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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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崔益鉉
채용신 화백이 그린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 초상화
채용신 畫伯이 그린 義兵將 勉庵 崔益鉉 先生 肖像畫
朝鮮의 忠淸道 신창현감
任期 1860年 ~ 1861年
君主 朝鮮 哲宗

朝鮮의 好調參判
任期 1871年 12月 5日 ~ 1873年 12月 30日
君主 朝鮮 高宗 李兄
攝政 흥선大院君 이하응
領議政 이유원

大韓帝國의 京畿道 觀察使
任期 1898年 ~ 1899年
君主 大韓帝國 高宗 李兄

이름
別名 初名은 최기남 , 字는 찬겸, 號는 勉庵
身上情報
出生日 1833年 12月 5日 ( 1833-12-05 )
出生地 朝鮮 京畿道 抱川縣 내북면 可採
(現 大韓民國 京畿道 抱川市 신북면 가채리)
居住地 大韓帝國 京畿道 抱川
死亡日 1906年 11月 17日 ( 1906-11-17 ) (72歲)
死亡地 日本 쓰시마國 이즈하라 에서 兵士
國籍 大韓帝國
學歷 1855年 科擧 及第
經歷 獨立運動家
政治人
抗日 義兵將
正當 老論 後裔 勢力 殘存 衛正斥邪派
本館 慶州 (慶州)
父母 아버지 最大(崔岱)
宗敎 儒敎 ( 性理學 )
웹사이트 최익현 - 두산世界대백과사전
賞勳 1962年 建國訓長 대한민국장 追敍

최익현 (崔益鉉, 1833年 12月 5日 ~ 1907年 1月 1日 (陰曆: 1906年 11月 17日)은 哲宗 治世 時節부터 高宗 治世 時節까지 忠淸道 신창현감·好調參判·京畿道 觀察使 等을 지낸 朝鮮 末期와 大韓帝國 政治人 이며 獨立運動家 利子, 1905年 乙巳勒約 에 抵抗한 代表的 義兵將이었다.

主要 履歷 [ 編輯 ]

本貫은 慶州 이고, 初名은 최기남 (崔奇男), 者(字)는 찬겸(贊謙), 雅號(雅號)는 勉庵(勉庵)이다. 金起炫과 李杭魯 의 門下에서 受學하였으며, 老論 화서學派 의 指導者이자 衛正斥邪派의 中心 人物이었고, 흥선大院君 의 越權行爲를 批判하였다.

1855年 過去 에 及第하여 官職에 올랐으며. 以後 여러 벼슬을 거쳐 同副承旨 , 參議 , 돈녕부 道政 等을 歷任했고 安東 金氏 勢道政治에 反對, 1863年 흥선大院君 의 執權과 改革 政策을 積極 支持했다. 그러나 1873年 陰曆 10月 1874年 陰曆 11月 , 이토록 두 次例씩 흥선大院君 을 攻擊하여 끝내 失脚시켰다. 그 뒤 議政府 贊成 等을 歷任하였다. 그는 高宗 卽位 直後부터 나온 정도전 , 南袞 , 정인홍 , 한효순 , 尹鑴 , 이현일 等의 復權 輿論을 親舊 김평묵 과 함께 여러 番 決死 反對하여 좌절시켰다.

1876年 江華島 條約 反對에서 加一層 浮刻되었다. 도끼 를 메고 光化門 에 나아가 올린 個項誤不可(開港五不可)의 ' 病者斥和所 '(丙子斥和疏)를 올린 뒤부터는 開港 反對와 衛正斥邪運動을 展開했고, 乙巳勒約 以後로는 抗日 義兵 活動을 展開해 나갔다.

1905年 乙巳勒約 締結을 契機로 그는 公開的으로 義兵을 募集하였다. 임병찬 , 임落 等과 함께 全羅北道 井邑 에서 擧兵하였으나, 곧 官軍에게 敗하여 逮捕되었고 對馬島 에 流配되었다. 流配 當日, 對馬島 注意 日本 式 斷髮 要求에 對한 抗議의 斷食 을 始作하였으나, 대마도주의 謝過 및 王命으로 斷食을 中斷을 하였다. 하지만, 3個月 뒤의 發病( 風症 ) [1] 斷食 後遺症으로 74歲의 나이로 死亡하였다. 그는 開化派를 反對하면서도, 흥선大院君 의 越權行爲와 남인 , 北人 採用 政策에 敵對的이었고, 高宗 의 皇帝 稱號 格上을 옳지 않게 여겼다. 事後 1928年 시호 없이 宗廟 高宗의 卯正에 配享되었다. 1962年 3月 1日 大韓民國 建國功勞勳章 이 追敍되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京畿道 抱川 出生으로, 화서 李杭魯 의 弟子이다. 1833年 12月 5日 京畿道 抱川郡 내북면 街범리(嘉范里)에서 最大(崔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本貫은 慶州(慶州)이고 字는 찬겸(贊謙)이며 號는 勉庵(勉庵)이다. 타고난 資質이 뛰어나서 初名(初名)을 奇男(奇男)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翼弦으로 고쳤다. 崔益鉉은 집안이 가난하여 4歲때 丹陽(丹陽)으로 옮긴 것을 비롯하여 여러脂肪으로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다. 14歲때 父親의 命에 따라 性理學의 巨頭인 화서 李杭魯 의 文人이 되어, 修學하였다.

數學科 少年期 [ 編輯 ]

14歲 때 京畿道 양근群 碧溪(蘗溪)에 隱退한 老論 性理學 의 거두 李杭魯 의 門下에서 擊蒙要訣 , 대학장구 (大學章句), 논어집주 (論語集註) 等을 통해 性理學의 基本을 習得하였다. 이 過程에서 이航路의 '애군與否 憂國餘暇(愛君如父 憂國如家)'의 精神, 卽 愛國과 護國의 精神을 배웠다. 그는 李恒老의 弟子들 中에서도 首弟子로 認定되었고, 나중에는 송시열 송준길 - 권상하 - 한원진 , 離間 -李恒老를 잇는 老論의 正統으로 看做되었다.

