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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略과 策略의 狂휘였으되 苟且하고 초라하도다|신동아

歷史 探究

智略과 策略의 狂휘였으되 苟且하고 초라하도다

1896年 丙申年 俄館播遷

  • 송우혜 | 小說家 swhoo@daum.net

    入力 2016-02-25 10: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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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0年 前 丙申年, 너무도 怪異한 事件이 일어났다. 難民收容所같이 어지럽던 朝鮮王朝 末期, 마른 하늘에 벼락이 쳤다. 오늘 우리 社會는 어떠한가. 强大國들에 휘둘리며 戰戰兢兢하는 모습은 120年 前이나 只今이나 똑같지 않은가.
    1896年 丙申年(丙申年) 2月 11日. 只今으로부터 120年 前 陰曆 섣달 그믐 前날 새벽. 설맞이 準備로 들떠 있던 朝鮮 天地를 뒤집어엎는 엄청난 事件이 터졌다. 朝鮮의 大君主(大君主, 高宗)와 王太子(王太子, 뒷날의 純宗)가 宮女가 타는 가마 안에 들어앉아서 몰래 景福宮을 脫出, 牙關(俄館)으로 들어간 것이다. ‘牙關’은 俄羅斯(러시아) 公使館, ‘播遷’은 임금이 自身의 宮闕을 떠나 다른 곳으로 避身함을 가리키기에, 歷史는 이 事件을 ‘俄館播遷(俄館播遷)’이라 한다.
    北岳山 기슭 景福宮에서 西小門 近處 俄館까지는 不過 2400餘m. 그러나 그날 새벽에 朝鮮의 大君主와 王太子가 가마를 타고 몰래 지나간 뒤 그 ‘2400m’가 지닌 意味는 巨大한 다이너마이트처럼 强力하게 爆發했다. 當時 怏宿이던 日本과 러시아가 朝鮮에서 갖고 있던 位相과 比重을 一擧에 完全히 뒤바꾸는 桑田碧海의 激動을 일으킨 것이다.



    明成皇后 弑害 後暴風

    俄館播遷의 根本 原因은 高宗의 整備(正妃) 中前 閔氏(明成皇后)가 日本人들에게 弑害당한 世稱 ‘乙未事變’(1895年 10月 8日)에 있다. 朝鮮을 삼키려는 日本의 野望을 꺾기 위해 中前 閔氏가 러시아와 손잡고 日本 勢力을 牽制하려는 움직임을 드러내자 日本은 明成皇后를 弑害함으로써 이를 막았다. 이 事件 以後 日本 勢力과 親日派들은 高宗을 景福宮에 軟禁하고 그의 움직임을 徹底하게 監視했다. 한 나라의 國母를 그처럼 悽慘하게 殺害한 뒤 그로 인해 일어날 反作用과 後暴風을 막기 위해 極度의 警戒措置에 나선 것이다.
    日本의 殘酷한 威勢와 强力한 統制에 억눌린 高宗은 極甚한 心身의 苦痛에 시달렸다. 日本人들이 自身을 廢位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軟禁된 景福宮 안에서 自身도 명성황후처럼 被殺될 수 있다는 生命의 威脅까지 體感하고 있었다. 名色이 一國의 統治者였지만 實際로는 日本 勢力에 完全히 掌握당한 불쌍한 捕虜에 不過했다.
    高宗은 그런 狀況에서 벗어나기를 懇切하게 願했다. 이런 事情은 周邊 사람들은 勿論 國外 人士들에게도 觀察됐다. 그래서 日本 新聞에 ‘朝鮮의 君主가 自身의 宮闕을 脫出해 러시아公使館이나 美國公使館으로 가려고 한다’는 記事가 실릴 程度였다. 그런 판局이니 高宗을 監視하는 者들의 警戒心은 極度로 高調됐고, 그 때문에 高宗의 景福宮 脫出은 그만큼 더 어려워진 狀況이었다.
    그런 惡條件에도 軟禁 狀態의 무거운 壓迫을 견디지 못한 高宗은 마침내 擧事에 着手했다. 世上 사람들이 이미 豫測하던 대로였다. 高宗은 日本 側의 날카로운 監視網을 힘겹게 뚫고 믿을 만한 極少數 臣下들에게 密造(密詔, 祕密調書)를 내려 “나를 救出하라!”고 命했다. 그는 前·現職 高位 官僚들 中 親러派와 親美派에 屬하는 人士들이 自身을 救해주기를 希望했다.
    密詔를 받은 臣下들은 忠誠을 다짐하며 最善을 다해 일을 벌였다. 乙未事變 50日 만인 1895年 11月 28日, 그들은 어렵게 兵力을 動員해 景福宮의 東쪽 夾門人 춘生門 앞까지 가는 데 成功했다. 擧事에 動員된 軍士들은 銃砲를 쏘아대며 宮 안으로 進入하려 했다. 그러나 動員軍 指揮部의 한 人物이 巨事가 失敗할 境遇에 對備해 事前에 密告하는 바람에 宮闕 안에서는 軍士를 大擧 動員해 단단히 對備하고 있다가 應戰했고 結局 巨事는 水泡로 돌아갔다. 擧事에 參與한 者들은 붙잡혔고 以內 裁判이 始作됐는데, 賃金은 “나는 全혀 모르는 일이다”라며 시치미를 떼고 빠져나갔다.



