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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月 維新 後暴風 權力暗鬪가 낳은 自害極|新東亞

김충립 前 首警司 保安班長 肉筆手記 ‘陰謀와 暗鬪’

10月 維新 後暴風 權力暗鬪가 낳은 自害極

윤필용·손영길 ‘쿠데타 陰謀’ 事件

  • 김충립 | 前 首警司 保安班長 kimchoonglib@naver.com

    入力 2016-03-07 14: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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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종규·신범식·전두환 vs 이후락·윤필용·손영길
    • “손영길을 參謀總長으로 키워라”에 全斗煥 불끈
    • 誣告 報告하자 朴 大統領 “내가 調査 指示했는데…”
    • 陸士 11期 ‘와이프 內戰’…김옥숙 ‘下級者 待遇’韓 이순자
    42年 歲月이 지난 오늘 이른바 1973年 首都警備司令部 윤필용·손영길 將軍 쿠데타 陰謀 事件을 仔細히 記錄하는 理由는 眞實을 밝혀 歷史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그동안 전두환 將軍 側近들이 執權 過程에서 自身들에게 不利한 이야기는 감추고 有利한 이야기는 美化했기 때문에 ‘코리아게이트’ ‘第5共和國’ 같은 드라마를 통해 國民에게 잘못 알려졌거나 감추어진 事實이 많다.
    또한 當時 事件으로 犧牲당한 數十 名의 現役 軍人과 中央情報部 職員들의 抑鬱함을 풀어주고 名譽를 회복시켜야 할 必要가 있다. 當時 刑을 받은 분들은 大部分 法廷鬪爭을 통해 無罪를 宣告받고 補償도 받았으나, 强制 豫編을 當한 분들은 40年 넘게 마음苦生을 하며 살아왔다. 軍部 內 私組織은 當然히 없어야 한다. 或如 政治的 欲望으로 陰謀를 꾸미고 權謀術數를 부리면서 執權을 꿈꾸는 人物들이 아직도 있다면 이 事件이 그들에게 警鐘이 될 것이다.



