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重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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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重根
安重根
뤼순監獄 獄中의 安重根 義士(寫眞=安重根 義士 記念事業會 홈페이지)
身上情報
出生 1879年 9月 2日 ( 1879-09-02 )
朝鮮 黃海道 해主婦
死亡 1910年 3月 26日 ( 1910-03-26 ) (30歲)
日本 帝國 萬藷芋 脂肪 關東州 펑톈 性 料準 뤼순 監獄
性別 男性
本館 순흥 (順興)
職業 獨立運動家 , 抗日 義兵將, 思想家, 著述家, 詩人, 作家, 書藝家
宗敎 天主敎 (洗禮名: 토마스)
父母 部: 안태훈 (安泰勳)
: 조마리아 (趙瑪利亞)
配偶者 김아려
子女 안현생(長女), 안분도(長男), 안준생 (次男)
親戚 안정근 (男동생)
안공근 (男동생)
안명근 (四寸 男동생)
안경근 (四寸 男동생)
안우생 (親조카)
안미생 (親조카)
김인 (親조카사위)
안진생 (親조카)
안봉생 (5寸 조카)
안춘생 (5寸 조카)
金九 (査頓)
안창호 (親族척)
活動 情報
關聯 活動 獨立運動
主要 活動 이토 히로부미 狙擊 事件
活動 理念 民族主義, 범아시아주의
經歷 大寒義軍 (1907年~1909年)
大寒義軍 參謀中將
義兵 參謀中將
特派獨立大將
啞鈴地區司令官
賞勳 建國訓長 대한민국장

安重根 (安重根, 1879年 9月 2日 ~ 1910年 3月 26日 ) 改名 前 안응칠 (安應七)은 大韓帝國 獨立運動家 , 抗日 義兵將 兼 政治 思想家이다. 洗禮名 토마스 ( 音譯語 도마 , 사도 토마 에서 따옴), 다묵(多默)이다. 本館 순흥 (順興), 高麗 時代 後期의 儒學者 安珦 의 26代孫이다. [1] [2]

東學 農民 運動 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李 몇몇 本來의 目的을 가지지 않은 東學軍 負袋들을 征伐하는 데 함께 參與하였고, 大韓帝國 末期에는 學校 設立과 敎育運動과 國債補償運動을 하였으며 한때 復權 事業과 비슷한 채表會社(彩票會社) 活動을 하기도 했다.

1909年 우덕순 , 유동하, 조도선과 少數의 決死隊를 組織하여 滿洲 하얼빈役 近處에서 招待 韓國痛感 이토 히로부미 等의 下車 時 暗殺을 準備하였다. 1909年 10月 26日 하얼빈役 에 潛入하여 驛前에서 러시아軍 의 軍禮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 를 暗殺하였다. 以後 러시아帝國群 憲兵에게 붙잡혀 日本 總領事館으로 옮겨졌고, 裁判管轄權이 日本에 넘겨졌다. 1910年 3月 26日 午前 10時에 殺人 의 罪刑으로 關東州 뤼순형무소 에서 絞首刑으로 死亡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마리아(趙瑪利亞)

安重根은 黃海道 해主婦 首陽山 아래에서 [1]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마리아(趙瑪利亞)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鎭海 名譽縣監을 지낸 할아버지 안인수(安仁壽)는 海州 一帶에서 米穀商을 經營하여 相當한 財産을 蓄積했다. [3] 1911年 韓國을 訪問하여 안태훈 一家의 活動地를 踏査한 베네딕토 修道院의 노베르트 베버 神父가 作成한 旅行記에 따르면 안인수와 그의 아들 6兄弟와 家族 36人이 海州에서 一家를 이루고 살았을 當時에 안인수는 4白石의 土地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3] 할아버지가 大地主에 米穀商으로 財産을 많이 蓄積하여 安重根은 어렵지 않은 幼年期를 보냈다.

뒤에 日本은 안인수가 "恒常 米穀 買入 代金을 支拂하지 않는 等 各種 奸惡한 手段을 부려 財物을 모아 拒否를 이루었다"거나, "性品이 貪慾하고 배부름을 모르고 日常 奸計를 써서 他人의 財産을 手中에 넣으려고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안億乏(安億乏)이라고 다르게 불렀다"고 말한 反面, 安重根은 "祖父가 資産家로서 道內에 이름이 높았다."고 回顧했다. [4]

그러나 安重根의 家計는 그의 5代祖 以前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多少 不確實하다. 순흥 安氏 族譜에 依하면 17代祖 안려(安廬)는 司馬試에 合格한 生員으로서 健元陵 參奉을 지냈다. 14代祖 안효신은 어린 나이에 文壇에서 名聲을 날릴 程度로 文章에 能했으나 벼슬을 求하지 않고 黃海南道 海州로 내려가 隱居 生活을 했다. 이로써 안효신은 순흥 安氏 參判公派의 海州 입향始祖가 되었다. 以後 安重根의 先祖들은 安重根의 14代祖 安宿館과 13代祖 岸柳가 通政大夫(正3品)의 品階를 받았을 뿐이며, 安重根의 5代祖 안기옥(安起玉)에 이를 때까지 벼슬에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不確實한 內容이 여기에서 나타난다. 1845年에 순흥安氏 族譜소가 刊行한 순흥安氏 族譜에는 安重根의 17代祖 안려에게 眞사, 後嗣 없음(進士無后)이라고 되어 있으나, 1864年 안最良(安最良)이 編纂한 순흥安氏 族譜에는 안려에 對해 後嗣가 나와 있지 않고, 眞사라고만 되어 있다. 이에 反해 1910年代 以後에 刊行된 族譜에는 안려의 長조카로 强震縣令을 지낸 안효충(安孝忠)의 둘째 동생인 안순복(安順福)이 안려의 養子로 들어가서 안효신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5] 따라서 安重根의 15大棗이자 海州 입향始祖人 안효신의 存在는 1918年에 新文館에서 刊行된 순흥安氏族譜와 1936年 刊行된 순흥安氏 族譜 以後부터 나타나고 있다. 또한 1800年代 中盤과 後半에 刊行된 族譜에는 안려의 兄인 안의(安毅)의 後孫으로 안효충만 나와 있다. 그런데 1910年代에 刊行된 族譜에는 眼醫의 後孫으로 안효충 外에도 안현복, 안순복, 안경복, 안창복, 안성복, 안준복 等이 새로이 나오고 있다. 이로 미루어 海州에 定着한 순흥安氏 參判公派 人士들의 落鄕 直前의 世界와 海州 입향 以後부터 韓末까지의 身分 問題는 不明確한 事實이 많음을 알 수 있다. [5]

解放 前後에 安重根의 電氣와 碑文을 執筆한 이들은 安重根 家門의 身分을 한결같이 鄕里로 보고 있다. 김택영과 이건승은 安重根 依據 以後 [6] 에 지은 簡略한 傳記에서 各各 "그 先祖는 本來 순흥 사람으로 海州에 살면서 代代로 주리(州吏)를 지내다 안태훈 臺에 이르러 글을 읽어 進士가 되었다"거나 "그의 先祖는 순흥인데 中途에 海州로 移徙하여 주리를 지냈다"고 하였다. [7] 또한 心山 김창숙 은 1961年에 지은 '安重根義士 崇慕鼻紋'에서 "그 先祖의 세가는 書翰의 海州에서 주리가 되었는데, 父親 안태훈의 臺에 이르러 讀書하여 國子生(國子生)李 되었다."고 하였다. [6]

安重根의 5代祖 안기옥의 臺에 이르러 武科에 及第, 官職 進出을 꾀하였다. 이는 鄕吏職을 長期間 世襲하면서 社會經濟的 能力을 갖추어 나간 李曙(吏胥)層이 過去를 통해 兩班層으로 編入되려는 身分上昇運動을 벌였음을 의미한다. 안기옥은 안영풍(安永豊), 안지풍(安知豊, 安重根의 高祖父), 안유풍(安有豊), 안順風(安順豊) 等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도 모두 武科에 及第하였다. 이처럼 鄕吏 家門의 4兄弟가 모두 武科에 及第한 것은 家門의 位相을 높인 快擧였다.

