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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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창
吳世昌
청년 시절 오세창
靑年 時節 오세창
조선국 漢城府 郵政總局 通信員室 室長
任期 1895年 1月 8日 ~ 1895年 8月 8日
君主 高宗 李兄

身上情報
出生日 1864年 8月 6日 ( 1864-08-06 )
出生地 朝鮮 漢城府
居住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死亡日 1953年 4月 16日 ( 1953-04-16 ) (88歲)
死亡地 大韓民國 慶尙北道 大邱 대봉동
經歷 每日申報 名譽社長 兼 서울新聞 名譽社長
正當 無所屬
父母 오경석 (簿)
子女 五一六(아들)
宗敎 儒敎 ( 性理學 ) → 天道敎
웹사이트 오세창(獨立有功者 功勳錄)
賞勳 ( 建國訓長 大統領章,1962)

오세창 (吳世昌, 1864年 8月 6日 ~ 1953年 4月 16日 )은 朝鮮 末期와 大韓帝國 의 文臣, 政治人이며 啓蒙 運動家이자, 日帝强占期 韓國 의 言論人, 獨立運動家, 書畫家, 그리고 大韓民國 의 政治人이다. 朝鮮 末期에는 開化派 政治人이었고, 日帝 植民地 時代에는 3.1 萬歲 運動 에 參與하였으며, 書畫와 古美術品 感情 等의 活動도 하였다. 韓國 의 歷代 王朝의 書畫家 人名事典인 《 槿域書畫徵 (槿域書?徵)》(1928年)의 著者이다. 1918年 設立된 朝鮮 人 美術家, 書藝家, 彫刻家 團體인 書畫協會 創立 發起人이기도 하다.

開化派 譯官 오경석 의 아들로 朝鮮 末期에는 開化運動에 同參했고, 乙未事變 으로 인하여 日本 으로 亡命했다가 歸國했으나 1902年 다시 日本 으로 건너갔다. 歸國 後 萬歲報 , 大韓民報 의 代表理事로 言論 活動을 하였고, 日帝强占期 에는 獨立運動과 天道敎 使役 活動에 從事하였으며 1918年 末부터는 萬歲 運動 計劃에 參與했다. 1919年 3月 3.1 運動 當時 民族 代表 33人 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藝術 多方面에 造詣가 깊은 書藝家이기도 했다.

1945年 光復 以後에도 獨立促成中央回 , 민주議員 等에 參與하였다. 1946年 民族 代表로 大韓帝國 玉碎를 引受 받았다. 書藝 가로度 篆書, 隸書, 草書에 能하고 彫刻도 하였으며, 둥그스름한 形態의 獨特한 書體를 創案하여 葦滄體, 오세창體라 부른다. 本貫은 海州 , 字는 중명(仲銘), 雅號는 葦滄(葦滄), 天道敎 도호는 한癌(閒菴)이다.

一生 동안 民族 開化運動과 朝鮮 獨立運動에 꾸준히 邁進했으며 美術史에 큰 劃을 남겼고 90歲까지 한 番도 口舌數에 오른 적이 없어 理念을 莫論하고 모든 國民의 尊敬을 받은 人物이다.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少年期 [ 編輯 ]

葦滄 吳世昌은 1864年 (高宗 1年) 8月 6日 漢城府 出生으로, 中國語 譯官 (譯官)이자 舊韓末의 先覺者로 잘 알려진 오경석 의 次男으로 태어났다. 本貫은 海州. 아버지 역매(亦梅) 오경석 은 譯官으로 崇祿大夫 (崇祿大夫, 從一品)까지 올랐으며, 求한 末의 開化黨의 理論的 支柱이기도 했다. 그의 집안은 譯官 家門으로, 代代로 外國語를 익혀 開化 思想에 일찍 눈을 뜬 中人 집안에서 자란 데다 開化派의 巨頭인 스승 유홍기 의 影響까지 받아 自然스럽게 開化 運動에 參加하게 되었다.

박규수 의 文人이자 아버지 오경석 의 門下에도 出入하던 박영효 , 서재필 , 서광범 , 김옥균 , 유길준 , 윤치호 等과 交流하며 가깝게 지냈다.

