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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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明成皇后
朝鮮 高宗의 王妃
大韓帝國의 初代 冊封 皇后
在位 1866年 3月 20日 ~ 1895年 10月 8日 (陰曆)
前任 철인왕후 金氏
後任 순정효황후 尹氏
이름
민자영 (閔玆暎)
別號 명성태皇后(明成太皇后), 閔妃(閔妃)
시호
孝子怨聲···명성태皇后
  • 효자원성정화陜川 홍공성덕제휘혈목
    명성태皇后
    (孝慈元聖正化合天 洪功誠德齊徽烈穆
     明成太皇后)
尊號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
(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
揮毫 제휘열목(齊徽烈穆)
電弧 景孝殿(景孝殿)
身上情報
出生日 1851年 11月 17日 ( 1851-11-17 )
出生地 朝鮮 京畿道 여주목 근동면 閃絡리 私邸
死亡日 1895年 10月 8日 ( 1895-10-08 ) (43歲)
死亡地 景福宮 건청궁 鯤녕합 옥호루 一帶
家門 餘興 閔氏
父親 女性府院君 민치록
母親 한창夫婦인 寒山 李氏
配偶者 高宗
子女 1男 (4男 1女)
純宗
陵墓 홍릉 (洪陵)
京畿道 南楊州市 홍유릉로 352-1

明成皇后 閔氏 (明成皇后 閔氏, 1851年 11月 17日 ( 陰曆 9月 25日 ) ~ 1895年 10月 8日 ( 陰曆 8月 20日 ))는 朝鮮의 26代 王이자 大韓帝國 의 初代 皇帝인 高宗 (高宗)의 王妃이자 冊封皇后 이다. 인현왕후 의 生父인 민유중 의 後孫으로 아버지는 司䆃寺 添丁 으로 事後 議政府 領議政 , 女性府院君에 追封된 민치록 이고, 어머니는 監考黨 寒山 李氏 이다. 兒名은 自營(玆暎) [1] , 本貫은 餘興 . 出身地는 京畿 餘興 이며, 驪州 나들목 隣近에 生家 公園이 있다. [2] [3]

高宗 의 整備로 1871年 첫 王子를 5日 만에 잃고, 최익현 等과 손잡고 흥선大院君 의 干涉을 물리치고 高宗의 親政을 誘導했다. 閔氏 戚族을 起用함으로써 勢道政權을 부활시켰으며, 1882年 壬午軍亂 以後 日本 한테 겨냥하는 牽制를 위해 淸나라 의 支援에 依存하다가 1894年 淸日戰爭 에서 淸나라가 敗北당한 以後에는 러시아 를 끌어들여 日本을 牽制했다. 맨 처음에는 個項에 微溫的이었으나, 漸進的인 開化施策을 통해 親日 性向을 띤 急進 開化派의 開化政策에 制動을 걸었다. 그러다가 駐朝鮮 日本公使 미우라 고로 의 公募에 依해 日本人 兵士와 浪人들에게 암살당했다( 乙未事變(乙未事變) , 1895年). 事後 大韓帝國 이 成立되면서 皇后로 追封되었다. [4] 正式 諡號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 (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이다. [5] 居住地는 興宣大院君이 景福宮을 重建할 때 지어진 건청궁 에서 主로 生活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監考黨

명성태皇后 閔氏 京畿道 驪州市 근동면 (近東面) 閃絡리(蟾樂里) 私邸 [1] [6] (現在의 驪州市 능현桐 250-1 [7] )에서 민유중 의 6代孫으로 司䆃寺 僉正이었던 민치록 (閔致祿)의 再娶夫人 寒山 李氏의 딸로 태어났다. [8] 어릴 적 이름은 自營이었다. [9]

아버지 민치록의 前 婦人 吳氏에게서는 子女가 없었던 것으로 推定되며, 寒山 李氏에게는 1男 3女의 兄弟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女만이 남았다. [8] 민유중 의 아들 민진후 의 5代孫으로 할아버지 민기현 禮曹 參判 과 開城府留守를 지냈으나 아버지 민치록 은 情3品 사도社 添丁 에 이르렀고 晩年에 落鄕하여 驪州 에서 선영을 돌보며 消日하고 있었다. 뒤에 代를 잇기 위해 위해 11寸 아저씨인 민치구 의 아들 민승호 를 아버지 민치록의 養子로 들였다. [8] 閔升鎬는 興宣大院君의 夫人인 여흥부大夫人 閔氏의 親同生인데, 1874年 權力을 爭取하려는 興宣大院君에 依해 爆彈으로 살해당했다는 說이 있다.

肅宗 의 繼妃 인현왕후 는 그女의 5代 고某뻘로, 5代祖 민진후 의 누이였다. 生家 監考黨 은 여양府院君 閔維重의 墓地를 지키기 위해 지은 墓幕집으로 以後 민유중 의 宗孫들에 依해 管理되었다. 그女의 아버지 민치록은 門蔭으로 나가기에 앞서 監考黨 에 居住하며 閔維重의 墓를 지키는 일을 했다.

肅宗 인현왕후 의 親庭이라 했으나 그女의 집안은 貧困하였고, 京畿道 驪州의 山골 민유중 의 墓地 近處에서 지냈다. 그女의 生家 近處 200m 즈음에는 朝鮮 前期의 文臣인 임원준 의 墓가 자리잡고 있다.

幼年期 [ 編輯 ]

明成皇后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 민치록 으로부터 學問을 배웠는데, 《小學》(小學)·《 梟獍 》(孝經)·《女訓》(女訓) 等을 즐겨 읽었고, 特히 歷史를 좋아하여 治亂과 國家의 前古에 밝았다고 한다. 오늘날 그女의 工夫房 자리에는 명성황후 誕降 九里非(明成皇后誕降舊里碑)(生家 入口 오른쪽)가 세워져 있다. 9歲 때인 1858年 아버지 민치록이 죽자 襲殮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아 周圍 사람을 놀라웁게 했다. 金東仁의 歷史小說 《 雲峴宮의 봄 》에서도 明成皇后는 아버지 민치록이 으로 자리에 누웠을때에 看護를 한 孝女로 描寫되고 있다.

아버지가 죽은 뒤 閃絡리 私邸에서 漢陽 監考黨 으로 옮겨 홀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監考黨은 인현왕후 의 史家로서 민치록의 所有였으며, 이름은 英祖 가 하사했다. [10] 兄弟와 父母를 여읜 孤兒인 데다가 依支할 오라비度 없었다. 그러나 以後 가까운 親戚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成長했다. [11]

흥선大院君

王妃 揀擇 [ 編輯 ]

1866年 어린 민자영은 王妃 揀擇에 參與하게 된다. 민자영이 揀擇되어 王妃가 되는 過程은 《童穉五年病因三月 嘉禮都監儀軌》(同治五年丙寅三月嘉禮都監儀軌) [12] 에 仔細히 說明되어 있다. 于先 1866年 2月 15日 ( 陰曆 1月 1日 ) 大王大妃 조氏 가 朝鮮에 있는 12歲 ~ 17歲 사이의 모든 處女들에게 禁婚令을 내린다. [11] 그리고 陰曆 2月 25日 初揀擇을 行하였고 [13] , 김우근의 딸, 조면호의 딸, 서상조의 딸, 유초환의 딸 等과 더불어 再揀擇에 들어갔다. [11] [14] [15] 王妃로 定해진 때는 3月 6日의 三揀擇에 뽑힐 때였으며, 3月 21日 男便이 될 高宗이 雲峴宮에서 明成皇后를 데리고 昌德宮으로 돌아오는 親迎(親迎)을 擧行했다. [15] [16] 아버지 민치록은 王의 丈人에게 追贈하는 禮에 따라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에 追贈되었고, 아버지의 本部인 海州吳氏는 해령府夫人에 追贈되었으며, 生母 監考黨 閑散李氏는 한창府夫人의 爵位를 받았다. [15] [17] 이어 민치록에게는 예전에 따라 女性府院君에 追封되었다.

한便 흥선大院君 高宗 이 卽位하기 前에 安東 金氏 김병학 의 딸, 김병문 의 딸 中에서 둘째 아들의 配匹을 定하기로 祕密 默契를 締結했으나, 約束을 뒤집게 되면서 김병학 等 大院君을 支持했던 一部 安東 金氏 勢力이 등을 돌리게 된다. 王妃는 그 點을 利用하여, 後에 흥선大院君 을 牽制할 때 安東 金氏 一家와 힘을 모은다.

王妃 時節 [ 編輯 ]

入闕과 興宣大院君과의 對立 [ 編輯 ]

男便 高宗

그러나 明成皇后가 入宮할 무렵엔, 15歲의 男便 高宗은 이미 後宮 貴人 李氏 를 寵愛하고 있었다. [18] [19] 家禮를 올린 첫 날 男便 高宗은 王妃의 處所엔 들지 않고 貴人 李氏 의 處所에 들었다. 그러다 1868年 4月 李氏가 완화군 을 낳자, 興宣大院君은 또 高宗 의 첫 아들인 완화군 선 과 그를 낳은 貴人 李氏 를 寵愛하였다.

明成皇后는 安全과 權力의 基盤을 다지기 위해 민승호 等 一家 親戚, 媤아버지 흥선大院君 이 失脚시킨 풍양 조氏의 조영하, 安東 金氏의 金炳基, 興宣大院君의 兄인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書院 撤廢에 不滿을 품고 있었던 儒林의 巨頭 최익현 等과 提携했다. [20] [21] 이와 같이 자리를 다지던 明成皇后는 차츰 高宗의 寵愛를 받아 1871年에 아이를 낳았으나, 王子는 肛門 閉塞으로 인해 5日 만에 죽어버렸다. [19] [22] [23] 王子의 죽음을 두고 閔氏는 興宣大院君이 王子에게 달여준 藥에 山蔘 을 많이 넣은 일을 疑心했다. [20]

高宗의 親庭 誘導 [ 編輯 ]

明成皇后는 大院君의 執權에 功을 세웠음에도 축출당했던 趙大妃 의 親族인 조성하 , 조영하 兄弟와도 입을 모았고, 흥선大院君 과 關係가 圓滿하지 못하던 그의 兄 흥인군 過度 입을 모았다. 또한 書院 撤廢 過程에서 등을 돌리게 된 儒學者 勢力과도 交流하여 최익현 等을 包攝해 왔다. 崔益鉉은 1873年 10月 賃金이 高宗인데 大院君이 攝政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上疏를 올렸다가 大院君 系列의 彈劾을 받고 해임당했다. 그러나 明成皇后는 崔益鉉의 뒤를 支援하였고 崔益鉉은 堂上官인 鄭3品 通政大夫 敦寧府 都正으로 올랐으며, 崔益鉉을 除去하려는 大院君 系列의 陰謀를 막아내기도 했다. 大院君에게 무시당하던 宗室 一部를 包攝하였고, 大院君이 黨爭을 根絶한다는 名分 아래 남인 北人 을 採用하자 여기에 反撥한 老論 界 團體 亦是 包攝에 成功하였다.

이어 明成皇后는 崔益鉉을 다시 好調 參判 으로 올려주었으며, 崔益鉉은 11月에 다시 흥선 大院君을 糾彈하는 上疏를 올렸다. 高宗과의 論議 끝에, 1873年 11月엔 雲峴宮에서 宮闕로 出入하는 大院君의 專用 門을 閉鎖하였다. 이로써 大院君의 11年間의 干涉은 終結되었다. 大院君은 洋酒 時鈍면 곧銀골(直谷)로 물러났으나, 隱退 以後에도 大院君은 끊임없이 復歸를 꿈꾸었고 明成皇后 및 閔氏 一族과 隨時로 葛藤하였다.

