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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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安昌浩
191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모습
1910年代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모습
大韓民國 臨時政府 第6代 國務令
任期 1926年 5月 3日 ~ 1926年 5月 16日
副統領 없음
前任: 이동녕 (第5代)
後任: 이동녕 (第7代)

身上情報
出生日 1878年 11月 9日 ( 1878-11-09 )
出生地 朝鮮 平安道 江西郡 초리면 초리7里 봉상도(道롱섬)
死亡日 1938年 3月 10日 ( 1938-03-10 ) (59歲)
死亡地 日帝强占期 朝鮮 京畿道 京城府 京城 帝國 大學 附屬 病院
國籍 朝鮮
大韓帝國
學歷 1896年 救世學堂 普通部 卒業
正當 無所屬
父母 안흥국(簿), 提案 黃氏 否認(某)
配偶者 이혜련
子女 아들 안필립 , 안필선 , 안필영
안수산 , 按手라
宗敎 儒敎 ( 性理學 ) 改新敎 ( 長老會 ) [1]
別名 者는 齒삼, 는 倒産 (島山), 山翁(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 別名은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
웹사이트 島山 安昌浩 記念館
徐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안창호 (安昌浩, 1878年 11月 9日 ~ 1938年 3月 10日 [2] )는 大韓帝國 의 敎育改革運動가 兼 愛國啓蒙運動家이자 日帝强占期 獨立運動家 , 敎育者, 政治家이다. 그의 死後 1988年 3月 21, 24日, 安昌浩가 工夫한 救世學堂 , 卽 更新中學校 更新高等學校 ( 大韓예수敎長老會 統合 에 所屬한 長老敎會 學校)에서 그에게 名譽 卒業狀이 追敍됐다.

平安南道 出身이며, 本貫은 순흥 , 號는 島山(島山), 宗敎는 改新敎 이다. 求한 말 萬民共同會에서 講演을 하였으며, 배워서 익히는 것의 重要性을 說破했다. 그러나 日本 帝國 의 影響力이 强大해지자 美國으로 亡命, 以後 美國 社會에서 活動하였으며 1919年 상하이에 臨時의정원과 臨時政府가 樹立되자 臨時政府에 參與하여 活動했다. 또한 實力兩性論 과 함께 敎育을 통해 人材를 養成하고 實力을 키우는 것이 獨立의 발板이라 생각해 1899年 (光武 2年) 漸進學校, 1908年 (隆熙 2年) 大成學校 , 1926年 中國 난징 에 동명학원을 設立하였다.

大寒義軍 特派獨立大將 兼 啞鈴地具司令官을 지낸 抗日 獨立運動家 安重根 과는 同姓同本 親族척이기도 하며 1938年 慶尙南道 釜山 에서 肝硬化를 비롯한 肺炎과 慢性氣管支炎 및 胃下垂症· 腹膜炎 및 皮膚炎과 消化不良 等의 合倂症으로 他界한 그는 生前에 興士團 , 대한인국민회 等 재미韓人團體를 組織, 主管하였고, 1919年 4月 부터 大韓民國 臨時政府 樹立에 參與, 主導하였다. 1921年 부터는 臨時政府 創造論과 改造論이 나뉠 때 改造論을 主張하였으며, 國民代表者會議가 强制 解散된뒤 美國 으로 건너가 獨立運動을 하였다. 美國 의 韓人 僑胞社會의 指導者였던 그는 박용만 , 李承晩 , 서재필 等과 競爭, 葛藤關係에 있기도 했다. 1932年 尹奉吉 훙커우 公園 爆彈投擲 事件 以後 日本 帝國 領事館 警察의 不審檢問에 逮捕되어 送還, 西大門刑務所 에 投獄되어 刑問을 받았고, 拷問 後遺症으로 경성제국대학 病院에 入院했으나 消化不良과 肝硬化 , 肺疾患을 비롯한 여러 疾病의 合倂症으로 出獄 直後 死亡한다.

活動家로서의 意義 [ 編輯 ]

日帝强占期 當時 獨立運動 方法을 놓고 武力鬪爭論, 민족개조론, 外交獨立論으로 나뉠 때 民族改造論을 主唱하였으며, 民族改造論의 代表的 人物이었다. 그에 依하면 스스로 힘과 實力을 키우고 그 實力을 基盤으로 할 때만이 스스로 自立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또한 實力 兩性論을 主張하여 經濟的, 社會的인 實力을 길러야만이 獨立이 可能하다고 보았다. 이어 敎育을 통한 敎育 入國論을 提唱하여 各種 學校의 設立과 養成에 努力하였다. 日帝强占期 後半의 그의 實力 養成論은 윤치호 , 이광수 , 최남선 , 송진우 , 안호상 , 조병옥 , 金性洙 等에게 두루 影響을 주었다.

雄辯術에 뛰어났으며, 演說과 雄辯에 두루 能通하였다. 여러 靑年들을 感化시켜 獨立運動에 投身하게 했다. 한便 그는 理想的인 政治人으로 유길준 을 指目했다. 다른 이름은 窓戶(昌鎬)이고, 者는 齒삼, 人 倒産(島山), 山翁(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 別名은 안광택(安廣宅), 안창호(晏彰昊)이다. 서울特別市 江南區 에 있는 島山大路 (島山大路)와 島山公園 은 그의 號를 따서 이름 지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島山 安昌浩는 平安南道 江西 (江西) 초리면 7里 봉상도(道롱섬)에서 1878年 11月 9日 農夫인 [3] 순흥 安氏 안흥국(安興國, 族譜上 이름은 안교진(安敎晋)과 濟南 黃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慰勞는 兄 안치호(安致昊)와 兄이 한名 더 있었고, 아래로는 그가 6歲 때 女同生 案信號 (安信浩)가 태어났다. 先代는 문성공 安珦 (安珦)의 後孫으로, 代代로 平壤 同村(東村)에서 살았으나 아버지 때에 大同江 下流의 道롱섬으로 옮겨왔다.

共助 參議 를 지낸 安宗檢 의 17代孫으로, 世祖 때의 宰相 안지귀 , 中宗 代의 政丞 雁堂 은 그의 傍系 先祖들이었다. [4] 安重根 , 안공근 一家는 安宗劍의 兄弟인 全羅道 觀察使 兵曹 參判 안종신 의 後孫으로 亦是 그의 먼 親族이었다. 그러나 그의 家計는 沒落하여 平安南道 로 移住하여 農事를 짓게 되었다. 그의 처음 이름은 齒삼이었다. 그러나 10歲가 되어 學校에 다닐 무렵 이름을 窓戶로 改名하였다.

할아버지 안태열(安泰烈)은 官職이 通德郞 에 머물렀고, 家勢는 더 기울어서 아버지 안흥국은 官職을 지내지 못하고 가난한 農夫로 生活하였다. 그러나 12歲 때 아버지 안흥국을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 안태열의 손에 자랐다. 9歲부터 書堂에 다니기 始作하였다. [5] 早熟했던 그는 書堂 에 함께 다니며 工夫하던 몇年 年上의 필대은 (畢大殷) 等과 함께 國內·外 [5] 의 이런 저런 問題에 對해서 많은 討論을 하기도 했다. [5] 以後 木洞 生活을 하며 1890年 前後 黃海道 九月山을 돌아다녔다.

幼年期와 數學問題 [ 編輯 ]

1892年 (高宗 29年) 平安南道 大同郡 남釜山面 노남리로 移徙하면서, 그는 노남리宅 셋째라고 불리었다. 이때 安昌浩는 著名한 性理學 自認 김현진에게 漢學과 性理學 을 受學하며 遊學 을 工夫하였다.

1894年 (高宗 31年) 16歲때 安昌浩는 平壤 淸日戰爭 으로 破壞당하자 큰 衝擊을 받았다고 한다. 東學農民運動 을 겪으며 淸나라 日本 君의 進入을 보고 自身이 救國의 隊列에 나서야 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할아버지 안태열이 反對했고 온 집안의 反對가 있었으나, 그는 홀로 京城府 로 가려 했다. 結局 三寸의 도움으로 祕密裏에 家出하여 車를 타고 京城府 로 올라갔다. 이어 長老敎 宣敎師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가 運營하는 救世學堂(救世學堂) 普通部에 入學하였다.

無作定 京城 에 올라온 安昌浩는 어느 날 京城 정동제일교회 가 있는 골목을 지나치다가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먹고 자고 마음대로 工夫할 수 있으니 우리 學校로 오라' 고 勸하는 美國人 改新敎 宣敎師 를 만난 것을 契機로 長老敎에서 設立한 救世學堂(求世學堂)에 들어가 工夫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算數, 지리, 世界史, 科學 等 새로운 學問을 배우며 새로운 世界를 接한다. 또한 救世學堂 在學 中 송순명의 顚倒로 長老敎 에 入敎하였다. 長老敎로 改宗하면서 自身에게 開化 思想을 준 필대은에게도 基督敎 를 紹介하였다.

敎育 啓蒙 運動 [ 編輯 ]

1897年 救世學堂 普通部를 卒業하였는데, 上級 學部로 進學하지 않고 普通部의 助敎로 就職하였다. 그해 故鄕으로 잠깐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 안태열은 安城 李氏 이석관(李錫寶)의 長女 이혜련(李惠練, 當時 13歲)女史와 成婚시켰다. 自身의 意志와는 相關없이 一方的인 約婚이 되었음을 알고 할아버지에게 破婚을 主張했으나 貫徹되지 않았다. 結局 그는 破婚하지 못하고 다시 京城府 로 되돌아와야 했다.

1897年 , 서재필 · 李承晩 · 유길준 · 윤치호 等이 主管한 獨立協會 에 加入하였으며, 이상재 , 윤치호 , 이동녕 , 李承晩 , 양기탁 等과 함께 萬民共同會에 參與하였다. 安昌浩는 곧 萬民共同會 관서지방 發起會에도 參與하였다.

安昌浩는 以後 獨立協會 官署支部를 組織하고 責任者가 되었으며, 평양부 快哉情에서 萬民共同會 關書誌會를 開催하여 講演에 演士의 한 사람으로 參席하였는데, 이 때 그는 靑年 雄辯家로 名聲이 알려졌다. 以後 安昌浩는 곳곳에 巡廻講演을 다니기도 했고, 演士로 招聘되기도 했다.

