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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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李商在
大韓帝國 의 議政府 總務局 局長
任期 1897年 10月 12日 ~ 1898年 1月 31日
君主 高宗

身上情報
出生日 1850年 10月 26日 ( 1850-10-26 )
出生地 朝鮮 忠淸道 한산군 한산면 종지리
死亡日 1927年 3月 29日 ( 1927-03-29 ) (76歲)
死亡地 日帝 强占期 朝鮮 京城府 재동 貰房에서, 午前 5時에 老患 合倂症으로 인하여 兵士
國籍 大韓帝國
學歷 漢學 數學
經歷 新幹會 會長 兼 代表最高委員
正當 新幹會
父母 아버지 이희택(李羲宅)
어머니 密陽 朴氏 否認(密陽 朴氏 夫人)
配偶者 初配 장순재(本貫은 목천 )
計杯 江陵 劉氏
子女 李承潤(長男)
이승인(次男)
이승준(三南)
이승간(사남)
이세련(次女)
親姻戚 이희진(伯父)
이홍직 (孫子)
李承雨(族姪)
宗敎 儒敎 ( 性理學 ) → 改新敎
웹사이트 이상재 - 獨立有功者 功勳錄
賞勳 建國訓長 大統領章,1962年

이상재 (李商在, 1850年 10月 26日 ~ 1927年 3月 29日 )는 大韓帝國 議政府 總務局長 職責을 지낸 政治家이다. 忠淸南道 舒川郡(태어날 當時에는 한산군)出身으로 高麗 時代 學者 兼 政治가 異色 의 後孫이다. 朝鮮 後記, 大韓帝國 의 政治人으로 開化派 運動家였으며, 日帝强占期 朝鮮 時代 의 敎育者, 靑年運動家, 獨立運動家이자 政治人, 言論人이다. 字는 계호(季皓), 雅號는 越南(月南)이다. 本貫은 閑散 이다.

履歷 [ 編輯 ]

그는 1867年 過去에 落榜한 後 박정양 의 個人祕書로 關係에 投身하였으며 1881年 日本 을 視察, 開化 思想을 接하였다.

歸國 以後 開化派 官僚로 活動하다가 甲申政變 에 連累되어 官職에서 辭退하였다. 政治的 스승인 박정양 의 沒落 以後 故鄕에서 隱居하다가, 美國公使館 2等 書記官 으로 赴任하였다. 以後 朝鮮 을 屬國으로 여기고 外交에 介入한 淸나라 使臣을 물리치고 直接 外交의 길을 열었다. 歸國 以後 獨立協會 , 萬民共同會 에서 民衆 啓蒙運動을 하였다.

그러나 1899年 11月 獨立協會 , 萬民共同會 는 强制 解散되고, 1902年 개혁당 事件 에 連累되어 投獄되었다가 풀려났으며 韓日竝呑 以後에는 官職을 辭退하였다. 1905年 以後에는 윤치호 와 함께 YMCA 를 指導하였으며, 1919年 3·1 萬歲 運動 에는 參與를 拒否하였으나 關聯者로 指目되어 連行되기도 했다. 以後 敎育과 靑年의 啓蒙, 覺醒을 力說하는등 1920年代 中盤 朝鮮日報 社長과 新幹會 活動하였다. 個人的으로 財物에 欲心을 부리지 않았고, 傳貰房을 轉轉하였다. 그는 後日 大韓民國의 大統領 을 歷任한 李承晩 의 政治的 스승 中의 한사람이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宣祖 목은 異色
9代 幇助 이산해

이상재는 1850年 10月 26日 忠淸南道 舒川郡 (當時 한산군) 한산면에 살던 繕工監 假監役(繕工監假監役)을 지낸 [1] 이희택(李羲宅)과 密陽 朴氏의 아들로 出生하였으며 典型的인 선비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高麗 末의 學者 異色 의 後孫으로, 異色 의 長男 이종덕(李種德)의 15代孫이었다. 13代 幇助人 耳介 (李塏)는 死六臣 의 한사람으로 斷種 復位 擧事에 加擔했다가 失敗하고 處刑당하기도 했다. 또한 12代 幇助人 이계전의 後孫 中에는 朝鮮 중기의 哲學者 土亭 李之菡 과 畫家 이산보 , 宣祖 領議政 을 지낸 이산해 가 排出되기도 했다.

그의 집안은 代代로 벼슬살이를 하다가 5代祖 이익태(李益泰)는 漢城副左尹, 高祖父 이덕한(李德漢)李 私馬를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다시 아버지 이희택이 繕工監 의 假監役으로 出仕하여 官職에 나가게 되었다. 어릴 적 이름이자 者(字)는 戒護(季皓)이고 成人이 된 뒤 이름을 商才(商在)로 바꾸었으며 雅號를 越南이라 하였다.

幼年期와 少年期 [ 編輯 ]

비록 집은 가난했지만, 學問이 있는 선비 집안답게 배움 을 重要하게 생각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影響으로 이상재는 어려서부터 漢學 을 工夫하였다. 계몽사에서 펴낸 어린이 그림偉人傳記 《李商在》에 依하면, 場을 보시던 할아버지가 生活費를 孫子의 冊값으로 쓰셨다는 逸話(에피소드)가 나올 程度로 배움을 尊重하는 집안이었다.

어려서 漢學을 修學하다 書堂을 다니고, 1864年 (高宗 1年) 早婚 風習에 따라 3年 年上인 목천 張氏와 結婚하였다. 할아버지 이경만이 別世하여 先山에 安葬되었으나, 그의 先山이 參議 를 지낸 金氏 집안 先山과 境界 摩擦로 아버지 이희택이 投獄되었다. 新婚期間 中 6寸 兄 李敬載에게 아버지 희택의 投獄 消息을 듣고 한산군에 달려가 아버지를 代身하여 獄살이를 하겠노라 郡守에게 請하여 아버지 희택을 석방시키고, 自身이 代身 投獄되었다가 풀려난 일이 있을만큼 이상재는 義理있는 靑年이었다.

過去 落榜과 開化派 [ 編輯 ]

過去落榜 [ 編輯 ]

어려서부터 學問 을 修鍊한 이상재는 18歲에 過去 에 凝視하였으나, 兩班 들의 緣줄과 人脈으로 過去 合格者를 定하는 賣官賣職行爲으로 落榜하였다. [2] 以後 過去를 斷念하고 故鄕으로 내려가 農業 에 從事하면서 隱居하였다.

