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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罪... 無罪... 無罪..."<br>이들의 抑鬱한 犧牲은 어찌하나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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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이민정·손병관 記者
- 寫眞 : 남소연 記者
- 動映像: 김윤상 記者


▲ 인혁당 事件에 連累된 이들에 對해 서울中央地法이 23日 午前 無罪를 宣告하자 法廷을 빠져나온 遺家族들이 痛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判決을 뒤집을 수 있으면 손에 醬을 支持겠다고 했던 사람들, 다 나와보세요."

23日 午前 서울 서초동 서울中央地法 311號 法廷 앞 複道는 눈물바다였다. 判決 途中 내내 손手巾으로 눈물을 훔치던 이영교(高 하재완氏 否認)氏는 複道로 나와 32年間 겪은 苦痛을 쏟아냈다.

法院(刑事合意23部·裁判長 문용선 部長判事)李 '인민혁명당再建團體 事件'(以下 인혁당 事件) 連累者 8名에 對해 無罪를 宣告했지만 亡者는 돌아오지 않았다. 遺家族들은 30年이 훌쩍 지나서야 嫌疑를 벗게 된 恨을 吐露했다.

"뒤늦게 歷史 바로잡았지만 抑鬱한 犧牲은 어떻게 하나"

▲ 인혁당 事件에 連累된 이들에 對해 서울中央地法이 23日 午前 無罪를 宣告하자 고 하재완의 夫人 이영교氏(가운데)가 痛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 이날 法院을 찾은 鄭東泳 열린우리당 前 議長이 인혁당 事件에 連累된 고 하재완氏의 夫人 이영교氏의 손을 잡고 앉을 곳을 案內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날 再審 公判에는 인혁당 事件으로 死刑된 서도원·도예종·우흥선·羸瘦病·송상진·하재완·김용원(以下 인혁당 事件)氏와 여정남(民靑學聯 事件)氏의 婦人과 조카 等 遺族들이 被告人으로 代理 出席했다.

또한 法廷에는 이 事件의 證人으로 出席했던 유인태 열린우리당 議員과 이철 韓國鐵道公社 社長이 參席했다. 鄭東泳 열린우리당 前 議長, 장영달 열린우리당 議員 等도 눈에 띄었다. 傍聽席 120席이 꽉 들어찼다.

裁判部가 死刑된 이들의 이름을 列擧하며 "無罪"를 외치자 遺家族들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傍聽席 곳곳에서 安堵의 한숨 소리도 새어나왔다.

이철 社長은 判決 以後 複道로 나와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났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刑場의 이슬로 사라진 분들은 永遠히 되돌릴 수 없는 犧牲이 됐지만, 뒤늦게나마 歷史를 바로잡을 수 있어서 多幸"이라며 "抑鬱한 犧牲을 어떻게 해야할지 답답하고 아득할 뿐"이라고 말했다. 李 社長은 民靑學聯 事件에 資金을 支援한 嫌疑로 김지하氏, 유인태 議員 等과 死刑을 宣告받았다가 無期懲役으로 減刑, 1975年 刑 執行停止로 풀려났다.

'인혁당事件眞相糾明 및 名譽回復을 위한 對策委員會'를 이끌고 있는 문정현 神父는 "그동안 家族들이 겪은 苦痛을 생각하면 오늘 判決이 무슨 意味가 있는 것이냐"며 "그동안 遺族들의 苦痛을 外面하고 事件에 對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言論이 원망스러울 뿐"이라고 말했다.

32年만에 亡者에 고개 숙인 司法府

裁判部는 이날 被告人 8人의 大統領 緊急措置 違反, 國家保安法 違反, 內亂 陰謀, 反共法 違反 嫌疑에 對해 無罪를 宣告했다. 遺族들은 지난 2002年 서울地方法院에 再審을 申請했고, 法院은 2005年 12月 再審을 決定했다.

裁判部는 各 被告人들이 인혁당 再建을 위한 反國家團體를 構成했다는 嫌疑를 비롯해 여정남氏의 民靑學聯 背後操縱 嫌疑와 송상진·하도원氏가 北韓放送을 聽取해 反共法을 違反한 嫌疑에 對해 無罪를 各各 宣告했다.

