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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와 拘束 두 가지 欲望의 變奏|新東亞

自由와 拘束 두 가지 欲望의 變奏

全州 韓屋마을에서 임권택을 만나다

  • 글 · 오동진 | 映畫評論家 寫眞 · 김성룡 | 捕討그래퍼

    入力 2015-05-20 17: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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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全州의 한 호텔에서 韓屋마을을 내려다보면 人生이란 것에 對해 새삼 생각하게 된다. 마치 임권택을 멀리서, 가만히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는 韓國籍 한(恨)의 情緖를 映畫에 누구보다 잘 풀어내왔다. 사람들 마음속 응어리가 풀리지 않고 맺혀 있는 한 임권택의 映畫는 繼續돼야 한다.
    자유와 구속 두 가지 욕망의 변주
    임권택은 임권택이다. 그의 映畫는 뭐니뭐니 해도 ‘임권택票’라는 것만으로 觸角이 集中된다. 한마디로 임권택 映畫는 林 監督 스스로가 브랜드라는 얘기다. 그 이름의 認知度는 어떤 톱스타만큼이나 높다. 사람들은 임권택의 映畫를 ‘尊重’한다. 그의 映畫를 ‘봐야 할’ 目錄에 올려놓는 데 躊躇하지 않는다. 映像美가 卓越하다는 것 또한 그의 映畫에 對한 期待値를 높이는 데 큰 몫을 한다.

    임권택 監督은 100篇의 作品을 넘기면서 101篇째와 102篇째 映畫부터는 디지털 카메라로 作業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만드는 映像의 깊이는 늘 남다르다는 評價를 받는다. 特히 101篇째 作品, 그러니까 最近 開封作 ‘火葬’의 全作인 ‘달빛 길어올리기’에서 韓紙(韓紙)를 만들어 가는 過程에 對한 꼼꼼하고 精巧한 映像 敍述은, 사람들로 하여금 感歎을 자아내기에 充分했다. 評壇의 反應도 ‘적어도 사람들이 갖고 있는 韓紙에 對한 單純하고 表皮的인 知識을 擴張시키고, 그럼으로써 그 關心을 보다 增幅시키는 데 큰 役割을 한 映畫’라는 것으로 모아졌다. 하지만 興行 面에서는 그다지 成績이 좋지 못했다. 映畫는 지나치게 ‘文藝映畫’ 取扱을 받았다.

    ‘大家의 映畫’와 ‘즐기는 映畫’

    자유와 구속 두 가지 욕망의 변주

    韓紙를 素材로 한 임권택 監督의 101篇째 映畫 ‘달빛 길어올리기’

    ‘달빛 길어올리기’는 韓紙를 만드는 丈人에 對한 얘기다. 여기에다 韓紙에 미친 한 下級 公務員(박중훈)과 이를 記錄하려는 다큐멘터리스트(강수연)의 얘기가 얽힌다. 두 사람의 러브 라인은 없지만 이들은 韓紙라는 傳統藝術로 交感하는 사이가 된다. 映畫는 極映畫人 척 다큐멘터리의 特徵을 보인다. 또 다큐멘터리인 척 드라마의 촘촘한 이야기 그물을 던져놓는다. 映畫는 장르의 境界를 奇異하게 뛰어넘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韓紙 攻防에 關心을 集中하게 만든다.

    韓紙에 對한 關心을 意圖的으로 集中시키려는 생각이 多少 읽히는 듯한 이 映畫는 事實 그 같은 目的性이 多分히 介入된 作品이다. 전주시와 全州國際映畵祭로부터 13億 원을 支援받아 製作됐다. 韓紙는 全州의 特産物이다. 全州는 임권택 監督을 통해 韓紙를 全國에, 可能하면 世界的으로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임권택 監督이 ‘천년학’ 以後 5年 만에 내놓은 作品이고, 무엇보다 지난 몇 年 사이에 흔히 볼 수 있던, 時流에 迎合하는 類의 映畫가 아니었지만 觀客은 이제 徐徐히 임권택의 품을 떠나려 한다. 그의 映畫는 代價와 丈人의 映畫임에는 틀림없지만 안타깝게도 ‘즐기는 映畫’는 아니라는 것이다. 多少 敎訓的이고 省察的인, 그럼으로 해서 中壯年層에게 訴求(訴求)될 作品이라는 認識이 刻印되고 있었다.

