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혁명당 事件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인민혁명당 事件 (人民革命黨 事件, 英語 : People's Revolutionary Party Incident ) 또는 인혁당 事件 (人革黨 事件)은 中央情報部 에 依해 도예종 等의 人物들이 起訴되어 死刑이 宣告된 事件이다. 1964年 의 第1次 事件에서는 反共法 , 1974年 의 第2次 事件에서는 國家保安法 ·大統領 緊急措置 4號 違反 等에 따라 起訴되었다. 1975年 4月 8日 大法院 이 死刑을 宣告한 後 18時間만에 死刑이 執行되었다.

인혁당 事件에 對한 再審의 소는 死刑 執行 後 30年이 지난 2005年 12月 27日 에 받아들여졌다. 2007年 1月 23日 에 서울중앙지법 刑事合議23部가 被告人 8名에 對한 大統領 緊急措置 違反, 國家保安法 違反, 內亂 豫備·陰謀, 反共法 違反 嫌疑에 對해 無罪를 宣告했고, 같은 해 8月 21日 에 遺族들이 國家를 相對로 提起한 損害賠償請求의 소에 對해서 서울地方法院은 國家의 不法行爲 責任을 認定하고 消滅時效 完成의 抗辯을 排斥하면서 時局事件上 最大의 賠償額數 637億餘 원(元金 245餘億 원+利子 392餘億 원)를 支給하라고 判決하였다. [1]

하지만 1次 인혁당事件 起訴者 13名 가운데 9名만 再審에서 無罪, 4名은 如前히 有罪로 남아있다. [2]

事件 槪要 [ 編輯 ]

第1次 인민혁명당 事件 [ 編輯 ]

1964年 8月 14日 , 김형욱 中央情報部 部長은 도예종 , 양춘우 ,김단부 ,배재현 等과 言論人, 學生 41名을 檢擧했다고 發表했다. 이를 通商 '第1次 인혁당 事件'이라고 부른다. 中央情報部는 "이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勞動黨 으로부터 指令을 받아 半(反)政府 組織인 인민혁명당(인혁당)을 結成하여 各界 人士를 모으면서 國家 事變(事變)을 企劃했다"고 主張했다.

그러나, 그 中 檢察 이 起訴한 人員數는 13名에 不過했고, 1審에서는 도예종과 양춘우에게 2~3年의 實刑이, 그外 11名에게는 無罪가 宣告되었다. 그러나, 2審에서 도예종, 양춘우, 박현채 等 6名이 懲役 1年의 實刑을 宣告받았고, 그 外 5名은 懲役 1年 執行猶豫 3年의 有罪判決을 받았다. [3]

한便, 事件 關聯者 김배영은 1962年 10月 日本 으로 密航하였다가 日本 警視廳 의 手配를 받자, 1964年 11月 在日本朝鮮人總聯合會 를 통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으로 越北하였다. 그는 以後 1967年 10月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工作員으로 南派되었다가 1971年 에 逮捕되어 死刑 이 執行되었다. 朴正熙 政權은 김배영의 死刑이 執行된 後 3年이 지난 第2次 事件에서 인민혁명당 再建委員會 資金은 越北한 김배영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主張하였다. [4]

第2次 인민혁명당 事件 [ 編輯 ]

1972年 12月의 維新 體制 發足과 1973年 8月에 있었던 김대중 拉致事件 朴正熙 政府 에 對한 國民的 抵抗을 불러 일으켰고, 1973年 10月부터 示威 等을 통한 朴正熙 政府 維新 體制 에 對한 反對運動이 本格化되었다.

이러한 渦中에 1974年 4月 3日 저녁, 朴正熙 大統領은 ' 民靑學聯 이라는 地下組織이 不純勢力의 背後操縱 아래 社會 各界各層에 浸透해 人民革命을 企圖한다'는 要旨의 特別談話를 發表하고, 民靑學聯과 關聯된 一切의 活動을 禁止하는 緊急措置 第4號를 公布했다.

