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在烘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安在烘
安在鴻
美軍政廳 隸下 民政 長官
南韓 過渡政府 首班
任期 1947年 2月 5日 ~ 1948年 9月 15日
大統領 李承晩
副統領 이시영
總理 이범석
司令官 존 리드 하지

이름
別名 號 民世(民世), 우헌(又軒), 者 警六(景陸), 재홍(在鴻)
身上情報
出生日 1891年 12月 30日 ( 1891-12-30 )
出生地 朝鮮 京畿道 水原郡 宗德面 繫累지리
(現 大韓民國 京畿道 平澤市 高德洞 )
死亡日 1965年 3月 1日 ( 1965-03-01 ) (73歲)
死亡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平壤
經歷 獨立運動家, 言論人, 政治家, 歷史學者, 言語學者, 隨筆家
正當 無所屬
本館 순흥 安氏
父母 안윤섭(簿)
南陽 洪氏 夫人(某)
兄弟姊妹 兄 안재봉
男동생 안재학, 안在職
누이同生 안재숙, 안재영, 그外 누이同生 2名
配偶者 이정순(死別), 김부례(再婚)
子女 長男 安靜用
次男 안민용( 兒名 안민학)
딸 안서용)
親姻戚 안상규(親祖父)
宗敎 儒敎 ( 性理學 ) → 改新敎 ( 長老會 ) → 大倧敎

安在烘 (安在鴻, 1891年 12月 30日 ( 陰曆 11月 30日 ) ~ 1965年 3月 1日 )은 日帝强占期 의 獨立運動家, 統一運動家, 政治家이며 言論인, 歷史가, 言語學 者이다. 大韓民國 政府 樹立 前 建國準備委員會 部 委員長과 南朝鮮過渡政府 의 民政長官이자 政府 首班이었다.

日帝强占期에 時代日報 理事, 朝鮮日報 社長, 新幹會 活動 主役이었으며, 朝鮮語學會 , 興業俱樂部 等에서도 活動했다. 日帝强占期 내내 社會團體와 獨立運動, 칼럼 寄稿 活動 外에도 史學者로서 古跡地 踏査, 語文 硏究 等의 活動을 하기도 했다. 隨筆家로서는 高原의 밤 等의 隨筆, 紀行文을 남겼다.

1919年 3.1 萬歲 運動 에 參與하였고 이어 大韓靑年外交團을 組織해 상하이 臨時政府 와 連絡하다가 逮捕되어 3年間 投獄당했다. 1923年 時代日報 理事 兼 論說委員, 朝鮮日報 社長 兼 主筆 等으로 活動하였으며, 조만식 , 송진우 , 이규완 等과 함께 物産奬勵會에도 參與하였다. 1925年 에는 新幹會 의 會員으로 加入하여 活動하다가 8個月間 服役하였다. 1936年 다시 臨政과 連絡을 取하다가 摘發되어 2年間 투옥당했고, 1942年에는 朝鮮語學會 事件으로 1年間 投獄되었다.

解放政局에서 建國準備委員會 副委員長과 漢城日報社 社長 等을 맡았으며, 1946年에는 尤史 金奎植 , 여운형 等과 함께 左右合作運動 活動 等을 展開하였다. 1946年 8月 美軍政廳의 南朝鮮過渡立法議院 議員으로 當選되었고 1947年 2月 5日 에는 南朝鮮過渡政府 의 政府首班 兼 民政長官으로 任命되어 1948年 8月 15日 까지 勤務했다. 南北協商 에는 消極的이었으나 南北協商 失敗 後 大韓民國 政府 樹立을 認定, 大韓民國 國紀施政委員會 委員 等으로 參與했다. 1950年 5月 의 第2代 國會議員 總選擧에 出馬하여 當選되어 國會議員으로 活動했으나, 6月 25日 韓國戰爭 朝鮮人民軍 에 依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으로 拉北되었다. 雅號 는 民世(民世), 우헌(又軒)이고, 字는 警六(景陸), 재홍(在鴻)이다. 京畿道 水原郡 (只今의 平澤市 ) 出身.

解放 後에는 中道右派의 指導級 政治家로서 旣存의 支配階級 爲主의 理論을 否定하고, 自身이 定立한 新民族主義論과 新民主主義論에 立脚하여 右派를 中心으로 左派까지 網羅하자는 이른바 민공協同論을 主唱하였다. [1] 그러나 微笑間 冷戰體制가 固着되어가는 國際情勢 下에서 中道派들의 민공協同論은 實現可能性이 稀薄한 便이었다. 이에 安在鴻은 李承晩 과 유엔과 美國 이 提案, 支持하는 南韓 斷定樹立論을 積極 受容함으로써 理想主義 字에서 現實主義者로 變身하였다는 評이 있다. [1]

生涯 [ 編輯 ]

初期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京畿道 水原郡 宗德面 繫累地利에서 地主 出身인 순흥 安氏 안윤섭(安允燮)과 어머니 南陽 洪氏 사이에 8男妹 中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高麗 말의 性理學 安珦 의 24代孫이자, 政堂文學, 藝文館 大提學 을 지낸 안원숭(安元崇)의 21代孫이었다. 그의 집안은 地主 집안이었고 아버지 안윤섭은 大韓帝國 때인 1902年 惠民院 注射 를 歷任하였지만 스스로 辭職書를 내고 平澤으로 내려왔다. 下級 官僚를 지냈던 아버지 안윤섭의 臺에 符號가 되어 界루지部落의 支柱로 成長했다. 집안의 財産은 兄 안재봉과 조카 안우용에게로 相續되었다. 어린시절 安在鴻은 勤王意識이 剛한 할아버지 안상규와 아버지 안윤섭의 影響을 받아 歷史意識이 强했다고 한다. 15歲 때 水原 의 富戶家였던 이규복(李圭復)의 無男獨女인 慶州李氏 이정순을 아내로 맞았다.

17歲 때 眞僞의 私立 振興義塾에 入學했고, 이어 水原의 基督敎界 學校로 進學한 後 서울 경성기독청년회(YMCA) 中學部에 入學한다. 基督敎靑年會 中學部에 다니며 이상재 , 남궁억 , 윤치호 等에게서 많은 影響을 받는다. 1910年 8月 여름放學으로 眞僞에 내려와 있다가 庚戌國恥 消息을 接하게 되었다.

幼年期 [ 編輯 ]

母校 와세다 大學校

李承晩 等의 影響과 越南 李商在 의 勸誘로 安在鴻은 留學을 決心, 경성기독청년회(YMCA) 中學部 卒業 以後 日本 으로 留學하여 1909年 9月 도쿄청년학원에 들어가 高等學校 課程을 履修하고 1910年 9月 에 修了하였다. 1911年 9月 日本 와세다 大學 政治經濟學部 經濟科에 入學, 在學 中에는 學科目 工夫 外에 趣味로 冊벌레라는 別名이 붙을 만큼 밤을 새워가며 讀書를 하였다. 많은 讀書를 하며 그는 歷史學, 政治學, 經濟學, 人類學, 文學 等 多樣한 分野의 學術 知識을 폭넓게 習得하였다. 日本 에서 그는 後輩인 여운홍 , 윤치영 等을 다시 再會했고, 신익희 , 송진우 , 趙素昻 韓國 인 留學生들과도 만나 交分을 쌓았다. 그 外에 '韓人留學生學友會'를 結成, 조만식 , 송진우 , 장덕수 , 이광수 等과 交流하면서 獨立運動 에 加擔하였다. 그 뒤 와세다 大學 經濟科를 卒業하였다. 以後 그는 號를 '民勢'(民世)라 지었다.

日本 에 留學中이던 1912年 도쿄 에서 安在鴻은 황성기독교청년회의 野球팀을 거느리고 日本 을 訪問한 여운형 을 처음 만나 사귀기 始作하였다. [2] 여운형 의 俊秀한 外貌와 達辯에 安在鴻은 깊이 빠져들게 된다.

以後 洋人은 "서로 깊은 認識을 나눌" 程度로 親密한 關係를 維持하였다. [2] 1913年 상하이 에서 신규식 이 組織限 洞祭祀 에 加入했지만 實質的인 活動은 1916年부터 始作하였다. 1914年 6月 와세다 大學 政經學部 政治經濟科를 卒業하였다.

靑少年期 [ 編輯 ]

敎育啓蒙運動 [ 編輯 ]

歸國과 同時에 敎育界에 投身, 1915年 4月 中央高等普通學校 에 學監으로 在職하고 있었고, 1916年 中國 으로 건너가 상하이 (上海)로 건너가, 신규식 等의 洞祭祀 (同濟社)에 加入하여, 신규식 , 신채호 (申采浩) 等과 함께 活躍하였다. 以後 그는 신채호 를 尊敬하였다 한다. 그 後 歸國하여 1917年 初, 學生들에게 不溫한 思想을 심어주려 한다는 理由로 一齊 總督府 當局의 壓力을 받고 中央高等普通學校 學監職을 辭退하였다. [3] 安在鴻은 이 무렵 大倧敎 에 歸依하기도 한다. [3]

1916年 12月 26日 윤치호 의 薦擧로 京城 朝鮮중앙기독교청년회 (中央 YMCA)의 職員으로 採用되었다. 1917年 1月 朝鮮중앙기독교청년회 敎育部 幹事가 되었으나 그해 5月 辭職하였다.

한便 財産을 모으는데 關心이 없었던 그는 오히려 아홉 番의 投獄으로 작은 財産도 大部分 잃고 가난하게 生活하였다. 그러나 그는 語文硏究나 古跡地 踏査, 文獻에 나온 指名 찾는 일을 抛棄하지 않았다. 그의 동생 안재학度 朝鮮總督府 를 위해서는 일할 수 없다며 경성제국대학 敎授職과 연희전문학교 敎授職 提議를 拒否하고 平澤 고덕면으로 落鄕하여 隱遁하였다.