스승인 李杭魯로부터 憂國愛民(憂國愛民)的인 衛正斥邪의 思想을 이어 받아 그것을 危局餘暇的(爲國如家的)인 忠義思想과 尊王攘夷 (尊王攘夷)의 春秋大義論으로 昇華?발전시켜 自主的인 民族思想으로 體系化하였다. 23歲 때에 明經科(明經科) 甲科(甲科)에 及第하여 官職生活을 始作하였으나 在任中 꾸준히 不淨腐敗와 救國抗日鬪爭을 끊임없이 展開하였다. 그의 政治思想은 李杭魯 系列의 衛正斥邪였으며 孔孟(孔孟)의 王道政治 (王道政治) 具現을 理想으로 하였다. [2]

花序는 최익현에게 '勉庵'(勉菴)이란 號를 지어 주고 '樂境民職'(洛敬민直)이란 글을 주면서 恒常 學問을 勸勉하였다. 이로부터 崔益鉉은 이航路의 學問을 戰勝받아 衛正斥邪의 '救國不渡'(救國扶道)의 義理를 具現시키고자 온 生涯를 바쳤다. 李恒老의 門下에서 그는 平生의 同志인 유인석 , 김평묵 等을 만나게 된다. 1855年 (哲宗 6年) 2月에 春塘臺 (春塘臺)에서 열린 强勁(講經)에서 1等, 바로 生員試 進士試 를 거치지 않고도 그 해의 戰時에 應試할 資格이 附與되었다.

官僚 生活과 政治 活動 [ 編輯 ]

科擧 及第와 官僚 生活 [ 編輯 ]

哲宗 在位 中인 1855年 (哲宗 6) 過去 에 及第하여 承文院 亭子(承文院正字)를 始作으로 순강원守奉官(順康園守奉官)이 되었으며 以後 成均館 司憲府 , 司諫院 等에서 勤務했다. 成均館戰績(成均館典籍), 司憲府地平(司憲府持平), 司諫院正言, 吏曹正郞(吏曺正郞), 신창현감(新昌縣監) 等 內外職을 두루 거치면서 剛直과 選定(善政)으로 稱頌되었다. 地方官·言官으로 在職時 不義와 不正을 剔抉해 强直性을 發揮하였다.

그는 言官 벼슬에 主로 있으면서 일찌감치 朝鮮朝 士林의 最大 美德인 剛直한 性品을 드러냈다. 安東 金氏 勢道政治에 反對하다가 눈밖에 나는가 하면 1864年 흥선大院君 의 執權과 改革 政策을 積極 支持했다. 그러나 興宣大院君이 勢道 家門 逐出에서 벗어나 老論 을 牽制하기 위해 남인 , 北人 等도 登用하자 그에게 批判的인 視角을 堅持하게 된다. 王權 强化를 위해 景福宮 을 重建하는 興宣大院君의 政策을 反對하여 官職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 뒤 다시 內職으로 돌아와 成均館直講이 되었다가 司憲府掌令을 거쳐 工曹參議, 돈녕부道政 等의 官職을 두루 歷任하고 1868年 올린 上疏에서 景福宮 再建을 위한 大院君의 非情을 批判, 是正을 建議하였다. 興宣大院君에 對한 上訴는 그의 剛直性과 그가 標榜한 民本主義 性向 憂國愛民精神의 發露이며 막혔던 言路를 연 契機가 되었다. 1870年 (高宗 7)에 勝戰을 지냈다.

大院君 批判 [ 編輯 ]

스승인 李杭魯 의 生存 時에 崔益鉉은 스승 李恒老가 大院君을 政治的으로 支持하였으므로 大院君에 對한 批判을 自制하였다. 그러나 李杭魯 死後에는 大院君에게 批判的으로 變하게 된다.

1868年 (高宗 5年) 景福宮 重建의 中止를 促求하고, 賦役에 動員되는 百姓들의 生計 問題와 當百錢 發行에 따르는 物價 引上과 財政의 破綻 等을 指摘, 흥선大院君 의 政策을 失政(失政)이라며 上疏하였다. 그는 景福宮 重建 의 大規模 工事에 많은 費用과 人力이 動員되어 人的, 物的 資源의 浪費가 甚함을 들어 景福宮 重建을 反對하였다. 그해 司憲府 掌令 에 除授되었으나 1868年 10月 다시 景福宮 重建을 無理한 土木工事라며 이를 中止할 것을 請하는 上疏를 올렸다.

司諫院 社間 권종록 이 이를 너무도 無禮하다며 批判하였으나 오히려 高宗 은 그를 10月 20日 을 期하여 돈녕부 道政(敦寧府 都正)으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崔益鉉은 10月 28日 을 基한즉 職責 昇進한지 8日만에 돈녕부 度正直을 辭退한다. 그 뒤 興宣大院君이 書院撤廢令 을 내리자 大院君에 對해 더욱 敵對的으로 變하였다. 1871年 上疏를 올려 大院君의 萬東廟(萬東廟)를 비롯한 書院들의 撤廢는 존주대義와 勉學雰圍氣를 망치는 것이며 撤廢令을 取消할 것을 建議하였다.

大院君 逐出에 協力 [ 編輯 ]

한便 媤아버지 흥선大院君 을 逐出하고자 한 명성황후 는 사람을 보내 그와 交涉하였다. 興宣大院君의 書院撤廢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873年 (高宗 10年) 10月 돈녕부道程으로 在職 中 癸酉上疏 (癸酉上疏)를 올려 高宗이 成年이며 大院君이 攝政을 할 理由가 없음을 上疏하였다. 이 上疏를 契機로 大院君의 10年 執權이 무너지고 高宗의 親政이 始作되었다. 이때 그의 上疏에 閔氏 一族과 高宗이 積極 支持하였다. 어려서 아버지의 도움으로 卽位한 高宗 이 成人이 되면서 흥선大院君 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여기에는 夫人인 明成皇后와 餘興 閔氏 戚族 勢力들이 加擔했다. 大院君을 批判했던 崔益鉉은 承政院 同副承旨 로 起用되어 班 興宣大院君派의 尖兵에 서게된다.

同副承旨로 起用되면서 그는 이어 朝廷 大臣들이 일處理를 잘못하여 煩雜하다는 것을 知的, 上訴한다. 이에 議政府 左議政 강노 右議政 한계원 , 영돈녕府使 홍순목 等이 辭職 上疏를 올렸고, 삼사에서는 崔益鉉을 糾彈하였다. 그러나 高宗은 그의 上疏를 높이 사서 一躍 好調 參判 에 除授하였다. 그러나 上疏文이 無禮하다는 非難이 빗발쳤고 大院君界 人士들은 그를 糾彈했다.

