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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心, 酒類 欲望 내던진 事由, 創作의 邊方|新東亞

中心, 酒類 欲望 내던진 事由, 創作의 邊方

박경리·윤이상의 故鄕 統營

  • 정윤수 | 文化評論家 prague@naver.com

    入力 2015-05-20 1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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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邊두리 出身이어서 邊方 意識을 獲得하는 게 아니다.
    • 中心, 主流로부터 審美的 거리와 緊張을 維持하면서 思惟의 힘을 維持해야 한다.
    중심, 주류 욕망 내던진 사유, 창작의 변방
    비가 내렸다. 주룩주룩, 내렸다.

    昌原에서 일을 보고, 統營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 언제 또 내려오랴 싶어 急히 小型車를 빌려 陣營을 向해 달리는데, 비가 내렸다. 많이 내렸다. 와이퍼의 往復 速度를 最高値로 올리고서야 겨우 視野가 確保됐다.

    運轉 經歷 20餘 年으로 어지간한 車는 다 몰아봤건만, 지난해 出市됐다는 이 小型車의 시트 포스트는 지나치게 낮게 잡혀 있어 昌原에서 陣營으로 가는 國道를 달리는데, 몸이 시트에 適應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다. 몸과 시트가 겉돌아 빗길 運轉이 힘들었다.

    嚴格하게 節制된 墓域

    예전에도 金海에서 한림을 거쳐 陣營으로 들어가는 14番 國道를 달린 적 있다. 그때 참으로 奇異한 風景을 봤다. 翰林에서 陣營 사이에 ‘家口 距離’가 形成됐는데, 道路 兩便으로 줄지어 선 家口 商街마다 ‘내레이터 모델’을 앞세워 呼客하고 있었다. 한두 가게도 아니고 모든 가게가, 十數 個 넘는 모든 가게가 스피커를 왕왕왕 시끄럽게 틀어놓고 짧은 치마에 바짝 달라붙는 배꼽 티를 입은 아가씨들이 춤을 춰가면서 呼客하는 場面이란, 참으로 奇異하고도 슬펐다. 다시 그것을 確認하고자 했으나 주룩주룩 비가 내려 國道邊을 살필 겨를이 없었고, 아마도 이토록 비가 내리는 날에는 그런 呼客 行爲도 삼갔을 것이다.



    비가 와서 次線은 죄다 지워져버렸고, 地方의 國道邊이 어디나 그렇듯 제대로 整理되지 않은 道路 周邊의 끝없이 無秩序한 風景은 安全運轉을 攪亂했다. 그 바람에 오직 내비게이션에서 쉴 새 없이 들려오는 左回轉하세요, 右回轉하세요, 前方에 미끄럼 注意 區間입니다 하는 警告音에 귀를 바짝 세우고, 달리고, 또 겨우 달려서 陣營에 當到했다.

    陳永, 이라고만 써도 될까. 暫時 생각해본다. 烽下마을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금세 알아듣겠지만 이러한 呼名은 瞬息間에 金屬性의 날카로운 政治性을 發現한다. 그렇다고 진영읍 본산리 30番地라고 쓸 수도 없고 故(故) 盧武鉉 大統領 墓域이라고 쓰기에도 不便하다. 이런 行政 地番은 곧잘 어떤 알리바이로 들리기 때문이다. 살았을 적에도 그러했고 逝去 以後에도 오늘의 政治와 社會에 緊急한 問題로 늘 浮刻되는 盧武鉉 前 大統領과 關聯해 지나가는 ‘行人 1’의 觀點에서 몇 글字 쓰는 것조차 어찌 이토록 힘겨운지, 다시 實感한다.

    어쨌든 다들 烽下마을이라고 하고, 또 뉴스에서도 地名의 뜻으로든 아니면 政治的 意味로든 어지간하면 다들 烽下마을이라고 하니, 달리 말을 찾아서 마음을 平靜시키기보다는 슬쩍 그 말에 기대어 烽下마을로 들어섰다. 平日 낮 주룩주룩 비가 오는데도 參拜客이 적지 않았다. 이 墓域의 特徵답게 아이들을 데리고 參拜하러 나선 젊은 夫婦들이 三三五五 걷거나 서서 비를 맞고 있는 墓域을 바라봤다. 墓域은 낮게 造成됐고, 그 너머 오른便으로 獅子바위, 그리고 또 왼便으로 부엉이바위가 보였다. 비가 烽下마을 全體를 다 적시고 있었다. 嚴格하게 節制된 墓域이었다.