흥선大院君 退陣과 權力 鬪爭 [ 編輯 ]

1873年에는 최익현 으로 하여금 高宗의 親庭과 흥선大院君 의 退陣을 要求하는 上書를 올리도록 했다. 22歲로 成人이 된 國王을 두고 攝政의 名分이 없었던 大院君은 結局 政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20] 이어 흥선大院君 勢力의 최익현 攻擊을 憂慮하여 一時的으로 流配보냈다가 다시 登用할 것을 高宗에게 상주하였다.

1874年 2月에는 둘째 아들 이척(李?, 後날의 純宗 )을 낳았으며, 이듬해 2月 이척은 王世子로 冊封되었다. [19] [24] [25] 흥선大院君 系列은 최익현 을 暗殺하려 했고, 王妃는 背後에서 최익현 을 一時的으로 流配보낸 뒤 다시 登用하여 승진시킨다.

흥선大院君 을 權力에서 排除한 明成皇后는 開化派를 大擧 登用하였다. [26] 對外的으로도 開放理論을 包容하여 鎖國을 버리고 1876年 丙子 修好 條約 을 締結하는 等 外國에 門戶를 開放하게 되며 김홍집 , 어윤중 , 김윤식 等 開化派를 支援하였다. 이런 한便으로는 開化派와 關係가 圓滿하지 못했다는 主張도 있다. 유길준 에 依하면 그女가 開化派를 排除하려는 謀議를 꾸미다가 大院君 卽 그女의 媤아버지에게 發覺되었다 [27] 고 한다.

이에 緊張한 明成皇后는 友好勢力을 重用하여 勢力을 强化한다. 1876年 江華島條約(朝日修好條規)을 맺고 一連의 開化政策을 施行했다. 먼저 老論 系列이지만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拔擢하여 右議政에 登用하고, 鎖國政策을 全面 廢棄함과 同時에 大院君 執權 當時 鎖國政策을 擔當했던 東來府使 정현덕(鄭顯德)과 釜山訓導 安東晙(安東晙), 慶尙道觀察使 김세호(金世鎬)를 次例로 罷免하고 流配보냈다. 한便 大院君 系列에서는 끊임없이 政界 復歸 試圖를 했고, 1881年 에는 大院君의 庶子 李在善 (완銀群)李 興宣大院君의 側近인 안기영, 권정호 等과 함께 陰曆 9月 13日 로 豫定되었던 競技도 鄕試를 機會로 보고 儒生들을 動員하여 高宗과 明成皇后를 廢位하려 하지만 事前 發覺되어 未遂로 그친다.

그러나 1874年 爆彈 테러 로 明成皇后의 오라비 민승호 와 그의 아들, 夫人 等 一家族 3名이 暴死하는 事故가 發生하였고, [28] 이 일의 背後로 興宣大院君이 指目되자 [29] 高宗과 明成皇后는 매우 애달파하며 特히 明成皇后가 이를 갈며 報復을 노린다는 이야기가 돌았으며, 東來府使 정현덕, 釜山訓導 安東晙, 慶尙道觀察使 김세호 等의 鎖國政策을 擔當했던 人物들을 流配보내려 罷免하였다. [30] 1882年 2月에는 親戚 민태호 (民台鎬)의 딸인 閔氏 를 왕세자빈으로 揀擇했다. [31] [32] [33]

壬午軍亂과 大院君의 政變 試圖 [ 編輯 ]

김옥균

그러나 明成皇后는 大院君과 허욱의 壬午軍亂 때에 죽을 危險에 達하였으나, 미리 變裝을 해 홍계훈 의 등에 업혀 宮闕을 벗어나 驪州 로 내려가 隱身했다. 이때 明成皇后는 洪啓薰의 누이로 演技를 하여 都城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 壬午軍亂 동안 1882年 6月 흥선大院君 은 蜂起한 舊式 軍隊의 推戴로 再執權하였다. 大院君의 側近인 ' 허욱 壬午軍亂 때 軍人 服裝을 하고 大闕로 들어가 明成皇后를 가리켜 주는 役割을 하기도 했다. [34] 그러나 王妃는 景福宮 에 그들이 다다랐을 때에 빠져나가고 없었다.

明成皇后가 宮으로부터 逃亡다니며 빠져나와 있는 동안, 이최응 , 민겸호 , 김보현 等은 壬午軍亂의 6月 10日 의 亂軍들에게 被襲 當했다. 難病이 宮殿으로 올라가 민겸호 를 만나 그를 잡아끌자 唐慌한 그는 興宣大院君을 바라보고, "大監 내를 부디 목숨만은 지켜주시오."라고 付託했다. 그러나 興宣大院君은 비웃으며 "내 어찌 大監을 그대로 둘 수 있겠소."라고 말했다. [35] 그는 階段으로 내던져졌다. 大院君의 말이 채 끝나기도 前에 亂兵들은 階段 아래서 그를 베어 죽이고 그의 주검을 銃劍으로 마구 베어 잘라놓았다. 또 "中宮은 어디 있느냐?"라고 매우 외치며 雰圍氣가 좋지 않았고, 殘忍한 光景은 繼續되었다. [35]

이때 大院君의 部隊否認도 入闕했는데, 그女는 明成皇后를 本人이 타고 온 四人轎 에 숨겨놓고 나왔다는데 이때 어떤 宮人이 이를 보고는 亂兵들에게 密告하였다. [35] 이 말을 들은 亂兵은 四人轎의 褒章을 잘라내어 땅에 내던졌다. 그때 武藝別監 홍재희 [35] [36] 가 '그 女人은 내 누이로, 尙宮으로 있는 이이다. 그대들은 誤認하지 말라'라고 외친 뒤에 등에 업고 宮闕을 빠져나왔다. [37]

이 渦中에 明成皇后는 大殿別監 홍계훈 의 등에 업혀 장호원 (長湖院) 閔應植의 집으로 隱身했으며, 宮에 남은 흥인군 이최응(李最應)과 閔謙鎬는 軍人들에게 被襲당했다. [38] 한便 漢陽에서는 政權을 委任받은 大院君이 明成皇后를 찾아내지 못하자 "皇后가 죽었다"라고 發表하고 國喪 節次를 밟았다. [31] [33] [39] 再執權한 興宣大院君은 財政과 兵權을 맏아들 이재면에게 委任하고, 金允植에게 淸나라 天津 (天津)으로부터의 淸나라 軍隊의 派兵을 要請했다. [31]

淸나라 軍隊의 介入要請과 壬午民兵 鎭壓 [ 編輯 ]

明成皇后는 宮闕에 있는 동안 高宗을 움직여 하여금 統理機務衙門 을 設置하게 하고, 大院君이 부활시켰던 三軍府(三軍府)를 廢止했으며, 領選使와 紳士遊覽團을 中國과 日本에 派遣하여 工業·武器製造法 等을 學習하도록 하는 政策을 施行했다. 황준헌 의 '朝鮮策略'李 傳來되면서 朝鮮策略의 燕尾론(聯美論)을 接한 그女는 1881年 김윤식 이 領選使로 請에 갈 때 祕密裏에 呼出하여 密命을 내려, 淸나라 에 한·未修交를 周旋, 後援해 줄 것을 付託했고, 同時에 사람을 보내 開花僧侶 이동인 (李東仁)을 불러들인 뒤 그에게 密命을 내린 뒤 日本 에 派遣, 主日淸國工事 下餘張 (何如璋)에게 韓美修交를 도와줄 것을 付託하였다.

이런 한便, 明成皇后에 依해 起用되었던 開化派 김홍집 은 1881年 淸나라의 外交官 황준헌 이 지은 《 朝鮮策略 》을 高宗에게 傳했는데, 이 冊의 內容을 問題삼은 儒生들이 1881年 2月 斥邪(斥邪) 상소 運動을 일으켜 閔氏 政權을 糾彈하기 위해 逆謀를 計劃했다. 그 해 8月에는 大院君의 周邊 人物인 안기영과 권정호 等이 李在善(李載先) 卽 大院君의 庶子를 王으로 擁立하기 위해 高宗 廢位를 위한 逆謀를 隱密히 展開했으나, 告變으로 因해 發覺되어 李在善, 안기영 等 主動者들이 獄에 갇히고 死刑당했다. [31] [40] 1882年에는 別技軍과 舊式群 間의 處遇 差別과 關聯하여 5軍營에 所屬되어 있었던 軍隊들에 依해 壬午軍亂 이 發生했다. 明成皇后와 그女의 人物들은 大院君의 支援을 받은 軍人들의 威脅을 받고, 明成皇后는 隱身한 反面 많은 人物들이 被襲당했다. 日本 公使館度 被襲됐다. [38] [40]

日本은 中國(靑)의 軍隊 派兵에 對한 "日本人 保護"의 名目으로, 逃走했던 工事 하나부사 요시모토 ( 花房 義質 )의 指揮 아래 1,500名의 兵力을 이끌고 仁川을 통해 들어왔다. [38] 日本軍은 一旦 協議를 먼저 要請하는 大院君을 無視한 채 漢陽으로 들어왔다가, 이에 단호히 對應하겠다는 大院君의 表明으로 一旦 仁川으로 後退했다. 中國人 除毒 吳長慶 (吳長慶)은 7月 日本軍이 退却한 틈을 타 大院君을 淸나라로 拉致했고, 그날 밤엔 漢城을 掌握했다. 이와 함께 明成皇后는 靑軍의 保護 下에 入宮했다. [38] 이 일 以後 明成皇后는 急進 開化派 等을 政權에서 漸次 排除시키며 外交的으론 親淸 政策으로 기울어졌다. [38]

開化派와의 對立 [ 編輯 ]

壬午軍亂 이 가라앉은 以後 金玉均과 朴泳孝 等 急進 開化派들은 민영익 等을 筆頭로 한 親淸 勢力에 依한 開化派에 對한 公公然한 彈壓에 威脅과 不安을 느끼며 亂과 擧事를 꿈꾼다. 이에 민태호와 민영목 等은 結局 金玉均과 朴泳孝 等 急進 開化派들의 標的이 되어, 1884年 10月 17日 郵政局 個國 祝賀宴의 軍人 亂入 때에 被襲당한다. 高宗과 明成皇后는 景祐宮 으로 옮겨졌으며, 그들의 周圍에 日本 軍人 1個 中隊가 步哨로 둘러진다. [38] [40] [41]

開化派 유길준 . 明成皇后 暗殺과 被襲의 過程에서 그는 日本 浪人들에게 協力한 朝鮮 人 協力者 中의 한 사람이었다.