領議政 이유원 等과 함께 宗室 흥선大院君 獨占 專橫 體制 批判 作戰에 電擊 合勢를 한 그는 書院을 撤廢한 興宣大院君의 政策을 猛烈히 批判하는 等 大院君을 攻擊하여 結局 失脚시켰다. 以後 高宗 의 信任을 받아 嘉善大夫 로 昇進, 돈녕부 道政 을 거쳐 好調 參判 에 除授되었다. 그러나 그와 映像 李裕元이 共同 施行한 興宣大院君 下野 運動은 父子離間의 行爲라며 大院君 系列 人士로부터 批判받았다. 그는 임금의 아버지를 批判했다는 理由로 돈녕부道程에 轉任되었다가 <社好調參判兼鎭所繪素 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를 올려 閔氏 一族의 壅蔽를 非難하자 上訴의 內容이 過激, 放恣하다는 理由로 11月 義禁府 에서 國文을 한 뒤, 다시 濟州道 圍籬安置 되는 刑罰을 받았으나 이는 實權을 잡은 閔氏 勢力의 形式的인 處罰이었다.

尹鑴, 이현일 復權 反對 [ 編輯 ]

1873年 (高宗 10) 이현일 , 尹鑴 , 한효순 , 목내선 , 정인홍 , 정도전 等을 復權해야 된다는 身元 上訴가 올려졌다. 이에 崔益鉉과 김평묵 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剛하게 反撥하였다. 그러나 鄭道傳, 이현일 , 尹鑴 等을 復權해야 된다는 上訴가 繼續되자 崔益鉉과 金平默은 이를 막기 위해 줄기차게 努力하였다.

1873年 (高宗 10)부터 1876年 까지 崔益鉉과 김평묵 等은 上訴 等을 통해 " 이현일 , 한효순 , 목내선 等의 身元을 要求한 사람들을 追律(追律, 反逆罪)로 處斷해야 하며, 남인 尹鑴 以後로 우리 西人 (老論)과 南人은 怨讐가 됐다. 萬若 西洋과의 條約이 成立된 後에 민암 , 목내선, 이인좌 , 정희량 , 이현일의 後孫들이 百姓의 불인(不忍)한 마음을 利用하여 槍을 들고 都城과 大闕을 侵犯한다면 올바른 선비들이 一網打盡될 것이다"라고 主唱하여 이들의 復權 輿論을 끝까지 反對하여 霧散시켰다. 그 뒤에도 崔益鉉과 金平默은 南人과 李麟佐의 亂 關聯者들의 復權을 決死 反對하였다. 結局 尹鑴, 이현일 等은 金平默과 崔益鉉이 모두 죽은 뒤 1907年 (隆熙 2年)에 가서야 福券된다.

開港, 開化 反對 運動 [ 編輯 ]

閔氏 政權과의 葛藤 [ 編輯 ]

崔益鉉은 곧 外國과의 通商을 論議하기 始作한 閔氏 政權과도 곧 摩擦을 빚었다. 1876年 江華島條約 反對에서 加一層 浮刻되었다. 도끼를 메고 光化門에 나아가 開港을 해서는 안되는 다섯가지 理由를 적어 個項誤不可(開港五不可)의 5組(條)로 된 '病者斥和所'(丙子斥和疏)를 올렸다. 그는 그의 머리를 치고 가야 通商할 수 있다며 反對하였다. 斥邪疏에서 그는 條約締結의 不可함을 力說하였다. 日帝의 强壓과 政府의 修交方針을 正面으로 反對하는 것으로 그 무렵 모든 開港反對上疏 中에서도 가장 잘 지은 內容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 上疏는 外面되었고, 그는 日本 과의 通商 條約 締結을 極烈 反對하다가 이番에는 黑山島 에 同性愛者들과 4年間 圍籬安置된 것이다.

崔益鉉이 反對한 開港 後의 事態는 開花, 主和派들의 主張과는 달리 近代文物을 앞세운 日制를 비롯한 列强의 侵略으로 나타나 그의 豫見은 的中한 것이었다. 特히 外國 資本의 浸透와 經濟的 進出은 農村經濟를 破綻으로 몰아갔고 그에 더하여 政治的, 軍事的 侵略이 强化되어 傾向(京鄕)의 百姓이 政府의 開化施策을 批判하는 속에서 衛正斥邪의 排日運動이 政界의 主流를 이루게까지 되었다. 1879年 釋放되어 故鄕으로 되돌아갔다.

以後로 通商 擴大와 여러 外勢의 流入이 繼續되면서 崔益鉉은 이에 結社 抵抗하는 衛正斥邪論 의 巨頭로 活動하게 된다. 1894年 發生한 東學農民運動 과 그해 親日 政權 成立과 함께 斷行된 甲午改革 에 크게 反撥했고, 이듬해 乙未事變 斷髮令 을 契機로 義兵을 組織했다가 逮捕되었다. 이 當時 그가 上疏를 올리며 적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라는 말은 强制的 斷髮令에 목숨을 걸고 反撥했던 當時 儒學者들의 뜻을 含蓄한 表現이었다.

甲午更張 反對 運動 [ 編輯 ]

崔益鉉은 繼續 西歐 文物의 流入을 나라를 타락시키는 原因으로 規定, 拓士運動에 앞장서 國民의 自主意識을 高調시키고 外勢依存勢力을 糾彈하여 마지 않았다. 1894年 甲午更張 이 斷行되자 外勢의 內政 干涉은 不當하다며 聲討하였다. 이어 斷髮令 이 施行되자 '청토易服醫提訴'(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外勢의 內政干涉이라며 糾彈하였다. 甲午更張 乙未改革 에 反撥하여 各地에서 義兵이 蹶起하자 그는 高宗 으로부터 甲午, 乙未年의 義兵抗戰에서는 各處에서 蜂起한 義兵을 解散시키라는 線柳委員(宣諭委員)에 任命되었으나, 그는 도리어 '津灰待罪소'(陳懷待罪疏)를 올려 義兵들을 "모두 忠誠과 義理를 앞세운 百姓들"이라 일컬어 거의救國의 正當性을 밝혔다. 그리고 이들의 正當한 擧兵을 解散, 彈壓할 理由가 없다며 抗拒하였다.

