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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挑戰精神 잃은 3世 時代 韓國財閥 最大危機 온다”|신동아

“挑戰精神 잃은 3世 時代 韓國財閥 最大危機 온다”

‘財閥改革 傳道師’ 김상조 敎授

  • 김호기 | 연세대 社會學科 敎授

    入力 2015-05-20 1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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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少額株主運動 目標는 ‘正常化된 社會’
    • 朴政府 經濟民主化, ‘折半의 成功, 折半의 失敗’
    • 초이노믹스, 期待했지만 失敗했다
    • 내가 願하는 未來社會는 信賞必罰 社會
    “도전정신 잃은 3세 시대 한국재벌 최대위기 온다”
    김상조 한성대 貿易學科 敎授는 우리 時代를 代表하는 進步的 經濟學者 中 한 사람이다. ‘財閥改革 傳道師’로 알려진 그는 經濟民主化運動에 注力하는 市民團體인 經濟改革連帶를 15年째 이끌어왔다. 金 敎授가 提示하는 經濟民主化는 出發에서의 機會均等, 過程에서의 公正競爭, 結果에서의 公平分配를 追求한다. 이런 經濟民主化는 民主化 30年을 바라보는 우리 社會가 일궈야 할 새로운 時代精神이라 할 만하다. 金 敎授는 2013年 三星 社長團 會議에 招請받아 經濟民主化를 主題로 講演하기도 했다. 光復 70年을 맞아 金 敎授에게 韓國 經濟의 現在와 未來, 經濟民主化와 財閥改革의 意義에 對해 물었다.

    김호기 저는 79學番인데 金 敎授는 81學番이지요. 經濟學을 專攻하게 된 動機는 무엇입니까.

    金尙祚 只今 내 모습을 아는 많은 분은 意外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模範生이었어요. 大學敎授가 될 때까지도 그랬어요. 籠城도 敎授가 되고 나서야 처음 해봤고요. 社會科學 가운데 經濟學을 漠然히 憧憬했는데, 그게 經濟學科를 選擇한 背景이에요.

    케인스 經濟學 工夫恨 理由

    김호기 社會科學에서 經濟學이 가장 乾燥한 學問 같아요. 經濟學을 選擇한 것을 後悔한 적은 없습니까.



    金尙祚 後悔한 적은 없어요. 다른 社會科學徒들은 經濟學을 計算하고 比較하는 것에 注力하는 淺薄한 學問이라 느낄지 모르겠지만, 저는 經濟學이 事物의 兩面을 同時에 把握하는 것을 訓鍊하는 學問이라고 생각해요. 便益과 費用, 需要와 供給이 그런 거지요. 絶對的인 善과 惡을 區分하기보다는 事物에 共存하는 兩面을 보면서 合理的인 判斷을 이끌어내는 게 經濟學이라고 생각해요. ‘經濟學은 世上을 좋게 할 순 없지만 나빠지지 않게 할 순 있다.’ 제가 만들어낸 말이에요.

    김호기 서울대 經濟學科 81學番 動機는 누가 있나요.

    金尙祚 動機 中에 世俗的인 面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적은 便이에요. 오히려 82學番 後輩 가운데 有名한 親舊가 많아요. 장하준 케임브리지對 敎授, 이혜훈 前 새누리당 議員, 강석훈 새누리당 議員 等이 있어요.

    김호기 金 敎授는 정운찬 前 總理의 弟子로 널리 알려졌지요. 어떻게 因緣을 맺게 됐습니까.

    金尙祚 大學院에 入學해 고(故) 임원택 敎授의 助敎를 했어요. 敎授님이 學校를 잘 나오시지 않아 그 房이 當時 經濟學科 大學院生들의 休憩室이 됐어요. 정운찬 敎授가 大學院生들을 찾아 그 房에 더러 오셨는데, 그때 알게 됐어요. 碩士 1學期 때부터 鄭 敎授께서 指導敎授가 돼줬어요.

    김호기 金 敎授나 제가 學部와 大學院을 다닌 1980年代는 ‘熱情의 時代’이자 ‘社會科學의 時代’였어요. 當時 서울대 經濟學科에는 趙淳·정운찬 敎授로 대표되는 케인스주의 經濟學科 김수행 敎授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주의 經濟學이 進步的 經濟學의 兩大 山脈을 이룬 것으로 記憶합니다. 케인스주의 經濟學을 選擇하게 된 특별한 動機가 있었나요.

