元山 總罷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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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山 總罷業을 報道한 조선일보의 寫眞

元山 總罷業 (元山 總罷業)은 1929年 1月 13日 부터 4月 6日 까지 원산시 에서 있었던 總罷業 이다. 英國系 企業 문평 라이징선 帝猷會社의 日本人 監督의 暴力이 發端이 되어 元山 地域 勞動者 大部分이 參與하는 大規模 罷業으로 發展하였다. 3個月을 넘게 持續되던 罷業은 指導部가 交替되고 罷業에 參與한 勞動者가 分裂되는 가운데 朝鮮總督府 의 大大的인 檢束마저 强化되면서 一段落 되었다. 元山 總罷業은 表面的으로는 勞動組合인 元山勞動聯合會와 商工人 代表인 元山商業會議所가 全面的으로 衝突한 事案이었으나 속으로 들어가면 日帝의 反勞動 政策에 따라 地域의 모든 社會 諸般 階層이 兩 篇으로 나뉘어 싸운 大規模 鬪爭이었다. [1]

背景 [ 編輯 ]

社會的 背景 [ 編輯 ]

韓國 社會에서 賃金 勞動 이 始作된 것은 17世紀 以後이나 勞動者 層이 形成된 것은 開港 以後라고 할 수 있다. [2] 19世紀에 들어서면 埠頭 勞動者를 中心으로 勞動組合 亦是 結成되기 始作하였다. [3] 日帝强占期 에 들어 資本主義的 社會 關係가 擴散되면서 勞動組合 亦是 擴散되어 1911年 當時 勞動者 數는 朝鮮人 12,180 名, 日本人 2,136名, 其他 外國人 259名으로 總 14,575 名 [4] 에 不過하였으나 1920年 會社令 이 撤廢되고 朝鮮과 日本 間의 關稅가 撤廢되자 工業이 擴大되자 [5] 1928年이 되면 全體 勞動者 數가 100萬名을 넘어서게 된다. [6] 이 가운데 工場 勞動者의 數는 10萬餘 名 程度였다. [7]

朝鮮人 勞動者는 大部分 農業의 沒落으로 都市로 移住한 貧民 出身의 非熟鍊 勞動者로서 日本人 管理者 아래서 일하였으며 賃金 亦是 日本人 勞動者의 折半에 不過하였다. 勞動時間 亦是 折半 以上이 12時間 以上이었으며 劣惡한 作業 條件으로 産業災害度 頻發하였다. 日本人 管理者들은 韓國人 勞動者를 蔑視하였고 暴言과 暴力이 頻繁하였다. 그러나 日帝는 아무런 制度的 保護 措置를 取하지 않았고 勞動者들의 處遇는 매우 劣惡하였다. [8]

元山의 産業 [ 編輯 ]

原産은 開港場으로서 比較的 이른 時期부터 都市로 成長하였다. [9] 1883年에는 最初의 近代敎育機關 가운데 하나인 元山學舍 가 세워질만큼 都市化의 速度가 빨랐다. [10] 1913年 京元線 이 元山까지 開通 [11] 된 以後 元山에는 여러 産業이 들어서기 始作하였고 이에 따라 勞動者 階層도 形成되었다. 1920年代 後半부터 元山은 重化學工業 이 들어서기 始作했으며 事件의 發端이 된 會社 亦是 石油會社이었다. [12]

勞動組合 [ 編輯 ]

소비에트 革命 3.1 運動 은 勞動者들에게 적잖은 刺戟을 주었고 [13] 朝鮮總督府 亦是 3.1 運動을 武力 鎭壓한 뒤 일어난 世界的 非難을 의식하여 武斷統治 一邊倒의 强壓的 統治 政策을 바꾸어 이른바 文化政治를 施行하여 [14] 勞動組合 結成에 유리한 條件이 形成되었다. [15]

罷業의 主役인 元山勞動聯合會 (元山勞聯)는 1921年 3月 15日 出帆한 元山노동회가 改編된 것이었다. 元山노동회는 途中(都中)을 單位로 이루어졌는데 [16] 途中은 什長(什長)을 우두머리로 하는 作業班이었고 使用者와의 契約은 十章을 통해 이루어졌다. 따라서 途中은 勞動者들을 剛하게 結合시키는 拘束力을 發揮하였지만, 使用者의 立場에서는 什長과의 交涉만 이루어지면 다른 勞動者와는 별다른 協議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使用者는 途中의 이러한 特性은 利用하여 勞動者의 團結을 약화시켰다. [17] 結成 初期 元山노동회는 事實上 使用者들의 組合인 客主組合 의 監督下에 運營되는 御用勞組였다. [18]