政權을 掌握한 急進 開化派들은 卽時 自身들의 政綱과 改革案을 公布하고, 各國 公使館에 이젠 새로운 政府가 樹立되었음을 알렸다. 이에 明成皇后는 閔泳翊과 京畿 監査 심상훈 (沈相薰) 等으로 하여금 靑軍의 援助를 請하도록 했다. [41] 明成皇后와 高宗이 軟禁되었던 景祐宮의 步哨를 맡았던 日本 公使 다케조에 신이치로 ( 竹添進一? )에겐 우리들의 居處를 昌德宮으로 옮길 것을 付託했고, 다케조에는 이 要求를 받아들여 明成皇后와 高宗이 居處를 昌德宮으로 바꾸도록 했다. [41] 그 해 高宗은 10月 18日 淸나라 工事 袁世凱 (袁世凱)와 6百 名의 軍人들의 面會 要求를 받았고, 金玉均은 이를 沮止하려하여 그들間에 말씨름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날 午後에는 中國 軍人들이 倍로 늘어났고, 日本人 軍人들은 混亂 渦中에 民心의 標的이 되어 攻擊받았다. [41] 日本人 軍人 2百 名은 一旦 後退하였으며, 政府軍 8百 名도 劣勢로 인해 敗北했다. 이런 때에 明成皇后는 高宗과 함께 홍영식 , 박영교 , 몇 名의 士官生徒의 護衛를 받으며 離脫하여 靑軍의 陣營으로 들어갔고, 金玉均은 박영효 , 서재필 , 서광범 , 變數 , 유혁로 와 함께 다케조에 公使의 뒤를 따라 日本軍의 護衛를 받으며 北門을 통해 三角山 과 楊花나루, 仁川을 거쳐 日本으로 逃避했다. [41] 明成皇后는 이 甲申政變 以後 淸나라에 依存하게 된 反面, 日本은 公使館의 火災와 群衆들에게 죽음을 當한 日本人들에 對한 賠償을 朝鮮에게 要求하였다. 이에 朝鮮은 日本에게 甲申政變에 對한 賠償을 해주기로 한 漢城條約 을 締結했다. [41]

朝鮮은 壬午軍亂과 甲申政變의 混亂으로 더욱 弱化되어 列强들의 角逐場이 되는데, 南下 政策으로 얼지 않는 港口를 얻으려는 러시아 의 介入으로 러시아와 淸나라와 日本 等 列强들의 影響圈 아래에 들어왔다. [42] 明成皇后는 朝鮮 政府의 顧問으로 와 있던 獨逸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를 媒介로 러시아 公使와 接觸하여 密約을 맺으려 했다. 이러나 密約은 먼저 中國에 發覺되어, 1885年 2月엔 묄렌도르프에게 令狀이 發付되고 大院君은 袁世凱를 帶同하여 歸國되었다. [42] 1885年 3月에는 巨文島 英國 艦隊에 依해 占領되었는데, 1887年엔 朝鮮의 領土를 占領하지 않는다는 러시아와의 合意 끝에 撤收했다. [42] 이런 한便 러시아 公使 카를 베베르 는 明成皇后와 密約을 또 맺으려 했으나 袁世凱가 情報를 먼저 入手하는 바람에 霧散되었다. [42]

朝廷의 實力者였던 調整 內의 閔氏 一家 戚族의 大多數가 1884年 10月의 甲申政變 김옥균 , 박영효 等 急進 開化派의 標的이 되어 죽음을 當했다. 內觀 유재현은 明成皇后의 個人 祕書였으나, 그 조차도 標的이 되어 죽음을 當한다. 그 때 美國人 議員인 호러스 뉴턴 앨런 (韓國이름 안련)은 量조카 민영익 의 負傷을 治療해주어 生命을 건져준다. 이 일로 말미암아 明成皇后는 日本과 急進 開化派를 매우 警戒하게 된다.

興宣大院君, 이준용 等과 葛藤 [ 編輯 ]

明成皇后에게 이준용 은 政敵인 媤조카였다. 明成皇后는 이준용의 명성황후 廢黜의 祈禱에 威脅을 받았다. 이준용은 高宗의 親조카였다.

1892年 엔, 雲峴宮 으로부터 火藥이 터지고 또 火藥이 여러 建物에 裝置된 것이 發見됐다. 多幸히 이 爆彈들은 點火되지 않은 채로 發見됐다. [29] 明成皇后는 이 일에 對한 陰謀論의 標的이 되어, 그 前날, 明成皇后의 양오빠人 민승호 에게 大院君이 爆藥을 보내 一家를 죽게 만든 일에 對한 政治的 報復劇을 꿈꾸지 않았겠느냐는 陰謀論이 提起되었다. [29] 黃玹 의 매천야록에는 世間의 所聞을 빌어 明成皇后가 雲峴宮 테러의 背後가 아닌지 疑心하고 있다. 雲峴宮의 爆彈 테러는 明成皇后가 大院君 一家를 爆殺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推測性 流言蜚語를 옮겨 놓은 것이다.

尹孝貞 은 이 事件이 이준용 이 統衛使에 오른 것을 記念한 1894年 7月 中旬 頃에 일어났다고 記錄했다. [43] 민승호 一家의 爆死 事件의 背後로 指目된 大院君은 그 뒤 無名의 刺客에 依한 暗殺과 爆彈 테러의 威脅을 받았다. 이에 그는 明成皇后를 指目하고 明成皇后와 高宗을 내쫓을 計劃을 꾸민다.

東學 農民軍과의 對立 [ 編輯 ]

전봉준

이와 같이 朝鮮을 둘러싸고 러시아, 日本, 淸나라 間의 角逐戰이 벌어지는 속에서 明成皇后는 政府와 權力의 安定에 모든 力量을 쏟았다. 이 渦中에 최제우 가 일으킨 東學은 비록 民衆을 거짓말로 홀렸다는 罪目을 받은 崔濟愚가 處刑되었으나 第2代 敎主인 최시형 을 中心으로 再起했다. 1893年 3月 忠淸道 報恩 集會에서는 農民들이 2萬餘名 모여 農民을 괴롭히는 地方官들의 退出과 民生苦를 蕩減하고, 오랑캐들을 몰아낼 것 等을 要求하였고 [42] [44] , 전봉준 을 中心으로 1894年 1月에는 姑婦郡守 조병갑 의 腐敗를 糾彈하는 農民 運動이 일어났다. [42] [45] 明成皇后는 穩健 開化派 및 親戚 戚臣들과 가까이 지내며 그들이 東學 農民軍을 동비(東匪. 東學의 不汗黨들.)로 報告한 것을 그대로 믿고 지냈다.

같은 해 4月 全州城 이 東學農民軍에 依해 占領되고 興宣大院君이 叛軍을 支援하여 高宗을 廢位하려 한다는 情報를 入手한 明成皇后는 支援을 위해 淸나라에 援兵을 請하였다. 軍人들이 淸나라에 依해 派兵되자 이에 日本도 톈진 條約 을 빌미로 派兵하였다. [42] [46] [47] [48] 農民軍과 官軍은 朝鮮에 日本軍과 淸軍이 當到하자 全州和約을 맺고 全羅道 53個 地域에 민정 機關인 執綱所를 設置하여 治安과 行政을 處理키로 하고 休戰했다. 그러나 朝鮮에 온 이들 오랑캐들은 駐屯하며 軍隊를 增派했다. 朝鮮의 內政을 改革하자는 빌미로 日本은 淸나라와의 協力을 提議했으나, 淸나라는 이를 拒絶했다. [46] 이에 閔氏 一家는 日本이 宮闕에 보낸 日本 公使 오토里 게이스케 ( 日本語 : 大鳥 圭介 五五토리 케이스케 [ * ] )와 麾下의 軍人들에 依해 퇴출당하고 大院君은 또다시 宮으로 돌아오게 됐으며, 日本은 김홍집 을 總理 代身에 앉히고 軍國機務處를 設置하여 內政 改革을 斷行 했다. [46] [48] [49] [50] 朝鮮의 內政 改革과 甲午更張을 通해 日本은 朝鮮에 駐屯하고 있던 淸國軍을 먼저 攻擊한 뒤에야 正式으로 宣戰布告하였으며, 7月 ~ 9月 사이에 淸나라와 戰爭을 벌여 勝利했다. [46]

명성황후 廢位 陰謀와 失敗 [ 編輯 ]

甲午更張 初期에 明成皇后와 高宗 廢位 陰謀를 꾸미던 大院君 이준용 은 먼저 명성황후 廢位를 前哨作業으로써 着手하였다. 명성황후 肺書의 趣旨를 적은 文件이 1894年 6月 22日 부터 흥선大院君 에 依해 日本 公使 오토里에게 傳達되었다. [51] 그러나 日本 側의 反應은 微溫的이었다.

이준용도 6月 22日 부터 24日까지 再 朝鮮 日本 公社 오토里 工事를 說得하기 위해 日本 公使館을 두 次例 訪問하였다. 그러나 흥선大院君 과 이준용의 意圖는 스기무라 日本 公使館 書記官 等 日本 公使館 職員들의 强力한 反對로 挫折되었다. [51] 明成皇后와 高宗 에 對한 監察과 干涉을 强化하려 흥선大院君 6月 24日 이준용 을 별入直에 임명하였다. [52] 高宗은 7月 甲午更張 을 斷行한다. 이때도 명성황후 廢位의 正當性을 믿는 이준용 은 꾸준히 日本 公使館을 訪問하여 協助해줄 것을 付託했다. 明成皇后를 廢位하려는 陰謀는 甲午更張을 전후해서 大院君과 이준용 의 主業이었으나 日本 領事館에선 呼應하지 않아 挫折된다.

1894年 6月 21日 景福宮이 日本 軍 混成旅團에 依해 占領되었다. 大院君은 政權 回復과 王朝 中興 方案 마련에 汨沒했으며, "朝鮮의 땅을 한 치도 要求하지 않겠다.”라는 스기무라 후카시 日本 公使館 書記官의 確約을 곧이곧대로 믿고 日本 商人의 護衛를 받으며 入闕하였다. 이로써 閔氏 一家의 勢道는 무너졌다. [51] 大院君 一家는 그러나 달포 만에 日本의 意圖로 끌어내려진다. 大院君의 代身으로 金弘集 內閣 이 日本軍의 傀儡政府로 만들어지며, 이 政府는 警長事業 (更張事業)을 進行한다. 이로 인해 閔氏 一族은 左贊成 민영준 (뒤에 靈휘(永徽)로 改名)을 筆頭로 은 모두 流配되었고, 明成皇后도 危機 中에 廢位 危機를 雅瑟아슬히 넘겨 홍순형 (洪淳馨) 京畿道 監司의 집에 隱身한다.

東學 農民軍 鎭壓 [ 編輯 ]

朝鮮에 對한 日本의 內政 干涉이 本格化되자 東學農民軍이 다시금 모여 對日 農民 戰爭을 敢行했다. 그러나 農民軍의 12月의 敗北로 蜂起는 우금치 戰鬪를 끝으로 마지막을 맞으며, 綠豆將軍으로도 불리는 全琫準도 淳昌 에서 部下의 密告로 逮捕되어 1895年 4月 24日 處刑되었다. [46] [53] [54]

東學의 農民 무리들에 調整은 東學 農民 運動 初期의 報告書에 記錄된 것처럼 그들이 單純 匪賊人 程度로 認識했으나, 明成皇后는 東學 農民軍을 否定的으로 볼만한 理由와 契機가 있었는데, 이는 綠豆將軍 卽 東學 農民軍 의 指導者 中 한 사람인 전봉준 흥선大院君 의 關係 때문이었다. 雲峴宮에 全琫準은 1890年 에 찾아갔다. 雲峴宮 에서 전봉준 1890年代 初盤부터 흥선大院君 의 門客 生活을 하였다. [55] 그 뒤 故鄕으로 내려간 전봉준 은 또 다시 흥선大院君 을 찾아가 協力을 請하기도 했던 것이다. 全琫準은 1893年 2月 흥선大院君 을 訪問하려 漢城府 로 올라가기도 했다. [56] 全琫準은 大院君에게 잠깐 손님으로 와 있던 것 뿐이나 大院君은 全琫準에게 매우 厚한 待接을 했다. 이때 全琫準은 흥선大院君 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民衆을 위해 한番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56] 이런 密接한 關係로부터 전봉준 흥선大院君 사이에 무슨 密約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世間엔 돌았다. [56] 이런 한便 朝鮮의 內政은 또 한 番 農民運動 鎭壓을 위해 動員된 淸나라 軍隊의 干涉을 받는다.