生活苦를 겪던 그는 윤치호 에게 돈을 빌렸으나 갚지 않았다. 윤치호 1917年 2月 1日 木曜日 日記에 安在鴻이 自身에게 빌린 돈을 갚겠다는 約束을 어겼다고 記錄했다. 後에 1926年 朝鮮日報 운영과 빚을 淸算할 目的으로 윤치호 에게 5千 원을 빌려줄 것을 要請했으나 윤치호 는 自身의 朝鮮基督敎창문사(朝鮮基督敎彰文社) 關聯 빚 1萬원과 빚으로 인한 訴訟을 理由로 拒絶했다. 1926年 8月 17日 火曜日의 日記에 記錄해두었다. 尹致昊는 빚을 갚을 方法을 硏究하지 않고, 新築 建物을 짓는데 돈을 빌리느냐며 그의 要求를 拒絶했다.

3·1 運動과 投獄 [ 編輯 ]

1919年 3·1 萬歲 運動 이 일어나자, 그는 軍平澤 에서 學生들의 萬歲 運動 을 指導하기도 하였다. 그해 5月 祕密組織인 大韓民國 靑年外交團을 組織, 大韓民國 靑年外交團 總務로 活躍하며 大韓民國臨時政府 와 連絡하다가 總督府에 依해 檢擧되어 11月 慶尙北道 警務部에 依해 大邱로 押送되었다. 大邱 警務部에서 酷毒한 拷問을 當한 安在鴻은 呻吟소리조차 내지 않아 顧問官마저 혀를 차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등뼈에 甚한 打撲傷을 입은 그는 그 뒤 後遺症으로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된다. [3] 바로 裁判을 받았고, 1920年 12月 大邱地法 最終 裁判에서 濟寧 違反嫌疑로 懲役 3年 刑을 宣告받고 大邱刑務所 에서 服役했다.

1922年 出獄하였다. 出所 以後 1923年 최남선 等과 '時代日報'(時代日報)의 創刊에 參與하였다. 1924年 3月 '時代日報' 論說記者로 言論에 첫발을 디딘 後 理事와 論說委員을 지냈다. 같은 해 9月에 '朝鮮日報'로 자리를 옮겨 主筆 兼 理事가 되었고, 1926年 9月부터는 主筆 兼 發行人이 되었다. 1930年 1月 부터 朝鮮上古史 를 始作으로 신채호 의 著作을 朝鮮日報 에 連載하여 國內에 紹介하기도 했다. 以後 日本 製品의 國內流入을 보고 조만식 · 金性洙 · 송진우 , 이규완 等과 物産奬勵運動을 推進, 物産奬勵會(物産奬勵會) 理事에 選出되었으며 國産品 奬勵運動을 主管하였다.

日帝 强占期 活動 [ 編輯 ]

獨立運動 [ 編輯 ]

新幹會 活動 [ 編輯 ]
1927年 2月 14日, 新幹會 創立 모습.
1927年 2月, 新幹會 創立을 報道하는 東亞日報 記事.

1920年代 中盤 무렵에 自治運動론, 民族的 經綸 等 民族改良主義가 擡頭되었을 때 民族主義者들 內部에 妥協的 民族主義者와 非妥協的 民族主義者로 나뉘게 되었다. 安在鴻은 絶對獨立論을 主唱하는 非妥協的 民族主義者였는데, 이 무렵 民族唯一黨 運動 等이 展開되어 社會主義 勢力이 非妥協的 民族主義 者들과의 協力을 要請하면서, 이들과 힘을 합쳐 1927年 허헌 , 김병로 , 허정숙 , 조병옥 等과 新幹會 를 結成하는 데 參與하고, 바로 新幹會 本部 總務幹事로 選出되었다.

이와 同時에 1927年 現代評論 》이 創刊되자, 그 創刊號에 이관용 (李冠鎔)· 김준연 · 이순탁 (李順鐸)· 백남운 (白南雲)· 홍명희 · 이긍종 等과 함께 參與하였다. [4] 이 무렵에 新幹會 總務幹事 等 여러 幹部職을 지내면서 本格的인 抗日運動을 벌여 나갔는데, 總督府에 依해 2次例에 걸쳐 逮捕되어 獄苦를 치른다. 그 뒤 新幹會 가 日帝의 壓力과 이런저런 事情으로 解體 危機에 處하자, 그는 新幹會의 解消를 極口 反對하였다. [3]

獨立運動과 啓蒙 活動 [ 編輯 ]
1929年, 朝鮮日報 副社長 時節.

1928年 1月 筆禍事件과 關聯하여 拘束되어 獄苦를 치렀다. 같은 해 5月 論說 〈濟南 事件의 壁上觀〉의 內容이 問題가 되어 獄苦를 치르며 이때 《朝鮮日報》 亦是 無期 停刊處分을 받는다. [3] 뒤에 朝鮮日報가 無期停刊에서 풀리면서 朝鮮日報 로 復歸, 1929年 1月 朝鮮日報 副社長을 거쳐 1931年 5月 社長이 되었다.

1932年 朝鮮日報 의 經營難으로 빚을 지게 되었다. 安在鴻은 尹致昊에게 5千원을 빌리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1932年 1月 31日 日曜日 朝鮮日報 의 滿洲地域 朝鮮人 難民 救護基金 5千원 關聯 問題가 發生하자, 신흥우 가 尹致昊를 찾아가 安在鴻의 빚 5千원을 代身 갚아줄 수 없느냐며 도움을 要請하기도 했다. 신흥우에 依하면 朝鮮一步 編輯長인 安在鴻이 돈 5千원을 朝鮮總督府 關聯 部署에 提出하지 못하면 그는 公金橫領罪로 拘束될 수 있다며 尹致昊에게 도움을 要請했다. 그러나 尹致昊는 신흥우의 도움 要請을 拒絶했다.

1932年 安在鴻은 自身이 社長職을 맡고 있는 朝鮮日報 社의 社長의 後任으로 여운형 을 推薦하였다. [2] 그리하여 여운형 의 應諾을 받았으나, 呂運亨은 홍증식 等 左翼 人士들의 勸誘 때문에 不得已 이를 撤回한 일도 있었다. [2]

1932年 2月 이른바 再滿洲同胞口號義捐金 流用事件에 連累되어 營業局長 李承福(李昇福)과 함께 橫領罪를 理由로 拘束, 西大門刑務所 에 投獄되었다. 4月 22日 朝鮮日報 社長職을 辭退, 理事會에서 修理되었다.

그해 7月 19日 京城地方法院의 公判에 李承福과 함께 橫領罪를 理由로 回附 [5] , 7月 20日 保釋이 許可되어 西大門刑務所 를 出所하였다. [6] 1932年 12月 1日 京城地方法院의 最終 心理에서 懲役 8個月에, 동산 資産 60日間 凍結 刑을 宣告받았다. [7] 出所 後, 1935年 5月부터 〈조선일보〉의 客員으로 〈民世筆談 民世筆談〉을 執筆했다.

그러던 中 1936年 6月 中國 난징 (南京)軍官學校에 두 靑年의 密派 入學을 斡旋한 事件에 連累된 嫌疑로 또다시 逮捕되었다. 이때 臨時政府 와의 內通이 發覺되어 懲役 2年 刑을 宣告받았으며, 1938年 풀려났다. 1936年 부터 茶山 정약용 의 外4代孫 金聖鎭의 付託으로 《 與猶堂全書 》를 爲堂 정인보 와 함께 한글 로 飜譯하던 安在鴻은 西大門刑務所 에서도 與猶堂全書의 一部를 한글로 解釋, 飜譯하는 作業을 했다. 그러나 1938年 첫 夫人 이정순 肺炎 으로 世上을 떠났다. 墓所는 平澤 고덕면 두릉리에 安葬하였다. 1938年 5月 그는 다시 興業俱樂部 事件 (興業)으로 連累되어 拘禁되기도 했다. 그는 1919年 以後 20餘 年 동안 無慮 9番에 걸쳐서 日帝 總督府에 依해 逮捕되어 7年 8個月間의 獄苦를 치러야 했다. 長男 安定用의 結婚式 때는 興業俱樂部 事件 으로 西大門警察署 에 收監中이라 參席할 수 없었다. [3]

그는 日帝强占期 時代 동안 1920~30年代에 民族敎育啓蒙意識과 獨立精神을 鼓吹시키는 데 寄與했으며, 1940年代에는 新民族主義 私學 을 主張하는 歷史觀을 確立하여 他民族에 對한 自主的인 立場을 堅持하려는 民族史觀을 主張했다. 그는 自身의 家庭 살림에는 無關心하였다. 安在鴻의 며느리인 金巡警은 後日 인터뷰를 통해, 安在鴻이 都統 살림은 神經을 쓰지 않는 바람에 그의 아들인 安定용이 살림을 도맡아야 했다고 한다. [3] 도리어 그는 이희승 等의 生活費와 한글硏究費를 支援하기도 했다. 興業俱樂部 事件 의 關聯者로 起訴되었던 그는 윤치호 의 身元保證과 赦免 要請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太平洋 戰爭 以後 [ 編輯 ]

1940年 外部 活動을 줄이고 畢生의 作業인 <朝鮮上古史鑑>의 著述을 위해 故鄕인 平澤郡 고덕면 두릉리 집에 隱居하며 古朝鮮 硏究에 沒頭하였다. 1941年 創氏改名을 强要할 때 그는 創氏改名을 拒否하였다. 朝鮮總督府 는 恒常 그를 要視察人物로 監視했다.

1941年 分性金氏 김부례 와 再婚하였다. 김부례의 親庭에서는 結婚에 對한 反對가 甚하였으나, 김부례 는 安在烘과의 結婚을 固執하였다.

김부례 는 安在鴻이 拉北된 뒤 2000年 11月 25日 享年 91歲로 世上을 떠났다. [3]

1942年 12月 朝鮮語學會 事件 으로 咸鏡南道 흥원警察署에 收監되었다. [8] 곧 裁判받고 咸興刑務所로 移監되었다. 1943年 3月 3個月만에 不起訴로 풀려났지만, 이때의 拷問으로 인한 苦痛과 後遺症은 두고두고 그의 精神과 肉體를 괴롭혔다. [9]

安在鴻은 日帝 强占期 時節, 總督府에 依해 逮捕되어 隨時로 收監되었는데, 收監되었던 事件들을 羅列하면 다음과 같이 整理한다.

