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拉致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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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大中 (1970年)

김대중 拉致 事件 (金大中拉致事件)은 日本 에 亡命 中이던 大韓民國 의 政治人 金大中 이 1973年 8月 8日 午後 1時頃 日本 도쿄都 의 그랜드팰리스 호텔 2210號室에서 大韓民國 中央情報部 要員들에 依해 拉致되었다가, 5日 만인 8月 13日에 서울 동교동 自宅 近處에서 發見된 事件이다.

事件의 背景 [ 編輯 ]

3.15 不正選擧 를 恣行한 自由黨 李承晩 政權은 4·19 革命 으로 沒落하였다. 過渡期 權限代行 體制를 거치며 出發한 第2共和國은 5·16 軍士쿠데타 로 朴正熙가 政權을 掌握하면서 11個月 만에 斷命하고 말았다. 反共, 親美, 經濟改建 等을 公約으로 내세웠던 [1] 軍事政權은 言論을 彈壓하고 모든 政治活動을 禁止시킨 狀態에서 [2] 共和黨 組織作業을 進行하였다. 이어 憲法을 改正하여 直接選擧와 大統領 中心制의 政府 體制를 만들었다. [3] 1963年 10月, 朴正熙는 出馬하지 않겠다던 約束을 깨고 大選에 나가 大統領으로 當選되었다. 11月에 進行된 總選에도 軍事政權에 參與했던 많은 軍人들이 軍服을 벗고 出馬하여 國會議員이 되면서 共和黨의 勝利로 마감되었다. 1963年 12月 17日, 朴正熙가 大統領에 就任하면서 제3공화국이 出發하였다. [4]

第7代 大統領 選擧 [ 編輯 ]

連任에 成功한 朴正熙가 三選改憲 을 推進하자 全國的으로 改憲反對 示威가 들끓었다. [5] 野黨 亦是 극렬히 反對했으며 與黨 內에서 조차 反對가 있었다. 朴正熙는 1968年 5月 '國民福祉回 事件'을 利用하여 黨內 反對派인 金鍾泌 支持勢力을 除去하는등 [6] [7] 여러 便法을 動員하며 反對勢力을 撫摩시켰다. 또한 1969年 9月 14日 새벽에 改憲案을 奇襲 날치기로 통과시켜 大選 出馬의 根據를 마련하였다. [8] 한便, 김대중은 1970年 9月에 進行된 全黨大會에서 競選을 통하여 김영삼을 누르고 신민당 大統領 候補가 되었다. [9]

遊說期間 中 김대중은 이番에 政權交替에 失敗할 境遇, 朴正熙가 永久 執權을 위해 총통制를 實施할 것이며, [10] 計劃에 對해 確實한 證據를 가지고 있다고 主張하며 支持를 呼訴하였다. 김대중과 朴正熙의 兩者對決 構圖로 進行된 選擧는 野黨 候補인 김대중이 政策 對決을 이끌며 宣傳하였다. [11] [12] 그러나 1971年 4月 27日 에 치뤄진 第7代 大統領 選擧 에서 民主공화당 候補였던 朴正熙 大統領에게 94萬票 差異로 惜敗한 [13] [14] 渦中에, 大選 前後 期間 동안 김대중에게 불미스러운 事件이 자주 일어났다.

爆發物 事故 [ 編輯 ]

1971年 1月 27日, 東橋洞 自宅 마당에서 私製 爆發物이 爆發하는 事件이 發生했다. [15] 當時 김대중은 野黨 大統領 候補 資格으로 訪美中이었다. [16] 大選을 目前에 두고 제1야당의 大統領 候補 집에서 發生한 事件이라 國會까지 나서서 眞相糾明을 要求하는 等 政局이 梗塞될 兆朕을 보였다. 警察은 김대중의 집에서 일하는 家政婦 조행덕(22歲)의 陳述을 根據로 김대중의 조카 김홍준(當時 15歲)을 拘束하였다. [17] 김홍준은 장난삼아 韓日이라 自白하였다. 그러나 이틀 後 벌어진 拘束適否審 審査에서 김홍준은 犯行 事實 自體를 否認하고 警察의 威脅과 苛酷行爲 때문에 虛僞 自白을 했다고 陳述을 飜覆하였다. 法院은 拘束 疏明資料가 不充分하다며 釋放을 決定했다. [18]