開化黨 除去 未遂와 興宣大院君의 暗殺 工作 [ 編輯 ]

1894年 가을, 明成皇后는 開化黨 을 除去하려는 陰謀를 꾸몄는데 이때, 흥선大院君 의 情報網에 發覺되었다. [27] 흥선大院君 은 明成皇后를 暗殺하려는 陰謀를 日本公使와 協議하며 日本에게 若干의 도움을 付託하였다. [27] 명성황후 卽, 그女가 죽음을 맞게 되는 陰謀가 꾸며지는 때였다. 大院君은 明成皇后의 除去에 日本人들로부터 若干의 도움을 얻으리라는 日本 公使 오카모토의 言約을 받았다. [27]

1895年 9月, 日本 公使에 미우라 고로 [57] 와 명성황후 除去의 謀議에 大院君을 끌어들이려는 日本人들 오카모토 류노스케 (岡本柳之助), 스기무라 후카시 (杉村濬) 等이 大院君의 도움을 받으려 大院君에게 다가갔으나, 大院君은 一旦 拒絶하였다. 大院君은 孔德洞 別莊에 蟄居하면서 교동에 長孫 이준용 이 幽閉된 일에 不滿을 품고 있었다. [58] 大院君이 雲峴宮에 있을 때 오카모토가 大院君을 說得했다. [58] 그런데 흥선大院君 은 이때 日本 公使館을 祕密裏에 자주 出入했는데, 유길준 은 ' 흥선大院君 이준용 日本 領事館을 드나들기를 隨時로 했다 [27] '라고 指摘했다. 그리고 유길준 은 王后 除去에 大院君이 日本 浪人들의 支援을 얻은 것은 매우 잘못이라고 主張하기도 했다. [27] 이래도 王后 除去 計劃에 關해 유길준 은 大院君에 協力했는데, 이준용 을 두고 박영효 서광범 은 그를 除去하기 위해 僞裝된 意圖的인 拷問致死를 計劃하는 中에 兪吉濬의 갑작스런 王后 除去 計劃 加擔 消息에 唐慌한다.

明成皇后의 마지막 [ 編輯 ]

1883年 1月 日本 에 滯留中일 때 그려진 박영효 의 肖像畫

明成皇后에 對한 朴泳孝의 暗殺 未遂 [ 編輯 ]

朝鮮은 1895年 4月 日本의 影響圈 아래 있었다. 日本은 大院君을 退陣시키는 한便 議政府 의 名稱을 內閣으로 바꾸고 물러나있던 金弘集을 7月에 다시 總理大臣으로 앞세워 聯立 內閣을 構成했고, 內政의 內閣엔 日本人 顧問官을 두어 內政 干涉을 强化했다. [59] 이에 明成皇后는 프랑스 , 러시아 , 獨逸 壓迫 으로 日本은 요동 半島를 다시 淸나라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情勢를 利用하여, 러시아를 通해 日本을 몰아내려 했다. [59] 明成皇后는 박정양 을 內閣總理大臣으로 임명하고 金弘集 內閣을 退出했다. [59] [60]

1895年 (高宗 32年) 7月 王后 를 暗殺할 計劃이 박영효 에 依해 꾸며진다. 朝鮮의 開化 以後로 高宗은 안으로는 軍國機務處 가 마음대로 하고 밖으로는 日本 의 牽制를 받아 高宗은 單 한 가지 일도 單獨으로 決定할 수 없었다. 이에 明成皇后는 이를 못마땅하고 분하게 여겨 러시아와의 提携를 통해 漸次로 軍權(軍權)을 回復하기를 祈願했으나, 朴泳孝는 이를 憂慮했다. [61] 明成皇后는 軍國機務處 의 一部 急進開化派가 獨斷하는 것을 憂慮했고 이들의 政策을 뒤엎을 機會를 찾았다. 이때 明成皇后를 暗殺할 陰謀가 朴泳孝의 單獨에 依해 計劃됐다.

박영효 는 王后의 能力과 權謀를 두려워해 王后가 暗殺되어 禍根을 뿌리 뽑아야 된다고 여겨, 1895年 7月 로 날짜를 定하고 日本 에 兵力을 要請하였다. 유길준 박영효 는 第 助力者로 여겨 가만히 뜻을 알렸다. [61] 이에 유길준 은 매우 놀라워하며 明成皇后 暗殺 計劃을 바로 임금에게 알렸다. 유길준 의 密告를 박영효 는 알아채어 洋服으로 바꿔 입고 變裝하며 日本人의 護衛를 받아 都城 을 빠져 나와 漢江 자락의 龍山에서 蒸氣船 을 타고 달아났다. 그의 一黨인 이규완, 신응희(申應熙) 等도 따라 달아났다. [61]

暗殺 準備 過程 [ 編輯 ]

明成皇后의 죽음을 낳은 浪人들( 漢城신보 社屋 앞에서)

1895年 8月 에 明成皇后는 죽고 大院君을 꼭두각시로 만든다는 陰謀가 日本 公使 兼 豫備役 陸軍 中將 미우라 고로 (三浦梧?)와 8月 15日 書記官 스기무라 후카시 (衫村濬), 無關 구스노세 유키히코 ( 楠?幸彦 ), 로닌 頭目 오카모토 류노스케 (岡本柳之助) 等과 함께 꾸미어졌는데, 明成皇后의 죽음은 日本人 軍人들과 로닌들이 맡고, 對外的으로는 不滿을 품은 朝鮮人 軍人들의 叛亂이었다고 發表하는 것이 骨子였다. [62] 8月 16日 大院君은 명성황후 除去와 關聯된 盟誓에 自筆로 署名했다. [63] 그 內容은 明成皇后가 죽은 뒤 大院君이 國王을 輔弼해 宮中을 監督하되 內閣에 政事를 맡겨 一切 干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明成皇后가 죽은 뒤 大院君이 政治에 關與하지 못하도록 미리 言約을 받아 둔 것이다. 이날 大院君은 大院君의 長男인 李載冕과 長孫子 이준용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自筆로 覺書에 署名했다. [63]

8月 20日(陽曆 10月 8日)에 明成皇后 暗殺 作戰이 그들에 依해 決行에 들어갔다. 大院君이 隱居했던 공덕리의 別莊 아소정(我笑亭)에, 日本軍은 로닌과 日本 軍人, 明成皇后에 不滿을 품은 조선인 軍人 300名假量을 모았다. 大院君은 미우라와 結託하고 合意하여 가마에 태워져 景福宮으로 나아갔다. [59] [64] 大院君은 먼저 明成皇后가 죽음을 맞아 마땅하다는 主張의 '告由文'을 發表하고 이를 來日 서울 市內에 揭示하라고 指示했다. 이 告由文의 內容은 '閔氏 一家의 戚族이 權力을 잡고 甲午更張의 改革을 無爲로 돌려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除去해 버리겠다'는 內容이다. [63] 이를 大院君은 제 自筆로, 日本 의 强要도 없이 적어놓았다. 大院君이 이런 글을 적는 이런 일이 일어나며 이 글을 미리 들은 朝鮮의 學者들과 知識人들은 매우 混亂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大院君이 日本의 强要에 依해 그러했는지 本人의 意志로 그러했는지는 論爭이 있다.

유길준 에 따르면, 1894年 가을 明成皇后가 開化黨 (開化派) 모두를 除去하려는 計劃을 꾸몄다가 大院君의 情報網에 發覺되었고, 明成皇后의 죽음과 暗殺을 위해 大院君은 日本人들로부터 '若干의 도움을' 얻어내기로 日本公使 오카모토 와 協議했다. [27] '고 한다. 日本 浪人들은 이두황, 이진호, 우범선, 구연수, 이주회 等이 이끄는 朝鮮人 宮闕守備隊 隸下 各 大隊 兵力의 길案內를 받으며 半나절도 안돼 都城에 仁川으로부터 潛入했다.

死亡 그리고 後日談 [ 編輯 ]

옥호루. 明成皇后가 암살당한 곳이다.

景福宮에서 이들을 마주친 홍계훈 經費 大將이 이들을 가로막았으나, [62] 홍계훈 과 警備隊員들은 日本 浪人들, 浪人들에게 協力한 朝鮮人 軍人들의 發捕에 맞아 죽는다. 明成皇后가 있던 宮闕에는 洪啓薰을 죽인 浪人들이 들어와 明成皇后를 찾아다녔다. 외침을 들은 明成皇后는 宮女服으로 갈아입고 건청궁 鯤녕합 쪽에 있는 옥호루 로 隱身했는데, 宮女와 內官들은 浪人들에 依해 被襲當하고 있었다. [62] 이경직 內部大臣이 두 팔을 벌려 明成皇后와 宮女들 앞을 가로막아 가리니 두 팔이 잘려 죽음을 맞는다. 宮女들과 함께 있던 明成皇后는 大闕에 다다른 浪人들을 만난다. [65]

明成皇后는 房 한 구석에 기대어 몸을 감추고 있다가, 浪人 오카모토 류노스케의 눈에 띄어 劍에 베여 죽었다 한다. [66] 明成皇后의 죽은 몸은 그 뒤 石油가 뿌려진 다음 불태워졌다. 이 때 明成皇后의 나이는 43歲였다. [62] [64] [67] [68]

明成皇后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는 景福宮 康寧殿 에 머물던 大院君이 休息을 取하던 中에 報告됐다. [63] 놀라고 두려운 高宗은 大院君을 불러 이 날 아침 景福宮內 건청궁 에서 아버지와 대면한다. 이런 大院君이 건청궁으로 발길을 옮기던 때에, 明成皇后의 주검은 大闕 홑이불에 둘러싸인 채 大闕 솔나무 숲으로 옮겨져 기름이 부어진 가운데 가을의 바람에 한줄기 煙氣가 되어 날려가고 있었다. [63] 다만 그女의 遺骨의 一部만이 누군가에 依해 주워져 닦이운 뒤에 高宗에게 傳達된다. 高宗을 대면한 자리의 大院君은 高宗 의 兄이자 그의 長男인 완興群 이재면 을 宮內府大臣에 앉히고 또 政權을 掌握한다. [63]

事後 [ 編輯 ]

명성황후 玉寶

明成皇后의 暗殺은 바로 漢城府 에 體制하고 있던 프랑스 淸나라 公使館의 外交官 및 外交官 夫人, 言論人들의 입을 통해 外國에 알려졌다. 駐朝鮮 러시아 工事 베베르 는 卽時 報告書를 作成하여 러시아 皇帝 니콜라이 2歲 에게 報告했다. 當時 러시아 皇帝 니콜라이 2歲 는 베베르의 報告書를 直接 읽은 뒤表紙에 自筆로 “正말로 놀랍다. 이런 일이 眞짜로 일어났단 말인가.”라고 적은 뒤 卽刻 韓半島에 가까운 아무르 州 駐屯軍에 非常 待機令을 내렸다. 프랑스 公使館에서는 明成皇后 暗殺의 背後로 興宣大院君을 指目했다.