또한 안지풍의 長男 안정록(安定錄, 安重根의 曾祖父), 안유풍의 아들 안두형(安斗亨), 안유풍의 孫子 안인환(安仁煥), 안順風의 아들 안新型(安信亨) 等이 모두 武科에 及第하였고 안유풍의 孫子 안人權(安仁權)李 折衝將軍의 品階를 받았다. 안인필(安仁弼)은 中央 軍事 組織인 五衛의 正6品 軍職人 沙果가 되었고, [6] 안정록의 아들이자 安重根의 할아버지인 안인수는 通訓大夫와 鎭海縣監을 지냈다. 記錄에는 안인수의 아들 안태건(安泰健)은 高宗(高宗) 28年(1891) 辛卯(辛卯)年에 24歲의 나이로 增廣試(增廣試) 眞사 3等(三等)으로 등課됨을 알리고 있다. [8]

初期 活動 [ 編輯 ]

安重根은 태어날 때 等에 검은 點이 7個가 있어서 北斗七星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海外에 있을 때 많이 使用했다. 安重根은 어렸을 때부터 사냥을 좋아했다. 또한, 書堂 工夫를 빼먹고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이렇게 차분히 앉아있는 날이 드物資 할아버지는 元來 이름인 응칠 代身 '무거울 中'에 '뿌리 近'字를 써서 중근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1884年 甲申政變 以後 開化黨 政客의 食客으로 있었던 아버지 안태훈 이 戚臣政權에 依해 죽임을 當할 危機에 놓이자 할아버지 안인수는 英特한 셋째 아들을 살리기 위해 一家를 이끌고 黃海道 信川郡 두라면 청계동으로 避身했다. 安重根도 家率을 따라 信川 청계동으로 移住했고,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書堂에서 訓長을 招聘하여 工夫를 했으나 四書五經에는 이르지 못하고 痛感 9卷까지만 배웠다고 한다. 安重根 自身은 《안응칠歷史》에서 "내 나이 예닐곱 때 祖父母의 사랑을 받으며 書堂에 들어가 8~9年 동안 漢文을 익혔으며, 祖父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사냥으로 學問에 힘쓰지 않았다"고 述懷하였다. [9]

少年期 [ 編輯 ]

東學 農民軍 鎭壓 活動 [ 編輯 ]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자주 드나드는 砲手꾼들의 影響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名射手로 定評이 났다. 아버지 안태훈 은 山菜에 個人的으로 士兵들을 養成하고 있었는데, 1894年 東學 農民 運動 이 일어나고 그와 함께 百姓을 괴롭히는 東學 農民軍이 各地에서 東學徒들과 農民들이 蜂起를 하자 안태훈은 自發的으로 創意를 하고 東學 農民軍을 討伐하여 [ 出處 必要 ] 勝利를 거뒀다. 그 뒤 黃海道 觀察使 의 要請으로 아버지가 山砲軍(山砲軍)을 組織해 農民軍 鎭壓作戰을 펼치자 少年 안에 安重根 亦是 東學軍 討伐에 參加하여, '薄石骨戰鬪' 等에서 奇襲戰을 敢行하는 데 參與했다.

金九 가 東學軍으로 活動하고 있을 때 안태훈이 金九를 保護한 적이 있으며 그 時期에 安重根도 그와 顔面이 있었으나 그리 親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天主敎 入校 [ 編輯 ]

安重根의 집안은 天主敎 聖堂 建築에 參與할 程度로 信仰心이 篤實하였고 [10] , 安重根 自身도 1895年 天主敎 學校에 入學하여 神學 을 배웠다.

1897年 아버지를 따라 天主敎 에 入敎하여 프랑스 出身의 天主敎 神父였던 조제프 빌렐렘 (Joseph Wilhelem, 韓國名 홍석구(洪錫九))으로부터 토마스 (도마, 다묵(多默))라는 洗禮名 을 받았다. 安重根이 홍석구 新婦에게 프랑스語 를 배웠다는 說明도 있지만, 安重根은 홍석구 新婦와 함께 뮈텔 主敎와 만나 이야기를 한 後 프랑스語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安重根》( 趙廷來 知音, 文學동네 )에 依하면, 뮈텔 主敎(韓國이름 民主校)가 朝鮮사람들이 學問을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學問 을 하면 머리가 깨일 것이고, 머리가 깨이면 天主敎 敎理 와 信仰에 對해 나름대로의 論理 와 批判으로써 疑問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를 보면서 失望한 安重根은 프랑스語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그 뒤 暫時 敎會의 銃대(總代)를 맡았고 뒤에 萬人契(萬人契:1,000名 以上의 契員을 모아 돈을 出資한 뒤 抽籤이나 入札로 돈을 融通해 주는 모임)의 彩票會社(彩票會社:萬人契의 돈을 管理하고 抽籤을 하는 會社)를 設立하고 社長이 되었다.

淸人 亂打 事件 [ 編輯 ]

1904年 아버지 안태훈 淸나라 醫師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휘말렸다가 外交 問題로 飛火되기도 했다. 아버지 안태훈은 1904年 4月 20日 안악읍에 사는 淸나라 醫師 서원훈(舒元勛)과 是非가 있었다. [11] 아버지 안태훈은 病을 治療하기 위해 親友 이용일(李龍一)을 데리고 서원훈을 찾아갔다. 兩側이 筆談을 나누는 사이에 안태훈側이 어떤 失手를 했는지 서원훈이 갑자기 일어나 안태훈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이에 안태훈은 서원훈에게 和解를 請하고 물러나왔다. [11] 그러나 이 消息을 들은 安重根이 4月 29日 이용일 等 10餘 名과 함께 武器를 들고 夜밤에 서원훈을 잡아다가 길가에서 無數히 亂打하여 擧動이 어렵게 만들었고, 이에 對한 反撥로 1904年 5月 2日 淸國人 7~8名이 이용일의 집에 亂入하여 그를 마구 毆打하고 잡아가려고 했다. [11]

韓淸 兩國民 사이에 紛爭이 發生하자 三和項의 淸나라 領事가 韓國 政府에 公式 問題提起를 했다. 이에 따라 三和項 裁判所 監理가 巡檢을 보내 安重根과 이용일을 逮捕하여 押送토록 했다. [11] 그런데 中途에 나타난 怪漢들이 巡檢들을 亂打하고 安重根과 이용일을 求하여 사라졌다. 이때 巡檢 한 名은 顔面에 銃을 맞아 重態에 빠졌다. [11] 逮捕令이 내려진 狀況에서 7月 10日 前後에 安重根과 이창순은 各其 外部에 請願書를 올려 自身들의 父親이 抑鬱하게 淸國人에게 當했다고 呼訴했다. [11] 그러나 大韓帝國 外務部는 다시 自體 調査를 거친 끝에 安重根과 이용일의 罪狀이 重하다는 點을 認定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地方 政府는 安重根 等의 逮捕를 命하였고, 7月 22日 黃海道觀察使 이용필(李容弼)은 安重根과 利用일이 幾微를 알고 미리 逃走하여 逮捕하지 못했다는 報告書를 外務部代身에게 올렸다.

重根은 明治三十七年(一九?四) 봄 黃海道 載寧에서 淸國人과 爭鬪한 끝에 그가 携帶한 短銃으로 淸國人을 射殺하였으므로 淸國領事로부터 外部에 交涉하는 바가 되어 事件이 重大하게 되려고 하였으므로 重根은 上海로 逃走하고 父 泰勳은 그 사이에서 當時의 外部大臣 李夏榮에게 哀願하여 艱辛히 無事할 수 있었다고 한다. [1]

한便 安重根 自敍傳 안응칠 歷史 에는 조금 다르게 事件이 紹介되어 있다. 安重根이 京城에 가서 外務部에 請願書를 올렸고, 裁判이 鎭南浦 裁判所에 回附되어서 徐氏와 같이 裁判을 받게 됐다고 나와있다. 그리고 이 裁判에서는 徐氏의 蠻行이 드러나고 安重根이 옳다는 判決이 났다. 以後 安重根은 어떤 淸나라 사람의 紹介로 徐氏와 만나 서로 謝過하고 平和를 維持하게 되었다고 한다.

啓蒙 運動과 義兵 運動 [ 編輯 ]

啓蒙 運動과 國債補償運動 [ 編輯 ]

安重根, 滿洲에서

1905年 乙巳勒約 이 締結되자 外交權을 日本에게 빼앗겼다는 消息을 듣고 國權 回復 運動을 하기 위해 旅費를 마련하고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期待를 걸었던 상하이의 有力者들과 天主敎 神父들로부터 協助를 거절당하여 失望하고 되돌아왔다. 이 무렵 父親喪을 當해 故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3年喪을 마치기도 前에 1906年 3月에 平安南道 鎭南浦로 移徙했다. 移徙한 곳에서 生計를 위해 한때 石炭商會를 經營하였으나 事業이 되지 않았으며, 敎育을 통한 깨달음이 必要하다고 생각하여 石炭會社를 整理하고 自己 집안의 全 財産을 털어서 삼흥學校(三興學校)를 設立하여 敎育運動을 始作했다. 그 뒤 黃海南道 天主敎 系列의 學校인 南浦 돈의학교(敦義學校)를 引受하였으며 安重根 自身도 敎師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1907年에는 大邱 의 獨立運動家 서상돈 等의 主導로 全國的으로 展開되던 國債補償運動 에 積極 呼應하여 國債補償期成會 에 加入하여 會員이 됐고, 熱心히 活動하여 認定을 받으면서 國債補償期成會 官署支部長으로 任命되었다. 그러나 國債補償運動 亦是 日本 의 妨害로 失敗로 돌아갔다.

獨立運動 投身 [ 編輯 ]

1904年 平壤 에서 石炭 장사를 하다가, 1905年 朝鮮 을 事實上 日本 의 植民地로 만든 乙巳勒約 이 締結되는 것을 보고 이를 抵抗해 獨立運動에 投身했다. 이어 삼흥學校 를 세우고 돈의학교 를 引受해 敎育에 힘쓰다가 1907年 沿海州 로 건너가 義兵 에 加擔했다.