1895年 乙未事變 때에도 各處에서 義兵이 發生, 朝廷에서는 그에게 宣諭使의 職責을 내려 義兵의 解散을 促求하게 하였으나 解散 說得을 抛棄한다.

斷髮令 反對 運動 [ 編輯 ]

1895年 12月 30日 ( 陰曆 11月 15日 ) 斷髮令 이 施行되자 '身體髮膚는 수지부모요 不感毁傷'이라는 理由로 斷髮令에 反對할 것을 呼訴하였다. 崔益鉉은 儒林 巨頭들과 連名하여 斷髮令 은 野蠻的인 行態라며 糾彈했다.

그러나 當時 內部 代身 유길준 等은 斷髮令을 斷行하였다. 1896年 初, 儒生들의 單發 反對 上疏가 빗발쳤다. 이에 유길준 은 儒生들의 示威의 背後로 崔益鉉의 逮捕를 指示한다. 兪吉濬은 儒生들의 單發에 앞서, 儒林들과의 몸싸움도 不辭하고 최익현 逮捕를 위한 巡檢 1個 部隊를 보냈다. 그는 斷髮令 反對 輿論을 主導하던 崔益鉉을 京畿道 抱川郡 영평 에서 逮捕하여 投獄시켰다. 以後 兪吉濬은 儒生들에 對한 斷髮을 敢行하다. 兪吉濬은 直接 최익현에게 告示文을 보이면서 法令대로 斷髮을 强行하겠다 하자, 崔益鉉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叱咤하며 몸부림쳤다. 유길준 은 가위를 들고 와서 崔益鉉의 머리카락을 削髮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頑强하게 몸부림쳐서 兪吉濬의 削髮 祈禱는 失敗하고 만다.

獨立協會, 萬民共同會 批判 [ 編輯 ]

그는 獨立協會, 萬民共同會에 對해 政府의 大臣들에게 不當한 壓力을 行使할 可能性이 있다고 보았다. 어떤 무리들이 自身의 利益을 얻고자, 政府 官僚에게 壓力을 行使하거나 謀陷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獨立協會 , 萬民共同會 를 民權黨, 民權地糖으로 規定하고 批判했다.

崔益鉉은 1898年 12月 10日 의 國內 懸案에 對한 上疏文 中 7番째 條項에 獨立協會 , 萬民共同會 革罷를 建議했고, 이들을 變亂을 助長하는 발板으로 規定했다. [3] 최익현에 依하면 ''민당'을 革罷하여 變亂의 발板을 막으소서. 臣은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는 誹謗하는 것을 써놓는 나무와 眞言(進言)할 때 치는 북이 있었으며, 朝鮮本條 (本朝)에 이르러서도 또한 儒生 들이 大闕 門에 엎드리고 成均館 (成均館) 儒生들이 示威(示威)의 表示로 成均館을 비우고 나가버린 일이 있었으니, 眞實로 百姓들로 하여금 말을 하지 못하게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限界가 있고 節制가 있어서, 차라리 情事에 對해 誹謗은 할지언정 大臣을 脅迫해서 내쫓는 일은 없었으며, 차라리 所長 을 올려 呼訴는 했을지언정 賃金을 威脅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3] '라 하였다.

그는 獨立協會 , 萬民共同會 의 모임에 對해서도 '이른바 '민당'이라는 것은 市政(市井)의 無識한 무리들을 불러 모은 것으로서, 苟且하게 牌거리를 糾合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名分을 빌려서 代身(大臣)들을 멋대로 命하여 오라 가라 하고 임금을 指摘하여 탓하며 나라의 政丞을 凌辱하였습니다. 밤낮으로 저들끼리 結託하여 高喊을 지르며 威嚴을 보이고 生色을 내는 것이 宏壯하여 그 氣勢가 무서울 程度입니다 [3] '라고 指摘했다. 崔益鉉은 集會가 暴力示威로 變質할 憂慮가 있다는 點도 같이 指摘하였다.

그는 또 '더욱 甚한 字 몇 사람을 다스리고 나머지는 法司(法司)로 하여금 解散시켜 보내도록 하며, 서둘러 情事와 刑罰을 밝히고 敎化를 힘껏 施行해서 百姓들로 하여금 ‘賃金이 果然 우리를 속이지 않고 眞實한 마음과 實質的인 情事로 始終如一하는구나.’라고 分明히 알게 한다면, 무엇 때문에 百姓들이 安定되지 않을까 근심하겠습니까 [3] '라 하였다. 崔益鉉은 利權團體가 사사로이 利益을 챙기는데 政府 官吏들에게 壓力을 行使할 수 있다는 點과, 利權團體가 國民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속일수 있다고 보았다.

崔益鉉은 1898年 12月 10日 의 懸案 上訴의 7番째 條項에서, 高宗에게 다른 이들을 시켜서 獨立協會 , 萬民共同會 를 解散할 것을 같이 進言한다. '只今 듣건대, 聖上께서 奮發하시고 큰 決斷을 내리시어 모두 除去하신다고 하니, 眞實로 더할 나위 없는 多幸입니다. 그러나 그 뒤를 잘 處理하지 못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지 못할까 두렵다'며 高宗 이 直接 獨立協會 , 萬民共同會 를 解散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惡役으로 내세워 이들을 解散시킬 것을 强調했다.

白丁 박성춘의 演說을 그는 못마땅히 여겨 牌거리들의 作黨으로 規定, 批判하였다.

大韓帝國 樹立 以後 [ 編輯 ]

1898年 (光武 1年) 宮內府 特進官 (宮內府特進官)에 除授되어 入闕하고, 이어 中樞院 議官(中樞院議官)을 거쳐 議政府 撰定 (贊政)李 되었다. 그해 京畿道 觀察使 에 任命되었으나 辭退하고 故鄕으로 내려가 後進敎育에 盡力하였다.

그는 學問 硏究와 後學 養成을 통해 衛正斥邪論의 電波를 推進했다. 世上이 混亂한 것은 人倫과 道德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라 굳게 確信하고 正論과 정학의 守護를 위해서 그는 敎育의 重要性을 力說하였다. 그 뒤 러일戰爭 의 勃發과 日帝의 軍事的 國權侵奪을 報告書는 '闕外臺名所'(闕外待命疏)를 올려 外勢의 剔抉과 國權守護의 方策을 力盡하였다.