官僚生活과 改革 運動 [ 編輯 ]

吳世昌의 親筆 書信

1879年 驛과 에 合格하여 官職에 나아갔는데, 1885年 博文局 에 發令받아 博文局 注射 時報로 週間 官報인 우리나라 最初의 言論機關 《 漢城週報 》의 記者가 되면서 言論人으로 入門했다. 1886年 (高宗 23年)에는 博文局 注射 가 되어 《 漢城旬報 》 記者를 겸했다. 以後 軍國機務處 , 農商工部 , 郵政局 等을 거쳤고, 1894年 (高宗 31年) 軍國機務處 郎廳總裁 祕書官(軍國機務處?廳總栽秘書官)이 되었다가 管制 改正 以後 農商工部 參議 (農商工部參議), 郵政局 通信局長(郵政國通信局長) 等을 歷任했다.

1895年 10月 乙未事變 直後 권동진 , 정난교 等과 함께 禍를 被害 日本 으로 亡命했다. [1] 그러나 그는 直接的인 嫌疑點이 없어 곧 歸國했다.

1896年 (建陽 1年) 日本 문부성 의 外國語學校 敎師 招聘 當時 招聘되어, 도쿄外國語學校 朝鮮語 敎師로 赴任하였다. 1897年 에는 正式으로 토쿄外國語學校 에 朝鮮語科 敎師로 派遣되어 日本 에서 1年假量 敎師 生活을 하면서 近代 文物을 直接 接했다.

大韓帝國期 活動 [ 編輯 ]

1902年 (光武 5年) 開化黨 事件으로 日本에 亡命하였다. 後日 권동진 三千里 誌字에 當時 亡命中이던 自身의 옛 同志를 紹介할 때 한 사람으로 그를 紹介하였다.

靑年時代의 제우(諸友)

먼저 靑年時代의 나의 동무들을 말하면... 그때 東京에 亡命하였든 人物들은 박영효 , 曺喜昖 (軍部大臣 다니든 分), 醬粕 (代身 지난이), 유길준 (水上 지낸 李), 권형진(權瀅鎭) (나의 중氏로 警務使 ), 유세남(內務次官 다니든 이), 김옥균 , 그러고 우리 동렬로는 조희문 , 이범래 , 우범선 , 이두황 ,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 尹孝貞 , 오세창 또 우리보담 조금 늦어 들어온 少壯派에 이신(李申), 유동렬 , 권석하 , 이동휘 等 第人物이 있었다. 이 가운데는 1,2次 對面에 끈親 이도 있었지만은 大槪는 여러 番 만났고 일도 圖謀하여 본 분들로 比較的 사람됨을 알 수 있었다. [2]

高宗 日本 朝廷에 繼續 사람을 보내 亡命客들의 送還을 要求했지만 日本 에서는 이를 拒絶했다.

1902年 부터 日本에 亡命해 있던 中, 天道敎 敎主 손병희 를 만나 손병희 , 양한묵 (梁漢默) 等의 거듭된 勸告로 天道敎 에 入敎했다. 1906年 天道敎 機關誌를 겸한 日刊紙 《 萬歲報 (萬歲報)》 社長으로 啓蒙 運動을 펼치면서 國債補償運動 을 벌였고, 1907年 3月 에는 의친왕 의 隨行員으로 日本 도쿄에 갔다가 천장절 行事에 參席하지 못하고 그해 7月 10日 에 歸還하였다. 11月 大韓帝國 中樞院 副贊儀(中樞院副贊議) 奏任官 2等(奏任官二等)에 任命되었다.

以後 大韓協會 (大韓協會)의 副會長으로 推戴되었으며 1909年 大韓協會 가 創刊한 日刊紙로서 反日 論調를 分明히 한 《 大韓民報 》 社長도 맡았다. 天道敎 內部에서는 권동진 과 함께 開化에는 贊成하되 日本과의 合倂에 反對하는 이른바 文明開化派의 代表的인 人物로서, 合倂 請願으로 開花할 것을 主張하는 一進會 系列과는 對立하여 結局 이용구 를 몰아냈다.

日帝 强占期 活動 [ 編輯 ]

日帝 强占期 初盤 [ 編輯 ]

1910年 (隆熙 4年) 10月 1日 韓日 倂合 條約 이 締結되자 男爵 作爲와 恩賜金이 내려졌지만 拒絶하고 받지 않았다. 안중식 의 東洋畫 〈탑원도소회지도〉( 1912年 )는 韓日 倂合 條約 締結 以後 吳世昌의 庭園 樓閣에 天道敎 文明派 人士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는 場面을 그린 것이다.

1917年 다시 《萬歲報》와 《大韓民報社》를 創設하여 社長 兼 主筆로 活動하였다. 萬歲報는 漢字를 모르는 讀者들을 위해 國漢文 混用과 함께 漢字 옆에 한글로 音을 달기도 했다.