元山노동회는 1925年 김경식(金瓊植)李 委員長이 元山勞動聯合會로 이름을 바꾸고 탄탄한 組織力을 갖추기 始作하였다. [19] 김경식은 元來 백산貿易株式會社의 元山 支店長으로 客主組合의 組合員이었다. 客主組合은 김경식을 勞動組合의 委員長으로 두어 元山老鍊을 繼續하여 御用勞組로 管理 監督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경식은 勞動組合의 委員長이 된 뒤 勞動者의 便에 서서 鬪爭을 主導하는 한便 朝鮮社會團體中央協議會에도 參與하여 社會團體들과 連帶하고자 하였다. [20] 元山老鍊은 創立宣言文에서 “勞動運動의 同一性과 無産者의 世界的 提携”를 闡明하고 있다. [16] 이를 보아 김경식은 아마도 어느 程度 社會主義의 影響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20]

1925年 當時 元山老鍊의 組合員은 모두 2千餘名으로 職業과 場所에 따라 7個 勞動組合으로 나뉜 40餘個의 途中에 屬하여 있었다. 김경식은 元山勞動靑年會와 提携하여 元山社會團體協議會를 構成하고 地域 社會에서 勞動者의 發言權을 强化하였고 1928年에는 新幹會 와도 提携하였다. 1928年 元山의 勞動節 行事에는 42個 傘下 團體 2千餘名이 參與하여 勢를 誇示하였다. [21] 元山老鍊은 理髮所와 病院도 直接 運營하였는데 元山勞動病院 은 勞動者 스스로 社會 福祉를 具現하려 하였다는 點에서 歷史的 意義가 크다. [22]

1927年 元山老鍊은 1,700 餘名이 參加한 罷業을 통해 十章을 통한 勞動契約을 廢止하고 元山老鍊이 團體交涉權을 갖도록하는 데 成功하였다. 이는 勞動組合의 큰 勝利였다. [17]

商工人 團體 [ 編輯 ]

總罷業 當時 使用者 團體는 日本人의 元山商業會議所와 朝鮮人 客主組合 市營會議 둘이 있었다. 1881年 2月에 먼저 居留日本人들의 團體인 元山港會議所가 設立되었으며 같은 해 10月 居留民銃대繹騷와 商法會議所로 分離되었다. [23] 이에 對應하여 1893年 朝鮮人 客主들의 組合인 元山上의소가 세워졌다. 그러나 日本 公使가 持續的으로 客主組合의 解體를 要求하였고 1982年 以後 元山上의소는 뚜렷한 活動이 없게 되었다. [24] 한便 日本人 經濟團體는 1891年 再원산진 日本人商業會議所로 統合되었고 1908年에는 元山商業會議所로 改稱하였다. [23]

日帝 時期에 들어서도 日本人 使用者 團體와 朝鮮人 團體는 分離되어 運營되었다. 朝鮮總督府는 한 地域에 두個의 團體가 兩立하여 運營되는 것을 不必要하다고 여겼고 1915年 日本人을 主軸으로 하여 上衣를 統合하도록 指示하였다. 元山亦是 이러한 統合이 進行되어 1920年代에는 元山상의가 商工人의 代表機構로 運營되었다. [25] 그러나 元山의 朝鮮人 商工人들은 如前히 獨自的인 客主組合을 運營하며 自身들의 影響力을 維持하고자 하였다. 1927年 元山老鍊의 罷業으로 十章을 통한 雇傭이 廢止되자 이를 끝까지 反對한 것도 客主組合이었고 總罷業에서도 客主組合은 끝내 元山老鍊의 要求를 認定하지 않았다. [20]

總罷業이 일어날 當時 勞使의 交涉代表는 元山老鍊과 元山상의였다.

