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泰壹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全泰壹
淸溪川8街에 있는 全泰壹 胸像
身上情報
出生 1948年 9月 28日 ( 1948-09-28 )
大韓民國 大邱廣域市
死亡 1970年 11月 13日 ( 1970-11-13 ) (22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東大門區
死因 焚身自殺
性別 男性
國籍 大韓民國
職業 裁縫師, 勞動者, 勞動運動家, 人權運動家
宗敎 監理敎
父母 전상수, 이소선
親戚 男동생 전태삼
男동생 전태이(腰絶)
女同生 전순옥
女同生 전순덕
外할아버지 이성조
外할머니 김분이
活動 情報
關聯 活動 勞動運動 , 人權運動
活動 理念 反共主義
經歷 바보회
웹사이트 (財) 全泰壹財團

全泰壹 (全泰壹, 1948年 9月 28日 ( 陰曆 8月 26日 ) ~ 1970年 11月 13日 )은 大韓民國 의 縫製 勞動者 利子 勞動運動家 , 人權 運動家이다. 1960年代 평화시장 縫製工場의 裁縫師, 裁斷師로 일하며 勞動 者의 權利를 爭取시킨 人物로 有名하다.

槪要 [ 編輯 ]

아버지가 詐欺를 當하여 正規 敎育을 받지 못하고 서울 로 올라와 淸溪川 被覆 工場에 就職하였다. 1965年에는 淸溪川內 三逸會社 裁縫師로 일하다가 强制 解雇된 女工을 돕다가 함께 解雇되었다. 以後 韓美辭意 裁斷補助로 있다가 裁斷師가 社長과의 葛藤으로 解雇되자, 그가 裁斷師가 되었다. 1968年 勤勞基準法 의 存在를 알게 되어 1969年 7月부터 勞動廳 을 訪問, 勞動者들의 劣惡한 環境 改善과 衛生 環境 改善을 要求하였으나 거절당했다.

1969年 6月 淸溪川 工場團地 勞動者들의 勞動運動 組織 바보회 를 結成하고, 다니던 敎會와 엠마누엘 修道院 等에서 雜役夫로 일하던 中 다시 왕성사의 裁斷師로 淸溪川 으로 돌아와 勞動運動을 主導했다. 그는 東大門區 廳과 서울特別市 의 勤勞監督官과 勞動廳 을 찾아가 劣惡하고 危險한 勞動環境 改善을 要求했으나 默殺當했고, 朴正熙 大統領에게 書翰을 보냈으나 傳達되지 못했다. 1970年 10月에는 本格的으로 勤勞條件 示威를 主導하였다. 11月 勤勞基準法 火刑式과 함께 평화시장 入口에서 온 몸에 揮發油 를 끼얹고 라이터로 焚身 自殺 하였다. 그의 죽음을 契機로 11月 27日 청계被服勞動組合이 結成되었고, 勞動 運動이 再擴散되었다.

事件 當時 그는 親舊 김개남 (假名)에게 自己 몸에 揮發油를 다 부은 後 성냥 불을 그어 달라고 했고 [1] , 金開男은 그의 몸에 불을 붙였다. 불이 全身에 붙은 채 평화시장 을 뛰었지만 畫像 應急處置 도 없이 放置되었다. 病院에 到着한 뒤에도 注射 費用이 必要하여 勤勞監督官의 保證이 必要하다 했지만, 勤勞監督官은 保證을 拒否했고, 鳴動聖母病院(汝矣島로 移轉하여 只今의 汝矣島聖母病院 , 現在 가톨릭會館 자리)으로 옮겨진 後 醫師는 可望이 없다는 理由로 3~4時間 放置하였다. 結局 當日 밤 10時에 死亡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初期 活動 [ 編輯 ]

전태일은 大邱 남산동의 가난한 勞動者인 전상수와 그의 夫人 이소선 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때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家內手工業度 했으나 거듭 失敗했다. [2] 그러다 裁縫師였던 아버지 전상수가 詐欺를 當하는 바람에 서울 로 올라와서 生活 前線에 뛰어든 뒤 1954年 서울 南大門初等學校에 入學하였다.

그의 家族은 처음에 서울驛 近處 염천교 밑에서 노숙했다. [2] 한때 그의 어머니는 만리동 一帶를 다니며 동냥했다. [2] 그러나 縫製 일을 하던 아버지가 就職하여 月貰房을 마련하면서 月貰 生活을 하였다. 그러나 1960年 다시 大邱 中區로 내려갔다. 以後 그는 正規 敎育을 거의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三발이를 만들어서 파는 各種 行商을 하며 生計를 이어가는 不遇한 幼年期를 보냈다.

1963年 3月 大邱 명덕초등학교(當時 靑玉高等公民學校)에 入學했지만 [3] , 家庭 事情으로 1學年 在學 中 그해 12月 自退하였다. 1963年 겨울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아들에게 自退를 强要하였다. 아버지는 學校를 그만두고 집에서 全的으로 재봉 일만 돌보라고 强要했다. 學校를 다닐 수 없게 된 것에 挫折하여 한 때 家出, 집을 뛰쳐나갔다가 3日만에 歸家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 工夫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그를 발길질로 차고 毆打하여 强制로 學校를 그만두게 했다.

靑少年 時節 [ 編輯 ]

아버지에게 재봉 일을 배웠으나 1964年 동생 전태삼을 데리고 다시 家出, 서울 청계천으로 올라와 서울 평화시장의 衣類製造會社에서 시다(見習工)로 일하였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배운 裁縫 技術로 서울 평화시장의 피複占 補助로 就業해 14時間 勞動을 하며 當時 車한盞 값이던 50원을 日當으로 받았다. 1965年 구두닦이로 구두桶을 메고 평화시장 을 돌아다니던 中, 그해 가을 衣類製造 會社인 삼일사 에서 시다를 求한다는 求人廣告를 보고 삼일사에 入社했다.

하루에 下宿費가 120원인데 一黨 五十원으론 어림도 없지만 다니기로 決心을 하고, 모자라는 돈은 아침 일찍 旅館에서 손님들의 구두를 닦고 밤에는 껌과 休紙를 팔아서 補充해야 했다. 뼈가 휘는 고된 나날이었지만, 技術을 배운다는 希望과 서울의 지붕 아래서 이 不孝子息의 固執 때문에 苦生하실 어머니 생각과 배가 고파 울고 있을지 모르는 막내동생을 생각할 땐 나의 疲困함이 問題가 되지 않았다.

以後 1年間 會社를 다니면서 그는 勞動運動에 投身하게 된다.

勞動運動과 勞動者 人權 運動 [ 編輯 ]

勞動者 生活 [ 編輯 ]

1965年 평화시장 삼일사 의 미싱師로 옮겨 裁縫師로 일하며 어린 女工들이 적은 月給과 劣惡한 勤務環境과 衛生 環境, 過重한 勞動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勞動運動에 關心을 가지기 始作했고, 特히 함께 일하던 한 女工이 苛酷한 勞動 環境으로 인한 職業病인 肺炎 으로 强制 解雇되는 옳지 못한 일을 보고 衝擊을 받았다. 그러나 自身도 女工을 도왔다는 理由로 會社에 밉보여서 1966年 여름 解雇된다.

1966年 8月 17日 평화市場 2層 244號에 있는 점퍼, 衣類 工場인 한미사 裁斷補助로 就職하였다가, 그해 말 한미사 의 裁斷師가 社長과의 葛藤으로 해고당한 뒤 새로 裁斷師 자리에 올랐다. 1967年 2月 初 무렵 下宿하고 있던 집의 딸과 戀愛하였으나, 돈 問題 等으로 어머니에게 罪責感을 느낀 그는 戀愛를 抛棄하게 되었다.

