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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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金玉均
身上情報
出生日 1851年 2月 23日 ( 1851-02-23 )
出生地 朝鮮 忠淸道 公州郡
死亡日 1894年 3月 28日 ( 1894-03-28 ) (43歲)
死亡地 淸나라 장쑤省 상하이
國籍 朝鮮
學歷 1872年 謁聖文科에 壯元及第
家門 新 安東
父母 金炳基 (양부)
全州 李氏 否認(羊毛)
풍양 조氏 否認(양계모)
김병태(生父)
恩津 宋氏 否認(生母)
配偶者 機械 劉氏 否認
子女 膝下 1男 2女
아들 金泳鎭 [1]
宗敎 儒敎 ( 性理學 )

김옥균 (金玉均, 1851年 2月 23日 ~ 1894年 3月 28日 )은 朝鮮 末期의 政治가 , 思想家 , 急進開化派 이다. 1872年 文科 壯元及第 後 여러 要職을 두루 거쳤고, 忠義系를 組織해 開化 思想 擴散에 힘썼으며, 東南諸島開拓使 兼 冠袍傾斜에 任命돼 鬱陵島 獨島 를 開拓했다. [2] 壬午軍亂 後 日本式 急進 改革을 主張했으나, 兩廡 運動 式 漸進的 改革을 主張하는 外戚 閔氏 勢力에 번번히 발목을 잡히다 못해 甲申政變 을 일으켰다. 얼마 안되는 兵力 不足으로 淸나라 의 介入에 막혀 3日 만에 失敗했으며 日本 으로 亡命했다. 淸日 戰爭 의 勃發 直前에 中國 상하이 로 건너갔다가 홍종우 에게 暗殺됐다( 金玉均 暗殺 事件 ). 朝鮮으로 送還된 屍身은 剖棺斬屍 後 8度에 梟首됐다. 淸日 戰爭 때까지 中일 두 强大國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存在는 늘 뜨거운 감자였으며 東洋 3國 어디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後日 開化派가 執權한 뒤 復權됐고 日帝 强占期 純宗 에 依해 충달共의 諡號가 追敍됐다. [3]

本貫은 章動 (新 安東) , 號는 古筠(古筠), 別號는 고우(古愚), 亡命 中에는 이와타 슈사쿠 (岩田周作 [4] )란 假名을 썼는데 甲申政變 失敗 直後 亡命길에 치토세마루(千歲丸)號 船員 츠地 度쥬로(?藤十郞)가 지어줬다 한다. [4] 이와타 山蝸 (岩田三和)란 假名도 使用했다. 박규수 , 劉大致 , 오경석 의 文人이기도 하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1851年 2月 23日 朝鮮 忠淸道 公州郡 [5] 에서 人組 右議政 을 지낸 문충공 김상용 의 9代孫 김병태와 否認 恩津 宋氏 의 長男으로 태어났다. [6] 그가 태어났을 때 살결이 '白玉같이 곱고 희다'고 하여 이름을 '玉菌'이라 지었다고 한다. [7]

6살 때 金玉均은 5寸 堂叔이자 當代 政界 巨物인 金炳基 의 養子가 됐다. [8] 當時 有力 집안에 赤字가 없는 境遇 一家 親戚 中 養子를 들여 政治的 地位와 祭祀를 잇게 하는 境遇는 흔했어도 맏이를 養子로 보내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그는 親아버지인 김병태의 決定으로 勢道가 집안에 入養가게 됐다.

數學科 開化 思想을 배운 靑年期 [ 編輯 ]

靑年 時節의 김옥균

어려서부터 文章·市·글씨·그림·音樂 等에 두루 多才多能했다. 入養 後엔 後繼者 授業을 받아야 해 有名한 先生들을 찾아다니며 科擧 準備만 專念했다. 11살 때 養父 金炳冀가 外職에 나갈 順番이 돼 江陵 府使 로 갔다. 玉菌度 江原道 江陵으로 移住해 송담 書院에서 배웠다. [7] 江陵은 西人 의 元祖 栗谷 李珥 의 故鄕으로, 栗谷의 祠堂을 모신 그곳에서 老論 의 學統을 이었다. 5年 後인 16歲 때 다시 中央으로 前任하는 養아버지를 따라 上京했다.

1870年 當時 弘文館 提學 으로 제너럴셔먼호 事件 等을 鎭壓하고 흥선大院君 의 寵愛를 받던 박규수 의 문하가 됐다. 景福宮 東便 北村 스승宅 舍廊房에 드나들던 韓醫院이자 開化 思想家이며 뜻있는 젊은이들에게 白衣政丞(白衣政丞)이라고 불리는 劉大致 도 만나 배웠다. 스승 朴珪壽의 집엔 神奇한 物件과 사람이 많았다. 修道僧으로 釜山 倭人村을 자주 드나들던 이동인 도 만났고, 譯官 首席으로 스승과 함께 淸나라 行 使臣團에 있었던 오경석 도 만났다. 日本에서 들여온 地球본, 萬華鏡, 望遠鏡 等의 神奇한 物件도 있었고, 淸나라에서 들여온 <<瀛環志略>>,<<海國圖志>> 等 西歐 地理와 情勢, 文物을 紹介한 書籍들도 耽讀했다.