交通 事故 [ 編輯 ]

大統領 選擧가 끝나자마자 같은 해 5月 25日에 치러지는 第8代 國會議員 選擧 를 위한 遊說가 進行되었다. 支援遊說에 나섰던 5月 24日, 김대중이 탄 車輛과 14톤 大型 트럭이 衝突하는 事故가 發生했다. [19] [20] 元來는 木浦에서 飛行機를 타고 水原으로 移動할 計劃이었으나 缺航으로 인해 車輛을 利用하여 光州로 移動하던 中에 事故가 일어났다. 김대중은 이 事故로 인해 兩팔 靜脈과 骨盤 關節 部位에 負傷을 當했으며 [21] 死亡하기 前까지도 이때의 事故를 當時 政權의 暗殺 試圖였다고 主張했다. 一連의 事件 事故로 인해 身邊에 威脅을 느낀 김대중은 交通事故 後遺症과 持病을 治療하고자 日本을 往來하기 始作했다.

維新과 都彌 [ 編輯 ]

1972年 10月 11日, 김대중은 1971年 5月에 있었던 交通事故로 다친 股關節 治療를 위해 日本으로 건너갔다. 日本 게이오 大學病院에 入院 治療하며 지내던중 [22] [23] 10月 17日 非常戒嚴令 과 同時에 10月 維新 이 宣布되자 김대중은 歸國을 抛棄하고 亡命을 選擇했다. 歸國한다해도 戒嚴下에 國會가 强制解散되었고 政治活動이 禁止된 狀況에서는 아무런 鬪爭活動도 할 수 없는 反面에, 海外에서 朴政權의 獨裁와 싸우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判斷했기 때문이었다. [24] 維新 直後부터 김대중은 日本과 美國을 오가며 外信을 통해 維新 體制를 批判, 糾彈하였고 1973年 7月 6日 美國 워싱턴 에서 韓國民主回復統一促進국민회의 (한민통)라는 團體를 組織하여 [25] 招待議長으로 就任해 僑胞 社會를 中心으로 反政府 鬪爭을 벌이기 始作한다.

한便, 朴正熙 政府는 10月 維新을 宣布하기 前인 1972年 5月, 이후락 中央情報部長을 平壤으로 몰래 보내 金日成 그리고 金榮珠 組織指導部長과 會談을 가지도록 했다. [26] 또한 金榮珠 部長을 代理하여 박성철 第2部首相이 5月 29日 부터 6月 1日 까지 서울을 答訪하여 이후락 部長과 2次例, 朴正熙와 한 次例 會談을 가졌다. 그 結果 7月 4日에 祖國統一 促進을 위한 原則에 對한 合意가 담긴 南北共同聲明 을 發表하며 南北間 平和 雰圍氣가 造成되었는데, 10月 遺臣이 있기 前에도 政府에서 北韓에 먼저 通報를 해주게 된다. [27]

事件 經緯 [ 編輯 ]

襲擊과 拉致 [ 編輯 ]

워싱턴에서 美洲 한민통을 組織한 김대중은 日本 支部를 組織하기 위해 1973年 7月 10日 日本에 入國하였다. [25] [28] 도쿄의 히비야 公園 에서의 反(反)朴正熙 集會 參加를 앞두고 8月 7日에 도쿄 팰리스 호텔 501號에 投宿하고 있었다. [29] [30] 8月 8日 午前에 택시로 移動하여 [31] [32] 그랜드 팰리스 호텔 2211號에 머물고 있던 양일동 民主통일당 代表와 만나 對話를 나누었다. [33] 午後 1時 警 對話가 끝나고 房을 나오던 途中 怪漢들에게 襲擊을 當했고, 비어 있었던 2210號室에 監禁되었다. [34] 김대중은 이 房에서 痲醉藥을 投與받아 意識을 잃은 狀態로 拉致되었다.