그는 工場 勞動者 生活 中에도 高等學校 復學을 꿈꿨고, 1967年 2月 20日 自身의 바지와 下宿房에 있던 곤로를 팔아 聯合中高等 通信講義錄 <中學 1>卷을 150원에 산다. 手中에 남은 15원으로 10원짜리 노트를 산 뒤 電話費 5원을 주머니에 남겨두고 3日間 禁食하였다. 當時 한 쪽紙에 그는 "來日부터 23日까지 禁食이다. 설마 3日 禁食에야 죽지 않겠지. 精神修養의 禁食이야. 먹을 게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데 왜 콧잔등이 시큰해오고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來年 3月에는 꼭 大學入試를 보자. 앞으로 376日 남았구나. 하루에 2時間씩 工夫하면 來年에는 大學入試를 볼 수 있겠지."라는 內容을 적어두었다.

1968年에 偶然히 勞動者의 人權 을 保護하는 法人 勤勞基準法 의 存在를 알게 되었다. [4] 그 뒤 解說書를 購入해 그 內容을 工夫하면서 法에 規定되어 있는 最小限의 勤勞條件조차 지켜지지 않는 現實에 의로운 憤怒를 느끼고, 바보회를 創立하여 平和市場 勞動者들에게 勤勞基準法의 內容과 現在 勤勞條件의 不當性을 알리기 始作하고 設問을 통해 現在의 勤勞實態를 調査하였다. 바보회는 勞動者들이 勤勞基準法을 工夫함으로써 제 權利를 알고 鬪爭을 하기보다는 搾取的이고 抑壓的인 勞動環境에 順應한 바보라는 뜻이 담긴 것이다. 實際 전태일 烈士가 살던 時代에 勞動者들은 改新敎와 天主敎 聖職者들의 도움을 받아 열린 夜學에 가서 勞動法 을 배웠고, 自身들이 누려야 할 權利를 누리지 못하는 不當한 現實을 깨달았다.

三冬回 組織과 勞動者 權利 請願 活動 [ 編輯 ]

그는 財團會社 시다들과 隣近 工場 勞動者들의 生活을 듣고 집에 와서 말하는 일이 잦아지다가 나중에는 勞動 運動에 本格 投身하게 되었다. 어머니 이소선은 처음에는 그를 말렸지만, 1969年 6月 아버지 전상수가 高血壓 으로 別世하면서 아들이 하는 일을 막지 말라고 하여 이때부터는 말리지 않게 되었다.

1969年 6月부터 裁斷師 親舊들, 近處 工場의 勞動者들을 찾아다니며 바보회 의 會員을 募集하였다. 그는 바보회의 趣旨에 對해 只今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當하고 살지만 우리도 깨우쳐서 바보로 남지 말자는 뜻을 담았다고 說明했다. 一部 勞動者들은 그의 勸告를 忌避하였지만, 그가 不當하게 해고당하는 勞動者들을 辯護하여 解雇를 막거나 再入社 시키면서 그의 바보회 에 參與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는 여러가지로 어려움에 逢着하게 되었다. 親舊들을 糾合하는 어려움, 周邊의 冷笑와 비야兩거림, 奴僮廳과 勤勞監督官, 言論들의 欺瞞劇, 生計를 책임져주기를 바라는 家族들의 懇切한 바람 속에 서있었다. [5] 一部 미싱師와 縫製 勞動者들은 그가 죽은 뒤에도 "自己 하나 죽는다고 뭐가 解決되느냐 [2] "라고 冷笑하였다. 이 當時에 어느 親舊에게 보낸 便紙에서 그는 "現實의 嘲弄과 冷笑가 너무나도 殘酷하고 괴로웠다" 라고 썼다. [6] 하지만 그의 죽음은 헛된 죽음이 아닌, 勞動者도 權利를 가진 사람이라는 事實을 일하는 사람들이 깨닫고 民主勞組 運動이 자라는 밑거름이었으며, 京鄕新聞 에서 전태일의 죽음을 詳細히 報道하는 等 實際 경향신문사 揭示板에 當時 全泰壹 靑年의 죽음에 對해 報道한 新聞 原本이 展示되어 있다. 勞動者들의 人權에 사람들이 關心을 갖도록 하였다.

勞動實態 設問調査와 勞動者 集會 [ 編輯 ]

그는 밤이 새도록 勤勞基準法 弔問을 찾아 暗記하며 現場에서 發生하는 勞動者 不利益에 抵抗하였다. 그는 동대문구청 을 찾아가 劣惡한 環境에 對해 呼訴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勤勞基準法 上의 監督權 行使를 要請하기 위해 市廳 勤勞監督官室을 찾아갔지만, 勤勞監督官은 평화 市場의 慘酷한 얘기에 關心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勞動廳 의 門을 두드렸지만 結果는 마찬가지였다. [7] 가뜩이나 어려운 條件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던 全泰壹에게 그것은 너무나 큰 衝擊이었다. 勞動이나 勤勞 基準法조차 事業主들의 便이라는 現實은 그를 한동안 虛脫 狀態로 몰아 넣었다. [7] 그는 청계천 一帶의 勞動 實態를 直接 調査, 設問하여 이를 土臺로 勤勞基準法 遵守를 要求하는 請願書를 勞動廳 에 냈으나 돌아온 答辯은 輕蔑과 비웃음 뿐이었다. 처음에 若干 말套가 語訥했던 그는 浮浪者로 몰리거나, 勞動廳 公務員들에게 嘲弄의 對象이 되기도 했다. 그의 勞動者 權利 請願은 言論들도 外面했고, 京鄕新聞 等에만 簡略하게 報道되었다.

1969年 7月 劣惡한 勞動條件과 勤勞基準法 違反에 關한 設問調査를 하여 勞動廳 에 陳情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以後 勞動廳 을 찾아가 勤勞 環境 改善, 衛生 環境 改善을 要求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1969年 9月부터 1970年 4月까지 日傭職 建築 勞動者로 일하였다. 이때 그는 監理敎會 의 主日學校 敎師로 活動했다. 1970年 4月부터는 平日에는 自身이 다니던 監理敎會의 新築 工事場에서 일하며 밤에는 勞動者 同志들에게 勤勞基準法 을 가르치는 夜學堂 敎師가 되었다. 週末 낮에는 主日學校 敎師로 活動하였다.

다니던 監理敎會의 建物이 完工되자 1970年 4月부터 8月 까지는 서울 三角山 임마누엘 修道院 建物 新築 工事場에 가서 4個月間 雜役夫로 일하였다. 1970年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8月부터 9月 1個月間 某 미싱會社에 就職했다.

1970年 여름 무렵, "아마도 한두 달 동안" 전태일은 金氏의 外三寸이 運營하는 縫製工場에서 裁斷師로 일했다. 그가 勞動運動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나중에 들었다. 裁斷師 전태일은 키가 작았다. 얼굴도 작았다. "땅땅했다"라고 金氏는 回顧했다. "뭐랄까, 아주… 아주 자그마했어. [2] "
 
— 1970年 8月~9月 무렵 전태일이 勤務하던 미싱會社 社長 外조카의 證言

當時 그가 2個月間 일했던 미싱會社 代表의 外조카는 그가 키가 작고 탄탄했다고 記憶하였다.