    1. 10月 維新 後 權力移動

    1968年 當時 朴正熙 大統領을 補佐하는 靑瓦臺 周邊 權力者는 祕書室長 이후락, 警護室長 박종규, 中央情報部長 김형욱, 防諜部隊長 윤필용 等이었다. 1968年 1·21 事件(김신조 等 北韓 特殊部隊 要員들의 靑瓦臺 奇襲 事件) 以後 政局은 比較的 安定됐지만, 朴 大統領의 野望이 問題였다. 當時 憲法으로는 大統領職 3選 連任을 할 수 없기 때문에 朴 大統領은 1971年 4月 實施되는 大統領選擧에 出馬할 수 없었다. 따라서 3選 大統領을 許容하는 憲法 改正이 必要했다.
    結局 朴 大統領의 뜻대로 1969年 10月 3選 改憲案은 77.1% 投票率에 65.1% 支持를 받아 通過됐고, 그는 3選 改憲 憲法에 따라 1971年 4月 第7代 大統領에 當選됐다. 朴 大統領은 韓半島를 둘러싼 周邊國과의 勢力 均衡을 위해 持續的인 國家 再建이 必要하고, 南北 平和統一을 위해 ‘西歐式 民主主義 政治制度’보다는 이른바 ‘韓國的 民主主義 政治制度’가 必要하다며 새로운 對策을 構想하기 始作했다.
    1972年 初 朴 大統領은 ‘平和的 南北統一 課業과 國家 再建事業을 完遂하는 時期까지 執權한 後 大統領職에서 물러나겠다’고 마음먹고 ‘維新革命’을 하기로 決斷했다. 1972年 3月부터 計劃을 세우고 準備하는 한便, 1972年 7月 4日에는 北韓을 다녀온 이후락 中央情報部長으로 하여금 ‘南北 7·4共同聲明’을 南北이 同時에 發表하게 했다.
    1972年 10月 17日 戒嚴을 宣布한 朴 大統領은 國會를 解散하고 野黨 國會議員을 軟禁했다. 그리고 大統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間選으로 뽑되 任期는 6年으로 하고, 國會議員 任期는 6年과 3年 2가지로 했으며, 國會 開會일은 150日 以內로 하는 維新憲法을 公布했다.
    이러한 措置는 自由를 制約하고 民主主義를 후퇴시킨다는 理由로 國民的 非難을 받았다. 그럼에도 1968年 1·21 事件 以後 1972年까지 間諜 浸透가 頻繁해 南北 間에 戰爭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憂慮가 擴散되는 等 社會的 混亂이 極甚했다. 따라서 國家經濟 再建과 安保를 위해 西歐式 民主主義 制度를 우리 實情에 맞도록 修正해 一定 部分 政治的 自由를 制約할 必要가 있다는 共感帶도 없진 않았다.
    維新革命이 마무리된 1972年 10月 朴 大統領 周邊의 權力 實勢는 祕書室長 김정렴, 警護室長 박종규, 중정部長 이후락, 保安司令官 강창성, 首警司令官 윤필용, 首警司令部 參謀長 손영길 等이었다. 이른바 10月 維新 功勞者들이다.
    그런데 앞서 國家再建最高會議 祕書室長이던 윤필용 大領이 1963年 軍으로 復歸한 뒤 이후락 中情部長이 後任 祕書室長으로 長期間 勤務했다. 准將 進級 後 윤필용은 朴 大統領에게 이후락의 非理를 報告했는데, 이것이 알려져 두 사람은 不便한 사이가 됐다. 朴 大統領은 이후락을 駐日大使로 左遷시켰다가 1970年 신직수의 後任으로 中情部長에 임명한다.
    그러나 北韓을 다녀온 後 1972年 7·4 共同聲明을 發表하는 等 頭角을 나타내던 이후락은 10月 維新 以後 서울地區戒嚴司令官이던 윤필용과 자주 만나 술자리를 같이하는 等 切親한 사이가 됐다. 그런데 이들을 화해시킨 人物은 두 사람 모두와 가까운 사이인 손영길 大領으로 알려졌다. 이후락과 사이가 좋지 않던 박종규 警護室長과 신범식 서울신문 社長은 이 때문에 손영길에 對해 안 좋은 印象을 갖게 된다.
    特히 박종규는 首警司令部가 警護室에 作戰 配屬돼 大統領을 警護하는 部隊이기 때문에 윤필용이 自身의 部下는 아니지만 各別히 關心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윤필용이 自身과 사이가 안 좋은 中情部長과 密着되는 것에 對해 心氣가 不便했고, 特히 朴 大統領 專屬副官 出身으로 自己 밑에서 4年間 30大隊長을 한 손영길이 윤필용과 같이 이후락과 가까워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勢力 均衡은 깨지고

