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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金宗直과 士林派 기틀 세우다|신동아

朝鮮의 아버지들

아들 金宗直과 士林派 기틀 세우다

日常을 經典 가르침대로…김숙자

  • 백승종 | 韓國技術敎育大 待遇敎授 chonmyongdo@naver.com

    入力 2016-02-22 14:5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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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世紀 性理學者 金叔滋는 學問이 뛰어났지만 벼슬길이 오래 막혀 人生의 辛酸(辛酸)을 맛봤다. 靑年 時節의 ‘不法 離婚’ 前歷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挫折하지 않고 學問의 硏磨와 實踐에 힘썼고, 맡은 벼슬이면 무슨 자리든 最善을 다했다. 苦難 속에서도 뚜렷한 所信을 가지고 奮鬪한 아버지였다.
    우리 家族이 사는 아파트는 堅固하다. 그러나 名色이 家長인 나의 立地는 不安하다. 우리 時代 아버지 中 相當數는 나와 處地가 비슷할 것이다. 왜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時代는 다르지만 아버지의 役割이야 크게 다를 理 없다. 家族을 扶養하고, 自身과 집안의 名譽를 지키며, 世上 일에 參與하는 것, 여기에 큰 差異가 있을 理 없다.
    이런 생각을 하다 김숙자(金叔滋·1389~1456)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그는 15世紀 性理學者다. 高麗 末의 代學者 吉再(吉再·1353~1419)의 學統을 이었다는 讚辭를 받을 程度로 學問이 뛰어났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혀 人生의 辛酸(辛酸)을 맛봤다. 自然을 벗 삼아 지낼 수밖에 없는 處地라 그의 號는 江湖散人(江湖散人)李 되고 말았다.
    靑年 時節 金叔滋는 ‘不法 離婚’을 했다. 이 때문에 氣를 펴지 못했다. 하지만 挫折하지 않고 學問을 硏磨하고 實踐하는 데 힘썼다. 또한 맡은 벼슬이면 무슨 자리든 最善을 다했다. 苦難 속에서도 뚜렷한 所信을 가지고 奮鬪한 아버지였다. 最側近에서 이를 지켜본 아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아버지를 깊이 尊敬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一平生을 글로 적어 後世의 敎訓으로 남겼다(김종직, ‘선공기年(先公紀年)’, ‘이存錄(?尊錄)’ 上).
    朝鮮時代 最高의 性理學者 李滉(李滉·1501~1570)에게 中國 使臣이 물었다. “朝鮮 性理學의 系統은 어떠합니까?” 李滉의 對答은 이러했다. “鄭夢周는 吉再에게 傳하고, 吉再는 김숙자에게 傳하고, 金叔滋는 그의 아들 金宗直에게 傳하고, 金宗直은 金宏弼에게, 金宏弼은 趙光祖에게 傳하였습니다.” 後世 學者들의 見解도 다르지 않았다.



    人生의 굴레가 된 ‘離婚’

    李滉이 列擧한 6名의 宣諭(先儒) 가운데 金叔滋와 金宗直은 父子之間이다. 얼마나 學問에 힘썼으면 富者가 都統(道統, 道學의 系統)을 주고받게 됐을까. 그들 집안엔 뜻밖의 事情이 있었다. 아버지의 不遇함이 되레 그들의 學問을 채찍질했다. 벼랑 끝에서 起死回生한 그들의 이야기는 뜻을 잃고 挫折하는 오늘날의 아버지들에게 勇氣를 줄 것이다.
    金叔滋는 經學(經學)과 文章에 뛰어났고, 周圍의 期待를 저버리지 않았다. 26歲 되던 1414年(太宗 14年) 生員試에 合格했고, 5年 뒤인 1419年(世宗 1年)엔 式年文科에 及第했다. 朝政에선 靑年 金叔滋를 ‘史觀(史官)’에 임명하기로 했다. 크게 出世할 兆朕이었다.
    그때 갑자기 金叔滋를 태운 ‘벼슬의 倍’가 風浪을 만나 坐礁했다. “金叔滋는 自己 子息을 妄靈되게도 庶孼이라 일컫고, 糟糠之妻를 理由도 없이 내버렸습니다. 刑法에 따라 그에게 棍杖 80臺를 치고, 이미 버린 아내를 데려다가 다시 家庭을 이루게 해야 합니다.”(‘세종실록’, 世宗 5年(1423) 7月 4日子) 司憲府로부터 이런 非難이 쏟아졌다. 世宗은 司憲府의 말을 따랐다.
    아들 金宗直이 傳한 말은 조금 달랐다. 언젠가 金叔滋의 할아버지 김은유(金恩宥)에게 한 고을에 사는 韓辯(韓變)李 찾아왔다. 韓氏는 自身에게 過年한 딸이 있는데, 結婚을 서두르지 않으면 곧 中國에 貢女(貢女)로 붙잡혀갈 것이라고 했다. 딱한 事情을 들은 김은유는 孫子 金叔滋와 한邊의 딸을 結婚시켰다. 그런데 김은유가 世上을 뜬 後 重大한 問題가 드러났다. 한邊이 身分上의 瑕疵를 속였던 것이다. 金叔滋의 父親 김관(金琯)은 집안의 將來를 망칠 수 없다고 判斷해 離婚을 命令했다.
    그러나 한邊의 呼訴는 달랐다. 사위 金叔滋가 過去에 及第하자 糟糠之妻와 子息들을 내팽개치고, 密陽의 富裕한 집안으로 새 장가를 갔다는 것이다. 調整은 한邊의 손을 들어줬다. 金叔滋를 벼슬에서 내치는 한便, 夫婦가 再結合하라고 命令했다.