    分斷의 致命的 傷痕

    대추나무 뒤便 하늘은 벌써 짙은 보라色이다. 나는 보라色을 싫어한다. 손톱에 들이는 봉숭아물도, 닭 벼슬 같은 맨드라미꽃도, 코스모스의 보라色 꽃도 다 싫다. 어머니의 젖꼭지 色깔까지도 싫다. 보라色은 어쩐지 아버지의 하는 일을 떠올리게 해주고 어머니의 피멍 든 얼굴을 생각나게 한다. 보라色은 또 말라붙은 피와 같고 깜깜해질 徵兆를 보이는 色깔이다. 옅은 보라에서 짙은 보라로, 그래서 야금야금 어둠이 모든 것을 잡아먹다가 끝내 깜깜한 밤이 온다는 것은 참으로 무섭다.

    慶南 陳永 出身 김원일이 쓴 短篇小說의 한 대목이다. 小說 속의 少年(아마도 어린 時節의 小說家 本人의 肖像인 듯)은 보라色으로 물드는 저녁이 싫었다. 그것은 곧 밤의 徵兆였고, 밤은 索莫한 沈默과 머리칼을 곤두서게 하는 緊張으로 덧漆된 暗黑이었으며, 또한 그 어둠은 죽음을 向해 直進하는 一方通行路였다. 끝내, 小說의 밤에 巡警이 들이닥치고 銃聲이 울려퍼지고 아버지는 쑥대밭이 된 곳을 뒤로하고 山으로 도망쳤으며 어머니는 支署로 끌려간다. 少年은 소리 죽여 운다. 그때, 달은 보라色 하늘에 걸려 있었다. 길지 않은 時間이 흐른 後 아버지는 逮捕돼 모진 拷問 끝에 싸늘한 屍身으로 돌아온다. 少年은, 피 칠갑을 한 채 턱이 붓고 입은 커다랗게 벌어진 아버지의 屍身을 본다. 어릴 적 무릎에 앉아 才弄을 떨던 넉넉한 가슴은 ‘그 두려운 보라色으로 變하고’ 말았다.

    김원일은 短篇 ‘어둠의 魂’을 擴張해 長篇 ‘노을’을 썼고, 戰爭과 分斷의 致命的 傷痕들을 불러 모아 大河長篇 ‘불의 祭典’을 썼다. 김원일의 이 小說에 對해 細部的인 ‘地政學的’ 批評을 한 사람은 亦是 陳永 出身의 김윤식이다. 1936年 윤삼월에 진영읍 사산리에서 태어난 金允植은 서울대 停年退任 告別 講演 ‘갈 수 있고, 가야 할 길, 가버린 길’에서 “제가 자란 곳은 마을에서도 떨어진 江가 포플러 숲이었지요. 낮이면 포플러 숲의 까마귀와 메뚜기, 뒤뜰 참새를 벗하며 그들의 言語에 친숙했지요”라고 回想했다. 그는 사산리에서 十里 길을 걸어 대창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몇 年 아래로 小說家 김원일이 다녔고 또 그 4年 後輩로 盧武鉉 前 大統領이 그 學校를 나왔다.

    중심, 주류 욕망 내던진 사유, 창작의 변방

    김해시 진영읍 盧武鉉 前 大統領 墓域.



    陣營의 보랏빛 하늘

    金允植은 김원일의 ‘노을’을 아주 詳細하게 읽는다. 예컨대 그는 ‘노을’에 나오는 綴하, 물桶걸, 陳永 같은 指名에 對해 解明하면서 “山기슭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뿐이었는데, 修理施設과 鐵道 通過로 말미암아 四方에서 뿌리 뽑힌 者들이 모여들었던 것. 日帝强占期에 이미 邑으로 昇格할 만큼 發達한 陣營은 단감 生産의 最適地로 判明되어 日人들이 다른 어느 곳보다 많이 몰려들었다. 陳永·金海 사람을 빼면 釜山 刑務所가 텅 빈다는 俗說만큼 여기에 모인 住民들의 性向을 잘 말해주는 것은 많지 않다. 左右翼 싸움이 유별나게 벌어진 곳”이라고 썼다.

