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險한 山, 거친 바다 ‘헝그리 精神’ 활활|新東亞

險한 山, 거친 바다 ‘헝그리 精神’ 활활

闽 - “社長 못 되면 男子 아니다”

  • 글 · 寫眞 김용한 | 中國硏究가 yonghankim789@gmail.com

    入力 2015-05-20 10: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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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이완과 마주보는 푸젠성은 예부터 過去 及第者와 商人, 그리고 海賊을 많이 排出하기로 이름난 땅이었다. 理由는 하나. 領土의 8割이 險峻한 山이라 살아남으려면 죽어라 工夫하든 장사하든 해야 했기 때문이다. 푸젠人들은 한족의 逼迫을 避해 바다로 나갔고, 광둥省과 함께 가장 많은 華僑를 輩出했다.
    2011年 핼러윈데이. 韓國에도 핼러윈 파티가 普及되긴 했지만 아직 大衆的이진 않던 때였다. 그런데 푸젠(福建)省 샤먼(廈門)에서는 百貨店 職員들이 핼러윈 衣裳을 입고 特別 세일 行事가 한창이었다. 나이트클럽 呼客꾼들度 핼러윈 扮裝을 하고 핼러윈 파티 弘報傳單을 돌렸다. 韓國보다 더 일찍, 더 積極的으로 핼러윈을 받아들이는 中國人들의 모습이 神奇했다.

    그날 밤, 바닷가에 있는 하바나 클럽을 찾았다. 많은 이가 핼러윈 扮裝을 한 채 파티를 즐겼다. 特別 이벤트로 ‘패션 콘테스트’와 ‘섹시 콘테스트’도 열렸다. 패션 콘테스트 1等은 능글맞은 表情 演技가 一品이었던 孫悟空 衣裳을 입은 西洋人에게, 섹시 콘테스트의 1等은 칭다오 麥酒걸로 扮裝한 八等身 金髮美女에게 돌아갔다. 두 1等에겐 共通點이 있었다. 人物 좋은 西洋人이 中國 親和的인 콘셉트를 잡았다는 點이다. 西洋에 對한 憧憬과 中華의 自負心이 微妙하게 섞여 있는 것. 租界地(租界地)로서 西洋에 일찍 門戶를 開放한 샤먼의 特徵을 읽을 수 있던 밤이었다.

    門에 달라붙은 벌레

    푸젠성의 略稱인 ‘閔’은 ‘種族 이름 민’ 자다. ‘種族’이라고 쓰고 ‘오랑캐’라고 읽는다. 한족과 다른 種族을 뜻하는 漢字는 많으나 ‘閔’ 者만큼 오랑캐에 對한 重原因의 認識을 赤裸裸하게 보여주는 글字가 있을까. ‘閔’ 者를 풀어보자. ‘門[門]’ 앞에서 알짱거리는 ‘버러지[蟲]’!

    푸젠성은 한족의 境界 바로 앞이라 神經 쓰지 않을 수 없는 오랑캐의 땅이었다. 司馬遷은 ‘詐欺’에 푸젠성에 對해 閩越王 無題(無諸)는 월왕 구천의 後孫으로 超旱田에서 劉邦의 便을 든 功勞를 認定받아 民월왕이 됐다고 썼다.



    後날 閩越은 옆 나라 東區(東·저장省 南部)와 戰爭을 벌였다. 閩越이 征服에 成功하기 直前, 東區는 韓武帝에게 救援을 要請한다. 이때 太尉(太尉·國防部長官) 澱粉은 ‘오랑캐의 일에 神經 쓸 必要 없다’고 했고, 中大夫(中大夫) 莊祖는 ‘天子의 나라가 小國의 어려움을 傍觀해서는 안 되므로 積極的으로 介入해야 한다’고 했다. 千兆國으로서 外國의 일에 介入하느냐 마느냐를 둘러싼 論爭이었다. 壬辰倭亂 때 明나라가 朝鮮에 援軍을 보낼지 말지 論爭한 것과 같다.