    “官職이 德에 못 미쳤다”

    하지만 金叔滋는 再結合을 拒否했다. 그는 새 아내의 故鄕 密陽으로 내려가 學問에 潛心(潛心)했다. 그렇게 13年의 歲月이 흘러갔다. 金叔滋의 學問的 名聲은 더욱 높아졌고, 마침내 朝廷에 復歸할 機會가 찾아왔다. 世子侍講院, 卽 將次 임금이 될 世子(文宗)를 가르치고 補佐하는 職責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司諫院 官吏들이 强力히 反撥했다. “糟糠之妻를 버릴 程度로 品行이 바르지 못하였다.”(‘세종실록’, 世宗 20年(1438) 10月 26日子) 調整 官吏들은 그의 離婚事件을 잊지 않았다. 1439年(世宗 21年) 그는 東部學堂(서울 所在 4部 學堂의 하나)의 敎授官(종6品)에 推薦됐다. 그러나 그마저 司憲府의 反對로 물거품이 됐다. 金叔滋의 一生에 드리운 離婚의 그림자는 짙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난 것은 한참 뒤였다. 1454年(端宗 2年) 4月 그는 66歲로 成均館 사예(正4品)에 任命됐다. 이젠 누구도 그의 過去를 들먹이지 않았다. 얼마 後 그는 星州敎授官(星州敎授官, 慶尙道 星州의 敎授)이란 閑職을 얻어 시골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벼슬을 永永 辭職하고 密陽으로 돌아갔다. 1456年 봄 그는 老患으로 世上을 떠났다. 後날 그의 셋째 아들 金宗直은 아버지가 平生 抱負를 제대로 펴지 못한 點을 아쉬워하며 恨歎했다.



    아, 先攻(金叔滋)의 平生은 그 官職이 그 德(德)에 못 미쳤다. 31歲로 文科에 及第한 뒤 13年 동안 시골에 묻혀 지내셨다. 벼슬은 참외(參外, 7~9品의 下級管理)로 始作해 代父(大夫, 4品 以上의 高位官吏)에 이르기까지 모두 28年 동안이었다. 그사이 6番 主婦(主簿)의 벼슬을 했고, 富寧(部令)은 2番, 縣監이 3番, 敎授官, 敎理(校理), 否定(副正), 사예(司藝)가 各 1番씩이었다. 歷任하신 官職은 모두 當代의 흔한 벼슬자리였을 뿐이다. (離婚 問題 때문에) 不遇하고 영락하여 끝내 큰 業績을 이루지 못하셨다. (…) 아, 이것이 타고난 運命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고야 만 것인가.
    -金宗直, ‘선공기年’