義兵 活動 [ 編輯 ]

安重根

1907年(隆熙 1年) 皇帝 高宗 헤이그 特使 事件 의 責任을 지고 强制 退位를 當한 뒤 韓日新協約의 締結, 軍隊解散에 따라 全國的으로 義兵이 일어나자 그는 路線을 바꾸어 獨立 戰爭 準備가 必要하다는 생각으로 江原道에서 義兵을 일으키는 데 加擔하였다. [12] 賣國奴 剔抉을 主張하던 그는 義兵隊를 찾아다녔다. 그 뒤 黃海道 義兵隊의 한사람으로 日本軍과 싸우다가 自身이 直接 國外에서 義兵部隊를 創設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 로 건너가서 桂洞靑年會(啓東靑年會)에 加入하고, 곧 桂洞靑年會의 臨時査察(臨時査察 [12] )에 選出되었다.

1907年 沿海州(沿海州)로 가서 義兵運動에 參加하였다. 이듬해 1908年 7月 전제덕(全齊德)의 麾下에서 大寒義軍參謀中將(大韓義軍參謀中將) 兼 特派獨立大將(特派獨立大將) 및 啞鈴地球(俄領地區) 司令官의 資格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餘 名의 部下를 이끌고 豆滿江을 건너 咸鏡北道 경흥군 路面에 駐屯하던 日本軍 守備隊를 奇襲攻擊하여 전멸시켰다. 그 뒤 本格的인 國內 眞空作戰을 計劃, 敢行하여 咸鏡北道 경흥군 과 신아산 附近의 野山에서 日本軍 과 交戰하여 戰果를 올렸으나, 얼마 後 日本軍의 奇襲攻擊을 받아 悽慘하게 敗北했다. 이때 奇襲攻擊을 받은 理由는 다른 義兵隊員들의 反對에도 不拘하고 安重根 혼자의 뜻으로 戰鬪에서 사로잡은 日本軍 捕虜를 國際公法에 依據해서 釋放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13] 이 일로 義兵의 信任을 잃은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로 건너가 새로이 義兵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批判을 받고 部隊는 곧 解體되었다.

1909年(隆熙 3) 超, 安重根은 뜻이 같은 同志 11人과 함께 同意團地回(同義斷指會)를 結成하고 義兵으로 再起하기 위해 努力하였다. 安重根은 이때 왼쪽 손의 藥손가락(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血書로 決意를 다졌다. 安重根의 囚人(手印)은 이때부터 찍기 始作한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 狙擊과 處刑 [ 編輯 ]

이토 히로부미 狙擊 [ 編輯 ]

狙擊 直前의 이토 히로부미(왼쪽에서 두 番째)

1909年 10月 26日 이토 히로부미 러시아 帝國 의 財務長官 블라디미르 코콥초프 와 會談하기 위해 하얼빈 에 오게 되었다. [14] 이 消息을 大同공보사에서 傳해들은 安重根은 이토 히로부미 暗殺에 自願했다. 10月 21日에 大同공보사 記者 李堈(李剛)의 支援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 를 떠난 安重根은 우덕순 조도선 , 유동하 와 함께 하얼빈(哈??, 哈爾濱(하얼빈), Harbin)에 到着했다. 當初 計劃은 동靑鐵道(東淸鐵道)의 出發地인 長春 의 남장춘(南長春), 管城子(寬城子)驛과 到着地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驛의 4個 支店에서 暗殺을 試圖하려 하였으나 資金과 人力이 不足하여 到着地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狙擊하기로 計劃을 變更하였다. [15] 이에 따라 禹德淳과 조도선은 채가구驛으로 移動하였으며 安重根은 하얼빈役에서 攻擊하기로 했다. 그러나 채가구驛에서의 計劃은 이를 殊常하게 여긴 러시아 警備兵에 依해 失敗했다.

10月 26日 午前 9時, 이토 히로부미가 탄 汽車가 하얼빈에 到着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財務代身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列車 안에서 會談을 가진 後 9時 30分頃 러시아 軍隊의 査閱을 받기 위해 下車하였다. 安重根은 査閱을 마치고 列車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第 反自動拳銃 M1900 으로 射擊하였다. [16] 以外에도, 일곱 발의 銃알 中, 나머지 네 발 中 세 발은 各各 옆에 있던 隨行祕書官 모리 他이지로(森泰二郞), 하얼빈 駐在 日本 帝國 總領事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南滿洲 鐵道 의 理事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에게 銃擊하였다. [14]

銃擊 後, 安重根은 가슴 안에 있던 太極旗를 높이 들어 올리며 에스페란토어

코레아 우라!

이라고 3番 크게 외쳤다. 이 외침은 對한 獨立 萬歲 라는 뜻이었다. [14]

銃擊 30分 만인 午前 10時頃, 이토 히로부미는 被擊당한 直後 列車로 옮겨졌다. 죽기 直前에 브랜디 (옛날에는 覺醒劑로 가끔 使用)를 한 모금 마시고 "犯人은 朝鮮人인가"하고 물었으며, 周邊에서 그렇다고 對答하자 "바보 같은 녀석"이라고 뇌까리며 죽었다고 한다. 이는 當時 事件 現場에 있던 周邊人物들의 證言에 依한 것이지만 造作이라는 主張이 있다. 銃을 세 발이나 맞고 그런 말을 남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當時 同行한 醫師의 證言으로는 分明히 列車 內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記錄에서는 죽기 直前에 "난 틀렸다... 다른 負傷者는 누구지"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도 記錄되어 있어 全般的으로 正確하지 않은 感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硏究가 必要하다.

安重根은 곧바로 러시아軍에 逮捕되었고 1次 調査 以後 하얼빈 日本總領事館으로 넘겨졌다. [17] 崔在亨 은 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 射殺 場所를 하얼빈 으로 定해, 日本 이 아닌 러시아 帝國 法廷에서 裁判 을 받도록 措置하고, 辯護士 人 미하일로프 主筆을 安重根의 辯護人으로 準備했다. 하지만 安重根이 日本 帝國 政府에 넘겨져 關東州 뤼순 (料準) 監獄에 갇혀 1910年 2月 14日 死刑 宣告를 받고, 같은해 3月 26日 處刑되었으며, 遺骸는 오늘날 現在까지도 찾지 못했다. 같이 擧事한 우덕순 은 懲役 3年, 조도선 유동하 는 各各 懲役 1年 6個月을 宣告받았다. 한便 法官養成所 出身 辯護士 안병찬 (安秉瓚)李 安重根을 위해 無料 辯論을 했다. 安重根은 이토 히로부미 를 죽인 理由를 묻는 말에 다음과 같이 答했다.

安重根이 이토 히로부미 를 죽인 15가지 理由.


첫 番째, 명성황후 弑害한 罪

두 番째, 1905年 11月 韓國을 日本의 保護國으로 만든 罪

세 番째, 1907年 정미7조약 을 强制로 맺게 한 罪

네 番째, 高宗皇帝 廢位시킨 罪

다섯 番째, 軍隊를 解散시킨 罪

여섯 番째, 無辜한 사람들을 虐殺한 罪

일곱 番째, 韓國人의 權利를 剝奪한 罪

여덟 番째, 韓國의 敎科書를 불태운 罪

아홉 番째, 韓國人들을 新聞에 寄與하지 못하게 한 罪

열 番째, ( 第一銀行 ) 銀行紙幣를 强制로 使用한 罪

열한 番째, 韓國이 300萬 英國 파운드 의 빚을 지게 한 罪

열두 番째, 東洋의 平和를 깨뜨린 罪

열세 番째, 韓國에 對한 日本의 保護政策을 糊塗한 罪

열네 番째, 日本天皇의 아버지인 고메이 天皇 을 죽인죄

열다섯 番째, 日本과 世界를 속인 罪 等이다.

安重根의 逮捕와 收監 消息이 接해지자 當時 國內外에서는 辯護 募金 運動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人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英國人 더글러스 等이 無料辯護를 自願했으나 日帝는 日本人 미즈노 기타로(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政治)를 官選 辯護士로 選任했다. 收監 中에도 그는 東洋 平和論 의 著述을 하였으나 끝내 完成하지 못했다.

마지막 行跡 [ 編輯 ]

2008年 國際한국연구원 은 安重根이 死刑宣告를 받은 2月 14日부터 死亡한 3月 26日까지의 行跡에 對한 새로운 資料를 公開하였다.

  • 1910年 2月 14日: 午前 10時 30分 關東州 뤼순 關東都督府 地方法院 에서 死刑 宣告를 받음. 安重根은 當時 天主敎 朝鮮代牧區(現在 天主敎 서울大敎區 )場 뮈텔 主敎 에게 電報를 보내 私製 를 보내줄 것을 要請함. 自身의 死刑 執行一路 聖金曜日 을 希望한다는 뜻을 傳함.
  • 1910年 2月 17日: 安重根은 高等法院長을 面談하여 한 國家의 獨立을 위한 義兵將으로서의 行動을 殺人犯으로 審理한 것에 異議를 提起함.
  • 1910年 3月 9日: 告解聖事 조제프 빌렘 當時 黃海道 天主敎 莘川本黨 主任神父에게서 받음.
  • 1910年 3月 10日: 빌렘 新婦의 執典으로 마지막 미사 를 奉獻.
  • 1910年 3月 25日: 死刑 執行 延期. 世界的으로 聖誕節 , 正月 初하루, 皇帝의 탄신일에는 死刑 이 없다는 慣例와 大韓帝國 內의 義兵活動이 剛하게 展開되고 있어 統監府 에서 이를 高麗, 死刑을 延期 要請. 이날은 大韓帝國 皇帝 純宗 이 태어난 乾元節이었음.
    • 이에 安重根은 面會를 온 두 동생에게 當付를 남김. 當付 內容은 老母의 安否를 묻고, 不孝의 罪를 容恕를 請하였고, 長男을 天主敎 私製 로 길러 달라고 付託. 동생 안정근에게는 韓國의 發展을 위해 工業 또는 植林 같은 韓國을 위한 일에 從事토록 付託.
  • 1910年 3月 26日: 午前 10時 死刑 執行. 享年 32歲. 參席者: 美조부치 檢察官, 구리하라 監獄長.