開化派 박정양과의 만남 [ 編輯 ]
박정양, 1888年

漢城 에서 우연한 機會에 그는 박정양 (朴定陽)을 만나 그와 사귀게 되었다. [3] 그와 時局을 論하면서 腐敗한 官僚, 賣官 매직, 民生 改革案 等에 對한 意見이 一致하였고 박정양 은 一介 平民인 그의 識見에 歎服하였다. 그러나 人脈과 緣줄로 科擧 合格者를 定하는 不正한 風土를 慨歎, 落鄕하여 世上을 등지고 살고자 하였으나 親族 杖直(長稙)의 勸誘와 박정양 의 付託으로 當時 承旨 였던 박정양 (朴定陽)의 집에서 1880年 까지 個人 祕書 일을 보았다.

承旨 박정양 의 個人 祕書 로 일한 經驗은 李商在 先生이 世上 돌아가는 理致와 國內外 情勢에 對한 知識 을 쌓기 始作한 時期였다. 朝廷의 信任을 받는 젊은 선비 利子 開化派 知識人 인 박정양을 만난 事件은 이상재의 一生에 決定的인 影響을 주었다. 當時 朴定陽은 엉뚱하리만치 個性이 剛한 靑年 李商在를 아껴서,자주 불러다가 을 마시며 討論 하였으므로 [4] 李商在가 自身만의 思想을 만드는데 影響을 주었다.

靑年 時節 [ 編輯 ]

日本 留學과 歸國 [ 編輯 ]

1881年 朴定陽이 日本 視察 目的으로 朝鮮 朝廷에서 構成한 紳士遊覽團 의 한 사람으로 選拔되어 日本 에 갈 때 그의 隨行員이 되어 日本으로 건너가 同行하였던 김옥균 (金玉均), 홍영식 (洪英植), 조준영 (趙準永), 어윤중 (魚允中) 等의 開化派 知識人들과 깊이 사귀었다. 이들의 隨行員으로는 美國 留學經驗이 있는 知識人인 유길준 (兪吉濬), 윤치호 (尹致昊), 고영희 , 안종수 (安宗洙) 等 26名이 李商在와 함께 따라갔다.

이때 그는 저녁에 閑暇한 時間에 日本 의 都心 繁華街를 다니며 新興文物과 社會의 發展賞을 보고 크게 衝擊을 받았으며, 朝鮮 社會 亦是 個項이 必要하다는 視角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함께 留學生으로 派遣된 홍영식 等과 사귀어 親分關係를 쌓고 歸國한 뒤 開化運動에 參加할 수 있는 素地를 마련하였다. 이때 그는 홍영식 , 윤치호 等을 만나 親分을 쌓았는데, 特히 홍영식 等과의 親分關係는 그의 官僚 生活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1884年 郵政局 總販(郵政局總辦) 홍영식 의 勸告로 郵政局 注射(主事)에 發令받아 仁川 에서 勤務하게 되었다. [3] 그해 10月 11日 에는 郵政局 社史에 任命되었다. 甲申政變 直前 그는 政變을 도왔으나, 3日만에 失敗한다. 甲申政變 의 失敗로 그는 스스로 責任을 痛感하고 官職을 辭退하고 落鄕하게 된다.

甲申 政變 以後 [ 編輯 ]

落鄕 [ 編輯 ]

1884年 12月 郵政局 의 仁川分局長에 任命되었다. 그러나 3日만에 解任된다. 그해 12月 에 開化派가 일으킨 甲申政變 이 3日天下로 失敗로 돌아가자 그도 連累者로 몰렸으나,수색 責任者인 한규설 (韓圭卨)을 만나 떳떳이 處身하고 故鄕으로 내려감으로써 處罰을 면했다. [5] 高宗 學問 이 뛰어난 그의 實力을 認定하여 地方守令職에 임명하려 했지만,자신을 政界로 이끌어준 박정양 이 流配되었으니 自身은 官職에 있을 수 없다 하며 辭退하였다.

그는 故鄕으로 落鄕하여 農事를 짓다가, 1887年 박정양 에 依해 다시 登用되었다.

美國公使館 書記官과 朝鮮의 單獨奉呈 [ 編輯 ]

1887年 박정양에 依하여 親軍營(親軍營)의 文案(文案)으로 任命되었다. 1887年 6月 朴定陽이 美國에 全權大使로 任命되자, 이상재는 美國公使館 2等 書記官 으로 遂行하여 1年餘 동안 워싱턴 D.C. 에서 勤務했다. 어린이그림偉人傳記《李商在》(계몽사)에 따르면, 越南 李商在 先生은 美國 靑少年 들이 美國公使館 2等書記官으로 일하는 外交官 人 自身에게 을 던진 無禮한 行動을 하여 警察 調査를 받게 되자, "나이어린 靑少年 들의 철없는 行動이니 容恕해달라"며 善處해줄 것을 要請했다. 이 事實을 안 父母들은 李商在 先生에게 고마워했고, 新聞 韓國 에서 온 外交官인 李商在 先生이 베푼 善行 이야기가 실렸다고 한다. 이러한 너그러운 마음은 나중에 抗日運動家로서의 理念이 되었다.

이때 淸나라 가 우리나라와 美國이 直接 外交關係를 맺지 못하도록 國서(國書)의 修交를 妨害하였으나, 이상재는 淸國公社와 談判을 벌여 直接 國書를 傳達하게 했다. 워싱턴 D.C. 에서 淸나라 工事가 國서(國書)의 奉呈을 直接 하려 하자, 淸나라 公使館 書記官과 談判하여 朴定陽이 單獨으로 奉呈하게 했던 것이다. [5] 이로써 朝鮮 個國( 1392年 ) 以後 外交關係에 있어서도 中國의 屬國化된 因習을 없애버렸다. 歸國한 뒤 淸나라 政府의 壓力으로 官職에서 물러났으나 駐韓 外交官 들의 親睦團體인 정동俱樂部 (貞洞俱樂部)의 一員으로 活動했다. [5] 落鄕하였다가 開化派 指導者들의 連絡을 받고 그는 다시 漢城 으로 上京했다.

