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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韓 特殊部隊 600名 潛入? ‘종北몰이’로 犧牲者 두 番 죽여|신동아

北韓 特殊部隊 600名 潛入? ‘종北몰이’로 犧牲者 두 番 죽여

光州抗爭 記錄의 眞實과 論難

  • 소준섭 | 國會圖書館 調査官, 國際關係學 博士

    入力 2015-05-21 16: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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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光州白書’ 베낀 ‘죽음을 넘어 時代의 어둠을 넘어’
    • 光州抗爭 記錄들이 ‘北韓 冊’ 베꼈다고?
    • 極右派 攻擊받는 ‘찢어진 깃폭’ 原作者 따로 있다
    • 事實 記錄韓 이들을 ‘間諜’ ‘反逆者’로 몰아
    북한 특수부대 600명 잠입? ‘종북몰이’로 희생자 두 번 죽여

    1980年 5月 27日 全南道廳을 마지막까지 지키던 市民軍이 戒嚴軍에 鎭壓된 뒤 捕繩줄에 묶여 끌려나오고 있다

    2011年 ‘신동아’ 1月號는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時代의 어둠을 넘어’가 筆者가 쓴 ‘光州白書’를 潤文하고 加筆하고 베꼈다고 報道했다.

    新東亞 報道는 ‘光州白書’와 ‘죽음을 넘어 時代의 어둠을 넘어’의 文章을 하나하나 精密하게 比較 分析하면서 “‘죽음을 넘어 時代의 어둠을 넘어’ 前半部는 ‘光州白書’에 全的으로 기댔다. 骨幹은 勿論이고, 에피소드 展開 順序, 디테일이 같다. ‘죽음을 넘어 時代의 어둠을 넘어’엔 ‘光州白書’ 出刊 以後 蒐集한 內容도 섞여 들어가 있다. ‘죽음을 넘어 時代의 어둠을 넘어’ 後半部에도 ‘光州白書’ 內容이 그대로 담겼으나 全體 內容의 一部일 뿐이다”(신동아 2011年 1月號)라고 結論을 내렸다.

    신동아의 ‘光州抗爭 記錄’ 報道

    신동아의 緻密한 分析 報道는 保守와 進步의 陣營 論理를 떠나 ‘죽음을 넘어 時代의 어둠을 넘어’가 ‘光州白書’를 土臺로 해 씌어진 事實을 認定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筆者가 1981年 初에 쓰고 이듬해 全國에 配布한 ‘光州白書’는 1985年 全南大 復籍生으로서 光州抗爭 當時 全南道廳을 지키다 獄苦를 치르고 釋放된 이재의 氏가 정상용 前 議員 等 光州 運動圈의 要請으로 抗爭 記錄을 整理할 때 “(‘光州白書’가) 여러 資料 가운데서도 가장 體系的이고 客觀的으로 整理된 記錄으로서 큰 도움이 되었다(집필을 擔當한 이재의 氏 證言).” 이재의 氏가 再構成한 그 記錄은 光州白書와 글의 全般的인 틀과 構成이 거의 一致했고, 다만 市民軍의 光州市內 掌握 以後의 內容이 더욱 忠實히 補强됐다. 신동아가 分析한 그대로다.



    이렇게 整理된 記錄은 以後 풀빛出版社에 넘겨졌고 大衆的 名聲이나 冊의 商業性 等 여러 條件을 考慮해 황석영의 이름으로 出刊하기로 決定됐으며 內容은 손대지 않기로 約束했다. 그리고 序文과 光州 文化運動 그룹의 活動 內容 等이 補强돼 1985年 ‘죽음을 넘어 時代의 어둠을 넘어’라는 題目의 冊으로 製作됐다.

    전남대 5·18硏究所 所長인 나간채 敎授도 그의 著書 ‘光州抗爭 復活의 歷史 만들기’ 中 ‘5·18 記錄 出版運動’ 部分에서 ‘光州白書’부터 ‘죽음을 넘어 時代의 어둠을 넘어’ 出刊까지의 過程을 仔細하게 整理했다.

    筆者는 1980年 서울 學院事態 背後操縱者로 全國에 指名 手配돼 그해 겨울 光州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1979年 學生示威 事件으로 城東拘置所에서 服役할 때 알고 지내던 조봉훈 先輩를 만나 함께 살았는데, 그는 光州에서 抗爭을 記錄으로 남기는 일을 推進하고 있었다. 自然스럽게 筆者가 執筆을 擔當해 조봉훈이 蒐集한 關聯 資料를 精讀했으며 많은 證言을 들었다. 신영일, 노준현, 김상집, 박몽구, 이현철, 전용호 等 10餘 名이 目擊하거나 經驗한 事實을 筆者에게 證言했다.