當時 安重根을 支援한 사람은 拒否 崔在亨 이었는데, 崔在亨은 安重根의 逮捕에 對備, 辯護士 와 相議할 程度로 安重根을 現實的으로 도왔다. 한便 安重根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監獄 收監 때 많은 遺墨을 남겼고 寶物 로 指定되었다. 1962年 建國訓長 大韓民國 張에 追敍되었다.

獄中에서 未完으로 끝난 著書《 東洋平和論 (東洋平和論)》을 남겼다. 2008年 3月 中華人民共和國 랴오닝省 다롄(大連)市 뤼순(旅順) 監獄 뒤便 野山 一帶 等地에서 遺骸 發掘作業을 벌였지만 失敗하였다. [18]

遺言 [ 編輯 ]

  • 大韓每日申報(大韓每日申報) 1910年 3月 25日子에는 '安氏 결고(安氏 訣告)'라는 題目으로 다음과 같은 內容이 報道되었다. 거月十五日(2月 15日)에 辯護士 안병찬(安秉瓚)氏가 여순감옥內에서 安重根氏를 面會 告別할 時에 安重根氏가 韓國同胞에게 결고(訣告)하는 社의(辭意)를 安炳瓚氏에게 舌急(說及)하였는데 "내가 韓國 獨立을 回復하고 東洋 平和를 維持하기 위하여 3年間 海外에서 風餐露宿 하다가 마침내 그 目的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千萬 兄弟姊妹는 各自 奮發하여 學問에 힘쓰고 實業을 振興하며 나의 維持를 이어 自由獨立을 回復하면 죽는 者 餘恨이 없겠노라" 하였다. [19]
  • 어머니의 뜻에 따라 抗訴를 抛棄한 安重根 義士는 死刑이 執行되기 前인 1910年 3月 9~10日頃, 어머니가 準備한 하얀 明紬천으로 지은 囚衣를 가져온 두 동생 안정근 안공근 에게 마지막 遺言을 남겼다. [20]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公園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國權이 回復되거든 故國으로 返葬해다오. 나는 天國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回復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同胞들에게 各各 모두 나라의 責任을 지고 國民 된 義務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合하여 功勞를 세우고 業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大韓獨立의 소리가 天國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萬歲를 부를 것이다." [21] [22] [23]
  • 1910年 3月 26日 午前 10時, 安重根의 死刑은 뤼순 監獄에서 行해졌다. 구리하라 全玉은 안에게 “今年 2月 24日 뤼순 地方 法院의 言渡와 確定命令에 따라 死刑을 執行하겠다”는 뜻을 傳했다. 消奴키의 通譯이 끝나자 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구리하라 全玉은 다시 한 番 안에게 “뭔가 남길 말이 없느냐”라고 물었다. 안은 "아무것도 남길 遺言은 없으나 다만 내가 한 일이 東洋 平和를 위해 한 것이므로 韓·日 兩國人이 서로 一致 協力해서 東洋平和의 維持를 度모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24] [23]

事後 [ 編輯 ]

  • 安重根은 自身이 死刑 當하면 曺國에 運柩하여 埋葬해줄 것을 最後로 當付했다. 그러나 死刑당한 그의 屍身은 뤼순 監獄 의 罪囚 共同墓域에 묻혔다. 일제는 뒤에 安重根의 正確한 埋葬地를 알려주지 않아 그의 埋葬地를 찾을 수 없었고, 現在까지도 公式的으로는 遺骸가 묻힌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 解放 後 1945年 11月 中華民國 에서 돌아온 白凡 金九 는 1946年 6月 尹奉吉 , 이봉창 , 백정기 等 獨立運動 3醫師의 遺骸를 日本 에서 찾아온 後 孝昌公園 에 安葬하였고, 그 옆에 언젠가는 安置될 安重根 義士의 家廟를 만들었다. 이것은 安重根의 屍身을 꼭 찾겠다는 金九의 決心을 보여준다. 하지만 金九 先生은 1949年 안두희 의 暗殺로 死亡하였고 金九 先生도 이곳에 安葬됐다. 家廟 앞에는 “이곳은 安重根 義士의 遺骸가 奉還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年에 造成된 家廟입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25]
  • 1962年 3月 1日 大韓民國 建國功勞勳章 中將(뒤에 대한민국장으로 改正)李 追敍되었다.
  • 2008年 南北 政府는 光復 以後 처음으로 安重根 遺骸 共同 發掘에 나섰지만 遺骸 는 찾지 못하고 位置 또한 찾지 못했다. 中國 랴오닝(遼寧)省 다롄(大連)의 뤼순(旅順)監獄 北쪽 野山 어딘가에 安 義士의 遺骸를 묻었다는 日帝 當時 看守들의 證言에 따라 政府는 2008年 1次 發掘 作業을 進行했지만 별다른 所得이 없었다. 安兌根 安重根뼈대찾기사업회 회장은 “當時 政府가 發掘 作業을 進行했던 곳은 日本人 公共墓地로, 太平洋戰爭 直前에 日本人들이 遺骸를 파서 本國으로 가져갔다”며 “10億원의 豫算을 들여 3000餘坪의 땅을 파는 大大的인 事業을 進行했으나 失敗할 수밖에 없었던 理由”라고 말했다. [26]
  • 安兌根 會長은 뤼순監獄九地墓地(旅順監獄舊址墓地)에 遺骸가 있다고 主張했다. 政府가 發掘을 벌였던 地點과는 反對 方向으로 監獄에서 東쪽으로 500餘m 떨어진 곳이다. 가장 오래된 罪人 墓域이다. “1943年 그곳으로 修學旅行을 갔던 사람, 아버지와 함께 安 義士의 墓를 參拜했다고 主張하는 분들이 모두 그곳을 安 義士 墓地로 指目해요. 墓地가 있는 뤼순에 가면 該當 住民들이 實際 그곳을 墓地로 알고 있기도 하고요. 1次 發掘地에서 不過 500m 떨어진 곳인데, 1次 作業 때 거길 파지 않은 게 못내 아쉽습니다.” 現場에는 이미 아파트가 들어서 遺骸 發掘 展望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26]
  • 天主敎 서울大敎區가 기리며 따르자는 趣旨로 2022年 前半期 信仰의 先祖 [28] 에 信者 安重根을 選定하였다. [29]

이토 히로부미 狙擊에 對한 反應 [ 編輯 ]

日本의 反應 [ 編輯 ]

日本에서는 이토를 射殺한 朝鮮人을 敵對하는 感情이 가속되었으며, 朝鮮의 强點을 主張하는 論理로 發展하기도 하였다.

評價 [ 編輯 ]

肯定的 評價 [ 編輯 ]

  • 革命家 김산 은 “춥고 긴긴 겨울밤에 學校 寄宿舍에서 우리는 수많은 隨行員들을 데리고 汽車에서 내려온 이토히로부미를 安重根이 하얼빈役에서 어떤 式으로 狙擊했는가 하는 이야기와 韓國獨立을 위해 大膽無雙한 行動을 했던 사람들에 對한 많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라고 님 웨일즈 의 《아리랑》은 收錄하고 있다.
  • 韓國의 로마 가톨릭교회 에서는 安重根을 韓國의 毛細 , 韓國의 사도 바오로 라고 부른다. [30] 卽, 安重根을 韓國 敎會에서는 毛細 의 愛國心과 바오로 의 信仰心을 가진 基督敎人 으로 評價한 것이다. 安重根의 書藝 作品 景天은 鑑定價가 6億원으로 感情이 되었는데 [31] 카톨릭 서울大敎區는 이 作品을 寄贈받았고 西大門 殉敎聖地 敎會史博物館에 展示한다고 發表하였다. [32]
  • 安重根은 그의 著書 《 東洋 平和論 》의 執筆을 위해서 死刑 執行을 한 달 늦추도록 高等法院長 히라이詩에게 請하여 許諾을 받았으나 그 約束은 지켜지지 못한다. 그래서 《東洋 平和論》은 未完成으로 남아 있다. 그런 狀況이었으나 뤼순 監獄에서 일하던 看守 지바 都市치는 安重根을 尊敬하여 그의 死後에 그의 遺品들을 간직하다 遺族들에게 返還을 하였다.
  • 安重根의 日本人 矯導官 다카오 迷鳥부치는 그를 東아시아의 義人이라고 評하였다.
  • 高麗大學校 社會學科 노길명 敎授는 安重根을 篤實한 天主敎 信仰과 愛國心을 조화시킨 人物로 評하였다. [30]
  • 未來司牧硏究所 황종률 博士는 이토 히로부미의 暗殺을 “正義의 하느님”의 뜻에 協力하는 것으로 하느님이 던진 물음에 對한 答이라고 評價하였다. [30]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서는 “20世紀 初 우리나라 反日愛國運動가”, “日帝의 朝鮮侵略의 元兇 이토 히로부미를 處斷한 愛國烈士”로 評價하며 北朝鮮의 歷史書인 “조선전사”에 狙擊場面, 契機 等을 仔細히 紹介하였다.
  • 大韓民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은 第15次 南北 長官級 會談(2005年 6月 21~24日, 서울)에서 ‘安重根 義士 遺骸發掘事業 共同 推進’에 合意했다.
  • 安重根 義士 記念 事業會에서 安重根 義士 國際平和上 을 制定하였다.
  • 김삼웅 은 安重根의 東洋平和 提案을 유럽共同體(EU)와 같은 것으로 評價한다. 當時 安重根의 提案 內容은 韓國, 中國, 日本이 東洋平和會議를 結成하며, 旅順을 中立化하고, 關聯 3國으로 運營되는 東洋平和會議本部를 旅順에 設置한다. 또한 平和地域 創設, 共同開發銀行과 共同貨幣 發行 等이 包含되어 있다. [33]
  • 安重根은 또한 文明開花를 통해 實力을 닦는 것이 韓國 獨立의 前提條件이라고 생각한 文明開化論者이면서, 日本의 保護政治가 韓國의 文明開花가 아닌 國權侵奪에 不過하다는 것을 깨달은 瞬間 바로 武裝鬪爭의 先頭에 나선 行動家라고 서영희 韓國産業技術大 敎授는 評했다. [34]
  • 安重根이 自身을 尊敬했던 日本人 看守 지바 에게 남긴 爲國獻身 軍人本分 (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침은 軍人이 해야 할 일입니다)이라는 글句는 現在 大韓民國 國軍 의 標語 中 하나가 되었다.
  • 靑山裏 戰鬪 主役 김좌진 은 安重根의 義擧에 影響을 받았다고 한다. [35]
  • 김경천 은 自身의 日記인 景天亞日錄 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銃殺한 이는 안응칠氏라 한다. 아 偉大하다. 우리에게도 사람이 있구나!"라고 評價했다.
  • 國際跆拳道聯盟 에서는 '重根'이라는 틀을 定하여 跆拳道의 基本 품세를 練習하도록 하고 있다. [36]