獨立協會와 萬民共同會 參與 [ 編輯 ]

萬民共同會 [ 編輯 ]

다시 官職에 登用된 이상재는 1892年 에 典圜局 委員, 朴定陽이 內務部 獨판이 되자 1894年 承政院 右副承旨 兼 競演角 參贊官 이 되었다. 그해 學部 參事官 (學部參事官)· 法部 參事官 (法部參事官)을 거쳐 [3] 1894年 管制 改正 以後 新設된 學部 아문 參議 (學部衙問參議) 兼 學務局長을 지냈다.

李承晩
(獨立協會에서 만난 以後 이상재는 李承晩 의 政治的 스승이자, 財政的 後見人이 되었다.)

1895年 12月 甲申政變 으로 逆賊으로 몰린 서재필 이 歸國하자 그의 支持者가 되었다. 서재필 을 國際 情勢에 밝다는 理由로 大韓帝國 中樞院 의 議長, 外務部 協辦 으로 薦擧하였다. 그러나 歸國 後 美國 市民權者 를 自稱하며 朝鮮人을 冷淡하게 對하는 서재필 의 態度에 衝擊을 받고 漸次 反感을 품게 된다.

鶴舞 아문 參議 로 在職中 이상재는 이때 新敎育 制度를 創案하여 新敎育令을 頒布하고, 師範學校·中學校·小學校·外國語學校를 設立하고 外國語學校 校長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때 日本公使 이노우에(井上馨)가 外國語學校 敎師는 日本人만을 雇用하라고 强要했으나 斷乎히 拒絶하였고 [5] , 美國人 프랑스人 을 雇用하기도 했다. 1896年 國語學校 校長으로 發令되었다. [3]

1896年 2月 高宗이 俄羅斯 公使館으로 그러니까 帝政 러시아 公使館에 간 事件인 俄館播遷 으로 親日政權이 무너지자 內閣 叢書(內閣總書)와 中樞院 1等 議官(議官)李 되고, 다시 官制改編이 되자 6月 內閣의 議政府 總務局長에 올라 貪官汚吏 索出과 處罰, 監査 活動으로 腐敗, 無能한 貪官汚吏 逐出에 힘을 기울였다. 1896年 7月 그는 서재필 (徐載弼), 李承晩 , 윤치호 , 이완용 等과 獨立協會 를 組織하고 獨立協會 委員이 되어 民權運動에 投身하였으며, 大衆啓蒙集會인 萬民共同會 議長과 社會를 맡아 活動했다. 萬民共同會 가 鍾路에서 開催되었을 때 隻外(斥外)·皇權(皇權) 確立 等의 6個 條項을 議決, 두 次例 上疏文을 올렸다. 그러나 다른 뜻을 가졌을 것이라는 戚族 大臣들의 彈劾으로 16名과 함께 警務廳 에 拘禁되었으나 參政 심상훈(沈相薰)의 懇曲한 上疏로 10日 만에 釋放되었다.

獨立協會 [ 編輯 ]
同志 서재필

獨立協會 의 指導者로 活躍하며 漢城府 와 故鄕인 忠淸南道 舒川 , 瑞山 等 各地를 巡廻하며 啓蒙, 講演活動을 하였다. 後日 史學者 문일평 은 李商在와 윤치호 , 서재필 을 獨立協會의 세 기둥이라고 評하기도 한다.

그는 윤치호 , 서재필 等과 民衆의 參政權을 主張하였다. 5月 17日 서재필 이 强制 追放되어 美國 으로 돌아가고 이완용 , 윤치호 와 함께 獨立協會를 主導했다. [6] 10月 28日 獨立協會 副會長으로 官民共同會(官民共同會)를 開催하여 專制君主權을 制限하고 內閣責任 行政을 實施해야 한다는 獻議6條(獻議六條)를 決意하여 高宗에게 建議하자 그해 10月 30日 高宗이 이를 受諾한 後 中樞院을 改正하여 中樞院 管制를 發表했으나, 조병식(趙秉式)· 유기환 等의 反擊을 받게 된다. 11月 4日 獨立協會 해산령이 내리고 精巧(鄭喬)·南宮檍(南宮檍) 等 16名과 함께 拘束되었다.

獨立協會가 萬民共同會를 열어 示威抗議를 함으로써 11月 10日 태(笞) 40臺를 맞고 풀려났다. 以後 萬民共同會를 指導하여 獻議6條의 實施를 要求하면서 皇國協會에 맞섰으나 1898年 末 獨立協會는 褓負商 들의 政治團體人 皇國協會 를 앞세운 保守派들의 彈壓으로 解散당하였다. 그해 12月 25日 獨立協會가 政府의 彈壓과 皇國協會의 妨害로 解散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落鄕하였다.

基督敎에 귀의 [ 編輯 ]
YMCA 靑年會 事務를 보는 越南 李商在.

서재필 은 掉尾하였고 윤치호 는 官僚生活에 邁進하였으나 그는 벼슬을 拒否하고 貪官汚吏의 腐敗相과 非理, 內部 默認 等을 彈劾하다가 1899年 11月 4日 守舊派가 보낸 軍士들에 依해 獨立協會 幹部들 大多數가 逮捕됨으로써 獨立協會 는 해산당한다.

1902年 에는 改革派 人士들이 大擧 拘禁되거나 日本으로 避身하는 개혁당 事件 이 일어나자 그해 6月 둘째 아들 이승인(李承仁)과 함께 逮捕되어 獄苦를 치렀다. 아들 承認은 當時 拷問 을 當하여 拷問 後遺症으로 出獄 後 死亡했다. 當時 그는 監獄에서 李承晩 이 傳達限 聖書 를 읽고 基督敎人 이 되기로 決心했는데, 靑少年 基督敎 雜誌인 《새벽나라》( 두란노 刊)에 依하면 李商在 先生은 怨讐도 사랑하라는 마태복음서 山上垂訓 에 感動받았다 한다.

出獄 直後 그는 自身의 故鄕인 忠淸道 舒川郡 한산면 종지리로 내려가 敎會 를 設立, '초갓집敎會' 禮拜堂을 獻堂한다. 草家집敎會는 後에 1970年 臺에 現代式 새 建物로 改築된다.

