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준
(金昌俊,
1890年
5月 23日
~
1959年
9月 29日
)은
韓國
의
監理敎
牧師
이며 獨立 運動家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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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9年
生이라는 說도 있다.
平安南道
江西郡
出生으로,
1907年
洗禮를 받고
改新敎
에 入敎했다.
平壤
의 基督系 系列 學校인
숭실중學校
,
도쿄
의
아오야마學院
에서 受學하고, 監理敎의
協成神學校
를 卒業했다.
1919年
3·1 運動
이 일어날 때
박희도
의 勸誘에 따라
民族代表 33人
中 基督敎界 代表로 參加하였고, 懲役刑을 宣告 받아 服役했다. 當時 김창준의 나이는 30歲였다.
1925年
그가
咸鏡北道
에서 警察 駐在所를 襲擊하는 武裝 獨立 運動을 벌여 無期 懲役刑을 宣告 받았다는 大多數의 記錄은 事實과 다르다. 김창준은 이 時期에
美國
의
시카고
의
個렛 神學校
로 留學을 떠나 神學을 工夫하고 돌아왔다. 歸國 後에는 協成神學校 講師로 일하다가 暫時 물러나 있던 中 光復을 맞았다.
光復 後 大多數의 基督敎人들이 右翼 勢力으로 編入되는 데 反하여, 그는
1947年
民主主義民族戰線
에 加擔하여 饌卓 運動을 벌이고
서울
에서 左派
基督敎人
들을 結集하여
基督敎民主同盟
을 結成하는 等 解放 空間에서 그의 行跡은 基督敎 社會主義者로서의 面貌가 뚜렷하다.
1948年
南北 帝政黨社會團體 代表者連席會議
때 38線 以北을 訪問했다가
허헌
,
홍명희
와 함께 그대로 머물렀다. 그해
最高人民會議
常任委員에 任命되면서,
강양욱
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政權을 積極 支持하는 代表的인 基督敎界 人士가 되었다.
韓國 戰爭
때
美軍
과
유엔軍
의 戰爭 犯罪를 海外에서 暴露했고, 最高人民會議 副議長까지 지낸 뒤
愛國熱사릉
에 묻힌 越北 牧師
[1]
[2]
였기에
大韓民國
에서는 獨立有功者로 인정받지 못했다.
參考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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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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