否定的 評價 [ 編輯 ]

  • 로마카톨릭 朝鮮 代牧區 敎區長 뮈텔 大主敎는 이토 히로부미가 狙擊되었다는 消息을 接하고 安重根의 信者 資格을 剝奪한다. 處刑을 앞두고 安重根의 宗婦聖事 要請을 拒絶하였으나, 프랑스 宣敎師 니콜라 빌렘이 終傅聖事를 執典하니 그에게 懲戒를 내린다.
  • 빌렘 神父의 安重根에게 베푼 成事는 安重根의 義擧를 理解한 때문이 아니라 天主敎 司祭로서 信者에게 聖事를 주어야 한다는 信念에 依한 行爲였다는 見解가 있다. [37] 이 判斷의 根據로 빌렘 神父의 書翰의 프랑스語 原文을 誤譯하였기에 加工해 낸 內容이었기 때문에, 빌렘 新婦가 이토가 죽은 것이 잘된 일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는 2010年의 硏究 結果가 있다. [37] 빌렘 神父가 朝鮮의 獨立을 追求하는 方法에 對해서 安重根과 意見을 크게 달리하게 되어 鬪爭보다는 敎育 을 重視하였다는 것이다. [37]
  • 日本 右翼들은 安重根을 尊敬하는 지바 都市値를 批判하거나 威脅을 하였다. [38]

思想과 信念 [ 編輯 ]

東洋平和論 [ 編輯 ]

東洋 平和論 》의 序文에서 安重根은 “萬若 政略을 고치지 않고 逼迫이 날로 심해지면, 차라리 다른 人種에게 亡할지언정 차마 같은 人種 黃人種에게 辱을 當할 수는 없다는 의론이 韓國·淸國 두 나라 사람의 마음속에 용솟음쳐 位ㆍ아래가 한 몸이 되어 스스로 여러 사람 앞에 나설 수밖에 없음이 불을 보듯 뻔한 形勢이다. 그렇게 되면...(若政略不改 逼迫日甚則 不得已寧亡於異族 不忍受辱於同種 議論湧出於韓淸兩國人之肺腑 上下一體 自爲白人之前驅 明若觀火之勢矣. 然則...)”라고 敍述하였다.

序文의 說明처럼 安重根은 獄中에서 執筆한 《 東洋 平和論 》에서 하얼빈 義擧를 東洋 平和를 위한 戰爭이라고 말하고 東洋平和論이란 한·중·일 3國이 各各 獨立을 維持하면서 서로 相互 浮躁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西歐 列强의 植民主義에 對應하는 體系를 만들 수 있다는 方法論까지 提示하고 있었다.

內容을 보면 이토 히로부미 가 바라는 ‘東洋平和(東洋平和)’는 이웃나라를 侵略해 日本에 종속시키는 것이었고 反對로 ‘日本式 東洋平和’를 主唱하는 이토에게는 安重根은 ‘東洋平和의 攪亂者’였다.

이러한 이토를 除去하기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 狙擊 事件 을 일으켰고 以後 5個月間의 收監生活과 公判過程에서 安重根은 이토의 射殺이 東洋平和를 지키려는 正義의 膺懲이었음을 줄기차게 强調했다.

未完成의 獄中 著書가 된 《 東洋 平和論 》은 ‘하얼빈 義擧’를 ‘東洋平和儀典(東洋平和義戰)’으로 記述하고 있다. 死刑場에서의 最後 發言도 “나의 이 巨事는 東洋平和를 위하여 決行한 것이므로 臨席 제員들도 앞으로 한·日 和合에 힘써 東洋平和에 이바지하기 바란다”였다. [39]

東洋平和論에 對한 評價 [ 編輯 ]

中華人民共和國 하얼빈시 의 安重根 義士 記念館에서 中國人들은 “安重根 義士가 追求한 東洋平和의 精神을 오늘 中國印度 배웠으면 한다”고 말하면서 “安重根 義士의 《 東洋 平和論 》은 오늘의 觀點에서 보아도 先驅的인 思想”이라며 “韓國에서 安重根의 平和思想을 왜 國際化하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 이들은 安重根이 뤼순 監獄에서 最後陳述하기 위하여 1910年 2月 12日 關東都督府 法廷 第5次 公判에서 堂堂히 밝힌 것도 東洋平和를 具現하고자 하는 意志였다고 말한다. 이것이 20世紀 넘어 西歐 유럽 等에서 構想한 平和보다 70年이 앞서는 思想이었다는 것이다. [ 出處 必要 ]

安重根이 志向하는 平和는 恨·中·日 3國이 各各 獨立을 維持하면서 서로 相扶相助하는 길을 찾았고, 이를 통해 西洋勢力이 東洋을 占領하고자 하는 西歐 帝國主義를 막을 때 東洋平和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고 더 나아가 日本이 侵略的 屬性을 合理化하기 위해 만든 大東亞共榮圈 論理의 陷穽과 矛盾을 이미 꿰뚫어보았기에 이에 對한 代案을 構想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9]

東學農民革命에 對한 否定的 視角 [ 編輯 ]

安重根은 1894年 16歲 나이로 東學 農民軍 討伐에 나서 功을 세웠다. 그는 獄中에서 쓴 自敍傳에서 東學軍을 "'東學黨'(現 一進會의 뿌리이다)이 곳곳에서 蜂起하여 外國人을 排斥한다는 口實로 郡縣을 橫行하면서 官吏들을 殺害하고 百姓의 財産을 掠奪했었다(이때가 韓國이 將次 위태롭게 된 基礎로, 日本과 淸나라와 러시아가 改悛하게 된 原因을 만든 病菌이었다)"라고 말한다. 이어 東學農民革命 蜂起가 淸나라와 日本의 介入, 淸日戰爭의 불씨가 되었다고 본다. [40]

東學農民革命 에 對한 安重根의 否定的 視角은 生涯 末年 獄中에서 쓰던 《東洋平和論》 前鑑(前鑑)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첫 머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나간 해(甲午年) 일청戰爭을 論하더라도 그때 朝鮮의 좀도둑떼와 같은 東學黨의 騷擾로 因해서 淸日 兩國이 軍士를 움직여 건너와 無斷으로 戰爭을 始作하여 서로 衝突하였다." [41]

安重根은 大韓帝國 滅亡 原因에 對해 貪官汚吏들의 不淨腐敗, 閔泳翊을 비롯한 高位 層의 無責任한 處事, 日帝의 强度짓 等을 擧論한다. 그러면서도 高宗과 閔妃를 비롯한 朝鮮 政府의 實情은 거의 言及하지 않는다. 代身 東學軍을 ' 좀도둑 떼'처럼 여기며 그들에게 相當한 責任을 돌린다. 이런 事實로 미루어 安重根은 朝鮮 王室에 忠誠을 다하려는 勤王主義 敵 視角을 벗어나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著書 및 遺墨 [ 編輯 ]

安重根이 血書로 大韓獨立(大韓獨立)이라고 쓴 太極旗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日一部讀書舊中生荊棘, 하루라도 冊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著書 [ 編輯 ]

安重根은 獄中에서 《 東洋 平和論 (東洋平和論)》을 執筆하였다. 이 冊에는 日本이 3國 干涉으로 因해 뤼순 을 淸나라에 돌려준 뒤 한·中·日 3國이 共同으로 管理하는 軍港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代表를 派遣하고 平和會議를 組織하고 3國 靑年으로 構成된 群團을 編成하고, 이들에게 2個國 以上의 言語를 배우게 하며, 銀行 을 設立하고 共用 貨幣를 만들자는 主張이 들어 있다.