또한 李商在 先生은 1910年 황성기독교청년회 野遊會에 監理敎 聖職者인 전덕기 牧師와 같이 參與하였다. 李商在 先生은 兩班 이고, 전덕기 牧師는 을 만들어서 장사하는 勞動者 였으니 階級 이 달랐지만, 基督敎人 인 그에게 전덕기 牧師는 하나님의 나라 建設을 위한 同志였을 따름이다. [7]

李承晩과의 關係 [ 編輯 ]
漢城監獄에서의 寫眞(맨 왼쪽 서있는 사람이 李承晩 ,앞줄 오른쪽 두 番째에 앉은 이가 이상재, 뒷줄 오른쪽 두 番째는 그의 아들) [8]

獄中에서 그는 김정식 (金貞植), 유성준 (兪星濬), 李承晩 , 이동녕 을 만났고, 그들과 가까이 지냈다. 이때 그는 李承晩 에게 影響을 주었는데, 그로부터 基督敎 를 接하고 敎人이 되었다.

1904年 2月 이상재는 特別 釋放되었다. 以後 李承晩 의 獄바라지를 했고, 李承晩도 美國 에 派遣될 特赦로 選定되어 곧 釋放된다. 그는 獨立協會와 萬民共同會, YMCA에서 만난 李承晩 의 政治的 後見人이 되어 주었고, 後日 李承晩이 美國 留學을 할 때는 그의 生活費를 支援, 後援하기도 했다.

公職 辭退와 基督敎靑年會 活動 [ 編輯 ]

出獄한 뒤로는 그는 한동안 杜門不出했다. 1905年 9月 26日 서울 傳動에 있던 侍從武官長 민영환 집에서 美國 大統領 시어도어 루스벨트 의 딸 엘리스 루스벨트를 歡迎하는 異色 晩餐이 開催되었다. [9] 李商在 亦是 이 晩餐에 큰 期待를 걸고 參席했다. 主賓은 當時 美國 大統領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이고 陪賓이 앨리스孃을 遂行한 海軍大將 트레인과 앨리스 羊의 約婚者 커빈 海軍 中將이었다. 韓國에서는 민영환 以外 李儁 , 이상재, 이용익 , 윤치호 , 그리고 美國人으로 서울에 와 抗日 筆鋒을 휘두르고 있던 '코리안 리뷰'社 週間 헐버트(흘法) 女史 等 反日 親美 人士들이 大擧 參與했다. [9] 그리고 앨리스孃에게 아버지인 大統領에게 다리놓아줄 것을 付託했고, 앨리스量은 皇帝의 國書를 지닌 特使를 派遣한다는 條件으로 쾌히 應諾했다. [9]

YMCA의 指導者이며 基督敎, 開化派와 親分을 쌓았던 이상재는 바다 건너 海洋 文明國이 大韓帝國 의 自由와 解放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弟子인 李承晩 , 親舊 윤치호 等으로부터 가쓰라-태프트 密約 消息을 듣자 이상재는 美國 에 對해 엄청난 失望感을 품게 된다. 1905年 乙巳條約이 强制締結된 뒤 高宗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官職에 未練이 없었음을 밝혔으나 도와달라는 高宗 의 哀切한 付託을 拒絶할 수 없어 議政府 參贊에 머물렀고, 1907年 法部大臣의 交涉을 받았으나 辭讓하였으며, 軍隊解散 以後 官職을 辭退했다.

윤치호
(그와 함께 YMCA를 指導하였다.)

釋放된 뒤 함께 監獄에 있었던 김정식 , 유성준 , 李承晩 等과 그밖에 윤치호 等과 함께 황성기독교청년회 (YMCA)에 加入, YMCA 初代 敎育部長에 選任되었다.

日帝强占期 以後 [ 編輯 ]

社會 參與 活動 [ 編輯 ]

韓日 合邦 直後 [ 編輯 ]
京城府 YMCA에 支援, 派送되어 온 美國人 宣敎師들과 함께(가운데 오른쪽이 윤치호, 가운데 왼쪽이 이상재)

1910年 8月 韓日 合邦 以後 一切의 公職에서 辭退하였다. 韓日 合邦 以後 敎育 啓蒙活動에 나섰고, 靑年들의 깨달음과 實力 養成, 海外 留學과 見聞 視察을 靑年들에게 當付하였다.

韓日合邦 直後 總督府 가 開催한 朝鮮美術展覽會에서 偶然히 朝鮮美術展覽會 會長으로 推戴되었다. 그는 人事말로 '大監은 東京 으로 移徙가셔야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新小說 《牡丹峯》에서 淸日戰爭 을 敍述하는 場面에서, 日本軍 軍醫官 을 엄마와 헤어져 孤兒 가 된 玉輦을 治療하고 入養 까지 한 恩人으로 親切하게 描寫하는 等 親日 性向이 濃厚한 小說家 이인직 이 疑問을 표하자 이상재는 '大監은 나라 亡하는데 選手 아니십니까? 大監이 日本으로 移徙가면 日本이 亡할 것이 아닙니까?'라고 反問했다 한다. 그의 諷刺, 嘲弄에 아무도 對答을 하지 못했다.

韓日合邦 直後 그는 一切의 公職活動을 自制하고, 言論, 文筆, YMCA 靑年會 와 宣敎 活動에 從事하였다.

YMCA 活動과 宣敎 活動 [ 編輯 ]
엄낙만 歡迎會長에 參席
(뒷줄 왼쪽이 이상재, 앞줄 왼쪽은 윤치호 , 앞줄 가운데는 신흥우

1913年 朝鮮總督府 YMCA 의 擴張을 警戒, 御用團體人 유신회(維新會)를 動員, 基督敎 靑年會를 破壞하려 하였고, 이 때문에 幹部들은 逐出, 拘禁, 國外追放 當하거나 海外亡命을 하였다. 出國한 李承晩 美國 滯留를 위한 奬學金을 支援하는 한便 윤치호 에게도 出國을 勸한다. 그러나 老父母가 生存해있던 윤치호 는 出國을 躊躇한다.

그러나 그는 1913年 황성 YMCA 總務에 就任하여, 指導者들의 離脫과 拘束, 追放 等의 가운데 윤치호 와 함께 YMCA의 看板을 지키고 靑年會를 死守하였다. 1914年 在日本朝鮮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배재·更新과 個性의 한영서願, 光州의 숭일YMCA, 群山의 YMCA聯盟, 全州의 YMCA新興, 公主의 YMCA聯盟 等 學生YMCA와 聯合, 황성기독교청년회와 統合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組織하였다. 이는 韓國 YMCA의 母胎가 되었다.