안창호, 美國 滯留 中(1910年代)

1898年 (光武 1年) 11月 京城府 鍾路에서 열린 萬民共同會에서 7大臣을 彈劾, 聲討하였고, 6個組의 政治革新 안(政治革新案)을 建議했다. 그러나 萬民共同會 獨立協會 皇國協會 의 無辜와 襲擊으로 解散되자, 安昌浩는 隱身해 있다가 故鄕으로 되돌아가 敎育과 基督敎 顚倒運動에 뛰어들었다. 1899年 江西郡 동진면 暗花里에 漸進學校 와 彈捕吏 敎會 를 設立하였고, 隣近 荒蕪地를 農地로 開墾하는 干拓 事業을 推進하였다. 1902年 (光武 5年) 이혜련 과 結婚하였고 그 해 11月 4日 아내 이혜련 과 함께 배便으로 出國, 日本 東京 에서 1週日을 滯留한 後 美國 으로 건너간다. 美國으로 가는 뱃길에서 日沒 中에 茫茫大海에 우뚝 솟은 하와이 섬의 雄壯한 모습을 본 安昌浩는 自身의 號를 倒産(島山)이라고 지었다.

結婚 生活 [ 編輯 ]

그러나 안창호 自身은 僑民社會 活動과 獨立運動에 投身해야 했으므로 아내 이혜련과는 오래 같이 보내지는 못하였다. 以後 安昌浩가 妻子와 함께 지낸 期間은 13年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6] 서울서 結婚式을 올린 뒤 함께 渡美한 以後 共立協會 時節의 5年間, 국민회 時節의 8年間뿐이었다. 1919年에 上海로 간 뒤엔 家庭을 다시 돌볼 機會가 없었는데, 1926年에 暫時 美國에 들렀을 때 로스앤젤레스의 YMCA 倒産 送別式場에서 安昌浩는 自己 家族에게 이렇게 말했다. [6]

내가 只今까지 아내에게 치마 하나, 저고리 한 감 사 준 일이 없었고, 필립에게도 空冊 한 卷, 鉛筆 한 자루 못 사주었다. 그러한 誠意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여러 가지 事情으로 그랬는데, 如干 죄스럽지 않다. [6]

1902年 留學을 위해 渡美하여 그곳 同胞들의 어려운 處地를 본 뒤 學業을 抛棄하고, 僑民地圖에 나섰다. 그러나 오랫동안 男便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아내 이혜련 은 不平不滿이 없었고 外道 한番 하지 않았다. 또한 經濟的으로 無能力한 男便을 탓하지도 않았고, 安昌浩는 平生 이를 가슴아프게 생각하였다. 그는 곧 草創期 美國 僑民社會 指導者의 한 사람으로 成長하였다.

亡命과 社會 活動 [ 編輯 ]

出國 初期와 留學 生活 [ 編輯 ]

共立協會 의 初期 멤버
(앞줄 오른쪽 맨 끝이 안창호)

1902年(光武 5年) 安昌浩는 美國 으로 留學을 떠나 샌프란시스코 에 居住하면서 하우스 보이로 就職해 2~3年 동안 일하였다. 以後 리버사이드 로 移徙하여 오렌지 따는 일을 하였다. 1903年 9月 23日 在美 韓人僑胞의 團結과 啓蒙을 위해 韓人親睦會(韓人親睦會)를 組織, 會長에 被選되었다. 留學生 身分임에도 그는 僑民 社會의 團結을 위해 各 韓人 僑民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집 淸掃와 周邊 쓰레기 整理, 겨울에는 눈도 쓸어주었다. 처음에는 그의 眞意를 疑心하던 僑胞들은 그의 繼續된 努力에 感動하여 韓人親睦會에 加入하고 僑民社會를 形成하여 活動하기 始作했다.

1904年 샌프란시스코 에서 리버사이드로 移住, 基督敎 契가 經營하는 神學講習所 에서 英語 와 神學을 가르쳤다. 留學生 身分이던 1905年 長男 필립이 태어났고, 그해 4月 5日 그는 韓人親睦會를 발족시켜 韓人共立協會 (韓人共立協會)를 創立하고 初代 會長에 被選되었다.

共立協會 1905年 4月 에 創立되어 安昌浩가 歸國하기까지 直接 이끌었던 2年 未滿의 短期間에 600名의 會員을 모았다. 11月 에는 慈悲를 들여 敷地를 마련하고, 3層 建物의 共立協會 會館을 設立했으며, 11月 22日 巡國文版 新聞 《 공립신보 (共立新報)》를 發行했다. 그는 每月 두 次例 《공립신보》를 發刊하여 僑民 社會에 普及하였다.

1905年 (光武 8年) 11月 17日 大韓帝國 박제순 科 日本 政府의 하야시 곤스케 에 依해 締結된 乙巳勒約 으로 大韓帝國 의 外交權을 日本 帝國 이 빼앗자, 그는 條約 反對 項의 聲明書를 發表하고, 윤치호 , 서재필 等과 함께 乙巳 保護 條約 에 反對하는 運動을 主導하였다. 1907年 安昌浩는 歸國하여 對한 사람 [7] 은 實力을 길러야 한다고 力說하였다. 愛國 啓蒙 運動 外에도 1904年 의친왕 , 鄭在寬 (鄭在寬) 等과의 共立協會 (共立協會) 創立, 1909年 김좌진 · 李甲 (李甲) 等과의 西北學會 創立을 하였고 또한 1907年 美國에서 歸國한 以後 新民會 , 大韓協會 大成學校 設立 等을 위해 서울과 平壤 等에서 여러 次例 演說을 했다. 安昌浩는 卓越한 雄辯力으로 數千 人波의 마음을 사로잡곤 하였다. [8] 乙巳 保護 條約 以後 그는 實力 養成을 통해 獨立을 達成해야 한다는 유길준 의 啓蒙 講演 活動에 感銘받아 깊이 共感하게 된다. 以後 그는 實力養成을 위해서는 敎育이 必要하며, 民衆들의 意識改善이 先行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獨立運動과 社會 活動 [ 編輯 ]

興士團 의 短期

1907年 (光武 10年) 大韓協會 에서 主催한 講演에 參與해 演說을 하였는데, 그의 演說을 듣고 感動받은 여운형 · 여운홍 兄弟와 조만식 은 獨立運動에 投身할 것을 決心하기로 한다. [8] 그의 講演에 感化받은 조만식 은 '將次 民族을 위해서 奉仕하려면 實力을 키워야 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8] 1907年 2月에는 大韓留學生會(大韓留學生會)의 招請演士로 招聘되어 講演하였다.

1907年 (隆熙 1年) 그는 歸國을 決心하였다. 歸國 卽時 安昌浩는 양기탁 , 윤치호 , 전덕기 (全德基), 金九 , 유길준 , 이동휘 (李東輝), 李甲 (李甲), 이회영 , 이승훈 等 國內 啓蒙運動의 核心人物들을 召集하였다. 그는 全國 各地의 民衆을 啓蒙, 文盲과 舊習을 打破하여 實力을 養成하겠다는 構想을 說明하면서 祕密結社를 組織하는 일에 着手했다. 이들의 폭넓은 共感帶를 얻어 安昌浩는 新民會 (新民會)를 京城府 에서 組織하였다. 그는 新民會 를 中心으로 全國의 愛國志士들을 糾合해 가는 한便, 靑年 支社들의 敎育 外에 그들로 하여금 敎育, 啓蒙 講演, 言論, 産業, 文盲 타파, 文字 敎育, 農村 啓蒙 等의 活動을 推進해 나갔다.

大成學校 創設과 中央, 記號學會 參與 [ 編輯 ]

1907年 安昌浩는 양기탁 , 윤치호 等과 新民會 創立에 參與하였다. 會長職은 윤치호 가 選出되고 그는 幹事로서 行動 綱領을 直接 草案한다.

新民會 綱領

民族自存意識과 獨立思想을 鼓吹한다.

함께하는 鬪爭同志를 發掘.總力 團結한다.

國民 個個人의 國民運動 力量을 蓄積한다.

未來의 主人될 靑少年 敎育을 促進한다.

各種 商工業을 발전시켜 國民經濟의 復興을 圖謀한다.

또한 그 해, 大成學校 를 平壤에 設立하였는데 當時 大成學校의 敎育方針은 正直하게 살자는 것이었다.

윤치호

1908年 (隆熙 2年) 京城府 中央學會 를 본 뒤, 中央學會를 본따 奬學財團인 西北學會 를 創立하였다. 書店인 太極서관 의 平壤, 서울, 大邱支社 設立을 計劃, 後援하여 讀書를 普及하려 努力하였다. 그해 平壤 마산동에 陶瓷器 會社를 設立하는데 投資, 直接 參與하여 産業을 일으키는 運動에 模範을 보이기도 했다. 이때 敎育과 支援事業에 沒頭하는 한便 各地를 巡幸하며 各地의 新民會 地域幹部들을 만나 事業을 議論하였다.

1908年 宣川郡 , 鐵山郡 等에서 김진후 의 喜捨金(喜捨金) 2萬원과 오치은 의 財政的 援助를 얻어 平壤 大成學校 를 세웠다. 校長에는 윤치호 를 招聘, 任命되었다. [9] 그런데 大成學校의 아침 體操時間은 軍事訓鍊을 彷彿케 한다고 알려져 當局의 耳目을 끌게 되었다. 비슷한 時期에 세워진 各 私立學校에서도 體操時間을 剛健한 身體와 精神을 鍛鍊하는 科目으로 重要視 하고 있는 雰圍氣가 擴散되고 있어서 많은 學生들과 敎育者들, 韓國統監府 조차 關心을 갖고 지켜보게 됐다.

어느 날 大成學校 學生들은 體育 授業 時間에 運動場에서 棍棒을 둘러메고 '行步가'를 부르며 行進하던 學生들은 '日本의 武力 앞에 힘없이 쓰러지는 亡國의 悲運을 눈앞에 둔 우리들에게 가장 必要한 것은 强兵이나 軍隊는 이미 解散되어 强兵政策의 遂行이 不可能하니 學校敎育의 體操時間을 통해서나마 이러한 民族的인 課題를 遂行해야 한다'며 우렁찬 氣像을 선보였다.