그는 哲宗 의 駙馬로 高宗 의 妹弟였던 박영효 , 餘興 閔氏 의 寵兒 민영익 , 유길준 , 박정양 , 서재필 等 同門受學하던 英才들과 함께 東大門 봉은사 에 자주 몰려나가 李東仁이 繼續 사나르던 最新 日本 書籍들을 읽으며 서로의 생각을 討論했다. 그러던 中 1872年 (高宗 10年) 文科 謁聖試(謁聖試)에 壯元及第했다. [6] 1等이기도 했지만 집안이 받쳐주지 않으면 文科에 及第해도 바로 任官되기 쉽지 않은데, 養아버지의 背景과 右議政 에 오른 스승 朴珪壽의 印度로 바로 權知 [9] 에서 成均館 全的 (典籍)에 補任됐다.

官僚生活 初盤 [ 編輯 ]

김옥균 肖像畫

1876年 2月 不平等條約인 江華島 條約 締結 後, 金玉均 等 開化派(開化派) 靑年들은 나라의 자주 獨立과 實力 養成, 改革을 推進할 政治 團體의 必要性을 切感하고, 身分을 超越한 祕密結社를 決意했다. 身分 問題 때문에 처음엔 葛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自主獨立과 近代 改革을 위해서는 이를 超越해야 한다고 說得해 뜻을 모았다.

그들은 朝鮮 末期 迷夢에 빠져 허우적대는 祖國을 수렁에서 건지려면 새 思想에 依한 一大 革新이 必要하다고 느꼈다. [7] 그래서 近代化된 祖國에의 信念을 모토로 開化에 뜻을 같이하는 同志들을 糾合해 忠義系를 組織했다. [7]

團體 政綱을 만들고 社會 各 階層의 同志들을 모아 組織하되, 옛 漆書의 便 , 洪吉童 事件 들처럼 身分秩序 紊亂罪로 찍혀 彈壓됐던 團體들과 같은 前轍을 밟지 않기 위해 祕密 契의 形態로 組織을 짰다. 김옥균, 홍영식 , 민영익 , 서광범 , 박영효 , 서재필 等이 主軸이 돼 劉大致 , 오경석 , 이동인 , 윤웅렬 等이 諮問하는 式이었다.

新文物 受容과 日本 往來 [ 編輯 ]

신문물 見學 建議 [ 編輯 ]

作品 夙昔邑産中
日本 滯留中인 開化派 靑年들
(左側부터 時計 方向으로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 윤치호 )

1876年 (高宗 16年) 朝鮮 朝廷에 强力히 建議해, 日語에 能했지만 一介 僧侶에 지나지 않던 이동인 을 正式 使臣 資格으로 日本 에 보내 신문물을 見學하게 했다. 李東仁은 바로 歸國하지 않고 몇 年間 日本에 머무르며 1880年 6月 修信使 를 이끌고 訪日한 김홍집 과 만나는 等 朝廷 內部에 開化란 話頭를 던졌다. 김옥균 自身도 日本에 가고자 80年 末 李東仁의 歸國 後 高宗 을 여러 番 說得한다. 結局 紳士遊覽團 을 꾸려 日本에 가게 됐는데 同行하려던 李東仁이 出發 直前 王宮에 들렀다 行方不明된다. 斥和派들에 依해 暗殺됐다는 所聞이 곧 퍼졌다.

日本 訪問과 신문물 視察 [ 編輯 ]

紳士遊覽團 見學 [ 編輯 ]
日本 滯留 中 처음 洋服을 입고 찍은 寫眞

1881年 12月 紳士遊覽團을 組織한 金玉均은 生家와 兩家 財産 및 周邊의 後援金 等을 모두 換錢, 總 2萬 엔의 巨金을 마련해 訪日했다. 一行은 나가사키 를 거쳐 各自 흩어졌다. 金玉均은 나가사키현 造船所 , 製鍊所 , 炭鑛 , 金鑛 等을 視察하고 採掘機械의 存在와 金屬 加工原理를 어깨너머로 把握하려 애썼다. 이어 고베 , 오사카 로 건너가 郡守基地 工場과 造幣局을 둘러보고 物資 運送用 車輛과 紙幣 주조 技術을 觀覽했다. 그 後 교토 를 거쳐 1882年 3月 도쿄 에 到着했다. 그는 게이오 大學校 를 設立한 開化 思想家 후쿠자와 유키치 의 집에 4個月 程度 머물며 日本의 發展相에 對해 談論을 나누는 한便, 그를 緣줄로 日本 政財界 人士들을 만나 그들의 朝鮮에 對한 視角과 日本의 眞意를 把握하려 했다. 후쿠자와는 이들의 歸國 後로도 書信을 몇 次例 주고받았다.

