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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스의 心臟, 눈앞의 傳說|新東亞

비틀스의 心臟, 눈앞의 傳說

첫 來韓 公演 ‘大박’ 폴 매카트니

  • 임희윤 | 동아일보 文化部 記者 imi@donga.com

    入力 2015-05-22 09: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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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의 舞臺는 꿈과 現實이 불꽃을 튀기며 結合한 巨大한 化學實驗室이었다. 七旬을 넘겨 드디어 韓國을 찾은 폴 매카트니(73)는 4萬餘 韓國 팬 앞에서 音樂史에 남은 名曲들을 잠깐의 짬도 없이 쏟아냈다. 사라져야만 ‘傳說’인가. 그는 只今도 비디오게임 엔딩 송을 만들고 젊은 팝스타와 協業하는 ‘現役’이다.
    비틀스의 심장, 눈앞의 전설
    비틀스는 4名(존 레넌,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이지만 大部分의 노래는 레넌과 매카트니가 作曲했다. 그中에서도 가장 ‘永遠’에 가까워 보이는 絶對的인 팝 멜로디 ‘Yesterday’ ‘Let it be’ ‘Hey Jude’의 旋律을 만든 건 매카트니다. 그는 비틀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를 쓴 作曲家이자 프로듀서 조지 마틴과 함께 絃樂 編曲·指揮를 한 新古典主義者이며, 大衆音樂史에 길이 남을 實驗的 明礬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1967)를 推進한 實驗家이고, 獨創的인 베이스기타 演奏者다. 傳說에 搏動하는 心臟이 남아 있다면 그건 비틀스의 두 生存 멤버(스타와 매카트니) 中 하나, 매카트니다.

    그가 비틀스 全盛期부터 近來까지 數도 없이 日本을 訪問하면서 單 한 番도 韓國 땅을 밟지 않은 것은 슬픈 不可思議였다. 그러나 5月 2日, 마침내 成事된 그의 첫 來韓 公演은 國內 팝 愛護 歷史에 一大 事件이었다.

    매카트니는 5月 1日, 80餘 名의 스태프를 帶同하고 自身의 傳貰機로 金浦空港에 到着했다. 400餘 名의 팬이 空港에 몰려나왔다. 그의 宿所는 서울 江南 R호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매카트니 側이 韓國 主管社에 “宿所는 발코니가 있는 곳으로 잡아달라”고 付託했기 때문이다. 客室에 데이지 꽃이 담긴 花甁도 놓아달라고 注文했다.

    100萬 원짜리 ‘사운드체크’ 티켓

    비틀스의 심장, 눈앞의 전설

    韓國 公演 後 폴 매카트니가 自身의 트위터에 올린 寫眞과 글.

    그가 데려온 스태프 中엔 料理師들도 있었다. 1975年부터 菜食을 固守하는 매카트니를 위해 이들은 每日 菜蔬로 만든 食事를 準備한다. 海外 스태프는 勿論 國內 公演 主管社 스태프들도 그의 訪韓 期間에 매카트니와 같은 菜食 食單을 消化해야 했다.



    2日 밤부터 쏟아진 ‘160分 동안 물 한 盞 안 마시고…‘할배’ 매카트니의 熱情’流의 國內 리뷰 記事들은 이 七旬 팝스타의 精力을 折半만 보고 作成된 것이다. 記者는 公演 當日인 2日 낮, 매카트니를 다른 國內 媒體나 팬들보다 4時間 먼저 볼 機會가 있었다. 그의 첫 來韓 公演이 열릴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主競技場 舞臺에서 午後 4時부터 進行된 사운드체크에 參席한 것.

    사운드체크는 公演 리허설의 一部인데, 매카트니가 밴드 멤버들과 함께 모든 기타와 鍵盤의 音響을 테스트하는 時間이다. 말이 ‘체크’地, 실은 少數의 팬을 위한 特別 콘서트다. 國內 티켓 豫賣處에서는 팔지도 않는 100萬 원짜리 ‘사운드체크 패키지’를 海外 VIP 專用 豫賣 사이트를 통해 購買한 骨髓 팬 230名을 위해 매카트니는 1時間 동안 渾身을 다해 연주했다. 記者와 팬들은 舞臺에서 50m 떨어진 安全線 밖에서 사운드체크를 지켜봤다.