首長 試圖 [ 編輯 ]

김대중을 넘겨받은 용금호 [35] 에 있던 者들은 急히 出港한 뒤 김대중을 배밑 쪽 船室로 끌고가서 몸을 새롭게 묶기 始作했다. 손발을 꼼짝 못하게 묶고 눈에는 테이프 를 여러 겹 붙인 다음 그 위에 다시 繃帶를 감았다. [36] 그리고 오른손목과 왼발목에 各各 數十 킬로그램이 되는 돌을 달았다. 마지막으로 等에 板子 를 대고 몸과 함께 묶으며 "던질 때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等의 말을 주고 받았다. 當時 狀況에 對해 김대중 前 大統領은 "발은 밧줄 로 兩쪽을 묶어서 당기려고 해도 끄떡도 않았다. 바다에 던질 計劃을 하는데 솜 이불 을 붙여야 안 떠오른다고 했다. [36] 그리고 自己들끼리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상어가 먹기 좋다는 말도 하더라"라고 證言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꼬꼬무, 서울방송)에 따르면, 當時 김대중은 篤實한 天主敎 信者(洗禮名: 토마스 모어 )로서 예수님 께 懇切히 "國民들이 불쌍하니 살려달라"면서 祈禱 를 드렸다고 한다.

强制歸國과 方面 [ 編輯 ]

김대중이 바다에 水葬될 危險이 있는 狀況에 處해 있을 때 東海 日本側 海岸에서 海上自衛隊 艦艇이 追擊해 왔다. 事件이 發覺될 것을 憂慮한 怪漢들은 計劃을 變更하여 김대중을 8月 13日 밤 10時頃에 서울의 동교동 自宅 近處에 있는 注油所 近方 뒷골목에 풀어주었다. [37] 김대중은 그의 自敍傳에서 "나는 집 門 앞에 이르러 이제 막 退勤해서 돌아오는 家長들처럼 招人鐘을 눌렀다"고 하였다. [38] 巷間에는 중정部長 이후락이 윤필용 事件 으로 잃은 信任을 挽回하기 위해 저지른 無理手 또는 過剩忠誠이라는 主張도 있지만, 김대중은 여러 次例 朴正熙 가 이 事件을 直接 指示한 것이라고 主張했다. [39]

事件 以後 [ 編輯 ]

事件을 調査한 日本 警察은 拉致 現場에 駐日 韓國 大使館의 1等 書記官 김동운 中央情報部 要員의 指紋을 發見했다고 밝혔다. [40] 이에 따라 日本 政府의 諒解 없이 김대중을 拉致해 强制로 韓國으로 押送韓 것은 日本의 主權을 侵害한 것이라는 意見이 擡頭되었다. 1973年 8月 23日 에 열린 參議院 法務委員會에서는 韓國 情報機關의 關與 嫌疑, 主權 侵害 與否, 김대중의 재度日(再渡日), 日本의 搜査 狀況 等을 政府 側에 물었다. 이에 對해 다나카 이사지 法務省 長官 은 "나의 第6感으로 볼 때 이 나라 祕密 警察의 所行이 틀림없다"라고 發言했다. 하지만 오히라 마사요시 外務省 長官 은 事件에 對해 斷定할 수는 없으며, (韓國 政府의)해명 以後 日本의 態度를 決定하겠다고 答辯했다. 이 事件으로 拉致事件에 對해 東亞日報 를 非難한 論調를 올린 요미우리 新聞 은 大韓民國 문교부로부터 1973年 8月 26日 部로 요미우리 新聞 서울支局에 對한 全面 弊國 命令을 받았다.