또한 安昌浩는 가끔 學生들에게 夜間에 非常召集令을 내려 險山準曲 이나 共同墓地가 있는 山에 올라가게 하여 膽力을 기르게 하기도 하였다. 韓國統監府 는 이를 두고 눈 덮인 曠野나 暴炎을 가리지 않고 戰術强化訓鍊을 시키고 있다며 트집을 잡기 始作했고, 軍事訓鍊을 彷彿케 하는 私立學校의 병식敎鍊을 두고 統監府와 隨時로 摩擦을 빚게 되었다.

韓日竝呑 前後 [ 編輯 ]

1916年 興士團 年例 大會 記念 撮影
(앞줄 가운데가 안창호, 맨 뒷줄 기러기 文樣은 그가 直接 만든 興士團 의 短期)

1909年 靑年學友會의 創設에 加擔하였으나, 같은해 10月 安重根 이토 히로부미 狙擊 事件의 關聯者로 指目되어 京城府 龍山 日本 憲兵隊에 逮捕되어 收監당하였다. 그러나 嫌疑點이 없어 곧 풀려났다.

1910年 韓國 統監府 는 그에게 內閣 組織 提議를 했으나 拒絶, 이어 다시 提議가 들어왔으나 다시 一蹴하였다. 그해 4月 7日 高陽郡 행주에서 列車를 타고 出發, 國外 亡命의 길을 떠났다. 長期間 亡命을 豫想하고 이 때 擧國歌(去國歌)라는 노래를 지어 남기고 떠났다.

第2次 都彌 [ 編輯 ]
1915年 ,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地方總會. 오른쪽 열한番째는 李承晩 , 가운데 壇上에 선 이는 안창호.

또한 民族運動의 求心點이 되는 團體 또는 側面支援團體 結成을 推進하면서 同時에 民族性復興運動을 위한 靑年 엘리트 團體의 必要性을 節減, 韓日 竝呑 以後 解散된 興士團 (興士團)의 復活을 推進하였다. 그해 《공립신보》를 《新韓民報( 新韓民報)》로 題目을 바꾸어 刊行하는데 同參하였다.

興士團 創設과 獨立運動 [ 編輯 ]

그는 韓人 個個人을 선비처럼 만든다는 유길준 의 思想에 깊이 共感하여 興士團의 復活을 準備하고 靑年을 糾合하였다. 이는 國民會 活動과는 別途로 推進하였다. 1913年 그는 自身이 세운 靑年學友會 를 基盤으로, 유길준 興士團 을 再建하였다. 興士團은 國內에서 그가 세웠던 靑年學友會 유길준 興士團 의 趣旨를 繼承한 것으로 民族運動의 幹部를 養成하려는 目的에서 만든 訓鍊團體였다. 興士團은 美國에 本部를 두었으며 3·1 運動 後에는 中國과 日帝强占期 朝鮮에도 會員을 確保하고 活動을 展開해 나갔다.

1918年 12月 19日 에는 美國 에 滯留中이던 서재필 로부터 連絡이 왔다. 英文雜誌 發刊을 提議한 것이다.

국민회, 興士團 活動 [ 編輯 ]

그러나 국민회 의 主導權을 놓고 李承晩 , 박용만 과 競爭하게 되면서 國民會 內에는 다시 안창호派, 李承晩 파, 박용만 波로 사분오열되고 만다. 국민회의 派閥 다툼이 심해지자 서재필 정순만 은 한발 물러서서 傍觀하게 된다.

1913年 , 自身이 創設한 靑年學友會 유길준 이 創始한 興士團 을 統合하여 興士團 을 再創立하였으며, 發起人은 全國 8度를 代表하는 25人의 代表者를 指名하였다. 以後 박용만 , 정순만 , 李承晩과 함께 美國 韓人社會의 指導者로 活動하기도 했다. 1914年 , 대한인국민회 의 認可 承認을 받기 위해 努力, 캘리포니아 州知事로부터 正式 社團法人(社團法人) 認可를 받았다. 이때 로스앤젤레스로 家族과 移住하여 LA 韓人社會 活動과 國民會 組織 整備 活動에 着手하였다. 1917年 송종익, 임준기 等과 함께 로스엔젤레스에서 北美 實業株式 會社를 設立했다. 또한 主로 캘리포니아 管內와 멕시코 僑民社會, 캐나다 等을 訪問하며 對韓人國民會 組織 運動을 强化한다.

1918年 말, 1919年 4月 에 열리는 파리 講和會議 의 代表子路 李承晩 , 정한경 , 민찬호 를 派遣하였으나, 無國籍者 人 李承晩은 美國 국무성에서 旅券을 發給해주지 않아 失敗하였다.

臨時政府 參與 [ 編輯 ]
大韓民國 臨時政府 國務院 記念 寫眞.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 안창호, 懸鶉 . 뒷줄 김철 , 윤현진 , 최창식 , 이춘숙 (1919年 10月 11日).
1919年 9月 17日 第6次 臨時의정원 閉院式 記念 寫眞.

1919年 4月 13日 宣布된 大韓民國 臨時政府 內務部 總長 으로 任命되었고, [10] 이어 國務總理 代理에 選出되었다. 그 뒤 여러 곳 各地에 選出된 臨時政府를 統合하는 일은 安昌浩의 主導下에 推進되었다. 5月 25日 美國으로 出國, 그날 中國 傷害 에 到着하였다. [11] 安昌浩는 아래의 條件을 이렇게 提示했다.

# 各地에 있는 政府 領袖들을 上海로 모으는 일을 推進할 것.

  1. 그 분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安昌浩는 內務總長 및 國務總理 자리를 내놓고 다른 분을 最高 指導者로 推戴할 것. [11] [12] [13]

自身이 맡을 수도 있었으나 記號派의 反撥을 豫想한 그는 다른 사람을 首班으로 하고 自身은 內務나 實務部署 자리를 願하였다. 臨政에서는 그의 條件을 受諾하였고 그는 바로 就任하였다.

臨時政府 活動과 辭退 [ 編輯 ]
1921年 1月 1日, 傷害 臨時政府 新年賀禮會. 두 番째 줄 오른 쪽 네 番째가 안창호, 맨 앞줄에서 왼쪽으로 세 番째가 金九 , 두 番째 앞줄의 가운데에 있는 이가 李承晩 , 바로 왼쪽 옆의 이가 이동휘 이다.

1919年 , 安昌浩는 上海 臨時政府의 內務總長으로서 나랏일을 보았다. 以後 그를 大統領 代理로 選定하려 했으나 [6] 그는 애써 辭讓하였고 代身 1919年 6月 28日 , 그는 內務總長 兼 國務總理 代理에 正式으로 就任하였다. [11] [12] [13]

나는 暫時라도 大統領 代理의 名目을 띠고는 몸이 떨려서 始務할 수가 없소. [6]

1919年 9月 , 國務總理로 就任하기 爲해 상하이 로 온 이동휘 1920年 말에 온 李承晩 은 서로 强力히 對立하였다. 李東輝는 蘇聯의 도움을 받아 社會主義 를 採擇해야 한다 했고, 李承晩은 美國式 民主主義 를 適用하자고 하여 葛藤이 繼續되었다. 安昌浩는 이 둘을 仲裁하고 和解를 周旋하였다. 그러나 安昌浩의 積極的인 仲裁는 失敗하여 먼저 李東輝가 臨政을 떠나고 李承晩도 美國으로 가버렸다.

1921年 2月 , 春園 이광수 가 歸國할 뜻을 보이자 挽留하였다. 그러나 李光洙는 그의 挽留를 듣지 않고 歸國한다.

이광수 ·허영숙君을 訪問하다. 2人이 같이 本國으로 갈 뜻을 말하는지라 내 이르기를 只今 鴨綠江을 건너는 것은 敵에게 降書(降書)를 齊納(提納)함이니 絶對 불까요 軍(君) 等 兩 個人의 앞길에 對話(大禍)를 만드는 것이라 속端的으로 行치 말고 冷靜한 態度로 良心의 支配를 받아 行하라 하다. [6]

1921年 2月 13日子 안창호 日記

4月 에는 날쌘 靑年 男子들을 選拔하여 日帝强占期 下 朝鮮에 보내 情報를 蒐集해오게 했으나 4月 말 모두 朝鮮總督府 에 逮捕되면서 失敗한다. 한便 安昌浩는 臨政 창조派와 改造派들을 說得하였지만 說得에 失敗하고 만다. 1922年 7月에는 金九 , 신익희 , 趙素昻 , 이시영 , 여운형 等 50餘 名과 함께 時事책진회 (時事策進會)를 組織하는데 參與하였다.

國民代表者 大會 主管 [ 編輯 ]

國民代表會議 改造派 聲明書

1921年 , 臨時政府 自由主義 를 主張하는 大統領 李承晩 共産主義 蘇聯 의 保護를 主張하는 國務總理 이동휘 의 獨立運動 方略과 理念의 差異로 內紛에 휩싸이자 安昌浩는 兩者間 調節, 仲裁를 努力했다. 그러나 李承晩 이동휘 를 攻駁했고, 이동휘 레닌 의 資金 事件이 터지자 臨政 總理職을 辭退했다. 그 뒤 大統領 李承晩 의 委任統治案을 두고 論難이 거듭되면서 李承晩 大統領 免職, 彈劾 運動이 展開되었다.

여기에 박용만 의 外交總長 就任拒否와 함께 半 臨政運動에 同參했다. 한便 베이징 에서는 李承晩 이 首班으로 任命되면서부터 半(反) 臨政運動 等으로 臨時政府가 흔들리자 安昌浩는 大統領 職을 遂行할 수 있도록 李承晩 中心으로 團結해 줄 것을 呼訴하였다.