1904年 러일戰爭 이 터지고 日本의 侵略이 露骨化되자 高宗 의 密旨를 받고 上京, 王의 諮問에 應하였고 日本으로부터의 次官(借款) 禁止, 外國에 對한 醫負心(倚附心) 禁止 等을 上疏하고, 漢城府 거리에서 當時 內閣 擔當者들을 糾彈, 이들의 罷免과 處斷을 强力히 要求하다가 두 次例나 日本 憲兵들에 依해 鄕里로 압송당하였다.

乙巳勒約 反對 運動 [ 編輯 ]

1905年 乙巳勒約 이 締結되었다. 그는 이를 勒約으로 看做, 反對 運動을 展開하였다. 崔益鉉은 乙巳勒約의 늑결을 나라의 滅亡으로 看做, 條約 締結 當事者 5名의 處斷을 主張, '청토誤適所'(請討五賊疏)와 '創意土賊소'(倡義討賊疏)를 올려 不法 條約의 廢棄, 取消와 義兵抗日戰을 闡明하였다. 또한 8度 社民(士民)에게 布告文을 發表하여 抗日鬪爭을 呼訴하였으며, 布告文과 新聞을 통해 納稅 拒否, 鐵道 利用 안 하기, 一切의 日本 商品 不買運動 等을 促求하였다.

그러나 上疏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忠南 紅紬衣 儒學者 민종식(閔宗植)李 構成한 義兵陣과 連帶, 共同抗爭할 湖南義兵眞意 編成으로 나타났다. 崔益鉉은 1906年 1月에 忠淸南道 魯省(魯城) 闕理事(闕里祠)에서 遠近의 儒林을 모아 講演을 열고 時局의 切迫함을 알리며 一致 團結해서 國權回復에 同參해 줄 것을 促求하였다. 이때의 모임에는 1896年 晋州義兵陣에서 活躍했던 慶南 陜川의 名儒 礙産(艾山) 정재규(鄭載圭)가 10餘名의 支社들과 함께 參席하기도 하였다. 堤川에서는 柳麟錫 等도 擧兵하였다.

1906年 2月, 自身의 門下生이자 이미 獨立하여 全北 태인의 종석산(鍾石山) 밑에 寓居하며 後學을 養成하던 임병찬(林炳瓚)을 찾아가 具體的인 擧事 計劃을 樹立하였다. 擧事 場所는 태인의 茂盛書院(武城書院)으로 定한뒤, 崔益鉉은 潭陽의 용추사(龍湫寺)로 내려가 기우만(奇宇萬), 이항선(李恒善), 腸諸稅(張濟世), 조안국(趙安國) 等 湖南의 名儒知事 50餘名을 召集, 이들과 會同하여 抗戰 方策을 論議하고 113名에 達하는 支社들의 延命否認 '同盟錄(同盟錄)'을 作成하는 한便, 順天, 落雁(樂安), 흥양, 麗水, 돌山, 光陽, 長興, 寶城, 康津, 海南, 莞島 等 湖南 고을마다 檄文을 보내 外勢를 剔抉하고, 腐敗한 官僚들을 處斷할 目的으로 擧兵함을 밝히고 良心的인 支社들은 同參할 것을 促求하였다. 한便 義兵의 軍律(軍律), 衣服制度(衣服制度), 規則(規則) 等을 作成하고, 林秉瓚이 主管이 되어 武器를 비롯한 各種 軍備를 마련하였다.

義兵 活動과 最後 [ 編輯 ]

義兵 蜂起 [ 編輯 ]

1905年 乙巳條約 締結을 契機로 그는 公開的으로 義兵을 募集하였다. 임병찬 , 임落 等과 함께 全羅北道 井邑 에서 擧兵하였으나, 곧 官軍에게 敗하여 逮捕되었고 對馬島 에 流配된다. 1906年 6月 4日 아침 崔益鉉은 최제학(崔濟學), 고석진 (高石鎭) 等 文人 數十名을 거느리고 茂盛書院에 到着, 講會를 연 뒤 擧事를 일으켰다. 그때 그는 悲痛한 눈물을 흘리면서 死生을 盟誓하였다.

倭敵이 國權을 빼앗고, 積薪이 罪藥을 빚어냈다. 구신(舊臣)인 나는 이를 차마 그대로 둘 수 없어 力量을 헤아리지 않고 이제 大義를 滿天下에 펴고자 한다. 勝敗는 豫測할 수 없으나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면 반드시 하늘이 도울 것이다.

1906年 6月 4日 崔益鉉의 湖南義兵津이 茂盛書院에서 거의韓 當日에 태인 본읍으로 進軍한 뒤 鄕校에서 暫時 有進할 때에 發表된 崔益鉉의 <期日本政府서(奇日本政府書)>를 發表하였다.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性(性)이라 하고 信義를 지키고 義理를 밝히는 것은 道(道)라고 한다. 사람으로 이 城이 없으면 반드시 죽고 나라에 이 道가 없으면 반드시 亡한다. 이것은 다만 老生의 犯談일 뿐만 아니라 또한 開化熱國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버리면 아마도 世界 안에 自立하지 못할 것이다. ...(中略)... 이제 于先 歸國(日本)李 信義를 저버린 罪를 論한 다음에 歸國이 반드시 亡하게 되고 東洋의 畫家 그칠 때가 없게 되는 理由를 밝히고자 한다.

이어 그는 江華島 條約이 不法임을 宣言하고, 江華島條約 締結 以來 朝鮮에 對해 '基醫背信'(棄義背信)한 日帝의 罪狀을 16가지로 나누어 條目條目 論述하여 韓日 兩國을 위해, 나아가서는 東洋平和를 위해 日帝의 覺醒을 促求하였던 것이다.

그의 擧兵에 弟子 文人들과 이날 모인 모든 會衆(會衆)李 흔연히 死生을 盟誓하니, 崔益鉉은 죽음으로써 國家의 恩惠를 갚을 것을 闡明하였다. 그 卽時로 80餘名이 隊伍를 編成한 뒤 態인 본읍을 向해 行軍을 開始하였다.