    바로 그 ‘유별난 싸움’을 記錄한 것이 김원일의 小說이다. 農産物이 集約되는 곳이었기에 爭議의 素地가 多分했고, 그래서 光復 以後 左右 對立이 激烈했으며 及其也 6·25戰爭 中에는 慶南 南部 地域에서 가장 激烈한 左右 爭鬪가 펼쳐진, 그리하여 이 地域 사람들의 家計는 分斷 以後의 南北關係 모두에 핏줄을 나눌 수밖에 없는 形便이 되고 말았다.

    김원일은 長篇 ‘노을’을 發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時點에 陳永 出身의 어느 辯護士로부터 ‘小說을 잘 읽었다’는 電話를 받는다. ‘陳永 出身의 辯護士가 몇 안 되니 아마 그 辯護士가 盧 大統領 아닌가’ 하고 김원일은 回顧한 적 있다. 萬若 이 回顧가 맞다면 그 電話는 單純히 同鄕 出身의 有名人士들이 ‘트고 지내려고’ 人事치레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노을’에 對한, 陣營의 슬픔에 對한, 이 韓半島의 쓰라린 傷處에 對한 答禮일 것이다.

    김원일의 小說 ‘노을’은 금병산과 烽火山에 對한 멀미 나는 描寫로 끝이 난다. 이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왜 김원일이 陣營을 물들이는 노을을 ‘붉은色’이 아니라 ‘보라色’으로 描寫했는지 斟酌할 수 있다.

    노을은 山과 가까운 쪽일수록 燦爛한 金빛을 띠고 차츰 距離가 멀어질수록 보라色 쪽으로 여리어져, 노을을 單純히 붉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仔細히 보면 그 속에는 여러가지 色이 巧妙히 섞여 있음에도 사람들은 노을을 붉다고만 말한다. 津노란色, 옅은 푸른色, 灰色도 저 속에 섞여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世上 사람들은 그렇게 무엇인가 뭉뚱그려 區別지어버리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비에 젖은 統營, 東피랑마을

    나는, 봄철이라 해가 길어지기는 했지만, 暴雨 때문에 統營이 너무 일찍 어두워질 것을 念慮하며, 烽下마을에서 統營 쪽으로 길을 서둘렀다. 길게 旋回하는 高速道路 代身 馬山을 貫通해 固城에서 統營으로 直下하는 國道를 잡았다. 길은 平坦했으나 비가 視野를 가렸다.

    統營에 當到해 于先 東피랑마을을 찾아갔다. 巨濟島와 南海島 사이, 바다로 뻗어나온 固城半島 끝자락에 統營이 있고 그中 높은 곳에 東피랑마을이 있다. ‘東피랑’은 東쪽에 있는 備郞(비탈의 統營 사투리)이라는 뜻으로 實際 住所地인 統營市 정량동, 태평동 一帶 山비탈 마을을 가리킨다.

    이 높은 마을에 올라서면 왜 統營이 三道水軍統制使英(三道水軍統制使營)이었는지 금세 알 수 있다. ‘統制私營(統制使營)’을 줄인 것이 ‘統營’이다. 옥포海戰, 한산大捷, 泗川海戰, 唐布大捷 等 壬辰倭亂 때 수많은 戰鬪가 벌어진 激戰의 要衝地이자 釜山에서 麗水까지 이어지는 南海岸 뱃길의 核心 據點이다. 한때 巨濟와 馬山과 南海에 地域 中心處 地位를 빼앗겼으나 2001年 統營 大田을 잇는 高速道路가 開通하면서, 그리고 尹伊桑·박경리·전혁림 等의 文化 資産이 全國的 사랑을 받으면서 統營은 은성(殷盛)韓 港口都市로 거듭나고 있다. 東피랑마을에 올라서면 그것을 實感할 수 있다.

    중심, 주류 욕망 내던진 사유, 창작의 변방

    東피랑마을에서 내려다본 統營.

    ‘壁畫마을’의 여러 얼굴

    중심, 주류 욕망 내던진 사유, 창작의 변방

    東피랑은 ‘壁畫 마을’로 有名하다.

    빗줄기가 바닷바람에 依해 斜線으로 몰아치는 中에도 東피랑 언덕에 올라 寫眞을 찍고 비좁은 골목 사이로 散策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오직 東피랑만을 보려 統營을 찾아온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于先 東피랑부터 訪問하고 보는 것이 最近의 흐름임은 틀림없다.