    金尙祚 김수행 敎授 아래에는 마르크스 經濟學, 卽 政治經濟學을 工夫하는 사람이 꽤 있었지만, 當時 서울대 經濟學科에는 各 分野에서 現實을 좀 더 熾烈하게 硏究하려는 雰圍氣가 形成돼 있었어요. 저는 政治經濟學的 問題意識을 갖고 貨幣와 金融을 工夫하고 싶었어요. 現代 資本主義는 貨幣資本主義라는 理解 아래에서 貨幣 및 金融을 硏究해온 셈이지요. 勿論 정운찬 敎授의 人間的인 魅力에 끌린 部分도 있었고요.

    少額株主運動은 重要한 革新

    김호기 金 敎授 하면 少額株主運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요. 少額株主運動은 進步的 市民運動이 일군 主要한 成果의 하나로 꼽혀왔어요. 언제부터 始作했습니까.

    金尙祚 장하성 고려대 敎授가 經濟民主化運動을 始作한 것이 1996年이에요. 저는 出帆 때부터 함께한 것은 아니고, 1999年부터 合流했어요.

    김호기 어떤 契機로 參與했습니까.

    金尙祚 1994年에 比較的 일찍이 大學敎授가 됐어요. 1995年 6月 先輩 敎授들의 勸誘로 민교협(民主化推進敎授協議會) 總務局長이 됐어요. 當時 민교협을 이끌던 이들은 김상곤 한신대 敎授(前 京畿道 敎育監)와 곽노현 放通大 敎授(前 서울市 敎育監)였는데, 민교협 實務를 맡으면서 우리 社會 進步的 知識人들을 만나게 됐고, 第 認識의 地平을 넓힐 수 있었어요.

    이런 過程에 1997年 外換危機가 일어났어요. IMF(國際通貨基金)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던 時節이었지요. 巨視經濟나 貨幣經濟를 專攻한 敎授들이 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1998年 第2期 勞使政委員會 經濟改革小尉의 公益責任專門委員을 맡아 일하기도 했어요. 各 經濟 主體 代表들이 모여 어떤 프로세스를 거쳐 意思決定에 到達하는지를 알게 된 所重한 經驗입니다.

    이때 支配構造 改善 問題를 다뤘는데, 김기원 放通大 敎授와 民主勞總·韓國勞總을 찾아가 支配構造 改善의 重要性을 强調하기도 했어요. 또 當時 活潑한 活動을 벌이던 참여연대를 찾아가 이야기했는데, 이게 因緣이 돼 참여연대 財閥監視團長을 맡게 됐고, 이어 經濟民主化委員會에 參與하게 됐습니다. 그 後 1年間 英國에 安息年을 다녀온 다음 장하성 敎授에 이어 責任者를 맡게 됐어요. 2006年 참여연대에서 獨立해 現在는 經濟改革連帶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15年째 같은 市民團體의 責任者를 맡고 있으니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最長壽이지 않을까 싶어요.

    “도전정신 잃은 3세 시대 한국재벌 최대위기 온다”

    김상조 敎授는 “財閥改革은 經濟民主化의 出發點”이라고 말했다.

    김호기 少額株主運動을 自評한다면.

    金尙祚 個人的으로 韓國 市民運動에서 最高의 方法論的 革新을 이뤘다고 생각해요. 그前까지 市民社會團體 活動은 두 가지 類型이었어요. 하나는 知識人들의 외침이었고, 다른 하나는 勞組 같은 多數 大衆의 외침이었어요. 이와 달리 少額株主運動은 敎授, 辯護士, 會計士 等 專門家의 도움을 통해 商法이라는 法的인 權利를 行使하는 運動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保守的인 法官들조차 마냥 無視할 수는 없었어요. 더군다나 그 成果를 多數 少額株主의 參與를 통해 이끌어냈다는 데 注目해야 해요. 參與에 依해 成果를 만들어내고 그 成果를 蓄積할 수 있다는 次元에서 韓國 市民運動의 重要한 革新이었다고 敢히 自評하고 싶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少額株主運動을 方法이 아니라 目的으로 理解한 사람이 적지 않다는 點이에요.