    그리고 박종규와 가깝지만 이후락과는 사이가 나쁜 신범식 社長이 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신범식은 國家再建最高會議 이후락 弘報室長의 後任 弘報室長이었고, 以後 文化公報部 長官과 靑瓦臺 祕書官을 歷任할 程度로 朴 大統領의 두터운 信任을 얻고 있었다. 신범식은 가까운 親舊들과 어울려 이후락, 윤필용과의 술자리를 마련했고, 이 자리에서 윤필용이 이후락에게 한 言動을 警護室長과 大統領에게 報告해 윤필용·손영길이 쿠데타 陰謀 事件으로 拘束되게 했다.
    1971年 ‘首警司 監聽事件’(‘신동아’ 2月號 140~155쪽 記事 參照)으로 김재규 保安司令官이 左遷되고, 그 後任에 강창성이 赴任한 後 10月 유신은 成功的으로 完了됐다. 그러나 維新 以後 安定돼 있던 勢力 均衡이 朴 大統領 周邊 權力者들의 離合集散으로 龜裂되기 始作했다. 이 過程에서 ‘加害者’는 박종규 警護室長을 中心으로 신범식 社長, 전두환 將軍, 노태우 大領 等이고, ‘被害者’는 윤필용, 손영길, 이후락 等이었다. 加害者 側은 朴 大統領에게 쿠데타 陰謀를 알렸고, 이를 事實로 받아들인 朴 大統領은 강창성 保安司令官에게 徹底히 調査해 嚴罰할 것을 命令한다. ?
    當時 軍에서 가장 强力한 實力者이고 陸士 8期生 中 先頭走者이던 윤필용은 이 事件으로 인해 1973年 3月 8日 拘束된다. 1961年 專屬副官으로 朴 大統領을 輔弼한 손영길은 제15사단 副師團長으로 轉補됐다. 윤필용이 拘束됐을 때만 해도 손영길은 이 事件에서 비껴나는 듯했지만 ‘統一情事 事件’(윤필용이 이후락이 大統領이 되기를 祈願하기 위해 靑瓦臺에 祈禱處를 지었다고 謀陷한 事件)으로 1週日 後인 3月 15日 保安司 西氷庫 紛失에 連行돼 調査를 받고 拘束됐다.
    윤필용이 누구던가. 그는 朴 大統領이 1956年 7師團長 時節 以後 軍需司令官과 國家再建最高會議 議長을 할 때 祕書室長을 歷任했고, 民政移讓 以後에는 防諜部隊長과 猛虎部隊腸, 首警司令官을 맡으며 朴 大統領을 最側近에서 도운 心腹이다. 大統領은 그런 그를 拘束하고 除去한 것이다. 여기에 自身의 專屬副官 出身으로 가장 아끼던 손영길度 拘束한 뒤 關係를 斷絶한다. ?
    筆者는 新東亞 2月號에서 이 事件이 韓國 現代史에서 1979年 10·26 事件 다음으로 重要하다고 밝힌 바 있다. 1979年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키는 原因(遠因)을 提供한 事件이고, 이 事件과 關聯된 人物들의 權謀術數가 우리나라 政治 發展에 惡影響을 끼쳤기 때문이다.

    강창성의 職務遺棄






    이 事件에서 核心은 윤필용·손영길이 果然 ‘逆賊’이었는가 하는 點이다. 그러나 강창성 司令官이 西氷庫에서 調査한 結果 쿠데타를 謀議한 事實이 없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기 때문에 逆賊이 아닌 것으로 일찌감치 判明됐다. 그렇다면 강창성은 누가 忠臣을 逆賊으로 謀陷했는지를 調査해 朴 大統領에게 報告했어야 한다. 윤필용, 손영길, 이후락이 健在했다면 10·26, 5·18 같은 事件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강창성은 ‘하나회’를 調査하다가 全斗煥이 會長인 걸 알고 쿠데타와 關聯 없는 윤필용 側近 30餘 名의 軍服을 벗기고 말았다. 그리고 以後 單 한 番도 이 事件과 關聯해 누가, 왜, 어떻게 陰謀를 꾸몄는지에 對해 言及하지 않았다. 이 事件의 仔細한 內幕을 아는 사람이 드문 데다, 있다 해도 關聯者들의 힘이 무서워 公開할 勇氣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筆者는 1970年 末부터 1973年까지 4年餘 동안 首警司 步안반에 勤務하면서 1972年 監聽事件과 10月 維新, 그리고 1973年 윤필용·손영길 將軍 事件 調査에 直接 參與한 만큼 그 內幕을 比較的 仔細하게 안다.
    當時 나는 윤필용·손영길 事件이 謀陷에 依한 것임을 尹 將軍의 後任인 진종채 將軍에게 報告했다. 報告를 들은 진 將軍은 그 자리에서 강창성 司令官에게 電話를 걸었다. 그리고 “이 時間 以後, 首警司 要員을 西氷庫로 連行해 調査해서는 안 된다”고 ‘宣戰布告’를 했다. 또한 그는 곧바로 이후락 중정部長에게 電話해 “保安司의 ‘油類 不正事件’을 徹底히 調査해달라”고 要請했다.
    保安司 油類 不正事件은 保安司 끗발로 配定받은 月 300餘 드럼의 剩餘 揮發油를 밖에 내다 팔다가 首警司 憲兵에게 들킨 事件이다. 이것은 一種의 反擊이었다. 진 將軍은 以後 김정렴 靑瓦臺 祕書室長에게 電話를 걸어 “來日 아침 閣下에게 報告드릴 事項이 있으니 時間을 잡아달라”며 面談을 要請했다.? ?
    다음 날 진 將軍은 筆者의 報告를 朴 大統領에게 傳했다. 朴 大統領은 처음에는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火를 냈지만 ‘事實은 나도 그런 報告를 받은 바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調査를 指示해서 拘束했는데 내가 어떻게 풀어줄 수 있겠느냐”면서 後續 人事 措置를 하는 것으로 事件을 一段落시켰다.