그러나 臨時政府 를 두고 解體論者(창조派)와 臨政 固守派가 나타나 繼續 葛藤하게 됐다. 처음에 臨政 固守派의 立場에 섰다가 部分的인 內容만 改正, 再整備하자는 쪽으로 路線을 旋回(臨政 改造派)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改造論 主張에도 兩側의 對立이 深化, 政局을 收拾할 수 없자 1921年 5月 에 勞動局 總販職을 辭任하고, 呂運亨과 함께 國民代表會議 開催에 參與하였다. 1923年 臨時政府의 改造派와 창조派 代表者 124名이 參席한 가운데 臨時政府 의 存廢 與否를 論하는 國民代表會議가 開催되었으나 여기서도 창조派와 改造派의 意見差異가 좁혀지지 않아 5月 15日 國民代表會議는 63回 會議에서 決裂, 閉會되고 말았다. 以後 臨時政府 內務部長 金九는 臨政 改造派와 창조派를 상하이 에서 追放, 解散을 命했으나 안창호에게는 不利益을 加하지 않았다.

外郭團體 活動과 臨政 復歸 失敗 [ 編輯 ]

韓人僑民 支援 活動과 國內 獨立運動 支援組織 結成 [ 編輯 ]

國民代表者會議에 參與 中 그는 1922年 이광수 , 주요한 等에게 連絡 京城府 에 修養同盟會(修養同盟會)와 平壤에 동우俱樂部 (同友俱樂部)의 發足을 指示했다. 그는 團體의 基準과 會員 資格, 團體 이름까지 具體的으로 이광수 주요한 等에게 指示하고 居士資金을 보내 設立에 着手하게 하였다. 한便 美國內 國民會에서는 李承晩 波와 안창호派, 박용만 파간 紛爭이 激化되면서 하와이 국민회 地方總會가 解體되고 만다. 以後 李承晩 系列은 臺韓人同志會 를, 其他 一部는 하와이 臺韓人僑民團 組織하였고, 안창호 系列만이 대한인국민회 에 남아있게 되었다.

1923年 에는 滿洲 에서 理想村 建立을 위해 努力하기도 하였으나, 一齊 의 滿洲 侵略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그가 實力 養成과 人材 育成을 부르짖자 急進派는 當場 싸울 人力이 必要한데 무슨 말이냐며 反對하였으나, 安昌浩는 나라의 獨立을 위해서는 于先 人材를 育成할 必要가 있다며 人材育成과 實力養成을 强調하였다. [14] 그가 보기에 韓國이 文明開化의 富强한 나라가 되는데 가장 必要한 것은 實力을 갖춘 人材를 키우는 것이었던 것이다.

傷害 共産主義者 들이 安昌浩를 批判하다가도 下宿費가 떨어지면 그를 찾아왔다. 그런데 그들이 찾아오 安昌浩는 時計라도 풀어서 주었다. [15] 구연흠(具然欽)같은 共産主義 運動家는 自己 딸의 就職을 그에게 付託할 程度로 그를 尊敬했다. [15]

國內와 美洲의 많은 僑胞들이 愛國金을 보낼 때 安昌浩에게 主로 보냈다. [15] 이는 그가 상하이 臨時政府 에 立脚했을 때나 辭退했을 때 변함없었다. 인촌 金性洙 (金性洙)는 상하이 에 오면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倒産과만 만나서 軍資金을 傳達하였다. [15] 安昌浩는 朝鮮日報 社長이던 啓礎 방응모 (方應謨)와도 切親했는데, 啓礎는 安昌浩를 조선일보의 高位職으로 모시려고 하기도 하였다. [15]

安昌浩는 섹션 6 비자로 세次例 美國을 訪問하였으며 市民權을 取得한 적이 없다. 安昌浩가 共産主義者라는 投書가 原因이 되어 1926年 美國은 安昌浩를 追放하였다. [16]

상하이 再訪問과 國務令 落馬 [ 編輯 ]
충칭 臨時政府 廳舍.

安昌浩는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 따는 일을 繼續 하다가 三一運動으로 상하이에 臨時政府가 設立되려하자 모은 誠金을 가지고 상하이로 떠났다. 1924年 中國 南京에 동명학원을 設立하고, 北京에 ‘同胞에게 告하는 글’ 作成하여 보냈다. 1925年 美國으로 暫時 돌아왔다가 1926年 다시 中國으로 떠났다. 1928年 民族唯一黨運動에 同參하여 이동녕 , 이시영, 金九 等과 상하이 에서 韓國獨立黨 을 結成하는데 參與하였고, 對共主義를 提唱하였다.

1926年 5月 3日 , 그가 傷害 로 到着하기 前에 大韓民國 臨時政府 는 그를 國務令으로 選出해놓고 있었다. [17] 그러나 5月 16日 , 그가 上海로 돌아와서는 國務令職에 就任하지 않았다. [17] [18]

安昌浩가 國務令을 辭退한 背景에는 臨時政府 내 記號派 의 反撥이 極甚했기 때문이다. 李承晩 系列과 그를 支持하던 趙素昻 외의 記號 系派 人士들은 그의 國務令 就任을 極烈 反撥했다. 5月 , 臨時의정원 에서 양기탁 의 後任으로 安昌浩를 國務令에 選任하자, 記號派의 中心인 안공근 , 김규식 , 金九 , 김보윤 (金甫潤) 等은 西北波인 安昌浩가 國務令이 되는 것을 反對하였다. [19] 김규식 은 記號派는 아니었으나, 記號派와 함께 連帶하여 安昌浩의 就任을 反對했다. 結局 安昌浩는 國務令에 選出된지 13日만에 辭退하여 事態를 收拾하였다.

7月 臨時議政院의 執政 최창식 (崔昌植)에 依해 國務令 으로 推戴된 紅塵 (洪震)李 內閣을 構成했을 때에 記號波인 金九, 趙素昻 , 中價派의 안공근, 오영선 等이 入閣을 反對하여 結局 安昌浩가 內閣 構成을 도왔다 한다. [19] [20]

民族 改造論과 理想村 建設 推進 [ 編輯 ]

하와이 를 訪問한 이상재 , 윤치호 와 함께 달리기 競走. 오른쪽 두 番째 선 이가 안창호.

獨立運動의 方略을 놓고 武裝鬪爭論, 外交獨立論, 민족개조론 으로 나뉘었을 때 安昌浩는 민족개조론 을 主唱하여 實力의 養成을 力說하였다. 그의 民族改造論은 뒤에 이광수 , 安在烘 , 金性洙 , 송진우 , 조만식 , 최남선 等에게 影響을 주었다. 李光洙는 그를 찾아와 活動을 補助하기도 하였고, 興士團 修養同友會 에도 加入하여 活躍하였다.

1923年 부터 國民代表會議가 決裂될 것을 豫想, 그는 大獨立黨 (大獨立黨) 創黨 運動과, 獨立 運動 根據地 兼 資源 調達處, 韓國人 移民者들의 定着村 等 複合的 目的의 理想村(理想村) 建設 計劃을 세웠다. 1924年 에는 經濟的 資源을 마련하고자 北中國 華北 地域과 滿洲 方面을 踏査, 視察 旅行하며 理想村 候補地를 探査하고 不動産 等에 土地를 物色했으나 適當한 곳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바로 南京에 동명학원 (東明學園)을 開設한다. 그 뒤 美國 에 건너가 서재필 , 李承晩 , 박용만 , 정순만 等을 面談하고 在美 韓人社會와 國際情勢의 動向을 把握하고 1926年 다시 中國에 건너가 가을부터 滿洲 吉林省 一帶를 踏査하며 理想村 事業을 推進하였다. 그러나 適當한 場所도 찾지 못하고, 費用 마련도 어려워서 失敗하고 만다.

1927年 吉林省에서 軍事 行動 團體의 統一과 대독립당의 結成을 討議中 拳銃과 칼, 長銃 等 武器들의 搬入을 殊常하게 여긴 中國 警察의 追跡으로 同志 200 餘名과 함께 中國 吉林省 警察에 逮捕, 吉林省 警察廳 監獄에 監禁되었다가, 中國內 社會 輿論과 中國內 反日主義者들의 釋放 歎願, 中國 國民黨 政府의 連絡 等으로 20日 만에 釋放되었다. 바로 美國 으로 出國했다가 배便으로 하와이 를 거쳐서 다시 상하이 로 되돌아왔다.

1928年 이동녕 , 金九 , 이시영 , 趙素昻 等과 上海에서 韓國獨立黨을 創黨하는데 參與하였다. 1930年 상하이에서 韓國獨立黨 을 재결성하는데 參與하였다가 1931年 滿洲事變으로 滿洲에서의 理想村 計劃을 斷念하고 난징에서 土地를 買收하였다.

대독립당 運動 推進과 失敗 [ 編輯 ]

1926年 5月 말, 상하이 로 간 安昌浩는 民族主義者, 社會主義者, 無政府主義者를 糾合하는 唯一政黨 運動인 대독립당運動(大獨立黨運動)에 앞장섰다. 1924年 頃부터 國內外에 걸쳐 左右合作론 이 提起되었으나 곧 묻혔고, 散發的으로 論議되는 데 그치던 左右合作 問題를 中國과 滿洲에서 本格的인 實踐運動으로 끌어올린 사람이 安昌浩였다. 상하이 에 到着 後 1個月間 民族派, 左派, 아나키스트 人士들과 接觸한 그는 그 해 7月 8日 , 140名의 各 派 指導者를 모아 '臨時政府 問題와 우리의 革命運動에 對하여'라는 講演을 始作으로 各 政派의 合作을 推進하였다. 그러나 各 派 間에 異見이 甚하여 그의 大獨立黨運動은 挫折되고 만다.

安昌浩의 主導로 始作된 左右合作 運動은 한동안 活潑히 推進되었지만 結局 失敗로 끝나버렸고 1928年 , 中國 獨立運動家 들은 民族主義者들의 韓國獨立黨 (韓國獨立黨)과 社會主義者 들과 아나키스트 들의 韓國 獨立運動者同盟(韓國獨立運動者同盟)으로 各各 結集하였다. 韓國獨立黨 創黨에 參與한 安昌浩와 그의 側近들은 記號派 臨政 系列인 이동녕 等 民族主義 獨立運動家 28名과 함께 韓獨黨 創黨 發起人으로 參加했다. 安昌浩는 趙素昻 等과 함께 韓國獨立黨 正當 綱領 基礎委員의 한 사람으로 參與하여 對共主義론(大公主義論)을 韓國獨立黨의 綱領에 追加하였다. 그러나 安昌浩의 勸告에도 興士團 修養同友會 에는 加入했지만 臨政 參與를 拒否하는 人士들이 存在하였다. 1932年 , 그가 國內로 押送된 後엔 韓國獨立黨 中 興士團 系列과 西北 系列은 相當數 離脫하고 臨政은 여러 갈래로 나뉘게 되었다.