政治的 觀點 [ 編輯 ]

그는 每日 日記를 썼다. 한 日記에서 그는 北韓 에 對한 反感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韓國 戰爭 北韓 이 먼저 挑發해서 일으킨 戰爭이라고 記錄해 두기도 했다.

1950年 6月 25日 새벽 4時 野獸와 같은 北傀는 平和 속에 잠긴 남녁 땅을 피로 물드렸다. [8]

勞動運動의 代父로 認識되는 탓에 그를 마치 反政府的이고 反體制的인 人物로 歪曲된 認識을 갖는 境遇가 있는데, 政府와 大統領을 向해 보낸 歎願書에서도 그는 '大統領은 國富이고, 곧 저희들의 아버지'라고 表現하였다. 그는 大統領에게 勞動者들의 極히 劣惡한 作業環境을 改善해주기를 呼訴하는 內容의 歎願書를 보냈다.

尊敬하시는 大統領 閣下 玉體 安寧하시옵니까? 저는 製品(衣類) 系統에 從事하는 裁斷師입니다. 閣下께선 저들의 生命의 源泉이십니다. 革命 後 오늘날까지 저들은 閣下께서 이루신 모든 實際를 높이 尊敬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길이길이 尊敬할 겁니다. 三選改憲에 關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犧牲을 閣下께선 마침내 行하심을 머리 숙여 隱微 합니다. 끝까지 忍耐와 賢明하신 勇氣는 또 한番 밝아오는 大韓民國의 무거운 十字架를 國民들은 尊敬과 信賴로 閣下께 드릴 것입니다.

...(以下 中略)...

저의 좁은 생각 끝에 이런 事實을 고치기 위하여 保護機關人 奴僮廳과 市廳 內에 있는 勤勞監督官을 찾아가 구두로써 監督을 要求했습니다. 奴僮廳에서 實態調査도 왔었습니다만 아무런 對策이 없습니다. 1個月에 첫 週와 三 週 2日을 쉽니다. 이런 休息으로선 아무리 鋼鐵같은 肉體라도 곧 衰退해 버립니다. 一般 公務員의 平均 勤務時間 一周 45時間에 비해 15歲의 어린 시다工들은 一周 98時間의 고된 作業에 시달립니다. 또한 平均 20歲의 熟鍊 女工들은 6年 前後의 經歷者로써 大部分이 햇빛을 보지 못한 眼疾과 神經痛, 神經性 胃臟病 患者입니다. 呼吸器官 障礙로 또는 肺結核으로 많은 熟鍊 女工들은 生活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應當 基準法에 依하여 企業主는 健康診斷을 시켜야 함에도 不拘하고 法을 欺瞞합니다. 한 工場의 30餘名 職工 中에서 겨우 2名이나 3名 程度를 평화시장株式會社가 指定하는 病院에서 形式上의 診斷을 마칩니다. X레이 撮影 時에는 필림度 없는 撮影을 하며 아무런 事後 指示나 對策이 없습니다. 1人當 3百 원의 診斷料를 企業株價 負擔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全部가 健康하기 때문입니까? 나라의 經濟 發展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實態입니까? 하루 速히 身體的으로 精神的으로 弱한 女工들을 保護하십시오. 最小限 黨舍들의 健康에 影響을 끼치지 않는 程度로 滿足할 純眞한 童心들입니다. 閣下께선 國富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小子된 道理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素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아픈 곳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怨望한다면 道理에 틀린 일입니다.

저희들의 要求는 1日 14時間의 作業時間을 短縮하십시오.
1日 10時間 - 12時間으로, 1個月 休日 2日을 日曜日마다 休日로 쉬기를 希望합니다.
健康診斷을 正確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工의 手當 現 70원 내지 100원을 50%以上 引上하십시오.

絶對로 無理한 要求가 아님을 盟誓합니다. 人間으로서의 最小限의 要求입니다. 企業株 側에서도 充分히 지킬 수 있는 事項입니다. [9]

朴正熙 에게 보낸 陳情書에서 그는 "三選改憲에 關하여 저들이 알지 못하는 참으로 깊은 犧牲을 閣下께선 마침내 行하심을 머리 熟語 隱微합니다. 끝까지 忍耐와 賢明하신 勇氣는 또한番 밟(밝)아오는 大韓民國의 무거운 十字架를 國民들은 尊敬과 信賴로 閣下께 드릴 것입니다. [10] …(以下 省略)…하루 速히 身體的으로 精神的으로 弱한 女工들을 保護하십시요. 閣下께선 國富이십니다. 곳(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小子된 道理로써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素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11] "라고 했다.

生涯 後半 [ 編輯 ]

政府 歎願 失敗 [ 編輯 ]

1970年 9月 전태일은 한미사 의 裁斷師가 되었다가, 같은 9月 왕성사 의 裁斷師가 되었다. 裁縫師보다 地位가 높은 裁斷師로 일하며 以前의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親睦會 를 組織하고 會長에 選任되었다. 그 뒤 다시 勞動實態 調査 設問紙를 돌려 126張의 設問紙와 90名의 署名을 받아 ' 평화시장 被服製品上 從業員 勤勞條件 改善 陳情書'라는 이름으로 勞動廳 에 陳情書를 提出한다. 이 內容이 京鄕新聞 에 실려 注目을 받자, 전태일 等 三冬回 會員들은 本格的으로 賃金, 勞動 時間, 勞動環境의 改善과 勞動 組合 結成 等을 위해 事業主 代表들과 協議를 벌였으나, 일을 撫摩하려는 政府 의 約束 違反으로 인해 番番이 無爲로 돌아갔으며, 資本家 들도 三冬會는 社會主義 組織이라고 헐뜯음으로써 勞動者 들이 勞動運動에 參與하지 못하도록 妨害하였다. 그해 10月 부터 그는 勤勞條件 改善 示威를 主管하였다.

그는 言論社들을 찾아다니면서도 勞動者들의 慘狀을 傳達했다. 1970年 10月 7日 마침내 市內 各 夕刊新聞에 평화시장 의 慘狀에 關한 報道가 大大的으로 실렸다.

1970年 10月 8日 그는 三冬回 代表들을 이끌고 평화시장 事務室에 찾아가 勞動者 宿所 다락房 撤廢, 正式 寄宿舍 設置, 勞組 結成 支援, 衛生 環境 改善 等의 內容을 담은 勞動 8個 項의 要求를 提出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朴正熙 大統領 앞으로도 歎願書를 보냈지만 歎願書 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中間에 消去되었다. 10月 24日 그는 서울 都心에서 勤勞 條件 改善 거리示威를 企圖했으나, 午後 1時 事前에 警備員의 申告로 情報를 入手하여 出動한 警察 의 妨害로 霧散되었다.

勞動廳 에서는 11月 7日까지 法을 改正해주겠다고 約束하였으나 法 改正을 約束한 11月 7日에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11月 8日 전태일은 同僚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勤勞基準法 冊을 火刑瑕疵"고 提議했고, 擧事 날짜는 11月 13日로 計劃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機械가 아니다!'라는 口號를 作成하였다.

