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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주고 떠나는 마지막 잎새|新東亞

아낌없이 주고 떠나는 마지막 잎새

  • 채병률 | (寺)失鄕民中央協議會 會長

    入力 2015-05-21 17: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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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年 8月 15日 光復은 내게는 또 다른 悲劇의 始作이었다. 平壤이 故鄕인 나는 38線 以北을 接受한 蘇聯軍을 被害 16歲의 나이에 故鄕을 떠나 38線 以南으로 脫出했다. 둘째누님과 서울로 온 나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他鄕에서 담배팔이, 껌팔이 等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뭐든 하면서 善隣中學校를 卒業했다. 그런데 美軍이 統治하던 以南에도 蘇聯과 김일성에 同調하는 者들이 우글거렸다. 나는 어렵게 苦學을 하면서도 西北학련(西北學聯)의 一員으로 목숨 걸고 左翼과 맞서 싸웠다.

    6·25戰爭이 勃發하자 故鄕땅을 밟기 위해 軍에 自願入隊했고, 美軍 極東司令部 情報處 所屬 8240部隊에 配屬됐다. 敵 後方에 浸透해 諜報蒐集과 攪亂作戰을 하는 部隊였다. 洛東江 戰線이 形成됐을 때에도 敵 後方인 平壤地域에 浸透해 祕密工作業務를 遂行했고, 1·4後退 以後에도 敵 後方인 個性과 土星 地域 作戰에 參與했다. 平壤作戰 때 平壤에 남아 있던 큰누이와 妹夫를 南으로 탈출시킨 건 只今 생각해도 잘한 일이다. 누님 家族을 脫出시키던 當時가 내가 故鄕을 본 마지막 瞬間이 되리라고는 그땐 미처 想像하지 못했다.

    올해로 故鄕 땅을 떠난 지 70年이 흘렀고, 나는 不知不識間에 86歲 老人이 됐다. 나와 함께 共産主義와 맞서 싸운 同志들은 하나둘 世上을 떠났고, 살아 있는 同志들 大部分도 이런저런 病魔와 싸우며 餘生을 보내고 있다. 가끔씩 그들을 만날 때면 나는 아직도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그들도 나도 左翼과 鬪爭하면서 또 6·25戰爭을 겪으면서 每 瞬間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 싸움을 避할 수 없었던 것은 내 목숨보다 所重한 ‘自由’라는 價値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自由’를 지킨 것에 自負心을 갖고 80 平生을 살아왔다.

    할배들의 주책?

    아낌없이 주고 떠나는 마지막 잎새

    現代史의 屈曲을 온몸으로 겪은 世代를 그린 映畫 ‘國際市場’.

    얼마 前 ‘國際市場’이라는 映畫에 1000萬이 넘는 觀客이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映畫 內容을 두고 난데없이 理念論爭으로 몰아가는 左派勢力을 보면서, 가슴속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勿論 映畫라는 媒體는 興行을 目標로 하기 때문에 不必要한 感動과 눈물을 强要하는 傾向이 있다. 映畫 ‘國際市場’에도 그런 場面이 있다는 것을 否定하지는 않는다. 그런 게 이 나라의 ‘國際市場 世代’에게 感謝해야 한다는 생각을 눈물로 强要하는 것 같아서 不便한 구석도 있다.



    하지만 設令 그런 部分이 있다 하더라도 萬若 이 땅에서 다시 戰爭이 勃發한다면, 老軀를 이끌고라도 銃을 들고 싸우겠다는 靑年精神을 가진 우리 世代의 國家史랑, 家族사랑이 消耗的인 理念論爭 속에 그저 ‘할배들의 주책’쯤으로 罵倒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우리 世代는 한 사람 한 사람이 映畫의 主人公처럼 波瀾萬丈한 人生을 살아왔다. 어려서는 太平洋戰爭을 間接 經驗했고, 學窓 時節에는 光復을, 成人이 돼서는 6·25戰爭을, 그리고 壯年이 돼서는 베트남戰爭을 經驗했다. 또한 4·19와 5·16, 3次에 걸친 經濟開發 5個年 計劃, 그리고 10·26事態와 民主化運動을 精神없이 거쳐왔다. 나 個人的으로도 記者 生活과 公職 生活을 하면서 現代史를 直接 目擊했고, 個人的으로 浮沈 많은 人生을 걸었다.