1919年 3·1 運動 民族代表 33人 의 한 사람으로서 主導的으로 參與했다. 日帝로부터 懲役 3年刑을 宣告 받고 投獄되었다.

3.1 萬歲 運動 前後 [ 編輯 ]

吳世昌은 1918年 11月 美國 大統領 우드로우 윌슨 民族自決主義 에 影響을 받아, 손병희 , 崔麟 (崔隣), 권동진 (權東鎭)等과 함께 朝鮮의 獨立運動을 展開하기로 決意하고, 于先 同志를 包攝하기로 한다. 또한 一部 天道敎 連絡員들이 基督敎 指導者 一部와 合意하자, 汎擧族的인 萬歲 示威 開催에 同意한다.

1919年 2月 10日 崔麟 , 최남선 等이 協議하고, 최남선 이 獨立宣言書를 草案하여 提出하자 그는 손병희 , 권동진 , 崔麟 等과 함께 獨立宣言書 內容을 檢討하고 그 內容에 同意한다. 또한 崔南善의 草案을 甘受해 몇몇 表現을 修正하기도 했는데 崔南善에게 "요즘 애들은 漢文을 몰라서 큰 일"이라고 나무랐다는 逸話가 있다.

2月 25日 吳世昌은 손병희 , 권동진과 함께 天道敎 祈禱會 終了報告와 高宗 局長에 參拜할 目的으로 上京한 天道敎 도 박준승(朴準承), 홍기조(洪基兆), 홍병기(洪秉箕), 김완규(金完圭) 等에게 獨立運動에 關한 計劃을 알리고 이들을 說得하여 贊同을 얻었다. 이때 吳世昌은 天道敎 月報課長 옥파 이종일 (李鍾一)을 說得하여 積極的으로 參與하게 했다.

1919年 2月 27日 吳世昌은 天道敎 指導者들을 說得, 그들과 함께 京城府 재동(齋洞)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 獨立宣言書와 其他 文書의 草案을 最終 確認하고 贊同, 民族代表者 33人의 한 사람으로서 署名 捺印한다. 이어 그는 최남선 의 獨立宣言書 用紙 普及과 印刷 等을 支援하였다.

3月 1日 午後 2時頃 吳世昌은 京城府 인사동의 태화관 (泰華館) 料理집에 손병희 , 최남선 等 民族代表者들과 함께 民族代表의 한 사람으로 參席하여 獨立宣言書를 朗讀하는데 함께 서고, 大韓獨立 萬歲三唱을 외쳤다. 바로 出動한 日本警察에 依해 逮捕되어 京城 警視廳 摠監部에 拘禁되었다. 以後 抗訴하였으나 有罪 判決을 받았다.

그는 獨立宣言에 參與한 理由에 對해 '歷史에 남기기 위해서'였다는 趣旨로 檢事의 審問에 答했다. "...前 世界의 사람이 民族自決로 逍遙하고 있는데 홀로 朝鮮만이 沈默하고 있기보다, 實行은 되지 않더라도 歷史에 남기기 위하여 朝鮮人도 民族自決의 意思가 있다는 것을 發表할 必要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20年 그는 京城覆審法院 에서 保安法 과 出版法 違反 嫌疑로 懲役 3年型을 最終 宣告받고, 西大門 刑務所 로 移監되어 投獄됐다.

1921年 11月, 2年 8個月 만에 假釋放됐다.

日帝 强占期 後半 [ 編輯 ]

假釋放 當時 이미 50代 後半의 나이에 이른 吳世昌은 以後 書藝家, 篆刻家(篆刻家) 및 書藝學科 金石學 歷史家로 主로 活動하며 文化界의 精神的 指導者로 活躍했다. 1922年 招待 朝鮮美術展覽會 가 열렸을 때 書藝 部門에서 受賞했고, 書畫社 硏究에도 뛰어들어 아버지 吳慶錫과 自身이 蒐集한 豐富한 文獻과 古書畵를 土臺로 歷代 韓國 의 書畫家 人名事典인 《槿域書畫徵 (槿域書?徵)》(1928)을 펴냈다. 또 高麗 ? 朝鮮 의 書畫들을 直接 찾아서 寫眞撮影하고 自身이 所藏한 古美術品을 合쳐 畫報集 《槿域書畫휘(槿域書?彙)》를 出刊했다.