    어쨌든 前週와 임권택의 關係는 이처럼 끈끈하다. 그건 임권택이 湖南 出身, 全羅南道 長城 出身이라는 點과도 깊은 關係가 있다. 湖南 出身답게,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임권택 監督은 種種 그 地方 特有의 걸쭉한 弄지거리를 하곤 한다. 林 監督은 事實 慇懃히 재미있고 유머러스한 사람이다. 但只 그걸 사람들과 나눌 時間이 不足할 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와 줄곧 映畫 얘기만 하려 하니까. 映畫와 時代, 映畫와 社會, 映畫와 歷史에 對한 얘기만 물어보려 하니까.

    그런데 事實 그와 좀 더 짙게 얘기했어야 할 部分은 바로 映畫와 人生이라는 섹션일 것이다. 그는 1936年生이다. 우리 나이로 여든이다. 映畫 얘기 말고, 人生 얘기를 물어보면 아마도 津한 弄談으로 사람들을 웃겨가며 同時에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韓屋마을 풀샷 같은 임권택

    자유와 구속 두 가지 욕망의 변주

    ‘달빛 길어올리기’는 韓紙를 만드는 丈人에 對한 얘기다.

    全州의 한 호텔에서 韓屋마을을 내려다보면(특히 어스름한 새벽녘이 가장 그럴듯하게 보이는 時間이다) 그런 느낌, 곧 人生이란 것에 對해 새삼 생각하게 되는 契機, 啓示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마치 임권택을 멀리서, 가만히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다. 韓屋마을의 풀샷 느낌을 어찌 그렇게 닮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韓屋마을을 내려다보면 여기엔 歷史의 에피소드가 도도히 흘러 다니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으로 해서 이런 곳에서는 그리 어려운 談論(談論) 같은 것은 쉽게 내놓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하는 느낌마저 준다. 공연히 젠체하지 말 것, 입 다물고 周邊을 즐길 것, 過去의 香氣를 가만히 몸 안으로 받아들일 것 等等 마음의 姿勢가 自然스럽게 가다듬어진다.

    電柱에서 찍은 수많은 映畫의 수많은 撮影 場所가 되는 全州 韓屋마을은 그러나, 위에서 내려다보다 아래로 내려가 아이드샷(eyed shot)으로 마주하면 한便으로는 지나치게 팬시(fancy)化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韓屋마을은 漸漸 더 커머셜(commcial)해지고 있다. 到處에 프랜차이즈型 便宜店이 들어서고 飮食店도 한결같이 깔끔해졌다. 어딜 가나 化粧室도 깨끗하고, 그릇이며 什器들에서 플라스틱이 사라졌다. 徹底하게 觀光地가 돼가는 中이다.

    그런데 꼭 그게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連休 期間에는 발걸음을 떼기 힘들 만큼 사람이 많다. 韓屋마을에서 고즈넉한 느낌을 얻기란 이제 힘든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젊은이가 너무 많아졌다. 韓屋은 靑年보다는 中年에게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어디를 가나 참새들이 짹짹거리는 듯한 소리만이 들려온다.

    그럼에도 全州에는 慰安거리가 많다. 一旦 먹을거리가 安心하게 만든다. 空間이 좀 現代化하고 있다 한들, 그래서 좀 不滿이 생긴다 한들, 사람들의 입맛을 만족시켜준다는 건 그만큼 大臣의 慰勞를 해준다는 것을 意味한다. 全州에선 먹을 것이 곧 얘깃거리가 된다.

    ‘달빛 길어올리기’는 ‘全州 투어’

    예컨대 全州 完山區에 있는 ‘옛촌막걸리’ 가 그런 곳이다. 여기서 서울 사람들이 처음에 失手를 많이 했다. 막걸리가 專門人 이곳에서 서울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이 按酒를 더 해달라, 저 按酒를 더 해달라 해서 結局 主人아줌마와 昇降이가 벌어졌다. 그도 그럴 만한 일인 것이, 여기서는 按酒가 空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꾸 按酒를 더 해달라고 하면 안 된다. 그건 ‘按酒 리필’과 다른 意味가 아니기 때문이다.