壬午軍亂 直後 [ 編輯 ]

1882年 (高宗 20年) 6月까지 곳곳에서 日本의 個火傷을 觀覽하던 그들은 本國에서 壬午軍亂 이 일어났다는 急報를 받고 遑急히 歸國했다. 흥선大院君 斥和派 가 쿠데타에 成功하면 改革은 끝이었다. 上京했을 때는 명성황후 는 艱辛히 忠州 로 이미 避身한 狀態였다. 이윽고 淸나라 가 介入해 興宣大院君을 톈진 으로 끌고간 後 明成皇后가 還宮했다. 亂이 收拾되고 高宗 夫婦가 實權을 잡아 斥和派가 逐出되자 開化派 靑年들의 發言權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는 承政院 右副承旨, 參議交涉通商事務(參議交涉通商事務)를 거쳐 吏曹參議, 戶曹參判, 外衙門協辦(外衙門協辦) 等 各種 火要職(華要職)에 任命됐으며 開化黨 同門들을 朝廷에 심기 위해 努力했다. 同門 막내 서재필 이 門과 增廣試에 最年少 合格하는 傾斜도 있었다. 아울러 第1次 日本 訪問을 中途에 그치고 歸國해야 했던 그는 틈틈이 《氣化近似 箕和近事》를 著述해 王에게 바쳤다. 그는 著書에서 日本 이 東洋의 英國 이 되려하므로 朝鮮은 東洋의 프랑스 처럼 近代文化國家를 만들어 完全 獨立을 成就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政治 全般에 大更張改革(大更張改革)李 斷行돼야 한다고 主張했다.

第3次 修信使 派遣에 參與 [ 編輯 ]
홍영식

1882年 7月 壬午軍亂 淸나라 의 介入으로 收拾이 됐음에도 日本이 賠償을 要求해왔다. 또다시 濟物浦 條約 이란 不平等 條約을 강요당한 朝鮮 朝廷 輿論이 急速히 反日로 돌아섰다. 唐慌한 開化派들은 日本의 眞意를 把握하고 條約을 再協商해 賠償金을 줄이려는 目的으로 金陵위 박영효 一行이 修信使로 가기로 했다. 歸國 直後였던 김옥균 亦是 高宗 에게 다시 放逸하게 해달라 建議해 允許를 얻었다. 修信使는 朴泳孝를 代表로 김만식(金晩植), 홍영식 , 서광범 等으로 許可가 났으며 金玉均은 同門 민영익 과 함께 拷問 資格으로 參與했다. 日本 各界 人士와 人脈을 넓혀 놨던 그였지만 豫想보다 훨씬 더 再協商에 어려움을 겪었다. 다만 日本의 西歐式 政府 組織과 三權 分立 에 깊은 感銘을 받고 朝鮮 改革의 必要를 다시금 切感했다.

日本은 修信使 一行을 國賓 待接하는 等 極盡하게 對해 젊은 使臣들을 親日 或은 知日派로 만들기 爲해 많은 努力을 傾注했다. 當時 外務大臣 이노우에 가오루 는 開化派 官僚들에게 次官 17萬 엔을 提示하며 高宗의 信任狀만 가져온다면 더 많은 借款을 無償으로 提供하겠다 約束했다. 當時 修信使 一行은 빌린 17萬엔의 借款 中 濟物浦 條約에 따라 賠償金 1回分 5萬엔을 辨濟하고 나머지는 修信使 滯留 經費 等으로 모두 日本에서 썼다. 歸國 後 手中에 남은 돈은 없었다.

日本 滯留 [ 編輯 ]

1882年 (高宗 19年) 11月 修信使 一行은 새로 赴任하는 日本 公使 다케조에 신이치로 와 함께 歸國하고, 金玉均과 徐光範 等만 日本에 남아 情勢를 더 살피고 條約 再改正에 對한 日本 政府의 協助와 借款 導入에 對한 突破口를 찾기로 했다. 그는 國賓 資格이었지만 旅館에 投宿하고 막일을 하며 生活費와 活動 資金을 스스로 모았다. 그가 6個月 日本 滯留 中 반드시 于先 導入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中 하나는 바로 專賣 制度 였다. 日本은 西歐를 본따 소금 酒類 담배 를 國家에서 專賣하고 主要 海産物과 交通 施設 等에 稅金을 賦課해 늘어난 國家 財政을 바탕으로 近代化 및 軍事力 增强에 心血을 기울였다. 歸國 後 金玉均은 日本처럼 술과 담배, 소금, 人蔘 等의 特産品을 專賣해 政府의 財政을 늘릴 것을 建議했으나 이는 提案 專賣 品目을 獨占하던 王室 宗親들, 一部 特殊 惠澤 階層의 反撥을 부를 것이 明若觀火했으므로 默殺됐다. 이 期間 中 著書 《治道略論》을 보면 道路 整備를 위한 治道局(治道局) 設置, 技術者 養成, 機械 具備, 汚物 處理法 等의 改革案과 財源 마련을 위한 17個 稅目(稅目)들이 列擧돼 있으며 같은 內容을 漢城旬報 에도 揭載해 共感을 얻기 위해 애썼다. [8]