1895年 10月 문석봉 金海 로부터 나와 忠淸北道 報恩 等地에서 많은 이들을 모아놓고 義兵을 일으켜 賊黨들을 討伐하자고 외쳤다. 이에 이곳과 隣接한 邑의 儒生, 선비들이 頭巾과 道袍를 입고 나아갔지만 얼마 뒤 공주부 에서 보낸 軍人들에 依해 모두 잡혔다. [69]

明成皇后의 職位는 日本의 壓力으로 인해 죽음 이틀 뒤 廢人으로 降等했으나, 바로 다음 날 그女의 職位는 高宗의 名으로 "빈"(嬪)으로 올라갔다. [64] [70] [71] 國母에게 저질러진 이런 蠻行이 國際的으로 알려져 非難을 받게 된 日本은 10月에는 形式的인 調査를 했으며, 明成皇后의 地位도 完全히 復元되어 暗殺 移轉 生前 마지막 作號인 王后로 복작됐다. [64] [72] 1897年 陰曆 1月 6日 문성이란 諡號가 陵戶는 홍릉 으로 定해졌으나 頒布를 하지 않아 문성이라는 諡號는 正式으로 使用되지 않았다. [64] [73] 그러나 뒤에 諡號의 문성(文成)李 正祖 의 諡號와 같다 하여 여러 論議 끝에 陰曆 3月 2日 名聲으로 諡號가 改稱됐다. [74] 같은 해 8月, 高宗은 年號를 光武로 고치고, 10月에는 大韓帝國情을 發表하고 皇帝에 올랐다. 이와 함께 明成皇后의 地位도 올라가 같은 해 10月 高宗의 皇帝 卽位에 따라 그女 亦是 皇后에 冊封되어 明成皇后가 되었으며(명성황후가 追尊이 아니라 冊封이라는 記錄은 大禮의궤, 고종실록, 承政院日記, 璿源譜略修正儀軌에 분명하게 明示되어 있다), 葬禮도 局長으로 다시 치러져 只今의 淸凉里洞 에 安置되었다가 只今의 位置로 移葬됐다. [75]

1919年 高宗이 崩御한 뒤, 高宗에게 太皇帝(太皇帝)라는 諡號가 올려지자 그 正後인 명성황후에게도 ‘태’(太) 자라는 皇帝와 皇后에게만 附與되는 後號(后號)가 올려져 ‘명성태皇后’(明成太皇后)가 되었는데 [76] 王后에게 2字號를 썼던 朝鮮의 오랜 風習의 影響 아래 흔히 明成皇后로 불린다.

한便, 明成皇后의 暗殺은 朝鮮 民衆들의 憤怒를 惹起하였고, 暗殺에 關聯된 朝鮮人 將校들과 軍人들은 避身하거나 隱身해 있었다. 이 때에 白凡 金九 (이 때의 이름은 金昌洙 , 金昌洙)는 義兵으로 滿洲 에 있다가 1895年 初 歸國하며 日本 人 商人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日本 浪人으로 誤認하며 치하포에서 만나 그를 죽이는 일이 發生하기도 한다. 金九 는 이에 對해 뒷날 그가 日本 浪人이거나 王妃 暗殺에 加擔한 者라고 主張하였으나, 오늘날 그는 日本 人 商人으로 알려져 있다. 歷史問題硏究所 硏究員 배경식 敎授는 "只今까지 確認 可能한 어떤 資料에도 그 日本人이 陸軍中尉라는 記錄은 없다"며 "日本 公使館의 報告書와 朝鮮 官吏의 報告書, 獨立新聞의 事件 報道는 한결같이 그를 '商人(商人)'으로 적고 있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裵 敎授는 白凡度 그가 陸軍 中尉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라고 主張했다. [77] 1997年 도진순 창원대학교 敎授는 日本의 資料로부터 그가 계림장業段의 商人이며 民間人이었다고 [78] 밝혔다.

暗殺의 背後 [ 編輯 ]

日本 浪人 [ 編輯 ]

日本 刺客들은 緻密하게 計劃을 짜고 漢城으로 潛入, 明成皇后의 暗殺을 主導하였다. 이 過程에서 朝鮮人 兵士들을 訓鍊하여 表面的으로 앞세웠다. [62] 또한 明成皇后의 暗殺 背後로 日本 工事 이노우에 가오루 等이 指目되었다. [79] 2006年 에는 최문형 한양대 名譽敎授가 日本 憲政資料室에서 찾아낸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陸軍大將과 무쓰 무네미쓰 (陸奧宗光) 外相 사이의 便紙를 통해 日本 政府의 介入說이 提起되기도 하였다. [80] 明成皇后의 暗殺 過程에서 朝鮮人 兵士들이 길案內를 했고, 日本軍이 養成한 訓鍊隊의 第1大隊長 이두황, 第2大隊長 우범선, 第3大隊長 이진호(李軫鎬) 等이 日本 浪人에 協力했다. 그 밖에 前 軍部協辦 이주회 等도 包攝하였다. 이 中 우범선이 1903年 고영근 에게 죽음을 當했다. [81]

朝鮮人 協力者들 [ 編輯 ]

明成皇后 暗殺의 國內 高位級 協力者로 유길준 흥선大院君 이 指目되었다. 윤치호 는 그의 日記에서 그를 暗殺한 日本 浪人들의 指揮者 中 한사람으로 유길준 을 指目하였다. [82] 明成皇后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 유길준 과 日本人 이시즈카가 事件의 顚末을 隱蔽하기 위해 自身을 그날의 저녁 食事에 自身을 招待했다는 것이다. [82] 兪吉濬은 大院君이 明成皇后 暗殺의 朝鮮 側 主動者라고 指目하였다. [27] 1894年 가을 明成皇后가 開化黨 을 除去하려는 計劃을 꾸몄다가 大院君의 諜報網에 發覺되었고, '大院君은 日本 公使 오카모토와 協議 끝에 日本人들로부터 若干의 도움을 얻어 그女를 죽이기로 決定하였다.'는 것이다. [27]

유길준 흥선大院君 을 明成皇后 暗殺의 朝鮮人 巨物 協力者로 指目했다. 美國人 敎授 에드워드 모스에게 보내는 便紙에서 兪吉濬은 明成皇后 暗殺은 實行되었지만 大院君이 明成皇后 暗殺 問題를 日本公使와 協議하고 日本側에 若干의 도움을 要請한 것은 큰 失手였다고 指摘하였다. [27] 그러나 유길준 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方法이 없었다.'는 意見도 덧붙였다. [27] 史學者이며 大韓民國 臨時政府 의 2代 大統領인 박은식 흥선大院君 을 明成皇后 暗殺의 背後로 指目하였다. 박은식 春秋戰國時代 朝暾 (趙盾)李 王을 暗殺한 것을 比喩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評價하였으며 感情이 사람의 良心을 가린다며 批判하였다. [83]

흥선大院君 유길준 外에도 조선국 國軍 1大隊長 우범선 (禹範善)·2大隊長 이두황 (李斗璜)·3大隊長 이진호(李軫鎬) 等과, 前 軍部 協辦 이주회(李周會), 國王 親衛隊 部位(副尉) 윤석우(尹錫禹), 日本公使館 通譯官 舶船(朴銑), 文身 구연수 (具然壽) 等이 協力했고, 宮闕守備隊의 舊式軍隊 出身 朝鮮人 兵士들도 自發的으로 協力했다.

論難 [ 編輯 ]

創作作品의 刺戟的인 弑害 描寫 論難 [ 編輯 ]

한 小說家는 〈 에조 報告書 〉를 根據로, 日本 軍人들은 皇后를 强姦했다는 主張을 했지만 作家의 主張대로 에조는 現場을 目擊한 弑害犯이 아닌 拷問이며 近現代 文獻 最高權威者中 하나인 書誌學者 김종옥, 서울대 신용하 敎授等 專門家들은 該當 作家의 主張에 對해서 常識에 違背되는 거짓浪說이라 一蹴했다. [84] 이러한 主張은 勿論 <에조 報告書>自體가 實際 目擊者의 陳述이 담겨있는 가장 信憑性있는 資料로 評價받는 <베베르 報告書>를 비롯한 다양한 證言들과 完全하게 違背된다. [85] 여기서 쓰인 '裸體''局部'라는 單語도 論難이 있는데 <에조 報告書>를 信賴한다고 假定해도 히로시마에서 弑害犯들이 證言한 '閔妃의 얼굴을 알 수 없어 中年女性의 身元을 識別하기 위해 가슴을 確認한 行爲'를 指稱했을 蓋然性이 크다. [86]

乙未事變 當時 明成皇后의 生存 疑惑 [ 編輯 ]

2013年 7月 1日, 1896年 2月 6日 當時 러시아 駐在 獨逸大使 後考 라돌린이 獨逸帝國 總理 실링스퓌르스트 호엔로에 앞으로 보낸 祕密文書의 內容을 정상수 韓國방송통신대學校 統合人文學硏究所 硏究 敎授가 한 言論을 통해 公開했다.

한 內容은 “러시아 外交部 長官 로바노프가 自身의 情報에 따르면 죽었다고 이야기되는 韓國의 王妃가 아직 살아 있다고 나에게 말했다. 서울 駐在 러시아 公使(베베르)는 王妃가 러시아 公使館으로 避身할 수 있는지를 한 名의 韓國人으로부터 아주 祕密裏에 要請받았다고 한다. 로바노프는 日本軍이 韓國에 오래 머무르고 있다고 말했다. 中國이 韓國에서 撤軍한 것처럼 日本軍도 더 以上 韓國에 駐屯할 根據가 없다고 했다” [87] 였다.

한便 서울 駐在 英國 總領事 월터 힐리어가 乙未事變 直後 作成한 文書에서 1895年 10月 9日 베이징 駐在 英國 公使 니콜라스 오커너에게 “日本人들이 서너 名의 宮女를 죽였다. 그리고 王妃는 사라졌는데 脫出한 것으로 보인다”고 報告했다. 이어 10月 22日에는 오커너에게 베베르가 自身을 訪問해 王妃의 生存 可能性을 이야기했다는 報告書를 보냈다.