이어 韓國 政府는 1973年 8月 25日 韓國 大使館의 이상진 政務擔當參事官을 통해 '日本 國會 等의 論議나 新聞의 報道 等에서 韓國 政府의 職員이 事件에 介入되어 있는 듯한 內容을 展開하는 것은 遺憾'이라는 뜻을 傳達했다. 그러자 다나카 法務省 長官은 이러한 態度를 가리켜 "매우 괘씸한 辨明이다"라고 指摘하며, '韓國 政府의 그러한 態度는 우리 國會에 對한 重大한 干涉'이라고 批判했다.

駐日公使 김재권은 駐日 大使館 일等 書記官 身分으로 僞裝하고 있던 김동운에게 工作 計劃의 樹立을 指示했다. 김동운의 計劃案을 接受한 次長補 이철희와 海外工作國葬 하태준은 海外工作團長 윤진원과 함께 計劃을 檢討했다. 김대중을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直接 拉致한 사람들은 이미 여러 資料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海外工作團長 윤진원, 駐日大使館 參事官 윤영로, 일等書記官 홍성채·김동운, 이등서機關 劉永福·유충국 等이며 일等書記官 한춘은 現地偵察任務를 遂行했다. 이들 ‘行動隊員’은 젊은 末端職員들이 아니었다. 當時 職級으로 윤영로와 한춘은 이사관人 2級 甲, 홍성채·김동운·劉永福은 副理事官人 2級 을, 유충국만 書記官인 3級 匣으로 모두 相當히 高位職에 이른 人物들이었다. 그러나 拉致 現場에 수많은 遺留品과 指紋을 남겨놓는 決定的인 失手를 저질렀다. [41]

情報部員들은 元來 양일동이 묵는 2212號의 건너 옆房인 2210號室을 豫約했는데 마침 앞房人 2215號室의 門이 열려 있어 두 房에 나눠서 要員들이 待機했다. 그中 2215號에 偶然히 以北 담배가 있었다는 것이고, 多量의 遺留品을 남기게 된 것은 複道에서 김대중을 배웅 나온 統一黨 김경인 議員과 마주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2210號室에 있던 拉致隊員들이 急하게 김대중을 끌고 내려가면서 2215號室에 있던 監視組가 뒤處理를 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監視組는 2210號室 狀況을 보지 않고 그냥 빠져나왔다. 어쨌든 拉致는 成功했고, 中央情報部員들은 日本 警察의 監視網을 따돌리고 도쿄를 빠져나와 無事히 工作船 용금호가 待機中인 오사카에 到着하여 김대중을 國內로 실어 보냈다.

윤진원은 이 무렵 마음속으로 甚한 葛藤을 겪고 있었다. 自身의 손으로 處理해야 한다면 토막 殺人을 하기에도 充分한 時間이 있었다. 自己 손으로 김대중을 殺害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負擔이었다. 김대중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윤진원度 이후락度 朴正熙도 모두 自己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1976年 말이나 1977年 初에 中央情報部에서 作成한 것으로 보이는 ‘KT事件 關與人士 一覽表’를 보면, 윤진원에 對해서는 事後管理 方案으로 ‘復職 또는 就職 斡旋’이라고 한 反面, 김동운에 對해서는 本人이 補職 變更을 希望하므로 相應한 補職을 附與할 것을 建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김동운은 形式的인 解任 後 바로 復職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동운은 解職 1年 後에 復職되어 8國 副團長에 任命되었으나 두 달 後 日本이 이 事實을 알고 抗議해 원남동에 事務室을 얻어 職責도 없이 副理事官級 待遇를 받으며 8年 동안 勤務하다가 1982年 末 退職했다. [42]

이어 1973年 9月 5日 , 警視廳 은 駐日 韓國 大使館의 김동운 일等書記官을 容疑者로 指目했다. 日本 野黨 側에서는 "韓國 政府의 主權 侵害에 對해 强力히 對應할 것"을 要請했으나 日本 政府 側은 "只今은 眞相 糾明이 첫째로, 現 段階에서는 主權 侵害라고 볼 수 없으며, 只今과 같은 韓國과의 關係를 變更할 생각은 없다"라고 答辯했다.