    平生 妾 안 둬

    金叔滋는 顯達(顯達)하지 못했지만 老年에 成均館 社例를 지낸 事實은 特記할 만하다. 調整이 그의 離婚 經歷을 더 以上 問題 삼지 않게 됐다는 證據가 되기 때문이다. 1423年 7月 離婚 問題로 벼슬에서 물러난 뒤로 그는 不名譽에서 벗어나기 위해 不斷히 努力했다. 儒敎 經典에 記錄된 禮法을 지키며 性理學的 家族 倫理를 實踐하느라 腐心했다.
    또 하나 注目할 것은 일平生 單 한 名의 妾도 두지 않은 事實이다. 蓄妾은 當時 兩班들의 一般的 慣行이었다. 勿論 그때도 男便이 妾을 두면 아내는 속을 끓였다. 金叔滋의 아버지도 晩年에 愛妾을 두자 어머니 柳氏 夫人과 不和가 發生했다. 어머니는 그 일로 속을 태우다 作故했다. 金叔滋는 “이를 가슴 아파하며 決코 妾을 두지 않았다.”(김종직, ‘선공기年’)
    金叔滋의 아우도 첩 問題로 한때 家庭이 不和했다. 金叔滋는 “여러 次例 便紙를 보내 동생을 懇切하게 타일렀다.” 마침내 아우는 스스로를 “몹시 부끄럽게 여기고 結局 夫婦의 道理를 처음과 같이 回復하였다.”(‘선공기년’)
    金叔滋는 失敗로 끝난 自身의 첫 番째 結婚生活을 徹底히 反省했다. 온 집안에 다시는 그런 悲劇이 再現되지 않도록 注意했다. “아들을 장가들이고 딸을 시집보낼 때면, 반드시 相對方이 世族(世族)인지, 그리고 家訓(家訓)이 있는 집안인지를 確認했다. 그리고 婚姻 約束이 이미 決定된 다음에는 누구도 離間질하지 못하게 막았다.”(‘선공기년’)
    金叔滋는 不遇한 親族과 이웃의 結婚도 積極 도왔다. 그에겐 奇氏(奇氏) 집안에 시집간 누이가 있었다. 妹夫가 죽자 後妻이던 누이는 前妻의 아들로부터 모진 虐待를 當했다. 金叔滋는 앞장서 누이의 家庭 問題를 解決하고, 가난으로 媤집을 못 가게 된 조카딸의 結婚도 直接 周旋했다. 그는 人倫의 出發點이 結婚에 있다는 性理學의 가르침을 徹底히 信奉했다.
    여기서 한 가지 强調해둘 點이 있다. 15世紀 初盤만 해도 性理學的 家族 倫理는 아직 朝鮮 社會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蓄妾과 離婚 問題로 家庭 不和에 빠진 兩班들이 全國 어디에나 흔했다. 當時엔 金叔滋의 境遇처럼 집안 어른들이 離婚을 決定한 事例가 적지 않았다. 또한 ‘病妻(竝妻)’라고 하여, 正式으로 아내를 둘 以上 둔 兩班들도 있었다.
    이래저래 家庭 問題로 골머리를 앓는 이가 많았다. 이것이 結局 田畓과 奴婢 等의 相續 問題로 이어져 社會的 混亂이 惹起됐다. 朝廷으로서는 放置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太宗은 ‘病妻’ 風習을 禁止하고, 오직 한 사람의 配偶者만 ‘定處(正妻)’로 認定했다. 나머지는 ‘妾(妾)’으로 取扱됐다. 離婚이 不可避할 境遇엔 朝廷의 許諾을 받게 했다. 그러나 朝廷의 이런 改革 意志가 貫徹되기까지는 오랜 歲月이 걸렸다.
    보기에 따라 金叔滋는 運이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丈人이던 한邊이 크게 反撥하지 않았다던가, 朝廷 代身 中 韓辯을 積極 擁護하는 勢力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賢明한 金叔滋는 自身의 悲運을 받아들였고, 스스로를 채찍질해 危機에서 벗어나기를 꾀했다. 비록 時間은 걸렸으나 結果는 肯定的이었다.