    釜山의 甘川마을과 더불어 이곳 統營의 東피랑마을은 이른바 ‘壁畫마을’의 先驅的이고 模範的인 洞네로 有名하다. ‘東쪽 벼랑’이란 뜻의 東피랑마을은 2006年까지만 해도 再建築이 豫定된 낡은 달동네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정겹게 살아가던 마을이 再建築으로 一擧에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푸른統營21 推進協議會’의 윤미숙 前 事務局長이 企劃하고 全國의 美大生들이 마음을 더해 壁畫를 그린 게 只今의 東피랑마을로 進化했다.

    事實 가난한 洞네에 壁畫를 그리는 流行에 對해 적지 않은 批判이 있어왔다. 生活環境 改善에 觀光事業까지 된다 해서 全國의 地自體들이 自己네의 가난한 洞네들을 두서없이 壁畫마을로 定해 最小限의 美的 基準이나 場所의 意味도 考慮하지 않고 덮어놓고 壁畫를 그려대는 風土가 蔓延했다.

    特히 仁川 中區 송월동의 ‘東和마을’ 壁畫는 地自體가 住民과 地域 藝術家들의 反對에도 오직 ‘觀光事業’이라는 目的을 앞세워, 實際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킨 代表的인 곳이다. 國籍 不明의 粗雜한 그림을 가난한 洞네의 壁과 담에 잔뜩 그려 넣는 것에 對해 自省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當然한 일이다. 마을의 意味와 正體性, 마을에서 實際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生活 感覺과 情緖를 考慮하지 않은 壁畫란 오히려 마을을 粗雜한 구경거리로 전락시킨다.

    東피랑 住民들과 藝術家들이 現況을 反省的으로 돌아보면서 새로운 摸索을 했다는 것 自體가 意味 있다. 東피랑 住民들과 藝術家들은 이 奇異한 熱氣를 되새기면서 參與作家 公募, 住民 共同企劃, 이야기가 있는 壁畫 그리기, 마을 壁畫와 公共性 討論 等을 아울러 展開했다. 東피랑의 빈집 가운데 다섯 채를 리모델링한 後 畫家, 作家, 音樂家들이 入住해 住民들과 함께 生活하면서 個別 作業을 하는 것도 이 東피랑의 美德이다. 住民 모두가 組合員으로 登錄된 東피랑生活協同組合이 마을의 記念品 販賣店 等을 運營하고 그 收益金을 住民 全體의 共同 利益을 위해 活用하는 것도 이 마을의 特色이다.

    東피랑마을의 自生性을 마련한 윤미숙 氏는, 통영시의 不當解雇에 맞서 勝訴했고 現在는 全南道廳 所屬으로 全南의 섬 가꾸기 프로젝트 總括企劃團長을 맡고 있다. 2000餘 個의 섬마을을 持續可能한 곳으로 再生하는 事業이다.

    중심, 주류 욕망 내던진 사유, 창작의 변방

    統營市 朴景利記念館.

    두루미 목만큼 좁은 陸路

    東피랑에서 내려와 더 어두워지기 前에 小說家 박경리의 墓所와 記念館이 있는 곳으로 向했다. 내비게이션은, 박경리 小說의 母胎가 되는 初期 代表作 ‘김약국의 딸들’의 背景이 되는 강구안을 一旦 벗어나라고 가리킨다. 1962年 作品임에도 小說의 첫 대목은 只今의 統營 風景을 그대로 보여준다.

    統營은 多島海 附近의 조촐한 漁港이다. 釜山과 麗水 사이를 來往하는 航路의 中間 地點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朝鮮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닷빛은 맑고 푸르다. 南海岸 一帶에 있어서 南海島와 雙璧인 큰 섬 巨濟島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玄海灘의 거센 波濤가 迂廻하므로 港灣은 잔잔하고 四철은 溫暖하여 매우 살기 좋은 곳이다. 統營 周邊에는 無數한 섬들이 衛星처럼 散在하고 있다. 北쪽에 두루미 목만큼 좁은 陸路를 빼면 統營 亦是 섬과 별다름 없이 四面이 바다이다. 벼랑가에 얼마쯤 圃田이 있고 언덕빼기에 집들이 松耳버섯처럼 들앉은 氣勢는 貧弱하다.