  • 1919年 11月 - 靑年 外交團 事件으로 收監, 懲役3年 兄 求刑 (第1次 獄苦)
  • 1928年 1月 - 朝鮮日報 社說“保釋遲延의 犧牲”으로 投獄 (第2次 獄苦)
  • 1928年 5月 - 朝鮮日報 社說 “濟南事件의 壁上觀 ”으로 投獄 (第3次 獄苦). 獄苦를 치르면서 朝鮮日報 가 武器 停刊處分을 받았다. 뒤에 武器停刊에서 풀리면서 安在鴻은 조선일보로 復歸하고 朝鮮一步 社長에까지 올랐다.
  • 1929年 12月 - 新幹會 光州學生事件 眞相報告 民衆大會 事件으로 投獄 (第4次 獄苦)
  • 1931年 5月 - 朝鮮一步 社長 獄中 就任
  • 1932年 3月 - 滿洲 同胞 救護 義捐金 關聯으로 投獄 (第5次 獄苦)
  • 1936年 5月 - 軍官學校 事件으로 投獄 (第6次 獄苦). 中國 난징軍官學校에 두 靑年의 密派 入學을 斡旋한 事件에 連累된 嫌疑로 逮捕되었는데 大韓民國 臨時政府 와 內通한 것이 發覺되어 懲役 2年 刑을 宣告받아 1938年 풀려났다. (그 해에 첫 夫人 이정순이 肺炎 으로 世上을 떠났다. )
  • 1938年 5月 - 興業俱樂部 事件 으로 投獄. (第7次 獄苦) 長男 安定用의 結婚式 때 西大門警察署에 收監中이라 參席할 수 없었다. 咸鏡南道 흥원警察署에 收監되어 3個月만에 不起訴로 풀려났다.
  • 1938年 10月 - 軍官學校 事件 刑確定으로 投獄. (第8次 獄苦)
  • 1942年 12月 - 朝鮮語學會 事件 으로 投獄. (第9次 獄苦)

1919年 以後 9番에 걸쳐서 總督府에 逮捕되어 7年 8個月間 獄苦를 치렀다.

日帝 强占期 後半 [ 編輯 ]

釋放과 敗戰 準備 [ 編輯 ]

1943年 7月 釋放되었다. [10] 出所 直後 卽時 京城 으로 上京했다.

出所 以後 安在鴻은 1944年 가을 一齊 의 敗亡에 對備하여 民族主義 組織을 結成하려고 하였으나 實行에 옮기지 못하였다. 1944年 여름무렵, 安在鴻이 여운형 을 찾아갔을 때 여운형 이 ' 地下組織 을 같이 結成하고 活動하자'고 勸했는데, 安在鴻은 '그렇게까지 非合法的 活動까지는 생각지 않으므로 地下組織은 그만둔다.'면서 鄭重히 辭讓했다. [11] 그 해 12月 日帝 核心 指導部와 時局 收拾을 論議하는 자리에서 여운형 과 함께‘民族自主’,‘호양協力’,‘摩擦防止’의 3原則을 提示하였으나, 日帝는 이러한 主張을 拒否하고 이때부터 安在鴻은 日帝의 暗殺威脅을 받아 서울市內에서 逃避 隱身하였다. 隱身 生活 하는동안 安在鴻은 歷史서 執筆에 沒頭했었다.

그 後 그는 日本 의 敗亡 兆朕을 感知하고 國內의 民族主義 및 社會主義 系列의 人士들과 活潑하게 接觸하였다. 이러한 交流를 통해 그는 解放 後 또는 直前에 갑자기 發生할지도 모르는 朝鮮總督府 側과 朝鮮人間의 大量流血事態를 避하고 自主的 民主主義 國家를 建設하려는 事前構想에 汨沒하였다. [10]

以後 1944年 10月 美軍의 東京大攻襲 以後 그해 12月 上旬부터 敗戰에 對備한 時局收拾策을 마련키 위해 韓國의 指導級 人士들과 接觸을 갖기 始作한 朝鮮總督府 側의 注目을 받게 되었다. [10]

密使 派遣 準備와 挫折 [ 編輯 ]

1944年 11月 安在鴻은 重慶으로 가서 中國과 和議 交涉을 해달라는 朝鮮總督府 의 付託을 받는다. [12] 11月 安在鴻은 바로 윤치영 을 訪問하였다. 安在鴻의 말은 "엔도(遠藤) 政務 總監이 나와 여운형 을 만나보라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에 윤치영 은 "敗戰이 짙어가는 마당에 무슨 酬酌인가" 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12] 그에 依하면 '1944年 7月 18日 戰爭을 일으킨 度祖 히데키 (東條英機) 內閣이 總辭退하고 고이소 구니아키 (小磯國昭) 內閣이 構成된 지도 여러 달이 되었다. 日本 에 對한 協力을 假裝하고 中國 東部에 傀儡政權을 세웠던 汪兆銘 (王兆銘, 改名 王精衛)은 같은 해 11月 에 病舍라는 口實下에 第가되었다. 民世의 말은 엔도가 夢陽과 윤치영 과 자기 세 사람에게 南京 으로 가서 왕정위(王精衛)를 만난 뒤 蔣介石 을 찾아가 日本 이 中國과 休戰하는 和平 交涉을 펼 수 있도록 日本 政府의 密書를 傳達해 달라고 付託했다는 것이다. [12] ' 윤치영은 "이 사람이 氣가 찬 소리를 한다 [12] "고 하며 反對했다.

* 윤치영  : 이 사람아 더운 박 먹고 식은 소리 작작하게. 萬一에라도 말이네만 兄님과 우리가 重慶으로 간다고 하세. 或是 政略的으로 우리를 場 總統과 만나게 해 줄는지는 모르나, 거기에는 우리 臨時政府 가 서 있고 光復軍 이 있네. 日本 의 意圖야 어찌 되었건 우리는 (重慶에) 갔다가는 當場 銃殺감이야. 그리고 나는 아직도 監房 生活의 後遺症으로 다리가 성하지 않아 잘 걷지도 못하는 形便일세. 가려거든 夢陽과 둘裏書나 가보게 [12]

  • 安在烘 : 괜히 輕擧妄動 하지 말고 몸操心이나 하게. 곧 解放이 될 터이니 [12]

윤치영 美國의 소리 短波 放送과 李承晩 의 日本 내막기 等을 愛聽하였지만 충칭 行은 無謀한 行爲라는 것이었다. 윤치영은 後日 "安在鴻 兄은 가끔 싱거운 소리를 잘 하는 親舊이지만 그때는 무슨 壓力을 받았기에 그런 소리를 했는지 나는 가끔 그때 생각을 해본다 [12] "고 回顧하였다.

光復 直前 [ 編輯 ]

朝鮮總督府는 여러番 사람을 보내 그에게 協力을 要請했다. 이를테면 總督府가 安在鴻을 包攝하려는 主要 動機는 治安을 維持하여 暴動을 防止하고, 여운형 을 통해 沿岸政府와 連絡하고, 蘇聯을 통해 美英 列强과 平和工作을 推進하려는 것이었다. [13]

安在烘度 治安維持에 關聯해서는 一部 同意하였으나, 이러한 意圖를 지니고 數次例 接近하는 總督府側의 協力 要求를 安在鴻은 그때마다 한호히 拒絶하였다. 當時 그는 總督府 警務局長 니시히로 타다오(西光忠雄)에게 單刀直入的으로 壬辰倭亂 · 乙未事變 및 關東大地震 때 日本人이 韓國人을 無慈悲하게 殺戮한 事例를 列擧하면서 "當身들은 朝鮮에서 退却할 날이 있는 것으로 치고, 退却하는 때에 韓日 兩民族 사이에 큰 摩擦을 일으켜 彼此間에 大型 流血事態를 일으키지 아니하도록, 미리부터 末端 方面, 郡民 各界에 徹底한 訓鍊을 시켜두는 것이 必要하다 [13] "고 主張하였다.

이어 그는 그 對策으로서 民族自主, 호양協力, 摩擦防止 等의 3原則을 提示하고, 言論과 行動의 自由를 許容해줄 것을 要求하였다. [13] [14] 總督府 側은 이러한 要求에 對해 一旦 肯定的으로 受容하겠다는 態度를 보였다. [15]

1945年 1月 에 이르러 朝鮮總督府側은 立場을 豹變하여 "流血防止는 趣旨 加하나, 民族自主를 부르짖는다니 治安維持法을 適用하여 女, 안 良人을 拘禁할 수 있다"고 威脅하였다. 同時에 總督府는 '히로시마兆'(廣島組)라는 暴力團을 組織하여 萬一의 境遇에 여운형·安在鴻 良人을 暗殺하겠다고 公言하였다. [15] 實際로 地方法院 檢事 모리우라(森浦)는 公開的으로 暗殺을 勸奬하는 演說을 하면서 제1자객과 第2刺客을 指定하여 安在鴻을 除去하자고 말했다고 脅迫하였다. [16]

이때 安在鴻의 側近人士들은 總督府側과 '호양協力'하면 後날 親日協力派 라는 是非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憂慮에서 異議를 提起하였다. 그러나 安在鴻은 "只今 民族自主를 들고 나와 對日折衝을 한다는 판인데, 그까짓 호양協力 쯤은 겁낼 것 없다"고 하면서 日本과 從前에 對備한 協商을 再開하겠다는 이른바 호양協力의 姿勢를 一貫되게 堅持하였다. [15]

1945年 8月 14日 니시히로 다다오 朝鮮總督府 警務局 張의 招待로 總督府를 訪問, 日本의 敗戰消息과 함께 敗戰 直後 朝鮮半島의 治安을 도와달라는 要請을 받았다.

解放 後 [ 編輯 ]

建準위 活動 [ 編輯 ]

建國準備委員會의 委員長 여운형

1944年 여운형 이 日帝의 彈壓을 避해 京畿道 楊州郡 의 奉安 理想村으로 내려가 祕密地下組織인 建國同盟 을 結成하였는데, 이는 建國準備委員會의 母體가 되었다. 여운형 日本 帝國 이 敗亡하여 降伏하자, 바로 8月 15日 저녁에 安在鴻 等과 함께 建國同盟 委員들을 中心으로 建國準備委員會 를 結成하였다. [17]

安在鴻은 1945年 8月 15日 밤 發足된 建國準備委員會 의 副委員長을 맡았고, [18] 1945年 8月 16日 京城중앙방송국 에 나가 放送 演說을 하였다. 安在鴻은 建準의 決定 消息을 알리면서 秩序 維持를 위한 警備隊와 정규병의 編成, 食糧 確保와 配給, 通貨와 物價 安定, 未決의 政治犯 釋放 等의 問題를 言及하였다. [19]

송진우

한便 安在鴻은 원서동 송진우 의 自宅을 찾아가 建準에 協助해줄 것을 要請했지만 송진우 大韓民國 臨時政府 奉戴論을 내세워 繼續 拒絶했고, 그 亦是 斷念했다. 김준연 도 拒絶했고, 다만 김병로 元世勳 은 그의 協力 要請을 拒絶하지 못하고 曖昧한 態度를 取했다. 와세다 大學 의 後輩이자 동생 안재학의 親舊인 윤치영 過度 接觸하였으나 冷淡한 反應이 되돌아왔다. 그러나 安在鴻은 屈하지 않고 한민당 界와의 接觸을 繼續 推進한다.

