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한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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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묵
梁漢默
1922年 5月 5日子 〈동아일보〉에 실린 寫眞
身上情報
出生 1862年 4月 29日 ( 1862-04-29 )
朝鮮 全羅道 海南縣
死亡 1919年 5月 26日 ( 1919-05-26 ) (57歲)
日帝强占期 京城府 西大門監獄
死因 拷問에 依한 獄事
性別 男性
本館 濟州
別稱 號 至剛(芝江), 者 慶弔(景朝), 길중(吉仲)
職業 獨立運動家 , 宗敎人, 敎育인
宗敎 天道敎
父母 아버지 梁狀態(梁相泰), 어머니 낭주 崔氏(朗州 崔氏)
活動 情報
關聯 活動 獨立運動
經歷 공진회
憲政硏究會
賞勳 ( 建國訓長 大統領章,1962)
웹사이트 양한묵(獨立有功者 功勳錄)

양한묵 (梁漢默), 1862年 4月 29日 ~ 1919年 5月 26日 )은 韓國 의 獨立運動家이며 1919年 3.1運動 當時 民族代表 33人 中 한 사람이다. 天道敎人이며 本貫은 濟州 . 雅號는 至剛(芝江). [1] 者는 慶弔(景朝) 또는 길중(吉仲).

生涯 [ 編輯 ]

全羅南道 海南 의 社會的으로 文科 及第者를 多數 輩出한 兩班의 名門家 出生이다.

地方의 稅務 管理로 일하다가 辭職하고 베이징 日本 을 旅行하던 中에, 日本에 亡命 中이던 天道敎 (當時 東學) 敎主 손병희 와 前職 開化派 官僚 出身인 권동진 , 오세창 等을 만나 天道敎에 入敎했다.

1904年 러日 戰爭 이 일어나자 孫秉熙는 日本에 머무르면서 國內에 진보회 를 結成하도록 하여 斷髮을 勸하고 內政改革을 促求하는 等 啓蒙運動을 펼쳤는데, 이때 이용구 一進會 系列이 親日派로 變身한 事件이 있었다. 亡命 中이던 天道敎 同僚들보다 앞서 歸國한 梁漢默은, 一進會에 對抗하기 위하여 李儁 , 尹孝貞 과 함께 공진회 , 憲政硏究會 를 組織하였다. 憲政硏究會는 近代的인 憲政 硏究를 내세운 啓蒙 團體로 立憲君主制 를 主張했으며, '憲政要義'를 著述하여 約 한달 間 皇城新聞 에 連載하였다. 以後 장지연 , 나수연 大韓自彊會 로 이어받았다.

이기, 羅寅永, 吳基鎬 等과 美國에서 열리는 포츠머스 强化會議에 參加해 韓國의 立場을 밝히려는 活動을 展開하였으나 失敗하였다.

孫秉熙, 權東鎭, 吳世昌이 歸國한 뒤로는, 다시 天道敎 基盤 啓蒙 運動으로 돌아온다. 1909年 天道敎 法度社에 任命되어 天道敎 敎理書人 '代宗正의', '無體法經' 等 約 20卷의 敎理書를 著述하였다. 그 中 大宗正義라는 冊에서 最初로 '人乃天(人乃天)'이라는 用語를 使用하였다.

孫秉熙의 敎育 運動에 積極 同調하여 보성전문학교 , 寶城中學校 , 同德女學校 等 近代 敎育 機關의 引受와 經營에 參與했고, 1919年 3·1 運動 에는 民族代表 33人 의 한 사람으로서 獨立宣言式에 參加했다. 萬歲三唱 後 逮捕된 梁漢默은 西大門監獄 에서 收監되어 裁判을 받던 中 拷問으로 인해 死亡했다. 民族代表 33人에 對해 懲役 3年刑이 最高의 中形이었기에 大部分 獄苦를 치르고 풀려났으나, 梁漢默은 이들 가운데 唯一하게 獄死하였다. [1]

事後 [ 編輯 ]

  • 그의 遺骸는 수철리(現 성동구 금호동) 共同墓地에 묻혔다.
  • 大韓民國 政府 는 그의 貢獻을 기려 1962年 建國訓長 大統領章을 追敍하였다.
  • 以後 1922年 5月 故鄕을 그리던 先生의 마음을 헤아려 天道敎團이 周旋하여 先生의 墓所를 全南 和順으로 半裝하였다.

著書 [ 編輯 ]

著書로는 天道敎 經典인 《 東經大全 (東經大全)》을 解說한 敎理書 《동경연의(東經演義)》(1907)가 있다. [1]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韓國民族文化大百科》, 憲政硏究會(憲政硏究會), 韓國學中央硏究院

參考資料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