    小說이 描寫한 대로 ‘두루미 목만큼 좁은 陸路’를 통해 이 섬 아닌 섬에 들어선 나는 언덕배기에 ‘松耳버섯처럼 들앉은’ 집들과 골목을 徘徊하고 나서 港口를 暫時 빠져나갔다. 小說의 始作은 잔잔하지만 實은 이 作品은 文弱하고 선비的인 김약국의 主人 김봉제 집안의 激情的인 風飛雹散을 다루고 있다. 激動期의 삶들이 侃諤함과 癡情과 欲望의 굴레에 갇혀 허우적대다가 破局을 맞는 作品이다. 大河小說 ‘토지’와 더불어 朴景利는 이렇게 한 집안의 沒落과 그로 인한 悲劇을 平生의 主題로 삼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車窓 밖으로 짭짤한 바람을 暫時 맡은 後, 곧 車를 몰아 박경리 墓所로 10餘 分을 달려갔다. 十數 年 前 原州 自宅에서 찾아뵈었을 때처럼 이곳 墓所도 儉朴하게 丹粧돼 있었다. 當代 最高의 作家임에도 誇示的인 造形과 裝飾을 찾아볼 수 없으니 오히려 마음을 묵직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先生의 親筆을 그대로 따온 ‘朴景利’ 세 글字는 小說 以外의 것에 嚴格했던 作家精神의 斷乎한 表現처럼 보였다. 墓所 아래에, 山기슭에, 端正하게 자리 잡은 記念館 또한 박경리의 作家精神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다시 車를 몰아 統營 市內로 돌아왔다. 해는 길어졌으나, 빗줄기에 依해 至毒히도 흐린 날씨가 되었기에 港口都市는 벌써부터 하나둘씩 불빛을 밝혔다. 直線으로 廣闊하게 펼쳐진 東海岸의 港口들과 달리 麗水와 南海와 이곳 統營은 들고나는 地形地物의 形態를 따라 港灣과 市場과 道路가 形成돼 있어서, 저녁 무렵 불이 밝혀지면 놀라운 風景이 펼쳐진다. 일부러 人工 照明으로 都市를 治粧할 必要가 없는, 그런 風景이다.



    傷處 입은 龍

    統營 한복판에 造成된 尹伊桑記念公園으로 갔다. 若干은 崎嶇한 場所가 됐다. 統營市는 몇 해 前부터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조금씩 지우고 있다. 그가 치른 政治的 事件과 行跡의 一部分을 誇張해 세차게 非難하는 境遇들이 있어 尹伊桑이라는 이름으로 國際的인 音樂 文化를 創出했던 地自體가 이제는 그 이름을 조금씩 削除하는 中이다. ‘尹伊桑國際音樂祭’가 ‘統營國際音樂祭’로 바뀌었고 ‘尹伊桑國際音樂堂’도 ‘統營國際音樂當’으로 바뀌었다. 그의 生家터에 造成된 記念公園度 尹伊桑이라는 이름 代身 ‘도천테마파크’를 公式的으로 쓰고 있다. 作曲家 윤이상의 生家터에 윤이상을 記念하는 公園을 造成하고 윤이상의 遺品을 展示해놓고는 정작 尹伊桑이라는 이름 代身 ‘도천테마파크’라고 부르니, 낯설고 괴이쩍다.

    小說家 루이제 린저와 大膽한 記錄에 따르면 그는 胎生的으로 苛酷한 運命의 傷處를 가진 音樂家다. 윤이상이 어머니로부터 일곱 살 즈음에 들었다는 胎夢이 그것이다.

    ‘한 마리 龍이 꿈틀거리며 飛翔을 한다. 푸른 하늘보다 더 燦然한 비늘을 퍼득이며 龍은 떠오른다. 옛적부터 靈山으로 꼽히는 智異山 위를 非常하던 龍은 이윽고 하늘로 오르기 위해 온 힘을 쓴다. 그러나 龍은 오래前부터 傷處를 입고 있었다. 하늘로 오르기는커녕 더 以上 飛上할 힘마저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윤이상을 ‘傷處 입은 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윤이상은 1917年에 慶南 統營에서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3·1運動이 일어나기 2年 前인 1917年은 韓國 民族音樂史의 가장 重要한 人物인 윤이상과 김순남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日本 오사카에서 現代音樂을 익힌 윤이상은 戰爭이 끝난 後 서울로 올라와 精力的인 活動을 펼치고 光復 以後 韓國 音樂界의 主導的 作曲家로 인정받는다. 1956年 그는 絃樂 四重奏 1番과 피아노 3重奏로 서울市 文化相을 受賞했다. 바로 그해 윤이상은 유럽으로 떠난다. 暫時 파리를 經由해 物情을 確認한 後 베를린으로 據點을 옮겼는데 그곳이 平生의 流浪地價 됐고, 그곳에서 南北 分斷에 따른 事件을 겪었으며 그 일로 끝내는 永久 歸國을 하지 못한, 傷處 입은 龍이 됐다.