그러나, 그는 個人的으로 박헌영 社會主義 思想을 極度로 嫌惡하였다. 建準에서 박헌영 파의 影響力 强化되면서 安在鴻은 不便해졌고, 及其也 1945年 9月 初 安在鴻은 建準 과 訣別하였다. 박헌영 에 對해 反感이 建準을 떠난 主要因이지만, 충칭 臨時政府 에 對한 視角 差異도 重要한 理由였다. 方法의 差異는 있을망정 安在烘度 송진우 처럼 '臨政 奉戴論'을 내세웠던 것이다. [20] 安在鴻은 '臨政 絶對 支持'를 表明한 뒤 自身의 支持者들과 함께 9月 4日 建準을 脫退하였다.

그러나 安在鴻과 한민당 은 民族統一戰線과 左右合作運動을 두고 尖銳하게 對立하였다. [20] 9月 中旬, 권태석(權泰錫)李 서울 에서 安在烘, 이갑성 , 정인보 , 이규갑 等이 모인 곳을 訪問, 正當 統一 運動을 하자고 主張했다. 그러나 권태석을 疑心한 이갑성 은 卽席에서 拒絶했고, 安在鴻 等도 確答을 回避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解放直後 순흥安氏 宗親會 會長으로 推戴되었다. 그는 私的인 時間은 家族 또는 宗親會 活動에 參與하였다.

軍政期 政治活動 [ 編輯 ]

光復 直後 그는 左右의 階級 鬪爭, 理念 鬪爭 代身 統一 民族國家의 樹立을 主張하였다. 그는 資本主義의 矛盾點과 共産黨 一黨 獨裁를 모두 拒否하고 萬人이 共生할 수 있는 새로운 民主主義 體制의 導入이 必要하다고 力說했다.

45年 8月부터 여운형 建國準備委員會 에 參加하였으나 建準이 박헌영 의 介入과 影響이 左傾化되어가면서 安在鴻은 建國準備委員會 를 脫退, 9月 1日 朝鮮國民當 을 創黨하였다. 박헌영 이 ' 建國準備委員會 內에 民族主義者들이 많다'며 右傾化를 憂慮하며 改造를 要求하였다. 呂運亨은 單獨으로 決心할 일이 못된다며 副委員長이었던 安在鴻을 찾아가 協議하였는데, 安在鴻은 呂運亨에게 '박헌영을 멀리하라'며 그에게 忠告를 하였다고 한다. [21] 그러나 建準에서의 박헌영 파의 影響力 强化는 安在鴻을 매우 不便하게 만들었고 安在鴻은 9月 初 建準과의 訣別을 宣言했다. [21]

1945年 9月 24日 社會民主黨·自由黨·民衆共和黨·近憂同盟·協贊同志會 等의 群小 政黨과 統合하여 國民黨을 創黨하였으며, 國民黨은 다시 1946年 4月 18日 韓國獨立黨 에 吸收되어 韓獨黨에 入黨하였다. 한便 그는 金性洙 의 勸告로 한민당에 入黨하는 것도 考慮하였지만, 한민당의 一角에서는 安在鴻을 左派, 朝鮮式 共産主義者라고 陰害하였고 安在鴻의 한민당 迎入은 霧散되었다. 1945年 10月 23日 에 열린 獨立促成中央協議會 結成大會에 參席하여, 李承晩 을 會長으로 推戴하였다.( 獨立促成中央協議會 參照)

11月 23日 朝鮮日報 가 復刊되자 [22] 그는 "(조선일보가) 日本 帝國主義의 彈壓으로 絶食(絶息·숨이 끊어짐) 되었었고, 이제 朝鮮民族에게 約束된 解放과 함께 또다시 그 報道와 批判 및 선양의 機關으로서 神(新)出發하게 되는 것은 매우 必要한 일"이라며 祝電을 보내주었다. [22]

1945年 12月 23日 午後 2時 金九 가 主管하는 殉國先烈追念大會에 參與하였다. [23] 殉國先烈追念大會 委員으로 選出되었다. [23] 金九 가 모스크바 3上會談에 反撥, 强力한 反託運動을 推進하자 12月 30日 結成된 信託統治反對 國民總動員委員會 委員이 되었다. [24] 곧 託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 委員長으로 被選되었다. [24] 1946年 右翼 言論人 漢城日報社 의 社長에 就任, 漢城日報社를 맡아 運營하기도 했다.

信託統治 反對에서 旋回 [ 編輯 ]

처음에는 安在烘度 信託統治를 反對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스크바 3賞 會議의 決定事項을 仔細히 살피고 當時의 國際情勢를 考慮한 다음, 1946年 4月8日 에 韓民族은 當時 唯一한 韓半島 統一方案으로써 關聯强大國間의 合意에 依해 마련된 모스크바3賞會議의 決定事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主張하기에 이르렀다. [25]

于先 信託統治問題는 민공協同으로 左右合作을 성사시킨 後 美蘇共同委員會(美蘇共委)에 提示할 提案을 作成하는 過程에서 韓民族의 團結된 意思를 反映해야 한다고 하였다. [25] 그러나 그의 이러한 생각은 탁치는 賣國이라는 認識 또는 託治를 美國이나 蘇聯의 植民地라고 보는 認識에 埋葬당하고 만다.

安在鴻은 金九 , 李承晩 等 反共主義 右翼人士들과 달리 모스크바 3賞會議의 決定事項을 受容하는 것이 곧 信託統治를 許容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25]

1月 12日 第2次 反託示威를 전후하여 反託의 물결이 다시 全國으로 擴散되었다. 國民經濟의 破産을 憂慮한 安在鴻은 이미 1月 8日 서울 중앙방송을 통해 "託治를 反對하는 것이지 聯合國에 敵對하는 것이 아니며, 全民族의 意思表示가 大衆生活에 支障이 없어야 하므로 罷業을 풀고 職場에 復歸하라"는 罷業撤回 促求演說을 하였다. [26] 이어 1月 15日 의 放送演說에서 그는 "國際的 國內的 狀況 變化에 直面하여 우리는 極左, 極右思想을 排擊하고 韓國獨立을 爲해 일하고 있다 [26] " 라며 信託統治를 둘러싸고 있는 左右의 極限對立을 警戒하는 態度를 보였다. [25]

1月 29日 "濁治安이 아직 實施가 아니된 代身 撤廢도 아니되었으니, 將來를 위하여 無用한 反託示威는 必要할 때까지 禁止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25] 이로써 그는 反託 論理를 實現하기 위해서는 極限 鬪爭도 不辭하겠다는 一部 强勁派 人士들과 立場을 달리하였다. [25]

右翼政黨 團結 努力 [ 編輯 ]

安在鴻은 한민당과 함께 李承晩의 非常국민회의와 金九의 非常政治會議를 聯合시킴으로써 建國의 道程을 앞당기려는 方案을 講究하였다. [27] 當時 安在鴻이 提示한 解決方案은 獨立促成中央回 를 中心으로 各 黨派關係를 考慮하여 人選한 다음에 非常국민회의를 열고, 거기에서 李承晩 , 金九 等의 領袖에게 指名權을 一任하여 最高政務會議를 構成하고 統一政府를 실현시키자는 것이었다. [27]

이러한 安在鴻의 意見은 收容되어 그는 鼻聲국민회의 最高政務委員 28人 中 1人에 選出되어 周備會腸을 맡게 되었다. [27]

左右合作運動 參與와 過渡立法位 活動 [ 編輯 ]

右翼 政治人 活動 [ 編輯 ]
1946年 第1次 美蘇共委 . 왼쪽부터 李承晩 , 金九 , 스티코프 ,安在烘.

1946年 2月 13日 非常국민회의 ( 獨立促成中央協議會 非常政治會議 周備會 統合體)에서 最高政務委員職(銃 28名)에 選出되었다. [28] [29] 이어 1946年 2月 14日 非常국민회의 政務委員長으로 選出되었다. [29] 2月 14日 민주議員 이 結成되자 非常국민회의 最高政務委員 28人과 함께 민주議員 議員에 選出되었다

그러나 右翼 中心 團體의 活動을 하면서도 極右 勢力과는 一定部分 距離를 두었다. 그해 2月 여운형 김규식 , 元世勳 等이 左右合作運動을 推進하자 그 亦是 여기에 加擔한다.

그는 左右合作運動을 하는 理由로 "萬一 우리 韓國에서 適正 妥當한 合作으로 하루빨리 統一政府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의 祖國에는 重大한 危機가 찾아올 것"이라 警告하고, 極左와 極右 偏向으로 勢力이 치달으면 "멀지 않은 將來에 그야말로 內亂的人 抗爭의 피를 흘리게 할 可能性이 있다."고 披瀝하였다.

韓獨黨과의 統合 [ 編輯 ]

1946年 3月 國民黨과 韓國獨立黨의 統合에 呼應 安在烘 自身이 먼저 韓國獨立黨 에 入黨하여 韓獨黨 訓鍊部長에 選出되었다. 그런데 國民黨이 韓獨黨으로 吸收될 때, 中央執行委員을 選出하는 데 있어 若干의 問題가 생겼다. [30] 中央執行委員은 3黨에서 同數로 公薦하게 되어 있었는데, 當時 國民黨은 南韓 뿐만 아니라 北韓에도 7~8個 軍에 地區黨과 및 準備處가 있었고, 黨員 數도 20萬 名을 넘고 있었다. 이에 비하면 신한민族黨 은 至極히 黨勢가 弱하였고, 韓獨黨 亦是 黨員數가 많은 便은 아니었다. [30] 게다가 韓獨黨의 幹部들이 高踏的인 姿勢로 一貫하였기 때문에 國民黨 內에서 韓獨黨 과의 統合에 反對하는 輿論이 沸騰하였다. [30] 그러나 安在鴻은 統合 强行을 宣言한다.