또한 《 안응칠 歷史 (安應七歷史)》라는 題目으로 自敍傳을 執筆하였다. 이 自敍傳의 原本은 現在 傳하지 않으며 日本語 飜譯本과 漢文 謄寫本이 傳해진다. 이 自敍傳을 底本으로 하여 1970年에 出版된 《安重根 自敍傳》이 있다.

[ 編輯 ]

安重根은 義擧를 擧行하기 前 〈帳簿가(丈夫歌)〉를 지어 우덕순에게 주었으며, 禹德淳도 〈거의가(擧義歌)〉로 答하였다. 〈帳簿가〉는 安重根의 親筆로 된 漢詩와 한글詩가 함께 傳해진다. 安重根은 〈帳簿가(丈夫歌)〉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쥐盜賊'이라 指稱했다.

丈夫處世兮,其志大矣。 帳簿가 世上에 쳐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英雄造時。 때가 英雄을 知音이여 英雄이 때를 지으리로
雄視天下兮,何日成業。 天下를 雄視함이여 어니 날에 業을 일울고
東風漸寒兮,壯士義烈。 東風이 졈드 借米餘 쟝社에 醫긔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必成目的。 分介히 한 番 加味餘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鼠竊伊藤兮,豈肯比命。 쥐도젹 이등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豈度至此兮,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랄 쥴을 시아려스리요 社셰가 고여하도다
同胞同胞兮,速成大業。 同胞 同胞여 速히 大業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大韓獨立。 萬셰 萬셰餘 對한 獨立이로다
萬歲萬歲兮,大韓同胞。 萬셰 萬셰餘 對한 同胞로다

遺墨 [ 編輯 ]

安重根은 獄中에서 많은 글씨를 남겼다. 이것들 中 몇몇이 寶物 第569號 安重根義士遺墨(安重根義士遺墨)으로 指定됐다. 이 가운데 有名한 것으로는 寶物인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日一部讀書舊中生荊棘, 하루라도 冊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等이 있다. [42]

年譜 [ 編輯 ]

  • 1879年 9月 2日: 黃海道 해主婦 광석동에서 部 안태훈 某 조마리아 사이에서 出生
  • 1894年: 16歲에 김아려 와 婚姻. 金九 와의 첫 만남
  • 1896年: 父親 안태훈이 天主敎 에 入校
  • 1897年: 19歲에 天主敎에 入校
  • 1898年~1904年: 天主敎 傳敎 事業. 天主敎大學 設立을 推進하였으나 不發
  • 1905年: 父親 안태훈 死亡
  • 1906年: 삼흥學校 , 돈의학교 를 運營하였으며 西北學會 에 加入
  • 1907年: 石炭會社 三合을 設立하였으나, 같은 해 8月 1日 大韓帝國의 軍隊가 解散되자 滿洲로 亡命
  • 1908年: 1908年 7月 전제덕(全齊德)의 麾下에서 大寒義軍參謀中將(大韓義軍參謀中將) 兼 特派獨立大將(特派獨立大將) 및 啞鈴地球(俄領地區) 司令官의 資格으로 엄인섭(嚴仁燮)과 함께 100餘 名의 部下를 이끌고 豆滿江을 건너 國內로 浸透
  • 1909年 靈山戰鬪 敗北 後 만난 11名의 同志들과 함께 團地同盟 을 函
  • 1909年 10月 26日: 擧事
  • 1910年 2月 14日: 日本帝國 裁判部는 安重根에게 死刑을 宣告. (當時 裁判管轄權은 日本에 없었음. [43] )
  • 1910年 3月 26日: 午前 10時 15分 死亡.

家計 [ 編輯 ]

  • 할아버지: 안인수 (安仁壽), 鎭海 縣監 歷任
  • 할머니: 濟州 高氏 (濟州 高氏)
    • 伯父: 안태진(安泰鎭, 1853年 ~ 1919年), 해主婦 軍司馬
      • 四寸: 안종근(安宗根, 1884年 ~ 1945年)
        • 종질: 안영생(安榮生)
      • 四寸: 안장근(安莊根, 1886年 ~ 1956年)
      • 四寸: 안창근(安昶根)
      • 四寸(女): 안창展(安昶田)
    • 中部: 안태현(安泰鉉)
      • 四寸: 안명근 (安明根, 1879年 ~ 1927年) 獨立運動家
        • 종질: 안의생(安毅生, 1899年 ~ 1934年)
        • 종질: 안양생(安陽生, 1901年 ~ 1974年)
        • 從姪女: 안순생(安順生)
      • 四寸: 안홍근 (安洪根, 1881年 ~ 1928年), 社會主義系列 獨立運動家 [44]
        • 종질: 안덕생(安德生, 1898年 ~ 1954年)
        • 종질: 안도생(安道生, 1909年 ~ ?)
        • 종질: 안무생(安武生)
      • 四寸(女): 안익근(安益根)
      • 妹弟 : 최익형(崔益馨), 獨立運動家
    • 叔父: 안태건(安泰建, 1868年 ~ ?)
      • 四寸: 안봉근(安奉根, 1887年 ~ 1936年) 獨逸 留學 中 死亡
        • 종질 : 안互生(安鎬生, 1908年 ~ 1988年?)
        • 종질 : 안창순(安昌淳, 1910年 ~ 1928年)
        • 종질 : 안民生(安民生, 1911年 ~ 1995年) 統一運動家
        • 從姪女 : 안창수(安昌洙)
      • 四寸: 안충근(安忠根), 滿洲에서 腰絶
      • 四寸 : 안성근(安性根), 蘇聯留學視 行方不明
    • 叔父: 안태민(安泰敏, 1869年 ~ 1922年)
      • 四寸 : 안경근(安敬根, 1896年 ~ 1978年) 獨立運動家
        • 종질 : 안철생(安哲生, 1915年 ~ ?)
      • 四寸: 안형근(安炯根, 1907年 ~ 1969年)
        • 종질 : 안명생(安明生, 1934年 ~ )
        • 종질 : 안정생(安晶生, 1936年 ~ )
        • 종질 : 안홍생(安弘生, 1938年 ~ )
        • 종질 : 안의생(安義生, 1941年 ~ )
        • 종질 : 안용생(安勇生, 1946年 ~ )
        • 종질 : 안달생(安達生, 1953年 ~ )
      • 四寸(女): 안형숙(安炯淑)
    • 叔父 : 안태순(安泰純), 獨立運動家

家族 關係 [ 編輯 ]

  • 아버지: 안태훈 (安泰勳, 1862年 ~ 1905年 ),성균進士
  • 어머니: 조마리아 (趙性女 마리아, 1862~1927) 獨立運動家, 2008年 8月 組마리아 女史에게 建國訓長 애족장을 授與
    • 女同生: 안성녀 루시아(安性女, 1881~1954), 獨立運動家, 釜山 天主敎 墓地에 安葬.
    • 妹弟 : 권승복(權承福), 獨立運動家, 1920年 死亡
      • 조카 : 권헌(權憲)
    • 男동생: 안정근 (安定根), 獨立運動家, 1949年 상하이에서 死亡.
      • 조카: 안원생(安原生), 獨立運動家
      • 조카: 안진생 (安珍生), 미얀마 大使 歷任
    • 男동생: 안공근 (安恭根), 獨立運動家, 1939年 死亡 推定.
      • 조카: 안우생 (安偶生)
      • 조카: 안낙생(安樂生), 獨立運動家
    • 否認: 김아려 (金亞麗)
      • 長女: 안현생 (1902~1960), 曉星女子大學校 (現 대구가톨릭대학교 ) 佛文學 敎授로 在職함. [45]
      • 사위: 황일청
        • 外孫女: 황은주(1928年 ~ 2021年)
        • 外孫女: 황은실(1931年 ~ 2021年 前)
      • 長男: 안문생 (安文生, 一名 안분도,), 沿海州로 避身하였다가 7살 때 누군가가 준 菓子를 먹고 독살당함.
      • 次男: 안준생 (安俊生, 1907年~1951年 11月), 肺結核으로 死亡. 惠化洞 天主敎 公園墓地에 安葬. [46]
      • 子婦: 정옥녀 (鄭玉女, 1905年 ~ 1991年)
        • 孫女: 안選好(安善浩, 1930年 ~2003年)
          • 孫子: 안웅호 (鄭雄浩, 1933年 ~ 2013年), 醫學博士, 安重根의 唯一한 孫子다. [47]
          • 孫女: 안연호(安蓮浩, 1938年~2011年)

기타 [ 編輯 ]

擧事 同志 우덕순, 日帝 密偵 確認 [ 編輯 ]

2019年 KBS 探査報道附加 3.1運動·臨時政府 樹立 100周年을 맞아 '獨立運動의 보이지 않는 敵'이었던 密偵을 追跡했다. 지난 8個月 동안의 追跡이었다. 日本 外務省과 防衛省 機密文書, 憲政資料室에 保管된 各種 書信, 中國 當局이 生産한 公文書 等 5萬 張의 文書를 入手해 分析했다.