發端 [ 編輯 ]

1928年 9月 咸鏡南道 덕원군 문평裡에 있던 英國人 所有의 문평 라이징 線(Rising Sun) 帝猷會社에서 毆打 事件이 發生한다. 帝猷會社는 石油를 精製하여 流通하는 會社였다. 이 會社의 中間 管理者였던 日本人 고다마(兒玉)가 朝鮮人 勞動者를 暴行하였다. 고다마는 平素에도 朝鮮人 勞動者에게 暴言을 일삼았으며 公公然히 蔑視하였다. 暴力事態가 일어나자 이 會社의 勞動者 120名은 日本人 監督의 罷免, 最低賃金 保障, 解雇手當第 實施 等을 要求하며 罷業에 들어갔다. 元山老鍊이 介入한 交涉에서 會社는 마지못해 勞動者의 要求를 들어주겠다고 하였으나 約束은 履行되지 않았다. [12] 元山老鍊은 早速한 約束 履行을 要求하며 罷業을 豫告하였고 라이징 線은 交涉團體 사이의 問題라며 解決 責任을 元山上衣에 떠밀었다. 元山상의는 罷業에 加擔하는 勞動者를 모두 解雇하겠다는 立場을 내놓았다. [26] 한便 日帝 當局은 總罷業이 "治安"과 "社會安定"을 해친다는 理由로 警察과 消防官, 그리고 日本軍 第19師團 所屬 咸興連帶 400餘名을 投入하여 元山老鍊을 威脅하였다. [12]

經過 [ 編輯 ]

總罷業 [ 編輯 ]

1929年 1月 13日 라이징 選의 勞動者들은 元山老鍊에 交涉이 履行되지 않고 있음을 報告하였고 元山老鍊은 라이징 線 所屬 勞動者들의 罷業을 指示하였다. [21] 當時 元山은 라이징 線 以外에도 運輸 勞動者들의 爭議가 이어지고 있었고 라이징 線이 罷業에 突入하자 이들 亦是 罷業을 準備하였다. [27] 1月 14日 라이징 선 勞動者들이 罷業에 突入하자 1月 17日 元山상의는 對策會議를 통해 元山勞聯 瓦解를 試圖하였다. 상의는 라이징 選의 罷業을 缺勤으로 處理하고 元山勞聯 所屬의 勞動者들을 採用하지 않겠다고 宣言하였고 元山 市內에 삐라 를 뿌려 勞動者들이 아무런 理由 없이 賃金引上을 要求하며 罷業한다고 宣傳하였다. [28]

元山老鍊은 1月 22日 中央委員會를 열고 元山상의가 協商할 意思가 없으며 오히려 老鍊을 瓦解시키려 한다는 點을 들어 總罷業을 決意하고 23日 아침부터 總罷業을 展開하였다. [29] 總罷業에는 元山老鍊 傘下 24個 勞組의 勞動者 2,200餘 名이 加擔하였다. [30]

彈壓과 對應 [ 編輯 ]

總罷業이 始作되자 元山上衣와 日帝 當局은 곧바로 對應에 들어갔다. 元山상의는 大體 勞動者를 求해 罷業을 無力化시키려고 試圖하였다. 仁川에서 200餘 名의 勞動者를 데려와 稅關 倉庫 等에서 勤務하게 한 것이다. [27] 그러나 仁川에서 온 勞動者들은 元山의 狀況을 把握하고는 罷業 隊列에 合流하여 상의의 意圖는 挫折되었다. [31] 元山 總罷業은 곧바로 勞使 紛爭의 範圍를 벗어나 社會 問題로 飛火되기 始作하였다. 元山에 居留하던 日本人들은 在鄕軍人會와 국수回(國粹會), 消防段을 中心으로 테러 威脅을 加하였고 [30] 警察은 勞組 幹部를 檢擧하였다. [30] 日本軍 亦是 300餘名의 步兵이 市街를 行進하며 武力 示威를 하였다. [27] 이러한 對決은 民族 問題로도 번졌다. 警察은 朝鮮人 幹部를 轉補하고 그 자리를 日本人들로 매꾸었고, 罷業長期化를 豫見한 元山상의는 物資의 遮斷과 함께 地域 經濟의 痲痹를 傍觀하였다. 比較的 餘裕가 있었던 日本人 企業과 달리 大多數 零細하였던 朝鮮人 企業은 곧바로 倒産의 危機에 處하게 되었지만 元山상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32] 그러나 地域 經濟 痲痹로 危機를 겪게 된 朝鮮人 商工人들이 이를 勞動組合의 責任으로 認識하였다는 點에서 總罷業의 餘波를 民族問題로만 보는 것은 斷片的이란 指摘이 있다. [33] 朝鮮人 地域 名望家들로 構成된 市民協會는 總罷業에 溫情的이었으나 元山上衣의 脅迫과 懷柔로 結局 上衣와 함께 步調를 取하기로 하였고 [32] 客主協會인 市營會는 처음부터 元山老鍊의 要求에 反對하였기 때문이다. [20]