槿域書畫徵은 三國時代부터 近代에 이르기까지 韓半島에서 活動한 書畫家들을 總網羅한 人命 辭典이다. 三國時代 以後 392人의 畫家와 576人의 書藝家, 그리고 市·化를 겸했던 149人 等 總 1117名의 記錄을 時代順으로 整理한 冊子다. 各 書藝家와 畫家의 聲明에 이어 자·호·본관·가계·출생 死亡年度 等을 밝힌 다음, 各種 文獻에 나오는 該當 藝術家에 對한 記錄과 論評, 提示(題詩) 等을 있는 대로 찾아 싣고 그 書目을 다 밝혔다. 이를 위해 引用한 文集이 總 270種이나 된다. 이 밖에 邑誌·族譜·悲鳴·書畫 作品의 제발(題跋)까지 見聞이 닿은 것은 모두 收錄하고 傳해지는 作品의 이름과 素材까지 記錄했다.

六堂 崔南善은 槿域書畫徵이 出刊되었을때 '暗黑한 운중의 電光(電氣불)'이라는 表現으로 그 業績을 評했다. 文化財廳長을 지낸 유홍준은 "王朝社會가 崩壞되고 近代的 試鍊이 始作되는 時點에 葦滄 吳世昌이라는 분이 있어 美術史 分野는 傳統의 斷絶없이 丘壑(舊學)에서 神學(新學)으로 자연스럽게 넘어왔으니, 近代的인 學問體系로서 韓國美術史의 아버지가 우현 고유섭이라면 葦滄 吳世昌은 韓國美術史의 할아버지다"라고 評했다. 京鄕新聞 이기환 記者는 "槿域書畫徵은 只今 이 瞬間까지 書畫社 硏究의 古典이자 바이블로 通하는 不朽의 名作이다. 萬若 이 冊이 없었다면 韓國의 書畫社 硏究는 太半이 迷宮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評價가 支配的이다."라고 評했다.

吳世昌은 그 밖에도 朝鮮 初期부터 近代에 걸친 書畫家, 書藝家, 文人學者들의 날인(捺印)된 樂觀, 印章 或은 關聯 情報들을 모아 《槿域引受 (槿域印藪)》를 編纂하였으며, 여러 書畫家들의 다양한 樂觀과 雅號 硏究의 資料가 되었다. 그는 1918年 近代的 美術家 團體의 嚆矢인 書畫協會 가 結成될 때 13人의 發起人으로 參席하였으며, 書畫協會 의 創立 會員으로 活動하였다.

生涯 後半 [ 編輯 ]

解放 以後 [ 編輯 ]

1945年 8月 光復 直後 9月 創黨된 右翼 系列의 保守 政黨 한국민주당 은 創黨때 그를 共同 黨首로 迎入하려 試圖했다. 그러나 그는 한민당 領袖職을 拒絶하였다. 朝鮮建國準備委員會 委員에도 推戴되었으나 拒絶했다.

이어 過去 朝鮮總督府 機關紙였던 每日申報(每日申報)가 職員들 名義의 對 國民 謝過文을 發表하고 1945年 10月 오세창을 社長으로 推戴하자 이를 受諾하였다. 當時 81歲 高齡이었던 그는 美軍政의 監督下에 每日申報의 題號를 서울新聞으로 바꾸고 主要 人士를 마무리한 後 두 달 만에 社長職을 내려놓았다.

李承晩 歸國歡迎式에 參席
(맨 왼쪽 테이블에 선 이가 오세창)
민주議員 會議에 參席 中( 1946年 2月 ), 왼쪽에 앉은 이가 오세창, 가운데는 副議長 김규식 , 오른쪽은 議長 李承晩

10月 16日 李承晩 의 還國 때 吳世昌은 金浦飛行場 에서의 歡迎式에 參席했다 .以後 李承晩 을 中心으로 大韓獨立促成國民會 (大韓獨立促成國民會)가 組織되자 會長에 推戴되었고, 全國愛國團體總年協會 會長으로도 委囑되었다.

臨時政府의 還國 後 吳世昌은 12月 1日 臨時政府 봉영식에 參席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 의 社會로 臨時政府 봉영식이 始作되었다. 이어 吳世昌의 開會辭, 異人 의 奉迎門 朗讀, 권동진 의 萬歲三唱으로 이어졌다. 奉迎門은 권동진 , 金性洙 , 異人 을 통해 金九 에게 傳達되었다. [3]

1946年 解放 1周年을 맞아 美軍政이 日本 宮內廳으로부터 押收한 區 大韓帝國의 國璽(圖章) 6課와 관인 2課를 朝鮮에 返還하는 行事를 가졌다. 吳世昌은 民族 代表의 資格으로 이 行事에 參席해 美軍 司令官 존 리드 하지 中將으로부터 國璽들을 引繼 받았다.