    매카트니는 實際 公演하듯 11曲을 내리 연주했다. 레퍼토리 大部分은 본 公演에선 연주하지 않은 曲이었다. 骨髓팬들의 要請을 받은 ‘Got to Get You into My Life’ ‘C Moon’ ‘Ram On’ ‘Bluebird’ ‘Honey Don‘t’ 같은 노래들. 1960年 英國 리버풀, 獨逸 함부르크의 地下 클럽부터 55年 舞臺 人生을 톱스타로 보낸 그에게 多情한 人事와 動作 큰 舞臺 매너, 完熟한 演奏로 고작 230名의 팬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은 식은 粥 먹기였다. 그러니까 그는 2015年 5月 2日 서울에서 160分이 아니라 220分 동안 舞臺에 선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밤 콘서트. 數도 없이 들은 ‘Yesterday’ ‘Let It Be’ ‘Hey Jude’ ‘Blackbird’ ‘The Long and Winding Road’ ‘Obladi-Oblada’를 ‘바로 그 목소리’로 들은 2時間 40分 동안 蠶室은 꿈과 現實이 불꽃을 튀기며 結合한 巨大한 化學實驗室이었다. 더구나 비틀스의 後記 앨범인 ‘Sgt. Peppers…’ ‘The White Album’ ‘Abbey Road’ 收錄 曲이 演奏될 때 ‘非틀마니아’(비틀스 狂팬)의 가슴은 두 倍로 뛰었을 것이다.

    매카트니는 1966年 美國 巡廻公演 以後 콘서트 活動을 全面 中斷하고 解體 때까지 스튜디오에 틀어박혀 갖가지 音響 實驗에 沒頭했다. 이때 비틀스는 라이브 演奏에 싫症이 났고, 라이브로 演奏되기 힘든 大哭을 여럿 만들어냈다. ‘Being for the Benefit of Mr. Kite’ ‘Helter Skelter’ 같은 曲이 라이브로 具現될 때의 現場感은 奇妙했다. 불꽃과 爆竹, 照明과 레이저를 活用한 華麗한 舞臺 演出은 映畫 ‘007 죽느냐 사느냐’ 主題曲인 ‘Live and Let Die’에서 絶頂을 이뤘다. “韓國 兆와요!” “데·#48401;” “남座들만(불러봐요)” 하는 韓國語 코멘트와 동그란 눈, 귀여운 舞臺 매너는 그가 왜 ‘큐트 비틀’로 불리는지 새삼 일러줬다.

    “韓國, 조와요오우!”

    記者가 2013年 11月 日本 오사카 교세라돔에서 觀覽한 매카트니 콘서트와 演出과 內容 面에서 거의 같았지만 野外 스타디움이라는 公演場 環境과 觀客 平均 年齡이 日本보다 낮은 客席의 뜨거운 雰圍氣는 公演을 더 특별하게 했다. 매카트니는 舞臺 위에서 眞짜 感動받은 表情이었다.

    日本 客席에는 1960年代 비틀스가 日本을 찾았을 때부터 줄곧 비틀스와 매카트니의 音盤과 公演 티켓을 사온 60代 以上 마니아가 많았다. 韓國에 비하면 지나치게 차분했지만, 거의 모든 曲을 따라 부르며 눈물짓는 壯年 팬들이 채운 日本 客席 雰圍氣 亦是 깊은 印象을 남겼다. 매카트니 訪問 前부터 오사카의 레코드店에선 비틀스와 매카트니의 노래가 繼續 흘러나왔고, 賣場 안은 매카트니의 書籍과 音盤, 포스터로 뒤덮여 祝祭 雰圍氣를 만들어냈다.

    七旬을 넘겨서야 처음 訪韓한 그를 다시 한 番 이 땅에서 볼 수 있을까. 매카트니의 强한 滿足度는 靑信號다. 그는 公演 뒤 宿所로 移動하는 투어 버스 안에서 “韓國, 조와요오우!”를 외쳤고, 自身이 太極旗를 들고 나와 흔드는 寫眞을 트위터에 揭載했다. “韓國은 正말 幻想的이다”는 말과 함께.