罷業 한 달 사이에 委員長 김경식을 비롯한 勞組 幹部 42人이 拘束되었다. [31] 警察이 勞組 事務室을 押收 搜索하여 帳簿를 徵發하고 勞組 指導部를 橫領犯으로 몰고자 하였으나 아무리 뒤져도 한 푼의 不正도 發見할 수 없었다고 한다. [16] 2月이 되자 元山老鍊은 새로운 指導部를 構成하여 長期戰에 對備하였다. 열흘이 넘는 罷業 속에 元山의 經濟는 이미 痲痹 狀態였고 生必品 枯渴로 위태로운 狀態가 되기 始作하였다. 元山老鍊은 印刷, 除免, 車輛, 洋服, 洋畫와 같이 生活에 必須的인 部分에 對해서는 罷業을 解除하여 市民의 不便을 最少化하는 한 篇 [21] 辯護士였던 委員長 職務代行 김태영은 "한 盞의 술, 한 개피의 담배, 한 푼의 浪費도 反動"이라며 1日 2式과 함께 物資 節約을 激勵하였다. [31] 元山老鍊은 元山상의에게 討論會를 提案하고 圓滿한 妥協을 試圖하였으나 상의는 一切의 對應 없이 勞組 瓦解 工作에 着手하였다. 2月 19日 상의가 主導하여 設立된 咸南노동회는 暴力輩가 大擧 投入된 御用勞組 罷業破壞者 였다. [28]

連帶 [ 編輯 ]

원산시에 있던 日本人 勞動者들은 이 事件을 資本家의 잘못된 慣行과 無理한 彈壓이 부른 事件으로 보았고 元山老鍊을 應援하였다. 때마침 元山에 碇泊한 日本 船員들은 元山상의가 要請한 大體 勞動을 拒否하였고 連帶 罷業을 벌이기도 하였다. [33]

상의는 大體 人力을 求하기 위해 仁川에서 勞動者들을 救해왔으나 事情을 알게 된 仁川 勞動者들마저 罷業에 同參하였다. 元山罷業은 新聞 報道를 통해 國內는 勿論 海外까지 널리 알려졌다. 國內 各地에서 新幹會 를 비롯한 여러 團體가 後援 物資를 보내며 連帶하였고, 中國과 프랑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의 勞動者들이 連帶 專門을 보내왔다. [31] 1月 末 무렵에는 勞動組合의 勝利가 目前에 다가온 것으로 보였다.

長期化 [ 編輯 ]

元山상의가 交涉에 應할 생각이 없고 警察을 비롯한 當局이 彈壓 一邊倒로 對應하자 元山老鍊은 버티는 것 以外에 달리 方法이 없었다. 2月 中旬이 되자 警察은 勞動組合 組合員의 집을 家家戶戶 訪問하며 罷業 中斷을 要求하였다. [17] 勞動者들은 一切의 收入이 없는 가운데 節約으로 버티는 수 밖에 없었으나 3月이 되자 狀況은 急激히 惡化되기 始作하였다. [30] 元山상의는 새로 設立된 咸南노동회를 통해서만 勞動者를 採用하겠다며 元山老鍊을 더욱 壓迫하였다. 3月 中旬 以後 勞動者들 가운데 元山老鍊을 떠나 咸南노동회에 加入하여 다시 就業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21] 委員長 職務代行 김태영은 咸鏡南道 道知事와 元山 府尹을 찾아가 仲裁를 要請하는 한便 勞動者의 部分的인 就業도 許容하였다. [34]

總督府는 元山老鍊의 綱領과 마크를 問題삼으며 共産主義 와의 連繫說을 流布하였고 新聞들이 이를 그대로 報道하자 새로운 指導部는 더욱 萎縮되었다. [32] 元山상의는 罷業 動力이 弱化되자 더욱 高壓的인 態度를 取하였고 [34] 勞動者들 사이에도 元山老鍊을 死守하자는 側과 咸南노동회를 통해 再就業한 側 사이의 葛藤이 激化되었다. [33] 元山老鍊은 自身들을 통한 鬪爭만을 固守하면서 朝鮮人 社會와도 葛藤을 빚었다. [17]