勤勞基準法 火刑式 [ 編輯 ]

이에 따라 전태일은 三冬回 會員들을 이끌고 1970年 11月 13日 勤勞基準法은 勞動者들의 人權을 保護하지 못하는 無能한 法이라고 告發하는 뜻에서 勤勞基準法 火刑 式을 하기로 決意하고, 플래카드 等을 準備해 평화시장 앞에서 勞動環境 改善과 勤勞基準法 遵守를 要求하며 示威를 벌였다. 그러나 始作도 하기전에 警察들과 고용주 側이 動員한 牌거리들에게 짓밟히고 同僚들도 示威를 벌이며 警察들과 치고박는사이 그는 平和市場 골목 近處에 있다가 午後 1時 30分頃, 警察들에 依해 示威가 霧散될 危機에 놓이자 市場 골목에서 몸에 揮發油 를 붓고 라이터를 켠 뒤, 몸에 불을 붙히고 한손에는 勤勞基準法 冊을 든채 "勤勞基準法을 遵守하라!", "우리는 機械가 아니다! 日曜日은 쉬게 하라!", "勞動者를 酷使하지 말라"라고 외치며 平和市場 앞길로 달려나왔다.

불길은 瞬息間에 전태일의 全身을 휩쌌다. 불타는 몸으로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나갔다. 그는 몇 마디 口號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전태일은 3分假量 放置되었으며, 當時 示威現場에 있던 勞動者들과 同僚들도 너무놀라 불을 끌 엄두도 못냈다.

그러나 전태일의 몸에 불이 붙은 狀態에서 放置당하고 있었다. 조영래 에 依하면 "쓰러진 전태일의 몸 위로 불길은 約 3分假量 타고 있었는데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唐慌하여 아무도 불을 끌 엄두를 못 내었다. [12] " 한다. 그는 온 몸에 불이 붙은채 평화시장 앞을 달리는 渦中에도 끝까지 " 政府 勤勞基準法 을 遵守하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쓰러졌다. 時間이 흐른 뒤 "한 親舊가 뛰어와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잠바 를 벗어서 불길을 덮었다. [12] " 한다.

最後 [ 編輯 ]

전태일의 葬禮式에서 影幀을 안은 이소선

쓰러진 그는 病院으로 실려갔으며 이 消息을 듣고 病院에 온 어머니 이소선에게 전태일은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代身 이뤄 주세요"라는 遺言을 남기고 [13] 쓰러졌다. 隣近 病院으로 옮겨졌지만 應急治療를 받은 전태일은 온몸이 굳어서 펴지지가 않았다. 전태일의 어머니는 추워서 떨고 있는 아들에게 앞치마를 벗어 덮어주고 醫師에게 갔다. 1萬 5千 원짜리 注射 두 對面 (當時 전태일의 給與로 計算하면 約 2年値 年俸에 該當한다.) 于先 火器는 가시게 할 수 있다는 醫師의 말에, 어머니는 後날 집을 팔아서라도 돈을 갚을 터이니 그 注射를 맞게 해달라고 哀願하자 醫師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그러면 勤勞監督官에게 가서 保證을 받아오라고 했다. [14] 이때 平和市場 擔當 서울市廳 勤勞監督官 한 사람이 전태일을 따라 病院에까지 와 있었다. 그러나 勤勞監督官은 "내가 무엇 때문에 保證을 서요?" 하고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避해버렸다.

어머니 이소선이 다시 醫師에게로 가서 매달리자 醫師는 고개를 흔들며, "그 藥이 只今 여기에는 없으니 聖母病院으로 옮기도록 하라"고 했다. 이때까지 전태일은 簡單한 應急治療 外엔 서너 時間을 그대로 放置되어 있었다. [14] 鳴動 聖母病院으로 전태일을 옮기는 앰블런스가 오자, 이때 勤勞監督官이 다시 나타나 전태일 等과 함께 타고 病院을 떠났다. 車 안에서 전태일은 勤勞監督官이 어머니와 하는 소릴 듣고 나서, "사람이 그럴 수가 있습니까? 監査가 끝났다고 그렇게 背信할 수가 있소? 내가 죽어서라도 基準法이 遵守되나 안되나 지켜볼 것이오" 라고 마음 속으로 憤慨하였다. [14]

午後 4時頃 전태일은 救急車에 실려 서울 聖母病院 應急室로 다시 後送되었지만, 11月 13日 午後 10時 聖母病院 應急室에서 死亡 하였다. 聖母病院에서는 전태일을 應急室에 얼마間 두었다가 入院室 로 옮겼는데, 이미 回生할 可望이 없다고 醫師는 診斷했다. [14] 그는 한동안 昏睡狀態에 있다가 그날 저녁 눈을 떠서 힘없는 목소리로 "배고프다……" 라고 하였다. [14] 11月 13日 昏睡狀態에 있었던 그는 그날 午後 10時 病院 應急室에서 夭折하였다. 屍身은 마석 모란공원 ( 京畿道 南楊州市 화도읍 月山里 606-1 산)에 安葬되었다. 전태일이 焚身抗拒를 한 1970年으로부터 50周年인 2020年에 서울特別市는 서울 전태일 다리에서 50周年 記念式을 열었다. [15]

전태일의 由緖 專門 [ 編輯 ]

다음은 전태일이 焚身하기 前 靑玉高等公民學校 同窓들에게 보내는 便紙 形式으로 쓴 遺書의 專門이다. [16]

사랑하는 親友(親友)여, 받아 읽어주게.// 親友餘,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이여.// 付託이 있네. 나를, 只今 이 瞬間의 나를 永遠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所重한 追憶의 書齋에 간직하여주게.// 雷聲 번개가 이 작은 肉身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所重한 追憶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萬若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永遠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領域의 一部인 나,// 그대들의 앉은 座席에 보이지 않게 參席했네.// 未安하네. 容恕하게. 테이블 中間에 나의 座席을 마련하여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中間이면 더욱 좋겠네.// 座席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全體의 一部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暫時 다니러 간다네. 暫時 쉬러 간다네.// 어쩌면 半指 [17] 의 무게와 銃칼의 叱咤에// 拘礙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瞬間 以後의 世界에서,// 내 生涯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目的地까지 굴리려 하네.// 이 瞬間 以後의 世界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腰絶 直後 [ 編輯 ]

勞動界 [ 編輯 ]

그의 自殺 以後 평화시장에 청계被服勞動組合이 結成되었으며, 다른 工場들에도 勞動組合 結成의 契機가 마련되었다. 전태일이 勞動者는 機械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외치면서 죽어간 事件은 當然히 勞動界에 큰 影響을 주어 本格的인 勞動運動 의 始發點이 되었다.

會社의 搾取 解雇 를 當하면서도 團結하여 鬪爭할 생각을 못하던 勞動者 들이 죽음 으로써 勞動者들의 悲慘한 現實을 告發한 전태일 烈士를 보면서 覺醒한 것이다. 1970年 11月 25日 朝鮮호텔 勞動者 이상찬의 焚身 企圖, 1971年 9月 韓國會館(飮食店) 勞動者 김차호의 焚身 企圖, 8月 신진자동차 勞組 組合員과 家族 1900餘名의 罷業 鬪爭, 汗疹商社 파월 勞動者 400餘名의 大韓航空 빌딩 屋上 放火 籠城 等이 主要한 事件들이었다. 1971年의 勞動者의 團結鬪爭은 1600餘件에 이르렀는데, 이는 前年度 165件에 비해 10倍가 넘는 規模였다. [18]

淸溪川의 다른 反應 [ 編輯 ]