그의 日本 滯留中 日本 政府側은 自國 軍備 增强이 朝鮮의 獨立을 돕고 아시아의 平和를 圖謀하기 위함이라 甘言을 흘리고는 借款을 周旋하겠다 다시금 强調하며 그를 說得했다. 그는 그들의 眞意가 무엇인지 半信半疑하면서도 그들의 大義名分을 받아들였다. 金玉均은 丙子胡亂 以後 朝鮮의 宗主國이 된 淸나라 의 內政干涉에 매우 批判的이었으며 朝鮮의 自主 國防力을 키워야 한다고 믿었다. 高宗 도 이에 共感해 서재필 과 그의 동생 서재창 및 開化派에 入黨한 部下들인 17名의 靑年들을 日本으로 보내 近代式 軍事技術을 배워오게 했다. 그는 朝鮮에 西歐式 軍事學校를 짓기 위한 靑寫眞을 만들었다. 그는 朝鮮 朝廷에 留學生을 더 選拔해 보내자고 上疏하는 한便 同門受學한 동생들과 部下들이 日本에 到着하자 이들의 身元을 保證해 日本 內 여러 學校에 入學시키고는 1883年 (高宗 20年) 3月 나가사키 에서 배便으로 歸國했다. [8]

身分制 廢止와 社會改革論 [ 編輯 ]

그는 于先 身分制度, 門閥의 撤廢, 人材의 公平한 登用, 公開 採用 試驗 導入을 建議했다. 이어 王室財政과 國家財政의 分離, 無償 土地 分配로 實質 稅收 確保를 主張했다. 産業 奬勵策으로 近代 工業의 建設, 鑛業의 開發, 先進 科學技術의 導入을 主張하고, 商業振興策으로 會社制度 立法, 貨幣改革, 關稅 自主權 確保와 稅金 領收證 制度의 導入을 建議했다. 그밖에도 鐵道 敷設과 汽船 海運의 導入, 全身會社 設立, 人口 調査, 農業과 養蠶, 牧畜 等 商業的 農業 振興, 林業 開發, 漁業 開發과 捕鯨業 導入 等 商工業 全般에 걸친 大改革을 부르짖었다. 또한 西洋式 學制를 導入해 新式 學校를 全國的으로 設立하자고 主張했다. 자주 國防力 養成과 地方官의 警察權, 法官權限을 分離하며 아울러 警察制度, 刑事行政과 司法權 改革을 促求하고, 道路 改善과 整備, 衛生의 改革, 宗敎와 信仰의 自由 許容, 朝鮮의 永世 中立化까지 主張김옥균政治 活動

開化派 活動 [ 編輯 ]

鬱陵島 獨島 開拓 [ 編輯 ]
金玉均의 親筆 書信

日本의 軍備 擴張과 征韓論 에 對해 알게되자 日本이 未久에 侵略할 可能性이 있음을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 윤치호 等 開化黨 同志들에게 넌지시 비치기도 했다. 아울러 鬱陵島 獨島 海域에서 包莖 事業으로 떼돈을 벌어가던 日本을 警戒했다.

1883年(高宗 20) 3月 歸國과 同時에 東南諸島開拓使 兼 管捕鯨事(東南諸島開拓使 兼 管捕鯨使)로 任命됐다. 이는 金玉均이 願하는 것이기도 했으나 事實 左遷이었다. 壬午軍亂을 收拾한 後 高宗의 어심은 동도서기로 기울어 있는데다가 明成皇后와 外戚들이 政治 前面에 登場하면서 밀려난 結果였다. [10] 그러나 外職에 나가서도 그는 맡은 바 任務를 다했다. 于先 鬱陵島에 南海岸과 湖南 出身 漁夫들을 定着시켜 無人島火를 막았다. 鬱陵島에 住民을 정착시키는 일은 가뜩이나 어려운 政府 財政을 기울여야 하는 일이었으나 高宗도 決斷했다. 어쨌든 定着民들이 고기잡이를 나가면서 朝鮮 때 지리 名稱인 于山島를 '돌섬'이라는 뜻의 湖南 方言 '독섬'으로 불렀다. 이게 獨島 의 語源이 된다.