    배우는 順序와 精讀 强調

    金叔滋는 靑年 時節부터 文明(文名)이 높았다. 한때 世宗은 3~4名의 선비를 中國에 보내 科擧試驗을 치르게 할 計劃이었다. 金叔滋는 그때 選拔된 선비 가운데 한 名이다. 그는 經學(經學)에 卓越했고 文章(文章)도 아름다웠다. 따르는 弟子도 많았다.
    그런데 그는 孔子의 先例를 따라 弟子들의 躐等(?等, 等級을 건너뛰어 올라감)을 禁했다. 배움엔 반드시 順序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初步者에겐 ‘艟艨수지(童蒙須知)’ ‘儒學者설(幼學字說)’ ‘정속편(正俗篇)’을 가르쳤다. 이것을 完全히 習得한 사람에겐 ‘小學(小學)’을 가르쳤다. 이어 ‘孝經(孝經)’ ‘大學(大學)’ ‘論語(論語)’ ‘孟子(孟子)’ ‘中庸(中庸)’ ‘詩經(詩經)’ ‘書經(書經)’ ‘春秋(春秋)’ ‘周易(周易)’ ‘禮記(禮記)’를 次例로 읽게 했다. 맨 마지막엔 ‘通鑑(通鑑)’ 및 第四(諸史)와 百家(百家)를 읽게 했다. 그런 金叔滋의 門下에선 겉멋을 부리며 함부로 알은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讀書에도 嚴格한 法이 있다고 가르쳤다. 무슨 冊이든 한 글字씩 모두 正確히 理解하라며 精讀을 注文했다.
    金叔滋의 日常生活은 곧 經典의 가르침을 實踐하는 것이었다. “困窮할 때는 배움을 몸소 實踐하고, 영달하여 남을 다스릴 때는 모든 것을 聖賢(聖賢)의 가르침대로 하라.”(‘선공기사’) 유난히 重視한 것은 ‘小學’이었다. 母親喪을 當했을 때 그는 ‘小學’에 明示된 대로 물 한 盞조차 마시지 않았다. 草殯을 마친 뒤에야 겨우 粥을 들었다. 當時 風俗은 선비 집안에서도 佛家의 葬禮法을 따랐다. 그러나 金叔滋는 “唯獨 確固不動해 廉(殮), 襲(襲), 禹(虞), 部(?), 年(練), 上(祥) 等의 意識을 주자(朱子)의 예(禮)에 따라 알맞게 擧行했다.”(‘선공기사’)
    ‘不法 離婚’ 問題로 그는 家族 倫理에 어긋났다는 非難과 함께 世上의 버림을 받았다. 그러나 시골에 蟄居하며 누구보다 模範的으로 性理學의 가르침을 實踐했다. 性理學的 社會 改革의 先頭에 섬으로써 그는 再起했다.



    淸水白石

    金宗直이 目擊한 아버지 金叔滋는 청렴한 官吏이기도 했다. 그가 高齡縣監(慶尙北道)으로 赴任했을 때 前任者의 잘못으로 倉庫의 穀食이 帳簿보다 3000餘 曲(斛)이 적었다. 金叔滋는 前任者의 잘못을 감추고, 任期 내내 節約에 힘써 問題를 조용히 解決했다.
    一線 行政業務에도 能通했다. 吏讀에 익숙했고, 判決을 公正하게 잘하기로 이름났다. 그는 두 고을의 縣監을 지냈는데 그때마다 스스로 다짐하기를, “土地가 있고 百姓이 있으니, 여기서도 나의 學問을 實踐에 옮길 수 있다”며 낮은 벼슬을 탓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古代 中國의 週(周)나라를 模範으로 삼아 善政을 베풀었다. 改令縣監(慶尙北道) 時節엔 세 곳에 방죽을 파서 700~800結의 農地에 惠澤을 줬다.
    그는 赴任하는 곳마다 鄕校를 大大的으로 修理해 선비들이 배움의 機會를 잃지 않도록 했다. 公務의 餘暇에 儒生들의 學業을 直接 指導하기도 했다. 그가 在任한 高齡과 改令에서 여럿이 生員進士 試驗에 合格했는데, 모두들 김숙자 德分이라고 말했다.
    衙前들을 다스리는 데도 뛰어났다. ‘約束(約束)’이라는 業務規定을 만들어 衙前들이 挾雜을 부리지 못하게 統制했다. 衙前들은 員님 金叔滋를 ‘靑數百石(淸水白石)’이라 부르며, 淸白함과 공정함을 稱頌했다.
    世宗이 全羅道 地方의 田品(田品, 土地 等級)을 實情에 맞게 改正하려 했을 때 그는 敬差官(敬差官, 後代의 御史와 같음)이 되어 南原, 長興, 玉과, 順天 等地에서 職務를 遂行했다. 多數의 敬差官이 巡察使(觀察使)와 짜고 不正을 저질렀으나 金叔滋는 달랐다. “調整도 속일 수 없거니와 百姓을 어찌 저버릴 수 있는가.” 이에 百姓들이 기뻐하며 닭고기와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러나 金叔滋는 그들의 마음만 받을 뿐이었다. 金宗直은 回顧하기를, 後날 “그 地方 사람들이 나(金宗直)를 만나면 그 恩德에 感激하며 稱讚하였다”고 했다(‘선공기사’).
    金叔滋는 어떤 벼슬을 하더라도 百姓의 衣食住를 念慮해 自身의 能力과 知識을 아끼지 않았다. 金宗直은 아버지의 態度에서 人生의 깊은 意味를 새삼 깨달았다.