1973年 9月 17日 韓國 政府는 《김대중 拉致 事件 搜査 資料》를 發表하고, "용금호에 對해 綿密히 調査했으나, 現在까지 김대중 拉致 容疑點을 發見할 수 없었다" 라고 日本 政府에 回答했다. 이어 9月 21日 에는 日本 國會에서 內閣 不信任案이 提出되었으나 否決되었다. 이 不信任案의 提出 理由에는 김대중 拉致 事件이 包含되었다.

1973年 11月 1日 , 韓國 政府는 拉致 事件에 對한 駐日 韓國 大使館 職員의 關與 嫌疑를 認定하고 辭意를 表明하려는 意向을 表明했으며, 김동운 일等書記官을 免職시켰다. 같은 날 朴正熙 大統領도 다나카 가쿠에이 總理에게 拉致 事件에 對해 公式 謝過했다. 다음날 金鍾泌 大韓民國 總理가 日本을 訪問해 다나카 總理와 會談을 가졌다. [43] [44] 이듬해인 1974年 8月 6日 日本 搜査當局은 搜査 報告書를 發表해 김대중 拉致 事件의 犯人 中 한 사람으로 김동운 일等書記官을 指目했다. 이에 韓國 政府는 1974年 8月 14日 에 그의 嫌疑에 對해 證據를 찾을 수 없었다고 日本 當局에 通報했다.

다음날에는 光復節 記念式場에서 日本에서 出生·成長한 在日 韓國人 문세광 이 朴正熙 大統領의 暗殺을 試圖했다. 이로 因해 令夫人 육영수 가 被擊되어 死亡했으며, 詩나 에쓰사부로 自由民主黨 副總裁가 9月 19日 日本 政府의 特使로 狙擊 事件의 進士를 위해 韓國을 訪問, [45] 朴正熙 大統領과 會談을 가졌다.

1974年 10月 25日 에 日本 當局은 韓國 政府의 搜査 結果는 納得할 수 없다며 詳細한 說明을 要求했다. 韓國 政府는 이 要請에 따라 1975年 7月 22日 에 搜査結果에 對해 다시 回答하면서, 事件 後 김동운 일等書記官의 職位 解除 以後 搜査를 進行했지만 바람직한 結果를 얻을 수 없어 1975年 8月 14日 에 搜査를 中斷했으며, 以後 祕密裏에 搜査를 進行했으나 嫌疑를 立證할 證據가 없어 不起訴 處分을 했으며, 以後 도쿄에서 그의 言動이 品位에 어긋난다고 보여 公務員의 地位를 剝奪했다는 要旨를 通報했다.

日本 政府는 이러한 回答에 1975年 7月 23日 미야자와 기이치 外務省 長官이 韓國을 訪問하여 兩國의 定期 會談 開催에 合意하고 다음날 歸國했다. 歸國 卽時 미야자와 外務省 長官은 김대중 拉致 事件의 結末이 지어졌다고 發言했다.

그러나 김형욱 前 中央情報部長이 美國 議會에서 '김대중 拉致 事件은 韓國 中央情報部의 犯行'이라고 發言하면서 事件이 다시 불거졌다. 이어 1977年 7月 1日 에 日本 교토通信과의 會見에서 證言을 두고 信憑性이 의심스럽다고 發言한 후쿠다 다케오 日本 總理를 非難하면서, "韓日 두 政府가 反省하지 않고 繼續해서 나의 名譽와 信賴性에 傷處를 입혀 김대중 拉致 事件의 眞相에 對한 兩國 國民의 눈을 가리려 한다면, 더욱 詳細한 事實을 밝혀 兩國 政府의 罪狀을 告發하겠다"라고 밝혔다.