    按酒는 막걸리 販賣 單位인 酒煎子 하나, 酒煎子 둘, 酒煎子 셋에 따라 繼續해서 ‘업그레이드’가 된다. 그러니 按酒를 더 먹고 싶으면 酒煎子 막걸리를 하나 더 시키면 될 일이다. 그래서 요즘엔 손님들이 헷갈리지 말라고 아예 한 酒煎子 基準 얼마에 按酒 뭐뭐, 두 酒煎子 基準 얼마에 按酒 뭐뭐, 라는 式의 메뉴板이 붙어 있다. 一種의 코스 料理인 셈이다.

    電柱를 비롯해 全羅道 全域에서는 按酒 人心이 아주 厚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飯饌이 한 床 가득, 床다리 휘어지도록 차려져 나온다. 막걸릿집度 例外가 아닌데, 例를 들어 두 酒煎子 基準으로 시키면 按酒가 無慮 10가지나 나온다. 蔘鷄湯, 김치찜, 足발, 巴戰, 프라이, 生鮮, 大河구이(或은 낙지볶음), 간醬게醬, 銀行구이, 紅蛤湯 等이다. 이것도 조금씩 조금씩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한 판씩 나온다. 이러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全州에 오면 映畫 때문만이 아니라 純全히 飮食 하나 때문에 입이 헤벌어진다. 이렇게 隆崇하게 待接받는 게 어디서 可能했겠냐 싶다.

    아마도 임권택 監督이 ‘달빛 길어올리기’를 찍을 때 그 舞臺를 아무런 異見 없이 단박에 全州로 決定한 것도 스태프들의 먹을거리가 가장 豐富할 것이라는 所信 아닌 所信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무엇보다 이 洞네에서 먹을거리만큼 有名한 韓紙에 對한 얘기가 林 監督의 가슴에 藝術의 불을 질렀을 것이다. 그래서 이 映畫에는 唯獨 막걸릿집이나 韓定食집 같은 먹을 곳과 여러 군데의 韓紙 工房이 集中的으로 나온다.

    막걸릿집 撮影場所로는 ‘옛촌막걸리’ 代身 ‘참새와 방앗間’이 쓰였다. 全州 韓屋마을 天壤製紙와 김혜미子 攻防, 全州 黑石骨 固窮한지, 全州 용머리고개에 있는 骨董品 가게 같은 곳도 主要 撮影 場所 中 하나였다. 그럼으로 해서 ‘달빛 길어올리기’는 하나의 巨大한 全州 투어 같은 映畫다. 이를테면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認 파리’나 ‘幻想의 그대’ ‘로마 위드 러브’ ‘내 男子의 아내도 좋아’ 와 같은 班列의 作品이라고 보면 된다.

    자유와 구속 두 가지 욕망의 변주

    임권택 監督의 102篇째 映畫 ‘火葬’은 映畫에 對한 林 監督의 苦惱를 率直히 보여준 作品이 아닐까.

    映畫로 나이 먹는다는 것

    映畫는 나이를 먹은 만큼 알 수 있는 것이다. 젊을 때 알았다고 생각한 映畫는 事實 또 그만큼 몰랐다는 얘기가 된다. 어찌 보면 사람들은 나이를 먹기 前까지는 무엇인가를 자꾸 드러내지 않으려고만 한다. 個人的인 것, 男女 間의 사랑 같은 것, 나이를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 男子의 欲求 같은 것, 그래서 부끄러운 것. 그런 건 可能한 限 밝히지 않고 숨기려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또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 그런 걸 밖으로 꺼내 보여주고 싶어 한다. 드러내는 映畫. 憾情的으로 스스럼없이 보여주는 얘기. 임권택의 最新作 ‘化粧’은 바로 그런 映畫였다.

    그러나 ‘火葬’ 亦是 지난 4月 開封 當時, 어쩌면 애當初 定해진 運命을 타고났을지 모른다. 末年 임권택의 最大 力作임에도 興行은 神通치가 않았다. 임권택 監督도 어느 程度 豫想한 듯 淡淡한 表情이었다. 主演俳優 安城企圖 같은 心情이었던 模樣이다.

    映畫 ‘火葬’은 作家 金訓과 巨匠 임권택의 만남만으로도 話題가 되는 作品이다. 임권택은 오랫동안 作家 이청준과 作業을 했다. ‘西便制’에서 ‘천년학’까지, 映畫를 찍는 임권택 옆에서 이청준은 末年을 比較的 만족스럽게 있다 가셨다. 이청준이 있어야 임권택 亦是 幸福해 보였다. 그러다 李淸俊 作家가 世上을 뜨자 임권택 映畫는 100篇째에서 막힌 듯이 보였다.

