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鼓子 아파트, 內侍 아파트 精管手術 全盛時代 넘다|신동아

鼓子 아파트, 內侍 아파트 精管手術 全盛時代 넘다

大韓民國 産兒政策 ‘黑歷史’

  • 李允洙 | 韓國性科學硏究所腸, 李允洙조성완 泌尿器科 院長

    入力 2016-02-19 10: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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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避妊 常識 제로…아들 낳을 때까지 ‘무한도전’
    • 國民所得 78달러 時代의 ‘不可避한 選擇’?
    • 豫備軍 集中 攻掠…아파트 請約優先權 惠澤
    • 精管手術 保險 適用 마지막 날 終日 북적북적
    • 180度 바뀐 政策…“아빠! 혼자는 싫어요”
    ‘人口가 곧 國力’이라는 말이 있다. 果然 그럴까. 人口가 넘쳐나 堪當 못하는 中國과 印度를 보자. 人口가 많은 것보다 적은 게 좋은 건 아닐까. 우리나라도 한동안 人口를 줄이려 努力했다. 1960年 以前까지 우리 國民은 헐벗고 굶주렸다. ‘가난이 줄줄 흘렀다’는 말 그대로였다. 日帝의 敗亡으로 갖은 收奪이 끝나나 했더니 6·25戰爭으로 食糧難이 닥쳤다.
    요즘 젊은 世代에겐 ‘보릿고개’라는 말이 낯설 것이다. ‘먹을 게 없으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릿고개를 經驗한 世代라면 그 時節 ‘草根木皮’로 延命하며 얼마나 悽絶하게 살았는지 記憶이 생생할 것이다. 한 집에 아이가 普通 7, 8名이었다.
    이처럼 아이를 많이 낳은 가장 큰 理由는 男女 모두 避妊 常識이 없었기 때문이다. 避妊의 必要性도 認識하지 못했다. 農耕 中心 社會에선 아이를 勞動力으로 여겼기에 많이 낳는 것에 對한 拒否感이 없었다. 더욱이 劣惡한 衛生狀態와 營養失調 等으로 죽는 아이가 많았던 탓에 말 그대로 생기는 대로 낳았다.