    朴 大統領은 강창성 保安司令官을 大田地域 3管區司令官으로 左遷시키고, 2軍團長이던 김종환 將軍을 後任 保安司令官에 內定했다. 윤필용·손영길 將軍 後續處理는 진종채 將軍에게 一任하고, 出監 問題는 金 大尉(筆者)에게 시키라고 指示했다. 後續 措置는 朴 大統領의 指示대로 終結됐다.
    한便 이후락 部長은 이 事件의 餘波로 어려운 處地에 놓이게 됐다. 大統領의 信任을 挽回하고자 ‘김대중 拉致 事件’을 일으켰다가 오히려 逆效果가 나 1973年 12月 責任을 지고 물러났다. 後任 中情部長에는 檢察 出身 신직수 氏가 任命된다. 윤필용 事件을 主導한 박종규는 1974年 8月 15日 陸英修 女史 被擊 事件으로 물러나고, 차지철이 後任 警護室長이 됐다. 結果的으로 事件 發生 2年 만에 加害者 박종규, 被害者 윤필용·손영길·이후락 等 朴 大統領 側近 모두가 權座에서 물러나고 靑瓦臺 周邊을 떠나 野人이 됐다. 한마디로 모두가 不幸해진 謀陷 事件이었다.


    2. 嫉妬의 化身들

    1972年 12月 末 손영길 大領이 1973年 1月 1日附로 准將 進級이 確實視되자 이후락 中情部長이 손 大領에게 電話를 걸어 朴 大統領의 許諾을 받고 中央情報部 2國葬으로 오라고 要請했다. 손영길은 이를 윤필용 首警司令官에게 報告했고, 윤필용은 自身이 데리고 있던 參謀長을 중정에 보낼 것인지를 決定하기 前 朴 大統領에게 報告해 승락을 받기로 했다.
    윤필용이 朴 大統領에게 意中을 打診하자 “將次 參謀總長을 해야 할 人物이니 程度를 걸어가도록 尹 將軍이 잘 指導하라. 情報機關에 가서는 안 되니 繼續 데리고 있으면서 잘 키워주라”고 指示했다. 이에 손영길은 首警司에서 윤필용의 參謀長으로 繼續 勤務하게 된다.
    손영길의 補職 問題가 朴 大統領과 이후락, 그리고 윤필용 사이에서 論議되자 靑瓦臺 周邊 權力者들 사이에 波長이 일었다. 손영길이 首警司 參謀長에 補職된 後, 그前까지 사이가 나쁘던 이후락과 윤필용의 關係가 좋아졌다는 事實이 알려지면서 박종규의 ‘파워’가 弱해지고 이후락 쪽으로 힘이 쏠리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
    박종규는 不快할 수밖에 없었다. 신범식이 윤필용 將軍의 ‘불경한 言動’을 報告한 것을 덮어뒀는데, 손영길의 補職 問題로 朴 大統領과 윤필용이 隱密히 對話를 나눈 것을 알고는 自身을 疏外시켰다고 여긴 것이다. ‘2人者’를 自負하던 박종규는 윤필용·손영길이 이후락 쪽으로 기울면서 權力 中心이 移動한다는 말까지 나오자 神經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고, 이런 狀況을 放置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
    이런 狀況에서 윤필용과 全斗煥 間에 深刻한 問題를 惹起할 만한 對話가 弄談 半, 眞談 半으로 이어졌다. 윤필용이 私席에서 全斗煥에게 “전두환 將軍, 앞으로 더 잘해야겠어! 朴 大統領이 손영길을 參謀總長으로 키우라는 當付가 있었으니 너는 더 奮發해야겠어”라고 忠告했다는 것이다. 전두환은 陸士 11期 中에서 自身이 가장 먼저 參謀總長이 되겠다는 抱負와 自負心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윤필용이 傳한 이야기는 靑天霹靂 같은 衝擊으로 다가왔다. 손영길과 전두환은 ‘血鬪’를 避할 수 없게 됐다.
    그 무렵 박종규는 윤필용·이후락·손영길이 가까운 關係로 發展하는 것에 對해 對策을 講究하기 始作한다. 이후락의 乘勝長驅에 不滿을 품은 신범식, 손영길의 파워에 밀리는 空輸1旅團長 전두환 將軍, 聯隊長을 마치고 서울에 와 待機 中이던 노태우 大領 等이 密接한 關係를 維持하며 權力의 離合集散을 銳意注視했다.
    이들은 1972年 11月 윤필용이 이후락에게 朴 大統領 後任 問題를 擧論한 事件을 알고 있었다. 신범식은 此際에 이후락을 除去한 뒤 中央情報部長 자리를 願하던 박종규가 中情部長으로 옮기면 自身이 重責을 맡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全斗煥도 自身의 앞날을 위해 윤필용과 손영길을 軍에서 逐出해야 할 必要가 있었다.

