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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身은 나의 敵이 아닙니다 함께 이야기 나눌 순 없을까요|신동아

當身은 나의 敵이 아닙니다 함께 이야기 나눌 순 없을까요

  • 정여울 | 文學評論家 suburbs@daum.net

    入力 2015-05-22 13: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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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나의 적이 아닙니다 함께 이야기 나눌 순 없을까요

    天使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br>정혜신 · &#129;진은영 지음, 創批

    세월호 事件이 있고 나서 석 달쯤 後에 高等學校 同窓을 만났다. 그 親舊는 오랫동안 아픈 딸을 건사하느라 自身의 꿈도 當分間 접어둔 狀態였다. 雙둥이 中 하나가 태어날 때부터 많이 아파 只今도 걸음걸이가 자유롭지 못했다. 그女의 딸 이야기를 들으면 나부터 눈시울이 뜨거워져 그 親舊를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異常하게도 時間이 지나니 그 親舊가 더 많이 그리워졌다.

    그女의 딸을 그날 처음 만났는데, 총명하고 사랑스럽게 잘 자란 아이를 보니 내 마음이 훨씬 便安해졌다. 그런데 그 親舊가 歲月號 이야기를 하면서 뜻밖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동안 나는 애들 키우느라 내 살림 챙기느라 내 생각만 하고 살았는데, 나만 힘들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막상 이런 일이 일어나니 이 社會가 이렇게 된 것이 내 탓인 것 같아. 나만 생각하고, 내 家族만 생각한 마음들이 모여서, 이런 慘事가 일어난 것이 아닐까 싶어.”

    親舊의 告白을 들으며 마음이 아팠지만 한便으로는 커다란 慰勞를 받는 느낌이었다. 나 또한 남몰래 그런 罪責感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以後에도 세월호 事件과 直接的으로 聯關이 없지만 멀리서, 그리고 혼자서 罪責感을 느끼는 사람을 여럿 만났다. 1年이 넘는 時間이 지났지만, 自身과 直接的인 相關이 없어도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의 存在야말로 우리 社會의 가녀린 希望이라는 생각이 든다.

    ‘天使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는 바로 그렇게 멀리서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의 心琴을 울리는 冊이다. ‘거리의 意思’ 정혜신과 ‘文學과 政治를 思惟하는 詩人’ 眞은영이 만나 함께 한 對談集 속에는 歲月號 遺族들 이야기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트라우마 以後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切切한 이야기가 담겼다.

    治癒 共同體, ‘이웃’의 發見



    이 冊은 아직도 사그라질 幾微가 보이지 않는 뼈아픈 憤怒와 罪責感을 暫時만이라도 내려놓고, ‘知性’과 ‘省察’이라는 차분한 프리즘으로 세월호 事件을 바라보게 만든다. 이 冊이 내게 준 커다란 認識의 轉換 中 하나는 ‘歲月號 疲勞度’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歲月號 引揚을 反對하거나 세월호의 ‘세’字만 나와도 剛한 反感을 보이는 사람들이 ‘우리의 敵’李 아님을 깨우쳐주고 있다는 點이다.

    나는 率直히 그들이 너무도 ‘野薄하고 無情하다’고 생각했지만, 이 冊을 읽고 나니 歲月號 疲勞度를 내세우며 그 이야기로부터 逃避하려는 사람들 또한 一種의 集團的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歲月號 이야기 自體를 避하려고 하는 사람들 또한 더는 傷處 받기 싫은 마음 때문에 一種의 防禦機制를 作動하는 것이 아닐까.

    정혜신 博士와 진은영 詩人이 가장 憂慮하는 것 中 하나는 加害者와 被害者의 싸움이 아니라 被害者 內部의 分裂이다. 事件에 直接的으로 責任이 있는 사람들은 눈도 꿈쩍 안 하는데, 事件 때문에 職·間接的으로 커다란 傷處를 입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傷處를 준다면, 이 싸움은 돌이킬 수 없는 破局을 招來할 것이다.

    정혜신 博士는 세월호 事件 以後 安山으로 移住해 ‘이웃’이라는 治癒 共同體를 마련하고 于先 遺族들에게 ‘마음껏 울 수 있는 空間’을 提供했다. 事故로 떠나간 子息들 생각에 밥 한 그릇, 물 한 모금 제대로 못 넘기던 遺族들은 이곳에 와서 바깥世上에서 받은 傷處를 조금씩 治癒한다. 정혜신 博士가 마련한 治癒 共同體 ‘이웃’에는 國民 誠金으로 支援되는 素朴한 집밥의 따스함, 세월호 事故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들이 함께 뜨개질하며 서로 慰勞하는 모습, 저 하늘의 반짝이는 별이 된 아이들을 위한 生日잔치를 열어주는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있다.

    社會的 治癒가 먼저다

    災難의 傷處를 治癒하는 데 韓國 社會가 보여온 가장 큰 問題點은 모든 災難의 아픔을 結局 ‘個人의 탓’으로 돌려버린다는 點이다. 分明히 社會的 關心과 國家的 責任이 必要한 일임에도 支配階層은 結局 ‘當身의 傷處는 當身이 알아서 處理하라’는 式으로 對處해왔다.