義兵 戰爭 [ 編輯 ]

1906年 6月 中旬 최익현 義兵陣이 態인 본읍으로 進軍해 오자, 郡守 손병호(孫秉浩)는 抵抗은 엄두도 못내고 逃亡쳤다. 따라서 義兵은 無血로 태인을 占領하였고, 崔益鉉은 鄕校로 들어가 明倫堂에 坐定하고 香匠(鄕長)과 首書記(首書記)를 불러 官衙의 武器를 接受하는 한便, 軍士들을 모아 義兵陣의 戰力을 强化시켰다. 태인邑을 出發한 義兵陣은 30餘里를 行軍, 當日 下午 井邑에 當到하였다. 이어 井邑郡 官軍과 對決, 結局 井邑郡守 송종면(宋鍾冕)의 降伏을 받은 義兵陣은 이곳에서 小銃 等의 武器類와 兵力을 確保한 다음 다시 行軍, 30餘 里 떨어진 內藏寺(內藏寺)로 들어갔다. 이때 興德(興德) 선비 고석진(高石鎭)李 김재구(金在龜), 강종회(姜鍾會) 等과 함께 戰鬪力이 뛰어난 포군 30餘名을 거느리고 合流하였다.

이튿날 아침 內藏寺 뜰에서 左, 右翼을 갈라 暫時 軍士를 調鍊한 다음 30餘 里를 行軍, 地勢가 險해 天然의 要塞를 이루고 있던 구암사(龜岩寺)로 들어가 다시 陣營을 整備하였다. 구암사에서 그날 밤을 지낸 義兵陣은 다음날 첫새벽에 빗속을 行軍, 正午頃에 순창읍으로 들어갔다. 많은 住民들과 異屬들이 나와 義兵들을 歡迎하였으며, 郡守 이건용(李建鎔)은 최익현 앞에 나아가 降伏했다. 이를 전후해서 채영찬(蔡永贊), 황균窓(黃均昌), 김갑술(金甲述), 양윤숙(楊允淑) 等이 隣近 各地에서 포군을 거느리고 合流해와 義兵陣의 電力은 더욱 强化되었다.

崔益鉉은 여기서 義兵陣을 再整備하고 部署를 定해 임병찬 을 參謀長으로 하고 김기술(金箕述), 유종규(柳鍾奎), 강종회(姜鍾會), 李東洲(李東柱), 利用길(李容吉), 손종궁(孫鍾弓), 정시해(鄭時海) 等을 副將으로 各其 任命, 戰列을 가다듬었다. 이때 全州警務拷問支部(全州警務顧問支部) 所屬 警察隊가 義兵을 鎭壓하기 위해 出動하기도 하였으나 義兵은 山골짝에서 이들을 一擧에 擊退시켰다. 그 後 義兵陣은 그곳 淳昌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인 6月 8日 南原으로 進出코자 行軍, 正午 무렵 50餘 里 떨어진 哭聲에 黨도, 日帝 官公署를 撤去하고 稅錢(稅錢), 糧穀 等을 接受하였다. 그곳 郡守 송진옥(宋振玉) 亦是 義兵陣을 迎接하였고, 또 住民들도 積極 協助해 왔다. 그러나, 南原에는 이미 義兵의 攻擊에 對備, 防禦態勢가 堅固하여 後日을 期約하고 이튿날 義兵陣은 다시 淳昌으로 回軍하였다. 義兵에 合勢하려는 三防(三坊)포군 1百餘名이 구암사와 白羊寺(白羊寺)에 駐屯하고 있다는 傳喝도 왔기 때문이다.

淳昌郡守 이건용이, 義兵陣이 哭聲으로 進出한 틈을 타 全羅北道 觀察使 한진창 (韓鎭昌)에게 支援 要請을 하여 義兵 '討伐' 計劃을 樹立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陰謀를 探知한 崔益鉉은 이건용을 義理로 타일러 오히려 그를 義兵陣에 加擔토록 해서 全部長(前部長)으로 삼아 募兵業務를 管掌케 하였다. 이처럼 최익현 義兵陣은 거의 後 態인, 井邑, 淳昌, 谷城 等 湖南 各地를 行軍하면서 武器와 軍士를 모아 거의 初期에 80餘名에 지나지 않던 兵力이 이때에 와서는 9百餘名에 達했고, 그中 相當數가 小銃 等의 火氣를 所持하게 되어 戰力이 크게 增强되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重要한 點은 湖南 一帶가 최익현 義兵의 活動 以後 意氣로 가득차 義兵陣의 사기가 한層 高調되어 있었다는 事實이다.

6月 11日 아침, 光州觀察使 이도재(李道宰)는 義兵解散을 命하는 光武皇帝의 宣諭詔勅과 觀察使 告示文을 최익현에게 보내와 義兵의 解散을 慫慂하였다. 그러나 崔益鉉은 이를 斷乎히 拒絶하였다. 그러나 韓國 統監府 의 傀儡로 轉落한 政府에서는 全羅北道 觀察使 한진창에게 全北地方 鎭衛隊를 動員해 義兵을 解散시키라는 訓令을 내렸다. 한진창은 全州와 南原의 鎭衛隊를 출동시켜 6月 11日 淳昌 外郭을 封鎖하여 邑의 北쪽인 錦山(錦山)에는 全州鎭衛隊가, 東쪽인 大洞山(大同山)에는 南原鎭衛隊가 各各 布陣하여 邑內 官衙의 客觀(客館)을 中心으로 布陣하고 있던 義兵陣을 壓迫해 왔던 것이다.

崔益鉉은 처음에 이들이 日本軍인줄 알고 卽時 戰鬪態勢에 突入했었다. 그러나 얼마뒤 斥候兵의 報告로 이들이 일군이 아니라 同族인 鎭衛隊 軍事임을 알고는 同族相殘의 悲劇을 避하기 위해 鎭衛隊側에 다음과 같은 懇曲한 通牒을 보냈다.