1895年 10月 8日 새벽 景福宮 건청궁에서 살해당했다는 게 韓國 歷史學界의 定說이나 정상수 敎授는 "獨逸과 英國 等 當時 朝鮮과 關係를 맺던 나라들의 外交文書이기 때문에 信憑性이 높다. 明成皇后의 弑害를 當然視할 게 아니라 새로운 史料 發掘로 眞實을 찾아야 한다."라고 主張했다. [88]

한便 이에 對한 歷史學者의 여러 反應으로, 전우용 서울대학교 國史學科 敎授는 "이番 文書는 日本이 事件을 撫摩하기 위해 퍼뜨린 逆宣傳이 包含됐을 可能性이 있다."며 "外交가 風聞에 關한 새 資料 程度로 봐야 한다."라고 診斷했다. 이태진 國史編纂委員長은 이에 對해 “明成皇后 生存은 乙未事變 뒤에 일어난 여러 事實을 보면 있기가 힘든 狀況”이라고 말했다. 또한 “獨逸 外交文書가 信賴性이 높다는 것은 首肯하지만, 라돌린 文書가 俄館播遷 즈음에 나온걸 보면 러시아 公使館 待避를 願한 사람이 王妃가 아니라 王의 誤記일 可能性도 있다.”며 事實이 아닐 可能性을 提示했다. [89]

評價 批判 [ 編輯 ]

當代의 評價 [ 編輯 ]

그의 벗 윤치호 가 明成皇后를 殺害한 犯人이라고 指目했던 [82] 유길준 은 明成皇后를 ‘世界에서 가장 나쁜 女性’이라고 酷評하였다. [27] 暗殺 直後 유길준 美國 人 恩師 모스에게 보낸 날짜 未詳의 便紙에서 兪吉濬은 明成皇后를 잉글랜드 메리 1歲 女王, 프랑스 마리 앙투아네트 보다도 더 惡하다고 批判하였으며, 批判 事由로 當時 百姓들 사이에서는 國王은 一介 人形이고 王妃는 그 人形을 갖고 노는 사람이라는 市中의 所聞을 根據로 提示하였다. [27] 유길준 은 明成皇后를 開化黨 殺害의 背後로 보았다. 모스에게 보내는 便紙 本文에서 유길준 은 明成皇后가 도움을 請하기 위해 러시아 公使와 祕密 接觸하고, 1894年 가을 開化黨 모두를 殺害하려는 計劃을 꾸미다가 國王의 아버지인 大院君에게 發覺되었다고 하였다. [27] 黃玹 의 《 매천야록 》에 따르면, 明成皇后의 奢侈와 閔氏 政權의 賣官賣職에 對해 매우 否定的으로 敍述되어 있다. [90]

서재필 은 明成皇后가 英敏한 頭腦의 所有者라고 評價하였다. 1947年 軍政期 때의 한 回顧談에서 徐載弼은 " 김옥균 의 智略은 歷史的인 것이었소. 朴泳孝와 洪英植과 서광범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才士들이었지요. 그래서 世上 사람들은 그들에다 나까지 넣어 다섯 사람의 機智와 計略을 모으면 世上에 못할 일이 없다고까지 일컬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다섯 사람이 함께 閔妃 앞에 나가면 으레 閔妃에게 機先을 잡혀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러나오기 마련이었지요. 閔妃는 실로 當할 길 없는 智略과 才略을 지닌 傑物이었소. [91] "라며 그女가 事態 分析에 機敏했다 [91] 고 評하였다.

後代의 評價 [ 編輯 ]

明成皇后에 對한 歷史學界의 評價는 親日 急進 開化派와 守舊的 斥邪派, 日本 官邊 側으로부터 모두 좋지 않은 評을 얻었다. [92] 反面에 그러한 좋지 않은 評價는 明成皇后의 政策 路線이 그만큼 保守와 進步 사이에서 均衡을 이루었다는 反證이라는 主張도 있다. [92] 한便 戚族政治의 惡循環을 거듭케 했다는 批判도 있다. [93]

또한 明成皇后와 戚族 勢力은 中人 中心의 開化派와는 달리 傳統과 西洋 文明을 折衷하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政策 路線을 띠었다. 이 때문에 急進開化派의 立場에서 事大黨 또는 守舊黨으로 評價를 받기도 한다. 反面에 高宗의 立場에서는 勤王派로서 高宗이 試圖한 光武改革의 支持勢力이었고, 乙未事變 以後에는 反日義兵運動을 背後에서 支援하였으며, 大韓帝國 成立에도 큰 役割을 하였다. [94] 그러나 大院君에 依해 剔抉된 勢道政治를 다시 불러들였다는 批判과 外勢를 利用하려 하여 國內에 日本의 侵入을 促進시켰다는 否定的인 視角도 存在한다. 甚至於 一部 極端的 評論家는 비슷한 時期 請帝國 을 衰退시킨 西太后 와 同級을 取扱하기도 한다. 普通 그들은 西太后 와 明成皇后를 19世紀 東洋의 最惡의 皇后 라고 批判한다.

批判 [ 編輯 ]

國庫 蕩盡에 對한 批判 [ 編輯 ]

儒學者 黃玹 은 高宗과 明成皇后가 國庫를 蕩盡했다는 點을 指摘, 批判했다. 그리고 黃玹 自身의 著書 매천야록 의 곳곳에서도 이를 言及하였다. 高宗과 明成皇后는 原子가 태어나자 宮中에서는 原子가 잘 되길 빈다는 핑계로 祭祀를 8道 江山에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이렇게 蕩盡하는 하루 費用이 千金이나 되어 內需司 가 所藏한 것으로는 費用 支出을 堪當할 수가 없었다. [95] 마침내 好調 宣惠廳 에서 所藏한 公金을 빌려서 使用했지만 그것이 違反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全혀 없었다. 1年이 채 못돼 大院君 이 備蓄해 놓은 財物을 모두 蕩盡했다. 그래서 賣官이나 매課 [96] 까지 氣勝을 부렸다고 한다. [95] 內需司에서 管理하는 王室 財産으로도 모자라 國庫의 豫算까지 使用했다는 것이 批判의 內容이다.

外戚으로 偏重된 權力 [ 編輯 ]

1874年 11月 흥선大院君 을 逐出한 뒤 皇后는 閔氏 一族을 大擧 登用하여 朝廷에 진출시켰다. 이 中 민겸호 宣惠廳 에 있으면서 軍人들의 給料를 着服하고 모래를 섞어서 주어 壬午軍亂 의 原因을 提供하기도 했다.

문정공 송준길 은 雨覆 정경세 의 사위이며 민유중 송준길 의 사위이다. 明成皇后는 송준길 집안에 對해서는 가까운 外家의 義를 지켰고, 鄭氏 집안을 秋對해서 亦是 外戚같이 各別히 생각해 왔다. [97] 明成皇后는 정경세 를 부르기를 雨覆 할아버지라고 하였다. 그래서 宋氏, 鄭氏 두 집안의 後孫들은 크게 高宗 의 寵愛를 받아 過去에 及第해서 벼슬을 하는 사람이 不知其數로 많았다. 이때 高宗 흥선大院君 은 親骨肉之間이지만 사이가 나빠져, 아버지 大院君을 嫌惡했던 것 같았다. 이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비아냥거렸다. "內戰(王妃)는 돈목을 감소시키고 大田(賃金)은 돈목을 增加시키면 좋겠다. [97] "는 것이다.

外國의 評價 [ 編輯 ]

明成皇后에 對해 日本人 을 除外한 外國人들은 大體的으로 좋게 評價했다. 이를테면 政治 敵 利害關係에 銳敏하지 않은 民間人의 記錄이 그러하다. 그들은 한결같이 明成皇后가 怜悧한 判斷力과 뛰어난 外交力을 지닌 敎養 있는 女性임을 傳해준다. [92]

英國 王立地理學會 會員이기도 한 地理學 이사벨라 버드 는 《 朝鮮과 그 이웃나라들 ( Korea and Her Neighbours )》에서 明成皇后에 對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朝鮮을 訪問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 (Isabella Bird Bishop)

閔氏는 첫눈에도 예사로운 女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매가 날카롭고 매서웠으며 頭腦回轉 또한 機敏해 보였다. 性格도 대단히 차분하고 冷徹하게 느껴졌다. 王妃는 마흔 살을 넘긴 듯 했고 퍽 優雅한 姿態에 늘씬한 女性이었다. 머리카락은 潤이 나는 黑檀이었고 皮膚는 透明하여 眞珠빛을 띠었다. 눈빛은 차갑고 銳利했으며 반짝이는 知性美를 풍기고 있었다. …(中略)… 나는 王妃의 優雅하고 魅力的인 禮儀凡節과 思慮 깊은 好意, 뛰어난 知性과 堂堂함에 깊은 印象을 받았다. 通譯者를 통해 나에게 傳達되기는 했지만 그女의 話法은 卓越한 것이었다. 나는 그女의 奇妙한 政治的 影響力, 王 뿐만 아니라 그 外의 많은 사람들을 手下에 넣고 指揮하는 統治力을 充分히 理解하게 되었다. 對話가 始作되면, 特히 對話의 內容에 興味를 갖게 되면 그女의 얼굴은 눈부신 知性美로 빛났다. 王妃의 周圍는 온통 敵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우두머리는 王의 아버지인 大院君이었다. 王妃가 그女의 才能과 權力으로 朝廷의 高位官職을 親姻戚을 登用하여 거의 席卷해 버렸으므로 그女에 對한 大院君의 反感은 엄청났다. [98]

 
이사벨라 버드 비숍 (Isabella Bird Bishop),
朝鮮과 그 이웃나라들 ( Korea and Her Neighbours )》

美國 公使館 書記인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 는 明成皇后에 對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뛰어난 學問과 知性的인 剛한 個性과 굽힐 줄 모르는 意志力을 지녔으며 時代를 追越한 政治家이자 外交街로 朝鮮의 獨立을 위해 애쓴 분이었다.
 
윌리엄 프랭클린 샌드 (William Franklin Sands)

美國 人 宣敎師이자 明成皇后의 御醫였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의 否認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女史는 明成皇后에 對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
優雅하고 謹嚴있다. 體型은 瘦瘠하고 얼굴은 蒼白했으며 눈빛은 날카롭고 초롱초롱했다. 純粹하면서도 뛰어난 基地와 魅力을 지닌 분으로 西洋의 基準에서 볼 때에도 完璧한 貴婦人이다. 그女는 世界 强大國과 그 政府에 對해 잘 알고 있었다. 섬세한 感覺을 가진 有能한 外交官이었고 反對勢力의 虛를 찌르는 데 能했다. 日本을 反對했고 愛國的이었으며 朝鮮의 利益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다. 그女는 아시아의 그 어떤 王后보다도 그 水準을 훨씬 뛰어넘는 女人이었다.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Lillias Horton Underwood), 《朝鮮見聞錄(Old Korea)》

한便, 日本의 畫家들이 그린 明成皇后의 揷畵는 모두 그 모습이 뚱뚱하고 심술궂게 그려져 있다. 또한 日本 外交官들은 그女를 암여우 ( 日本語 : 女狐 메기쓰네 [ * ] )라고 불렀다. [99]

기타 [ 編輯 ]

  • 明成皇后의 正確한 寫眞은 現在 存在하지 않고 있다. 壬午軍亂 以後 明成皇后는 寫眞 撮影을 忌避하였으리라 여겨진다. 따라서 現在 명성황후라고 알려진 寫眞은 명성황후와는 關聯이 없다 [92] 는 意見이 主流를 이루고 있다. 甚至於 語義조차 明成皇后의 寫眞을 찍지 못하였다. [99] 明成皇后가 寫眞을 忌避한 것에 對해서는 異見이 있으며, 그 밖에 同時代에 살던 李承晩 이 自身의 著書 《 獨立精神 》에 明成皇后의 寫眞이라고 言及한 寫眞이 한 個 記錄에 남겨져 있다. [100] 그러나 李承晩 의 著書에 나온 寫眞도 명성황후인가 與否는 確實하지 않다는 見解도 있다.
  • 1894年 겨울 最初로 피겨스케이팅 을 구경하였다. 英國 王立地理學會 最初의 女性會員人 이사벨라 버드 비숍 女史는 著書 ‘朝鮮과 이웃나라들’에서 1894年 겨울 高宗 皇帝 와 明成皇后의 招請으로 景福宮 향원정에서 첫 試演을 했다고 적고 있다. 또 '男女가 사당牌와 色酒家들처럼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模樣에 對해 明成皇后가 못마땅해 했다.' 고 한다. [101]
  • 明成皇后의 한글 便紙가 公開되었다.
明成皇后의 한글便紙

“글씨 보고 밤사이에 아무 頉 없이 지낸 일 든든하며,
여기는 임금의 文案도 아주 平安하시고,
東宮의 情況도 매우 平安하시니 祝壽하며,
나는 한결 같으나 다리의 痛症이 한결 같다.
영복이 檢校는 그리 하겠다.
임금을 모신 것에 對해 賞을 내리는 일은 알아보겠다.
안준옥이는 자리를 옮기겠다.
오늘 日記도 춥고 차다.”