필리핀 理想村 建設計劃 挫折 [ 編輯 ]

1928年 부터 그는 中國 과 滿洲 밖에 理想村을 建設할 計劃을 세운다. 1929年 2月 , 安昌浩는 日帝가 목을 죄어 오던 상하이와 滿洲 地域을 벗어나 새로운 獨立運動 據點 開拓을 試圖했다. 安昌浩는 滿洲의 韓人들을 필리핀으로 大規模 이주시킬 計劃을 세우고 필리핀 移民國에 찾아갔다. [21] 中國 滿洲 의 馬賊團, 日本 의 警察과 密偵, 朝鮮總督府 의 警察, 獨立運動家를 詐稱하는 强盜團의 出沒에서 滿洲 同胞들을 救濟할 方案으로 그는 滿洲 移住民들의 필리핀 移住를 위해 마닐라 等地의 適當한 地點을 物色하는 等 2年間 努力하였다.

그런데 “ 日本 旅券을 갖고 와야 하고, 1人當 50원의 持參金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 필리핀 外務部 當局이 내건 條件이었다. 當時 50원은 쌀 5가마 값으로, 勞動者 1名 月給이 쌀 한두 말에 不過했던 것을 勘案할 때 너무 큰돈이었고, 日本 旅券을 얻는 것은 더 어려웠다. [21] 安昌浩는 李承晩 윤치호 에게 도움을 請해 費用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日本 의 旅券을 얻는 것은 어려웠고, 그가 처음에 中國人이나 外國人으로 假裝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中國人이나 他國 사람이라고 말을 뒤집기도 어려웠다.

安昌浩는 케손 (Quezon) 필리핀 國會 上院議長 等 필리핀 政界 有力人士들을 만나 事情을 說明하고 도움을 要請했지만 結局 거부당하고, 結局 挫折하고 만다. [21] 하지만 필리핀 에 ' 대한인국민회 필리핀 支部'를 設立하는 等 部分的인 成果도 있었다. [21]

홍구公園 義擧와 逮捕, 收監 [ 編輯 ]

島山 安昌浩의 末年. 왼쪽에는 여운형 , 오른쪽에는 古堂 조만식 . 呂運亨과 曺晩植은 安昌浩가 죽을 때까지 곁에서 보살펴 주었다.

1932年 4月 상하이 훙커우 公園 에서 尹奉吉 義擧 가 成事되자 金九 는 臨政 要人들에게 避身을 連絡했지만 그는 連絡을 받지 못했다. 4月 29日 同志 이유필 의 딸 生日에 膳物을 사준다던 約束을 지키러 이유필 의 집에 到着하던 中, 尹奉吉 과 上海 홍구 爆彈 事件의 關聯者로 指目되어, 日本 領事館 警察과 合勢한 佛祖系 프랑스 領事館 官憲에 逮捕되어 日本 領事館 警察에 引渡되었다. 日本警察에 逮捕되어 상하이 領事館 監獄에 投獄되었다가 5月에는 배便으로 서울로 護送돼 4年型을 받고 西大門刑務所 에 收監되었다가 移監되어 대전형무소 에서 服役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自身은 尹奉吉 義擧와 아무런 關聯이 없음을 主張하였으나 釋放되지 못하였다. 그가 逮捕되면서 安昌浩와 興士團 圓을 中心으로 推進된 대독립당 推進 運動은 結局 霧散되고 만다.

윤치호 는 그가 事件에 관계되었을리 없다며 朝鮮總督府 警務局을 찾아가 說得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安昌浩는 拘束되었다가 裁判을 받게 된다. 檢察의 審問과 裁判을 받는 過程에서 그는 꼿꼿한 姿勢로 自身은 尹奉吉 義擧 事件과 無關함을 力說하였다. 虛僞 自白 要求에 그는 아는 事實이 없다며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民族을 위해 먹고 잤으니, 앞으로도 民族을 위해 일하고자 함은 變함이 없다" 며 堂堂하였다. 뚜렷한 嫌疑點이나 關聯性이 없었는데도 朝鮮總督府 司法府 當局은 治安維持法 違反罪로 安昌浩에게 懲役 4年刑을 求刑하였다.

윤치호 日記》에 1933年 10月 4日 者 內容에 따르면, 安昌浩는 “ 日本人 들은 最近의 敵이지만 記號派는 500年間의 敵이기에 먼저 記號派를 撲滅하고 獨立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2] 그러자 여운형, 신흥우 等도 獨立志士들과 함께 尹致昊를 찾아가 西北派의 陰謀를 粉碎하기 위한 記號派 祕密結社를 提案하였다고 한다. [22] 尹致昊는 이를 自身의 日記에 記錄으로 남겼고, 尹致昊는 安昌浩와 신흥우, 呂運亨 等을 비롯한 獨立運動家들의 地域感情을 놓고, “地域感情 하나로만 봐도 韓國은 日本으로부터 獨立할 資格이 없다”고 非難했다. [22] 이에 對해 安昌浩는 1932年 5月에 中國 상하이에서 日帝 警察에 逮捕되어 國內로 押送되었고 懲役 4年刑 宣告받아 대전형무소에서 服役한 狀態였기 때문에 안창호나 呂運亨 等이 尹致昊에게 찾아가 그런 提案을 했다는 것에 對해서는 앞뒤 情況이 맞지않다는 反論도 있다. 그러나 安昌浩가 언제 그와 같은 發言을 했다는 것까지는 正確히 記錄하지 않아 그 以前에 發言했을 可能性도 存在한다.

生涯 後半 [ 編輯 ]

獄中 生活과 苦痛 [ 編輯 ]

日帝强占期 西大門 刑務所
안창호, 방응모 共著 十二名家 書帖 (1936年)

日人 看守들에게서 "基다나이野츠!(더러운 子息)"라고 辱을 들을 만큼 온몸에 病이 든 것은 日帝에 依한 大田 監獄 生活과 鍾路 留置場 生活 때문이었다. [6] 大田 監獄 生活로 그의 宿患인 消化不良 이 더욱 惡化되었고, 肺와 肝이 나빠졌다. 安昌浩의 臨終時의 病名은 「肝硬化症 兼 慢性氣管支炎 兼 胃下垂症」이었다. [6]

그는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 恒常 담배 를 입에 물고 있을 程度로 담배 를 많이 피웠다. 祕書 구익균 이 그에게 '先生님은 왜 다른 건 다 實踐하시면서 담배 끊는 것만은 못 하십니까'라고 恒常 말해도 끝내 못 끊다가 나중에 監獄에 가서야 끊었다. [15] 그러나 禁斷 現象 亦是 獄中의 그를 甚하게 괴롭혔다. 1935年 2月 疾病의 惡化로 病保釋을 申請, 윤치호 , 金性洙 , 이광수 等이 保釋金을 支拂하여 大田 監獄에서 2年 半 만에 假出獄하였다.

日帝 警察에 逮捕되고 國內로 押送된 以後 5年間 獄살이를 하였는데, 1935年 2月 大田 監獄에서 假出獄, 出所 後 列車便으로 全國 地域을 巡廻講演을 다니다가 平安南道 大同郡 대보산 송태산場에 隱居하였다. 以後 故鄕에 머무르면서 自身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 山莊으로 찾아오는 많은 親舊와 同志들과 더불어 討論하고 演說하면서 安昌浩는 平南線 降仙驛에서 北쪽으로 바라다보이는 달마산 아래에 그가 平生 꿈꾸어 왔던 理想村을 建設할 計劃을 세웠으나 修養同友會 事件 과 連이은 病院 入院으로 失敗하고 만다.

修養同友會 事件 [ 編輯 ]

西大門 刑務所 獄事 內部

1937年 6月 28日 同友會事件 으로 逮捕되어 西大門刑務所 에 收監되었으며 [23] , 日警의 拷問을 當하였다. 그의 親舊인 윤치호 와 安昌浩를 平素에 欽慕하던 金性洙 는 그에게 領置金을 보내 주었고, 朝鮮總督府 에 保釋金을 提出하여 釋放, 救命 運動을 하였다. 1937年 11月 1日 다시 西大門 刑務所에 收監되었으나 病勢가 甚하여 12月 保釋을 申請하여 받아들여졌다. 12月 24日 新兵으로 病保釋 出監하여 경성제국대학(現 서울大學校 ) 附屬病院에 入院하였다.

自身의 全 遺産과 全 財産을 大成學校 와 理想村 建設을 위한 土地 買入 [24] 等에 獻身하고 平生 가난했던 그는 病院費를 제대로 댈 수 없었다. 윤치호 金性洙 , 이광수 그리고 장리욱 , 안병욱 , 주요한 等이 그의 病院費를 댔다. 그러나 肝臟炎과 拷問 後遺症으로 病勢는 差度를 보이지 않았다. 病院 入院 中 冷房이었던 때가 있었는데 이때 病勢가 惡化되었다.

最後 [ 編輯 ]

親舊인 윤치호 와 그를 스승처럼 따르던 이광수 가 高級 韓藥을 보냈지만 여러 病의 合倂症으로 苦生하여 낫지 않았다. 그의 外조카 김순원과 조카딸 안성결, 그의 弟子인 박정호 等 그의 入院 中 시중을 들었으며 나중에는 그의 獨立運動 同志인 이갑의 딸 李正姬가 거들면서 번갈아가면서 安昌浩의 시중을 들며 끝까지 至誠껏 病看護를 했다. 윤치호 이광수 , 金性洙 等은 病院費를 支拂했고 隨時로 그를 찾아 問安했다. 1938年 그는 昏睡 狀態에 빠졌는데, 이때까지도 그는 나라를 걱정하며 民族의 實力을 기르고 獨立을 準備해야 함을 强調하였다.

木人아, 木人아 네가 우리 民族에게 큰 罪를 지었구나!