閔氏 戚臣, 斥邪派 勢力과의 葛藤 [ 編輯 ]
조日修好條約 宴會記念도, 건너便 가운데가 김옥균, 앞줄 맨 左側 無關福을 입은 이는 홍영식 , 맞은 便 西洋人은 묄렌도르프 이다. 食卓에는 스테이크와 나이프가 보인다.
(安中植 作, 1883年)

1883年 陰曆 2月 內部 矛盾과 거듭된 賠償 條約等으로 거덜난 朝鮮의 財政 問題 때문에 묄렌도르프 가 淸나라에서 拷問 資格으로 派遣됐다. 그는 閔氏 外戚들을 主軸으로 한 守舊派들에게 當五錢 主潮를 主張했다. 이를 알게 된 金玉均은 펄쩍 뛰었다. 이미 흥선大院君 景福宮 重建 때 發行한 當百錢 의 잘못을 또 하겠느냐며 急히 上疏를 올렸다. 그는 當五錢이 財政 確保는커녕 物價 暴騰으로 民心만 離叛될 거라며 反對했다.

이 問題를 놓고 아직은 開化黨 同門이던 민영익 의 집에 묄렌도르프를 비롯한 穩健派(守舊黨) 重鎭들과 急進開化派들이 모였다. 스테이크와 포크 나이프를 앞에 둔 채로 金玉均은 묄렌도르프를 論理的으로 몰아붙여 입도 못떼게 했다. 이는 두 派의 反目이 表面에 드러나는 契機가 됐다.

그러나 삼정이 紊亂한 朝鮮의 現實에서 旣得權을 그대로 두고 近代化를 위한 돈을 마련할 方法은 밖에서 꿔오든가 아니면 찍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結局 守舊派의 뜻대로 當五錢은 發行됐고 物價는 暴騰했다. 當五錢은 當時까지 通用되던 常平通寶 의 5倍에 達하는 額面價로 常平通寶 5錢과 同一한 額面價로 價値가 定해졌지만 市中에서는 常平通寶와 同一한 額面價로 通用되고 있었다. 地方官들은 常平通寶와 當五錢의 單位가 兩으로 같은 點을 惡用해, 租稅를 當五錢 額面價의 5倍로 流通되던 常平通寶로 걷어놓고 나라에는 當五錢의 額面價대로 代納하는 過程에서 差額을 着服한 後 中央高官大爵들에게 上納했다.

金玉均은 잘못된 通貨 政策으로 엔貨 換率이 1 對 2.5 程度에서 1代 8로 急落하며 더욱 惡化된 對日(對日) 貿易 逆調 및 政府 財政 赤字에 對해 上疏를 멈추지 않았지만, 오히려 閔氏 一派를 비롯한 守舊派, 묄렌도르프들은 '金玉均과 開化派가 발목을 잡기 때문에 政策 效果가 더디 나타나는 거'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묄렌도르프 等 朝鮮에 淸나라 입김이 剛해져 影響力을 잃을까 憂慮한 日本은 朝鮮에 次官이란 카드를 내민다. 1883年 金玉均을 通해 日本은 高宗이 委任狀만 주면 借款을 追加 提供하겠다고 朝鮮 朝廷에 알려왔다. 高宗 亦是 마다할 理由가 없었다. 高宗은 바로 金玉均에게 委任狀을 들려보냈다.

日本의 立場 變更과 借款導入 失敗 [ 編輯 ]
김옥균, 1884年

1883年 6月 高宗 의 委任狀을 받아든 金玉均은 다시 日本 으로 건너갔다. 이를 알게 된 묄렌도르프와 守舊派들은 高宗에게 달려가 當場 取消하라고 壓迫하는 한便, 開化派가 祕資金을 만들려한다고 루머를 퍼뜨렸다. 묄렌도르프는 다케조에 신이치로 日本 公使에게 金玉均의 委任狀이 僞造된 거라 흘렸다. 다케조에 工事는 바로 이를 本國에 打電했다. 守舊派의 妨害 公爵은 全方位的이었다.

이를 까맣게 몰랐던 金玉均은 次官 交涉 테이블에 앉았으나 日本 政府는 그를 불러놓고는 借款을 一方的으로 取消했다. 金玉均은 政府 次官에 失敗하자 日本에 主宰하고 있는 外國系 上司와 民間 銀行을 통한 國債 發行을 試圖했다. 朝鮮 政府는 國際 信用이 없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日本 政府의 保證을 要求했고 이는 不可能한 일이었다. 結局 金玉均의 日本行은 完全히 失敗로 끝나고 말았다.

美國行 高麗와 丹念 [ 編輯 ]

金玉均은 次善策이었던 國債 發行마저 如意치 않자 서광범 과 함께 美國 에 가려했다. [11] 그러나 結局 그는 美國行만은 斷念했다.