4月 1日 數十名의 사람들이 咸南노동회를 襲擊하는 事件이 發生하였다. 警察은 이를 元山勞聯 側의 테러로 規定하였으나 實際 逮捕된 사람은 아무도 없어 使用者 側의 自作劇이라는 疑惑이 있다. [27] 當代의 사람들로서는 이를 쉽게 判斷할 수 없었지만 여러 情況을 살펴볼 때 日帝 當局 側의 造作일 可能性이 높다. 元山老鍊은 罷業 初期부터 秩序의 維持와 罷業 勞動者의 規律 維持에 心血을 기울였고 日帝 當局도 이를 認定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2]

結果 [ 編輯 ]

4月 3日 咸南勞動會議 幹部가 襲擊을 當하여 重傷을 입자 警察은 이를 契機로 元山老鍊 關聯者를 大擧 檢擧하기에 이른다. [28] 指導部가 檢擧된 狀態에서 더 以上 罷業을 維持할 수 없었던 元山老鍊은 元山상의가 持續的으로 主張해 온 勞動組合을 통하지 않은 勞動者 個人의 "自由就業"을 受容하고 罷業을 中止하게 되었다. 얻은 것 하나 없는 敗北였다. 以後 元山의 勞使關係는 御用勞組人 咸南노동회가 影響力을 行使하였다. [33]

罷業을 主導한 元山勞聯 委員長 김경식은 懲役 6個月을 宣告받고 投獄되었다가 10月 滿期 出所하였다. 김경식의 以後 日帝 時期 行跡은 알려진 바가 없고 光復 以後 大韓民國의 初代 勞動局長을 지냈다. [19]

以後 [ 編輯 ]

元山 總罷業 以後에도 勞動組合 運動은 全國的으로 繼續되었다. 釜山에서는 朝鮮紡織의 罷業이 있었고 [35] , 1931年 平壤 고무工場 罷業에서는 강주룡 乙密臺 에 올라 高空 籠城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 [36]

元山 總罷業 以後 朝鮮總督府의 勞動組合 彈壓이 더욱 거세지자 1930年代의 勞動組合은 非合法 組織으로 活動하는 境遇가 많았다. [37] 興南, 咸興, 元山 等地에서도 非合法 勞動組合이 繼續하여 組織되었으며, 警察 當局은 이들을 公安 事犯으로 보고 逮捕하였다. 1931年에서 1935年 사이 逮捕된 勞動組合 活動家는 1,759名에 達했다. [35] 또한 勞動組合은 非合法 活動과 함께 새로운 思想을 自身들의 組織 理念으로 받아들였다. 朝鮮共産黨 과 같은 共産主義 運動家들은 赤色勞組 運動을 벌였고 [38] , 元山에서는 아나키즘 의 影響아래 元山一般勞動組合 이 結成되었다. 元山一般勞動組合은 元山 總罷業 以後 埠頭 勞動者들이 中心이 된 咸南노동회와 달리 여러 中小 事業場의 勞動者들을 組織하였으며 咸南노동회 幹部들의 非理를 暴露하였다. [39] [40]

評價 [ 編輯 ]

當代의 評價 [ 編輯 ]

朝鮮共産黨 의 3次 再建 組織인 ML派의 김영두와 理哲學은 勞動者들의 自發的 鬪爭을 肯定的으로 評價하면서도 勞動組合 指導部의 改良性 때문에 敗北하였다는 立場을 보였다. 特히 김영두는 元山老鍊의 指導部를 "朝鮮에서 가장 右翼的인 勞組"라고 맹공하였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가 더 以上 소부르주아 를 指導部로 認定하지 말고 스스로 全國的인 勞動同盟을 結成해야 하며 共産黨의 이념적 指導를 받아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32] 當代의 이러한 評價는 光復 以後에도 이어져 元山勞聯 指導部가 改良的이었다는 評價는 이 글에서 參照한 여러 文獻에서도 言及된다. 史學者 김광운은 朝鮮共産黨의 이러한 評價가 一面 妥當한 點이 있더라도 以後 이어진 非合法 勞動運動이 定해진 理論에 따라 組織을 꿰어맞추어 理念만을 急進化하였을 뿐 오히려 當代의 問題를 解決하지 못하였다고 批判한다. [37]

元山 總罷業 當時 現場을 取材한 記者들은 "朝鮮 未曾有의 階級展", "大爭議"와 같은 記事들을 送稿하였으나 當代 言論들은 基本的으로 "勞使協調主義"에 立脚한 意見을 表出하였다. 日帝 當局은 元山 總罷業의 經驗을 바탕으로 效果的인 彈壓 政策을 求하고자 하였다.