"合黨은 처음부터 計劃했던 바이고, 또 이미 天下에 宣布 公約한 바이니, 그 새 또 뒤집는 것은 不可하다"는 立場을 堅持하며 無慮 1個月餘의 說得作業을 통해 合黨을 强行하였다. [30]

國民黨과 韓獨黨과의 統合은 '民族大同團結'을 바라는 安在鴻의 純粹한 動機에서 나온 것일 뿐만 아니라 反託運動으로 全國的인 支持를 얻고 있는 臨政 勢力에 힘입어 右翼 陣營 內에서 自身의 政治的 基盤을 强化하려는 苦心의 決斷에서 나온 것이었다. [30] 그러나 韓獨黨에 들어가려는 그의 試圖에 다른 이들은 大部分 冷笑的이었다. 國民黨과 韓獨黨의 統合에 對해 韓獨黨의 一部 原任幹部(元來부터 있었던 幹部)들과 美國의 政治가 및 新聞記者들은 이를 安在鴻의 政治的 失策으로 看做하고 있었다. [30]

1946年 6月 15日 午後 5時 40分 서울驛 에 마중나가 서울驛 에 到着한 三醫司 遺骨을 迎接하였다. 이어 太古史(太古寺)에 마련된 殯所에 參席하였다.

1946年 , 여운형 김규식 , 元世勳 , 여운홍 等과 같이 左右合作運動 에 參與하였다. 그해 12月 美 軍政의 南朝鮮 過渡立法委員會 議員으로 當選되어 過度立法委員會 에 參與하였다. [8] 5月 조봉암 이 轉向을 宣言하고 박헌영 에 對한 公開批判書를 發表하자, 安在鴻은 이를 入手해서 漢城日報 에 報道케 했다.

民政長官 在任 [ 編輯 ]

民政長官 活動 時節, 民世 安在鴻.

1947年 2月 5日 에는 美 軍政廳 의 民政長官으로 任命되었다. 그가 美軍政의 民政長官으로 任命되면서 各 部處의 長 및 道知事 韓國 仁으로 바꾸고 美國 燐을 顧問으로 임명했다. 美軍政 器具에 中道派가 파고들어오는 것을 警戒한 한민당 은 民政長官 安在鴻을 猛烈하게 攻擊하였다. [31]

한민당 이 反對하며 陰害工作까지 加勢하자 安在鴻은 괴로워하였다고 한다. [32] 自身의 政治路線을 '純情右翼'이라고 불렀던 安在鴻은 後날 '나는 最初에는 贊託賣國奴요, 다음에는 愛國運動 沮害者요. 또 다음에는 極惡無道한 貪官汚吏로 許多한 誹謗을 當하게 되었다'고 慨歎하였다. [32] 그는 한민당 共産黨 兩쪽의 攻擊에 시달림당했고, 金九 亦是 그를 冷淡하게 對했다. 左派는 그를 "階級意識을 稀釋化시키려는 小부르주아地", "地主의 아들"이라는 理由로 非難을 받았고, 右派는 그를 美軍政의 앞잡이, 贊託論者라는 非難하였다.

다만 安在鴻을 民政長官으로 推薦한 것이 한국민주당 이라는 見解도 있다. [32] 그에 依하면 美軍政 의 實情에 對한 責任은 지지 않고 싶었던 한민당 이 政治的 野心이 많지 않은 非한민당界 人物을 찾다가 安在鴻을 推薦했다는 說이다. [32] [33]

韓獨黨 黨首인 金九 (金九)는 그의 民政長官 入閣을 反對하지 않았으나 美蘇共委 參加를 놓고 參與拒否를 主張하는 舊 韓獨黨員과 美蘇共委 參與를 主張하는 舊 國民黨系列 間의 葛藤으로 國民黨 出身이 47年 4月賦로 韓獨黨에서 除名당하는 것을 目擊한다. 한便 그는 贊託論者로 몰리면서 刺客이 그의 집 담牆을 넘다가 걸려서 逃走하기도 했다.

政治 活動 [ 編輯 ]

微笑 共委 支持와 金九와의 葛藤 [ 編輯 ]

金九

그러나 安在鴻은 國民黨 韓獨黨 에 合黨된 後 金九 와 政見差異를 露呈하면서 對立하고 있었다. 그가 金九 와 立場을 달리했던 것은 信託統治問題와 美軍政 에의 參與問題 等이었다. [30]

1947年 5月 再開된 美蘇共委의 參加與否를 둘러싸고 參加하자는 韓獨黨內 國內派와 保留하자는 海外派間에 論爭이 일어났다. 海外波인 臨政側에서는 美蘇共委에 參加與否를 決意할 中央執行委員會 召集案을 提出한 國民黨 및 신한민주당게를 除名 處分하자는 主張을 내놓았다. [34] 이에 따라 安在鴻은 1947年 6月 19日 韓國獨立黨에서 除名당하였다. [34]

7月 3日 親日派 處斷을 要求하다가 김규식 과 함께 容共分子로 모는 삐라가 나돌고 壁報가 붙기도 했다. 이어 怪靑年들이 김규식 의 집을 둘러싸고 金奎植과 安在鴻의 辭退를 要求하는 示威를 벌였으며, 安在鴻의 事務室을 襲擊하여 反託, 反過度立法委員의 內容을 담은 傳單을 撒布하였다. [35] 그가 運營하는 漢城日報 에는 '어째서 警察이 立法議員 議長과 民政長官을 冒瀆하는 삐라를 붙여도 못본척 하고, 한민당을 非難하는 삐라를 撒布한 愛國婦女同盟 所屬 두 女性은 逮捕되었는가'라는 抗議性 記事를 發表하기도 했다. [35]

1947年 6月 初 박용희, 조헌식, 이의식, 李承福, 장지필, 엄우룡 等 舊 國民黨 出身 勢力과 함께 金九 等의 反託 路線에 反旗를 들고 美蘇共委의 成事를 위해 韓獨黨 을 脫黨하였다. [36] [37]

4.3 事態 鎭壓會議 參席 [ 編輯 ]

5月 5日 美軍政廳 軍政長官 兼 駐韓美軍 副司令官 윌리엄 F. 딘 , 民政長官 安在烘, 警備隊 總司令官 송호성 准將, 警務部長 조병옥, 濟州道 軍政長官 맨스필드 大領 等이 飛行機 篇으로 濟州道 에 着陸했다. 5日 午前 12時부터 4.3 事件의 解決을 놓고 濟州中學校 美軍政廳 會議室에서 열렸다. 參席者는 美軍政長官 딘 將軍, 民政長官 安在烘, 警備隊 總司令官 송호성 准將, 警務部長 조병옥, 濟州道 軍政長官 맨스필드 大領, 濟州道知事 유해진, 警備隊 第9聯隊長 김익렬 中領, 濟州道 警察監察廳長 최천(崔天), 딘 將軍 專用通譯官 金氏(牧師出身) 等 9名이었다. [38] [39]

會議의 主題는 4.3의 鎭壓에 對한 것이었고, 最高首腦會議에서 合意點을 찾지 못하면서 김익렬 조병옥 의 亂鬪劇이 發生한다. 會議에서 첫 番째로 發言하게 된 최천 警察監察廳長은 4.3暴動은 國際共産主義者에 依한 事前에 組織 訓鍊?計劃된 暴動이며 軍?經 大甁(大兵)을 投入하여 合同作戰으로 徹底하게 討伐할 것을 主張하고, 이어 發言한 김익렬 聯隊長은 武力 威壓과 說得, 宣撫歸順 工作을 竝用하는 作戰을 建議하였다. 그러면서 김익렬은 直接的인 導火線은 密貿易子 或은 남로당 共産主義者와 警察 間의 摩擦이나 仔細한 經緯를 알기 어렵다고 發言한다. 暴動者 數가 增加된 것은 빨치산이 右翼 人士들을 虐殺했지만 警察이 제대로 對應하지 못하고 樵童의 對策과 作戰에 失敗한데서 起因된 것이며, 이 作戰의 妨害要素는 警察의 紀綱紊亂이므로 前 濟州道警察을 自己의 指揮 下에 달라는 要求를 한다.

김익렬 이 證據로 提出한 寫眞帖을 들여다보던 윌리엄 F. 딘 長官은 興奮하여 寫眞 資料들을 조병옥 警務部長에게 던져주며 조병옥 에게 火를 낸다. 그런데 火가 난 조병옥 김익렬 을 共産主義者로 몰면서 會議場은 亂場판이 된다. 조병옥 은 聯隊長의 說明과 寫眞帖 等 證據物이 全部 虛僞造作된 것이며, 맨스필드 大領과 드루스 大尉에게 提出한 資料는 警察에 對한 中傷謀略이라고 極口 否認했다. 그러다가 김익렬 을 손가락으로 指目하며 “저기 共産主義 靑年이 한 사람 앉아 있소. 나는 오늘 처음으로 國際共産主義가 무서운 組織力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소.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等地에서 그랬듯이 처음에는 民族主義를 앞세워 各地에서 暴動으로 政府를 顚覆하고 나중에는 本色을 드러내는 것이 國際共産主義者들의 常套手段이요”라고 指摘했다. [38] [39]

火가 난 김익렬 은 “닥쳐라!”하고 高喊을 질렀다. 딘 將軍은 김익렬 을 制止하며 演說 妨害를 하지 말라고 命令하였다. 그러나 조병옥 은 繼續해서 김익렬 을 가리키며 “民族主義의 假面을 쓴 靑年들이 먼 外國에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現在 우리나라에도 있소. 바로 저 聯隊長이 그런 靑年이요. 우리 警察의 調査에 依하면 저 靑年의 아버지는 國際共産主義者이며 蘇聯에서 敎育을 받고 現在 以北에서 共産黨 幹部로 熱烈히 活躍하고 있소. 저 者는 自己 父親의 敎化를 받고 共産主義者가 되었으며 自己 父親의 指令에 依하여 行動하고 있는 것이요”라며 共産主義者일지도 모른다며 疑惑을 提起했다.