    김호기 資本主義를 美國式 ‘株主 資本主義’와 獨逸式 ‘利害關係者 資本主義’로 나눠볼 때, 進步的 性向의 知識人은 主로 利害關係者 資本主義를 支持해왔습니다. 少額株主運動이 株主 資本主義를 鞏固化한 것 아니냐 하는 批判도 있었어요.

    金尙祚 株主를 배불리는 것 아니냐는 批判이 進步陣營 內에서 提起됐지요. 그런 批判에 積極的으로 對應하지는 않았지만, 이 運動에 參與한 그 누구도 韓國 社會를 美國式 株主 資本主義처럼 만들려는 意圖가 없었음을 알아줬으면 합니다. 少額株主運動은 1980年代 社會構成體 論爭 式으로 말하면 ‘一般民主主義’를 追求한 改革運動으로 볼 수 있어요. 그것이 追求한 것은 ‘正常化된 社會’였어요. 少額株主運動이 얼마만큼 進步的이냐에 對해선 意見이 갈렸어요. 우리 社會에서 改革勢力과 進步勢力이 어느 部分까지 같이할 수 있고, 어떤 部分에서 서로의 差異를 認定할 수 있는지의 問題가 담겼습니다.

    김호기 現在 韓國 經濟의 最大 問題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새로운 産業도, 새로운 市場도 없는 一種의 二重苦에 直面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뉴 노멀 時代, 낡은 戰略

    金尙祚 韓國 經濟의 問題는 두 가지라고 봐요. 하나가 ‘環境’이라면 다른 하나는 ‘主體’예요. ‘새로운 産業도, 새로운 市場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環境을 두고 하는 말이에요. 韓國 經濟는 10年마다 한 番씩 危機에 處했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成長産業과 새로운 海外市場 發見을 통해 危機를 克服하고 한 段階씩 점프해왔어요. 2008年 以後의 危機는 韓國만의 危機도 아니고 아시아의 地域的 위기만度 아닌 글로벌 危機예요. 低成長의 不確實性 時代, 다시 말해 ‘뉴 노멀’ 時代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時代에 韓國 經濟 未來의 먹을거리 産業은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어요. 勿論 ICT(情報通信技術)나 寒流로 대표되는 文化 콘텐츠 産業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것들이 過去와 같은 成長의 엔진 구실을 할지 相當한 疑懼心을 갖게 돼요. 새로운 成長産業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正直한 自畫像이지요. 過去의 美國 市場, 中國 市場처럼 우리 製品을 받아줄 巨大한 市場도 새로 出現하기 어려운 狀況에서 우리 社會가 이 危機를 어떻게 克服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워요. 不確實性이 자욱한 時代를 사는 셈이지요. 世界는 最近 G2의 時代로 넘어가요. AIIB(아시아인프라投資銀行) 參與 問題처럼 새로운 G2 時代에 우리가 스스로 運命을 決定하기 어려운 側面도 加重된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호기 主體의 側面에서는 어떻게 볼 수 있나요.

    金尙祚 主體의 側面에서는 變化하지 않는 戰略을 指摘할 수 있어요. 最近 ‘87年의 桎梏’이라는 表現을 자주 쓰는데, 保守든 進步든 各 陣營이 驅使하는 戰略을 보면, 4半世紀 前인 1980年代 後半 韓國 經濟가 가장 큰 成功을 거둔, 檀君 以來 最大 好況이라 불린 ‘87年 戰略’을 只今도 그대로 驅使해요. 保守는 財閥企業의 落水效果를 期待하고, 進步는 國家를 통해 經濟 權力을 直接的으로 統制하려는 方式을 固守해요. 保守와 進步의 基本的인 戰略이 固着化한 狀態로 4半世紀를 살아왔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不幸한 結果를 낳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選擇을 벗어나지 못하는 一種의 膠着 狀態이지요. 經濟學에서는 이것을 ‘罪囚의 딜레마’라고 하는데, 둘 다 自白하는 게 가장 나쁜 시나리오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것을 벗어날 수 없는 셈이지요. 나만 變化하고 相對方이 變化하지 않으면 結局 나만 뒤집어쓰는 經驗이 그동안 너무 많았기에, 危險한 줄 알면서도 過去의 낡은 戰略을 繼續 選擇할 수밖에 없는 狀況이 持續되고 있어요.