    疑問의 勳章 授與式
    그러던 1973年 1月 初, 손영길과 전두환의 競爭心을 부추기는 또 다른 事件이 發生했다. 윤필용은 10月 維新 功勞者 2名에게 勳章을 주겠으니 對象者를 推薦하라는 政府의 連絡을 받았다. 윤필용은 손영길과 전두환을 推薦했고, 이들은 1973年 1月 民防衛의 날에 中央廳에서 朴 大統領으로부터 勳章을 받게 됐다. 그런데 總務處 長官이 “1名만 2等 勳章을 주고, 다른 1名은 3等 勳章을 주게 됐다. 누구에게 2等 勳章을 주겠냐”고 問議하자 윤필용은 “2等 勳章은 손영길에게 주라”고 했다. 全斗煥이 섭섭하게 여긴 것은 不問可知.
    하지만 손영길이 大統領으로부터 勳章을 받는 行事가 갑자기 取消됐고, 박종규가 首警司를 訪問해 손영길에게 個人的으로 勳章을 傳達했다. 어떤 緣由 때문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一部 將校들 사이에는 全斗煥이 時期·嫉妬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全斗煥이 박종규에게 不平하자 박종규度 손영길이 大統領으로부터 直接 勳章을 받는 것이 適切하지 못하다고 判斷해 손영길을 勳章 授與 行事場에 參席하지 못하게 措置하고, 勳章을 個人的으로 傳達한 것으로 推測된다. 이 ‘事件’李 3月 8日 일어난 윤필용·손영길 事件과 直接 關聯이 있는지에 對해서는 確實하게 아는 사람이 없고 推測만 可能할 뿐이다.