4月 25日 , 中央情報部 民靑學聯 事件 搜査狀況發表에서 民靑學聯을 '共産主義 思想을 가진 學生을 主軸으로 限, 政府를 顚覆하려는 不純 反政府勢力'으로 規定했다. 이와 關聯하여 緊急措置 第4號 및 國家保安法 等을 違反한 嫌疑로 1,024 名이 令狀 없이 逮捕되고, 그 中 253名이 軍法會議 檢察部에 拘束送致되었다. 5月 27日 , 非常普通軍法會議 檢察部는 民靑學聯 事件 追加發表에서 民靑學聯의 背後에 인민혁명당 再建委員會가 있으며, 이들이 인민혁명당을 再建해 民靑學聯 의 國家 顚覆 活動을 指揮한 것으로 發表했다. 所謂 인혁당 再建위(第2次 인민혁명당) 事件 이다.

7月 11日 , 民靑學聯(1審判部), 인혁당 再建위(2審判部), 日本人(3審判部)으로 分離하여 裁判을 進行한 非常普通軍法會議 裁判部는 7月 8日 軍 檢察部가 求刑한 그대로 인민혁명당 再建위 事件 關聯者 21名 中 서도원, 도예종 等 8名에게는 死刑, 김한덕 等 7名에게는 無期懲役, 나머지 被告人 6名에게는 懲役 20年을 宣告하였다. [5] 7月 13日 에는 7月 9日 求刑과 같이 民靑學聯 事件 關聯者 32名 中 이철 , 유인태 等 7名에 死刑, 7名에 無期懲役, 12名에 懲役20年, 6名에 懲役 15年이 宣告됐다. 2名의 日本人에게도 懲役20年이 宣告됐다. 다만, 民靑學聯 事件 關聯者들은 大部分 1975年 2月 15日 大統領特別措置에 依한 刑執行停止로 釋放되었다. [6]

1975年 4月 8日 , 민복기 大法院長 민복기 을 裁判長으로 한 大法院 全員合議體에서 '인민혁명당 再建위 事件'의 上告가 棄却되어 事件 關聯者 23名 中 서도원 等 8名에게는 死刑, 김한덕 等 7名에게는 無期懲役, 나머지 被告人에게는 懲役 15~20年의 重刑이 確定되었다. 이때 參與한 13名의 大法官들 가운데 이일규 大法官 혼자 만이 原審裁判의 不法性을 들어 判決에 反對했다.(74도3323 判決)

1975年 4月 9日 새벽, 황산덕 法務部 長官의 署名으로 大法院에서 死刑 宣告를 받은지 겨우 18時間 만에 死刑判決을 받은 8名 全員에 對한 死刑이 執行되었다.

關聯 事件 [ 編輯 ]

木曜祈禱會 等 身元運動을 펼친 改新敎 聖職者 조지 오글 牧師는 1974年 12月에, 인혁당 救命運動을 펼쳤던 가톨릭 聖職者 제임스 詩노트 神父는 1975年 4月 30日 에 各各 追放되었다. [7] 警察은 死刑執行 다음날인 1975年 4月 10日 , 연미사를 올리기 위해 함세웅 神父의 응암동聖堂으로 向하던 송상진의 주검을 가져가 化粧 處理했다. 이를 막으려던 문정현 神父는 靈柩車 바퀴에 깔려 다리에 큰 負傷을 입었다. [8]

日本 外務省 官僚가 인혁당 關聯 事件에 韓國을 野蠻國이라고 發言하였다가 失言으로 指摘되어 撤回하였다. [9]

國際赦免委員會 엠네스티의 非難聲明을 동아일보가 75年 4月 11日子 1面에 報道함 [10]

事件 以後의 評價 [ 編輯 ]

인민혁명당 事件에 對해서는 서로 相反된 歷史 認識이 竝存한다.

第1次 인혁당 事件에 連累되었던 박범진 前 國會議員은 2010年 인터뷰에서 "서울대 政治學科 4學年 때인 1963年 入黨할 때 文書로 된 黨의 綱領과 規約을 直接 봤고 北漢山에 올라가서 오른손을 들고 入黨宣誓도 했다"고 證言하며 인혁당이 實際로 國家 變亂을 企圖한 地下組織이었다는 事實을 肯定했다. 그는 "當時 인혁당의 綱領 內容은 民族 自主的인 政權을 樹立해서 北韓과의 協商으로 統一을 試圖한다는 것이었다"고 밝히며, 過去事 委員會의 發表처럼 地下黨이 아닌 理念서클이었다면 構成員을 祕密로 할 必要가 있었겠느냐고 反問하기도 했다. [11]