황성기독교청년회 를 中心으로 꾸준히 啓蒙 運動에 參加했는데, 이는 1920年代 朝鮮 基督敎界 에서 啓蒙運動에 重點을 둔 社會參與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기독교청년회( YMCA )는 3·1 運動 에서 重要한 役割을 맡아, 그도 이 일로 關聯者로 指目되어 6個月間 拘禁되었으나 嫌疑點이 없어 풀려났다. 韓國보이스카우트聯盟 의 前身인 少年斥候團朝鮮總聯盟 初代 總裁, 朝鮮日報 社長을 歷任하면서 다양한 社會運動을 하였다.그러나 1919年 3月 1日 民族代表 33人 으로부터 朝鮮獨立宣言文에 署名해 줄 것을 要請한 것은 拒否하였다.

靑年들과의 交遊 [ 編輯 ]
晩年의 이상재

그 뒤 그는 YMCA 靑年會의 第2代 總務에 就任한다. [10] 그는 基督敎에 늦게 入門하여 나이가 들어서 젊은 사람들과 함께 靑年會 運動을 하였고, 別世한 해인 1927年에도 中道 右派 (非妥協的인 民族主義 )와 左派 ( 社會主義 )가 合作한 獨立運動團體인 新幹會 의 初代 會長을 맡는 等 끝까지 元氣 旺盛한 基督敎 社會活動을 펼쳤으며, 유머가 넘치는 밝은 性格이라 "萬年靑年"으로 불렸다. 當時 保守的인 이들은 "나이지긋한 분이 體統을 지키지 않는다"며 그의 그러한 行動에 不滿을 가졌으나, 이상재 自身은 "내가 靑年이 돼야지, 靑年더러 老人이 되라고 할 수 없다"면서 靑年들과 交流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또한 그 自身은 貰房 에서 살면서도 어려운 苦學生이 있으면 學費를 줄 程度로 靑年들을 다음 世代의 指導者로 키우는 일에 獻身하였다.

基督敎人으로서의 基督敎 批判 [ 編輯 ]

이렇듯 이상재는 너그럽고 밝은 性格을 갖고 있었지만, 옳지 못함에 對해서는 거침없이 批判했다. 그 實例로 1923年 이상재는 西區 改新敎 宣敎師들앞에서 다음과 같은 演說을 하여, 當時 朝鮮 改新敎 敎會에서 宣敎師들과 朝鮮人 信者들이 對立하게 된 原因인 宣敎師들의 白人優越主義 를 批判하였다.

基督敎人으로서 우리는 하나이다. 하나님 나라 는 世上의 어떤 境界도 超越한다. 그러므로 民族的 優越感에 사로잡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妨害되지 않도록 하자. [11]

그는 一部 改新敎 宣敎師와 敎人들의 傲慢함과 獨善이 社會的인 分裂과 葛藤을 惹起할 것이라 豫見하였고, 基督敎 精神인 寬容과 사랑으로 감싸려고 努力하자고 勸告하였다. 그의 이런 豫見은 틀림이 없어서, 社會主義 가 本格 朝鮮에 導入된 1920年 代初에 이르러 大多數 基督敎人 들과 마르크스-레닌주의 性向의 社會主義 共産主義 勢力 間의 尖銳한 葛藤으로 나타난다. 社會主義者 들은 基督敎를 人民의 阿片 ( 痲藥 , 鎭痛劑 ), 迷信 이라 批判하고, 基督敎界는 自身들을 批判하는 社會主義者들을 對話와 協力을 할 수 없는 사탄인양 取扱을 했다. 하지만 少數 基督敎人들은 基督敎와 社會主義의 共通點을 찾으려는 基督敎 社會主義 를 主張함으로써 社會主義와 基督敎의 協力과 對話를 생각했고, 夢陽 여운형 先生처럼 基督敎界의 社會運動이 限界가 있음을 直視하여 社會主義로 轉向하는 이들도 있었다.(기독교 社會主義 散策/이덕주 지음/홍성사)

敎育, 講演 活動 [ 編輯 ]

1920年 11月 4日 開催된 1920年 全國體育大會 開會式에서 이상재(右側)가 始球를 하는 모습.

그러나 3·1 運動 以後 萬歲 事件의 背後로 指目되어 投獄되었다가 바로 풀려났다. 이때 日本人 檢事 상내(上內)가 問招를 할 때 各種 拷問 道具들을 準備하고 懷柔하였으나 그는 拒絶하였다. [12] 상내檢事가 拷問 道具들을 늘어놓은 다음 順順히 自白하지 않으면 拷問할 意思를 밝혔다. 그러자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옳지. 倭놈들은 제 父母도 친다더라. 늙은 나를 치려거든 쳐 보거라. [12]

이 말을 들은 상내 檢査는 故鄕의 늙은 아버지를 생각하여 敢히 그를 치지 못했다. [12] 總督府 警察은 그에게 3.1 萬歲 運動 에 關聯된 것을 追窮하였으나 그는 모르쇠로 一貫했고, 별다른 嫌疑點이 없자 釋放되었다.

1920年 조선기독교청년회聯合會 會長, 朝鮮중앙기독교청년회 顧問으로 推戴되었다. 이어 同年 YMCA의 名譽總務 또는 전국연합회會長에 選出되었고, 1920年 美國會議원으로 構成된 視察團이 來韓하였을 當時 第2의 獨立運動·物産奬勵運動·少年斥候隊(보이스카웃)運動·學生靑年會運動 等 YMCA運動을 主管하였으며, 各種 講演會·討論會·日曜講座·農村運動·地方巡廻講演을 다녔다.

反基督敎 事態 仲裁 [ 編輯 ]

半 基督敎 事態 始作 [ 編輯 ]
하와이 訪問 時 안창호 , 윤치호 와 함께 달리기 競走 (오른쪽 맨 끝)

105인 事件 의 失敗 以後에도 朝鮮總督府 는 統治에 否定的이었던 基督敎 團體들을 打倒할 計劃을 꾸몄다.