    音樂家로서 윤이상은, 현대의 急進 아방가르드 傾向을 주도함은 勿論 東西洋의 葛藤과 交叉와 緊張과 對話라는 물음을 五線紙로 提出했다. 1959年 作 ‘일곱 樂器를 위한 音樂’을 始作으로 ‘바라’(1960),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家事’(歌辭·1963), 오페라 ‘류퉁의 꿈’(1965), 臺管絃樂을 위한 ‘禮樂’(1966), 오페라 ‘나비의 未亡人’(1967~68), 混聲合唱과 打樂器를 위한 ‘나비의 꿈’(1968), ‘첼로와 管絃樂을 위한 協奏曲’(1975~76), 誤報에·하프·관현악을 위한 二重 協奏曲 ‘견우와 織女 이야기’(1976), 1980年代에 나온 5個의 交響曲이 그가 내놓은 答案紙다.

    가장자리의 소용돌이

    그 答案紙는, 신영복의 ‘邊方意識’이라는 槪念으로 보자면 東北亞의 南端 港口 統營에서 태어나 유럽 音樂 文化의 聖地 베를린에서 活動한, 그러나 그 어느 쪽에도 完全히 歸屬되거나 編入되지 않고, 그 兩 文化의 邊方을 끝없이 서성거린 境界人이자 邊方人이 提出한 것이기에 큰 注目을 받았다.

    다시 말해 신영복의 ‘邊方意識’이란 ‘中心으로부터 地理的으로 멀리 떨어진 邊두리’라는 意味가 아니라 權力의 中心, 文化의 主流로부터 意識的으로 멀리 떨어져 끝없이 가장자리의 소용돌이를 自己 作品의 滋養分으로 삼는 思惟와 創作의 邊方을 말한다. 邊方은 會議하고 되묻고 摸索하는 자리다. 眞正한 變化와 創造는 그 激流가 휘몰아치는 邊方에서 發生한다. 신영복은 “낡은 것에 對한 冷徹한 覺醒과 그것으로부터의 果敢한 訣別”李 邊方意識이라고 말한다. 이 激烈한 事由가 ‘中心에 對한 劣等意識’을 떨쳐버리게 한다.

    그러니 그저 地理的으로 ‘邊두리’ 出身이라고 해서 自動的으로 ‘邊方意識’李 獲得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中心이나 主流로부터 審美的 거리와 緊張을 維持하는 것, 中心과 主流에 編入되려는 欲望을 制御하고 그 보이지 않는 懷柔를 拒絶하며 ‘思惟의 힘’을 維持하는 것이 重要하다. 統營 사람 윤이상이 베를린에서 오랫동안 活動할 수 있었고, 또 그 結果物이 그 흔한 오리엔털리즘, 卽 ‘西洋 화성악에 東洋 精神을 담았다’는 式의 陳腐하고 낮은 水準에 갇히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疏外와 隔絶感을 스스로 選擇했기 때문이다.

    暫時 비를 避해 記念館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의 遺品이 展示돼 있었다. 境界인 윤이상의 筆記具와 옷가지와 冊床이 있었고 旅券, 큼직한 旅行 가방도 있었다. 그리고 여러 冊子와 記事와 音樂會 팸플릿을 통해 눈에 익숙한 그의 커다란 肖像 寫眞이 걸려 있었고, 그 옆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愛國者 尹伊桑’

    …. 엉킨 실타래처럼 여러 가지 생각이 갑자기 몰려들었다. 境界에 선 音樂家 윤이상, 邊方意識의 藝術家 윤이상이 그 記念館 안에서는 ‘愛國者’라는 이름으로 强調돼 있었다. 이런 呼名이 아니고서는 故鄕에 머무를 수도 없는 한 藝術家의 生涯, 그 傷處 입은 生涯가 逆說로 도드라졌다.

    중심, 주류 욕망 내던진 사유, 창작의 변방

    통영시 도천테마파크에 展示된 윤이상의 遺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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