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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함께하면 길은 뒤에 생긴다”|신동아

“여럿이 함께하면 길은 뒤에 생긴다”

신영복과 27年 交遊한 ‘더불어숲’ 사람들

  • 이혜민 記者 | behappy@donga.com

    入力 2016-02-19 11:4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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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監獄으로부터의 思索’ 獨自 모임
    • “이웃에 對한 關心과 愛情 특별했던 분”
    • 燒酒 ‘처음처럼’ 글씨로 ‘처음처럼’ 奬學會
    신영복(1941~2016) 성공회대 碩座敎授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가 많다. 1月 15日 그가 持病으로 世上을 떠나자 葬禮式場을 찾은 弔問客이 8500餘 名에 이르렀고, 聖公會大 追慕展示館엔 追慕葉書 1800餘 腸이 내걸렸다. ‘一般人’으로선 特別한 葬禮였다.
    申 敎授의 足跡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남아 있다.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인 그의 冊을 아끼고 그의 생각을 따르던 ‘더불어숲’ 會員들의 마음은 特히 더 애틋하다. 20年 넘게 그와 交遊해온 더불어숲 會員들은 故人의 夫人과 외아들 곁에서 喪制(喪制) 노릇을 했다. 會社에 休暇를 내고 子女를 親戚에게 맡기고 달려와 弔問客을 맞고, 屍身을 運柩하고, 影幀寫眞을 들었다. ‘言約은 江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처럼 故人이 좋아하던 글句가 적힌 懸垂幕을 聖公會大 外壁에 건 것도 그들이다.



    나이 不問 ‘親舊 사이’

    1月 28日 서울 中區 南山골公園 近處에 있는 더불어숲 事務室에서, 그리고 2月 3日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利文學會’에서 모임에 參與해온 이들을 만났다. 김범회(41), 배기표(45), 沈銀河(44), 유연아(42), 윤미연(46), 이윤경(41), 장영주(60), 座經宿(66) 氏가 그 ‘나무’들이다. 더불어숲에선 草創期 會員들을 ‘오래된 나무’, 갓 들어온 이들을 ‘어린 나무’라고 부른다. 윤미연 氏는 “先生님(더불어숲 會員들은 신영복 敎授를 이렇게 부른다)은 自身에 對한 偶像化를 警戒하며 ‘엑스트라도 그 사람에게 앵글을 맞추면 다 主人公’이라고 하셨다”면서 “우리는 先生님을 尊敬하는 弟子와 讀者들로, 그분과 좋은 親舊 사이였다”고 했다.
    더불어숲 모임은 申 敎授가 出所한 뒤 펴낸 ‘監獄으로부터의 思索’(1988年)을 읽고 感動을 받은 讀者와 知人들이 모이면서 始作됐다. 申 敎授는 1989年부터 글쓰기, 書藝, 講演을 契機로 그들과 만났다. 1990年부터는 週末에 北漢山을 올랐고, 1996年 봄부터는 自宅 近處인 서울 牧童 파리公園에서 모임을 이어갔다.
    모임이 擴張된 건 1996年 스승의 날에 二連窓 氏가 더불어숲 홈페이지(www.shinyoungbok.pe.kr)를 膳物하면서부터다. 인터넷 使用이 活性化한 1998年부터 홈페이지 利用者가 늘었고, 온라인에서 만나던 이들이 그해 江原道 鐵圓으로 逍風을 가면서 定期 모임이 始作됐다. 以後 簡單한 모임은 ‘逍風’, 버스를 貸切해서 가는 모임은 ‘大風’이라 불렀다. 初期에는 洞네에서부터 10餘 里 山坂 길을 걷고, 도르래에 매달려 五臺山 자락의 내린천을 건너, 申 敎授의 大學 後輩인 신남휴 氏의 個人山房(開仁山房)으로 大豐을 가기도 했다. 以後 더불어숲 홈페이지에 실린 글은 2001年 ‘나무가 나무에게’라는 冊으로 엮일 만큼 豐盛해졌다.
    座經宿 氏는 留學生 男便과 獨逸에 살다 歸國한 뒤 경희대 앞의 가게에서 ‘더불어 한 길’이라고 쓴 申 敎授의 글씨를 본 것을 起點으로 그의 冊과 더불어숲 홈페이지의 魅力에 푹 빠졌다. 1997年 勇氣를 내 홈페이지에 公知된 退村 逍風에 同參한 因緣으로 會員이 됐다. 
    “逍風이라고 해서 갔더니 會員들이 빙 둘러앉아 新聞紙 깔고 카레라이스를 먹더라고요. 그 素朴한 만남이 좋아서 ‘제가 사는 大田에 오시라’고 했어요. 홈페이지에 이 消息을 公知한 뒤 30餘 分이 저희 집에 오셔서 1泊2日을 보냈지요. 會員들이, 監獄에 있던 先生님께 6, 7年間 글씨를 가르쳐준 丁香 조병호 先生 宅에 들른 뒤 저희 집에 와서 부럼 까먹고, 申 先生님 講義를 듣고 그랬죠. 좋은 사람들이 좋은 기운을 주니까 참 좋았습니다.”