    끝순이 말순이 말숙이

    여기에 男兒選好思想까지 一助했다. 女性은 아들을 낳을 때까지 ‘무한도전’에 나섰다. 그러다 보니 딸만 7, 8名인 집도 많았다. 그 時節 막내딸의 이름으로 많이 쓰인 끝筍, 말순, 영순, 말자, 말숙 等에는 더 以上 아들에 未練을 두지 말자는 意味가 담겼다.
    그러다 아차 하는 瞬間의 ‘失手’로 運 좋게 아들을 얻는 境遇도 있었다. 아들을 낳은 집은 大門 기둥에 禁줄을 매달았고, 男便과 媤어머니는 온 洞네에 자랑하러 돌아다녔다. 딸을 낳으면 男便은 아이 얼굴도 보지 않고 洞네 酒幕으로 달려가 술盞을 들이켰고, 媤어머니는 갓 出産한 며느리 앞에서 孫子타령을 해댔다.
    儒敎思想의 影響을 받은 우리나라는 예부터 아들을 重視했다. 집안의 代를 잇고 祖上을 모시는 일이 重要했다. 아들을 못 낳은 며느리가 쫓겨나지 않으려면 아들을 낳을 때까지 아이를 낳든지, 男便이 妾을 둬 아들 낳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女性의 健康과 幸福은 無視되고 오직 아들을 낳기 위해 妊娠과 出産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社會構造였다. 1990年代까지만 해도 法조차 아들과 딸의 相續 權利를 差別하고 男子가 家系를 承繼한다는 傳統意識을 認定했다.
    政府의 家族計劃은 이처럼 歪曲된 社會意識과 構造를 바꾸기 위해 始作됐다. 1960年부터 始作한 家族計劃事業은 不可避한 側面이 있다. 産業이래야 大部分 農業이었고, 2次産業의 存在는 微微했다. 1人當 國民所得(GNI) 78달러. 世界 最下位 國家群으로 分類됐다. 當時 어느 新聞의 社說 題目이 이랬다. ‘우리는 얼마나 가난한가. 來日을 위해 오늘을 알자.’
    우리 政府의 最優先 課題는 飢餓와 貧困 解決. 그 對策의 一環으로 提示된 것이 바로 家族計劃이다. 1955~1960年 우리나라의 人口 增加率은 約 3%. 다른 先進國에 비해 조금 높은 水準이었다. 政府는 人口 抑制 政策을 民間 主導로 推進하기 위해 1961年 4月 1日 大韓家族計劃協會(以下 協會)를 發足했다. 協會 設立 趣旨文의 一部를 옮겨보면 이렇다.
    ‘家族計劃運動이 志向하는 바는 妊娠回數 및 터울을 調節함으로써 道義的으로나 母性 健康을 위해 좋지 못한 妊娠中絶을 避하고 願치 않는 受胎를 未然에 防止하고 태어난 子女에 對해서는 生命을 尊重하고 잘 養育하게 함으로써 適切한 子女 數를 維持하고 明朗하고 潤澤한 家庭生活을 이룩하고 國民生活의 質的 向上을 圖謀함에 있다.’
    協會는 한 달 뒤 發生한 5·16軍事政變으로 暫時 門을 닫았다가 바로 다시 열고 6月 국제가족계획연맹(IPPF)에 加入했다. 當時 政府나 知識人들은 家口當 家族 數가 너무 많다 보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봤다. 나아가 國家 經濟成長을 沮害하는 要因으로 꼽았다. 1961年 11月 3日 國家再建最高會議 常任委員會는 經濟開發 5個年 計劃의 一環으로 人口 抑制政策을 竝行하기로 했다.



    車範根 “하나만 더 낳고…”

    政府가 내세운 家族計劃 標語나 포스터에는 當時 時代相이 고스란히 담겼다. 1961年 家族計劃의 始作을 알리는 첫 番째 標語는 ‘알맞게 낳아 훌륭하게 기르자’였다. 對策 없이 닥치는 대로 낳을 게 아니라, 經濟的 能力에 맞게 適當히 낳아 제대로 키우자는 얘기다. 이어 ‘많이 낳아 苦生 말고, 적게 낳아 잘 키우자’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 ‘적게 낳아 잘 기르면, 父母 좋고 子息 좋다’ 等 비슷한 趣旨의 標語들이 登場했다. 社會的 因習과 傳統 等 國民意識 轉換에 重點을 둔 것이다.
    1966年에는 ‘세 子女 갖기 運動’을 前面에 내세웠다. 政府는 세 子女를 3살 터울로 35歲 以前에 낳자는 趣旨의 ‘3·3·35 原則’을 올바른 家族計劃이라고 紹介하면서 弘報 映畫까지 動員했다. 1970年代는 한 名이 더 줄었다. ‘딸 아들 區別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政府는 國民 參與를 督勵하기 위해 家族計劃을 實踐하는 家庭에 各種 支援策을 내놓았다. 세 子女 以下까지 稅制 惠澤, 女性 相續權을 認定하는 家族法 改正, 두 子女 不妊手術 家庭에 公共住宅 入住 優先權 提供 等이 代表的이다.
    當時 獨逸에서 活躍하던 蹴球選手 車範根 家族을 내세운 포스터도 登場했다. 車範根과 夫人, 딸이 함께 나와 “하나만 더 낳고 그만두겠어요”라며 家族計劃運動 同參을 呼訴하는 內容이었다. 有名 스포츠 스타를 앞세운 이 포스터는 어떤 講演보다도 說得力이 있었다.
    1980年代의 代表的 標語는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딸 아들 區別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이는 男兒選好思想에 對한 宣戰布告나 다름없었다. 及其也 1990年代에는 ‘고운 딸 하나 백 아들 안 부럽다’는 標語까지 登場했다. 大家族 中心에서 小家族 中心으로 社會가 急激히 變化하면서 男兒選好思想이 退色한 것과 無關치 않다.