    漢나라는 東歐를 救하고 同月을 平定했지만, 山은 險하고 사람들은 거칠어 服屬시키기란 不可能했다. 領土 欲心이 많던 한무제조차 同月 地域에 對한 統治를 抛棄하고, 同月 百姓을 長江과 回收 사이(안후이·장쑤 北部의 平野地帶)로 옮겨 살게 했다. 중원의 統治力은 강북의 平野地帶까지는 미쳤지만, 江南의 山岳地帶는 堪當할 수 없었다. 閩越은 以後 1000餘 年 동안 獨自的 正體性을 維持하다가 南宋 後에야 비로소 完全히 同化했다.

    悠久한 時間 동안 한족에 吸收·同化하지 않은 閩越인들. 한족의 視線으로는 當時 ‘글로벌 스탠더드’이던 한족의 燦爛한 文化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는 이 ‘未開人’들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自身의 境界, 文[門] 周圍에 귀찮게 달라붙는 벌레[蟲]라는 뜻으로 ‘閔’이라는 글字를 만들었을 것이다. 뱀을 崇尙하는 閩越人이 門 안에 뱀을 키웠기 때문에 ‘閔’ 者가 만들어졌다는 解釋도 있다. 이 境遇에도 한족의 눈에 閩越仁義 風習은 怪異하고 野蠻的으로 비쳤으리라.

    험한 산, 거친 바다 ‘헝그리 정신’ 활활
    “團結만이 살길”

    푸젠 親舊에게 秋夕 때 뭐 할 거냐고 묻자, 祠堂에 가서 所願을 빌 거라고 했다.

    “아, 마調(祖) 祠堂에 가려고?”

    “아니, 마調는 뱃사람들의 神이야. 우리 집은 장저우(州) 山골이라 土地神 祠堂에 갈 거야.”

    푸젠은 바다의 女神 마調로 有名하니까 마調 祠堂에 갈 거라는 豫想을 깼다. 푸젠 文化가 地域別로 다양함을 새삼 일깨웠다.

    ‘閩越은 8割이 山, 1割이 물, 1割이 밭’이라고 할 만큼 山이 많다. 푸젠의 歷史는 産을 빼놓고 論할 수 없다. 山岳地形은 移動하기 힘든 데다가, 많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땅도 아니다. 그렇다보니 山에서는 少數의 部落이 自給自足에 가까운 生活을 한다. 작고 閉鎖的인 共同體에 있으니 言語와 文化도 獨自性을 갖게 된다.

    게다가 푸젠은 種族도 多樣하다. ‘백월(百越)’이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刖足, 高山族(高山族), 避難 온 한족 等이 산다. 같은 산 안에서도 種族이 다르고 山을 넘어가면 言語가 다르다. 地方마다 말이 다른 中國에서도 푸젠은 言語가 가장 다양한 곳으로 손꼽힌다.

    産銀 外部의 視線을 避할 수 있어 숨어 살기 좋은 곳이다. 중원의 끊임없는 戰亂은 大規模 避難民을 여러 次例 發生시켰다. 푸젠에 내려간 避難民은 戰爭을 避해 조용한 山속으로 들어갔다. 土着民인 토가(土家)와 比較해 避難民들은 새롭게 찾아온 손님과도 같아서 客家(客家)라고 불렸다.

    客歌人은 不安했다. 戰爭의 恐怖는 아직도 생생한데, 生硬한 땅에 와서 모든 것이 낯설었다. 게다가 周圍에는 거친 오랑캐들이 득시글거렸다. 産銀 임자가 없는 代身에 거칠고 險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弱者에게 살길은 單 하나였다. 團結.

    그래서 客家人들은 巨大한 原形의 흙집을 지었다. 온 마을 住民이 두세 채 흙집에서 함께 살았다. 山속 要塞를 彷彿케 하는 土壘(土樓)는 그들의 共同 宿所이자 兵營(兵營)이었다. 1950年代 美軍이 人工衛星으로 土壘를 처음 보고는 核 軍事施設로 錯覺했을 程度다.

    山을 開墾해 農事를 지어도 收穫은 神通찮았다. 이에 푸젠人은 過去에 及第하기 위해 工夫를 하거나 장사를 했다. 아이들은 “두꺼비야, 두꺼비야, 하하하. 工夫를 하지 않으면 아내를 얻지 못한다”라는 童謠를 부르며 놀았다. “10分만 더 工夫하면 아내의 얼굴이 바뀐다”는 오늘날의 ‘勸學歌’와 놀랄 만큼 닮았다.