甲申政變 前後 [ 編輯 ]

調鍊局 設置 試圖와 失敗 [ 編輯 ]

金玉均은 1883年 3月 서재필 , 서재창 , 이규완 , 신응희 , 正行징 (鄭行徵), 임은명 (林殷明), 유혁로 , 신중모 , 윤영관 , 하응선 , 정난교 等을 日本으로 留學보낸 바 있다. 이 中 서재창, 이규완, 유혁로 等은 도야마 下士官學校 에 入學한다. [12] 그리고 나머지는 各自 專攻 學校에서 政治, 警察 , 郵便 , 關稅 , 財政 制度를 배웠다. 이들은 政府 支援이 끊어지자 1年 後 歸國해야 했다. [12] 이 무렵 京畿道 光州 留守 로 左遷돼있던 박영효 가 下士官 學校 在學生 신복모, 이규완, 유혁로, 정난교 等을 主軸으로 新式 軍隊 創設에 着手했다. [13] 總員 600名 程度로 [13] 兵曹 傘下의 調鍊局 이란 西歐式 軍事學校 形式으로 許可됐다. 朴泳孝는 自己 집까지 日本 公使館에 판 代金 5000원으로 軍資金까지 마련했다. [14]

그러나 開化派들의 成長을 警戒한 閔氏 外戚들은 高宗을 壓迫해 調鍊局 設置를 取消시키고 이듬해 海防營 (海防營)을 設置해 閔氏 戚族과 이완용 等 門閥의 子弟들을 中心에 앉혔다. 민영환 이 主張해 江華島 等 主要 防禦地點에 設置된 海防營은 京畿, 忠淸, 黃海道 3個道에 設置됐다가 甲申政變 後 統衛營으로 改稱된다.

日本 借款導入 失敗 [ 編輯 ]

1884年 2月까지 次官 및 國債 調達에 매달린 그는 빈손으로 歸國했다. 그는 上京길에 日本 領事館에 갔다가 協商이 왜 失敗했는지 뒷事情을 알게 됐다. 憤怒와 挫折에 빠진 그는 日本領事館을 나와 高宗 에게 歸國人事만 하고 조용히 돌아갔다. 이미 開化派의 모든 事業은 中斷된 狀態였다. 박영효 가 推進하던 兵力 養成 事業과 新式 武器 購入 亦是 資金 不足으로 中斷되고 600餘 兵力은 한규직 , 윤태준 의 海防營 밑으로 編入돼 結局 閔氏 政權만 좋은 일이 됐다. 朴泳孝는 光州 留守 자리마저 解任됐다.

守舊派 打倒 計劃 [ 編輯 ]
김옥균

開化派들이 主張해 設立된 朝鮮 最初의 官立 言論 出版社 博文局 發行의 漢城旬報 도 廢刊 危機였다. 淸나라 軍士들의 行悖를 報道했다가 外交問題로 飛火돼 日本人 職員들이 쫓겨나고 政府 支援이 끊겨 經營難에 빠졌다. 開化派들의 言路가 막힌데다가 金玉均은 外的으로는 外資 導入 失敗를 繼續 追窮당했고 內的으로는 刺客에게 목숨까지 노려졌다. 그는 곧 모든 官職을 辭退하고 現在 정독圖書館 자리인 北村 집에 蟄居했다.

그의 潛在的 隱退 後에도 閔氏 戚族 및 守舊派들은 金玉均을 죽이라 上疏를 올리는 한便 虎視眈眈 刺客을 보내 威脅했다. 大院君의 斥邪派는 더더욱 金玉均 等에게 이를 갈았다. 그런데 開化派 同志 민영익 조차 漸次 元來 出身인 閔氏 外戚 勢力으로 기울었다. 閔泳翊이 1883年 의 유럽 視察 等 西歐 文明 自體를 直接 본 터였음에도 오락가락하자, 더욱 絶望에 빠진 金玉均 等은 革命을 計劃한다.

甲申政變 前夜 [ 編輯 ]

守舊派(穩健開化派)와 斥邪派 兩側의 攻擊 및 淸나라 의 壓力, 묄렌도르프 等의 妨害 工作 等으로 窮地에 몰리자 金玉均은 順理的인 方法으로는 不可能하다고 생각하고 革命을 머리에 그렸다.

當時 朝鮮은 全國 各地에서 民亂으로 官公署 襲擊까지 있었고 東學 敎徒들의 敎祖 身元과 布敎 許容 要請, 天主敎 의 布敎 許容 要求 및 改新敎 流入과 擴散, 傳染病과 凶年, 流浪民 等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게다가 1884年 8月 淸나라 베트남 宗主權을 두고 프랑스 와 衝突해 可用 兵力을 거의 베트남 戰線에 投入해야 했다. 減軍 計劃에 따라 駐朝鮮 靑軍 兵力 亦是 이미 半토막 난 狀態였다. 모든 狀況은 開化派에게 決斷을 要求하고 있었다.

金玉均에게 動員 可能한 兵力은 '忠義系'의 40餘 祕密組織員과 日本 留學生 出身 30餘 名을 主軸으로 開化派 同志인 咸鏡南道 兵馬節度使 (줄여서 南兵使) 윤웅렬 의 兵力 1500이 있었고, 비록 海防營 傘下에 있으나 元來 調鍊局 出身인 600餘 名 等이었다. 問題는 守舊派 背後의 淸나라 軍이었다. 반드시 日本軍의 힘이 必要했다.