光復 以後의 評價 [ 編輯 ]

光復 以後에는 民族主義的 觀點의 評價가 두드러졌다. 歷史學者 강동진은 元山 總罷業이 民族 解放 鬪爭의 一環이었음을 强調하였고, 김충렬은 總督府와 元山상의가 緊密한 合作關係 속에 처음부터 元山老鍊을 瓦解하고자 하였다고 보았다. [32] 元山 總罷業은 地域 社會의 3分의 1이 同參한 大規模 爭議로서 勞使關係뿐만 아니라 暴壓的인 對應을 펼친 日帝 當局에 맞선 抗拒로 評價되고 있다. 民族主義的 觀點의 史學者들은 3.1 運動 以後 最大 人員이 凝集한 抗日運動으로 評價한다. [41]

1990年代 以後 元山 總罷業이 日帝强占期에 있었다고 해서 抗日 運動의 觀點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偏狹하다는 새로운 視角이 形成되었다. 日本人 管理者의 暴行이 發端이 되었으나 總罷業은 基本的으로 勞動者 對 資本家의 對決이어서 船員을 비롯한 日本人 勞動者들 亦是 勞動組合 便에 서서 連帶한 反面에 朝鮮人도 客主組合과 같이 自身의 利害關係에 따라 元山老鍊에 反對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33] 전국역사교사모임 은 《歷史,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에서 日帝强占期는 資本主義的 關係가 本格化되고 近代的 勞動者가 出現한 時期이기 때문에 이 時期의 勞動爭議를 "日帝의 侵略으로 勞動者가 苦痛받았다"는 斷片的 敍述로만 理解할 것이 아니라 帝國主義 資本과 總督府의 抑壓이 가장 反勞動者的人 秩序로 制度化된 時期였음을 注目할 必要가 있다고 評價하였다. [42] 朝鮮總督府의 勞動政策은 直接的으로 勞使關係에 影響을 미쳤으며 朝鮮總督府는 勞動統制를 强化하고 日傭勞動制를 奬勵하여 勞動者의 團結을 무력화하고자 하였다. [1]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各州 [ 編輯 ]

  1. 김광운, 〈 1930年 前後 朝鮮의 資本·賃勞動關係와 日帝의 勞動統制政策 〉, 《국사관論叢》 38輯
  2. 이 2006 , 25-26쪽
  3. 韓國 最初 勞動組合과 勞動爭議, 仁川港에서 始作됐다 , 仁川in, 2014年 6月 12日
  4. 以上의, 27쪽
  5. 이 2006 , 28쪽
  6. 이 2006 ,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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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한영우 外, 韓國史 特講,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年, isbn 89-7096-115-1, 277-279쪽
  9. 都市化 , 韓國民族文化大百科社
  10. 최규진, 《近代를 보는 窓 20 - 人間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 묶음이 곧 歷史이다》, 서해문집, 2007年, ISBN   978-89-7483-325-1 , 37쪽
  11. 朝鮮總督府 告示 第238號(1913.08.02)
  12. 歷史學硏究所, 《함께 보는 韓國近現代史》, 서해문집, 2013年, ISBN   978-89-7483-208-7 ,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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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브루스 커밍스, 김동노 外 驛, 《부르스 커밍스의 韓國現代史》, 창작과비평사, 2001年, ISBN   89-364-8219-X , 220-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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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元山總罷業:日帝强占期 勞動者 抵抗의 噴出과 挫折 , 오늘보다
  18. 김경일, 《日帝下 勞動運動史》, 창작과비평사, 1992年, ISBN   978-89-3641-111-4 , 294-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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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元山總罷業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韓國史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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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권태억, 신동원, 《韓國 近代社會와 文化 2》,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年, ISBN   978-89-5210-648-3 , 241-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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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元山總罷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8. 日帝下 勞動運動 (2) Archived 2019年 3月 3日 - 웨이백 머신 , 韓國勞動社會硏究所
  29. 東亞日報, 聯合會員二千名 昨朝부터總罷業斷行, 1929年 1月 24日
  30. 元山 總罷業 , 우리歷史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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