    庶民的, 實用的, 世俗的

    푸젠은 강절(江浙·장쑤省과 저장省) 地域과 함께 過去 及第者를 많이 輩出했다. 강절의 學問은 豐饒와 餘裕의 産物이다. 그러나 푸젠의 學問은 瘠薄한 環境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方道였다. 따라서 강절 文化는 貴族的이고 理論的이며 高雅했으나 푸젠 文化는 庶民的이고 實用的이며 世俗的이었다.

    장쑤 쿤산(昆山) 出身의 代學者 顧炎武는 經世濟民(經世濟民)의 大義를 위해 學問을 했지만, 푸젠 취안저우(泉州) 出身의 선비 이탁오(李卓吾)는 管理가 되는 目的은 名譽와 利益을 求하기 위한 것이고 “먹고 입는 것이 人倫”이라며 當代 社會의 僞善에 돌直球를 날렸다.

    性理學의 創始者 朱熹(朱熹)도 푸젠의 大學者다. 走者는 大義를 重視하는 儒學과 實利的인 푸젠 文化를 조화시켰다. 當時 푸젠에선 考試 準備를 위한 參考書 出版業이 盛行했고, 주자는 人氣 受驗書 著者였다. 司馬光의 ‘資治通鑑’은 卓越한 中國歷史서지만 너무 厖大했다. 朱子의 ‘資治通鑑綱目(資治通鑑綱目)’은 核心 整理집으로 考試生들에게 큰 人氣를 누렸다. ‘사서집주(四書集註)’도 人氣 解說書였다. 오늘날로 치면 족집게 講師가 ‘하룻밤에 읽는 資治通鑑’, ‘公務員試驗에 꼭 나오는 論語’ 等을 펴낸 셈이다.

    泰國을 旅行하다 푸젠 아가씨를 만난 적이 있다. 그女는 觀光客이 으레 찾는 寺院이나 옛 城터 等에는 別 關心이 없고 泰國 物件에는 非常한 關心을 보였다. 自己가 앞으로 貿易商을 할 豫定이라고 밝혔고, 西洋 旅行者들과 名銜을 交換했다. 20代 中盤의 젊은 나이인데도 事業家 氣質이 대단했다. 나중에 같이 저녁을 먹으며 그 얘기를 하자 그女는 웃으며 말했다.

    “난 歷史와 文化보다 돈과 飮食에 關心이 많아.”

    商人 文化가 發達한 푸젠의 딸다웠다. 農事로 먹고살기 힘들고, 工夫를 잘해 科擧 及第하기도 어려운 푸젠人은 일찍부터 장사에 나섰다. 푸젠人은 “장사 속에 黃金의 집이 있고 玉 같은 얼굴의 家族이 있”으며, “社長이 되지 못하면 勇敢한 男子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山이 많아 商業이 發達한 面에서 푸젠성과 안후이(安徽)性은 닮았다. 內陸地域인 안후이 商人들은 江으로 豐饒로운 강절 地域에 갈 수 있어 國內 商業이 發達했다. 그러나 海岸 地域인 푸젠 민상(商)은 바다로 나가 海外貿易을 했다.

    푸젠을 中心으로 圓을 그려보면 韓國, 日本, 베트남, 필리핀이 거의 비슷한 距離에 있다. 貿易의 中心이 될 만한 곳이다. 송·元代 海上 실크로드의 起點이던 취안저우는 10萬 名의 아랍 商人이 살던 國際貿易港이다. 아프리카·아랍·아시아를 두루 旅行한 大冒險가 이븐 바투타는 취안저우를 “世界에서 唯一한 最大의 港口”라고 極讚했고, 마르코 폴로는 “후추를 실은 배 1隻이 알렉산드리아로 들어갈 때 취안저우에는 100隻이나 들어온다”고 驚歎했다.

    고구마, 담배 等 神奇한 物件이 들어오는 窓口였고, 海外 優秀 人力을 雇用할 수 있는 ‘人材 풀’이었다. 淨化(鄭和)의 大航海는 西유럽의 對抗해 時代보다 90年이나 앞서 東南亞, 印度, 中東뿐만 아니라 東아프리카의 케냐까지 이르렀다. 이때 淨化는 취안저우에서 아랍 船員을 雇用해 天文航海술을 活用하고 이슬람圈의 現地 情報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푸젠仁義 活潑한 商業 活動은 朝廷의 疑懼心을 샀다. 農業이 아닌 商業에 힘쓰고, 오랑캐와 親하게 지내며 異常한 物資가 流通되는 푸젠은 매우 殊常한 곳이었다.