우리 義兵은 倭敵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目的으로 싸울 뿐 同族間의 殺傷은 願치 않는다. 鎭衛隊度 다같은 우리 同胞일진대, 우리에게 겨눈 銃口를 倭敵에게로 돌려 우리와 함께 倭敵을 討滅하도록 하자. 그리함으로써 後世에 祖國을 배반했다는 汚名을 씻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錢主鎭衛隊와 남원진偉大는 崔益鉉의 이와 같은 呼訴를 默殺한 채 오히려 義兵陣의 피전(避戰)姿勢를 逆利用해 一齊히 攻擊을 加해 왔다. 義兵側은 이미 '同胞끼리는 싸워서는 안된다'고 捨生取義(捨生取義)를 決行, 應戰없는 狀態에서 猛攻을 받게 되자 中軍將 정시해가 戰死하는 等 一時에 陣營이 瓦解되고 말았다. 崔益鉉은 周圍를 돌아보며 "이곳이 내가 죽을 땅이다. 諸君은 모두 떠나라"고 하며 指揮部가 있던 淳昌 客觀 연청(椽廳)에 그대로 눌러 앉자,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者가 22名이었다. 鎭衛隊는 義兵側으로부터 아무런 抵抗이 없자 射擊을 中止하고 指揮所를 에워싼채 그대로 밤을 지냈다.

斷食과 最後 [ 編輯 ]

1906年 6月 13日 朝廷으로부터 宮內府 特進官 에서 解任되었다. 6月 14日 끝까지 남아 있던 최익현 以下 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文達煥), 임현주(林顯周), 유종규, 조우식(趙愚植), 조영선(趙泳善), 최제학, 나기덕(羅基德), 利用길, 유해용(柳海瑢) 等 13人의 醫師들은 全州로 押送되었다. 이로써 崔益鉉의 義兵抗戰은 終末을 告하였다.

6月 末 崔益鉉은 이들과 함께 다시 京城府 로 押送되어 京城 駐在 日本軍司令部에 감금당하였다. 최익현 以下 13人의 義兵將들은 여기서 그들의 審問과 懷柔를 받는 동안에도 日本의 朝鮮 植民地化 陰謀의 罪狀을 聲討하였다. 2個月間 日本軍司令部에 監禁된 끝에 崔益鉉과 임병찬은 그해 8月 下旬 日本의 쓰시마섬 엄원(嚴原) 위수영(衛戍營)으로 押送되어 監禁되었다. 그곳에는 紅酒義兵陣의 유준근(柳濬根), 移植(李式) 等 義兵 9人이 이미 함께 監禁되어 있었다.

崔益鉉은 日本 政府 側의 갖은 脅迫과 懷柔를 뿌리치고 斷食에 突入하였다. 崔益鉉은 죽음이 臨迫해지자 임병찬에게《유소(遺疏)》를 口述, 다음과 같은 餘恨(餘恨)을 남겼다.

神의 나이 75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哀惜하겠습니까. 다만 逆賊을 討伐하지 못하고 怨讐를 갚지 못하며, 國權을 回復하지 못하고 疆土를 다시 찾지 못하여 4千年 火하정도가 더럽혀져도 扶持하지 못하고, 三千里 疆土 先王의 赤字가 魚肉이 되어도 救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神이 죽더라고 눈을 감지 못하는 理由인 것입니다.

日本人들은 强制로 그의 입에 飮食을 넣었으나 모두 뱉거나 입을 열지 않고 抵抗하였다. 1906年 10月 警 그는 風症 이 發病하였다. 1907年 1月 1日 쓰시마섬 監獄에서 風症 斷食 後遺症으로 死亡하였다.

屍身의 運柩와 葬禮式 [ 編輯 ]

崔益鉉의 遺骸는 1月 5日 쓰시마 에서 배便으로 慶尙南道 東來府 초량(草梁)에 닿았다. '春秋大義 일월苦衷'(春秋大義 日月孤忠) 8者의 萬張(輓章)을 앞세운 그의 永久(靈柩)는 年度에 수많은 人波가 늘어서 哀悼하는 가운데 구포, 星州, 황간, 公州 等地를 거쳐 1月 20日 靑陽의 本家에 到着, 무동산(舞童山) 기슭에 묻혔다. 1907年 論山郡 상월면의 國道邊에 安葬했다가 뒤에 禮山郡 관음리로 移葬했다. 文集으로는 《면암집》, 勉庵續集 等이 있다.

事後 [ 編輯 ]

著書 [ 編輯 ]

  • 《면암집》
  • 《勉庵續集》

思想과 信念 [ 編輯 ]

崔益鉉의 衛正斥邪論은 어디까지나 性理學을 바탕으로 하고 中華思想의 테두리 속에 머물러 있어 中國으로부터의 完全 離脫이나 性理學的 倫理秩序의 改造란 容納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開化된 日本도, 禽獸視(禽獸視)하는 西歐 各國과 다를 바 없었으며, 또한 그는 東學 農民 運動 의 農民軍과 東學徒들을 盜賊이라 批判하였다. 그에 依하면 傳統的 王朝 秩序를 뒤흔들려는 東學(東學)도 '동비'(東匪)로밖에 看做되지 않았다.

高宗 卽位 直後부터 나온 정도전 , 南袞 , 정인홍 , 한효순 , 尹鑴 , 이현일 等의 復權 輿論이 나오면, 同門이자 親舊 김평묵 과 함께 번번히 決死 反對하여 좌절시켰다. 이들은 그가 죽은 直後인 1907年 (隆熙 1) 純宗 卽位 後 復權되었다.

또한 그는 大韓帝國 의 樹立을 反對하였다. 朝鮮의 國王이 大韓帝國(大韓帝國)의 '皇帝'(皇帝)로 格上되는 것을 옳게 여기지도 않았다.

平等社會를 反對한 理由 [ 編輯 ]

崔益鉉은 平等 思想에 對해 反對하였다. 그가 平等社會를 反對한 理由는 富와 權力, 社會的 地位를 위해 서로 赤裸裸하게 競爭하는 淺薄한 平等社會가 될 可能性이 높다고 展望했다. 崔益鉉은 普通 사람들이 모든 것을 차지하고 또 韓國이 漸次的으로 富, 權力, 社會的 地位를 위해 서로 赤裸裸하게 競爭하는 淺薄한 平等社會로 向해가고 있다는데 對해 깊은 憂慮를 나타내고 있었다. [6]

議會 設置와 民權黨 反對 理由 [ 編輯 ]