    種族 繁殖權 vs 請約 優先權

    政府는 1962年 3月 1日 全國 市·郡·區 保健所에 家族計劃相談所를 設置했다. 시골 구석구석까지 啓蒙指導원을 配置하고 콘돔, 質內 揷入 避妊精製, 避妊藥, 젤리 等을 無料로 普及하기 위해 豫算을 集中 編成했다. ‘家族計劃’이라는 美名 아래 對策 없이 아이 낳는 집을 團束하겠다며 男性에게는 ‘精管手術’을 勸奬하고, 女性에게는 ‘避妊施術’을 奬勵했다. 그래야 삶의 質이 높아진다나.
    政府가 男性에게 精管手術을 督勵한 것은 手術費用이 크게 들지 않으면서 永久的으로 避妊할 수 있는 方法이기 때문이었다. 事後 管理가 必要없다는 것도 長點으로 꼽혔다. 政府는 精管手術 件數를 늘리려 大大的인 캠페인을 벌였다.
    大韓家族計劃協會는 1964年 4月부터 醫師들에게 精管切除手術敎育 및 訓鍊을 實施했다. 當時 鼎冠手術費는 500원. 莫大한 豫算이 投入됐다. 手術을 받은 男性에게 事後 治療費는 勿論 回復期間 中 勤勞補償金 名目으로 一定 金額을 支給했다. 手術 對象者에게 手術을 받게 한 保健指導院이나 啓蒙源에게는 別途 活動費를 支給했다. 精管手術 副作用 治療를 위한 ‘避妊施術 事後 管理委員會’도 中央과 地方에 設置했다. 하지만 갖가지 誘引政策은 큰 成果를 거두지 못했다.
    手術 件數가 急增한 건 1974年 政府가 人口 抑制政策 中 하나로 豫備軍 訓鍊期間에 精管手術을 받도록 하면서다. 豫備軍 中에는 젊은 旣婚者가 많았는데 이들을 家族計劃事業에 同參시킨 것은 絶妙한 아이디어였다. 政府는 豫備軍들에게 다양한 ‘당근’을 提示했다. 1977年 12月에는 精管手術을 받은 사람에게 住公아파트 및 住宅賦金아파트 分讓 優先權을 附與한다고 發表했고, 1982年에는 國防部 訓令으로 豫備軍訓鍊 中 精管手術을 한 사람에게 訓鍊 殘餘時間을 免除해줬다. 旣婚者는 豫備軍 殘餘訓鍊 免除 惠澤과 더불어 手術費 免除, 아파트 分讓 于先 惠澤 等 經濟的 利得까지 챙길 수 있었다.
    내 집 마련 熱氣와 더불어 請約 優先權은 대단한 反響을 일으켰으며, 德分에 手術 件數도 2倍 以上 늘었다. 分讓 當時 엄청난 人氣를 끈 서울 江南의 某 아파트는 精管手術自家 請約優先權을 갖게 되면서 ‘鼓子 아파트’ ‘內侍 아파트’로 불리기도 했다. 政府의 積極的인 政策에 힘입어 精管手術 參與者는 1984年 最高値를 찍었는데, 그해에만 8萬3527名의 男性이 手術臺에 올랐다. 子女 1~2名을 둔 30代가 가장 많았다.
    그로부터 30餘 年이 지난 只今, 이들은 어느덧 60代가 됐다. 얼마 前 그 또래의 한 男性이 診療室을 찾았다. 前立腺 肥大症 初期 患者였는데 “或是 젊을 때 精管手術을 했기 때문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紙匣 속에 오래 保管해온 듯 꼬깃꼬깃하고 누렇게 바랜 종이 한 張을 보여줬다. 精管手術 證明書였다. 30代 때 아파트 請約 優先權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바로 그 쪽紙였다. 그때는 돈이 없어서 아파트 請約을 하지 못해 記念으로 갖고 다닌다고 했다. 種族 繁殖 機能을 아파트 請約 優先權과 맞바꾼 것에 對한 未練과 不安 때문일까. 어찌됐든 精管手術은 戰笠性 肥大症과는 無關하다.