또한 反國家團體 構成 嫌疑와 關聯해 "搜査機關의 被疑者 新聞調書와 陳述書는 當時 被疑者들이 調査를 받을 때 自由로운 狀態에서 作成했다고 볼 수 없다"면서 證據能力이 없다고 判斷, 證據로 採擇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番 事件과 같이 陳述者가 死亡한 境遇, 陳述書는 刑事訴訟法上 '特신狀態'(特別히 信憑할 수 있는 狀態)에서 作成됐다는 點이 認定돼야만 證據 能力을 갖는다.

裁判部는 民靑學聯을 背後操縱해 政府 顚覆을 試圖하고 共産主義 政權을 樹立하려 試圖한 嫌疑에 對해서도 檢察 主張을 認定할 證據가 없다며 無罪를 宣告했다. 緊急措置 違反 嫌疑는 "維新政權 以後 緊急措置가 效力을 잃었기 때문에 兄이 廢止된 狀態"라며 有·無罪 判決 代身 訴訟을 終結하는 面所 判決을 내렸다.

다만 여정남氏의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 中 '反獨裁 救國宣言' 嫌疑 部分은 다른 裁判에 倂合돼 有罪가 確定됐고 再審 事由에 該當하지 않기 때문에 旣存의 事實을 그대로 認定해 懲役 10月에 執行猶豫 2年을 宣告했다.

裁判部는 이날 判決로 獨裁政權 當時 民主化運動을 하다가 死刑 宣告를 받고 大法院 上告 棄却 18時間만에 死刑된 8名에 對한 名譽를 회복시켰다. 同時에 '司法殺人', '司法史上 暗黑의 날'이라고 非難받았던 過去 잘못을 認定했다.

▲ 인혁당 事件에 連累된 이들에 對해 서울中央地法이 23日 午前 無罪를 宣告하자 法廷을 빠져나온 遺家族들은 痛恨의 눈물을 흘렸다. 이 事件을 擔當했던 김형태 辯護士가 法院 複道에서 取材陣의 質問에 答辯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인혁당 사건="" 주요="" 일지="">

▲1963. 6. 3 '屈辱的 韓日會談' 批判 示威 擴散되자 非常戒嚴令 宣布
▲1964. 8.14 中央情報部 第1次 인민혁명당 事件 發表
"關聯者 57名 中 41名 拘束, 16名 手配"
▲1965. 1.20 1審 判決, 被疑者 2名만 2, 3年 懲役刑, 나머지 11名은 無罪
▲1965. 6.29 2審 判決, 6名 懲役 1年, 그 外 懲役 1年, 執行猶豫 3年
▲1965. 9.21 大法院 抗訴審 判決 그대로 認定
▲1972.10.17 維新 宣布
▲1973.10. 2 서울대에서 國內 最初 維新反對 示威 觸發, 全國大學 擴散
▲1973.12. 장준하.백기완 先生 中心, 國民改憲請願運動 進行
▲1974. 4. 3 朴正熙 大統領 特別談話 "民靑學聯 團體, 不純勢力 背後操縱으로 人民革命 遂行하려 하고 있다"
▲1974. 4. 緊急措置 4號 發表, 民靑學聯 犯罪團體로 規定
中央情報部, 民靑學聯 背後로 제2차 인혁당(인혁당 再建위) 指目
▲1975. 4. 8 大法院 인혁당再建위 判決, 8名 死刑.15名 懲役 15年∼無期懲役
▲1975. 4. 9 死刑執行
▲2002. 9.12 疑問詞眞相糾明위 "인혁당 事件은 中央情報部 造作事件"
▲2002.12.10 인혁당事件 再審 請求
▲2003.11.24 再審請求 첫 特別心理
▲2005.12. 7 國精院 眞實委 事件調査 結果 發表
▲2005.12.27 法院, 인혁당 再審 決定
▲2006. 3.20 再審 첫 公判
▲2006. 9.11 이철·유인태氏 證人 出席
▲2006. 9.18 김지하氏 證人 出席
▲2006.11. 2 遺族 國家 相對 340億원 訴訟
▲2006.12.18 檢察, 異例的으로 求刑 없는 논고
▲2007. 1.23 無罪 宣告

taejong75@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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