    ‘解禁令’ 비웃은 生存意志

    明나라는 物資의 國外 搬出과 海外 交流를 嚴格하게 禁止하는 鎖國政策을 펼쳤다. 그나마 海外貿易 窓口인 市舶司(市舶司)가 있을 때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明나라는 倭寇가 市舶司에 나타나자 “倭寇의 災難은 市舶司에서 일어난다”며 市舶司를 閉鎖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때부터 倭寇가 暴發的으로 增加했다.

    푸젠 순무 담輪이 말한 대로, 푸젠人은 “바다로 나가지 않으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없다.” 굶어 죽으나 海賊질하다 죽으나 다를 바 없었다. 日本人만이 倭寇가 아니었다. 푸젠·貯藏·광둥의 現地人도 海賊이거나 海賊과 한통속인 境遇가 많았다. 海賊이라 불렸지만 實狀 合法的으로 장사할 수 없는 商人인 境遇가 많았다. 취안저우의 官僚 임대춘은 歎息했다. “沿海의 都市와 鄕村 사람은 모두 海賊이다. 海上의 뱃사람과 商人은 모두 海賊이다. 주나 君을 다스리는 長官 左右의 署理는 모두 海賊이다. 沿海의 貧民은 모두 海賊이다.”

    倭寇를 막겠다고 먹고살 길을 막아버리자 멀쩡한 百姓들조차 倭寇가 됐다. 解禁令(海禁令)은 全혀 實效가 없었고,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됐다. “板子 하나라도 바다에 들어오는 것을 不許했지만, 江 入口를 막을 程度로 큰 배가 들어왔다. 少量의 物件도 外國人이 가져가는 것을 不許했지만, 큰 배는 아이들과 아름다운 緋緞을 가득 싣고 갔다.”

    海賊질도 하다보면 實力이 느는 法. 及其也 明나라 末期 海賊 鄭芝龍은 皇帝에게 푸젠의 實質的인 主人으로 認定받았다. 鄭芝龍의 아들 鄭成功은 後날 明나라가 亡했을 때 半晴復命(反淸復明) 運動을 展開했을 만큼 푸젠의 實力者였다.

    험한 산, 거친 바다 ‘헝그리 정신’ 활활

    구랑位 섬에서 바라본 샤먼 前景.



    겨우 2km 떨어진 兩岸

    淸나라는 叛亂의 故鄕인 푸젠이 不便했다. 大陸에서 敗해 타이완으로 逃亡친 鄭成功을 고립시키기 위해 海岸 50km 以內의 모든 마을을 破壞하고 住民을 强制 이주시켰다. 이 過程에서 1661~1663年間 8500名의 푸젠 漁夫와 農民이 죽었다. 海外貿易을 禁止하고 華僑를 ‘外國과 密通한 賣國奴’로 看做했다. 이에 많은 華僑가 中國에 돌아오지 못하고 現地에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二重톈은 구랑位(鼓浪嶼) 섬을 波濤와 피아노 소리만이 들리는 조용한 섬이라고 描寫했다. 그러나 내가 찾은 구랑位는 觀光客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不幸 中 多幸으로 當日치기 觀光客이 大部分이라 저녁이 되면 比較的 閑散해졌다. 평화롭고 조용한 섬의 골목을 한가롭게 거닐다가 어느 집 門 앞에 붙은 大連(對聯)을 보게 됐다.

    廈門金門門對門

    大小打

    (샤먼과 진먼, 門과 門이 서로를 마주 보네

    큰 砲와 작은 포, 砲와 포가 서로를 때리네)

    氣가 막힌 大連이다. 이 對鍊을 理解하려면 國共內戰에 對해 알아야 한다. 無能하고 腐敗한 國民黨 軍隊는 中國 全域에서 共産黨 軍隊에 敗北했고,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逃亡쳤다. 共産黨은 이제 샤먼의 코앞에 있는 진먼다오(金門島)를 占領하고 餘勢를 몰아 타이완까지 征服해 完璧한 統一을 이루려 했다. 이미 廣闊한 中國 全域을 解放시켰으니, 눈앞의 조그만 섬은 하루면 充分히 占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軍艦이 없어 漁船을 徵發해서 1萬 名의 兵士, 하루치 食糧, 勝戰 잔치에 쓸 소를 진먼으로 실어 날랐다.