    癌 誘發 論難에 拒否感

    잘못된 性 常識 때문에 精管手術을 忌避하는 일도 많았다. 精管手術을 받으면 ‘精液이 나오지 않는다’거나 ‘精力이 떨어진다’는 等 性機能에 問題가 생길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런저런 핑계로 몸에 칼을 대기 싫은 男便 代身 아내가 永久 避妊術人 難關 切除手術을 받는 境遇도 적지 않았다. 男便의 性機能에 問題가 생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自身이 手術을 받는 게 낫겠다는 非常識的 判斷에서였다.
    政府는 女性에게 子宮 내 裝置인 루프 揷入施術을 勸奬했다. 루프는 한番 施術하면 除去하기 前까지는 避妊效果가 持續돼 效果的이지만, 不便함을 呼訴하거나 副作用 等으로 除去하는 境遇가 많았다. 政府는 1968年부터 루프 施術에 失敗한 女性에게는 먹는 避妊藥을 提供했다. 스웨덴이 無償援助韓 避妊藥이었다. 女性의 永久 避妊法 中 喇叭管 切開 手術은 開腹을 해야 할 程度로 큰 手術이다. 그 때문에 帝王切開手術 等 開腹手術을 한 사람 中 希望者에 한해 制限的으로 施術이 이뤄졌다.
    1976年 以後 一名 ‘배꼽手術’로 불린 腹腔鏡 手術法 等 한層 수월한 方式이 普及되면서 手術 件數가 劃期的으로 增加했다. 하지만 骨盤이나 허리 痛症 等 手術 副作用을 呼訴하는 事例가 적지 않았다. 이처럼 女性의 難關手術은 男性의 精管手術보다 훨씬 어렵고 副作用이 深刻한데도 精管手術보다 훨씬 많이 行해졌다. 이런 不均衡을 解消하기 위해 女性團體들은 大韓家族計劃協會와 손잡고 ‘男性이 더 避妊하는 해’를 宣布하기도 했다.
    먹는(경구용) 避妊藥이 國內에 普及된 것은 1960年代 後半. 政府의 家族計劃 次元에서다. 하지만 우리나라 女性에게선 그다지 呼應을 얻지 못했다. 市販 初期라 副作用이 생각보다 甚했다. 더욱이 當時 保守的인 社會 情緖上 避妊藥을 먹는다는 事實 自體가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藥을 먹으면서까지 性生活을 즐기는 女性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避妊藥을 每日 服用해야 하는 것도 귀찮고 不便했다. 그러다 보니 한 番에 한 달分을 服用하면 안 되느냐는 問議가 많았고, 한꺼번에 많은 藥을 먹고 下血을 하며 病院으로 달려오기도 했다. 當時엔 避妊藥을 服用法대로 먹기보다는 생각날 때마다 먹는 女性이 더 많았다.
    먹는 避妊藥이 癌 論難에 휩싸인 것도 비슷한 時期다. 1968年 美國 뉴욕 州 議員選擧에 出馬한 候補者가 “먹는 避妊藥이 癌을 誘發하는데 韓國에 大量 普及됐다”고 主張한 事實이 言論 報道로 알려지면서 먹는 避妊藥에 對한 韓國 女性의 拒否感을 더욱 키웠다.
    事實 먹는 避妊藥은 오랜 避妊의 歷史에서 이른바 ‘性의 革命’을 가져온 것으로 評價받는다. 生化學者 그레고리 핀커스가 開發한 最初의 먹는 避妊藥 ‘에노비드 10’은 1960年 美國食品醫藥局(FDA)으로부터 販賣 承認을 받았다. 핀커스는 女性이 妊娠 中에는 다시 妊娠하지 않는다는 事實에 注目했다. 女性의 몸엔 妊娠 中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이 急激히 많아지는데, 먹는 避妊藥은 妊娠 때와 비슷한 水準으로 호르몬 數値를 높여주는 成分으로 만든 것이다. 이 藥이 登場하면서 女性은 妊娠과 出産을 스스로 選擇할 수 있을 뿐 아니라 妊娠이 두려워 性關係를 忌避하지 않게 됐다.
    初期에 販賣된 藥은 含量이 지나치게 높아 副作用 論難을 일으켰다. 避妊藥 한 알에 無慮 150ug의 合成 에스트로겐이 들어 있어 避妊 效果는 컸지만, 高血壓, 浮腫, 血戰 等이 나타날 危險도 그만큼 높았다. 한때는 癌이나 肥滿을 誘發한다는 論難에 휩싸였다. 먹는 避妊藥은 發展을 거듭해 最近에는 容量을 過去의 20%臺로 낮춰 副作用을 最少化했다.