    嚴 尙宮의 擧事

    宮闕을 向해서 銃을 쏘았기에 이 事件은 ‘逆謀’로 規定됐고, 主動者인 前 始終 임최수와 이도철 參領이 死刑을 宣告받고 곧 處刑됐다. 處刑을 謀免한 나머지 關聯 人士들, 卽 王族인 이재순을 비롯해 이범진, 이완용, 이윤용, 윤웅렬, 윤치호, 이하영, 이채연 等 親러派와 親美派에 屬하는 名門 巨族의 有名 人士들은 流配刑과 笞刑 等으로 處罰되거나 外國으로 亡命했고, 더러는 서울에 있는 外國 公館이나 시골로 달아나 숨었다. 이 일은 歷史에 ‘춘생문 事件’이라 記錄돼 있다.
    高宗으로서는 가뜩이나 견디기 힘들던 景福宮 軟禁 狀態가 춘생문 事件 失敗 後 더 고통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비록 自身과 無關한 일이라고 뻗대면서 빠져나가긴 했지만, 춘생문 事件이 高宗의 密造로 始作됐음은 누구나 아는 眞實이었다. 軍士를 이끌고 춘生門에 이른 指揮部가 賃金의 密詔를 꺼내 휘두르면서 “여기, 임금님이 내리신 密造가 있다!”고 고함치면서 宮闕 進入을 督勵했기 때문이다. 監視의 强度가 더욱 높아지면서 以後 兵力 動員을 通한 巨事는 不可能해졌다.
    그런데 賃金이 到底히 넘을 수 없는 巨大한 壁 속에 갇힌 듯한 當時 狀況을 解決하고 景福宮을 無事히 脫出하게 할 方道가 있다고 나선 이가 있었다. 大戰(大殿, 임금의 處所)에 所屬된 宮女 嚴 尙宮이었다. 嚴 尙宮은 ‘두 채의 가마 作戰’이라는 腹案을 내놓았다. 워낙 奇拔한 생각이라 처음 들었을 때는 荒唐하다 못해 奇怪하기까지 했다. 그의 計劃은 이러했다.
    嚴 尙宮과 그의 心腹 宮女인 內인 朴氏가 가마에 들어앉아 宮闕을 드나드는 일을 每日 자주 反復함으로써 두 채의 가마가 나란히 宮門을 드나드는 것이 사람들 눈에 익숙해지도록 만든다. 그들이 두 채의 가마를 타고 宮