1970年 8月~9月에 일하던 某 미싱會社의 社長은 全泰壹 때문에 自身이 調査를 받을까봐 苦悶했다 한다. 그 會社 社長 外조카에 依하면 "外三寸은 全泰壹 때문에 勞動廳 調査를 받게 될까 걱정했다. [2] "고 한다. 그의 外三寸은 "우리 工場에 있다 그런 일 났으면 正말 큰일 날 뻔했다"라고 나중에 말했다. [2] 社長의 外조카 亦是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집안에 누워 계시고, 오빠가 평화시장에서 미싱師로 일하고 있었으며 [2] , 그는 外三寸의 工場에서 月給 2萬원을 받고 시다로 일하면서 전태일을 봤다고 한다. [2]

一部 미싱師 等은 冷笑的으로 反應하였다. 一部 勞動者와 미싱師들 中에는 "自己 하나 죽는다고 뭐가 解決되느냐"라고 말하기도 했다. [2] 當時 初等學校만 나와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던" 一部 勞動者들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이야기를 그저 귓등으로 흘렸다. [2]

政治, 社會界의 反應 [ 編輯 ]

基本的 人權 을 尊重받지 못하는 勞動者 들의 삶을 告發한 그의 죽음은 社會的으로 큰 反響을 일으켜, 11月 16日 서울大 法大生 1百餘名은 그의 遺骸를 引受하여 學生長을 擧行하겠다고 主張했고, 相對生 4百餘名은 無期限 斷食 籠城을 벌였다. 11月 20日 서울대生, 성균관대生, 이화여대生 等과 기타 서울市內 學生運動家들이 모여 서울對 法科大學에서 전태일 追悼式을 擧行하고 共同으로 示威를 벌였다가 解散되었으며, 고려대, 연세대生들도 集會를 열었다.

示威 直後 서울대 側은 無期限 休業令을 내렸으나 서울대生들은 繼續해서 徹夜 籠城을 벌였다. [19]

22日 새문안교회 ( 예장통합 )大學生簿 信徒 40餘名은 전태일의 죽음에 社會가 責任이 있고 自身들도 共謀者라며 贖罪를 위한 禁食 祈禱會를 열었다. 23日에는 基督敎 契에서 改新敎 天主敎 의 共同執典으로 追慕 禮拜 를 擧行하였는데, 故(故) 張公 김재준 牧師 는 "우리 基督敎人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위해 哀悼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닙니다. 韓國 基督敎의 懶怠와 安逸과 僞善을 哀悼하기 위해 모였습니다."라고 하였다. [20]

當時 新民黨 大統領 候補였던 金大中 은 1971年 1月 23日 年頭 記者會見에서 '全泰壹 精神의 具現'을 公約으로 發表하기도 했다. [21] 以後 新民黨 은 勞動 運動에 好意的인 政策을 펼쳤고, 勞動者 示威는 警察과 政府의 彈壓을 避해 新民黨 의 黨舍로 避身하는 일도 種種 發生하였다.

事後 [ 編輯 ]

전태일記念館

1972年 基督靑年 전태일 1周忌 追悼式으로 始作된 以來 1980年代에 와서 勞動運動家 전태일 追悼式으로 題目이 바뀌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 은 아들의 遺言에 따라 別世 直前까지 청계천 勞組 支援과 勞動 運動 支援에 獻身하여 勞動者들의 어머니라는 別稱을 얻기도 했다. 1981年 서울 에서 勞動運動家들 中心으로 전태일記念事業會가 組織되었고, 以後 全泰壹財團이 組織되어 '전태일文學賞'과 '全泰壹勞動上'을 制定하여 授與하기 始作하였다. 1987年 6.10 抗爭 以後 勞動團體들이 모여 그해 7月 부터 8月 까지 勞動者 大會를 열었으며 7月 15日에는 그의 語錄, 草案 等을 參考하여 '87 勞動者階級 解放宣言'李 開催되었다. 1988年 11月 전태일의 焚身 自殺을 記念하기 위한 '全泰壹 精神 繼承 全國 勞動者 大會'가 서울 에서 開催되어 每年 11月 全國 勞動者大會가 열리고 있다. 2002年 民主化運動 關聯者 名譽回復 및 補償審議委員會에서 전태일을 民主化 運動 關聯者로 承認하였다. 1996年 9月 19日에는 서울 中區 을지로6街에서 '全泰壹 거리'를 宣布하였고, 이를 記念하여 민예총 會員들이 전태일 烈士가 焚身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걸개그림 앞에서 追慕公演을 하였다. [22] 이 '全泰壹 거리'에서는 전태일을 追慕하기 위한 '全泰壹 거리文化祭'가 進行되고 있다. 1999年부터는 民主烈士를 비롯해 의롭게 숨진 市民의 記念標石을 세우는 서울市'遺跡地 事業'에 包含되어 平和市場 焚身場所에 記念標石이 세워졌다. 하지만 2003年 청계천 復元工事로 撤去되기도 하였다. [23] 2019年 4月 30日에는 서울特別市 종로구에 전태일記念館 이 正式 開館하였다. 大韓民國 政府는 2019年 11月 12日 全泰壹 50周忌 를 맞이하며 勞動界 最初로 國民勳章 無窮花章을 追敍 하여 그의 功績을 기리고 勞動尊重社會를 向한 意志를 表明하였다.

著書 [ 編輯 ]

  • 《全泰壹 日記》
  •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돌베개, 1983) : 전태일의 手記, 便紙 書信, 勞動設問調査 等 모음

學歷 [ 編輯 ]

  • 南大門國民學校 中退
  • 靑玉高等公民學校(1學年 中退)

名譽卒業 [ 編輯 ]

  • 서울南山初等學校(南大門草家 廢校 後 吸收된 學校) 名譽卒業

論難 및 이슈 [ 編輯 ]

縫製 勞動者 月給 調査 [ 編輯 ]

1970年 當時 전태일은 縫製 勞動者들의 月給 額數를 設問 調査하여 記錄으로 남겼다. 1970年度 當時 전태일이 調査한 바에 依하면 大體로 시다가 月 1千8百 원에서 3千 원, 미싱師가 7千원에서 2萬 5千원, 미싱補助는 3千원에서 1萬 5千원, 그리고 裁斷師가 1萬 5千원에서 3萬원까지 받고 있었다.

東亞日報 의 1983年 뉴스에도 그가 調査한 調査資料와 비슷한 記錄이 傳한다. 東亞日報 記者가 1983年 設問한 資料에도 "70年代 初만 하더라도 平和市場 勤勞者들은 하루平均 14~15時間을 높이 1.5m의 다락房에서 일하고 裁斷師가 月1萬5千원에서 3萬원, 미싱師가 月7千원에서 1萬5千원, 詩다 라는 이름의 見習工이 月1千8百원에서 3千원程度 받았다. [24] "고 한다. 參考로 當時 1972年 9級 公務員(現在 5級) 1號俸은 月給 1萬7300원을 받았다. 裁斷師가 5級公務員보다 月給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시다는 그에 못미친다. [25]

幇助, 放置 論難 [ 編輯 ]

전태일이 불을 붙일 當時 다른 사람이 그의 몸에 불을 붙였으나 불을 붙인 이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人權 辯護士 조영래 에 依하면 全泰壹에게 불을 붙인 第3의 人物이 있었다 한다. [26] 전태일 評傳 》을 처음 執筆한 조영래 는 전태일의 몸에 불을 붙였다는 그의 親舊의 이름을 알지 못하여 김개남이라는 假名을 使用하였다. [26] 1970年 11月 13日 示威가 霧散당하자, 그날 午後 그는 아무 말 없이 金開男의 옷소매를 끌어당기며 눈짓을 하여 그를 사람이 좀 덜 다니는 옆 골목으로 끌고 갔다. 전태일은 "아무래도 누구 한 사람 죽어야 될 模樣이다."라고 말하며 金開男에게 성냥불을 켜서 自身의 몸에 갖다 대어 달라고 付託했다. [26] 조영래 에 依하면 '그 前날 저녁에 金開男은 전태일이 來日 "누구 한 사람 죽는 것처럼 쇼를 한판 벌려서 저놈들 精神을 번쩍 들게 하자"라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26] ' 한다.