딘 將軍은 조병옥 이 김익렬의 父親이 共産主義 자라고 그럴싸하게 說明하자 깜짝 놀라며 疑心에 찬 눈초리로 김익렬을 쳐다봤고, 맨스필드 大領도 疑心하기 始作했다. 激忿한 김익렬 은 理性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壇上에 뛰어올라 演說하는 조병옥 에게 달려들었다. 誘導 3段이던 김익렬 中領은 興奮한 나머지 주먹으로 조병옥 을 끌어내 실랑이를 벌였고, 조병옥 의 腹部를 친 後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趙炳玉은 김익렬 의 表現에 依하면 '意外에도 힘이 장사였다. 當時 50歲가 넘었는데도 쉽게 넘어지지 않아 壇上에서 格鬪가 벌어졌다. 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조 博士의 넥타이를 당기니까 그는 목을 졸리게 되었다.'고 한다. 넥타이로 목이 졸린 조병옥 은 숨을 못 쉬고 悲鳴을 지른다. 최천 濟州警察廳腸이 말리러 올라왔으나 김익렬 의 발길질에 急所를 次여서 그도 悲鳴을 지르며 쓰러졌다. 딘 將軍이 송호성 將軍에게 싸움을 말리라고 高喊을 질렀고, 맨스필드 大領과 安在鴻이 달라붙어 김익렬 조병옥 을 떼놓으려 하였으나, 김익렬 亦是 高喊을 지르며 조병옥에게 辱說을 퍼부었다. “當身이 日帝時代에 獨立運動을 하였다기에 愛國者인 줄 알았더니 自己의 罪狀이 드러나니까 無辜한 나를 何必이면 共産主義者로 모느냐. 取消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하며 必死的으로 덤벼들었다. [38] [39]

송호성 將軍은 일어서지도 않고 앉은 채로 “이 놈 聯隊長! 누구에게 暴行을 하느냐. 네 놈이 죽으려고 換腸했느냐. 손을 놓고 말로 하라”하며 高喊을 친다. 그러나 말릴 뜻은 없는 듯 입으로만 號令號令했다. 돌아가는 內容의 大綱을 눈치챈 安在烘 民政長官은 손을 놓고 “聯隊長! 손을 놓으시오. 暴行을 멈추시오. 外國사람들이 우리를 野蠻人이라고 흉을 보니 어서 손을 놓고 말로 하시오”라며 制止했다. 유해진 知事가 壇上에 달라붙어 다시 김익렬 의 손을 떼어 놓으려고 하였으나 老齡이라 力不足이었다.

김익렬과 趙炳玉의 몸싸움은 激化되었고, 5月 5日 의 會議는 瞬息間에 會議場은 亂場판이 되고 말았다. 火가 난 딘 將軍은 通譯官 金某 氏를 불러 安在烘 民政長官과 송호성 將軍이 只今 무어라 말하고 있느냐며 불러 물었다. 그런데 通譯官이 딘 將軍에게 安在鴻 氏와 송 將軍이 聯隊長에게 “너는 共産主義者이며 나쁜 놈”이라고 辱을 하고 있다고 通譯하였다. 理性을 喪失한 김익렬 조병옥 의 넥타이를 붙잡고 通譯官에게 달려가 발길질로 陰囊을 걷어 찼다. 놀란 딘 長官과 安在烘, 송호성 은 會議室을 빠져나갔고, 通譯官은 悲鳴을 지르며 쓰러졌다. 딘 將軍은 待機 警護 中이던 美軍憲兵을 불러들여 場內 秩序를 整理하라고 命令했다. 數 名의 MP가 달려들더니 그 中 2名의 MP가 兩쪽에서 김익렬 의 팔을 붙잡아 비틀고, 조병옥 에게서 떼어놓고는 强制로 椅子에 앉혀놓고는 두 팔을 結縛하여 꼼짝 못하게 했다. 騷亂은 끝이 났고, 鎭壓 會議는 結末을 보지 못한 채 終結되었다. [38] [39]

政府樹立 參與 [ 編輯 ]

單獨政府 樹立에 贊成하지 않았으나 金九 , 김규식 等의 南北協商에도 懷疑的이었다. 그는 1947年 12月 20日 김규식 民族自主聯盟 創黨에 參與하여 民族自主聯盟 最高委員에 被選되었지만, 1948年 4月 에 열린 南北協商에 그는 不參하였다. 5月 5日 , 軍政長官 윌리엄 F. 딘 의 主導로, 安在烘, 警務部長 조병옥 , 警備隊司令官 准將 송호성 等이 濟州島를 訪問해 祕密會議를 가졌다.

1948年 6月 24日 朝鮮言論人協會 에서 서재필 , 安在鴻을 名譽會長으로 推戴했다.

1948年 7月 20日 , 1948年 大韓民國 大統領 選擧 에 候補者로 立候補, 出馬하였으나 2票를 얻는 데 그쳤다. 以後 國民黨 黨首와 조선일보사 社長 兼 主筆을 歷任하였다. 1949年 大韓民國 1代 大統領 李承晩 은 國紀視政委員會를 組織했다. 安在鴻은 國紀施政委員會 委員에 委囑되었다. [40] 南北協商이 失敗하고 單獨政府가 樹立되자 그는 單獨政府를 支持하는 立場을 보였다.

自身의 信念이자 理想論인 민공協同論의 實現可能性이 漸次 稀薄해지자 그는 未練없이 最善策을 버리고 李承晩 政權에의 參與라는 次善策을 選擇. [41] 하게 된다. 左右合作과 南北協商은 虛像이었으며 김규식 亦是 美軍政의 付託에 依해 南北協商에 參與했음을 알린 後 그는 李承晩 을 찾아갔다. 그와 함께 趙素昻 , 여운홍 等도 亦是 南北 協商 의 失敗를 認定하고 大韓民國 政府 樹立에 參與한다.

그러나 李承晩 의 두 番째 夫人 프란체스카 女史 는 南北協商, 左右合作論을 主張하다가 轉向하여 李承晩 을 찾아온 安在鴻을 無視하고 冷笑的으로 對했다. 프란체스카 도너 가 安在鴻을 蔑視하고 無視하던 것은 親舊였던 윤치영 과 그의 祕書 최기일 에게도 그대로 目擊되었다. 이를 目擊한 윤치영 의 公報祕書인 최기일 은 '安在鴻 氏가 프란체스카 에게 푸待接을 받고 가시는 것을 보고 나는 朝鮮 사람으로서 분한 마음이 들었다. [42] '고 證言한 바 있다. 簡單한 英語를 解讀할 수 있었던 그는 프란체스카 로부터 侮辱的인 待遇를 받으면서도 參考 이화장 景武臺 를 出入하였다.

政治 活動과 韓國 戰爭 [ 編輯 ]

1948年 8月 安在鴻은 民間委員으로 史學者 이병도 , 이선근 , 美術協會長人 火가 고희동 , 國語學者 崔鉉培 와 함께 參與하였으며 [40] 기타 官選인 國會議員, 法曹人, 言論人, 學者 等 總 42名의 市政委員이 選出되었으며 12名의 特別審査委員을 構成하여 새 나라의 國旗 採擇을 議論하게 했다. [40]

1949年 8月 20日 民族陣營强化委員會 常務委員에 選出되었다. [43] 한便 門中의 大小事에 關心이 많았던 그는 서울 麻浦 에 宣祖 安珦 의 祠堂을 짓는데에도 積極 參與하여 飼料 分析과 資金을 支援하였다. 安享의 祠堂은 1950年代 後半 서울 麻浦 에 建立되었다.

以後 1950年 第2代 國會議員 總選擧 에서 京畿道 平澤郡 民議員에 出馬하여 當選되었다. 그러나 6月 25日 韓國戰爭 이 勃發하자, 9月 26日 에 人民軍에 依해 北韓 으로 拉北되었다. [44] 政府의 安心하라는 放送을 믿다가, 朝鮮人民軍 의 모습을 보고 그는 서울 外郭에 숨어서 脫出을 試圖했으나 脫出하지 못하고, 家族의 安全을 위해 스스로 捕虜로 붙잡히는 길을 擇했다. 朝鮮人民軍 은 권태희와 2名의 情報要員을 시켜서 安在鴻이 숨은 곳과 緣故地를 追跡하였고, 그는 돈암동 自宅 近處에서 逮捕되었다.

被拉과 最後 [ 編輯 ]

6.25 戰爭 當時 그는 被拉당했지만 李承晩 政權 下에서 그는 越北한 人士로 여겨져 禁忌의 對象이 되었다. 한便 北韓 에서는 拉北, 越北人士들에게 協助를 要請했지만 그는 拒絶했고, 이렇다할 活動을 하지 않았다.

拉北당한 以後 安在烘에 對한 仔細한 記錄은 在北평통 最高委員으로 活動했다는 것만 알려졌을뿐 그外에 具體的인 活動에 對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곳에서 1965年 3月 1日 死亡하였다. [44] 그의 죽음은 日本 放送을 통해 當日에 大韓民國 으로 傳達되었고, 安在鴻의 아들 安定用과 辯護士 異人 (李仁) 等의 主管下에 3月 9日 서울 에서 屍身 없는 永訣式을 擧行하였다. 그의 故鄕인 京畿道 平澤郡의 生家에는 그를 記憶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韻構圖 없는 葬禮式은 쓸쓸하였다고 한다. 한便, 北쪽에서는 옛 同志인 벽초 홍명희 가 葬禮委員長이 되어 哀悼했다고 한다. [45]

事後 [ 編輯 ]

아들 安定용이 4代 國會議員 選擧에 平澤郡에서 出馬했지만 落選하였다. 孫子들 中에는 大企業에서 活動하다가 移民을 떠나기도 했다. 敎員 資格證 (中等)이 있던 며느리 金巡警은 敎職에 復歸하려 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1957年 11月 에는 北韓 間諜 박정호(朴正鎬)外 14名이 逮捕되었는데, 當時 檢察은 이들이 安在鴻의 密書를 받고 進步黨, 민혁당 等에 浸透하려 했다고 主張했다. 한동안 安在鴻은 韓國에서는 言及이 금기시되었다.