안병직 敎授는 2011年 5月 26日 에 出刊한 冊 《保守가 이끌다-한국 民主主義 起源과 未來》에서 인혁당은 南韓에서 自發的으로 생긴 共産革命을 위한 組織이었다고 證言했다. [12]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代表의 著書 ‘進步의 그늘’에서 “인혁당은 革新系 人士들의 實體 없는 써클 水準의 모임보다는 綱領과 規約을 갖추고 革命運動을 試圖한 非合法 地下組織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고 分析했었다. [13]

朴槿惠 한나라黨 代表는 2012年 9月 10日 MBC 라디오 <손석희의 視線集中>과 다음날 國會 本會議에 出席하면서 記者들 앞에서는 '인혁당 事件에는 두 가지 判決이 存在한다'는 趣旨의 主張을 했다. [14]

左派 性向 言論의 評價 [ 編輯 ]

民主黨과 그 支持者들을 비롯하여 한겨레, 傾向, MBC 等 左翼 性向 言論들은 인혁당 事件을 國家가 法을 利用해 無辜한 國民을 殺害한 司法殺人 事件이자 朴正熙 政權 時期에 일어난 人權 彈壓의 事例라고 主張하며 批判하고 있다. [15]

김형욱은 이 事件을 回顧錄 《革命과 偶像》에서 " 朴正熙 이후락 의 指令을 받은 신직수 그리고 그의 心腹 李龍澤 이 10年 前에 問題되었다가 證據가 없어서 釋放한 사람들을 다시 政府 顚覆 陰謀 嫌疑로 잡아넣었다"라고 記述하고 있다. [16]

1995年 4月 25日 MBC 가 司法制度 1百周年을 記念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判事 315名에게 實施한 앙케이트 《近代 司法制度 100周年 記念 設問調査》에서 인혁당 事件 裁判이 '우리나라 司法史上 가장 수치스러운 裁判'이었다고 應答했다고 한다.

2002年 9月 12日 , 參與 政府의 疑問詞眞相糾明委員會 는 인혁당 事件이 中央情報部 의 造作이라고 主張하였다.

事件 關聯者 [ 編輯 ]

1975年 4月 9日 인민혁명당 再建위 事件으로 死刑이 執行된 여덟 名은 다음과 같다.

이름 漢字 當時 나이 職業
서도원 徐道源 53 大邱每日新聞 記者
김용원 金鏞元 41 경기여고 敎師
羸瘦病 李銖秉 40 日語學院 講師
우홍선 禹洪善 46 韓國골든스템프사 常務
송상진 宋相振 48 養蜂業
여정남 呂正男 32 慶北大 學生會長
하재완 河在琓 44 建築業
도예종 都禮鍾 52 三火土件 會長

그 外의 刑量은 다음과 같다. [17]

刑量 이름
無期懲役 이태환, 유진곤, 전창일, 이성재, 김한덕, 라경일, 강창덕
懲役 20年 정만진, 이재형, 조만호, 金鍾大
懲役 15年 전재권, 황현승, 이창복, 임구호

1975年 4月 8日 이들에게 死刑을 判決한 大法院 判事들은 다음과 같다.

聲明 漢字 職責
민복기 閔復基 大法院長
민문기 閔文基 大法院判事
안병수 安秉洙 大法院判事
양병호 梁炳皓 大法院判事
한환진 韓桓鎭 大法院判事
주재황 朱宰璜 大法院判事
임항준 任恒準 大法院判事
이일규 李一珪 大法院判事
  • 이 中에서 이일규 判事만 少數意見을 냈다.

當時 中央情報部長 檢察總長 은 아래와 같다.