1938年 初 그는 病床에서 日本 天皇 무쓰히吐(睦仁, 메이지 天皇 )를 糾彈하는 소리를 一喝하여 病院 關係者들을 놀라게 하였다. 病床에서 安昌浩는 鮮于氏의 손을 잡고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입 안이 마르고 혀가 잘 돌지 않아서 말을 못하였다. 몸이 極度로 瘦瘠하여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程度였다. 鬚髥은 희고, 머리의 半은 누렇고 半은 희어 黃白色이었다. 물을 숟가락에 떠서 입술에 축여드리니 비로소 말을 하였다. [6]

너무 슬퍼하지 마오. 夫人과 아이들 平安하오? 이렇게 어려운 곳을 오니 참 반갑소. 내 홑이불을 들고 내 다리와 몸을 보오. 이렇게 되곤 사는 法이 없소. 나는 本來 心臟病 이 있는 中 大田 監獄에서 까지 傷한 몸으로 이番 다시 鍾路서 留置場에서 三伏 炎天 좁은 房에 10餘 名이 가득 누웠으니, 내 몸은 견딜 수가 없었소. 醫師의 말이 나는 只今 일곱 가지 病이 생겼다고 하오. 只今 이가 傷하고 齒牙가 빠졌고, 廢刊이 傷하고, 腹膜炎 , 皮膚炎 모두 성한 곳이 없소. 그 종로서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나는 只今 아무것도 먹지 못하니, 全身에 뼈만 남고 피가 말랐소. 나를 일으켜 안아 주시오. [6]

그가 晩年에 京城 의 한 寫眞館에서 찍은 寫眞을 보면 얼굴이 많이 부어 있는 狀態였다. 1938年 3月 10日 安昌浩는 경성제국대학 附屬病院(現在 서울대학교病院 )에서 享年 61歲를 一期로 肝硬化 消化不良 , 肺炎 , 慢性 氣管支炎 , 胃臟病 等의 合倂症으로 死亡하였다. 死亡 當時 그는 自身이 寵愛하던 애弟子 유상규 의 墓所 近處에 묻어달라는 遺言을 했다고 한다. [23] 그의 葬禮式은 興士團 修養동지회 會員의 主導로 擧行되었고, 윤치호 , 이광수 , 金性洙 , 여운형 , 여운홍 , 윤치영 , 장택상 等이 參席하였다.

事後 [ 編輯 ]

  • 그는 망우리에 埋葬되었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朝鮮總督府 는 憲兵을 보내 萬一의 騷擾事態를 막는다는 理由로 망우리 墓所 葬地의 出入을 統制, 監視하였다.
  • 以後 강남구 新沙洞의 島山公園 으로 移葬되면서, 그의 區 墓所가 있던 墓터 [25] 는 原形 保存되고 있다. 日帝의 懸賞金으로 因해, 國內에 들어와 安昌浩의 葬禮式에 參席할 수 없었던 李承晩 은 安昌浩를 追悼하는 漢字 로 된 萬時(晩詩) [26] 를 지어보내 비록 獨立運動의 方向과 意見 差異로 인해 다투기도하고 서로 돕기도 하였던 지난 날을 생각하며 哀悼를 표했다. [27]
    李承晩 限時 (漢詩) '倒産千古' 元本.

倒産千古(島山千古)

妻子天涯哭 處子는 하늘가에서 울고
親朋海外驚 親한 벗은 바다 멀리서 놀랐네
國亡人又去 나라가 亡하자 사람마저 떠나가니
嗚咽狽江嗚 大同江물도 목이 막힌 듯 울어대네.

思想과 信念 [ 編輯 ]

興士團 年例 大會 (1916年, 샌프란시스코)
(첫줄 가운데가 안창호, 오른쪽 끝은 이혜련 女史와 필립, 弼善)

4代 精神 [ 編輯 ]

무실, 逆行, 忠의, 勇敢

實力兩性論 [ 編輯 ]

安昌浩는 1920年代 내내 獨立運動의 進行을 가로막던 痼疾的인 思想分裂을 克服하고 民族主義 者와 共産主義 者 間의 思想과 路線 葛藤의 極限 對立을 融和 시키고자 그 어떤 主義와 路線으로도 分派할 수 없는 自己 犧牲의 '對共主義'(大公主義)라는 第3의 길을 提示하였다. [29]

그는 스스로 힘을 키울수 있을 때만이 民族이 스스로 自立할 수 있다고 展望하고 實力兩性論 을 主張했다. 그의 實力 養成論에 이광수 , 최남선 , 金性洙 , 조병옥 等이 感化받았다.

安昌浩는 個人의 黨利나 私益보다 社會 全般의 利益을 優先으로 하고 民主 敵 討論節次를 통해 形成된 公論을 重視하였으며, 이를 通해 民族 平等 , 政治 平等 , 經濟 平等 , 敎育 平等 社會民主主義 나라 樹立을 志向하는 中道 敵 路線을 選好했었다. [29]

거짓 亡國論 [ 編輯 ]

安昌浩는 韓國人들의 거짓, 詐欺, 不正이 나라를 亡國으로 몰고갔다고 봤다. “아아,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怨讐로구나. 軍部(君父)의 怨讐는 不共戴天(不共戴天)이라 하였으니 내 平生에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 하리라.”,“네 가죽 속과 내 가죽 속에 있는 거짓을 버리고 참(誠)으로 채우자고 거듭거듭 盟誓합시다. [30] ”라며 거짓과 거짓말이 나라를 망친 길이라고 보았다. 거짓이 蔓延한 것이 나라를 망친 것이라 診斷한 그는 거짓이야 말로 나라를 죽인 怨讐로 規定하였다.

그는 "나라 일은 神聖한 일이요. 神聖한 일을 神聖치 못한 財物이나 手段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오. [30] "라며 公職을 통해 不當한 財物을 蓄財한 것 亦是 나라가 亡할 수 밖에 없는 原因으로 보았다.

그에 依하면 '거짓이 挾雜을 낳고 挾雜이 不信을 낳고 不信에서 모든 不幸이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를 망친 最大의 原因의 하나가 거짓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죽는 限이 있어도 거짓말을 말라. 甚至於 弄談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자. 꿈에라도 거짓말을 했거든 깊이 뉘우쳐야 한다. 거짓이 우리를 망친 怨讐다 [30] '라는 것이다. 各 個人의 가슴 가운데 眞實과 正直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그의 信念이었다. [30]

그가 가장 미워한 것이 거짓이요, 그가 가장 사랑한 것이 眞實이다. 그의 人格은 參議 人格이요, 그의 哲學은 眞實의 哲學이다. 저마다 참되기를 힘쓰고 韓國民族을 참된 民族으로 만들자는 것이 그의 宿願이었다. 그가 平壤에 大姓(大成) 學校를 세우고 靑年 弟子들을 敎育할 때에도 ‘참(誠)’이 그의 敎育 理念이었다. [31]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31]
弄談으로라도 거짓을 말아라. 꿈에라도 誠實(誠實)을 잃었거든 痛悔(痛悔)하라. [31]

安昌浩는 學生들에게 誠實과 眞實을 要求했다. [31] 그는 저마다 ‘참’의 工夫를 하자, 온 國民이 眞實한 人間이 되기를 힘쓰자, 그것이 곧 나라를 救하는 길이다라고 强調하였다. [31] 그는 늘 이렇게 생각하고 實踐하려 努力하였다.

對共主義 [ 編輯 ]

1927年 상하이 에 있을 때 그는 對共主義(大公主義)를 力說하였다. 이는 理念, 系派, 派閥을 떠나 曺國과 獨立을 위해 獻身하자는 것이며, 公的인 것을 위해 個人과 私的인 것을 犧牲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1919年 4月 大韓民國 臨時의정원 이 設立되면서부터 그는 '여러분, 公과 私를 가르시오. 公과 社 中 한쪽을 굳이 犧牲해야 된다면 社를 犧牲해야 됩니다.'라고 力說했다. 對共主義를 發表하면서 그는 여기에 '個體는 全體를 위하여, 全體는 個體를 위하여'라는 口號를 追加하였다. 對共主義는 1920年代 中後半 獨立運動家들間의 이념적 分裂을 克服하기 위해, 當時 急速히 勢力이 커진 社會主義者들과의 提携 乃至는 이들을 積極的으로 包容해 내려는 意圖에서 이를 具體化하기에 이른다.

1919年 安昌浩는 獨立運動期間에 서로 嚴히 지킬 盟約으로서 公金을 橫領하지 못한다는 鐵則을 세웠다. 公金을 史跡으로 橫領하는 行爲는 容恕하거나 容納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1920年 1月 3日 上海에서 新年 祝賀會가 열렸을 때 5時間 동안 獨立運動의 方略으로서 六大事業(6大事業)에 對한 說明을 할 때 그는 사사로운 利益을 取하는 一部 獨立運動家들을 指彈하며, 臨時政府 의 職員들은 사사로운 感情과 사사로운 行動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政府職員은 人民(人民)의 奴僕(奴僕)이지만, 決코 人民 各個의 奴僕이 아니요, 人民全體의 公服(公僕)이다. 그러므로 政府職員은 人民全體의 命令을 服從하려니와 個人의 命令을 따라 마당을 쓰는 奴僕은 아닐 것이요. 그러니까 政府의 職員으로서 祠宇(私友 )나 私服(私僕 )을 삼으려 하지 마시오. 그러지 말고 空腹을 삼으시오. 나는 여러 사람이 國務院(國務院 )을 訪問하고 事情(私情)을 論하려 四史(私事)를 擇하는 일을 보았소. 이는 크게 不可한 일이니, 工事(公事)를 맡은 者와는 決코 한담(閑談)을 마시오. 이것이 尋常한 일인듯 하지만은 其實 큰 일이요. 今日은 政府職員이 아들이라도 아들로 알지 말고 社友라도 社友로 알지 마시오. 祠宇(私友)를 위해서 工事(公事)를 해함은 큰 罪입니다.

1922年 의 國民代表會(國民代表會) 席上에서 統一과 大同團結(大同團結)을 强調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에 對해서 몇 가지로서 告하고자 합니다. 卽 첫째는 過去의 感情을 忘却할 것, 둘째 彼我(彼我)를 一視同仁(一視同仁)할 것, 셋째는 일만 標準하여 公平正直(公平正直)할 것, 넷째는 胸襟을 披瀝할 것, 다섯째 公決(公決)에 悅服(悅服)할 것 等이외다. 諸君이 어떠한 理論을 陳述하고 어떠한 안을 提出하든지 各各 그 自身이나 親舊나 黨派의 理解(利害)를 標準하여 外供內査(外公內私 )하면, 求하는 원만(圓滿)은 이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敗亡(敗亡)에 이를지니 그러므로 各各 自家의 理解는 絶對로 犧牲하고 오직 일만 하는 純潔한 마음으로 會議席上에서 公平(公平)과 停職(正直)을 主張하면 設或 二世(理勢)로서 싸움의 熾烈함이 어떠한 程度까지 到達할지라도 아무 爲해(危害)가 없고 도리어 會議 全體는 圓滿하여지고 대표된 者의 責任을 다 하는 것이 될 것이외다.