1987年 拉致事件을 主導한 이후락 前 中央情報部長이 事件의 顚末에 對해 인터뷰를 한 新東亞 10月號의 印刷 作業을 安企部 가 막는 事件이 發生했다. 이후락의 인터뷰가 韓日間 外交問題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理由였다. 新東亞 記者들은 이에 抗議하며 徹夜 籠城을 벌였고 東亞日報 側에서 이 事件을 報道하여 有力 外信들에게도 이 事件이 報道되는 等 波紋이 擴大되었고 結局 安企部 側이 方針을 撤回하면서 一段落되었다. [46]

하지만 1998年 公開된 中央情報部의 김대중 拉致計劃 文件인 一名 KT工作 計劃文書를 보면 殺害 計劃은 없었고, 日本에서 서포터를 받고 維新反對運動을 했던 김대중을 日本에서 拉致 동교동 自宅까지 强制로 끌고 온다는 것이 中央情報部의 元來 計劃으로 알려졌다. [47]

그러나 國精院 過去事件 眞實糾明을 통한 發展委員會에 따르면 拉致工作의 具體的 方案으로 殺害計劃이 推進됐는지에 關해 “初期 工作計劃 樹立 當時 ‘야쿠자’를 動員, 暗殺하는 方案과 拉致 後 外交背囊 篇으로 ‘搬入’하려는 計劃이 論議된 적이 있다는 關聯者들의 陳述에 依據, 工作目標는 殺害였을 可能性도 排除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暗殺計劃이 下達돼 日程段階에까지 進行되다 目擊者 出現 等 狀況變化로 因해 實行이 中止됐거나, 現地 工作館의 判斷에 따라 殺害計劃을 抛棄하고 單純拉致로 變更됐을 可能性도 있다고 說明했다.

게다가 1973年 5月 5日 김대중에게 보내진 匿名의 便紙에 따르면 "最近 正確한 消息에 依하면 先生님을 暗殺하려는 테러 陰謀를 꾸미고 있다"는 內容이 들어있어 正말로 暗殺할 計劃이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48] [49]

2006年 2月, 大韓民國 外交通商部 1947年 부터 1974年 사이의 非公開 外交文書를 公開하였다. 이로 인해 當時 拉致 事件과 關聯된 많은 內容이 世上에 알려지게 되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前後日本外交史》, 이리에 미치마社, 1983年
  • 《김대중 拉致事件 眞實糾明》, 國家情報院 過去事件 眞實糾明을 통한 發展委員會, 2007年. ( 이곳 이곳 에서 文書 內容을 確認할 수 있습니다.)

各州 [ 編輯 ]