金玉均은 日本을 떠보기 위해 다케조에 신이치로 公使에게 次官 交涉 失敗 件에 對해 抗議하고 朝鮮 改革을 力說했다. 그러자 다케조에는 次官 交涉 失敗가 自身의 責任임을 是認하고 앞으로는 金玉均에게 積極 協助하겠노라 約束했다. 擧事를 決心하기에는 아직 그 程度로는 믿을 수 없었다. 며칠 後 王室 宗親 박영효 를 보내 다시 떠보자 金玉均의 뜻을 把握한 그는 "淸나라는 將次 亡할 것이니 貴國의 改革 知事들께서는 이 機會를 絶對 놓치지 마시오."라고 答했다.

擧事 直前 [ 編輯 ]

그해 9月 追加 兵力 募集과 君子 調達 等의 本格的인 擧事準備에 나섰다. 金玉均은 擧事 10月 初 다케조에를 다시 만나서 이른바 '삼책(三策)'을 알려 주고 協助에 對한 確答을 받아 냈다. 삼책이라 함은 첫째, 忠義系를 中心으로 한 開化派의 團結을 통하여 政變을 計劃대로 추진시키고 둘째, 高宗을 說得하여 政變을 承認받아서 擧事 名分을 確立한 다음 셋째, 靑軍의 干涉이나 妨害 策動은 日本軍이 막아 준다는 內容이었다. 日本側의 同意를 얻어낸 金玉均은 擧事 5日 前인 10月 12日 에 大闕 안으로 들어가 高宗과 單獨으로 대면하여 世界의 情勢와 淸나라 와 結託한 閔氏 政權의 賣國的 作態를 說明하고, 閔氏 一派가 要職을 掌握하여 王을 꼭두각시로 여긴다는 點을 指摘한 뒤 改革을 推進할 수 있는 새 政府의 必要性을 主張했다. 金玉均의 逆說에 感動한 高宗 은 마침내, "國家의 命運이 危急할 때, 모든 措處를 京義 智謀에 맡기겠다."는 指示를 隱密히 내렸다.

高宗의 同意를 얻은 金玉均은 윤치호 를 통해 美國 工事에게도 곧 政變이 있을 것임을 알리고 協助를 付託하여 對內外的으로 擧事를 爲한 準備 作業을 마쳤다. 아직 完全히 미덥지 않은 日本 側에게는 擧事 日子를 正確히 알리지 않았지만, 홍영식 郵政局 落成式 날을 巨事日로 定하고 同志들과 準備를 마무리했다. 이때 다케조에로부터 日本 政府의 正確한 指示를 받은 後에 擧事를 일으키자는 要請을 받았지만 金玉均은 더 以上 遲滯할 수 없다고 判斷했다.

1884年 10月 17日 午後 6時 貞洞 에 新築한 郵政局 落成式에는 郵政局總辦 홍영식 의 招請으로 많은 內外 貴賓의 參席하여 落城 祝賀宴을 했다. 宴會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金玉均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日本 公使館의 詩魔무라 書記官에게 이날 擧事를 일으킬 것임을 隱密히 알려서 日本軍 動員을 준비시켰다. 金玉均의 連絡을 받은 서재필 은 바로 兵力을 集結, 이동시켰고, 郵政局 入口에 埋伏시켰다.

宴會가 거의 끝날 무렵 郵政局 北쪽 建物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火災가 發生했다. 가장 먼저 建物 밖으로 뛰쳐나갔던 민영익 이 埋伏하고 있던 開化派 武士들에게 칼을 맞고 한쪽 귀가 떨어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허겁지겁 다시 들어오자 宴會場 안은 完全히 阿修羅場이 되었다. 이때를 틈타 김옥균, 박영효 , 서광범 等은 急히 郵政局을 빠져나와, 埋伏하고 있던 徐載弼 麾下 士官 生徒들을 다시 景祐宮 으로 이동시키고 金玉均은 교동 에 있는 日本 公使館으로 가서 日本軍의 出動을 確認한 後에 大闕로 向했다.

甲申政變과 三日天下 [ 編輯 ]

10月 17日 저녁 金玉均 等은 昌德宮 金虎門 앞에 當到하여 김봉균 , 신복모 等이 거느리고 온 40餘名의 兵士들을 門 밖에서 지키게 하고는 미리 內通하고 있던 守門軍이 門을 열어주어 바로 入闕했다. 또한 윤경완 이 引率하는 武裝兵力 50餘名에게는 專門 앞을 지키게 하고 김옥균, 박영효 , 서광범 세 사람은 高宗이 있는 沈澱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高宗 에게 郵政局에서 變亂이 일어난 것과 그 原因이 閔氏 戚臣 勢力의 陰謀와 腐敗, 民生의 疲弊 때문임을 알리고 形勢가 危急함으로 景祐宮 으로 避難할 것을 要請했다. 처음에는 事態의 自初至終을 다지던 高宗 內外도 沈澱 東北쪽 通明殿 附近에서 엄청난 爆發音이 들려오자 놀라서 그들을 따라나섰다.