또한 安昌浩는 '물彷徨'(勿彷徨)이란 主題의 講演에서 有名한 詐欺(史記)의 한 句節을 들어 '死鬪(私鬪, 私的인 싸움)에는 怯을 품고, 空轉(公戰, 公的인 싸움)에 臨해서는 勇敢하시오'라는 것이다. 1927年 에 이르러 공을 위해 社를 犧牲해야 된다는 것을 主題로 한 對共主義라는 것을 具體化하여 發表하기에 이른다. 이는 西歐의 個人主義나 自由主義에 對應하되 이념적이지 않은 理念이었다.

그는 民族主義者들이 追求하던 窮極的 目標인 獨立國家의 建設이라는 틀 속에서 自由主義 者와 아나키스트 들의 主張인 어떤 것에도 抑壓되지 않는 自由의 價値를 受容하고, 社會主義 者들과 共産主義 者들의 主張인 平等의 價値 亦是 積極 受容하였다. 對共主義의 바탕으로 그는 '안으로는 이를 政治,經濟,社會,敎育의 分野에서 平等社會를 實現하고, 個人과 個人間의 平等한 權利와 待遇 保障'을, '밖으로는 民族과 國家間의 平等을 통한 平和的 世界秩序 樹立'을 그 存立의 根據로 提示하였다.

敎育立國論 [ 編輯 ]

實力兩性論 의 方法의 하나로 그는 敎育入國論을 主張하였다. 그는 敎育이 곧 塗炭과 植民統治에 빠진 韓國을 독립시킬 수 있는 길이라고 確信하였다. 따라서 1899年 平壤 에 漸進學校, 1908年 大成學校를 建立하였고, 그와 생각이 같던 이동휘 , 윤치호 , 양기탁 等이 그의 漸進學校, 大成學校의 運營에 積極 協力, 同參한다. 1926年 中國 난징 에는 동명학원을 設立하였다.

그의 敎育入國論에도 感化된 金性洙 等은 學校 新設과 經營難을 겪던 中央學校 , 보성전문학교 等을 引受하였고, 장덕수 , 윤치호 等은 이화여전 , 근화女學校 等의 財團 理事로 參與하며 이들 私立 學校 財團의 財政的 後見人 노릇을 하였다.

評價 [ 編輯 ]

肯定的 評價 [ 編輯 ]

安昌浩는 '民族의 先覺者', '獨立運動의 偉大한 指導者'라는 等 높은 評價를 받는 反面, '改良主義者', '朝鮮獨立不可論者', '自治論者'等 獨立運動界에 派閥을 助長시키고 民族改良主義를 陽性시킨 人物이라는 批判的인 視角도 있다. [32] 實際 李光洙, 崔南善, 尹致昊 等 그의 路線을 追從했던 人物 1930年代 中盤以後 露骨的인 親日行脚을 벌였다. 그러나, 안창호 自身은 언제나 中立的 立場에서 平行線을 維持하려 했었고, 派閥을 助長하는 것에 對해 極히 願하지 않았었다. 그는 韓國 近代思想 經濟, 政治, 言論, 文化 各 方面에서 뚜렷한 足跡을 남겼으며 人材養成과 財政 確保 等을 통해 獨立運動의 土臺를 마련했을뿐만 아니라 獨立運動이 障壁에 부딪혀 危機에 處했을 때마다 突破口를 마련하고 政局을 轉換하여 獨立運動에 活氣를 불어넣는 役割을 하였다. [32]

當代의 視角에서 "倒産은 謙虛한 사람이었다. 그는 謙遜한 마음으로 一生을 살았다. 傲慢不遜한 마음과 唯我獨尊의 英雄主義的 態度는 倒産에게서는 秋毫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頭腦와 言辯과 統率力과 勇氣와 德性이 뛰어난 人格者였지만 絶對 自慢하거나 뽐내는 일이 없었다. 그는 앞에 나서서 떠드는 사람이 아니고 뒤에 서서 默默히 自己 職分을 다하는 분이었다. 그는 스스로 높이는 者가 아니고 스스로 낮추는 者였다. [6] "는 評價도 있다.

安昌浩의 祕書를 지낸 구익균 은 참 溫和하고, 火도 잘 안 내시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분 [15] 이라고 評하였다.

獨立運動家 兼 政治人 장택상 은 그를 大統領이 될 資質을 갖춘 人物이라고 評價했다. 그에 依하면 英國 으로 가는 途中, 베를린 에 있는 韓國人을 만나 旅館에 함께 묵고 있을 동안에 安昌浩를 만날 수 있었다. 장택상은 '그의 印象 中에서도 雄辯術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評價했다. [33]

島山은 어떠한 問題든지, 그리고 누구에게든지 自己의 意見을 쉽게 납득시키는 長點을 지니고 있었다. 한 番은 나이가 한참 어린 나를 데리고 얘기를 하다가 意見이 달라지게 되자, 그 날 밤中에 다시 찾아와서 意中의 말을 들려주며 어떻게 해서든지 꼭 相對方으로 하여금 納得할 수 있을 때까지 抛棄하는 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때 어린 생각에도 이분이야말로 우리나라가 解放이 되면 이 분이 반드시 大統領 이 될 분이라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33]

李明博 4大江 살리기 事業 强行에 安昌浩가 主張한 '江山改造論'이 思想的 根據를 提供하였다고 主張하였다. [34] [35]

否定的 評價 [ 編輯 ]

安昌浩의 所謂 實力 養成論은 積極的 獨立 鬪爭을 回避하는 것이라는 批判이 있다. 元來 文書에서는 子女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쓰여있었으나 靑葡萄出版書의 안창호 評傳을 보면, 長男 필립에게 漢字와 한글을 가르치고 익히도록 하였다고 記錄되어 있다. [36] [37] 左派 知識人 박노자 敎授는 그를 近代 親美的 부르주아·知識人의 首長으로 [38] 否定的으로 評價하였다. 또한 '民族개량주의자, 親美主義者'라는 批判的인 視角도 있다. [39]

안병욱 敎授는 島山의 思想을 '힘의 哲學'이라고 명명하였다. 한便 이런 힘의 哲學을 社會進化論 을 바탕으로 하는 弱肉强食의 帝國主義 論理와 결부시켜, 그의 漸進主義 或은 準備論은 結果的으로 强者의 侵略을 正當化하고 國權喪失의 責任을 안으로 돌림으로서 外部의 敵에 對한 對抗意志를 약화시키고, 窮極的으로 獨立意志를 無力化하여 日帝의 植民地 政策에 同調하게 할 憂慮가 있다고 批判하였다. [40] 또한 그의 漸進的 獨立運動 方法論은 根本的 變化를 無視하고 搾取와 收奪의 基本的 植民地 構造 안에서 制限된 改善만을 試圖할 뿐이며 結局 現實逃避的인 以上村으로 빠질 수 밖에 없다는 批判도 있다.

著書 [ 編輯 ]

  • 《安昌浩 日記》
  • 《島山 安昌浩 書翰集 : 永遠한 靑年 安昌浩의 러브레터》

關聯 書籍 [ 編輯 ]

이광수 , 《島山 安昌浩》 (대성문화社, 1959)
紅友出版社, 《政界野花 (前2卷)》 (紅友出版社, 1966)
장병혜 篇, 《常綠의 自由婚》 (滄浪장택상記念事業會, 1973)
조병옥 , 《나의 回顧錄》 (해동, 1986)
주요한, 《島山 안창호展 (한마당文庫 72)》 (세名文化史, 1990)
장택상 , 《大韓民國 建國과 나》 (滄浪장택상記念事業會, 1993)
안병욱 外, 《安昌浩 評傳》 (靑葡萄, 2004)
金九 , 《白凡逸志》 (돌베개, 2006)
정병준, 《雩南 李承晩 硏究》 (역사비평사, 2006)
안창호, 《그대 가슴 속에 살아있고 싶다 : 永遠한 靑年 安昌浩의 러브레터》 (샘터사, 2007)
안창호, 《나의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 島山 安昌浩》 (知性文化史, 2011)
윤병욱, 《島山의 香氣 百 年이 지나도 그대로》 (기파랑, 2012)

略歷 [ 編輯 ]

趣味 [ 編輯 ]

그는 每日 밤 10時에 就寢하고 아침 여섯 時면 일어나서 食事를 하고 太極拳이나 劍術 運動을 하였다. [15] 그 밖에 趣味로는 꽃 가꾸는 일 뿐이었는데, 무더운 여름에 온몸이 땀에 젖도록 꽃에 물을 주었다. [15]

기타 [ 編輯 ]

靑年層과의 對話, 談論을 좋아했던 그는 靑年들의 집에 直接 찾아가기까지 했는데, [41] 그는 조병옥 , 장택상 , 許政 , 윤치영 等을 비롯한 在美 留學生들을 直接 찾아다녔다. 在美 韓人社會의 主導權을 놓고 서재필 , 박용만 , 李承晩 等과 競爭하는 側面도 있었지만 그는 靑年들을 直接 찾아다니며 對話와 談論하기를 즐겼다.

가난한 韓人 苦學生들이 찾아오면 찾아가서 밥부터 사 먹이고, 車費와 宿泊費도 支拂해주었고, 學生들의 學費까지 直接 건네주기도 했다. [42]

장택상 은 그를 大統領감이라 봤고, 조병옥 이광수 , 주요한 等은 그의 感化를 받아 국민회와 興士團, 修養同友會 를 이끌만큼 積極的으로 活動했다. 그의 迎入 要請을 拒絶한 것은 許政 等 少數였다. 허정은 以後 李承晩 系列에서 活動하면서도 李承晩系와 安昌浩界의 反目과 分裂을 調節하기 위해 對話를 主張했고, 서재필 을 찾아가 兩者間의 仲裁를 要請하는 等의 努力을 했다.