    “나는 바보라서 좋다”

    1455年(世祖 1年) 12月 金叔滋의 막내딸이 結婚했다. 그때 自身의 所懷를 아들들에게 吐露했다. “나는 品階가 이미 3品에 이르렀고, 男婚女嫁(男婚女嫁, 아들딸의 結婚)도 끝냈다. 할 일을 마쳤으니 어서 辭職書를 作成해 오거라.”(‘선공기사’) 그는 벼슬을 辭職하고 密陽으로 돌아갔다. 平生 청렴하게 살았기에 두어 달 만에 食糧이 떨어졌으나 泰然했다. 어쩌다 잔치에 招待받아도 말을 타지 않고 죽여(竹輿, 대나무를 엮어 만든 가마)로 갔다. 이런 金叔滋를 사람들은 ‘達尊(達尊, 世上이 尊敬할 만한 어른)’이라 했다.
    利속에 밝은 世上의 눈으로 보면 그는 ‘바보’였다. 財産을 불릴 줄도 모르고, 威勢를 부리는 데도 關心이 없었다. 그러나 金叔滋는 自身이 바보라는 事實에 滿足했다. 그는 아들 金宗直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世上 사람들이 나를 ‘卒(拙)하다(못났다)’고 말하는데, 拙한 것이 眞正으로 큰 보배로다. (…) 나는 眞實로 그런 말을 多幸으로 여긴다. 너도 내 아들인지라, 나중에 卒하기로 이름이 날 것이다. 그런 世評에 부디 掛念하지 말아라.”(김종직, ‘先攻類似’)
    果然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金宗直은 文科에 及第해 世祖와 成宗 때 여러 要職을 두루 지냈다. 그럼에도 捲歸(權貴)들에게 附和雷同하지 않았다. 士林派의 領袖로서 많은 弟子를 길러냈고, 世上의 높은 推仰을 받았다. 끝내는 1498年(燕山君 4年)의 戊午士禍에 빌미를 提供했다는 理由로 剖棺斬屍(剖棺斬屍, 管을 쪼개 屍體의 목을 베는 벌)의 罰을 받았다.
    하지만 金叔滋, 김종직 富者의 官爵은 오래지 않아 復舊됐다. 그들은 朝鮮 性理學界의 별이 되어 數百 年 동안 後學들의 길잡이 구실을 했다. 한때 挫折의 늪에 빠진 것처럼 보이던 金叔滋의 삶이 거기서 끝나지 않고, 士林派의 登場이라는 歷史的 轉換點을 마련하는 契機가 됐으니 놀라운 일이다. 機會는 危機 속에서 孕胎되기 마련인가.
    우리 時代의 아버지들이 다 김숙자처럼 卓越한 學者 또는 公職者가 돼야 할 까닭은 없다. 우리 自身이 허물어진 그 地點에서 다시 일어나 未來 志向의 價値를 追求할 일이다. 重要한 것은 成就 그 自體가 아니라, 아마도 우리의 성실한 態度일 것이다. 

    ‘아버지 김숙자’의 가르침
    - 人倫의 出發點은 結婚에 있다.
    - 배움을 몸소 實踐하고, 모든 것을 聖賢(聖賢)의 가르침대로 하라.
    - 하찮은 職責이라도 精誠을 다하라.

    百 勝 種


    ● 1957年 全北 全州 出生
    ● 獨逸 튀빙겐대 哲學博士
    ● 서강대 史學科 敎授, 獨逸 튀빙겐대 韓國 및 中國學과 敎授, 獨逸 막스플랑크 歷史硏究所 招聘敎授,프랑스 國立高等社會科學院 招聘敎授
    ● 現 韓國技術敎育大 待遇敎授
    ● 著書 : ‘백승종의 逆說’ ‘마흔 歷史를 알아야 할 時間’ ‘禁書, 時代를 읽다’ ‘正朝와 不良선비 강이천’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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