    “自己 評價는 서리처럼 차갑게”

    2001年 合流한 배기표 氏도 冊과 홈페이지를 보다 逍風에 參與한 뒤 ‘그루터기(스태프)’ 活動을 해왔다. 김범회, 이윤경 氏처럼 申 敎授의 聖公會大 講義를 聽講하다 모임에 들어온 이도 많다. 심은하 氏는 大學 學報社 時節 申 敎授를 인터뷰한 契機로 因緣을 이어온 境遇.
    더불어숲은 5, 6個의 小모임으로 構成된다. 글씨 쓰는 모임 ‘鉏餘回’는 2000年代 初부터, 글 읽기 모임 ‘鉏三毒’은 1990年代 末부터 꾸려졌다. 새로 오는 이들과 冊을 읽는 모임 ‘마중물’, 申 敎授의 冊을 읽으며 主題別로 分類 作業을 하는 ‘言約’은 3, 4年 前 始作됐다.
    신영복 敎授는 新年 山行과 같은 年中行事엔 參與했지만 小모임에 主導的으로 參與하지는 않았다. 모임의 이름을 짓거나 助言하며 ‘觀察者’로 머물렀다. 다만 緖餘會에서는 “글씨는 自身의 모습을 反映하므로 날카롭지 않고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쓰되, 自己 글은 가을서리처럼 차갑게 評價하라”고 當付하며 展示를 準備하는 모든 弟子의 房서(傍書, 作品 解說)를 直接 써줬다. 
    現在 오프라인 活動에 積極 參與하는 더불어숲 會員은 80餘 名, 申 敎授의 學校長을 치를 때 自願奉仕에 나선 會員은 200餘 名이다. 더불어숲 다음 카페(cafe.daum.net/together.forest) 會員까지 合하면 그 數는 500餘 名으로 늘어난다. 會員들의 面面은 勞動運動家부터 企業 CEO까지 多樣하다. 記者가 만난 이들은 大槪 主婦, 敎師, 大學 講師와 敎授다. 나무들은 “처음 나왔을 때 先生님과의 因緣을 簡略하게 紹介할 뿐 本人의 背景에 對해선 仔細하게 밝히지 않아 會員들의 職業을 알기까지는 時間이 걸린다”고 傳했다. 유연아 氏는 “사람과 사람의 關係 속에서 배우고 싶어 하는 이들의 모임이라 會員들이 처음 온 분들에게도 마음을 활짝 연다”고 덧붙였다.
    더불어숲은 모임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 ‘親切하게’ 對하는 걸 原則으로 한다. 會費를 받지 않고, 申 敎授의 옆자리 같은 ‘床石(上席)’도 讓步한다. 좋은 冊도, 좋은 글씨도 나눈다. 男女老少 가리지 않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엄마들도 歡迎한다. 
    “2008年에 처음 갔는데 애들을 데리고 갔어요. 膳物交換食餌 있다기에 女性會에서 만든 비누를 가지고 갔는데, 先生님과 交換하고 싶은 마음에 先生님 앞으로 허겁지겁 뛰어가 第 비누와 先生님의 ‘처음처럼’ 글씨가 쓰인 종이를 맞바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會員들이 新入인 제가 그 자리에 가도록 配慮해준 것이었어요(웃음).”(윤미연)
    이런 態度는 나무들이 申 敎授의 面貌를 보고 배우면서 더욱 確固해졌다. 나무들은 自身들이 申 敎授를 처음 만났을 때 經驗한 ‘配慮’를 新入 會員들에게도 傳하고 싶어 했다.
    “2003年 大學院에 다닐 때 聖公會大에 청강 가서 처음 뵈었어요. 人事를 드리니 반겨주시면서 硏究室에서 손수 복숭아를 깎아주시더라고요. 果刀가 없어 커터로…. 그러고는 복숭아 代가 맛있다면서 그건 本人이 드시고, 眞짜 맛있는 部分은 저희한테 주시더군요.”(이윤경)
    “先生님이 新入 會員들에게 주는 膳物로 愛用한 것은 쥘부채예요. 지난해에만 健康이 안 좋으셔서 다른 弟子가 써줬고, 그前까지는 先生님이 直接 負債를 사와서 글씨를 써주셨죠.”(좌경숙)
    會員들 누구나 申 敎授의 ‘보살핌’에 對한 記憶이 있다. 女性學者 오한숙희 氏가 그를 ‘母性(母性)을 가진 男子’라고 表現한 것도 그런 理由에서일 것이다. 유연아 氏는 “先生님을 잘 모르던 男便이 2006年 先生님과 바이칼 湖水 旅行을 다녀오곤 ‘先生님은 冊보다 實際 모습이 더 좋다’ 하더라”고 傳했다.