    다시 말하면, 環境은 새로운 産業도, 새로운 市場도 보이지 않는 뉴 노멀의 時代예요. 그런데 主體의 觀點에서 보면 過去의 낡은 戰略을 繼續 固守하는 狀況이 韓國 經濟의 어려움을 더욱 强化한다고 봅니다.

    逸脫하는 사람 罰 줘야

    김호기 2012年 大選에서 經濟民主化 談論이 새로운 時代精神으로 浮上했고, 이와 關聯된 財閥改革에 對해 關心이 높아졌어요. 하지만 最近 그 關心이 多少 시들해진 것처럼 보여요. 우리에게 經濟民主化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金尙祚 經濟民主化 烈風이 2012年 韓國 社會 全體를 뜨겁게 달군 것은 분명해요. 現在 時點에서 돌아보면 朴槿惠 大統領한테 속았다고, 特히 朴 大統領의 經濟民主化는 失敗했다고 評價하는데, 저는 ‘折半의 成功, 折半의 失敗’라고 보고 싶어요. 새로운 法을 만들고 그 法을 嚴正하게 執行한다는 次元에서 보면 朴 大統領과 現 政府는 成果를 거의 내지 못했기 때문에 失敗라고 볼 수 있어요.

    김호기 그런데 왜 ‘折半의 成功’이라는 겁니까.

    金尙祚 經濟民主化運動을 하다보니 企業의 最高經營者들을 자주 만나게 돼요. 經濟改革連帶의 公式的인 報道資料에 내지 않는 많은 對話를 나누는데, 그때마다 企業에 있는 사람들도 ‘世上이 變했다’ ‘世上이 過去로 돌아갈 수 없다’는 點을 確實히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勿論 企業에 있는 이들이 自身의 利益을 固守하기 위해 그 變化의 速度를 늦추려는 行動을 取하지만, 그럼에도 韓國 社會가 2012年 以前의 過去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아는 것이지요. 작은 움직임이긴 하지만 三星이 白血病 問題에 關心을 갖는 것도 그 事例의 하나예요.

    이런 變化들은 財閥企業들이 世上이 過去와 같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는, 새로운 摸索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財閥企業들이 올바른 方向으로 갈 수 있도록 우리가 繼續 努力해야겠지요.

    김호기 金 敎授가 보는 經濟民主化의 要諦는 무엇인지요.

    金尙祚 出發에서의 機會均等, 過程에서의 公正競爭, 結果에서의 公平分配가 經濟民主化의 核心이라고 생각해요. 機會均等, 公正競爭, 公平分配 가운데 優先順位를 어디에 두고 세 가지 相互關係를 어떻게 設定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요. 제가 보기에 來日을 알 수 없는 不確實性의 時代에 社會가 願하는 方向으로 行動하는 사람에게는 賞을 주고 그것으로부터 逸脫하는 사람에게는 罰을 주는 게 우리 社會가 追求해야 할 經濟民主化의 미니멈이에요. 그 미니멈을 만드는 게 뉴 노멀 時代의 經濟民主化라고 생각합니다.

    財閥改革이 가장 쉽다

    김호기 經濟民主化를 이야기하면 우리 國民은 가장 먼저 財閥改革을 떠올려요. 金 敎授는 ‘財閥改革 傳道師’라는 別名을 갖고 있어요. 國民은 財閥에 對해 二重的 感情을 가진 것처럼 보여요. 한便으로 批判하면서도 다른 한便으로는 財閥이 없으면 어떻게 살까를 걱정하는 겁니다.

    金尙祚 우리 社會가 常識的으로 設定한 規範을 가장 많이 逸脫한 게 財閥이에요. 그것을 改革하는 게 經濟民主化로 나아가는 出發點이에요. 다시 말해, 財閥改革은 經濟民主化의 모든 게 아니고 但只 出發點이지요. 財閥改革을 통해 공정한 市場을 만들면서 下都給, 非正規職, 零細 自營業者 問題를 解決해 多數 國民의 삶을 改善하는 것이 經濟民主化의 到達點이라고 볼 수 있어요. 個人的으로 우리 社會가 풀어야 할 課題 가운데 財閥改革이 가장 쉽지 않나 생각해요. 財閥企業들도 이제 世上이 變化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올바른 方向으로 가도록 壓迫하는 게 重要합니다.

    김호기 財閥 內部의 變化가 感知된다는 말인가요.