同志이자 라이벌이었던 서재필 , 박용만 李承晩 等과 書信을 주고 받았고, 이광수 , 金性洙 等과도 隨時로 連絡하였다. 國內에 있던 윤치호 와도 連絡을 주고 받았다.

異性 關係 [ 編輯 ]

京城府 의 救世學堂에 다닐 當時 安昌浩는 京城府의 新女性 中에 理想型이 있었다. 그러나 故鄕에 있던 그의 할아버지 안태열은 그의 同意 없이 自身의 親舊 이석관의 딸 이혜련과 仲媒結婚을 推進하였다. 1896年 同意 없이 一方的인 約婚이 되었음을 알고 할아버지에게 破婚을 主張했으나, 貫徹되지 않았다. 結局 그는 破婚하지 못하고 6年 뒤 이혜련과 結婚하였다. 以後 獨立運動과 僑民活動을 하느라 아내와 떨어져 지냈으나, 한番도 바람피우거나 私娼街에 出入하지 않았다. 오히려 私娼街에 데려가겠다는 僑胞들과 親舊들의 提議와 弄談을 모두 拒絶하였다. 社會運動을 하느라 바쁜 男便에게 不平不滿을 드러내지 않고, 平生을 함께 한 이혜련 女史에 對한 義理를 지킨 것이다.

安昌浩의 祕書室長을 지낸 구익균 의 證言에 依하면 '倒産은 늘 洋服 과 넥타이, 中折帽를 깨끗하게 차려 입는 멋쟁이였습니다. 靑年, 壯年 時節의 安昌浩는 秀麗한 外貌에 옷을 잘 입었습니다. 많은 女性들이 安昌浩를 戀慕하여, 그가 아내와 멀리 떨어져 있음과 홀아비로 生活한다는 것을 알고 그를 誘惑하였지만 모두 拒絶했습니다. 어느 날엔 崔某라는 新女性이 寢室로 몰래 들어와서 倒産이 자고 있던 寢臺에 누웠어요. [15] 그러자 倒産은 조용히 '불을 켜라'고 말한 뒤에 '이렇게 나에 對한 熱情이 있다면 그것을 獨立運動 으로 돌려라'고 하고는 돌려보냈습니다 [15] ' 한다.

飮酒와 吸煙 [ 編輯 ]

安昌浩는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 술은 1~2盞 마시고 나면 얼굴이 빨갛게 돼서 많이 하지 못하였다. [15] 晩年에는 健康이 惡化되어 술을 입에도 대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담배 는 잘 피웠다.

그는 '다른 사람과 얘기할 때 恒常 입에 담배 를 물고 있을 程度로 담배를 많이 피웠는데, 내가 '先生님은 왜 다른 건 다 實踐하시면서 담배 끊는 것만은 못 하십니까'라고 恒常 말해도 끝내 못끊다가 나중에 監獄에 가서야 끊었다. [15] ' 釋放된 뒤에는 여러 사람들이 잔칫床을 열어 줘서 過食을 한 탓에 胃臟病에 걸려 트림을 많이 했다 [15] 한다.

유길준 崇慕 事業 [ 編輯 ]

그는 유길준 을 愛國者이자 理想的인 政治 指導者로 規定했다. [38] 以後 유길준 은 先覺者, 啓蒙의 先驅者로 기려져 왔다.

노르웨이 오슬로 大學敎授 박노자 에 依하면, 유길준에 對한 ‘선양’ 作業을 始作한 것은, 그를 ‘朝鮮 民族의 模範的인 指導者’로 섬기고 그의 興士團(1907年 設立) 이름까지도 본떠 使用한 近代 親美的 부르주아·知識人의 首長 安昌浩였다 [38] 며 否定的으로 評하였다. <윤치호 日記>와 같은 史料에서 甲午 內閣의 主要 人物이었던 유길준 명성황후 弑害의 關聯性이 뚜렷하게 보이는 等 그의 行跡이 決코 ‘模範的’이지만 않았음에도, 오늘날의 敎科書에서는 그의 모습을 ‘近代化의 先驅者’, ‘國民 啓蒙의 主役’ 等 肯定 一邊倒로 敍述하고 있다고 否定的인 評價를 내리기도 했다. [38]

安重根 親戚 [ 編輯 ]

꽤 알려진 事實이지만 그는 이토 히로부미 暗殺 安重根 醫師의 親戚 이다.

家族 關係 [ 編輯 ]

電氣 [ 編輯 ]

  • 左派 性向의 神學雜誌인 《 福音과 狀況 》에 안창호 이야기가 실린 적이 있다.
  • 계몽사 어린이 그림 偉人 傳記에 島山 安昌浩 電氣가 있다. 이우범 畫伯이 그림을 맡았다.

安昌浩를 演技한 俳優 [ 編輯 ]

映畫 [ 編輯 ]

드라마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大韓民國의 最初 長老會 敎會인 새門안敎會에 다녔었다.
  2. “네이버 人物檢索 〈안창호〉” . 네이버 . 2009年 9月 3日에 確認함 .  
  3. 조인형 (1999年 3月 15日). 《歷史와 오늘》. 신서원. ISBN   978-89-7940-910-9 .  
    김인봉, 編輯. (2009年 1月 5日). 《EBS 修能特講 言語領域》 初版. 韓國敎育放送公社. 2卷12쪽. ISBN   978-89-547-1115-9 .   에서 再引用.
  4. 17代祖 安宗劍의 兄 안종약의 孫子와 曾孫으로, 안창호에게는 15代 幇助와 14代 幇助가 된다.
  5. 안창호 - Daum 百科事典
  6. "거짓말들아, '安昌浩'를 읽어라" 오마이뉴스 2004.10.27
  7. “安昌浩는 “우리는 大韓帝國 사람이므로 大韓사람으로 自身을 呼稱해야 한다”고 하였다” . 2007年 9月 29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9月 13日에 確認함 .  
  8. 빛을 남긴 先進들(7) / 조만식 長老便 리폼드뉴스 2008年 12月 3日子
  9.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10. 이이화, 《韓國史이야기21. 解放 그 날이 오면》(한길사, 2004) 26쪽.
  11. 大韓民國 臨時政府 30年史(이연복 지음 | 국학자료원 | 2006) 24
  12. 韓民族의 獨立運動과 臨時政府의 位相 추헌수 지음 | 연세대학교出版部 | 2009) 117
  13. 안창호 戰서(주요한, 삼중당, 1963) 200~201
  14. "島山 安昌浩와 太虛 유상규2"
  15. "共産主義者들, 倒産 批判하다가도 下宿費 떨어지면 찾아와" 朝鮮日報 2008.03.09
  16. 島山 安昌浩 美國서 追放되기까지…모함한 投書者의 實體는 , 聯合뉴스, 2017年 8月 10日
  17. 이연복, 《大韓民國 臨時政府 30年史》(이연복 지음, 국학자료원, 2006) 39페이지
  18. “::::: 平和 專門 인터넷 新聞 [平和만들기] :::::” . 2011年 11月 2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2月 6日에 確認함 .  
  19.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288페이지
  20.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便 598, 600~601페이지
  21. 안창호, 滿洲韓人 필리핀 對移住 試圖 朝鮮日報 2006.02.02
  22. 安昌浩는 西北派였으나 그의 親舊인 尹致昊는 記號派 家門이었다. 《尹致昊 日記》, 1933年 10月 4日
  23. "島山 安昌浩와 太虛 유상규4"
  24. 그러나 그의 理想村 建設은 實現되지 못했다.
  25. 愛弟子 유상규 의 墓所 뒤便.
  26. 죽은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
  27. “大統領記錄館” .  
  28. (歷史 속 오늘) 島山 安昌浩 別世(1938.3.10) 朝鮮日報 2007.03.09
  29. 韓國史 市民講座, 第 47輯. 일조각. p64
  30. 안병욱,《民族의 스승 島山 安昌浩》(島山安昌浩先生記念事業會, 1999) 13페이지
  31. 안병욱,《民族의 스승 島山 安昌浩》(島山安昌浩先生記念事業會, 1999) 12페이지
  32. 韓國史 市民講座, 第 47輯. 일조각 p52
  33. 장택상, 大韓民國 建國과 나(滄浪장택상記念事業會, 1992) 57
  34. " 4大江事業, 倒産 '江山改造' 꿈 實現"(綜合)” . 聯合뉴스. 2010年 12月 27日 . 2011年 1月 1日에 確認함 .  
  35. 박양호,〈 島山 安昌浩 先生의 江山(江山)改造論과 4大江 살리기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國土政策 Brief》, 國土硏究院, 第 212號(2009. 1. 12.).
  36. 倒産思想硏究會, 《島山 安昌浩의 思想과 民族運動》 (학문사, 1995) 273페이지
  37. 圖書出版 靑葡萄, <안창호 評傳> 47페이지.
  38. 啓蒙主義者, 軍國主義者!:박노자 - 한겨레 21 [第502號] 2004.04.01日子
  39. "倒産先生 女同生 最高人民會議代議員 지내" 한겨레 2001.12.09
  40. 倒産思想硏究會, 《島山 安昌浩의 思想과 民族運動》 (학문사, 1995) 126페이지
  41. 當時 朝鮮은 年下者가 年上者를 찾아가야 된다는 權威主義的인 認識이 社會 全般에 자리 잡고 있었다. 平等主義 思想에 바탕한 이런 脫權威的인 모습은 그가 美洲 韓人들에게 指導者로 인정받을 수 있는 要因 中 하나였다.
  42. 서재필이나 金奎植은 韓國人 苦學生을 拒絶했는데, 自己 좋아서 留學을 왔으면 그만한 苦生도 堪耐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며 拒絶하였다. 美國, 프랑스, 英國 留學生들에게 用돈과 學費를 부쳐주던 人物은 安昌浩와 李承晩이 唯一했다.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이동녕
第3代 大韓民國 臨時政府 國務總理 代理
1924年 6月 28日 - 1924年 8月 27日
後任
이동휘
前任
이동녕
第6代 大韓民國 臨時政府 國務令 (首班)
1926年 5月 3日 - 1926年 5月 16日
後任
이동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