  1. 전국역사교사모임 <살아있는 韓國史 敎科書 2> 휴머니스트 2003.4.28 p213
  2. [네이버 知識百科] 5·16 軍士 政變과 第3共和國 (살아있는 韓國 近現代史 敎科書, 2011. 8. 8., 김육훈)... 쿠데타의 主役은 最高 會議 議長을 맡게 된 朴正熙 陸軍少將 과, 中央情報部 를 創設하여 莫强한 權力을 行使하게 될 金鍾泌 陸軍中領 이었다....(중략)... 救護·學術·宗敎 團體를 除外한 모든 政黨과 社會 團體를 解散시켰으며, 國會를 解散하고 一切의 政治 活動을 禁止시켰다. 1,170種의 新聞과 雜誌도 强制로 폐간시켰다.
  3. 전국역사교사모임 <살아있는 韓國史 敎科書 2> 휴머니스트 2003.4.28 p212
  4. [네이버 知識百科] 5·16 軍士 政變과 第3共和國 (살아있는 韓國 近現代史 敎科書, 2011. 8. 8., 김육훈)... 朴正熙도 大統領에 出馬하지 않겠다고 여러 次例 約束하였다....(중략)... 軍服을 벗은 朴正熙가 大統領 候補로 出馬하였고, 많은 軍人들이 軍服을 벗고 國會 議員 候補로 나섰다. 共和黨이 오랜 準備를 거쳐 選擧를 맞은 것과 달리, 2年 가까이 主要 指導者의 政治 活動을 금지당해 온 다른 政黨들은 選擧 運動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5. [네이버 知識百科] 三選改憲 [三選改憲] (韓國民族文化大百科, 韓國學中央硏究院)... 新民黨 中心의 改憲 反對 鬪爭과 때를 같이하여 6月 12日부터는 서울大學校·高麗大學校·延世大學校·京畿大學·경북대學校 等 全國 20餘 個 學院街에서 改憲 反對 示威가 連日 일어나 警察과의 對峙騷動이 벌어졌다.
  6. 김충식 <南山의 部長들 1> 東亞日報社 1992.12.19 p141~145... 1968年 5月 24日, 共和黨은 김종필系로 分類되는 金鎔泰, 최영두, 송상남 等 福祉會 會員들을 害黨行爲者로 規定하여 除名하였다. 이 일로 因해 김종필은 5月 30日에 政界에서 隱退하였다. 國民福祉會는 송상남이 主導하여 1968年 3月에 만든 團體였다. 除名處分을 받은 理由는 이들이 3選改憲을 反對하며 1971年 大選에 김종필을 공화당 候補로 推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상남, 金鎔泰等 會員들은 '農村 近代化運動'을 위한 組織이었다고 抗辯했다. 勿論 이들의 主張은 全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울러 中央情報部의 調査過程에서 發見된 '時局判斷서'는 송상남이 個人的으로 作成한 것이라고 主張하였으나, 이 文件이 除名處理에 主要根據가 되고 말았다. 한便 중정의 調査過程에서 現役 與黨 議員들 多數가 拷問을 받는 苦役을 치루었다.
  7. “[네이버 知識百科] 國民福祉會事件 [國民福祉會事件] (韓國近現代史事前, 2005. 9. 10., 韓國史辭典編纂回)” .  
  8. 김삼웅 <한 卷으로 보는 解放後 政治史 100場面> 嘉藍企劃 1994 p185
  9. 金大中 <나의 삶 나의 길> 傘下 2009.8.25 p143
  10. 김삼웅 <한 卷으로 보는 解放後 政治史 100場面> 嘉藍企劃 1994 p193
  11. 김삼웅 <한 卷으로 보는 解放後 政治史 100場面> 嘉藍企劃 1994 p192
  12. 김형욱外 <김형욱 回顧錄 3> 아침 1985.10.15 p75~78
  13. 朝鮮日報 4月 29日子 發表
  14. 金大中 <나의 삶 나의 길> 傘下 2009.8.25 p155
  15. 김형욱外 <김형욱 回顧錄 3> 아침 1985.10.15 p84
  16. 金大中 <김대중 自敍傳 1> 삼인 2010 p226, p231
  17. 爆發物事件 金候補「15歲조카」拘束 Archived 2019年 7月 1日 - 웨이백 머신 東亞日報 1971.02.11
  18. 金大中候補宅 爆發物事件 金弘準軍 釋放決定 Archived 2019年 7月 1日 - 웨이백 머신 東亞日報 1971.02.13