1920年 9月 慶尙北道 영주군 (榮州郡)에 권성영 (權聖英)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平素에 孝誠이 至極하여 媤어머니 喪을 當하자 아침 저녁으로 上食(上食)을 했다. [13] 그러던 中 男便이 예수교 信者(우리나라에 改新敎는 예수교를 音譯한 말인 耶蘇敎 라는 이름으로 들어왔음)가 되면서부터, 聖書말씀을 嚴格하게 解釋하여 朝夕 常識이 迷信 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嚴禁하게 하였다. 아내는 男便에게 哀願도 하고 說得도 해봤으나 끝내 듣지 않았으므로 차라리 죽음으로써 不孝의 罪를 갚는 것이 子息된 道理라 생각하고는 自決하였다. [13]

그 當時 基督敎人 들은 聖書 를 文字 그대로 解釋하여 父母의 神主(神主) 앞에 절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父母에게 1年에 한 番씩 歲拜 드리는 것마저 偶像 崇拜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하나님 外에는 절하지 말라'는 十誡命 을 犯하는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13] 이 일로 西歐의 迷信 이 朝鮮을 짐승 社會로 만든다며 基督敎 에 對한 儒敎 基督敎 聲討가 이어졌고, 社會主義 者들 亦是 基督敎 의 排他性과 盲信을 集中攻擊했다. 民族代表 33人에 長老敎 長老인 南江 이승훈 先生 等이 參與할 程度로 民族意識이 剛했던 基督敎 團體를 打倒하려 했던 朝鮮總督府 基督敎 聲討를 부추기거나 袖手傍觀하였다.

이 事件은 新聞에 크게 報道되었다. 9月 1日 東亞日報 [13] 에 '애매 無理한 基督敎 의 犧牲者, 男便이 예수교를 믿고 常識을 廢한 結果 마누라가 代身 죽어'라는 題目의 記事가 실렸다. [14] 以後 社會에서는 旣成 敎會에 對하여, 特히 宣敎師들에 對하여 非難의 소리가 빗발쳤다. [14] 反基督敎 敵 示威와 抗議가 擴散되는 가운데, 그는 基督敎 의 本質이 父母를 恭敬하고 祖上에게 例를 표하는 것을 拒否하는 것은 아니라며 解明하였다.

李商在 先生의 意見 [ 編輯 ]

事態가 이쯤 되자 東亞日報 의 記者가 基督敎 系의 反應을 듣기 위하여 靑年會 會館으로 越南을 찾아왔다. 이에 越南은 크게 衝擊을 받고 自己 所信대로 意見을 말했다. [14] 基督敎가 孝를 拒絶하는 것은 아니며, 人間이 되지 못한 者가 信仰을 한다고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東亞日報 는 그의 發言을 歡迎하여 '祭祀와 偶像 崇拜, 朝鮮의 祭祀는 일신(一神)思想에 違反이 되지 아니한다'는 社說 을 發表했고, 基督敎 根本主義 를 따르는 改新敎 敎會들과 宣敎師 들은 그들이 보기에 偶像崇拜 人 祭祀를 의 實踐으로 尊重하는 李商在를 責罰感想으로 몰았다. [15] 이때 박승봉 長老는 基督敎 의 祭祀 問題를 根本的으로 파헤쳐 舊約聖書 레위기 註釋까지 썼으며, 더 나아가 酒酊(朱子와 정호) 때부터 儒敎 가 決斷났다고 하면서 朱子學 (朱子學)의 祭祀官을 批判한 일도 있었다. [15] . 이상재의 이러한 發言은 敎會와 社會에 큰 波紋을 惹起시켰 [15] 고, 反基督敎 風潮를 잠재우고 事態를 仲裁하는데 成功한다.

生涯 後半 [ 編輯 ]

民立大學 期成會와 宣敎 活動 [ 編輯 ]

晩年의 이상재 (1925年)

1922年에 朝鮮敎育協會를 創設하여 會長에 就任하였다. 1920年 代 初에는 民立大學 設立運動에 參與하여 한규설 , 윤치소 等과 民立大學 設立運動 發起人의 한사람이 되었다. [16] 그 뒤 民立大學期成會 로 發展시켰다. 1922年 3月 中央執行委員에 選任되었다. 1922年 이상재는 이승훈 , 윤치호 , 김병로 , 金性洙 等과 함께 主動이 되고 發起人 1,170 名을 確保하여 民立大學 期成會를 出帆시키고 募金活動을 했다. [16] 그러나 民立大學 設立運動은 日帝의 妨害로 挫折되었다.

1922年 신흥우 , 李大尉(李大偉), 金活蘭 , 김필례(金弼禮) 等 YMCA代表團을 引率, 北京에서 열린 世界基督學生聯盟(WSCF) 大會에 參席하여 韓國 YMCA가 單獨으로 國際 YMCA聯盟에 加入을 許諾해줄 것을 各國의 YMCA 代表者들에게 說得 呼訴하고, 日本 YMCA 代表團과 談判하여 韓國 YMCA가 單獨으로 國際 YMCA에 加入케 하고, 獨自的으로 國際 YMCA 行事에 參與하게 하여 韓國 YMCA의 國際 YMCA 加入의 端初를 마련하였다. 1923年 少年聯合斥候隊(少年聯合斥候隊:보이스카우트) 初代 總裁가 되고, 物産奬勵運動·節制運動·地方顚倒運動·창문사運動 等을 指導했다. 24年 朝鮮日報 사 社長에 就任하였으나 곧 辭退하였다.

1925年 2月 孫子 홍직 이 工夫恨 監理敎 高等學校 배재高等普通學校 卒業式에 參席하였다. 朝鮮總督府 總督과 日本人 京畿道知事 의 祝辭를 代身 朗讀한 韓國人 職員들의 朗讀 以後, 來賓 代表로 祝辭를 朗讀할 때 그는 "여러분, 朝鮮末 들으실 줄 아시오? 나는 日本말을 몰라서 朝鮮말로 하오. [17] "라며 한글로 祝辭를 朗讀하였다.

新幹會 會長 推戴와 臨終 [ 編輯 ]

1927年 4月 7日 , 이상재 社會葬. 當時 그의 葬禮行列은 數 많은 人波가 몰렸다.

1925年 4月 15日 第1回 全國記者大會가 열리자 議長에 被選됐고, 1927年 2月 15日 民族主義 者와 社會主義 者, 共産主義 者 等 理念을 超越한 各界 人士가 모여 新幹會 를 結成하자 會長으로 推戴되었다. 이상재는 當時 病席에 누워 있었으나 新幹會 會長職을 受諾했다.

晩年에 老患으로 苦生하다가 末梢神經에 浮腫 症勢로 苦生하였으며, 1927年 3月 19日 昏睡狀態에 빠졌다가 깨어났다.