    자유와 구속 두 가지 욕망의 변주

    全南 高興 黨남海邊 가는 길에 있는 農場.

    火葬과 化粧

    ‘달빛 길어올리기’가 失敗한 건 어쩌면 李淸俊 없이 찍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임권택은 徐徐히 隱退를 準備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가 結局 金訓을 만났다. 그리고 이 老붕(老鵬)은 다시 非常(飛上)했다. ‘火葬’은 그가 如前히 뛰어난 作品을 만들 수 있는 巨匠 監督임을 立證하는 데 모자람이 없는 作品이다.

    ‘火葬’은 初老의 한 男子가 腦腫瘍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보낼 準備를 하면서 同時에 自身의 職員 中 한 名인 젊은 女性에게 欲望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다. 어쩌면 이건 임권택 스스로 只今의 映畫와 觀客들에게 느낀 感情 그대로가 아닐까 싶었다. 그는 映畫를 떠나보내려 한다. 그러나 한便으로는 새로운 觀客과 만나고 싶어 한다. 映畫 속 初老의 男子 안성기는 임권택 自身이고, 죽어가는 아내 김호정은 그의 映畫이며, 젊은 女性 김규리는 임권택이 새로 만나고 싶어 하는 요즘 觀客인 것이다.

    하지만 映畫에서 안성기는 김규리를 ‘갖지’ 못한다. 아니 아예 ‘갖지’ 않으려 한다. 그건 어쩌면 임권택度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는 安聖基처럼 徐徐히 世上을 등질 準備를 해나갈 것이다. ‘火葬’에서 임권택 監督이 보여준 鬪魂의 演出은 사람들 가슴에 눈물을 차오르게 만든다. 임권택의 ‘火葬’은 그래서 매우 眞實된 맛이 철철 넘쳐흐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자유와 구속 두 가지 욕망의 변주

    ‘달빛 길어올리기’를 演出할 때의 임권택 監督.

    지난 5月 初 第16回 全州國際映畵祭 開幕式 다음 날 콩나물국집 앞에서 지나치듯 만난 老將 임권택 監督의 어깨는 多少 처져 있는 듯했다. 그는 別로 신나 보이지 않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映畫祭라는 祝祭가 오히려 그와 같은 巨匠에게는 심심하게 느껴져서일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 그는 슬슬 隱退를 準備하는 것처럼 보인다.

    映畫 ‘火葬’은 火葬(火葬)과 火葬(化粧), 곧 늙음과 젊음, 삶과 죽음, 아내와 戀人, 理性과 欲望이라는 두 가지 錘를 오가는 사람들의 永遠한 不安症을 보여주는 映畫다. 무엇보다 임권택 스스로 苦悶하는 것, 映畫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한便 永遠히 그 안에 갇히고 싶은 두 가지 欲望의 變奏를 보여주는 作品이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 欲望의 變奏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얼마 前 그는 이番 作品을 끝으로 ‘이제 充分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火葬’은 그의 隱退作이 될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또 다른 새로운 映畫를 만들기까지 時間이 좀 더 걸리고 間隔이 좀 더 벌어질 것이다. 銀幕을 完全히 떠나는 그를 想像하기가 힘들다. 임권택은 임권택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映畫가 當然히 關心을 모으듯, 그 亦是 그 反對로 스스로 물러앉기가 힘든 사람이다. 임권택은 映畫 없이는 생각하기가 어려운 사람이다. 監督이 아닌 임권택을 우리는 想像해본 적이 없다. 想像하기조차 싫다. 그는 只今 지쳤을 뿐이다. 理解 못할 바가 全혀 없다. 지치지 않았겠는가. 많은 것이 磨耗되고 뭉툭해졌을 것이다.

    映畫에서 벗어나기, 或은 달아나기

    자유와 구속 두 가지 욕망의 변주

    全南 高興 發砲海邊가.

    때때로 映畫에서 한 뼘쯤 벗어나는 것은 그래서, 매우 必要한 일이다. 全州 德津區에 位置한 前日슈퍼 같은 곳에 가면 많은 것을 싹 잊게 된다. 그저 떠들고 마시고 놀게 된다. 前日슈퍼는 全州 名物인 ‘가麥’집의 하나다.