성냥불을 켜서 갖다 대어 달라는 전태일의 付託이 深刻하였기 때문에 不吉한 豫感이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긴 했으나 "설마…"하는 생각에 그는 성냥불을 켜서 전태일의 옷에 갖다 대었다. 瞬間 전태일의 옷 위로 불길이 확 치솟았다. 親舊들 보고 먼저 내려가라고 한 뒤 그는 미리 準備해 두었던 한 되假量의 石油를 온 몸에 끼얹고 내려왔던 것이다. [12]

그의 몸에 불이 붙은 뒤에도 現場에 사람이 있었으나 3分假量 放置되었다. 조영래 에 依하면 "(石油를 온 몸에 뿌린 그의 몸에) 불길은 瞬息間에 全身을 휩쌌다. 불타는 몸으로 그는 사람들이 많이 서성거리고 있는 國民銀行 앞길로 뛰어나갔다. 그는 몇 마디 口號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입으로 火焰이 확확 들이 찼던 것인지 나중 말은 똑똑히 알아들을 수 없는 悲鳴 소리로 變하였다. [12] " 한다. 그러나 전태일은 現場에서 3分假量 放置되었다. 도리어 勤勞基準法 火刑式이라 하여 勤勞基準法 法典들을 불타는 전태일을 向해 던졌다. 쓰러진 전태일의 몸 위로 불길은 約 3分假量 타고 있었는데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唐慌하여 아무도 불을 끌 엄두를 못 내었다. [12] 그러다가 한 親舊가 뛰어와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잠바 를 벗어서 불길을 덮었다. [12]

病院 放置 論難 [ 編輯 ]

서울 聖母病院 應急室에 後送되었으나, 그는 3~4時間 동안 放置되었다. 그는 治療다운 治療를 한 番도 받아보지 못한 채 應急室 한 구석에 放置되었다. [27] 그는 病院 到着 直前까지 夭折하지 않은 狀態였다. 그리고 전태일은 救急車로 隣近 病院에 後送되었다가 다시 서울 聖母病院으로 後送된 뒤에도 3~4時間 程度 放置되었다고 한다. 聖母病院에서는 전태일을 應急室에 얼마間 두었다가 入院室로 옮겼는데, 이미 回生할 可望이 없다고 醫師는 診斷했다. [14] 醫師는 全泰壹에게 回生 可能性이 없다는 理由로 3~4時間假量 그를 진료하지 않았다.

入院室에서도 별다른 治療없이 患者를 거의 放置해두다시피 하였다. [14] 어머니 이소선은 목이 마르다면서 물을 달라고 數없이 졸라대며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물을 마시면 火氣가 입 속으로 들어가서 永永 살릴 수 없게 된다는 생각에 물을 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서 渴症이라도 면하게 해주려고 물을 적셔서 입에 축여주었다. [14] 저녁이 되면서부터 전태일은 氣力이 脫盡해 가는 듯 잠잠히 누워 있었다. 한동안 昏睡狀態에 빠진 듯하더니 눈을 떠서 힘없는 목소리로 "배고프다…" 라고 하였다. [14] 그리고 누구도 전태일의 診療費를 내지 않았다.

이를 두고 患者를 살려야 되는 醫師 들이 責任을 傍觀했다는 批判이 있다. "그 當時 전태일의 擔當 醫師는 한 個人이 아니었다. 1970年 11月의 大韓民國 醫療界 全體가 전태일의 마지막 길을 同伴한 主治醫였다. 그 글(전태일의 入院 過程)을 읽었던 1987年의 醫療界도 社會的 責務라는 面에서는 1970年의 醫療界와 別般 달라질 게 없었던 듯 했다. [28] "는 批判이 있다.

勞動人權宣言에 影響 [ 編輯 ]

  • 當時 勞動者 들의 慘酷한 勞動 現場의 狀況이 世上에 赤裸裸하게 알려졌고 이로 인해 全體 勞動者들이 겪고있는 人間以下의 苦痛에 對해 世上 사람들의 關心과 愛情이 일기 始作했다. 勞動者 學生 , 知識人 等 各界各層을 網羅한 連帶는 從前에는 報道조차 하지 않던 勞動問題 를 社會 이슈化했다. 新聞 , 放送 이 이를 大大的으로 報道하게 되고 이로써 政治界와 政黨들도 政府의 半勞動者 政策에 批判을 加하지 않을 수없게 되었다.
  • 전태일의 抗拒는 勞動者 의 목소리를 代辯하는 民主勞動 運動의 高揚과 後날 社會 民主化의 試金石이 되었다. [29]
  • 民主勞總 김영훈 委員長은 전태일 烈士의 삶을 非正規職 勞動運動 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다.김영훈 委員長은 한겨레 21 과의 인터뷰에서 "전태일 烈士는 그 自身도 어려웠지만 自身보다 더 어려운 女性 勞動者 들의 便에서 살다가 죽었다. 勞動運動도 가장 苦痛받는 非正規職 勞動者들,特히 社內下請 非正規職 勞動者들과 連帶해야 한다.이것이 전태일 烈士의 精神을 올바르게 繼承하는 것이다.전태일 烈士는 勞動者가 사람답게 사는 삶을 생각했다. 非正規職 勞動者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사람답게 사는 삶'이다."라고 말했다. [30]

補償金 問題 [ 編輯 ]

2002年 11月 28日 그는 補償金 930萬원을 받았다. 1970年 焚身自殺한 全泰壹(全泰壹)에 對한 補償金은 930萬원에 不過한 反面 91年 焚身自殺한 勞動運動家 윤용하 는 2億 3千萬원을 받게 돼 衡平性 問題가 提起되었다. [31] 委員會는 이에 對해 " 國家賠償法 은 犧牲 當時 月給額을 基準으로 補償金 을 定하도록 돼 있어 當時 月給이 2萬원에 不過한 전태일氏와 90年代 들어 勞動者의 月給이 急激히 오른 後의 對象者와 補償金이 數十 倍 差異가 날 수 밖에 없다"라고 說明했다. [31] [32]

그의 어머니 이소선(李少線) 等 民主化運動 關聯者 遺家族 8名이 12月 31日 '民主化運動 關聯者 名譽回復 및 補償審議委員會'에 補償金 支給을 現實化해 줄 것을 要求하며 再審을 請求했다. [33] 어머니 이소선은 "태일이가 補償金으로 930萬원으로 받는데 비해 1991年 焚身 自殺한 윤용하 氏는 2億 3千萬원을 받는다"며 "이는 태일이의 補償金을 物價上昇率을 考慮하지 않고 當時 賃金만을 單純 反映한 호프만式 計算法 으로 算定했기 때문"이라고 主張했다. [33] 再審請求를 周旋한 全國民主民族遺家族協議會(유가협)도 補償金審議委員會가 當時 專門 技術者였던 全氏를 單純日傭職 勤勞者 로 分類해 補償金 을 支給한 것은 不當하다고 主張했다. [33]