財産이 없던 그는 傳貰房을 轉轉하기도 했다. 1927年 3月 29日 京城 의 傳貰房에서 病死하였고, 當時 나이 78歲였다. 傳貰로 輾轉하던 그는 財産도 없었으며, 死亡 當時 쌀 27가마의 빚을 남겼다. 이 빚은 윤치호 , 李承晩 , 金性洙 , 안창호 , 송진우 等이 募金運動을 하여 그의 빚을 갚아주었다. 家庭的으로도 不幸하여 세 아들이 그보다 먼저 죽고, 넷째 아들 승준만이 그의 臨終을 지켰다.

以後 擧族的인 社會葬 이 擧行되었으며 10萬 人波가 몰렸다. 선영인 忠淸南道 한산군의 先塋에 장사되었고, 1957年 大韓民國 大統領 李承晩 의 指示로 京畿道 楊州郡 장흥면 삼하리로 移葬되었고, 변영로(卞榮魯)가 墓碑文을 썼다.

事後 [ 編輯 ]

1957年 , 李承晩 大統領 이 越南 李商在 先生 墓碑式에 參席한 모습.

故鄕인 한산면 종지리에 頌德碑가 建立되었다. 光復 以後 1956年 大統領 李承晩 의 特別 指示로 公報處 에서 《李商在 先生 略傳》이 發刊되었다.

1962年 建國訓長 大統領章이 追敍되었다. 서울 종묘공원 에 銅像이 設置되어 있고, 獨立記念館 에는 다음 文句를 새긴 語錄비가 세워져 있다.

思想과 信念 [ 編輯 ]

이상재의 銅像

盲目的 事大主義에 對한 反感 [ 編輯 ]

그는 韓國 사람들이 서로 부를 때 긴상(金氏), 服喪(朴氏) 하거나, 美國 式으로 미스터 金(Mr. Kim), 미스터 朴(Mr. Park) 하는 것을 볼 때마다 매우 不快히 여겼다. 어찌하여 韓國 사람들을 제 나라 固有의 말이나 버릇대로 부르지 않고 日本人이나 美國人의 흉내만 내느냐는 것이다. [18]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 外國人 風潮를 따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상재는 갑자기 입을 열어 "요즘 웬일인지 常놈도 많고 미친놈도 많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였다. [18]

요즘 웬일인지 常놈도 많고 미친놈도 많습니다. 요새 日本 말이나 좀 할줄 아는 사람들은 스스로 金常놈(김상), 朴常놈(박상) 하더니, 美國 風潮가 들어와서는 어떤 사람들은 미쳤다 金(Mr. Kim), 미쳤다 朴(Mr. Park) 하니까 말이지! [18]

그제야 무슨 뜻인지 깨닭고 座中은 爆笑하였다. [18] 開化派 出身이었던 그는 盲目的인 現象 維持에는 反對하였다. 그는 大韓帝國 의 滅亡 原因을 신문물을 拒否하고, 鎖國 政策 을 斷行한 點을 指摘했다. 그는 우리의 것을 지키기는 지키되 좋은 것은 지키면서 外國의 것을 받아들이자는 것이 그의 持論이었다.

評價 [ 編輯 ]

諷刺와 機智가 넘쳐 次元 높은 諧謔으로 殺伐한 社會雰圍氣를 醇化시켰고, 惡毒한 日帝의 侵略과 不義를 날카로운 諷刺와 經句로써 制御하였다. 그 根據로 계몽사에서 만든 이상재 前期에는 李商在 先生이 諷刺와 經句로써 不當한 現實에 抵抗한 才談家였음을 보여주는 事例들이 나온다. 李商在 先生은 紳士遊覽團에 따라갔을 때 日帝가 銃과 칼을 보여주며 힘을 자랑하자 " 로 일어서면 칼로 亡한다."는 예수 로마帝國 軍國主義 를 論駁하기 爲해 한 말( 마태복음서 26:52)을 引用했고, 乙巳五賊 들에게는 "大監들, 日本 에 가시지요. 當身들 나라 亡하게 하는데 재주가 있으니 말이오"라고 毒舌을 보여주었다.

서재필 은 越南의 訃音을 듣고 조선일보에 한 寄稿에서 "그는 巨人이었고, 그의 非凡한 卓論과 剛直한 氣魄에 나는 感服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19] 東亞日報 社長을 지낸 송진우 는 "世上을 諷刺하는 諧謔은 東方朔을 앞섰고, 슬플 때는 屈原 을 생각하게 한다"며, "先生은 나라를 근심하고 一身은 근심하지 않아 머리는 희고 마음은 붉었다"고 評하였다. 윤치호 는 "人間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인 분"이라고 評하였다.

敎育者 兼 政治人 김동길 (金東吉)은 그의 "率直함과 假飾이 없음 [20] "을 높이 評價했다. 김동길 에 依하면 "越南 李商在가 한 時代에 우뚝 선 巨物인 까닭은 凡事에 率直하고 假飾이 없고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보여주신 어른이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20] "고 評하였다.

일화 [ 編輯 ]

獨立運動家 이원순 의 證言에 따르면 그는 老少同樂(老少同樂)을 主張하여 靑年들과 慶州하거나 바둑·長期 두는 것을 좋아했다. 學生들끼리 바둑이나 將棋를 두는 것을 보면 반드시 訓手하기를 좋아했고 訓手대로 두지 않고 質듯한 사람에게는 자리를 비키게 하여 代身 이겨주고 즐거운 듯 破顔大笑(破顔大笑)하는 모습이 마치 紅顔少年(紅顔少年)처럼 보였다고 한다. [21]

李商在가 講演會와 基督敎 宣敎 活動을 다닐 때는 朝鮮總督府 에서 派遣한 憲兵과 巡査들이 들어와 그를 監視하고 講演內容을 注視했다. 겨울의 어느 講演에서 그는 개나리꽃 이 활짝 폈다고 一喝했다. 當時 巡査와 憲兵의 制服이 黃色인 點을 着眼, 개는 黃色 制服이었고, 나리는 憲兵을 嘲弄했던 것이다.

庚戌國恥 直後, 어느 著名 人士가 自發的으로 日本式 이름으로 改名하였는데 이토(伊東)라 하였다. 그의 改名 消息을 듣고 이상재는 그 人士의 집 大門에 가서 用便을 보았다. 그 人士가 李商在에게 抗議하자 너는 이 똥과 같은 놈이라고 嘲弄하고 떠났다.