取材陣은 金佐鎭 將軍의 參謀 이정을 包含해 只今까지 모두 895名의 實名을 確認했다. 密偵 嫌疑者들이다. 8月 13日과 20日 放送되는 <密偵 2部作>(밤 10時, KBS1TV)에서 나눠 公開한다. 여기에 安重根의 擧事 同志 禹德淳이 密偵이었음이 드러났다.

1920年代 들어 禹德淳은 以上 行跡을 보인다. 取材陣이 入手한 日本 機密文書 等을 보면 禹德淳은 1920~30年代 하얼빈과 치치하얼 等 滿洲 地域에서 '朝鮮人民會' 主要 幹部로 活動했음을 確認할 수 있다.

朝鮮人民會는 日帝가 當時 韓國人 社會를 統制하기 위해 만든 代表的 親日團體다. 情報 蒐集이 主要 役割이었다. 一般 韓國人뿐 아니라 獨立運動家를 綿密히 監視하고 情報를 끌어모았다. 取材陣은 禹德淳이 一齊 情報機關인 '特務機關'과 密接한 關係를 맺었음을 보여주는 證據 資料 等을 入手했다.

中國 地域 韓國獨立運動 專門家인 김주용 원광대 敎授는 "朝鮮人民會가 活用하는 密偵들이 獨立運動家들을 監視하는 役割을 했고 이들 情報가 朝鮮人民會腸을 했던 우덕순에게 集中됐다"고 分析했다. 말하자면 禹德淳이 密偵을 指揮하고 管理하는 役割을 맡았다는 이야기다. 禹德淳도 現在 獨立有功者다. 1962年 建國訓長 독립장을 받았다. [49]

金九와의 因緣 [ 編輯 ]

白凡 金九 東學 農民 運動 에 參與했다가 失敗한 後 安重根의 아버지 안태훈이 청학동 으로 移徙하여 살게 되었을 때 처음 대면하였으며, 金九 는 그가 銃으로 사냥을 잘하며 男子다웠다고 評하였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 暗殺 以後 그의 夫人 等의 遺族을 우덕순 , 金九 等이 돌보았으며 安重根의 동생인 안공근 은 상하이에서 金九 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안정근 은 金九와 直接 連結되지 않고 안창호 를 따랐지만, 안공근 金九 의 部下가 되어 韓人애국단 과 韓國獨立黨特務對를 組織하는데 同參한다.

信者 資格 剝奪과 資格 回復 [ 編輯 ]

安重根은 19歲 때 니콜라 빌렘 新婦에게 天主敎 領洗를 받았으며, 洗禮名은 토마스(Thomas)이다. 安重根의 아버지 안태훈이 먼저 領洗를 받아 入敎한 後, 그의 집안은 모두 領洗를 받고 天主敎 信者가 되었다. 安重根은 當時 朝鮮敎區長으로 司牧 中이던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主敎와도 因緣을 맺고, 聖堂 建築에 必要한 獻金을 奉獻하는 等 旺盛한 信仰生活을 해왔다.

1909年 10月 하얼빈에서의 依據 以後 死刑 宣告를 받은 安重根은, 死刑執行 直前 神父를 만나 告解聖事 病者聖事 를 執典해줄 것을 要請했다. 그러나 朝鮮敎區長이었던 뮈텔 主敎는 安重根의 義擧를 殺人 行爲로 斷罪, 朝鮮敎區의 新婦들로 하여금 安重根에게 成事를 배푸는 것을 禁止했다. 이에 니콜라 빌램 神父가 뮈텔 主敎의 命을 어기고 뤼순 監獄으로 찾아가 미사와 告解聖事를 執典해주었고, 安重根은 聖事를 받고 死亡했다. 뮈텔 主敎는 主敎에게 不純名했다는 理由로 빌렘 神父의 成事執行權을 정지시켰으나, 빌렘 新婦가 敎皇廳 敎會法院에 異議를 提起해 成事執行權 停止는 解除되었다. 한便 天主敎 信仰이 篤實했던 安重根은, 自身의 아들인 안분도를 司祭로 키우려고 計劃했었다.

오랜 期間동안 韓國 天主敎에서 殺人者로 斷罪되었으나, 1990年代에 들어 安重根에 對한 한국천주교회의 評價가 變化하기 始作했고 1993年 8月, 誕辰 미사를 執典한 金壽煥 스테파노 樞機卿은 "安 義士의 當時 行爲는 殺人이 아니라 獨立運動이자 正當防衛로 봐야 마땅하다" 라는 立場을 밝히며 韓國 天主敎에서 安重根의 平信徒 身分은 完全히 復權되었다. [50]

記念 事業 [ 編輯 ]