1965年 3月 安在鴻의 死亡 消息이 傳達되자 夫人 김부례 等은 그의 屍身을 引導해줄 것을 北韓에 要求했다. 北韓 政權은 그해 12月 처음에는 安在鴻의 屍身을 世界赤十字社國際委員會를 통해 돌려보내겠다고 約束했지만 約束을 지키지 않았다.

1970年 代부터 再評價 論議가 나오고 學術大會가 開催되었다. 그러나 아들 安定용이 進步黨 事件에 連累되어 1989年 解禁措處되기 前까지 公開的인 場所에서 暗暗裏에 言及이 금기시되었다. 1989年 3月 1日 建國功勞勳章 大統領章이 追敍되었다.

2008年 8月 學術誌 ‘韓國史 市民講座’ 下半期號(43號)에서 大韓民國 建國 60周年 特輯 ‘大韓民國을 세운 사람들’ 을 選拔, 建國의 基礎를 다진 32名을 選定할 때 文化, 宗敎, 言論 部門의 한사람으로 選定되었다. [46]

家族 關係 [ 編輯 ]

安在鴻의 아들인 安定用은 安在鴻이 拉北당한 뒤, 아버지의 同志였던 김성숙 을 따라 革新運動에 뛰어들지만, '拉北者 家族'이라는 理由로 警察의 監視 對象이 되어 그 生活의 困窮함은 말로 表現할 수 없을 程度였다고 한다. 1961年 5·16 軍士 政變 이 일어날 무렵, 1年 동안 獄苦를 치렀으며 以後 出版業에 從事하기도 했다. 安定用은 1970年 腦卒中 으로 갑작스레 世上을 떠났다.

  • 祖父 : 안상규 (安相揆)
  • 部 : 안윤섭 (安允燮)
  • 外祖父 : 南陽 洪氏
  • 某 : 南陽洪氏
    • 兄 : 안재봉(安在鳳)
      • 조카: 안우용
    • 男동생: 안재학(安在鶴)
    • 女同生: 안이영(安二英, 1894年 ~ ?)
    • 女同生: 안재숙(安在淑, 1907年 ~ ?)
    • 女同生: 안재영(安在英)
    • 男동생: 안在職(安在稷, 1909年 ~ ?)
  • 妻 : 이정순( 1889年 ~ 1938年 , 本貫은 慶州)
  • 妻 : 김부례(金富禮, 1909.2.29~2000.11.25, 本貫은 分性)
    • 딸: 안순희

思想과 信念 [ 編輯 ]

민공협동론 [ 編輯 ]

解放 直前에 安在鴻은 右派 民族主義 者들이 제1선에 나서고 左派 共産主義 者들이 제2선에서 協力하자고 하는 右派 優位의 민공協同論을 主張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階級革命 은 勿論 共産主義 者가 主導하는 어떠한 形態의 左右 提携에도 一貫된 反對意思를 나타냈다. [49]

安在鴻은 일찍이 " 社會主義 系列 人士들과 함께 監獄生活을 하는 동안 그들을 理解하고 그들과 親해질 수 있었다"고 述懷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態度는 그가 國內에서의 左右合作運動人 新幹會 運動에 積極 參與했던 것처럼 그로 하여금 '自主的 民主主義國家의 建設을 위해 民族主義者와 社會主義者 乃至 共産主義者가 合勢해야 한다는 민공協同의 政治觀을 지니도록 하는데 決定的 影響을 미쳤다. [2]

1944年 가을부터 日本이 敗亡한 後 駐韓日本軍과 韓國人과의 流血 衝突 및 韓國內 民族陣營과 共産陣營 間의 相쟁이 벌어질 것을 豫見하였다. 따라서 그는 "進步的인 民族主義路線에서 協同하자고 하는 것이고, 共産主義를 追後하는 協同은 意義를 이루지 못하는 것 [50] "이라는 認識下에 右派 優位의 민공協同論을 推進하였다. [50]

解放 直後 安在鴻은 共産主義 界 人士들을 訪問하여 그들에게 重慶 임정의 民族主義者들을 제1선에 나서도록 하고 [50] 共産主義 系列은 第2線에서 協力하는 것이 좋겠다고 說得하였다. [49] 그러나 共産主義 側은 自身들이 優越한 位置에 서려고 하였기 때문에 安在鴻의 提案을 受諾하지 않았다. [51]

登山 奇行 趣味 [ 編輯 ]

山을 좋아했던 그는 朝鮮의 各 産을 踏査하고 그 所感을 紀行文으로 남겼다. 故鄕인 平澤 월명산, 部落産을 始作으로 安城 고성산, 平壤 九月山, 全北 俗離山, 智異山, 無等山, 摩尼山 等을 登山하고 그 所感을 남겼다. 그는 日本 留學中에도 여름放學과 겨울放學을 利用해 中國을 踏査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1934年에는 俗離山을 訪問한 뒤 35日間 論山, 井邑, 高敞, 淳昌, 南原, 求禮, 麗水, 珍島, 木浦, 羅州를 踏査하기도 했다.

評價와 批判 [ 編輯 ]

評價 [ 編輯 ]

安在鴻은 典型的인 學者같은 性格으로 '冊벌레'라는 소리를 들었을 程度로 讀書에 熱中하였으며 自己 硏究에 沒頭하였다고 한다. 한便, 그는 家庭的으로는 家父長的 性向을 가졌다고 한다. [3] 송건호 는 '民勢(安在鴻의 號)는 거짓이 없고 純正한 人間으로 온갖 苦楚를 겪은 民族指導者로 尊敬 받기는 했으나 韓國的 政治 風土에서 政治人이면 으레 몸에 지니고 있어야할 權謀와 術數, 黨略을 驅使할 수 있는 人物이 아니고 日帝 受難期와 解放後의 거센 波濤속에서 時代的 犧牲者로서 人生을 마친 悲運의 主人公이었다.'라고 評價 하였다. [52]

강원용 은 '安在鴻은 열린사람이며 右翼 人物 가운데서 進步的인 人物'이라고 보았다. 또한 '安在鴻은 조만식 , 홍명희 , 여운형 , 송진우 와 함께 一齊 가 指目한 最後까지 남아있는 非協力 指導者 人物'이라고 評했다. [53] [54]

批判 [ 編輯 ]

詩人 이기형은 '民勢(安在鴻의 號)는 모든일에 軍自然하고 妥協的이며 順應的이었다.'라고 評價하였다. [55] 매우 家父長的이어서 집안일에 까딱도 안 했다는 批判도 있다.

한便 1946年 非常국민회의 最高政務委員의 選出方式이나 會議 進行方式이 典型的인 상명하달式이었기 때문에 右翼 中心의 最高政務會議를 立案한 安在鴻은 左翼 陣營으로부터 '파시즘的 傾向이 있는 人物'이라는 批判을 받기도 했었다. [27] [56]

또한 國民黨과 韓獨黨의 統合을 無理하게 强行한 것은 政治的 失策으로 看做되기도 한다. [30]

기타 [ 編輯 ]

趣味는 登山과 散策이었다. 特히 登山을 좋아해서 京城府 一帶에서 안 다녀본 山이 없다고 하며, 摩尼山 , 白頭山 도 登頂했다. 特히 白頭山 의 境遇 後에 登頂期를 남기기도 했다. [57]

그는 南北協商, 左右合作論을 主張하다가 轉向하여 李承晩 을 찾아갔다.

李承晩 의 側近 윤치영 의 公報祕書 최기일 프란체스카 도너 가 安在鴻을 相當히 無視했다고 한다. 최기일 에 依하면 프란체스카 도너 가 南北協商, 左右合作論을 主張하다가 轉向하여 찾아온 安在鴻을 無視하고 冷笑的으로 對했다. [42] 이를 본 최기일 은 '安在鴻 氏가 프란체스카 女史에게 푸待接을 받고 가시는 것을 보고 나는 朝鮮 사람으로서 분한 마음이 들었다. [42] '고 證言하였다.

親日 疑惑說과 反論 [ 編輯 ]

親日 疑惑說 [ 編輯 ]

東亞日報 , 朝鮮日報 等 비롯한 뉴데일리 等 一部 保守 言論에서 安在鴻을 여운형 과 더불어 '骨髓 親日派 '라고 主張하고 있다. [58] [59] 그가 朝鮮言論輔國會 名譽會員 名單 및 總督府 機關紙 每日申報에 學徒兵 遊說에 들었다는 根據로 主張하고 있다. 이어서 2010年 1月, 정진석 韓國外大 名譽敎授가 月刊雜誌 <<新東亞>> 1月號에 '呂運亨과 安在鴻은 親日派'라는 內容의 記事를 愷悌했다. [60] 朝鮮共産黨에서 1945年 9月 3,4日에 作成된 '安在鴻의 正體를 公開함'이라는 標題를 달고 그를 親日派라고 傳單을 뿌리는 等 攻擊했다. [61]

反論 [ 編輯 ]

그러나 安在鴻은 여운형 과 더불어서 日帝治下 時節, 國內에 살면서 마지막 끝까지 日帝에 妥協을 拒否한 獨立運動家였고, 오히려 그의 民族主義的 行步 때문에 日帝로부터 數次例 投獄되어 여운형 같이 日帝로부터 ' 不逞鮮人 監視對象 1號'로 指目되었다. [62] [63]

또한, 安在鴻은 1942年 朝鮮語學會 事件 에 連累되어 2年間 服役을 하고 나와서 休養한 뒤 呂運亨과 合流해 建國準備委員會 等 組織하는데 活動하였다. 이를 미루어보면 朝鮮共産黨이 그를 '親日派'라 攻擊하는 主張은 語不成說이다. [61]

卽, 安在鴻의 親日疑惑說은 여운형 의 境遇와 마찬가지로 日帝로부터 本人의 뜻과 相關없이 無斷으로 名義盜用된 것에 不過하다는 反論도 있다. 1949年 反民特委 文書에는 ('新聞記者 會見 等에서 是非를 드러내지 않고, 큰 支障이 없을 程度의 技術的 談話 發議를 한 것이 新聞의 紙面에는 自己 意思와 다르게 발의되었으나 訂正 할 수 없어서 그대로 放任한 者. 例를 들어 呂運亨과 安在鴻 等')라고 記錄하고 있다. [64]

著書 및 論文 [ 編輯 ]

著書 [ 編輯 ]