吳世昌은 1946年 2月 南朝鮮大韓國民代表 民主議院 (一名 민주議員) 議員, 서울新聞 名譽社長 等을 지냈다. 1946年 6月 15日 午後 5時 40分 서울驛 에 마중나가 서울驛 에 到着한 三醫司 遺骨을 迎接하였다. 이어 太古史(太古寺)에 마련된 殯所에 參席하였다. 以後 南北協商과 單政樹立論이 갈렸을 때는 立場表明을 하지 않다가 1948年 8月 15日 政府 樹立에 參席하였다.

1949年 7月 5日 白凡 金九의 葬禮式에서 葬儀委員長을 맡았다.

韓國 戰爭과 最後 [ 編輯 ]

80代 後半에 이른 吳世昌은 1950年 6月 25日 韓國 戰爭 이 터지자 大田 을 거쳐 大邱 로 내려가, 1951年 4月 16日 나인협 의 葬禮式 葬禮委員長을 맡았다. 大邱 대봉동 31番地의 집에서 病席에 누운 지 1年만인 1953年 4月 16日 享年 90歲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葬禮式은 社會葬(社會葬)으로 치러졌다.

遺言대로 化粧된 遺骨은 梵魚寺 善防에 모셨다가 1954年 忘憂 公園 墓地에 安葬됐다. 現在의 서울 망우동 獨立有功者 墓域이다. 그의 墓所는 2017年 10月 23日 國家登錄文化財로 指定됐다.

墓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졌다. 앞面 殿閣 글씨는 書藝家 素筌 손재형(孫在馨)李 電子(篆字)로 썼고, 後面에는 전홍진(全弘鎭)이 짓고 김응현(金膺顯)李 글씨를 썼다.

''李 墓에 잠드신 葦滄 先生 오세창 어른은 1864年 7月 서울에 나시어 1953年 4月 世上을 떠나시니 享年 九十. 民族의 開化를 위하여 몸소 그 先驅을 잡으셨고 祖國의 光復을 위하여 獨立 宣言 33인 中에 열하시였을 뿐 아니라 文化의 發展에 크게 힘주시어 書藝와 金石 考證의 거벽을 이루시니 平生에 남기신 危空은 길이 빛나 비길 바 없다. 어른 가신지 3年 厚生과 遺族이 뜻을 모아 先生이 끼치신 빛을 오래 繼承하려 이에 1956年 1月 이 墓碑를 세우다."

事後 [ 編輯 ]

  • 吳世昌은 民族社會의 元老이자 獨立運動의 元老였기에 光復 後 高齡에도 不拘하고 朝鮮建國準備委員會 (建準) 委員, 南朝鮮大韓國民代表 民主議院 (一名 민주議員) 議員, 서울新聞 名譽社長 等 無數한 職位에 委囑된 바 있다.
  • 大韓民國 政府 는 吳世昌의 貢獻을 기려 1962年 3月 大韓民國 建國訓長 大統領章을 追敍하였다.
  • 文化部는 1996年 11月과 2001年 8月, 오세창을 各各 그 달의 '文化人物'로 選定하며 다음과 같이 評했다. "近代를 代表하는 書藝家·篆刻家(篆刻家)이자 卓越한 鑑識眼(鑑識眼)을 지닌 書畫社(書畵史) 硏究者."
  • 國家報勳處와 獨立記念館은 2004年 3月 오세창을 '이달의 獨立運動家'로 選定했다.

家族 關係 [ 編輯 ]

著書 [ 編輯 ]

  • 《槿域庶彙》
  • 《槿域火휘》
  • 《筋묵》
  • 《槿域引受》
  • 《槿域書畫徵》

기타 [ 編輯 ]

그와 비슷한 時代에 活動하던 黃海道 甕津郡 마산면 出身의 儒學者 오세창 (吳世昌, 1901年 生)도 存在하였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生物進化論을 修正케한 世界的植物學者", 東亞日報 1950年 1月 22日子 2面, 社會面
  2. 서정민, 《이동휘와 基督敎》 (연세대학교出版部, 2007) 161페이지
  3. 아 悲運의 歷史現場 京橋莊(白凡思想實踐運動聯合, 1993), 145

外部 링크 [ 編輯 ]

參考 資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