    特히 抗爭의 發端이 된 전남대 正門 앞 戒嚴軍과의 衝突은 當時 現場에 있던 박몽구 氏의 仔細한 證言을 聽取했고, 市民들의 武裝 및 以後 重要 過程에 對한 執筆 때도 可能한 限 많은 사람과 接觸해 證言을 들으려 努力했다.

    筆者는 蒐集된 資料와 證言 가운데 너무 誇張됐거나 寫實性이 缺如된 것으로 여겨지는 內容은 最大限 排除했다. ‘最大限으로 確認된’ 事實만을 記錄한다는 方針이었다. 이를 위해 當時 狀況을 取材 報道한 동아일보 等 各 新聞 記事도 精讀해 參照했다. 當時 筆者는 腹膜炎을 앓는 等 몸이 衰弱한 狀態였지만 莫重한 任務임을 깨닫고 心血을 기울였다.

    當時만 해도 光州市內 곳곳에서 하루에도 몇 次例씩 着劍한 銃을 든 空輸部隊員을 가득 태운 郡 車輛이 疾走했다. 한마디로 殺風景이었다. 여러 사람의 목숨과 관계된 일이어서 모든 일을 비밀스럽게 進行해야 했다. 그날의 慘狀이 꿈에 나타나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 적도 적지 않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하루에 몇 張씩 조금씩 손으로 써나갔다. 渾身의 힘을 다했다. 그리고 마침내 ‘光州白書’의 執筆을 完了했다.

    바람 새는 골房에 숨어 읽은 冊

    ⓛ發端(學生示威 : 5月 18日) ②民衆蜂起로 發電(市民合勢 : 5月 19日) ③ 武裝蜂起로의 轉換(5月 21日) ④全南 民衆蜂起(市外로 擴散 : 5月 21日) ⑤市內 掌握 및 自體 組織 過程(5月 22 ~26日) ⑥戒嚴軍 武力進入(5月 27日)으로 主要 內容을 構成했고, 맨 마지막에 附錄으로 ‘찢어진 깃폭’을 拔萃해 실었다.

    ‘光州白書’를 記錄할 當時 入手된 資料 가운데 ‘찢어진 깃폭’은 一部가 多少 誇張됐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現場 雰圍氣를 比較的 實感 나게 描寫했다고 判斷해 4쪽 分量으로 拔萃, 白書의 本文 內容과 區分되도록 別途의 附錄 形態로 簡略히 덧붙였다. 當時에는 아직 ‘光州’의 眞實이 밝혀지지 않은 狀態였다. 民主主義의 횃불은 반드시 ‘光州’로부터 들어 올려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은 光州의 眞實을 알리는 것으로 出發해야 했다.

    ‘光州白書’를 몸에 지니고 서울로 올라온 筆者는 1982年 1月 抗爭 記錄을 全國에 널리 알리기 위한 作業을 始作했다(수기로 쓴 ‘光州白書’의 原本은 油印物로 製作, 配布된 後에 筆者가 지니고 다니다 手配者 身分으로서 너무나 危險해 結局 태워 없애고 말았다). 仁川 구월동 고(故) 김근태 先輩 아파트 옆에 房 한 칸을 얻어 살면서 함께 起居하던 박우섭(仁川 南區廳長), 민종덕(전태일記念事業會 理事), 故(故) 이범영(前 民主化運動靑年聯合 議長), 박승옥 等 手配者들과 함께 ‘光州白書’를 타이핑했다. 손으로 한 張 한 張 作業하는 謄寫機는 南大門市場에서 박우섭 先輩가 購入했고, 打字機는 을지로 地下商街에서 筆者가 求해왔다. 서울 中區 印刷골목 紙物鋪에서 종이를 購入, 裁斷한 後 仁川 구월동까지 아픈 몸에도 地下鐵을 타고 무거운 종이를 運搬한 記憶이 생생하다. 타자 作業은 민종덕 兄이 맡았다.