    韓國 觀客의 유별나게 뜨거운 呼應은 有名하다. ‘韓國에 한 番도 안 온 音樂人은 있어도 한 番만 오는 音樂人은 없다’는 말은 이제 公演 市場의 格言이 됐다. 英國의 人氣 록밴드 트래비스는 몇 年 前 來韓 公演 때 觀客이 한瞬間 一齊히 舞臺를 向해 날린 노란 종이飛行機 數千 個에 感動했다. 멤버들은 스태프에게 “舞臺로 날아온 종이飛行機를 全部 싸서 짐에 넣어달라. 英國에 가져가겠다”고 했다. 英國과 美國의 록 音樂界에선 ‘韓國 가봤냐? 아직 안 가봤어? 꼭 가봐’ 하는 귀띔이 떠돈다는 所聞이 있다.

    매카트니의 鋼鐵 體力도 ‘예스’를 말한다. 지난해 갑작스러운 健康 以上으로 韓國을 비롯한 一部 地域 公演을 取消할 때만 해도 그가 危篤한 게 아니냐는 推測이 亂舞했다. 그러나 休息 뒤 이어진 巡廻公演 强行軍을 통해 매카트니는 憂慮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한 가지 障礙物은 높은 개런티다. 公演 主管社는 밝히기 꺼리지만, 業界의 意見을 綜合해보면 매카트니의 이番 舞臺 出演料만 300萬 달러(藥 33億 원) 以上인 것으로 推定된다. 지난 몇 年間 ‘슈퍼콘서트’ 시리즈를 통해 팝 巨物을 꾸준히 데려온 현대카드의 머니 파워가 아니라면 消化하기 힘든 金額이다. ‘傳說의 첫 來韓’이란 弘報 포인트가 消盡된 두 番째 來韓이 얼마큼의 티켓 파워를 끌어낼지도 未知數다.

    이어지는 破格 行步

    지난해 매카트니는 두 가지 破格的인 行步를 보였다. 하나는 70代의 그가 曾孫子나 즐길 법한 X박스, 플레이스테이션用 1人稱 슈팅게임 ‘데스티니’의 엔딩 송을 作曲해 부른 것이다. 그 曲, ‘Hope for the future’를 그는 來韓 公演 때도 불렀다. 舞臺에 선 팝의 傳說 뒤로 보인, 컴퓨터그래픽 액션 場面이 펼쳐진 大型 스크린은 좀 非現實的이었다.

    또 하나, 그는 지난해부터 美國 래퍼 카니에 웨스트와 合作한 新曲을 시리즈로 내고 있다. 웨스트의 ‘Only one’ ‘Four five seconds’ ‘All day’에 기타나 鍵盤 演奏家, 보컬, 共同 作曲者로 參與한 것이다. 웨스트는 美國 有名 래퍼 제이지의 프로듀서로 出發해 스스로 最高의 래퍼가 됐으며, 電子音樂이나 프로그레시브 록의 形式을 힙합에 꾸준히 導入해 自己 世界를 構築해온 21世紀 팝의 革新가다. 팝스타 리아나, 웨스트와 매카트니가 나란히 포즈를 取한 ‘Four five…’ 싱글 앨범 表紙가 異彩롭다. 1982年 스티비 원더(‘Ebony and Ivory’), 마이클 잭슨(‘The Girl is Mine’)과 듀오로 名曲을 만들어낸 그가 33年 뒤 21世紀 팝스타와 또 천연덕스레 協業하고 있는 것이다.

    매카트니가 비틀스 時節(1960~ 1970), 10年間의 天才的 暴注로 以後 45年을 便하게 산 것만은 아니다. 그는 비틀스 解體 後 첫 番째 아내 린다를 비롯한 다른 演奏者들과 새 밴드 윙스를 結成했고 第2의 全盛期를 맞았다. 1970年代 ‘Another Day’ ‘My Love’ ‘Live and Let Die’ ‘Band on the Run’ ‘Silly Love Songs’ ‘Maybe I‘m Amazed’ ‘Mull of Kintyre’부터 1980年代 ‘No More Lonely Nights’, 1990年代 ‘Hope of Deliverance’, 2000年代 ‘Jenny Wren’에 이르기까지 그의 創作力과 挑戰 精神은 좀처럼 녹슬지 않았다.