結局 2005年 4月 1億 4千萬원의 追加 補償金을 支給받았다. 政府는 4日 國務會議를 열어 이같은 補償이 可能하도록 規定한 '民主化運動 關聯者 名譽回復 및 補償法律 一部 改正令'을 議決했다. [34] 이에 따라 전태일의 遺族들에게 1億 4千餘萬원이 追加로 補償되었다. [34]

전태일 關聯 作品 [ 編輯 ]

그의 삶은 1983年 出版된 조영래 辯護士의 《 어느 靑年勞動者의 삶과 죽음 》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全泰壹財團에서 전태일 評傳이 改訂版으로 다시 出版되었다. 1990年代에 전태일의 生涯를 다룬 《 아름다운 靑年 전태일 》이란 映畫가 製作되었는데, 全泰壹 役을 맡은 俳優 홍경인 과 내레이션 役割을 맡은 俳優 문성근 은 이 映畫에 無料로 出演하였다. [35] 2000年에는 全泰壹 30周忌에 맞춰 製作된, 전태일烈士를 記憶하는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엮은 映畫 《전태일의 記憶》李 開封하였다. [36] 舞臺 作品으로는 音樂劇 '太一'이 있다. 전태일의 忌日에 맞춰 2017.11.06~11.13, 2018.11.13~11.30 두 次例 上演되었으며 全 製作陣이 盧개런티로 參與하였다. [37] 演劇으로는 自由學校 물꼬 學生들의 演劇모임 '터'의 9期 學生들이 선보인 《스물 한살》이 있다. [38] 歷史저널 그날도 2020年 11月이 전태일이 焚身抗拒를 한 1970年으로부터 50周年이 됨을 記憶하여 전태일의 삶을 記憶하는 放送 歷史저널그날 283回 "人間宣言-우리는 裁縫틀이 아니다!"을 製作하였다. [39]

家族 [ 編輯 ]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은 전태일이 죽은 後 勞動運動家로 活動하였다. 女同生 전순옥 도 勞動運動家가 되어 2012年에는 民主統合黨 所屬 國會議員에 當選되었다. 女同生 전순옥은 35歲에 英國으로 留學하여 노동학 博士 學位를 받았으며, 2001年 英國人과 結婚하였다.

그에게는 姓이 다른 姨母 外三寸 이 있는데, 이는 그의 外할아버지 이성조는 어머니 이소선 이 4살 때 別世, 外할머니는 鄭氏 男子와 再婚하였다.

  • 아버지 전상수 (全相洙, 1923年~1969年 6月)
  • 어머니 이소선 (李小仙, 1929年 12月 30日~2011年 9月 3日)
  • 큰姨母 李氏 (1964年 別世)
  • 姨母,外三寸: 鄭氏
    • 男동생 전태삼(1950年 出生) [40]
    • 男동생 전태이(1952年~1958年) [40]
    • 女同生 전순옥 (1953年 5月 5日~), 勞動運動家, 勞動學者, 政治人
    • 妹夫 크리스 조엘(1942年~), 英國人 , 英語 語學者
    • 女同生 前태리(1958年~, 本名: 전순덕) [40]
  • 外할아버지: 이성조(?~1933年)
  • 外할머니: 김분이

評價 [ 編輯 ]

聖書學者 정승우에게 "전태일이 없었다면 韓國 勞動者들의 人權 은 數十 年 뒤에나 尊重받았을 것" [41] 이라는 말을 들을 程度로, 그는 大韓民國의 勞動 人權과 民主主義 의 發達에 큰 影響을 끼쳤다. 勞動界에서는 전태일을 부를 때 흔히 ' 烈士 '나 '同志' [42] 呼稱을 붙인다.

한便 以後 勞動運動과 反政府 運動의 象徵이 되면서 대단히 急進的이고 戰鬪的인 人物인 것처럼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43] 는 視角도 있다. 歷史學者 함규진에 依하면 "勞動運動과 反政府 運動의 象徵이 되면서 대단히 急進的이고 戰鬪的인 人物인 것처럼 이미지가 만들어어졌지만, 그가 쓴 글은 아주 素朴하고 溫乾하다. '大統領 前上書'의 內容을 보면 骨子가 勤勞基準法 을 遵守하고, 惡德 企業主들을 團束해 달라는 것이다. 마지막은 이렇게 맺고 있다. '閣下께서는 國富이십니다. 곧 저희들이 아버님이십니다. 小子 된 道理로서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素子의 아픈 곳을 고쳐주십시오. 아픈 것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怨望한다면 道理에 틀린 일입니다.' [43] "라는 것이다. 전태일 評傳 을 읽어보면, 전태일은 急進的이거나 생각이 偏向된 사람이 아니라 基督敎人 의 良心으로써 勞動人權運動에 獻身했다고도 볼 수 있다. 전태일 評傳에 전태일이 쓴 日記가 실려있는데, 十誡命 으로써 하나님이 安息日 을 定하셨으니 勞動者 들은 休息할 權利가 있다고 했다.

어머니 이소선의 回顧 [ 編輯 ]

子息들에 對해서 : 이소선 은 "난 子息들한테 할 말이 없는 사람이야.내가 미쳐 돌아다녔는데, 애들이 밥을 먹었는지, 어찌 살았는지 모른다. 해준 것이 없어. 딸(순옥)李 英國 留學갈 때 난 그것도 몰랐어 짐싸놓고와서 간다길래 가는가 했지, 學費 한番 대준 적이 없어. 태삼이 그거는, 니는 雙둥이 子息도 있으니 데모하는데 나오지 마라고 해도, 알았다면서 데모가면 나와있어. 엄마가 勞動運動 못하게 한다고 怨望해. 순덕이는 우리집 사람들은 全部 家出했다고 말한 적이 있어. 언니도 오빠도 모두 勞動運動하러 다니고 집에 아무도 없다는거야. 그런 순덕이가 시집가서 뒤늦게 집을 장만했다는데도 난 가보지 못했어. 그렇게 吳라고해도 갈수가 없어. 지들 사는데 무슨 도움을 주었다고…참 난 못난 사람이야"라고 具述했다.

太一에 對해 : "태일이는 사람을 참 좋아했어. 같은 勞動者를 너무도 사랑했다고. 그러니 烈士나 鬪士보다 그냥 同志 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 태일이는 只今도 勞動者와 함께하는 冬至라고, 제발 그렇게 불러달라고 傳해줘. 태일이는 날 참 좋아했어. 아직도 이 옷을 못 버리고 겨울이 오면 꼭 챙겨입는데, 태일이가 工場에서 남은 천으로 엄마 준다고 손수 만들어 준 內衣野. 누가 새옷 입으라고 사줘도 안入庫 난 이것만 입어…그런 太一이 아니냐"

太一의 동무들에 對해 : "나 그대들 없었으면 只今 살아있지도 못했어. 태일이가 죽고 病院에 찾아와서 이제부터 지들이 내 아들이라는거야. 그리고 只今 40年 가까이 지났어. 變치 않고 엄마 以上으로 잘해줘. 얼마나 챙겨주는지 몰라. 난 正말로 太一이 親舊들을 내 아들이라 생각해. 배곯아가며 두들겨 맞아가며 청계勞組를 만들고 지켜냈지. 이들이 나와 함께하지 않았다면 태일이와의 마지막 約束도 지킬 수 없었을거야. 난 그냥 미쳐 죽었을테지. 어머니라고 얼마나 생각해 주는지, 순덕이 結婚할 때도, 손주들 大學 들어갈 때도 이들이 태일이 노릇 다했어. 열서너살 먹은 女工들, 그 어린 것들이 얼마나 苦生했냐. 이들이 없었으면 청계勞組를 支撐해올 수도 없었을꺼야. 名節 때마다 韓服 차려입고 歲拜하고 그랬어. 只今 다 시집가고 애낳고 살지만 그래도 떡이랑 사들고 찾아오고 그래 이 엄마 준다고." [44]