    추운 겨울 구월동 房에서 裁斷해 온 종이에 謄寫機로 一一이 한 張씩 42쪽 팸플릿을 約 120部 印刷했다. ‘光州白書’ 팸플릿을 完成한 後 筆者는 光州에서 製作된 것처럼 꾸미고자 일부러 光州로 내려갔다. 光州 現地 郵遞局에서 원주의 이창복(在野人士) 前 議員 等 20餘 名 앞으로 匿名을 써서 登記로 發送했다. 뒤이어 基督敎人權委員會(NCC) 等 서울의 여러 民主化運動團體, 서울대 人文大 學會室 等 들키지 않으면서도 容易하게 配布될 수 있는 場所에 3~5部씩 놓아두었다.

    이 ‘光州白書’ 팸플릿은 配布되자마자 複寫本으로 만들어져 바람 새는 골房에서 祕密裏에 많은 사람에게 읽혔다. ‘光州白書’는 本來 題目도 붙이지 않은 팸플릿이었지만, 사람들에 依해 ‘光州白書’라고 稱해진 것이다. 光州의 悲劇과 慘狀을 생생히 담은 이 팸플릿은 그間 所聞으로만 傳해지던 光州의 眞實을 復元해 1980年代 學生運動 및 民主化運動의 불길을 怒濤와 같이 타오르게 했다.

    입에 올리기 부끄러운 얘기

    最近 一部 極右 論客들은 1980年 5月 光州民主化運動이 北韓 特殊軍 600名이 潛入해 일으킨 暴動이라고 목소리를 限껏 높였다. ‘日베’라는 얼치기 集團도 헛소리를 하며 젊은 層에게 惡影響을 끼친다.

    極右 論客들은 當時 光州 市街地에서 手巾을 머리에 둘러쓰고 銃을 들고 있던 市民軍 寫眞을 指目하면서 ‘특수하게 訓鍊 받은 北韓 特殊軍의 體型’이라는 어이없는 主張을 한다.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얘기다.

    萬若 그들의 主張대로 1980年 光州에 ‘北韓 特殊軍 600名’李 潛入해 활개를 쳤다면 國家 防衛가 完全히 무너진 것으로서 當時 最高權力者인 전두환 保安司令官이 책임져야 하고, 國防部의 主要 將星 모두가 責任을 지고 물러나고 拘束돼야 마땅한 일이다. 또한 北韓 特殊要員 600名이 光州에 浸透해 暴動을 助長했다고 主張하려면 主觀的 推定과 間接的 蓋然性만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이 要員들의 指揮體系와 內的 構成, 接近方法, 接近路, 光州에서의 活動 內容, 光州市民에게 미친 影響과 效果 等에 對한 事實的 資料를 具體的 根據로 提示해야 한다.

    參考로 美國의 探査專門記者 팀 샤록이 1995年 入手한 美國 國務省의 光州抗爭 當時 祕密 專門에 따르면 美國은 當時 光州抗爭에 北韓이 介入할 可能性에 對해 크게 念慮했고 그것을 傍證할 만할 證據와 資料를 繼續 蒐集하고 모니터했는데, ‘介入은 없었다’는 結論에 到達한 것으로 알려졌다. 美國 政府는 光州抗爭 關聯 國防省과 軍部의 資料를 아직 公開하지 않았는데, 이 資料가 公開되면 北韓 介入說을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資料를 公開하기 위한 政府와 民間 次元의 努力이 切實하다.

    한便 앞에 言及한 保守 論客들은 1985年 황석영의 이름으로 나온 ‘죽음을 넘어 時代의 어둠을 넘어’가 北韓 冊 두 卷을 脚色한 것이라고 强辯한다.

    하나의 歷史的 事件을 多數人이 記錄할 境遇 그 內容이 部分的으로 一致하고 重複되는 것은 어느 程度 不可避한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北韓에서 作成한 資料와 위의 冊 內容에서 同一한 敍述 部分이 一部 發見됐다고 해서 北韓 冊을 脚色했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 主張이다. 위에서 說明한 바와 같이, ‘죽음을 넘어 時代의 어둠을 넘어’는 筆者가 1981年 初 光州에서 記錄하고 1982年에 팸플릿으로 製作 配布한 ‘光州白書’를 基本 텍스트로 삼아 記錄한 冊이다. 그러나 北韓의 冊들은 1985年이 돼서야 出版된 것이다. 훨씬 뒤에 出版된, 따라서 存在하지도 않았던 그 冊들을 筆者가 베꼈다는 것은 語不成說이다.