    金尙祚 이젠 ‘30大 財閥’이란 말이 意味가 없어졌어요. 財閥 內에서도 兩極化가 進行돼왔어요. 4大 財閥인 三星, 현대次, LG, SK와 그 親族 그룹을 包含하면 10餘 個의 그룹만이 우리가 생각하는 財閥로서의 파워를 가졌어요. 나머지 그룹들은 事實上 둘 中 하나가 不實 徵候를 보일 程度로 相當히 危險해요. ‘땅콩 回航’ 事件이 터졌을 때 바로 膺懲한 것처럼 國民은 財閥 問題가 뭔지, 어떻게 고치는지의 方法을 아는 셈이지요. 우리가 풀기 어려운 問題는 不特定 多數가 關聯된 非正規職, 自營業者 問題 等이에요. 眞짜 苦悶해야 하는 經濟民主化의 本領입니다.

    김호기 ‘3世 經營’은 어떻게 봐야 하는지요. 前近代的 形態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金尙祚 財閥 總帥 一家의 패밀리 企業集團 形態는 다른 나라에도 많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나라를 보더라도 閉鎖的인 家族 所有 構造가 3代 以上은 維持되기 어려워요. 現在 우리나라 財閥은 2歲에서 3歲로 넘어가는 過渡期인데, 創業者와 2歲까지는 슘페터的 企業家 精神이 있었어요. 勿論 勞組 彈壓과 不法行爲 能力까지를 包含하는 것이지만요.

    우려스러운 것은 現在 財閥 3世들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挑戰精神을 잃어버렸다는 點이에요. 3世들은 할아버지, 아버지가 만든 王國에서 皇太子처럼 커왔기 때문에 世上과 完全히 斷絶됐고 어려움에 부딪혀서 克服한 經驗도 없어요. 그러니까 일감 몰아주기와 같이 安全하게 돈 버는 일에만 沒頭하는 거예요. 나아가 大多數 社會 構成員과 疏通하고 共感하는 能力도 없는 狀態지요.

    3世가 總帥가 되는 時代가 곧 오는데, 그게 바로 우리나라 財閥이 逢着하게 될 가장 큰 危險要素라 할 수 있어요. 이것은 제가 再昨年 三星그룹 社長團 會議에 가서 한 얘기이기도 해요. 이제 3世들의 役割은 內部 構成員들의 意見을 聚合하고 外部 構成員들에게 傳하는 持株會社 理事會 議長이에요. 여기서 個人的인 力量을 評價받으면 CEO로 가고, 그렇지 않으면 配當을 받는 株主로 물러나는 것이지요. 머지않아 3世들의 運命이 決定될 것으로 봅니다.

    김호기 朴槿惠 政府의 ‘초이노믹스’는 어떻게 봅니까. 失敗한 것 아닌가요.

    金尙祚 최경환 副總理가 지난해 赴任했을 때 個人的으로 期待를 걸었어요. 崔 副總理가 經濟를 아는 政治 實勢 中 한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現在 時點에서 보면 거의 失敗한 게 아닌가 생각해요. 企業所得의 家計 還流를 위한 稅法 改正에서 누구도 理解할 수 없는 稅法을 만들었고 그 效果를 擔保할 수도 없었어요. 또 法과 制度를 통해 뭔가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그것을 미끼로 해서 財閥企業들의 팔을 비틀어 投資와 經濟를 늘리는 運營을 했어요. 어젠다는 있었지만 實行은 舊態依然한 셈이지요.

    公共·勞動·敎育·金融의 4大 構造改革을 내걸었지만, 最近 朴槿惠 政府의 國政 掌握力이 急激히 떨어지면서 事實上 거의 모든 것을 抛棄하지 않았나 싶어요. 歷代 政府 모두가 빠져든 短期效果에 汲汲하면서 落水效果에 依存하는, 失敗의 길을 간다고 봐요. 出發은 昌大했지만 結果는 過去로 가는 것입니다.

    “도전정신 잃은 3세 시대 한국재벌 최대위기 온다”

    經濟改革을 主題로 大膽하는 김호기 敎授(왼쪽)와 김상조 敎授.

    초이노믹스와 所得 主導 成長

    김호기 問題의 核心은 低成長人 듯합니다. 이 點에서 最近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재인 代表가 내건 ‘所得 主導 成長’에 눈길이 가요. 신동아 5月號 이 코너에서 만난 김광두 敎授는 무척 批判的이었는데, 어떻게 보는지요.