    정혜신 博士는 9·11테러나 東日本 大地震, 스웨덴 大型 旅客船 沈沒 같은 事例와 比較해볼 때 우리나라가 決定的으로 다른 點이 바로 이 ‘社會的 治癒’가 絶對的으로 不足한 것이라고 强調한다. 濟州 4·3 被害者들, 光州 5·18 被害者들, 그리고 雙龍車, 龍山, 密陽, 강정, 씨랜드, 天安艦 等 셀 수 없이 많은 被害者가 ‘社會的 治癒’의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放置됐다.

    災殃의 眞相 糾明이 先行돼야 하고, 이를 통해 社會가 모을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끌어 모아 돕는 것이 그다음이고, 그래도 平生 씻을 수 없는 個人의 傷處를 함께 治癒하는 것이 맨 나중이다. 그러나 우리 社會에서는 늘 ‘眞相 糾明’이 이뤄지지 않는다. 첫 단추가 끼워지지 않으니 社會的 治癒도, 個人的 治癒도 제대로 始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狀況에서 唯一한 希望이 바로 ‘이웃’의 共感과 연대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얼굴 한番 본 적 없어도 ‘그날 그 衝擊’을 함께 記憶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이야말로 眞正한 이웃이며 社會的 治癒의 主體가 될 수 있다. 于先 遺族이 2次, 3次의 트라우마를 겪지 않도록 더 以上의 刺戟的인 行動을 避해야 한다. 정혜신 博士는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素朴한 일들’을 찾아서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어떤 學位 없이도 훌륭한 ‘이웃 治癒者’가 될 수 있다고 傳한다. 어떤 自願奉仕者는 ‘이웃’에 찾아와 하루 終日 淸掃만 하다가 간다고 한다. 그女가 治癒의 空間 구석구석을 깨끗이 淸掃해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깊은 慰勞를 느낀다.

    이것이 바로 어떤 醫術이나 藝術 作品보다도 더 훌륭한 ‘이웃 治癒者’의 役割이다. 學位가 없어도 좋다. 대단한 理論이나 藥물治療 같은 것이 없어도 좋다. 그저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보살피는 따스한 마음과 작은 配慮만으로도 傷處 받은 사람들의 가슴은 ‘기우뚱’한다.

    진은영 詩人은 정혜신 博士에게 決定的인 質問을 던진다.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의 差異’는 무엇이냐고. 정혜신 博士는 매우 明快하게 對答한다. 흔히 ‘아픈 만큼 成熟해진다’고 할 때 그 아픔이 스트레스라고. 하지만 트라우마는 아픈 만큼 成熟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픈 만큼 破壞되는 것이라고.

    스트레스가 姑婦間의 葛藤이나 試驗 直前의 緊張感처럼 삶의 ‘部分的인 問題’라면, 트라우마는 다시는 그 以前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總體的인 災殃이다. 職場 上司와의 關係에서 ‘스트레스’를 느낄 때 우리는 다른 일에 沒頭하거나 그 사람을 안 보면 스트레스를 잊을 수 있지만, 트라우마는 그렇지 않다. 窓猝地間에 子息을 잃은 슬픔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길을 걸을 때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가는 다른 엄마들을 볼 때마다, 새록새록 더 아프게 스며든다. 트라우마는 ‘그날 以前’의 삶으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깊은 傷處다.

    우리는 더 알아야 한다

    스무 살 때 性暴行을 當한 한 女性이 20年이 지나 그 加害者를 殺害한 事件이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왜 20年이나 지나서 그랬냐’고 수군거렸지만, 그女에게는 그 끔찍한 性暴行의 트라우마가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생생했다. 트라우마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오랜 歲月이 지나도 바로 어제 일어난 것처럼 또렷하고, 무섭고, 아픈 것. 遺族들의 달曆은 如前히 4月 16日에 멈춰 있다. 365番째 4月 16日이 지났어도 如前히 꿈쩍 않는 世上에서 오직 이 狀況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으로 함께 보듬는 사람들의 따스한 마음이다.

    ‘歲月號 疲勞度’를 이야기하며 더 以上 歲月號 이야기를 안 하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歲月號 引揚을 經濟論理 또는 政治論理로 反對하시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門을 트고 싶다. 當身은 나의 敵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날 以後 돌이킬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같이 經驗하고 있으니까요. 當身의 拒否感은 當身이 傷處 받았다는 證據가 아닐까요. 그런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순 없을까요.

    自願奉仕者들이 뜨개질을 해서 遺家族에게 膳物로 주는 것이 아니라 遺家族들이 直接 뜨개질을 하는 거예요. 遺家族 엄마들이 異口同聲으로 하는 말이, 자꾸만 아이 생각이 나서 미쳐버릴 것 같은데 뜨개질을 하다보면 集中하느라고 아이 생각이 덜 난다는 거예요. 말하자면 鎭痛劑와 같은 거죠. 藥은 效果가 있으면 그에 따르는 副作用도 있기 마련인데, 이건 副作用이 全혀 없는 完璧한 鎭痛劑인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들이 무척 戰鬪的으로 뜨개질을 해요. (…) 아이에게 잘해주었던 敎會 先生님에게 떠주기도 하고, 아이 親舊에게 떠주기도 하고요. 아이를 記憶해줘서 고맙다고 遺家族이 목도리를 떠주는데 世上에 그것보다 더 感動的인 膳物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뜨개질을 媒介로 해서 治癒的인 關係가 自然發生的으로 이어지는 거지요. -‘天使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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