日本 YMCA 事件 [ 編輯 ]

1911年 初봄, 日本 YMCA가 越南 先生을 招請한 일이 있었다. 韓日 兩國의 校人間 親睦을 標榜하였으나 그 內幕에 있어서는 그로 하여금 獨立運動의 意志를 꺾게 하려는 政治的 凶計가 內包되어 있었다. 日本에 건너간 越南 先生 一行은 極盡한 待接을 받으며 名勝古跡을 두루 視察하고 어느날 저녁, 總理大臣이 베푸는 晩餐會에 參席하게 되었다. 이 晩餐會에는 總理大臣을 비롯한 各 大臣이 參席했는데 晩餐이 끝날 무렵, 總理大臣이 가장 平凡하고 庶民的인 越南에게 所信을 듣기를 請하였다. [22] 이에 應한 越南 先生은 다음과 같은 有名한 말을 남겼다. [22]

여러분! 日本人들은 日本이 가장 强한 나라 中의 하나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當身네들은 願하는 모든 것이 成事될 것으로 믿고 있으나 또 하나의 强力한 王國이 存在하고 있다는 것을 銘心해야 할 것입니다. 萬若 그 임금께서 怒하시게 되면 日本의 陸海軍은 눈깜짝하는 사이에 滅亡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日本 사람들이 이것을 銘心하여 그 임금을 즐겁게 해드린다면 日本은 偉大한 國家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임금이란 두말할 것 없이 하늘에 계신 賃金이십니다. [22]

변정상 氏 [ 編輯 ]

1918年 무렵 YMCA의 中學部에 在學하던 數週 변영로 가 親舊들과 함께 授業을 듣지 않고 鍾路 거리를 걸어가노라니까 뒤에서 누군가가 변정상(卞鼎常) 氏, 변정상 氏 하고 自身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뒤를 돌아다 보니 李商在가 그렇게 부르면서 따라오는 것이었다. [18] 변영로 는 불쾌히 여기며 李商在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18]

卞榮魯는 그에게 "先生님. 老妄이 아니세요? 아버지와 아들을 分別하지 못하시니, 아무리 우리 아버지가 先生님의 親舊이기로 路上에 [18] 서 이름을 부르는 法이 어디 있습니까. [23] "라며 抗議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상재는 "이놈아. 그러면 네가 변정상의 씨가 아니란 말이냐. 氣魄이 그만하면 됐다. [23] "고 하였다.

그에 依하면 너는 卞氏家門의 氏 답게 體統을 지켜야 하며, 너희들은 韓國人의 氏이니 씨알머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弄談調로 가르친 것이다. [23]

기타 [ 編輯 ]

月灘 박종화 의 醜都市

어질고 굳센 氣象 澡擦코 깨끗한 定期

富貴도 임의 마음 흔들지 못했고
銃칼도 임의 뜻을 빼앗지 못했네
해지고 어두운 거리
우리들 靑年의 길은 險惡度 하였어라
모두다 헤맸네.
豪傑은 亡命하고 指導者는 없었네
이中에 先生은 우리들의 燈불
나라의 靑年들 依支하던 곳
오직 當身만이 높고 높은 泰山의 峻嶺이었네
오오 當身은 이겨레의 아버지, 大韓의 聖雄이었네

같이 보기 [ 編輯 ]

李商在를 演技한 俳優 [ 編輯 ]

各州 [ 編輯 ]

  1. “忠淸時代:歷史다큐 이상재 一代記” . 2016年 3月 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4年 2月 24日에 確認함 .  
  2. 이러한 墮落相은 金九 白凡逸志 에도 나온다.
  3. 네이버 百科事典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 계몽사 偉人傳記《李商在》/계몽사
  5. daum事前
  6. 以後 YMCA 運動 亦是 윤치호와 함께 指導하게 된다.
  7. 《基督敎 社會主義 散策》/이덕주 지음/홍성사 P.196
  8. 이 寫眞은 愚男館에 展示되어 있다.
  9. (이규태 歷史에세이) 앨리스-헐버트 이야기 朝鮮日報 1999.06.10日子
  10. 開花窓口 奉仕 消費者.環境運動/YMCA 創立 90年 朝鮮日報 1993年 10月 14日子
  11. 基督敎思想 》2005年 9月號, 무엇이 이 時代의 福音이고 宣敎인가:선교의 反省과 오늘의 方向性 摸索,한규무, 大韓基督敎敍懷 p.56
  12. 京鄕新聞, 1979年 10月 9日子
  13. 전택부, 《李商在 評傳》 (범우사, 2002) 184페이지
  14. 전택부, 《李商在 評傳》 (범우사, 2002) 185페이지
  15. 전택부, 《李商在 評傳》 (범우사, 2002) 187페이지
  16.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이이화, 한길사, 2006) 290페이지
  17. 여적
  18. 전택부, 《李商在 評傳》 (범우사, 2002) 183페이지
  19. 朝鮮日報 社長列傳/①越南 李商在 先生 朝鮮日報 2001.03.01
  20. 자연스럽기를 바랍니다
  21. 李元淳. 《世紀를 넘어서 : 海史 李元淳 自傳》 1988板. 新太陽社. p. 72쪽.  
  22. 李元淳. 《世紀를 넘어서 : 海史 李元淳 自傳》 1988板. 新太陽社. p. 74쪽.  
  23. 전택부, 《李商在 評傳》 (범우사, 2002) 184페이지

參考 資料 [ 編輯 ]

關聯 書籍 [ 編輯 ]

  • 천광노, 《紅松 - 越南 李商在 一代記》 1,2 (越南精神文化史, 2009)
  • 이시원, 《月南李商在》(中央書館, 1926)
  • 金雪洞, 月南李商在實技(越南李先生實技出版所, 1927)
  • 公報室 便, 月南李商在選省略前(大韓民國 公報室, 1956)
  • 나라사랑 9―月南李商在 特輯號―(외솔회, 1972)
  • 김을한 , 《月南李商在一代記》 (정음사, 1976)
  • 전택부, 《月南李商在》 (한국신학연구소, 1977)
  • 전택부, 韓國基督敎靑年會運動史(정음사, 1978)
  • 金聖泰, 月南李商在의 性格硏究(聲曲論집 4號, 1973)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