    金尙祚 2012年부터 나오기 始作한 所得 主導 成長論은 最近 문재인 代表의 代表 商品이 됐어요. 關鍵은 새로운 콘텐츠가 무엇이냐에 있는데, 率直히 새로운 面이 別로 없어 보여요. 過去에 우리가 經濟民主化, 福祉國家, 革新經濟, 創造經濟 等으로 表現한 語젠더와 다른 게 눈에 띄지 않아요. 새로운 內容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캐치프레이즈 次元으로 보고 싶어요. 콘텐츠를 보면 最低賃金 引上이라는 아이템 以外에는 過去에 다 이야기된 것들을 한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김호기 그래도 進步가 成長을 이야기한 것은 注目해야 하지 않을까요. 成長과 分配의 善循環은 理念을 넘어선 課題이기도 하고요.

    金尙祚 所得 主導 成長論으로 모든 것을 包括하는 方式으로 提示하면 答이 없어요. 進步의 問題點은 하나의 萬病通治藥을 提示하는 陷穽을 反復하는 데 있습니다. 經濟는 그렇게 單純하지 않아요. 如前히 經濟民主化度 重要하고, 福祉國家度 重要해요. 創造經濟와 革新經濟度 重要하고요. 經濟民主化가 위의 成果를 아래로 보내는 ‘톱-다운’ 트랙이라면, 所得 主導 成長은 多數의 所得과 消費를 基盤으로 한 에너지를 위로 올리는 ‘바텀-업’ 트랙이에요. 不確實性의 低成長 時代에 韓國 經濟의 力動性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이 두 트랙을 善循環하는 어젠다가 必要하다고 생각해요.

    김호기 金尙祚式 韓國 經濟의 代案은 무엇인지요.

    金尙祚 15年 前부터 只今까지 저는 먼 未來에 到達할 바람직한 社會相을 提示하는 方式으로 運動을 하지는 않았어요.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에요. 自稱 타칭 進步經濟學者이지만, 進步的이고 옳은 方向이기 때문에 無條件 우리의 未來로 選擇해야 한다는 것에는 反對해요. 우리 社會 構成員들이 많이 同意할 수 있는 方向으로 經濟 秩序를 만드는 것이 必要하고 또 重要해요. 社會가 願하는 方向으로 가는 사람에게는 賞을 주고 逸脫하는 사람에게는 罰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經濟民主化의 本質도 바로 이것이고요. 제가 願하는 未來社會는 信賞必罰(信賞必罰)의 原理가 作動하는 社會지요.

    金尙祚 對 장하준

    김호기 政治學者와 社會學者가 아닌 經濟學者가 社會運動에 關與해온 게 이채로워요. 運動으로서의 經濟民主化의 核心 精神은 무엇입니까.

    金尙祚 經濟民主化에는 公正의 意味도 있지만, 連帶의 意味도 있어요. 市場에 依한 效率性 增加뿐 아니라 내 周邊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뭔가를 追求한다는 連帶의 精神이 重要해요. 이 工程과 連帶를 生産的으로 結合하는 게 經濟民主化이고, 韓國 經濟 問題를 解決하는 方法이에요.

    김호기 金 敎授는 1年 後輩인 장하준 敎授와 흔히 比較되곤 합니다.

    “도전정신 잃은 3세 시대 한국재벌 최대위기 온다”
    金尙祚 工程만이 아니라 連帶를 强調하는 저의 主張이 張 敎授의 社會 大妥協論으로 빠지는 것 아니냐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張 敎授처럼 ‘이리로 오면 큰 利益이 있다’고 말하는 것도 必要하지만, ‘저리로 가면 큰 罰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社會가 바람직한 方向으로 가기 위해서는 逸脫하는 사람들에게 채찍을 加하는 役割도 必要해요. 저는 그 채찍의 役割을 繼續 해나가고 싶어요.

    김호기 金 敎授나 저나 어느새 50代 中盤이에요. 버킷리스트가 있을 텐데, 첫 番째는 무엇인가요.

    金尙祚 두 군데를 가보고 싶어요. 박경리 先生의 ‘토지’에 나온 평사리 崔參判宅과 조정래 先生의 ‘太白山脈’에 나오는 筏橋예요. 筏橋에서 꼬막을 한番 먹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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