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직
(林炳稷,
1893年
10月 26日
~
1976年
9月 21日
)은
大韓民國
의
獨立運動家
利子 軍人이며 政治家 兼 外交官이었다.
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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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
의 美國에서의 外交 獨立運動 當時 側近으로 補佐하던 人物 中의 한사람이었으며 그가 還國한 後에는
大韓民國 臨時政府 歐美委員部
委員과 議長을 맡아서 活動하였다. 臨時政府 陸軍 大領과 外務部長官, 駐유엔 大使와 主人도 總領事를 歷任했다. 號는 소죽(小竹). 本貫은
羅州
(羅州)이며
忠淸南道
扶餘郡
出身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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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涯 初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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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연상(林淵相)의 아들로 태어났고 동생으로 임병설(林炳卨)이 있었다. 寶城中學校를 卒業하고
官立外國語學校
로 進學하였다.
1913年
,
李承晩
의 周旋으로
美國
으로 건너왔으며
드와이트 무디
가 設立한 마운트 허먼 스쿨과
오하이오
大學校
를 다녔다. 李承晩은 美國
遊學
을 하려던 임병직에게 다음과 같은 助言을 해주었다.
[1]
“
|
자네가
샌프란시스코
에 到着하면
韓人
들이 많이 살고 있어 좀처럼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에 오래 있게 되면 必是 工夫할 意欲을 잃게되고 그리되면 美國에 온 보람이 없게 된다. 그러니 그곳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말고 바로 마운트 허먼 學校로 直行하라
[1]
|
”
|
大學在學 中, 雜誌 「韓國學生評論」을 創刊하여 編輯長으로 活動, 韓國의 獨立活動을 寄稿하며 韓國의 事情을 呼訴하였다.
獨立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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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의 재미韓人僑胞 大會 書記長을 지낸 뒤 3.1運動推進會를 組織했고, 以後
李承晩
의 祕書 兼
歐美外交委員部
委員으로 獨立運動에 活躍하면서
日王
에게 韓國의 獨立을 承認하라는 李承晩의 親書를 日本 公使館에 傳達하기도 하였다.
1919年
8月
,
大韓民國 臨時政府 歐美外交委員部
委員으로 任命되었고,
9月
에는 臨時政府 初代 大統領
李承晩
의 祕書官을 지냈다. 臨政 歐美委員部 委員으로 活動하며 美國 19個 都市에 韓美親友會의 組織을 支援하였다.
하와이에 位置한
葬儀社
윌리엄 보스윅(William Borthwick)의 相助會社.
1920年
말,
李承晩
과 함께
하와
이에서
相助會社
를 運營하던 윌리엄 보스윅(William Borthwick)의 周旋으로
日本
을 거치지 않고
傷害
로 直行하는 中國人 屍體가 담긴 管을 運送하는 배를 타고 마침내 上海에 到着하였다.
[2]
以後 李承晩이 彈劾된 後에도 李承晩과 함께 活動하며 그가 하와이에 세운 韓人中央學院, 韓國基督學院 等에서 敎育活動을 하였다.
1919年
3月 1日
, 國內에서
3·1萬歲運動
이 일어나자 日帝의 虐殺과 拷問 等의 蠻行을 國際社會에 알리고 獨立運動 資金을 募金하는 等의 活動을 하였다.
1921年
,
李承晩
을 終身總裁로 하는
同志會
가 設立되자 同志會에 入團하여 團員이 되었다. 以後 生計를 위해 日本 製品인 阿只老母徒 等의 化粧品을 輸入해서 販賣하는 化粧品 販賣員으로 生計를 維持하면서 臨政 歐美委員部에 資金을 送金하였다.
1943年
, 歐美委員部 武官이 되고, 1945年, UN 創立總會에 옵서버로 參席하고 돌아왔다.
光復 以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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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復과 歸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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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年
10月
,
李承晩
還國 後
워싱턴
에 있는
歐美委員部
를 맡아서 活動하다가
大韓民國 臨時政府
歸國 後에 陸軍 大領
[3]
에 任命되어 歐美委員部 委員長을 겸하였다.
政治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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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國 後인
1948年
12月
, 外務部長官에 任命되었다. 外務部長官으로 在職하던 1950年 6月,
韓國 戰爭
을 맞았다. 그는 總務處長
전규홍
(全奎弘)으로부터 "38線 動向이 受賞하며 아마 全面南侵人 것 같다"는 戰爭 勃發 消息을 듣고 "이제 올 게 왔구나"라고 생각했다.
[4]
마치 豫想한 듯한 反應이었다.
[5]
1950年 末,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第5次
國際聯合 總會
에 韓國 代表團長으로 參席하였다. 代表團은 임병직 外에도
場面
,
장택상
,
金東聖
,
임영신
으로 構成되었다. 또한 1951年에도 亦是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第6次
國際聯合 總會
에 韓國 代表團으로서 團長
場面
,
장택상
,
이묘묵
,
전규홍
,
안捐生
과 함께 參席하였다.
[6]
韓國 戰爭
中 歸還하며 戰時內閣에서 活動하다가 駐유엔 代表部大使
[7]
를 거쳤다. 1952年 第7次
國際聯合 總會
에 韓國 代表團으로서 團長
변영태
,
양유찬
,
한표욱
,
이재항
,
서재식
,
전상진
과 함께 參席하였다.
[6]
1954年 4月부터 7月까지 제네바에서 열린
제네바 政治會議
에 大韓民國 代表團
[8]
의 一員으로 參席하였다.
[9]
生涯 後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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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軍政 때
朴正熙
에 對한 支持를 宣言했다. 以後 再建國民運動 本部長을 거쳐 1966年 主人도 總領事로 赴任, 在職 中
중앙대학교
에서 名譽 法學博士를 받았다. 歸國 後
國土統一院
拷問, 海外線前問題 硏究會 名譽會長을 거쳐 1974年 3月부터 9月까지
韓國自由總聯盟
의 前身인 韓國反共聯盟 理事長을 지내기도 했다.
1976年
9月 21日
,
美國
뉴욕州
뉴욕 市
에 滯留 中 死亡하였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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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後 國立墓地 獨立有功者 墓域에 安葬되고
1976年
그의 功勳을 기려
建國訓長
대한민국장이 追敍되었다.
忠淸南道
扶餘郡
초촌면
응평리에 追慕碑가 세워졌다.
著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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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臨政에서 印度까지》 : 임병직 回顧錄 (여원사, 1964)
- 《임병직 大使 外交演說 選集》 (문화춘화사, 1958)
學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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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譽 博士 學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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賞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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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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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祖父 : 임휘수(林徽洙)
- 父親 : 임연상(林淵相)
- 叔父 : 임준상(林浚相)
- 否認 : 昌原 黃氏(昌原 黃氏)
- 否認 : 全州 李氏(全州 李氏), 再婚
- 동생 : 임병설(林炳卨)
- 조카 : 임윤영(林胤英, 1925年 11月 2日 京城府 出生. 外交官 兼 政治가. 國務總理 祕書室 室長, 타이 駐在 大韓民國 大使, 外務部 本部 大使 歷任.)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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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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