 金堂禪院에서 夏安居를 보내며 遂行하던 中 문득 大悟했다. 當代의 善知識은 75代 鏡虛(1849-1912)스님으로부터 76代 滿空(1871-1946)스님이 깨달음의 道를 이었다고 하던 時節이어서, 定慧寺 의 滿空스님을 찾아갔는데, 깨달음의 깊이에 失望乙하고 또 쉽게 깨달음을 認可하고 있었기 때문에 失望을 하게 된다. 以後에 76代 滿空스님의 度를 77代 전강(1898-1975)스님이 이었다고 했는데, 前强調社에게도 認可를 申請하지 않았다.

佛敎에서는 다른 깨달은 善知識으로부터의 認可는 重要하게 다루지 않아도, 當代 調査스님의 認可는 매우 重要하게 여긴다. 當時 佛敎 慣行이, 別로 큰 깨달음도 아닌데 쉽게 認可를 해주는 慣行이었다고 하더라도, 조사의 認可는 반드시 받았어야 했다.

歷代 最長 記錄의 장좌불와 [ 編輯 ]

聖哲스님의 涅槃 時期에 大衆들에게 갑자기 有名해진 佛敎 遂行用語가 장좌불와인데, 達磨大師 의 小林寺 面壁 9年의 面壁은 이와 비슷하나 難易度에서 장좌불와에 못미친다. [4] 現在 聖哲스님보다 오래 잠을 자지 않고 장좌불와를 했다는 記錄은 보이지 않으며, 記錄은 10年, 一部에서는 8年이라고 主張하는 境遇도 있다. [4] 이 깨달음 以後의 午後보임(悟後保任)의 行 때문에 後學 修行者들이 억지로 따라하며 健康을 해쳐 病院 治療도 하게 되는 境遇도 種種 있었다. [5]

主要 經歷 [ 編輯 ]

以外 履歷 [ 編輯 ]

咀嚼 [ 編輯 ]

육조단경 (六組檀經)》, 《 傳燈錄 (傳燈錄)》 等 先文 (禪門)의 調査(祖師) 語錄을 中心으로 많은 法語 를 이루었는데 觀念의 도그마 (dogma) [註解 1] 에 빠지지 말 것과 見性 (見性)의 體驗을 强調하였다. 1993年 海印寺 에서 入寂 (入寂)하였다. 著書로 《 頓悟입도요문강설 》(1986) 等이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註解 [ 編輯 ]

  1. 論理에 맞고 理性에 根據한 證明과 批判이 不許(不許)되는 宗敎上 原理나 理致와 宗敎의 信仰 內容이 眞理로서 公認된 宗敎上 敎法(敎法) 그리고 宗敎上 信條를 通稱(統稱)하는 말이다.

各州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