    문득 老人이 되어 돌이켜 보니, 그 過程이 正말로 한瞬間에 지나간 것 같다. 하지만 우리 世代는 靑年 時節에 함께 목숨을 걸고 自由 大韓民國을 死守하기 위해 싸웠고, 産業化 時代에는 저마다의 位置에서 大韓民國을 富强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犧牲과 努力을 다한 現代史의 산證人들이라고 自負한다.

    내 짧은 筆力으로는 우리 世代의 經驗과 눈물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 다만 우리 世代가 목숨보다 所重하게 여긴 ‘自由’나 ‘家族’에 對한 熱情과 責任感을 後世들이 있는 그대로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誇張된 包裝도, 强要된 監査도 아닌 있는 그대로 우리 人生을 바라봐주었으면 한다.

    그늘 속의 老兵들

    現在 6·25 參戰勇士 18萬餘 名이 生存해 있다. 大韓民國을 지켜내고 발전시킨 主人公들이 이 社會에서 ‘廢品’이 되어 尊敬은커녕 無視의 對象이 되어버린 現實에 悲哀感을 감출 수 없다. 大韓民國 發展에 寄與했지만 이제는 放電된 배터리 身世가 되어 쓰레기 取扱을 當하는 同志들과 나 自身을 보면서, 大韓民國 社會에 對해 背信感마저 든다.

    다 늙은 老兵의 푸념이라 해도 좋다. 하지만 大韓民國 社會는 國家와 民族을 위해 一生을 바친 老兵들에 對한 禮遇에 對해 只今이라도 眞摯하게 苦悶해야 한다. 美國의 알링턴 國立墓地에서는 해마다 6·25 參戰 記念行事를 하고, 美國 政府는 參戰 老兵들을 招待해 最大의 例를 갖춘다. 그런데 정작 當事國인 우리의 歷代 政府는 무엇을 했는가. 政府가 無視하니까 國民도 無視하는 것이다.

    只今 病床에 누워 있는 나의 同志들 中에는 6·25戰爭 中에 負傷을 當하고도 이를 숨기고 戰場으로 뛰어나간 이가 많다. 共産軍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보니 ‘傷痍勇士登錄’을 拒否한 이도 많다. 그런데 只今 그걸 後悔하는 이가 적지 않다. 나이 들어 病院 治療가 必要한 時期에 醫療支援 惠澤이 너무나 不足해 經濟的 負擔이 크다 보니 參戰手當으로 받는 18萬 원 안팎의 돈으로 堪當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MRI(磁氣共鳴映像裝置) 같은 값비싼 檢査나 診療는 하나도 支援되지 않는다.

    甚至於는 6·25戰爭 記念事業會조차 參戰勇士 中心이 아니라 엉뚱한 人士들에 依해 主導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보니 參戰 勇士들이 自身의 어려움을 呼訴할 수 없는 組織이 되어버린 듯하다.

    또한 政府가 4大江 事業, 無分別한 地自體 事業, 無償給食, 普遍的 福祉 等에는 莫大한 豫算을 퍼부으면서 老兵들의 診療費 支援 豫算을 아낀다는 것은 正말 부끄러운 일이다. 18萬餘 名의 生存 參戰勇士들이 모두 떠나고 나면, 6·25라는 戰爭을 記憶하는 사람이 果然 있을까. 大韓民國은 이들의 마지막을 서글프게 하지 말았으면 한다.

    아낌없이 주고 떠나는 마지막 잎새
    채병률

    1930年 平壤 出生

    檀國大 法廷과 卒業, 서울대 新聞大學院 履修

    國家再建最高會議 內務分課委員會 民政補佐役

    새마음奉仕團 總裁補佐役

    現(寺)失鄕民中央協議會 會長


    政府는 只今이라도 報勳政策을 改善해 잊힌 그늘에서 苦痛 받고 呻吟하는 大韓民國의 老兵들을 따뜻하게 慰勞해야 한다. 그들은 비록 老衰해 韓國 社會라는 잘 자란 나무에서 마지막 잎새처럼 살고 있지만, 그들이 大韓民國이라는 나무에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고 아무 말 없이 떠난다는 事實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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