  • 1958年 -“愛國烈士 安重根”은 北韓에서 創作, 공연되었다.
  • 1963年 - 安重根義士崇慕會 가 設立되어 初代 理事長으로 윤치영 이 就任하였다.
  • 1974年 - 安重根 記念 銅像이 作家 김경승 에 依해 製作되어 南山 區 조선신궁 자리에 設置되었는데 최성모 신동아그룹 創業主가 誠金을 [51] 喜捨하기도 했다.
  • 1979年 - 《 安重根 伊藤博文을 쏘다 》가 北朝鮮에서 開封되었다. 監督은 엄길선 조선예술영화촬영소 總長이다.
  • 1979年 - 明洞聖堂 에서 安重根 義士 誕辰 100周年記念 대미사가 執典되었다.
  • 1986年 - 金日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主席은 中華人民共和國 뤼순 監獄을 訪問하여 安重根 義士 遺骸 發掘을 要請하였다.
  • 1987年 - 小說家 복거일 하얼빈 義擧 의 失敗와 그로 인한 日帝强占期 의 延長을 假定한 代替歷史 小說 《 悲鳴을 찾아서 》를 出刊했다.
  • 1990年 - 天主敎正義具現全國司祭團 이 《安重根 (도마) 義士 追慕 資料集-逝去 80周年을 맞이하여》를 發刊하였다.
  • 1999年 - 서울市 都市公園委員會에서 安重根 義士 記念公園 造成 提案을 否決하였다.
  • 2000年 - 安重根 義士 遺骨 發掘委員會가 發足되었다.
  • 2000年 - 하얼빈役에서 南韓과 北朝鮮의 共同 記念式이 열렸다.
  • 2001年 - 오페라 “아시아의 횃불 安重根”李 獨逸에서 初演되었다.
  • 2002年 - 오페라 “安重根 손가락”李 韓國에서 공연되었다.
  • 2002年 - 安重根 義士 國際 平和賞이 制定되었다.
  • 2003年 - 安重根 義士 崇慕會 理事陣의 退陣과 改革을 促求하는 100인 宣言이 發表되었다.
  • 2004年 - 安重根의 삶을 그린 《 도마 安重根 》이 韓國에서 開封되었다. 演出家는 서세원 이며 開封 當時 8.15 光復 59周年 - 天主敎正義具現全國司祭團 創立 30周年 記念 映畫란 [52] 이름으로 弘報했으나 허술한 演出-場面들 [53] 로 觀客들한테 외면당해 興行에 失敗했고 安重根을 《 英雄本色 》의 주윤발 또는 西部映畫에 나올 銃잡이처럼 描寫한 [54] 歷史歪曲物이란 指摘이 있었는데 諮問 役의 天主敎正義具現全國司祭團 神父들이 더욱 慫慂해 酷毒한 評價를 받았으며 이 過程에서 2004年 最惡의 韓國映畫 不名譽를 [55] 안았다.
  • 2006年 - 假짜 安重根 揮毫가 8千萬 원에 落札되기도 했다. [56]
    • 獨立運動家로서는 最初로 2008年 乾燥된 韓國 海軍의 1800톤級인 손원일級 潛水艦 大型 3番함의 이름이 安重根函 으로 命名되었다. [57] [58] 安重根 潛水艦은 2008年 6月 蔚山 현대중공업에서 進水되었다. 安重根函 進水式에는 김태영 大韓民國 合參議長과 정옥근 海軍參謀總長 等 軍關係者와 現代重工業 任職員, 安重根 義士 崇慕會 關係者 等 關係者 等 100餘 名이 參席했다.
  • 2009年 - 安重根 義士 義擧 100周年을 記念하여 6月부터 國內 公演을 始作으로 11月까지 하얼빈, 日本 等地에서 최수종 이 安重根 役을 맡은 演劇 '大韓國人 安重根'의 幕이 올랐다.
  • 2010年 - 中華人民共和國 政府가 安重根 義士 追慕行事를 公式的으로 承認하였다. [61]
    • 3月 26日 - 李明博 大統領은 安重根 義士의 遺骸를 모셔올 수 있도록 最善을 다하겠다고 發表했다. [62]
    • 3月 26日 - 서울 서울廣場 에서 安重根 義士 死亡 100周年 追念式이 政府 主管으로 열렸다.
    • 7月 27日 俳優 송일국 이 1人 2役을 맡은 安重根의 삶과 처음으로 그의 아들 안준생에 對한 이야기를 그린 '나는 너다' (2010年 7月 27日 ~ 2010年 8月 22日)가 國立劇場 에서 初演되었다. [63]
    • 9月 30日 - 國防部 朝鮮日報 가 安 醫師 死亡 100周年과 조선일보 創刊 90周年을 맞아 共同으로 制定한 爲國獻身上 이 11名에게 처음 授與되었다.
    • 9月 30日 - 러시아 政府가 安重根과 關聯된 外交 文書를 大韓民國 政府에 처음 傳達하였다. [64]
    • 11月 19日 - 安重根醫師 死亡 100周年記念, 大韓獨立 運動家 42人 肖像畫 特別展 《大韓獨立展》李 南山의 安重根義士 記念館에서 開催되었다. (西洋畫家 조영규) [65]
    • 12月 1日 - 安重根醫師 死亡 100周年記念, 大韓獨立 運動家 42人 肖像畫 特別展 《大韓獨立展》李 안양시 所在의 坪村아트홀에서 開催되었다. (西洋畫家 조영규) [66]
    • 12月 4日 安重根의 이야기를 담은 創作 뮤지컬 '英雄'李 1年 만에 다시 幕이 오를 豫定이다. (製作社: 에이콤 / 演出: 윤호진 / 公演場: 國立劇場 해오름극장)
    • 安重根 死刑 以後의 祝賀宴 記錄을 찾아냈다. [67]
  • 2011年 - 安重根 義士 遺骸 發掘 및 國內 奉還을 推進하는 非政府 民間團體 安重根뼈대찾기사업회 가 公式 出帆하였다.
    • 天主敎 서울大敎區 諡福諡聖準備委員會(委員長 廉洙政 主敎)가 安重根을 ‘近現代 信仰의 證人에 對한 諡福調査’ 對象으로 擧論하면서 安重根에 對한 諡福 調査를 實施하였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安重根義士 記念館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 安重根義士 記念事業會
  3.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227쪽
  4. 韓國 獨立運動史 資料 8, 173~174페이지
  5.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222쪽
  6.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223쪽
  7. 윤병석 譯編, 《安重根電氣全集》 (國家報勳處, 1999) 450, 463페이지
  8. 韓國歷代人物 綜合情報 시스템 Archived 2015年 4月 2日 - 웨이백 머신 韓國學中央硏究院
  9. 安重根,《안응칠歷史》(1910)
  10. 熊進偉人傳記《安重根》/ 웅진출판 .
  11.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256쪽
  12. daum
  13. 풀어준 日本軍 捕虜들이 이들의 慶興 作戰을 漏泄한 것이다.
  14. 朴, 陳永 (2016.11.17). “安重根이 부르짖은 萬歲의 正體는 무엇이었을까?” . 2020.10.20에 確認함 .  
  15. 장석흥, 《安重根의 生涯와 救國運動》, 獨立記念館 韓國獨立運動史 硏究所, 1992
  16. 當時 그는 이토 一行이 모두 비슷한 옷을 입어 이토를 알아보지 못해 擧事를 失敗할 뻔했지만, 갑자기 이토가 멈춰서 뒤돌아 群衆에게 손을 흔들며 人事하는 틈을 타 狙擊을 成功할 수 있었다.
  17. 이희용 (2019年 10月 18日). “[이희용의 글로벌時代] 110年 前 安重根을 도운 愛國志士들” . 《 聯合뉴스 . 2022年 5月 19日에 確認함 .  
  18. 安重根 義士 遺骸發掘 失敗 - 1等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19. “安氏 결고(安氏 訣告)” . 大韓每日申報.  
  20. 유석재, “安重根 母親의 ‘편지’는 日本人 僧侶의 造作이었다” , 朝鮮日報
  21. “밸런타인데이, 초콜릿보다 安重根 義士를 記憶하자” . 노컷뉴스.  
  22. " 安重根 生家 復元, 南北 和合의 架橋 삼아야 " . 노컷뉴스.  
  23. “獨立運動 > 生涯 > 大韓國人 安重根 > 安重根義士記念館” . 2020年 9月 17日에 確認함 .  
  24. “[여적]安重根 義士 家廟” . 京鄕新聞.  
  25. “孝昌公園의 受難史…安重根 醫師의 假墓(假墓)를 아십니까?” . 헤럴드經濟.  
  26. ““아파트로 變한 뤼순監獄 墓地터 1次 發掘 때 못 파 너무 아쉬워”” . 서울新聞.  
  27. 全羅南道 告示 第2019-459號, 《全羅南道 指定文化財 指定 告示》 , 全羅南道知事, 全羅南道 徒步 第2019-62號, 19-27面, 2019-12-26
  28. “정순택 大主敎 "安重根 醫師는 자랑스러운 가톨릭 信仰인”” . 카톨릭新聞. 2022年 4月 3日.  
  29. “‘信仰의 模範’ 安重根 토마스 醫師 기린다” . 天主敎 水原敎區靑. 2022年 3月 23日.  
  30. 가톨릭 新聞 2008年 4月 13日子.
  31. “安重根 義士 遺墨 ‘敬天’ 나오자… “아!” 傍聽席에선 歎聲” . 東亞日報. 2013年 5月 16日.  
  32. “朝鮮 後期 思想史와 殉敎 精神 품은 ‘寶物倉庫’ 西小門公園·博物館” . 카톨릭평화신문. 2019年 6月 2日.  
  33. 安重根 評傳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4. [安重根 義士 義擧 99年] "그는 100年 前부터 東北亞 平和都市를 꿈꿨다" - 1等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35. SBS, 다큐드라마 '金佐鎭 將軍' 放送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충청일보 2011/08/12
  36. 윤형권, 世界 跆拳道 修鍊生들, <중근틀> 익히며 安重根 배우다 , 오마이뉴스
  37. 김수태 (2011年 4月). “安重根과 天主敎의 關係에 對한 批判的 檢討 : 獨立運動期를 中心으로”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獨立記念館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38 : 5?45.  
  38. “[필동通信] "나는 安重根을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이 난다 " . 每日經濟. 2018年 4月 30日.  
  39. 배영대, “安重根 東洋平和論은 오늘날 觀點서도 先驅的 思想” Archived 2020年 8月 9日 - 웨이백 머신 , 中央日報
  40. 安重根, <安重根 獄中 自敍傳>(2019, 열화당 靈魂圖書館), 22~23쪽.
  41. 引用한 安重根, <安重根 獄中 自敍傳>, 111쪽.
  42. 寶物 第569號, 安重根義士遺墨 ( 大韓民國 文化財廳 )
  43. 安重根 裁判權 行使 잘못 알고도 밀어붙인 日本
  44. '安重根 義士 4寸 동생' 안홍근 先生 建國訓長
  45. “故國에 돌아와도 依支하고 찾아갈 곳이 없었다” , 示唆IN
  46. "그는 100年 前부터 東北亞 平和都市를 꿈꿨다"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한겨레新聞
  47. Q: 安重根 義士 後孫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나? 朝鮮日報
  48. 光復 70周年 - 安重根의 愛國魂 再照明, 聯合뉴스 TV
  49. “[探査K] 895名 追跡…“金佐鎭의 祕書는 密偵이었다”” . KBS. 2019.08.12.  
  50.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3/08/22/19930822723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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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바다의 王子 '安重根 潛水艦' (朝鮮日報) 2008.06.04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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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 노재현 記者 (2009年 9月 4日). “安重根 義士 銅像, 國會에 臨時 展示” . 聯合뉴스 . 2009年 9月 4日에 確認함 .  
  60. 한동현 記者 (2009年 10月 12日). “安重根 義士 義擧 100周年 記念 第1回 世界인 長期大會 하얼빈서 開催” . 黑龍江新聞. 2014年 2月 2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11月 14日에 確認함 .  
  61. 박종국 記者 (2010年 3月 25日). “中, 安重根 追慕行事 첫 公式 承認(綜合)” . 聯合뉴스 . 2010年 3月 28日에 確認함 .  
  62. 이광효 記者 (2010年 3月 26日). “李明博 大統領, “安重根 義士 遺骸 모셔오는 데 最善”” . 투데이코리아.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3月 26日에 確認함 .  
  63. 나는 너다 Archived 2021年 5月 14日 - 웨이백 머신 國立劇場
  64. 김귀근 김남권 記者 (2010年 9月 30日). “러, '安重根 外交文件' 韓國에 처음 傳達(綜合2報)” . 聯合뉴스 . 2010年 10月 2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65. 김남인 記者 (2010年 11月 20日). “獨立運動家 42人 肖像畫展 여는 조영규氏 "生 다할 때까지 殉國先烈 그릴 겁니다 " . 朝鮮日報 . 2010年 11月 20日에 確認함 .  
  66. 김남인 記者 (2010年 11月 20日). “獨立運動家 42人 肖像畫展 여는 조영규氏 "生 다할 때까지 殉國先烈 그릴 겁니다 " . 朝鮮日報 . 2010年 11月 20日에 確認함 .  
  67. 김귀근 記者. “日官吏들, 安重根義士 死刑執行後 祝賀宴” . 聯合뉴스.  

參考 文獻 [ 編輯 ]

  • 安重根, 《安重根 義士 自敍傳》, 범우사, 2000
  • 薄宦, 《滿洲 地域 韓人 遺跡 踏査記》, 국학자료원, 2009
  • 薄宦, 《러시아 韓人 遺跡 踏査記》, 국학자료원, 2008
  • 윤명숙, 《大寒英雄傳 1》 (國家報勳處, 1995)
  • 장석흥, 《安重根의 生涯와 救國運動》, 獨立記念館 韓國獨立運動史 硏究所, 1992
  •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 韓國民族運動史學會, 《安重根과 韓人民族運動》 (국학자료원, 2002)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