기타 [ 編輯 ]

70年代 縫製工이던 전태일의 境遇 當時 月給이 2萬원假量이었다. [45]

關聯 書籍 [ 編輯 ]

  • 全泰壹,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돌베개, 1988)
  • 조영래, 《전태일 評傳:어느 靑年 勞動者의 삶과 죽음》 (돌베개, 1983)
  • 김종찬, 《불의 記錄, 피의 記錄, 죽음의 記錄》 (실천문학사, 1988)
  • 조현민, 《歷史를 다시 본다 : 韓國 現代史가 말하는 아리랑 여덟 고개》(萬民事, 1989)
  • 오경환, 《全泰壹思想 硏究》 (한소리, 1990)
  • 金正煥, 《歷史의 希望과 希望의 歷史: 近?現代篇》 (푸른숲, 1998)
  • 안승천, 《(全泰壹에서 民主勞總까지)한국 勞動者 運動, 鬪爭의 記錄》 (박종철출판사, 2002)
  • 이원보, 《韓國勞動運動社 : 100年의 記錄》(韓國勞動社會硏究所, 2005)
  • 趙廷來, 《韓江 6》 (해냄出版社, 2007)
  • 김선, 《醫師가 말하는 醫師》 (圖書出版 부키, 2004)
  • 함규진, 《歷史法廷:韓國史 人物論爭》 (포럼, 2006)
  • 民主化運動記念事業會, 《그날 그들은 그곳에서》 (民主化運動記念事業會, 2009)
  • 민종덕, 《勞動者의 어머니 : 이소선 評傳》(돌베개, 2016)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金正煥, 《歷史의 希望과 希望의 歷史: 近?現代篇》 (푸른숲, 1998) 272페이지
  2. 전태일의 時間·공간·생각 한겨레 21 2010.11.05 第834號
  3. 1971年 문교부 施策으로 中學校, 高等學校가 分離되기 前까지 韓國의 學校들은 中高等學校가 함께 運營되었다.
  4. 위기철 이 쓴 全泰壹 偉人傳(山河)에 依하면, 勞動運動 을 했었던 父親의 影響으로 읽게 되었다고 한다.
  5. 《녹색평론 78號 (2004年 9, 10月號)》 (녹색평론, 2004) 59페이지
  6. 조영래, 《전태일評傳》 (돌베개, 2001) 183페이지
  7. 한국정치연구회 政治史分課, 《韓國 現代史 이야기 주머니, 2卷》 (綠豆, 1993) 265페이지
  8. 全泰壹,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돌베개, 1983) 127쪽
  9. 권태억, 《近現代 韓國 探査》 (역사비평사, 2007) 398~400페이지
  10. 全泰壹,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돌베개, 1983) 136쪽
  11. 全泰壹,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돌베개, 1983) 138쪽
  12. 조영래, 《전태일 評傳:어느 靑年 勞動者의 삶과 죽음》 (돌베개, 1991) 283페이지
  13. 〈이소선:아, 우리들의 어머니!〉, 《이야기 女性史 1》 163~4p, 여성신문사, 2000
  14. 조영래, 《전태일 評傳:어느 靑年 勞動者의 삶과 죽음》 (돌베개, 1991) 289페이지
  15. “서울 全泰壹다리서 '全泰壹 50周忌 追慕祭 ' . 2020年 11月 7日에 確認함 .  
  16. 조영래, 《전태일 評傳》
  17. 金力(金力)을 뜻함.
  18. 지명관, 《韓國을 움직인 現代史 61場面》 98~ 101쪽, 다섯수레, 1996年; 한국정치연구회, 《韓國政治史》 352~ 353쪽, 백산서당, 1990年; 歷史學硏究所, 《講座 韓國近現代史》 347쪽, 풀빛, 1995年
  19. 이광일, 〈우리 時代 知識人의 肖像:權力과 資本의 품에 안긴 知識人들〉, 《당대비평》 第 4號 279쪽, 1998年
  20. 전태일 評傳 》/ 조영래 지음/아름다운 靑年 전태일(高 조영래 辯護士가 쓴 전태일 評傳은 돌배게에서 出版되었으며, 아름다운 靑年 전태일에서 改正하여 다시 出版하였다.)
  21. 조영래, 《전태일 評傳》 (돌베개, 1998) 27쪽
  22. 한겨레 1996,09.20
  23. 全泰壹 銅版 撤去 ‘물의’ 京鄕新聞, 2003.12.01
  24. "서울 斷面 청계천商街 <中> 機械工具·衣類의 本고장", 東亞日報 1983年 11月 30日子 3面, 經濟面
  25. “物價 50倍 오를 때 年俸은 400倍 뛰었는데…왜 내 通帳은 ‘텅腸’일까” . 2020年 11月 17日 . 2021年 12月 11日에 確認함 .  
  26. 조영래, 《전태일 評傳:어느 靑年 勞動者의 삶과 죽음》 (돌베개, 1991) 282페이지
  27. 大邱史學會 篇, 《嶺南을 알면 韓國史가 보인다》 (푸른역사, 2005) 430페이지
  28. 김선, 《醫師가 말하는 醫師》 (圖書出版 부키, 2004) 104페이지
  29. 조성오,《우리歷史 이야기》돌베개,187,208쪽
  30. 《한겨레21》2010年 9月 27日 記事,글:안수찬 記者,寫眞:김정효 記者,p.82
  31. 전태일氏 補償金 930萬원 支給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韓國日報 2002/11/28
  32. 民主化 補償金 첫 支給…衡平性 論難 國民日報 2002.11.28
  33. "民主化運動 補償金 現實化" 전태일氏 遺族等 再審請求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韓國日報 2002/12/31
  34. 전태일 烈士 1億 4千萬원 追加補償 Archived 2013年 12月 24日 - 웨이백 머신 韓國日報 2005/04/04
  35. 映畫「全泰壹」周易 確定 문성근 홍경인 無料出演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東亞日報 1995年 3月 31日 作成
  36. 씨네21-전태일의 記憶
  37. 音樂劇 太一
  38. 全泰壹 財團-[映畫/다큐멘터리] 目錄
  39. “[KBS 歷史저널 그날] 勤勞基準法을 몰랐던 우리는 바보입니다 - YouTube” . 2020年 11月 7日에 確認함 .  
  40. https://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67
  41. 《人類의 永遠한 古典-新約聖書》/정승우 지음/아이세움
  42. 同志 呼稱은 아직 通用되는 건 아니지만 全泰壹 어머니 이소선은 遺言처럼 남긴 말에서 烈士 呼稱을 極口 辭讓하고, 언제나 함께하는 勞動者라면서 '同志'로 불러줄 것을 懇曲히 要請했었다.:오도엽,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후마니타스, 287쪽. 예:“전태일'동지'가 그처럼 壯烈하게 죽었고, 그에 뒤이어 우리 모두 엄청난 苦難과 試鍊을 겪으면서 無數한 鬪爭을 展開했으며”- 장기표 의 글에서
  43. 함규진, 《歷史法廷:韓國史 人物論爭》 (포럼, 2006) 330페이지
  44. 오도엽《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후마니타스,177,203,273,285쪽
  45. 民主化運動補償金 60億5千萬원 첫 支給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