    ‘가麥’은 ‘가게 麥酒’의 줄임말이다. 元來는 구멍가게였다. 그런데 가게 앞 파라솔 아래서 사람들이 三三五五 按酒도 없이 麥酒를 마시기 始作했다. 보다 못한 가게 主人이 黃太구이를 按酒로 내준 것이 禍根이었다. 그 맛에 사람들이 자꾸 몰려들었다. 主人은 가게 日보다 麥酒를 파는 일이 더 잦아졌다. 그래서 結局 가게 麥酒집이 된 것이, 只今 ‘가麥’이라 불리는 곳들이다.

    嚴格하게 말하면 ‘不法은 아니지만 脫法’인 셈인데 完璧하게 庶民들의 空間이다. 胡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은 가게 麥酒 값 程度로 술집에 온 雰圍氣를 실컷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가麥집에서 흠뻑 取하고 싶어 한다. 世上일일랑 映畫일일랑 複雜한 건 다 잊어버리고 마시고 醉해버린다.

    가麥집의 特徵은 모두가 다 아는 사람인 것 같다는 데 있다. 안 그렇겠는가. 좁은 가게 안에서 사람들과 이리저리 둥글게 둘러앉아서 麥酒를 마시게 되면 等과 살이 닿는다. 여기서라면 적어도 與野(與野)가 따로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監督과 製作者 或은 批評家가 따로 놀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인다.

    電柱에서 나와 定處 없이 발길을 南쪽으로 向했다. 元來는 임권택의 故鄕 將星으로 가려고 했다. 그때 捕討그래퍼 김성룡이 불쑥 말했다. ‘南쪽으로 튀어!’란 映畫도 있던데 그냥 南쪽으로 튀시죠? 처음엔 邊山半島를 가려고 했다. 全州의 西쪽에는 群山과 扶安이 있고 扶安 그 안쪽으로 변산海水浴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김성룡이 다시 말했다. 조금 食傷한데요. 그래서 둘은 내리 南쪽으로 튀었다. 김성룡은 가장 南쪽으로 가보자고 했다.

    2時間 半쯤 달리니 最南端으로 왔다. 高興 發砲海邊, 그리고 黨남海邊 쪽에 있는 平和로운 農場이었다. 發砲海邊은 南쪽에 이런 海水浴場이 있을까 싶게 깨끗하고 조용한 海邊이다. 북적거리는 全州와 全州映畫祭를 뒤로하고 半나절의 休息을 즐기기에 適當한 空間이다. 黨남海邊의 農場은 무엇보다 바람결에 思索의 時間을 傳해주는 듯한 느낌을 준다. 사람은 種種 風景에 마음을 던지고 입을 다물어야 한다. 생각만으로 世上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유와 구속 두 가지 욕망의 변주

    全南 高興 發砲海邊 港口.

    觀客의 權利, 監督의 義務

    임권택의 映畫는 湖南 民心의 줄기를 지녔음이 새삼 느껴진다. 그가 태어난 곳 將星을 中心으로 그는 長興(‘祝祭’)과 全州 等 西쪽의 위아래를 오가며 映畫를 찍었다. 그의 代表作인 ‘西便制’와 ‘천년학’이 그렇지 않은가. 湖南 民心이 무섭다고 한다. 特히 요즘이 그렇다고 한다. 그게 또 全國의 民心이라고도 한다. 임권택의 映畫들이 사람들의 그런 憤怒를 다스려줄 수 있을까.

    임권택의 映畫는 韓國的 한(恨)의 情緖를 담고 있다. 南北離散家族 얘기를 그린 ‘길소뜸’으로 그는 사람들을 어마어마하게 울리고 한便으로 엄청난 慰安을 줬다. 前週와 南쪽 海邊을 오가며 갑자기 임권택의 映畫가, 그렇기 때문에라도 繼續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사람들 마음속에 응어리가 풀리지 않고 맺혀 있는 한 임권택 監督이야말로 映畫를 繼續해서 만들어야 한다. 그건 觀客인 우리의 權利이자 監督 임권택의 義務일지도 모른다. 權利와 義務 따위는 別個로 치더라도 어쨌든 우리가 임권택이라는 巨星(巨星)을 잃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의 映畫를 위해 祝杯를. 임권택 監督이 늘 우리와 함께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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