? 明成皇后의 한글便紙 

家族 關係 [ 編輯 ]

朝鮮의 王妃
   大韓帝國의 推尊 皇后   
    명성태皇后 閔氏   
   明成太皇后 閔氏   
本館 出生
餘興 1851年 11月 5日
조선의 기 朝鮮 京畿道 驪州 監考黨
死亡
1895年 9月 26日 (43歲)
조선의 기 朝鮮 漢城府 景福宮 건청궁 鯤녕합 옥호루

父母 [ 編輯 ]

本館 生沒年 父母 備考
女性府院君 驪城府院君
민치록 閔致祿
餘興 1799年 - 1858年 민기현 閔耆顯
連日 鄭氏 延日 鄭氏
인현왕후 의 오빠 민진후 의 玄孫
한창夫婦인 韓昌府夫人
李氏 李氏
閑散 1818年 - 1874年 이규년 李圭年
安東 金氏 安東 金氏
1874年 爆彈테러로 死亡 [102] [103]
(→ 민승호 一家 暗殺事件 )      

夫君 [ 編輯 ]

夫君 廟號 및 시호 出生 死亡 備考
    高宗 太皇帝   
   高宗 太皇帝   

1852年 8月 27日

1919年 1月 21日 朝鮮의 第26代 國王
    大韓帝國의 初代 皇帝   

子女 [ 編輯 ]

爵號 이름 出生 死亡 配偶者 備考
長男 原子 元子 1871年 11月 4日 [104] 1871年 11月 8日 [105] 鎖肛症 으로 死亡 [105]
長女 公州 公主 1873年 2月 13日 [106] 1873年 9月 28日 [107]
次男 척 ? 1874年 3月 25日 1926年 4月 26日 순명효황후 閔氏
純明孝皇后 閔氏
   大韓帝國의 마지막 皇帝   
순정효황후 尹氏
純貞孝皇后 尹氏
純宗 孝皇帝
純宗 孝皇帝
3男 大君 大君 1875年 4月 5日 [108] 1875年 4月 18日 [109]
4男 大君 大君 1878年 2月 18日 [110] 1878年 6月 5日 [111]


明成皇后가 登場하는 作品 [ 編輯 ]

舞踊 [ 編輯 ]

뮤직비디오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한영우 (2001年 10月 20日).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初 1刷판. 서울: 효형출판. ISBN   89-86361-57-4 .  
  • 황원갑 (2008年 9月 30日). 《韓國史 女傑列傳》 初 1刷판. 서울: 圖書出版 바움. ISBN   978-89-5883-062-7 .  
  • 임중웅 (2003年 4月 10日). 《새롭게 꾸민 王妃列傳》 改正 1 1刷판. 서울: 김영사. ISBN   89-7558-901-3 .  
  • 지두환 (2009年 2月 14日). 《朝鮮의 王室 26 高宗皇帝와 親姻戚》 初 1刷판. 서울: 圖書出版 歷史文化. ISBN   978-89-88096-60-4 .  
  • 《朝鮮王朝實錄》〈고종실록〉 (인터넷)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國際舞臺에의 進出" 項目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各州 [ 編輯 ]

  1.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18~20쪽.
  2. 장경순. 굳이 閔妃라고 불러야 直星이 풀리는 者들 Archived 2012年 3月 24日 - 웨이백 머신 .뉴스페이스.2011年7月25日.
  3. 장경순. '닥터津' 이하응 따위가 爲人이라고? 초이스經濟 2012年8月29日.
  4. 高宗 1卷, 卽位年 叢書 , 1863年 12月 13日 《고종실록》 叢書
  5. 순부 12卷, 14年(1921 辛酉 / 日 대정(大正) 10年) 3月 9日(陽曆) 2番째 記事
  6. 精巧(鄭喬), 《大韓季年史》病인(1866)년 高宗 3年 記事.
  7. 國立文化財硏究所. “文化遺産學術硏究情報知識포털 : 명성황후 誕降 九里非” . 2008年 10月 25日에 原本 文書 (HTML)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5月 29日에 確認함 .  
  8. 한영우, 20쪽에서.
  9. 이영래 엮음, 《朝鮮王世譜》 (1997年), 412쪽에서.
  10. 안국동 仁賢 王后의 司祭에 가다 朝鮮王朝實錄, 英祖 97卷, 37年(1761 神社 / 靑 乾隆(乾隆) 26年) 6月 13日(競進) 4番째 記事에서. "…閔氏(閔氏) 여러 사람과 聖候(聖后)의 親屬(親屬)을 불러 들이도록 命하고, 그 寢室을 監考黨(感古堂)이라고 이름을 짓고 어필(御筆)로 그 扁額(扁額)을 써서 새겨서 걸도록 하였다…."
  11. 한영우, 22쪽 ~ 23쪽에서.
  12. 서울大學校 奎章閣에 太白山本(규13153), 정족산本(규13155), 예조본(규13156), 규13157, 규15078 等 總 5冊이 所藏되어 있다.
  13. 중희당에서 初揀擇을 行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卷, 3年(1866 病인 / 靑 童穉(同治) 5年) 2月 25日(乙卯) 7番째 記事에서.
  14. 민치록의 딸, 김우근의 딸 等을 再揀擇에 들어오도록 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卷, 3年(1866 病인 / 靑 童穉(同治) 5年) 2月 25日(乙卯) 8番째 記事에서.
  15. 한영우, 24쪽 ~ 27쪽에서.
  16. 別宮에 나아가 親迎禮를 行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卷, 3年(1866 病인 / 靑 童穉(同治) 5年) 3月 21日(競進) 1番째 記事에서.
  17. 지두환, 241쪽
  18. 임중웅, 370 ~ 371쪽에서.
  19. 한영우, 28쪽에서.
  20. 임중웅, 372쪽
  21. 글로벌稅契對百科 》, 〈國際舞臺에의 進出〉, 명성황후.
  22. 原子가 誕生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8卷, 8年(1871 辛未 / 靑 童穉(同治) 10年) 11月 4日(京仁) 1番째 記事에서.
  23. 原子가 拙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8卷, 8年(1871 辛未 / 靑 童穉(同治) 10年) 11月 8日(甲午) 1番째 記事에서.
  24. 原子가 誕生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11卷, 11年(1874 甲戌 / 靑 童穉(同治) 13年) 2月 8日(紳士) 1番째 記事에서.
  25. 인정전에 나아가 王世子 冊禮를 行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12卷, 12年(1875 乙亥 / 靑 光緖(光緖) 1年) 2月 18日(甁술) 1番째 記事에서.
  26. 임중웅, 373쪽
  27. 정용화, <文明의 政治思想: 兪吉濬과 近代韓國> (정용화 지음, 文學과知性社, 2004) 93페이지
  28. 前 判書 閔升鎬가 拙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11卷, 11年(1874 甲戌 / 靑 童穉(同治) 13年) 11月 28日(丁卯) 2番째 記事에서.
  29.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2007.4, 京仁文化史) 315쪽.
  30. 竄配 罪人 이승보, 김세호, 이재만을 鄕吏로 방축하라고 命하다 , 朝鮮王朝實錄, 高宗 13卷, 13年(1876 病者 / 靑 光緖(光緖) 2年) 2月 27日(己丑) 6番째 記事에서.
  31. 임중웅, 374 ~ 375쪽
  32. 인정전에 나아가 王世子빈의 冊殯禮를 擧行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19卷, 19年(1882 壬午 / 靑 光緖(光緖) 8年) 2月 19日(乙亥) 1番째 記事에서.
  33. 지두환, 245쪽
  34.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12쪽.
  35. 黃玹, 《매천야록》 (정동호 驛, 一問書籍, 2011) 55페이지
  36. 《매천야록》에서 홍계훈 의 이름을 誤記하였다.
  37. 黃玹, 《매천야록》 (정동호 驛, 一問書籍, 2011) 56페이지
  38. 임중웅, 376 ~ 377쪽
  39. 中宮殿이 昇遐하여 擧哀하는 節次를 마련하도록 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19卷, 19年(1882 壬午 / 靑 光緖(光緖) 8年) 6月 10日(甲子) 7番째 記事에서.
  40. 한영우, 30쪽 ~ 31쪽에서.
  41. 임중웅, 378 ~ 380쪽
  42. 임중웅, 380 ~ 382쪽
  43. 尹孝貞, 韓末祕史, (교문사, 1995) 138~139쪽
  44. 報恩郡의 難民을 養護 宣撫使 魚允中이 曉諭하여 解散시켰다고 雉鷄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0卷, 30年(1893 繫辭 / 靑 光緖(光緖) 19年) 3月 30日(임자) 2番째 記事에서.
  45. 民亂이 議政府에서 일어난 데 對해 고부 民亂을 處理하고 總責任者 忠淸道 軍人 이정규를 處罰할 것 等을 아뢰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1卷, 31年(1894 甲午 / 靑 光緖(光緖) 20年) 2月 15日(壬戌) 4番째 記事에서.
  46. 임중웅, 383쪽
  47. 全羅 監營이 東學 무리에게 陷落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1卷, 31年(1894 甲午 / 靑 光緖(光緖) 20年) 4月 27日(戒喩) 5番째 記事에서.
  48. 日本 公使 五토리 게이스케를 片箭에 나아가 接見하다 高宗 31卷, 31年(1894 甲午 / 靑 光緖(光緖) 20年) 5月 23日(己亥) 1番째 記事에서.
  49. 大闕에 迎秋門으로 日本 軍人들이 亂入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1卷, 31年(1894 甲午 / 靑 光緖(光緖) 20年) 6月 21日(病人) 1番째 記事에서.
  50. 조일 同盟 條約이 締結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2卷, 31年(1894 甲午 / 靑 光緖(光緖) 20年) 7月 22日(病身) 4番째 記事에서.
  51.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16쪽.
  52.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17쪽.
  53. 農民軍에 將校들과 軍人들이 討伐을 위해 나가다. 日本軍에게 犒饋하고 唯一하게 指定된 處刑法으로 敎兄과 銃殺乙定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2卷, 31年(1894 甲午 / 靑 光緖(光緖) 20年) 12月 27日(技士) 1番째 記事에서.
  54. 全琫準과 그의 무리 5名을 非敵으로 絞刑에 處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3卷, 32年(1895 乙未 / 靑 光緖(光緖) 21年) 3月 29日(경자) 5番째 記事에서.
  55.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230쪽
  56. 全琫準의 背景과 出身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57. 가 赴任한다.
  58. 박은식, 《 한국통사 》(김승일 驛, 범우사. 1997) 193쪽.
  59. 임중웅, 384쪽에서.
  60. 박정양을 內閣 總理大臣에 임명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3卷, 32年(1895 乙未 / 靑 光緖(光緖) 21年) 5月 8日(無人) 1番째 記事에서.
  61. 黃玹, 《譯註 매천야록 (上)》 (임형택 外 驛, 文學과 知性史, 2005) 448 페이지
  62. 황원갑, 616 ~ 617쪽에서.
  63. 윤덕한 (1999年 8月 19日). “閔妃는 外勢 끌어들인 張本人” . 《뉴스플러스》: 64-65. 2014年 2月 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64. 임중웅, 385 ~ 387쪽에서.
  65. "宮女들을 虐殺하던 途中 죽은 몸이 發見되었다"는 言及이 황원갑의 著書 616 ~ 617쪽에 있다.
  66. 신봉승, 《朝鮮王朝 500年:24. 王朝의 悲劇》 (금성출판사 , 2010) 390페이지
  67. 明成皇后의 죽은 몸은 興奮한 日本人 浪人들에게 凌辱을 當했다 는 主張이 임중웅의 著書의 385쪽에 言及된 김진명의 〈皇太子妃 拉致事件〉에서는 이시즈카 에조 의 祕密 報告書에 言及된다.
  68. 王后가 鯤녕合에서 卯時에 붕서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3卷, 32年(1895 乙未 / 靑 光緖(光緖) 21年) 8月 20日(戊子) 1番째 記事에서.
  69. 黃玹, 《매천야록》 (정동호 驛, 一問書籍, 2011) 153페이지
  70. 閔王后를 西人으로 降等시키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3卷, 32年(1895 乙未 / 靑 光緖(光緖) 21年) 8月 22日(京仁) 1番째 記事에서.
  71. 民王后에게 빈의 呼稱을 特赦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3卷, 32年(1895 乙未 / 靑 光緖(光緖) 21年) 8月 23日(辛卯) 2番째 記事에서.
  72. 民王后의 位號를 회복시키고 祖靈을 檄召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3卷, 32年(1895 乙未 / 靑 光緖(光緖) 21年) 10月 10日(丁丑) 1番째 記事에서.
  73. 王后 代行에게 문성의 諡號를, 홍릉의 陵號를, 卿孝의 戰壕를 週期로 議論하여 定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5卷, 34年(1897 精油 / 大韓 建陽(建陽) 2年) 1月 6日(陽曆) 1番째 記事에서.
  74. 王后 代行에게 名聲의 諡號를 주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5卷, 34年(1897 精油 / 大韓 建陽(建陽) 2年) 3月 2日(陽曆) 5番째 記事에서.
  75. 高宗이 皇帝의 자리에 오르고, 閔王后를 閔皇后로, 王太子를 皇太子로 冊封하고 山呼萬歲 等을 唱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36卷, 34年(1897 精油 / 大韓 光武(光武) 1年) 10月 12日(陽曆) 1番째 記事에서.
  76. 高宗 皇帝의 行長 朝鮮王朝實錄, 純宗附錄 10卷, 12年(1919 幾微 / 日 대정(大正) 8年) 3月 4日(陽曆) 4番째 記事에서.
  77. 신정선 (2008年 9月 20日). “[Why] 金九에게 이런 모습이?” . 朝鮮日報.  
  78. 京鄕新聞 1997年 8月 13日子, 19面
  79. 한영우, 42쪽
  80. 日政府 明成皇后 弑害 介入 物證 111年 만에 ‘햇빛’ 東亞日報 2006年 6月 5日子
  81. 도망친 罪人 고영근이 日本에서 逆賊 怪獸 우범선을 殺害하다 朝鮮王朝實錄, 高宗 43卷, 40年(1903 癸卯 / 大韓 光武(光武) 7年) 12月 3日(陽曆) 4番째 記事에서.
  82. 윤치호 <윤치호 日記(1916-1943)> (尹致昊, 김상태 便 飜譯, 역사비평사, 2007)585페이지
  83. 박은식, 《 한국통사 》(김승일 驛, 범우사. 1997) 193쪽.“...秋菊 春秋時代에 趙淳(趙盾)李 王을 誅殺했다는 것과 그 處地가 다를리 없었다. 아! 哀痛하도다. 感情이 사람의 良心을 가린다더니 어찌 이 地境에까지 이르게 되었단 말인가!”
  84. “[現代史 俗說과 眞實(2)- ‘에조文書 435號’의 實體] “明成皇后 ‘死亡 前 능辱說’… 作家의 想像力 지나쳤다”” . 2004年 12月 1日 . 2020年 9月 14日에 確認함 .  
  85. 新東亞. ““日本人 暴徒가 가슴을 세 番 짓밟고 日本刀로 亂刺했다”” .  
  86. “閔妃弑害에 使用된 칼 日本 神社서 發見” . 2020年 9月 14日에 確認함 .  
  87. Furst Lobanow sagt mir gesprachsweise, daß seinen Nachrichten zufolge die todt gesagte Konigin von Korea, noch lebt. Der russische Gesandte in Soul ware sogar von einem Koreaner geheimnißvoll gebeten worden, der Konigin Aufnahme in der russischen Gesandtschaft zu geben. Der Furst meint, daß die Japaner doch ziemlich saumselig in der Raumung von Korea seien. Ihr langeres Verbleiben deselbst hatte keinen Grund mehr da auch die Chinesen das Land geraumt hatten.
  88. “乙未事變 當時 명성황후 生存” 外交文書 發見 京鄕新聞 [單獨] “乙未事變 當時 명성황후 生存” 外交文書 發見
  89. ‘明成皇后 日 浪人 칼에 弑害돼 불태워졌다’ 그間의 定說 뒤집히나 京鄕新聞 [單獨] ‘明成皇后 日 浪人 칼에 弑害돼 불태워졌다’ 그間의 定說 뒤집히나
  90. 黃玹의 매천야록 參照.
  91. [運命의 20年] 여우 사냥-日의 造船 皇后 弑害 作戰 朝鮮日報 2004.07.27
  92.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34~35쪽.
  93. 每日經濟 1972年 1月 5日子 4面, 政治面
  94.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38쪽.
  95. 黃玹, 《매천야록》 (정동호 驛, 一問書籍, 2011) 35페이지
  96. 돈을 주고 過去 合格證을 파는 일
  97. 黃玹, 《매천야록》 (정동호 驛, 一問書籍, 2011) 45페이지
  98. “王妃는 마흔 살을 넘긴 듯 했고, 퍽 優雅한 姿態에 늘씬한 女性이었다. (中略) 對話가 始作되면, 特히 對話의 內容에 興味를 갖게 되면 그女의 얼굴은 눈부신 知性美로 빛났다. 王妃의 周圍는 온통 敵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우두머리는 王의 아버지인 大院君이었다. 王妃가 그女의 才能과 權力으로 朝廷의 高位官職을 親姻戚을 登用하여 거의 席卷해 버렸으므로 그女에 對한 大院君의 反感은 엄청났다.” 《韓國과 그 이웃나라들》/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이인화 옮김/살림.
  99. 신복룡 (2001年 12月 20日). 《韓國史 새로 보기》 初 2刷판. 서울: 圖書出版 풀빛. 190~198쪽쪽. ISBN   89-7474-870-3 .  
  100. "明成皇后 弑害 眞實은 非公式 記錄 行間 속에" Archived 2010年 8月 25日 - 웨이백 머신 韓國日報, 2010年 8月 9日
  101. 韓國 피겨 110年史 2004-10-01 23面
  102. 고종실록 》 11卷, 高宗 11年(1874年 朝鮮 個國 (開國) 483年) 11月 28日 (丁卯)
    前 判書(判書) 민승호 (閔升鎬)가 졸하였다.