    로큰롤 名譽의 殿堂 2回 獻額, 그래미 트로피 21回 受賞, 빌보드 싱글 차트 1位 曲 32篇 作曲, 音盤 1億 張 以上 販賣, 英國 騎士 爵位…. 매카트니의 足跡은 이런 數字나 名譽로만 환산되지 않는다. 비틀스 時節인 1966年, 비틀스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과 合作한 映畫 音樂 ‘The Family Way’는 매카트니의 클래식 作曲에 礎石이었다. 그는 이듬해 나온 비틀스의 不可思議한 대곡 ‘A Day in the Life’에서 마틴과 함께 40人組 오케스트라 指揮를 맡았고 後날 ‘Liverpool Oratorio’(1991) 以後 두 番째 오라토리오 作品인 ‘Ecce Cor Meum’(2006)으로 英國 클래시컬 브릿 어워드에서 最優秀 앨범賞을 받았다. 놀라운 것은 그가 樂譜도 볼 줄 모른다는 事實. 作曲할 때 컴퓨터의 도움을 받고 머릿속에 든 聽覺 이미지에 依存해 오케스트라를 指揮한다.

    그가 假짜라 해도

    비틀스의 심장, 눈앞의 전설

    비틀스 時節의 폴 매카트니(오른쪽).

    非現實的인 現在進行形 팝스타 매카트니는 그러나 뱀파이어가 아니다. 그의 人間的인 面貌는 歷史的인 業績과 別個다. 세 番 結婚한 그는 다섯 子女를 뒀다. 2011年에 18歲 年下의 美國 뉴욕 運送會社 相續女 낸시 쉬벨과 結婚했다.

    매카트니의 첫째 아내는 寫眞作家 린다 매카트니로 더 잘 알려진 린다 이스트먼(1941~1998). 비틀스 解體 直前인 1969年 맺은 매카트니와 린다의 百年佳約은 1998年, 그가 乳房癌으로 世上을 떠나기까지 이어졌다. 둘은 첫딸 헤더를 入養한 뒤 메리, 스텔라(패션 디자이너), 제임스를 낳았다.

    슬픈 나날을 보낸 매카트니는 린다가 떠난 지 4年 만인 2002年, 두 番째 아내 헤더 밀스와 結婚했다. 4年 만에 訣別했지만, 넷째 제임스 出生 後 26年 만인 2003年, 막내딸 베아트리스를 얻었다. 베아트리스는 매카트니의 寶物 1號가 됐다. 매카트니는 音樂 作業과 世界 巡廻公演으로 팍팍한 日程 속에서도 베아트리스와 1年의 折半을 함께하기로 約束했다. 지난해 取消된 來韓 公演의 재성사에 적잖은 時間이 걸린 데엔 七旬 딸바보의 ‘義務 空白期’도 한몫했다.

    늘 엉뚱하고 귀여운 魅力을 發散하는 매카트니는 死亡說, 大力說에도 휘말렸다. 1967年 以後 비틀스가 콘서트 舞臺에서 자취를 감춘 뒤 世上과 疏通을 줄이면서 생긴 一種의 陰謀論이다. 그가 1966~67年 어느 날 交通事故로 死亡한 뒤 그를 꼭 닮은 帶域이 活動한다는 說이다. 陰謀論者들은 그의 外貌와 목소리가 微細하게 變한 點을 指摘한다. 陰謀論 信奉者들은 如前히 ‘眞짜’는 오래前에 죽었다고 믿는다. 엘비스 프레슬리, 히틀러가 生存說 속에 如前히 살아 숨 쉬는 것과 反對로 매카트니가 異例的인 ‘死亡說’에 휩싸인다는 것 自體가 비틀스와 그의 傳說的 位相을 傍證하는 건 아닐까.

    記者는 지난해 陰性分析 專門家와 成形外科 專門醫에게 依賴해 매카트니 死亡說을 캤다. 그러나 2014年 5月 24日子 ‘東亞日報’ 18面(‘土曜뒷談, 비틀즈 폴 매카트니를 둘러싼 陰謀論’)이 말해주는 事實은 制限的이다. 100%의 眞實이란 於此彼 世上에 아예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100年 뒤 비틀스나 매카트니에 對한 어떤 놀라운 眞實이 밝혀진다고 할지라도 다음과 같은 事實에는 變함이 없을 것이다. 그래, 記者는 차라리 이쪽에 걸겠다. ‘Yesterday’ ‘Let It Be’…. 매카트니의 아름다운 노래들을 200年 뒤 태어난 아이들도 따라 부르게 되리라는 可能性 말이다. 어제의, 그날의 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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