    3. 손영길 vs 全斗煥

    1972年 中旬 陸軍本部에서는 將軍 人事를 하면서 손영길·전두환 두 名의 大領을 將軍 자리에 補職시키고, 1973年 1月 1日 將軍 進級을 豫告하는 人事를 했다. 卽 朴 大統領을 最側近에서 輔弼해 온 首警司 30大隊長 出身 손영길 大領은 首警司令部 參謀長에, 전두환은 金浦 空輸 第1 旅團長에 補職시켰다.
    陸軍本部는 1972年 將軍 進級 審査에서 처음에는 陸士 11期 中 2名만 將軍으로 進級시킬 豫定이었으나, 손영길이 大領으로 進級할 때 4名이 함께 特診했으니 김복동, 최성택 大領도 將軍으로 進級시켜 달라는 建議가 있었다. 그 結果 1973年 1月 1日, 陸士 11期 先頭走者 4名(손영길·전두환·김복동·최성택)이 모두 將軍으로 進級한다.
    4名 中 莫强한 파워를 가진 1人者는 朴 大統領 專屬副官 出身 손영길이었고, 2人者는 전두환이었다. 朴正熙 大統領이 7師團長을 할 때 손영길 中尉는 最優秀 中隊長으로 인정받았고, 1961年부터 國家再建最高會議 議長인 朴正熙 少將의 專屬副官으로 勤務하다가 少領으로 進級해 靑瓦臺 外郭 境界를 警護하는 30大隊長을 4年이나 맡은 바 있다.
    전두환은 陸士 時節엔 蹴球 잘하는 生徒 程度로 여겨졌는데, 任官 後에는 同期들 中 頭角을 나타내기 始作했다. 新東亞 2月號에도 밝혔지만, 전두환은 손영길 德分에 最高會議 祕書室 民政祕書로 勤務할 수 있었고, 1963年 쿠데타 陰謀 事件 때는 손영길 少領의 도움으로 訓放된 적도 있다. 1967年 손영길 中領이 陸軍大學에 入學하면서 전두환 中領을 30大隊長 後任者로 推薦하며 朴 大統領에게 紹介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兄弟와 같은 友情으로 서로를 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1973年 1月 1日 함께 准將으로 進級한 瞬間부터 熾烈한 競爭이 始作됐다. 朴 大統領이 1973年 1月 初 두 사람을 靑瓦臺로 招請해 進級 祝賀를 해줬을 때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릴 程度의 義理 있는 親舊처럼 보였지만 속마음은 正反對였다.

    全斗煥·盧泰愚 深夜 會同
    전두환은 2個月 前 신범식이 朴 大統領에게 報告한 ‘不敬(不敬) 事件’과 ‘統一情事 事件’이 곧 불거질 것임을 豫想하고 있었고, 朴 大統領이 손영길을 參謀總長 감으로 키우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 競爭心을 갖게 됐다. 自身이 쿠데타 陰謀에 휘말릴 것임을 눈치채지 못한 손 將軍은 前 將軍에게 “朴 大統領을 잘 모시자. 兄弟같이 友情 變치 말고 힘을 합쳐 大韓民國을 지키는 間性이 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얼마 안 지나 윤필용이 拘束된 3月 8日 손영길은 全斗煥에게 電話를 걸어 “어떻게 된 건지 만나서 이야기나 해보자”고 했지만 前 將軍은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고, 部隊 일이 많아 만날 時間이 없다”고 말했다. 그제야 손 將軍은 前 將軍이 이 事件에 깊이 關與했으며 自身을 意圖的으로 避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 날 밤 전두환은 노태우 大領 집에 갔다. 중정 監査室 搜査課長이던 송석근 少領이 노태우의 집에 갔다가 거기서 전두환을 봤다고 손영길에게 알려줬다(248쪽 箱子記事 參照).? ?
    윤필용 拘束 다음 날 손영길은 最前方 15師團 副師團長에 補任돼 쿠데타 陰謀 事件에서 비켜서는 듯했으나 1週日 後 電擊 解任되고 保安部隊員들에 依해 서울로 押送돼 西氷庫에 拘束된다. 西氷庫에서 保安司 參謀長 김귀수 將軍이 “自進해서 轉役志願書를 쓰면 모든 걸 容恕할 테니 轉役書를 쓰라”고 强要하자 손영길은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 轉役書를 쓰느냐. 絶對 쓸 수 없다”고 맞섰다.
    윤필용의 境遇는 大統領에 對한 佛經(不敬)에 該當하는 말을 했다는 謀陷이라도 있었지만, 손영길은 調査를 받아야 할 何等의 理由가 없었다. 結局 몇몇 사람의 謀陷에 밀려 抑鬱하게 轉役을 當하고 말았다. 問題가 된 ‘統一情事 事件’은 다음 回에 擧論하겠지만, 손영길은 40餘 年이 흐른 2015年 7月 大法院으로부터 無罪 確定을 받고 補償도 받았으니 多幸이라고 생각한다.?