    그러나 진먼에는 4萬 名의 國民黨軍이 鐵壁 要塞에 駐屯하고 있는 데다가, 武器의 火力과 해·공군력은 共産黨軍을 壓倒했다. 共産黨의 1萬 兵士 中 3000名은 戰死, 7000名은 捕虜가 돼 單 한 名도 진먼을 脫出하지 못했다. 共産軍은 强力한 해·공군력이 없으면 타이완 征服이 不可能함을 깨닫고 抛棄했다. 진먼 戰鬪는 局地戰이 全體 판勢에 큰 影響을 준 事例다.

    中國과 타이완 政府가 各各 安定돼 갈 무렵 中東에선 革命이 일어났다. 美國은 艦隊를 急派해 革命을 抑制하려 했다. 마오쩌둥은 中東의 革命 勢力을 支援하고자 타이완을 侵攻하는 시늉을 했다. 1958年 8月 23日, 中國은 진먼에 砲擊을 퍼부었다. 23日 午後 6時부터 2時間 동안 4萬 발의 砲彈이 떨어졌고, 40日 동안 47萬 發의 砲擊이 加해졌다. 軍人과 民間人을 包含해 600餘 名이 죽고 2600餘 名이 負傷했다. 그 後에도 間歇的으로 砲擊이 繼續됐고, 1979年 1月 1日 美中修交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砲擊이 中斷됐다. 구랑위의 對鍊이 말해주듯, 샤먼과 진먼이 맞붙어 큰 砲와 작은 砲를 날리던 歲月이었다.

    험한 산, 거친 바다 ‘헝그리 정신’ 활활

    露店에서 豆乳를 파는 할아버지.

    門 밖의 龍, 門 안의 龍

    오늘날의 샤먼과 진먼은 나른할 程度로 평화롭지만, 不過 40餘 年 前만 해도 기나긴 歲月 동안 砲彈이 날아다니던 戰場이었다. 샤먼과 진먼의 거리는 2km밖에 안 된다. 린이푸(林毅夫) 全 世界銀行 副總裁는 1979年 진먼에서 陸軍大尉로 勤務할 때 籠球공 하나를 끌어안고 헤엄쳐서 샤먼으로 脫營했다고 한다. 이제는 脫營 代身 量案 水泳大會가 열려 和解와 協力의 雰圍氣가 물씬 풍긴다. 그러면서도 샤먼에는 ‘一國兩制 統一中國(一國兩制 統一中國)’, 진먼에는 ‘三民主義 統一中國(三民主義 統一中國)’ 口號가 各各 걸려 있어 微妙한 葛藤이 完全히 解消된 것은 아님을 엿볼 수 있다.

    活潑한 貿易을 펼친 푸젠은 광둥과 함께 世界 華僑를 兩分한다. 中國 안에 있을 때는 別 볼일 없이 살다가 海外에 나가면 펄펄 날아다니는 푸젠人을 보고 中國人들은 “門 안에 있는 벌레가 밖에 나가면 龍이 된다”고 神奇해한다.

    오늘날 푸젠은 史上 最高로 激勵받고 있다. 지난 4月 21日 푸젠은 新設 自由貿易區로 選定됐다. 一帶一路(一帶一路)에서 海上 실크로드의 寄港地가 돼 옛 榮光을 다시 찾으려 한다. 타이완의 交流·包攝에서도 核心的인 機能을 遂行한다.

    험한 산, 거친 바다 ‘헝그리 정신’ 활활
    김용한

    1976年 서울 出生

    연세대 物理學科, 카이스트 Techno-MBA 專攻

    前 하이닉스반도체, 國防技術品質院 硏究員


    하지만 中國은 外國의 돈을 좋아할 뿐, 外部 생각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싫어한다. 西洋 技術만 받아들이고 制度는 받아들이지 않던 中體西用(中體西用)의 21世紀版이다. 閉鎖的인 中國에 開放的, 實用的인 푸젠이 새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푸젠人은 이제 門 안에서도 龍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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