그는 獨立協會 를 民權黨으로 보았다. 그가 民權黨을 反對하는 理由로는 國會나 議會에서 民權黨, 民權運動을 하는 무리들이 政府 高位層, 官僚에게 壓力을 주어, 自身들의 사사로운 利益을 챙길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가 國會, 議會를 反對하는 理由는 이런 特定한 무리들이 政府 官僚들에게 壓力을 行使하는 것을 그 理由로 들었다. 崔益鉉은 '本人은 外國에는 所謂 自由議員(自由議員)과 國民의 權利를 위한 民權黨(民權黨) 또는 民權至當(民權之黨) 이 있으며, 國民이 그들의 指導者를 自發的으로 選出하는 實例가 있다고 들었다. 이들 政黨員(黨人)들이 이미 그들의 政府 代身(大臣)들을 되풀이해서 脅迫하고 逐出해낸 일이 여러番 있었은즉, 그들은 目的達成을 위해 그 어떤 일을 망설이겠는가? 이들 追從者들이 나라에 對한 眞正한 忠誠心과 祖國愛를 지니고 있다고 假定할지라도 그들을 道理(道理) 로 생각할 때에 우리들은 그들이 自己네의 計劃들을 持續하게끔 放置할 수 없다. [6] '고 하였다.

崔益鉉은 特定 勢力이나 個人이 政府의 高位層에게 壓力을 行使하거나 利權을 要求하거나 할 것을 내다보았다. 崔益鉉은 '더군다나 그들은 아무렇게나 모여든 새들의 무리와 같고, 紀律(紀律)없는 暴徒들과 같다. 그들이 어떻게 國家를 統治하는 올바른 길을 알 수 있겠는가,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脅迫한 그들의 罪는 어떻게 容恕받을 수가 있겠는가? [6] '라고 指摘했다. 그는 이런 利權請託이나 要求를 一種의 脅迫으로 보았다.

獨立協會 에 對해서는 上疏文에 市政(市井)의 無識한 무리들을 불러 모은 것으로서, 苟且하게 牌거리를 糾合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名分을 빌려서 代身(大臣)들을 멋대로 命하여 오라 가라 하고 임금을 指摘하여 탓하며 나라의 政丞을 凌辱한다고 批判하기도 했다. 白丁 박성춘의 演說이 있자 牌거리들의 作黨이라며 이를 批判하였다.

大院君 越權行爲 批判 [ 編輯 ]

그는 흥선大院君 을 越權行爲字로 보았다. 그가 흥선大院君 을 否定的으로 본 理由는 書院撤廢 보다는 남인 北人 黨員을 採用하는 것이었다.

國王의 生父로 執權해온 大院君의 强力政治와 越權行爲를 批判, 大院君이 남인 北人 을 登用하는 것 亦是 政事를 어지럽히는 行爲라 보고 大院君 執權 名分의 正當性이 없음을 들어 彈劾, 失脚시켰다. 이때 '鳳鳴朝陽'(鳳鳴朝陽)이란 讚辭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도 大院君 勢力의 攻擊으로부터 保護하기 위해 閑職으로 轉任되었지만 한때 '王室의 骨肉을 離間시킨' 罪目으로 2年間 濟州島에 圍籬安置(圍籬安置)되기도 하였다.

斷髮令 反對 [ 編輯 ]

그는 甲午改革 斷髮令 當時 나라가 亡하는 것이라며 抵抗하였다. '5百年 從事가 드디어 亡하니 어찌 한番 싸우지 않겠는가' 또한 '살아서 怨讐의 奴隸가 되는 것이 어찌 忠義(忠義)의 魂이 되는 것만 같겠는가'라며 甲午更張 等에 抵抗한다. 또한 斷髮令 當時 그는 '두歌壇(頭可斷)이나 발不可團(髮不可斷)'이라는 語錄을 남기기도 했다.

農民軍 出身에 對한 反感과 疑心 [ 編輯 ]

義兵活動을 하면서 崔益鉉을 包含한 儒生들은, 儒生들과 農民들 사이의 協力에 對한 要求가 컸음에도 不拘하고, 農民들에게 가졌던 敵愾心과 恐怖가 뒤섞인 업신여겨 보는 態度를 全혀 克服할 수 없었다. [7] 崔益鉉은 農民 出身들의 殘忍함과 好戰性, 殺人, 도둑질, 無禮함을 極度로 嫌惡하였다. 정재식은 이를 두고 '崔益鉉은 '殺人的이고 도둑질을 恣行하는 農民 무리들 을 反對하며'라는 激烈한 글에서 보인, 16世紀 獨逸의 "危險하고, 해로우며, 極惡無道한 農民叛亂者들을" 남모르게 或은 公公然하게 치고, 죽이고, 찌르라" 主張한 마틴 루터 (Martin Luther)가 보였던 感情的인 反應과 비슷한 反應 [7] '이라 評하기도 했다.

기타 [ 編輯 ]

  • 그는 그의 스승 李杭魯 의 道德的 原理를 實現하고자 하는 斷乎한 面貌가 있었다. [8]

家計 [ 編輯 ]

  • 長男 : 최영조(崔永朝)
  • 次男 : 최영학(崔永學)
  • 三南 : 최영복(崔永福)
    • 玄孫 : 최창규(1937~ 前 서울大 政治學과 敎授)

關聯 文化財 [ 編輯 ]

寫眞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崔益鉉을 演技한 俳優들 [ 編輯 ]

各州 [ 編輯 ]

  1. 《對馬島日記》
  2. 《東亞日報》 새로 쓰는 선비론 (21) - 勉庵 崔益鉉 Archived 2007年 2月 17日 - 웨이백 머신 (1998.3.5)
  3. 고종실록 38卷, 1898年(高宗 35年, 對한 光武(光武) 2年) 12月 10日 陽曆 2番째記事, 崔益鉉이 施行해야 할 事項을 갖추어 上疏를 올리다
  4. 禮山郡靑, 崔益鉉 先生 墓 Archived 2007年 9月 27日 - 웨이백 머신
  5. 東亞日報 1928年 5月 11日子 2面, 社會面
  6. 정재식, 《意識과歷史: 韓國의 文化傳統과 社會變動》, (一潮閣, 1991) 266페이지
  7. 정재식, 《意識과歷史: 韓國의 文化傳統과 社會變動》, (一潮閣, 1991) 264페이지
  8. 정재식, 《意識과歷史: 韓國의 文化傳統과 社會變動》, (一潮閣, 1991) 258페이지

參考 書籍 [ 編輯 ]

  • 최익현, 《면암집》(民族文化推進會, 1978)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