    【閔升鎬가 어린 아들과 함께 한창夫婦인(韓昌府夫人)을 모시고 食事하는데, 어떤 사람이 地方 고을에서 바치는 封物(封物) 비슷한 자그마한 함 하나를 가지고 와서 바치면서 卽時 내실(內室)로 들이도록 하고서 그 사람은 돌아가 버렸다. 閔升鎬가 그 함을 보니 매우 奇妙하게 생겨서 直接 자물쇠를 여니 갑자기 轟音이 나면서 크게 暴發하여 어머니, 아들, 孫子 세 사람이 모두 害를 當하였다. 그런데 그 함이 어디에서 왔는지 調査해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103. 고종실록 》 11卷, 高宗 11年 11月 30日(1874年 朝鮮 個國 (開國) 483年) (技士)
    한창 府夫人이 拙하다
    傳敎하기를,

    "이 집에서 苛酷한 喪事를 當한 것은 뜻밖이었는데 只今 며칠 되지 않아 府夫人의 喪事를 當하였으니, 이 무슨 일인가, 이 무슨 일인가?

    틀림없이 商社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이 地境에 또다시 이른 것이다. 그 情景을 떠올리니 더욱 마음아프다.

    (中略)

  104. 고종실록 》 8卷, 高宗 8年(1871年 朝鮮 個國(開國) 480年) 11月 4日 京仁 1番째記事
    傳敎하기를,

    "中宮殿이 오늘 卯時(卯時)에 原子(元子)를 誕生하였으니, 여러 가지 擧行은 該當 組로 하여금 規例대로 하게 하라."

  105. 고종실록 》 8卷, 高宗 8年 11月 8日(1871年 朝鮮 個國 (開國) 480年) (甲午)
    傳敎하기를,

    "오늘 해시에 原子가 大便이 통하지 않는 症狀으로 不幸을 當하고 말았다. 産室廳을 撤收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또 傳敎하기를,

    "日前에 삼가 描寫(廟社)와 匕弓(?宮)에 경건히 告由祭를 지냈었다. 原子가 只今 이미 不幸을 當하고 말았으니, 일로 보면 告由祭만 擧行해야 하겠지만, 이는 前例가 없는 일이다. 禮曹 判書가 廟堂에 가서 議論하여 卽時 擧行하도록 하라."

    하였다.

  106. 고종실록 》 10卷, 高宗 10年(1873年 朝鮮 個國 (開國) 482年) 2月 13日 (壬戌)
    新詩(申時)에 王妃 電荷가 順産하여 公主를 낳았다.
  107. 고종실록 》 10卷, 高宗 10年(1873年 朝鮮 個國 (開國) 482年) 9月 28日 (戒喩)
    公主가 卒逝하다
  108. 고종실록 》 12卷, 高宗 12年 4月 5日(1875年 朝鮮 個國(開國) 484年) (辛未)
    中宮殿이 大君(大君)을 誕生하였다. 藥房의 세 提調(提調), 時任 大臣과 原任 代身, 閣臣(閣臣), 宗正卿(宗正卿)李 問安하러 入侍하였다.
  109. 고종실록 》 12卷, 高宗 12年(1875年 朝鮮 個國(開國) 484年) 4月 18日 (甲申)
    大軍이 卒逝하다
  110. 고종실록 》 15卷, 高宗 15年(1878年 朝鮮 個國(開國) 487年) 2月 18日 (戊戌)
    寅時(寅時)에 大君(大君)李 誕生하였다.
  111. 고종실록 》 15卷, 高宗 15年(1878年 朝鮮 個國(開國) 487年) 6月 5日 (癸未)
    大軍이 卒逝(卒逝)하였다. 傳敎하기를,

    "上(?)이 되지 않았으니 禮曹(禮曹)에서 初期(草記)를 擧行하는 等의 節次는 行하지 말라."

    하였다.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철인왕후
朝鮮 歷代 王后
1866年 ~ 1895年
後任
純情皇后
( 순명皇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