    밖에 나가는 것은 ‘西小門에 있는 嚴 尙宮의 親庭집으로 들어오는 賂物을 챙기기 위해서’라는 所聞을 내고 다닌다. 現在 高宗의 信任과 寵愛를 한 몸에 받고 있는 處地라 充分히 먹혀들 것이다. 宮門을 드나들 때마다 守門兵들에게 厚한 行下(行下, 아랫사람에게 내려주는 金品)를 내린다. 그래서 두 사람이 宮門을 出入할 때마다 큰돈을 받는 軍士들이 굳이 가마門을 열고 안에 있는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身元을 確認하는 일이 漸次 未安해지도록 한다. 그리 되면 얼마 안 가서 守門兵들이 가마를 열어보지 않고 宮門을 통과시킬 것이다. 그때가 되면 擧事한다.
    擧事 計劃은 이러하다. 가마 한 채에는 賃金이 안쪽에 들어앉고 門 앞엔 嚴 尙宮이 앉는다. 다른 한 채에는 東宮이 안쪽에 들어앉고 門 앞에 내인 朴氏가 앉는다. 出宮할 宮門은 景福宮의 同門인 建春門으로 한다. 擧沙할 때는 平素 嚴 尙宮과 朴氏가 宮門을 出入할 때처럼 警護 人力이 全혀 없다. 가마 두 채가 無事히 建春門을 나서면 平素처럼 西小門의 嚴 尙宮 親庭집에 가는 듯 여유롭게 걸어서 周邊의 境界를 避하며 俄館으로 간다.


    權力 指導를 바꾸다

    임금과 그의 後繼者인 東宮을 함께 景福宮에서 탈출시키는 데는 重大한 理由가 있었다. 그 두 사람이 分離되면 나라도, 權力도 分離될 것이다. 親日, 親러, 親美 等等 저마다 背景이 다른 勢力에 등을 대고 있는 臣下들이 두 사람 中 하나를 確保한 뒤 서로 自身들의 ‘砲로’를 名目上의 統治者로 내세워 權力 다툼을 加重시킬 것이었다.
    嚴 尙宮의 計劃은 그 點까지 念頭에 둔 것이다. 高宗은 嚴 尙宮의 計劃에 따르기로 決定했다. 成事 可能性이 크다고 確信해서는 아니었다. 다른 길이 全혀 없었기에 그런 荒唐한 試圖를 통해서라도 日本의 極甚한 抑壓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嚴 尙宮은 춘생문 事件의 餘波로 여기저기로 숨은 親러派 및 親美派 人士들과 祕密裏에 連絡해 自身이 임금과 東宮을 모시고 러시아 公使館에 到着한 뒤의 일을 맡아 處理하도록 周旋해놓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絶體絶命의 處地에 있는 한 나라의 임금과 東宮을 그처럼 危險하고 奇怪한 冒險을 하도록 몰아넣은 嚴 尙宮의 巨事는 結局 成功했다. 모든 것이 嚴 尙宮의 計劃대로 됐다. 常識과 法度를 뛰어넘는 高度의 心理造作 技法이 活用된 놀라운 事例다.
    本來 宮闕 안에서는 王族과 三公(三公, 領議政·左議政·右議政) 外에는 가마를 탈 수 없었다. 그럼에도 嚴 尙宮은 ‘두 채의 가마 作戰’을 企劃했고, 實際 擧事에 들어가자 가마꾼들이 平素와 달리 한 가마에 두 사람을 태우고도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嚴 尙宮의 事前 工作에 길든 建春門 守門兵들은 가마 門을 열어보지도 않고 通過時

    켰으며, 單 한 名의 警護引渡 없이 홀홀히 建春門을 빠져나간 두 채의 가마가 光化門 앞 큰길을 悠悠히 질러가도  누구 하나 疑心을 품지 않았다.
    임금과 東宮이 탄 두 채의 가마가 러시아公使館 正門 안에 들어간 때는 1896年 2月 11日 午前 7時 20分. 그 瞬間부터 朝鮮 天地의 權力 指導가 完全히 뒤바뀌었다. 日本人들이 판을 치던 世上에서 러시아人들이 판을 치는 世上으로.
    嚴 尙宮은 여러모로 特出한 人物이다. 그女는 哲宗 5年 甲寅年(1854)에 태어나 萬 5歲에 ‘아기 內인’으로 入宮해 宮女가 됐다. 어릴 때부터 宮 안에서 자라 宮闕살이의 全貌를 꿰고 있는 데다 頭腦와 體力이 非常했다. 그래서 成人이 된 뒤 明成皇后가 부리는 至密尙宮이 됐다. 至密尙宮은 統治者의 最側近이기에 宮 안에서 대단한 權力者로 꼽힌다. 嚴 尙宮이 지닌 單 하나의 欠은 얼굴이 너무도 못생겼다는 것. 그런데도 都大體 무슨 造化인지, 그女는 滿 32歲라는 늦은 나이에 高宗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僧은(承恩)’을 입었다.  