    ‘母性을 가진 男子’

    “露天 이구영 先生 省墓를 가는 날, 申 先生님께서 다른 사람들 나눠 쓰라며 餘分의 帽子를 가져오셨어요. 시골로 逍風을 갈 때는 샌들도 여러 켤레 챙겨오셨죠.”(이윤경) 
    “더불어숲 사람 50, 60名이 室內에 모이면 先生님이 그 자리에 오시기 前에 슬그머니 신발을 整理하고 들어오세요. 그 모습을 보곤 ‘나는 先生님 못 따라가겠다’ 싶었어요.”(심은하)
    “바이칼 湖水에 널브러진 쓰레기를 1時間 동안 酒友시던 모습도 記憶나네요. 여럿이 가면 늘 ‘社會福祉 하는 거예요’라며 밥도 사주셨지요.”(좌경숙)
    “中國 시안碑林(西安碑林) 博物館으로 逍風 간 적이 있어요. 그날 몸이 아파서 先生님 講義를 듣지 못해 先生님께 지나가는 말로 ‘아쉽다’고 했는데, 그 講義를 버스 안에서 다시 해주셨습니다.”(장영주)
    申 敎授는 많은 이에게 글씨를 써주며 情을 傳했다. 海南 松枝初校 抒情分校, 江陵 許筠 許蘭雪軒 記念館, 朴達재, 벽초 洪命憙 文學碑와 生家, 五臺山 상원사, 全州 이세종 烈士와 김개남 將軍 追慕碑, 서울市長실, 烽下마을 盧武鉉 大統領 墓石을 비롯해 一般 民家에도 그의 글씨가 있다. 代價 없이 써주는 境遇가 많았다. 더러 代價를 받기도 했는데, 燒酒 ‘처음처럼’의 글씨를 써서 聖公會大에 ‘처음처럼 奬學金’을 造成한 게 그런 境遇다. 더불어숲 會員들의 結婚式 때도 글씨를 膳物했다. 더불어숲에서 因緣을 찾은 배기표·심은하 夫婦도 ‘함께 여는 새날’이란 글씨를 膳物 받아 家譜(家寶)로 여긴다.
    “親舊와 함께 先生님께 ‘맛있는 것 사주세요’ 하고는 先生님을 뵌 적이 있어요. 그런데 밥을 먹은 뒤 先生님이 ‘글씨 必要해서 만나자고 한 거 아닌가요?’라며 글씨 膳物을 주시더라고요. 그저 食事만 하려고 했던 건데….”(이윤경) 
    “2000年 江原道 旌善으로 逍風을 다녀온 後 先生님을 찾아뵈었어요. 그前에 몇 番 메일을 드렸을 뿐인데도 제 이름을 記憶해주시더군요. 나중에 ‘꽃이 되어 바람이 되어’란 글씨를 써주시며 ‘유연아는 꽃이 되면 좋겠다’고 激勵하셨어요.”(유연아)