  19. 金大中 <나의 삶 나의 길> 傘下 2009.8.25 p164....본 自敍傳에는 5月 25日에 事故가 發生했다고 記錄했으나 5月 25日은 總選投票日이므로 事故는 그 以前에 發生했다. 동아일보 5月 25日子 3面 報道內容에 따르면 事故는 5月 24日 發生했다. 또한 김대중은 政府가 報道統制를 통해 事故消息이 報道되지 못하게 막았다고 主張하고 있다.
  20. 東亞日報 1971年 5月 25日 3面 報道
  21. 金大中 <나의 삶 나의 길> 傘下 2009.8.25 p166
  22. 이영신 <김대중 拉致事件 이것이 眞相이다> 錦山企劃 1998.9.23 p4
  23. 金大中 <나의 삶 나의 길> 傘下 2009.8.25 p168
  24. 金大中 <나의 삶 나의 길> 傘下 2009.8.25 p171
  25. 康俊晩 《韓國 現代史 散策 1970年代篇 2》 人物과 思想史 2009.6.12 p79
  26. 김충식 <南山의 部長들 1> 東亞日報社 1992.12.19 p342, p351
  27. 朴正熙 政府, 維新宣布 前 北에 通報 한겨레 2009.09.24
  28. 이영신 <김대중 拉致事件 이것이 眞相이다> 錦山企劃 1998.9.23 p45... 워싱턴發 JAL氣는 7月 10日 午後 6時 日本 도쿄 하네다 空港에 到着했다.
  29. 金大中 <나의 삶 나의 길> 傘下 2009.8.25 p180
  30. 이영신 <김대중 拉致事件 이것이 眞相이다> 錦山企劃 1998.9.23 p215
  31. 金大中 <나의 삶 나의 길> 傘下 2009.8.25 p181
  32. 이영신 <김대중 拉致事件 이것이 眞相이다> 錦山企劃 1998.9.23 p220
  33. 김창훈 <韓國 外交, 어제와 오늘> 다락원 2002.7.13 p117
  34. 金大中 <나의 삶 나의 길> 傘下 2009.8.25 p183
  35. 이영신 <김대중 拉致事件 이것이 眞相이다> 錦山企劃 1998.9.23 p267... 1944年에 乾燥된 배로 美軍 貨物船으로 使用되었다가 大韓民國 海軍이 買入했다. 1972年에 中央情報部에서 引受했으며, 韓進海運에 登錄하고 對共 工作用으로 使用했다. 무게는 536톤으로 길이 52미터, 最大 航海 速度 35노트였다. 500馬力짜리 디젤 엔진이 두 個 裝着되어 있었으며 乘務員은 總 21名이었다.
  36. 金大中 <나의 삶 나의 길> 傘下 2009.8.25 p190
  37. 金大中 <나의 삶 나의 길> 傘下 2009.8.25 p197
  38. 金大中 <나의 삶 나의 길> 傘下 2009.8.25 p198
  39. 康俊晩 《韓國 現代史 散策 1970年代篇 2》 人物과 思想史 2009.6.12 p81
  40. 金大中 <나의 삶 나의 길> 傘下 2009.8.25 p203
  41. 한홍구. 《維新: 오직 한 사람을 위한 時代 , 混沌 속의 實行 準備》.  
  42. 한겨레. “윤진원度 이후락度 朴正熙도 自己 손엔 피를…”.  
  43. 박상건 <金大中 살리기> 울림社 1995.6.19 p59
  44. 康俊晩 《韓國 現代史 散策 1970年代篇 2》 人物과 思想史 2009.6.12 p80
  45. 康俊晩 《韓國 現代史 散策 1970年代篇 2》 人物과 思想史 2009.6.12 p145
  46. [동아일보를 통해 본 大韓民國 近現代史]<14> 1987年 民主化 물꼬 트다 東亞日報 2010.10.11
  47. “安企部`KT工作` 文件 言論社 入手” . 2020年 12月 3日에 確認함 .  
  48. “[單獨] 'DJ 拉致' 錄取 入手…"暗殺 陰謀 있다" 事前 警告” . 2020年 12月 3日에 確認함 .  
  49. https://www.korea.kr/special/policyFocusView.do?newsId=148639694&pkgId=49500053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