結果 [ 編輯 ]

眞相 糾明과 그 以後 [ 編輯 ]

  • 2002年 9月 12日 : 疑問詞眞相糾明委員會 에서 인혁당(再建위) 事件은 中央情報部 造作 事件이라고 發表하다.
  • 2004年 11月 2日 : 國家情報院 過去事件 眞實糾明을 통한 發展委員會 (過去史委: 委員長 오충일)가 인혁당 事件의 眞相 糾明 調査를 開始하다.
  • 2005年 12月 7日 : 國家情報院 過去史委가 "인혁당 事件은 造作"이라는 調査 結果를 發表하다.
  • 2005年 12月 27日 : 裁判部가 인혁당 再建위 事件(2次 인혁당 事件)에 對한 再審 소를 받아들였다.
  • 2006年 12月 18日 : 檢察이 異例的으로 求刑없는 論告를 하다.
  • 2007年 1月 23日 : 서울 中央地法에서 인혁당 再建위 事件 關聯 8人에 對하여 無罪를 宣告하다.
  • 2007年 8月 21日 : 인혁당事件 犧牲者의 遺族들이 國家를 相對로 한 損害賠償請求의 소에서 서울地方法院은 國家가 總 637億餘 원을 賠償해야 한다는 判決을 내리다.
  • 2010年 1月 28日 : 民靑學聯事件에 連累되어 10個月間 服役했던 日本人 다치카와 마사키(太刀川正樹, 當時 28世)에 對한 再審判決에서 無罪가 宣告되다.
  • 1次 인혁당 事件에 對해서도 再審이 청구되다
  • 2013年 11月 28日 :1次 인혁당 事件에 對한 再審에서 無罪 判決이 나다.(9명만 無罪, 4名은 如前히 有罪)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司法殺人: 1975年 4月의 虐殺》 天主敎人權委員會(엮음), 학민사, 2001年.
  • 國家情報院 過去事件 眞實糾明을 통한 發展委員會 (2007年 10月 24日). 〈1. 인혁당 事件〉. 《主要 疑惑事件便 上卷》 (PDF) . 111-149쪽 . 2007年 11月 24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各州 [ 編輯 ]

  1. 인혁당 賠償金 利子合쳐 637億.." 一部 財團 出演 Archived 2004年 10月 12日 - 웨이백 머신 , 머니투데이, 2007.8.21.
  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1281624161&code=940301 .   |題目= 이(가) 없거나 비었음 ( 도움말 )
  3. 인혁당 및 民靑學聯 事件 主要 日誌 (登錄 : 2005.12.07)
  4. ‘인혁당’ 起訴 檢事 乘勝長驅…抗命 檢事 左遷-辭表 (登錄 : 2010.04.25 18:14 修正 : 2010.04.25 21:51)
  5. 民靑學聯(下)-速戰速決 軍事裁判 Archived 2014年 2月 1日 - 웨이백 머신 , 韓國日報, 2003年 10月 16日
  6. "維新 抵抗 擴散되자 緊急措置로 인혁당 再建위 事件 造作" , 京鄕新聞, 2012年 9月 11日
  7. 《인혁당 再審 無罪判決의 經過와 意義》, 김형태 辯護士, pp8~pp9.
  8. 世界 最惡의 司法殺人, 造作부터 死刑까지 朴正熙 作品 , 한겨레新聞, 2011年 11月 14日
  9.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10.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  
  11. “인혁당 實在했다”는 박범진 氏의 勇氣 있는 證言 東亞日報, 2010.6.30
  12. 안병직 敎授 證言錄을 통해 본 '5代 時局事件' 東亞日報 2010.05.25
  13. 인혁당 事件의 眞實은? 뉴스타운, 2012.09.12
  14. "인혁당 論難"에 캠프도 當惑…朴槿惠는 搖之不動 (登錄 : 2012.09.11)
  15. '인혁당 統一烈士 43周忌' 文 大統領 花環 한겨레, 2018.4.9.
  16. 金, 경재 (2009). 《革命과 偶像》. 4卷: 人物과사상사.  
  17. 인혁당 再建위 事件의 經過와 意味 Archived 2013年 12月 12日 - 웨이백 머신 , 2012年 9月 12日 確認, 김형태 辯護士
  18. 統一뉴스, 2019.4.9, "絶體絶命의 이 瞬間, 烈士들의 뜨거운 鬪志가 함께 하길",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8379
  19. 京鄕新聞, 2020.11.9, ‘인혁당 事件’ 김한덕 범민련 前 副議長 別世,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3042224
  20. 聯合뉴스, 2021.9.3, '인혁당 事件' 等 7番 逮捕…강창덕 민주당 大邱市黨 拷問 別世(綜合), https://www.yna.co.kr/view/AKR20210903151351011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