  • 朝鮮上古史鑑
  • 《조선통사》
  • 《韓民族의 基本 進路》(조양사 出版部, 1949)
  • 《新民族主義와 新民主主義》
  • 《民世安在鴻選集》 (지식산업사, 1983)

紀行文, 隨筆 [ 編輯 ]

  • 《高原의 밤》 (綜合出版 범우, 2007)

論文 [ 編輯 ]

  • 《檀君 硏究》
  • 《丁若鏞 硏究》

大衆文化 安在烘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48年 大統領 選擧 1代 大統領 大韓民國 無所屬 2票
1.0%
3位 落選
1950年 總選 2代 國會議員 京畿 平澤郡 無所屬 14,549票
96.98%
1位 初選

各州 [ 編輯 ]

  1.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452
  2.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459
  3. “民族21” .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1月 5日에 確認함 .  
  4. 1927年 ~: 이긍종(李肯鍾) - 韓國學中央硏究院
  5. "安在鴻 終豫 公判에 廻附", 東亞日報 1932年 7月 20日子 2面, 社會面
  6. "安在鴻, 李昇馥 保釋 今日許可", 東亞日報 1932年 7月 21日子 2面, 社會面
  7. "安在鴻,李承馥 體刑八個月", 東亞日報 1932年 12月 3日子 2面, 社會面
  8. [左·右를 넘어] 解放政局의 中道派들 ①民世 安在烘 - 1等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9. 김인식, 《中道의 길을 걸은 新民族主義者》, 歷史空間, 2006, p.162.
  10.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454
  11. 《韓國現代民族運動硏究》, 서중석 (歷史學者) 저. 역사비평사 出版社
  12. 윤치영, 《東山回顧錄:윤치영의 20世紀》 (삼성출판사, 1991) 137페이지
  13.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455
  14. 創作과 批評 (1987年 겨울號) (創作과 批評史, 1987) 238~239페이지
  15.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456
  16. 民世安在鴻選集 2 468
  17. 다시쓰는 韓國現代史 1 : 解放에서 韓國戰爭까지(박세길 저, 돌베개, 2002)
  18. 1945年 8月 15日:~김재명, 〈安在烘: 民族愛 實踐했던 穩健派 知識人〉,《韓國現代史의 悲劇-中間派의 李箱과 挫折》 (선인, 2003),244쪽 ; 여연구, 신준영 編輯 《나의 아버지 여운형》(김영사, 2001),143쪽
  19. 1945年 8月 16日~: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 1940年代篇 1卷 38쪽
  20. 歷史問題硏究所, 《韓國現代史의 라이벌》 (歷史問題硏究所 篇, 역사비평사, 2006) 84페이지
  21.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1卷〉 (人物과사상사, 2004) 59쪽.
  22. [激動의 歷史와 함께한 朝鮮日報 90年 ] 解放空間 指導者들, 理念 떠나 '復刊 祝賀' 메시지 朝鮮日報 2010.02.08日子
  23. 아! 悲運의 歷史現場 京橋莊(1993, 白凡思想實踐運動聯合) 213
  24. 아! 悲運의 歷史現場 京橋莊(1993, 白凡思想實踐運動聯合) 255
  25.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475
  26.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474
  27.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476
  28. 1946年 2月 13日~: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 1940年代篇 1卷 206쪽
  29. 이연복 《大韓民國 臨時政府 30年史》(국학자료원, 2006) 91페이지
  30.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478
  31. 한민당은 '1個月을 넘지 않는 동안 저 者를 쫓아내고야 말겠다'고 公言하기까지 했다. 한민당 은 安在鴻을 '親日派'라는등 말도 안되는 억지論理로 猛烈히 人身 攻擊하였고 甚至於 한민당은 極右團體를 動員하여 삐라를 뿌리게 했으며, 한민당系 高位 官吏들은 5月 下旬 民政長官 安在鴻이 내린 人事 發令까지 拒否하였다. 그러나 康俊晩 은 安在鴻을 推薦한 것이 한민당 이라고 主張한다.
  32.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2卷〉(人物과사상사, 2004) 43~44쪽
  33. 김재명, 《韓國現代史의 悲劇:中間派의 李箱과 挫折》(선인, 2003)256쪽
  34.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479
  35.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2卷〉(人物과사상사, 2004) 46~47쪽
  36. 漢城日報 1947年 6月 3日子 우사연구회 엮음 서중석 지음, 《남.北協商:金奎植의 길, 金九의 길》(한울 2000) 22쪽에서 再引用
  37.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2卷〉(人物과사상사, 2004) 30~31쪽
  38. 김익렬 寄稿, 1948年 8月 6日, 8月 7日, 8日子 國際新聞
  39. 김익렬 有故 : 1970年代 作成, 1988年 12月 김익렬 死亡 後 發表, 美刊行 出版物
  40. 박은봉, 韓國史 常識 바로잡기(박은봉 저, 冊과함께, 2007) pp.68~69
  41.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453
  42. 최기일, 《自尊心을 지킨 한 朝鮮人의 回想》 (생각의나무, 2002) 92페이지
  43. 韓國現代民族運動硏究 2(逆比韓國學硏究叢書 13)(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 2008) 302
  44. 聯合뉴스 (2000年 12月 21日). “拉北 制憲ㆍ2代 國會議員 現況” . 2005年 9月 1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10月 3日에 確認함 . 朝鮮日報 社長 兼 主筆을 歷任한 安在鴻氏는 지난 65年 3月 1日, 3.1運動 33人中 한 사람인 오하영氏는 60年 8月 各各 殞命했다.  
  45.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리니》,이이화 저. 김영사 p149
  46. 混沌의 解放空間서 自由民主主義 礎石을 놓다 東亞日報 2008年 8月 22日子
  47. ““우리社會 理念 葛藤 사라지길” - 조선닷컴” .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2月 10日에 確認함 .  
  48. 韓國史 데이터베이스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9.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458
  50.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457
  51. 民世 安在鴻 選集 2, 352페이지
  52. 民世 安在鴻 - 記念 事業會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53. 國會 프락치 事件의 再發見 1 , 한울, 김정기 저. p445
  54. <歷史의 언덕에서>,강원용 저. 한길사.
  55. <여운형 評傳>-이기형 지음-, p386
  56. 人民地 1946年 1,2月 合本號, 박달환 '安在烘론'
  57. 白頭山 登陟機
  58. ( http://www.newdaily.co.kr/html/article/2009/09/02/ART32981.html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獨立新聞, 當해야만 하나 : Save Internet 뉴데일리)
  59. 시바의 女王 :: 네이버 블로그
  60. (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7/09/10/200709100500035/200709100500035_6.html 신동아 1月號)
  61. <여운형-時代와 思想을 超越한 融和主義者>-이정식 지음.p514
  62. 강원룡 牧師의 主張에 依하면 謀陷이라 한다. 강원룡의 主張에 依하면 韓國 민주당 에서 ' 여운형 과 安在鴻을 意圖的으로 誹謗하고자 온갖 말도 안되는 煽動질을 했다.'라고.. (KBS 人物 現代史 - 여운형 便- 參照.
  63. 이광수 , 崔麟 等 '民族改良主義'를 내세워 民族主義者에서 親日派로 變節한것과는 달리, 安在鴻은 徹底한 非妥協的 民族主義者였다.
  64. 韓國史 데이터 베이스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參考 資料 [ 編輯 ]

關聯 書籍 [ 編輯 ]

  • 安在烘, 《高原의 밤》 (범우사, 2007)
  • 安在鴻選集刊行委員會 篇, 《民世安在鴻選集 1~8》 (지식산업사, 2004)
  • 民世安在鴻記念事業會, 《安在鴻과 平澤의 抗日運動 深層硏究》 (圖書出版 線인, 2014)
  •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1卷〉(人物과사상사, 2004)
  •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2卷〉(人物과사상사, 2004) 30~31, 41, 104쪽.
  • 오민석, 《곧은 붓으로 겨레를 이끌다 : 民族 指導者 安在烘》(우리교육, 2009)
  • 김영국 外, 《韓國政治史上》 (박영사, 1991)
  • 民世安在鴻記念事業會 篇, 《安在鴻과 新幹會의 民族運動》 (圖書出版 線인, 2012)
  • 김인식, 《中道의 길을 걸은 新民族主義者 : 安在鴻의 생각과 삶》 (歷史空間, 2006)
  • 김인식, 《安在鴻의 新國家建設運動 1944~1948》 (圖書出版, 線인, 2005)
  • 韓國學中央硏究院 外, 《民世 安在鴻 深層硏究》(한국학중앙연구원, 정윤재, 이진한, 김인식, 윤대식 共編, 黃金알, 2005)
  • 김재명, 《韓國現代史의 悲劇 : (中間派의 李箱과 挫折)》 (선인, 2003)
  • 鄭鎭奭, 《(6·25 戰爭) 拉北 - 끌려가고 殺害된 言論人 284名, 牧師·新婦·宗敎人 371名의 悲劇》(기파랑 , 2006)
  • 김정기, 《國會 프락치 事件의 再發見 1,2》(한울아카데미, 2008)
  • 윤민재, 《中道派의 民族主義運動과 分斷國家》(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 安在烘, 《韓民族의 基本 進路》(조양사 出版部, 1949)
  • 安在烘, 《新民族主義와 新民主主義》(민우社, 1945)
  • 韓國史學會, 韓國現代人勿論 1,2(을유문화사, 1987)
  • 歷史問題硏究所, 《韓國現代史의 라이벌》 (歷史問題硏究所 篇, 역사비평사, 2006)
  • 브루스커밍스, 《韓國戰爭의 起源》 (김자동 飜譯, 일월서각, 1986)
  • 박명림, 《韓國 1950 戰爭과 平和》 (圖書出版 羅南, 2002)
  • 박명림, 《韓國戰爭의 勃發과 起源》 1, 2 (圖書出版 羅南, 1996)
  • 신용하 外 篇, 《韓國現代社會思想》 (지식산업사, 1984)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美軍政廳 司令官) 하지
南朝鮮過渡政府 首班 (美軍政廳 民政長官)
1947年 2月 5日 ~ 1948年 9月 15日
後任
(大韓民國 大統領) 李承晩
前任
최석화
第2代 國會議員(平澤郡)
1950年 5月 31日 ~ 1950年 6月 30日
無所屬
後任
황경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