    ‘定款을 이어라’ 特命

    그런데 요즘은 低出産率이 國家 經濟成長의 발목을 잡는다며 出産을 奬勵하느라 餘念이 없다. 正말 ‘人口가 國力’이라는 말인가. 20世紀에서 21世紀로, 時代가 바뀌면서 人口를 바라보는 觀點이 完全히 달라졌다. 人口를 줄일 게 아니라 늘려야 한다는 것. 그렇다 보니 産兒政策도, 口號도 正反對로 바뀌었다.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 ‘하나보단 둘, 둘보단 셋이 幸福합니다’ ‘하나의 촛불보단 여러 個의 촛불이 더 밝습니다’ 따위의 口號가 登場했다.
    우리 政府의 産兒政策社에서 2004年 11月 30日은 매우 意味 있는 날이다. 이날을 起點으로 政府가 主導해온 家族計劃 事業이 歷史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政府는 低出産 對策의 一環으로 가장 먼저 精管手術부터 막았다. 그동안은 家族計劃 事業이란 名目으로 國家가 定款手術費를 支援했다. 그러다 어느 瞬間 健康醫療保險으로 代替했다. 結局엔 手術費 全額을 本人 負擔으로 돌리겠다고 正反對로 旋回했다. 代身 定款 復元手術에 對해선 醫療保險 惠澤을 받도록 했다. 定款을 끊는 건 막고, 다시 잇는 건 積極 奬勵하는 것이다.
    精管手術이 醫療保險 適用을 받은 마지막 날인 2004年 11月 30日, 全國의 泌尿器科는 精管手術을 받으러 온 男性으로 온終日 북적였다. 當場 來日부터 保險 惠澤이 없어진다는 말에 그동안 手術을 망설이던 男性들이 病院으로 몰려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엔 醫療保險 適用을 받아 手術費 8萬460원 中 本人負擔金이 3萬 원밖에 안 됐으나 保險 對象에서 除外되면서 하루아침에 30萬 원으로 10倍가 뛰게 됐기 때문이다.
    서울 市內 한복판 鳴動에 位置한 筆者의 病院에도 周邊 會社員들이 몰려들었다. 平素 하루 1, 2件 하던 精管手術을 이날 하루에만 30件 넘게 했다. 豫備軍을 對象으로 한꺼번에 手術할 때를 빼놓고 하루에 그토록 많은 定款을 자르기는 처음이었다.
    엊그제까지 政府를 代身해 精管手術을 勸奬하던 筆者에게 언제부턴가 “低出産 對策과 關聯한 講演을 해달라”는 要請이 들어오기 始作했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던 口號가 아직도 생생한데 말이다. 요즘 筆者의 病院에 精管手術을 相談하러 오는 男性이 있으면 반드시 子女가 몇 名인지 물어본다. 한 名이라고 하면 夫人과 한 番 더 相議하고 오라며 돌려보낸다. “하나는 너무 외롭지 않겠느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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