      

    4. 陸士 11期 파워게임

    陸士 11期들 間의 파워게임은 家族들 間에 더 甚했다. 軍人 社會에선 同期生 間에도 軍番이 빠른 軍人이 上級者 待遇를 받는데, 이는 軍人 家族 間에도 마찬가지였다. 男便의 軍番이나 階級, 파워에 따라 아내들 사이에 男子 世界보다 더 嚴格하고 敏感한 序列이 形成되고, 때로는 甚한 時期와 嫉妬가 불거지기도 했다.
    特히 전두환·盧泰愚·김복동의 家族 間 競爭이 甚했다. 男便의 階級이 올라가면서 家族 間 競爭이 더 熾烈해져 男便들 間에 不和를 誘發하기도 했다. 어떤 家族은 自尊心이 유별나게 剛해 男便을 곤란하게 하는가 하면, 競爭에 밀리는 男便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아내도 있었다. 保安司令部 存案室에는 이러한 記錄이 只今도 남아 있을 것이다.
    陸士 11期 同期生 家族들은 서울 한남동 손영길 大領 집(當時 최성택 大領 집과 붙어 있었다)에 모여 日本語 工夫를 같이 하는 等 거의 每日 만났다. 當時 筆者는 中尉로 서울地區 506保安部隊에 勤務할 때였다. 筆者가 大隊長으로 모신 陸士 13期 신재기 中領 夫人의 紹介로 손영길 大領 집을 자주 訪問하면서 全斗煥, 김복동, 盧泰愚, 최성택 大領 家族들과 알게 됐다. 特히 손영길, 최성택 大領 夫人들과 가까이 지냈는데, 그들의 要請으로 손 大領 집에서 筆者의 約婚女를 인사시킨 일도 있고, 몇몇 夫人은 1971年 말 鍾路禮式場에서 치른 筆者의 結婚式에 賀客으로 參席하기도 했다.
    이런 因緣으로 婦人들 사이에 不便한 對話를 나누는 것을 直接 目擊하기도 했고, 이야기를 傳해 듣기도 했다. 男便 간 序列이 바뀌면 軍人 家族 序列도 뒤바뀌기 때문에 家族 間에 猜忌, 嫉妬, 葛藤이 생기기 쉽고 때로는 是非가 빚어지기도 했다. 特히 전두환 前 大統領 夫人 이순자 女史와 노태우 前 大統領 夫人 김옥숙 女史 사이가 그러했다.
    盧 前 大統領은 全 前 大統領보다 1963年 少領 進級 때부터 1988年 大統領이 될 때까지 늘 한 해씩 進級이 늦었고, 專 前 大統領의 後任 補職을 여러 番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순자 女史는 김옥숙 女史를 ‘下級者 家族’처럼 對했고, 김옥숙 女史는 數十 年 동안 受侮를 當하면서 마음苦生을 많이 했다.
    그러다 1988年 노태우가 大統領에 當選되자 狀況은 바뀌어 김옥숙 女史가 그동안 當한 서운한 感情을 드러냈다. 이순자 女史에게 “나는 當身과 다르다. 當身은 體育館 出身 大統領 夫人이고 나는 全 國民이 뽑은 直選 大統領 夫人이야! 옛날에는 많이 當했지만 只今은 아니야!” 라고 쏘아붙인 이야기가 言論에 公開되기도 했다.
    數年 前 祕資金 事件으로 두 前職 大統領의 巨額 恥部에 國民이 憤怒할 때, 筆者는 當時 大統領의 夫人들에게도 많은 責任이 있다고 생각했다. 男便에 對한 이들의 影響力은 普通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比較가 되지 않을 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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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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