    歷史의 거울 속 俄館播遷

    獨占慾이 剛한 中前 明成皇后는 自身을 直接 모시는 宮女인 嚴 尙宮이 承恩을 입은 事實을 알게 되자 卽時 刑틀을 차려놓고 때려 죽이려 들었다. 그러나 嚴 尙宮 側에도 사람이 있어 이를 卽刻 高宗에게 알렸고, 急히 現場에 온 그가 極力 挽留해 闕 밖으로 내치는 線에서 마무리했다.
    嚴 尙宮이 다시 高宗을 본 것은 그로부터 10年 뒤, 乙未事變으로 明成皇后가 日本人들에게 弑害당한 뒤였다. 中殿 弑害 뒤 日本人과 親日派들은 大闕에서 勤務하는 者들을 自己 사람으로 바꿔놓았다. 따라서 周圍 사람들을 全혀 믿지 못한 高宗은 中前 弑害 5日 만에 嚴 尙宮을 宮으로 불러들이게 命하고 大田 所屬 至密尙宮으로 任命해 最側近에 뒀다.
    高宗이 아무도 믿을 수 없는 極度의 恐怖 속에서 嚴 尙宮을 생각해낸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10年 前 承恩할 무렵 嚴 尙宮이 高宗에게 自身의 忠誠心과 明敏함, 有用함을 確固하게 刻印시켰다는 意味다. 嚴 尙宮에 對한 高宗의 眼目은 正確했다. 嚴 尙宮은 再入宮 4個月 만에 俄館播遷이라는 初有의 大事件을 企劃하고 성사시켰다.
    俄館播遷으로 日本 勢力圈에서 벗어난 高宗은 1年 만에 慶運宮(德壽宮)으로 還宮한 뒤 大韓帝國 樹立을 宣布했고, 嚴 尙宮은 萬 43歲의 늦은 나이에 러시아公使館에서 妊娠한 高宗의 아기를 大韓帝國 樹立 後에 慶運宮에서 낳았다. 그 아기가 英親王 이은으로, 뒤에 大韓帝國 皇太子가 됐다. 皇族 아기를 낳은 嚴 尙宮은 ‘黃貴妃 嚴氏(略稱 嚴 貴妃)’라는 높은 地位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제 嚴 尙宮과 俄館播遷 成功이라는 그女의 業績을 歷史라는 이름의 거울에 비춰보자. 그女가 지닌 뛰어난 智略과 策略의 光輝(光輝)가 초라하게 오그라들어 금세 빛이 죽는 것이 보인다. 그렇다. 그女의 智略과 策略은 胎生부터 苟且하고 서글픈 限界를 지닌 것으로서, 오로지 敗北者의 補身(保身)에나 有用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 社會는 어떠한가. 周邊 强大國들의 勢力 다툼에 휘둘리며 戰戰兢兢하는 모습은 120年 前이나 只今이나 똑같다. 그래서 俄館播遷의 記憶과 恥辱이 더욱 아프다. 陰濕한 사잇길에 該當하는 怪異하고 奇妙한 術策을 통해서 이루어진 俄館播遷, 果然 그런 汚辱의 歷史는 이제 우리에게서 아주 멀어졌는가. 우리가 放心할 때, 다시 難民收容所와 같은 苦痛의 歷史에 갇혀서 몸부림치는 挫折을 反復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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