    社團法人으로 敎育·硏究 事業

    公演企劃者 탁현민 氏가 追悼辭에 ‘나만 先生님과 特別한 關係인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과도 다 그렇더라’고 썼을 程度로, 申 敎授는 많은 이를 각별하게 對했다. 警備員 服裝의 한 사내가 새벽녘 葬禮式場에 찾아와 默念을 하고 가기도 했다. 申 敎授가 20代 때부터 交遊한 少年 모임 ‘請求回’의 한 會員과 함께 申 敎授의 윗집에 살던 아이들, 只今 사는 아이들도 弔問을 왔다.
    “윗집 아이들이 하도 시끄럽게 뛰기에 先生님이 하루는 놀이터에서 만난 그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對話하면서 親해졌대요. 勿論 그 後에도 아이들은 많이 뛰었는데, 先生님은 ‘아는 아이가 뛰면 덜 시끄럽다’고 하시며 허허 웃으셨어요.”(이윤경)
    “先生님은 當身이 飜譯한 ‘루쉰(魯迅)展’에 ‘루쉰의 삶 全體를 꿰뚫는 意志는 良心의 凝結體다, 良心은 이웃에 對한 關心이며 愛情이다, 흙과 더불어 살고 이웃과 더불어 살고 祖國과 民衆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人間에 對한 깊은 理解가 루쉰이 지켜낸 良心의 內容이었다’고 쓰셨어요. 저는 先生님이 지닌 ‘關係’의 源泉이 바로 그 ‘良心’이라고 생각합니다.”(배기표)
    애初 더불어숲은 ‘모임이 오래가고 깊이 갈 수 있도록 모임의 形式을 갖추자’는 意味에서 社團法人을 만들었고, 1月 23日 創立大會를 열 計劃이었지만 申 敎授가 危篤해 行事가 保留됐다. 서울 中區 더불어숲 事務室은 지난해에 會員들이 마련한 곳으로, 社團法人 事務室로 쓰일 豫定이다. 앞으로 ‘社團法人 더불어숲’은 ‘여럿이 함께하면 길은 뒤에 생긴다’는 申 先生의 뜻을 받들어 讀者, 聖公會大 敎職員, 人文學濕原, 勞動大學院, 더불어숲, 各 地域 團體 等과 함께 다양한 敎育·硏究 事業을 벌일 計劃이다.
    “돌아가시기 8日 전 先生님을 찾아뵈었어요. 힘이 없어서 말씀도 잘 못하고 그저 한 사람, 한 사람씩 凝視하셨는데, 우리가 우니까 ‘울지 말아요, 다시 만나면 되지’ 하셨어요…. 先生님이 가신 뒤에도 더불어숲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고 정답게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드릴 겁니다.”(장영주)



    신영복 敎授가 남긴 冊들
    신영복 前 성공회대 敎授는 慶南 密陽에서 태어나 서울대 經濟學科와 大學院을 卒業한 뒤 숙명여대 講師, 陸軍士官學校 敎官으로 經濟學을 가르쳤다. 1968年 통일혁명당 事件으로 拘束돼 無期懲役을 宣告받았다. 1988年 特別假釋放으로 出所했고 1989年부터 성공회대 社會科學部 敎授로 學生들을 가르쳤다. 2006年 停年退任 뒤 夕座敎授를 지냈다. 
    ‘나무야 나무야’(1996) ‘더불어숲’(1998) ‘신영복의 葉書’(2003) ‘講義-나의 동양古典 讀法’(2004) ‘邊方을 찾아서’(2012) ‘談論’(2015) 等의 著書는 그가 世上과 疏通하는 道具였다. 特히 20年間 監獄에서 家族들에게 보낸 封緘葉書를 묶은 ‘監獄으로부터의 思索’(1988)은 ‘큰 苦痛 속에서 길어 올린 眞率함으로 가득한 散文集’이란 評을 받으며 오랜 歲月 많은 사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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