    그들은 ‘찢어진 깃폭’ 文件이 北韓에서 만들어졌다며 이를 根據로 筆者의 ‘光州白書’와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時代의 어둠을 넘어’가 北韓 作品이라고 主張한다.

    ‘찢어진 깃폭’ 文件을 쓴 人物은 이미 故人이 된 김건남이라는 光州 出身의 詩人이라는 點을 밝히고자 한다. 그는 1980年 5月 自身이 當時 光州 市內에서 直接 目擊한 光景을 記錄해 가톨릭 團體에서 證言했고, 그 題目이 바로 ‘찢어진 깃폭’이었다. 김건남은 1989年 南風이라는 出版社에서 同名의 冊을 ‘김문이’라는 筆名으로 公開 出版하기도 했다.

    一部 論客들은 當時 筆者가 스물두 살의 애송이였다면서 어떻게 抗爭 記錄을 남길 수 있었겠느냐며 반드시 北韓의 使嗾를 받았을 것이라 ‘確信’한다.

    歷史를 살펴보면 젊은이들의 熱情과 超人的인 에너지야말로 우리 人類를 이끌어온 核心的인 動力이었다. 筆者를 民族詩人 金素月과 比較하는 것은 말도 안 되겠지만 金素月은 그의 가장 뛰어난 作品인 ‘진달래’를 스물한 살에 썼다.

    歷史 歪曲이 現實 歪曲으로

    거듭 밝히지만, ‘光州白書’를 記錄하던 當時 筆者는 蒐集된 資料와 證言 가운데 誇張됐다거나 寫實性이 缺如된 것으로 여긴 內容은 最大限 排除했다. 光州抗爭 當時 市民들이 發行한 ‘鬪士會報’나 各種 宣言文, 裁判 記錄 等을 꼼꼼하게 整理했고, 이와 同時에 抗爭에 參與한 여러 사람의 證言을 다양하게 들었다. 誇張된 表現이나 證明되지 않은 所聞을 그대로 글로 옮기는 것은 記錄의 價値와 信賴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結局 軍部政權에 利用만 될 뿐이므로 可能한 限 正確性을 期하려 努力했다.

    一部 論客들은 只今도 筆者를 비롯해 光州抗爭 記錄 關聯者들을 ‘南韓의 反逆者’라든지 甚至於 ‘間諜’으로 罵倒한다. 그러나 筆者는 1970年代부터 北韓의 主體思想을 批判하면서 南韓 中心의 統一運動을 主張했다.

    筆者는 김범우라는 筆名으로 1989年 쓴 ‘實踐的 大衆運動론’(圖書出版 아침)에서 “統一運動은 南韓 大衆의 意識 및 力量에 기초해야만 하며 아울러 南韓 大衆의 利益에 奉仕해야만 한다. 北韓 側 立場을 反映하는 側面이 아무런 媒介 없이 露呈될 境遇, 一般 大衆과 深刻하게 遊離되는 現象을 招來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南韓 大衆을 思考의 中心에 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北韓 側 立場을 排除하는 또 하나의 分裂的 思考가 아니냐는 反論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南韓 大衆을 위한 길은 반드시 우리 民族 全體를 위한 길이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統一運動은 오로지 大衆的 結集에 依存할 때만이 發展할 수 있다(189~191쪽)”라고 記述한 바 있다.

    북한 특수부대 600명 잠입? ‘종북몰이’로 희생자 두 번 죽여
    소준섭

    1959年 全北 出生.

    전주고, 韓國외대 中國語科 卒業

    中國 푸단대 大學院 博士(國際關係學)

    現 國會圖書館 調査官

    著書 : ‘詐欺’ ‘帝國의 復活- 슈퍼파워 中國과 21世紀 霸權’ ‘王의 書齋’ ‘소준섭의 定命論’ 等 多數.


    筆者는 中國 留學을 했지만 北韓과 가까이 位置한 東北 地方에는 아예 가지도 않았고 北韓 사람들과 만나지도, 對話 한 마디 하지도 않았다. 우리 社會에서 數十 年 동안 繼續돼온 ‘종北몰이’의 危險을 避하기 위해 維新 時節부터 體得한 몸가짐이기도 하다.

    歷史의 歪曲은 現實의 歪曲을 낳는다. 歷史는 主觀이나 恣意的 判斷에 依해 童謠돼서는 안 되며, 반드시 眞實의 記錄으로 構成돼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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