高宗 一行이 景祐宮에 到着하자 朴泳孝는 다케조에와 함께 日本軍 兵士 200名을 景祐宮 周邊에 配置하였다. 그리고 서재필 이 指揮하는 士官 生徒 13名은 國王의 居處 바로 앞을 지키면서 出入者를 統制하도록 措置한 後에, 王命으로 重臣들을 불러들여서 一旦의 閔氏 戚臣 勢力을 刺殺해 버렸다. 그날 밤 軍士들은 戚臣界와 守舊派 人士들은 윤태준 , 이조연 , 한규직 , 척新人 민영목 , 조영하 , 순명효황후 의 親庭아버지 左贊成 민태호 等과 擧事에 同調하기로 했다가 變節한 內侍 유재현 等을 殺害하였다.

10月 18日 隻身 政權 指導者들을 處刑한 開化派는, 18日 새벽 新政府의 發足을 알리고 人事를 斷行하였다. 高宗의 四寸兄 이재원 領議政 에, 홍영식 左議政 에, 윤웅렬 刑曹判書 , 박영효 前後領事 , 서광범 左右領事 , 서재필 兵曹 參判 , 신기선 李朝 參判 , 承政院 都承旨 박영교 로 內定하여 內閣을 掌握하였다.

金玉均은 財務와 內務를 管掌하는 好調의 借款인 好調 參判 을 맡아 改革에 必要한 財政의 調達을 擔當하기로 했다. 內閣 構成을 마친 새 政府는 14條項의 綱領을 發表한다.

  • 첫 番째, 請에 잡혀 간 大院君을 還國시키고 請에 對한 朝貢을 廢止한다.
  • 두 番째, 門閥을 廢止하고 能力에 따라 人材를 登用한다.
  • 세 番째, 租稅 制度를 改革하여 管理의 不正을 막고 가난한 百姓을 保護하여 國家 財政을 늘린다.
  • 네 番째, 內侍府를 없애고 그 中에서 優秀한 者는 官職에 登用한다.
  • 다섯 番째, 貪官汚吏 中에서 그 罪가 極甚한 者는 處罰한다.
  • 여섯 番째, 百姓들에게 빌려 주었던 政府 所有의 患者미는 모두 蕩減하고 받지 않는다.
  • 일곱 番째, 奎章閣을 廢止한다.
  • 여덟 番째, 빠른 時日 內에 巡檢(巡檢)을 두어 治安에 注力한다.
  • 아홉 番째, 惠商公局(惠商公局)을 廢止한다.
  • 열 番째, 流配되거나 拘束되어 있는 者는 兄을 減해 준다.
  • 열한 番째, 4開營을 1開營으로 統廢合하되, 그 中에서 壯丁을 봅아 近衛隊를 設置한다.
  • 열두 番째, 一般 財政은 好調에서 統轄하고 其他 모든 財政 擔當 官廳은 廢止한다.
  • 열세 番째, 大臣과 參贊은 每日 闔門 안에 있는 議政所에 모여 精靈을 議決하고 頒布한다.
  • 열네 番째, 六曹 以外의 모든 不必要한 機關은 없애되, 大臣과 參贊이 이를 決定하게 한다.

그밖에 開化派 革命 政府는 다음과 같은 具體的인 改革案을 發表했다.

  • 첫 番째, 全 國民은 斷髮한다.
  • 두 番째, 外國 留學生을 選拔하여 派遣한다.
  • 세 番째, 宮內性을 別途로 設置하여 王室 業務와 一般 國務를 區分한다.
  • 네 番째, 國王을 '星霜(聖上) 陛下(陛下)'로 稱해서 他國의 皇帝와 同等하게 禮遇하며 大조선국의 君主로서 尊嚴을 維持한다.
  • 다섯 番째, 只今까지의 管制를 廢止하고 內閣에 여섯個의 部署를 둔다.
  • 여섯 番째, 科擧制度를 廢止한다.
  • 일곱 番째, 內外의 公債(公債)를 募集하여 國家 財政을 忠實히 한다.

그러나 支持基盤이 脆弱한 內閣은 閔氏의 戚臣 政權이 淸나라 軍士를 끌어들여 反擊을 加하자마자 그대로 沒落하게 된다.

政變의 失敗와 隱身 [ 編輯 ]

以後 '人民平等', ' 門戶開放 ' 等 改革을 斷行할 것을 主張하였으나 [6] 오히려 易心을 품는 것으로 曲解되었다.

1884年 保守派인 事大黨의 閔氏 一派를 後援하는 淸나라가 安南 問題 로 苦悶하고 있는 틈을 타서 甲申政變 을 일으켰다. 事大黨의 中心人物을 肅淸하는 等 政變을 主導하여 當時 新政府의 好調參判 兼 惠商公局 堂上에 就任했다. 그러나 政變이 淸나라 軍隊의 介入으로 三日天下로 끝나자 다케조에 신이치로 와 함께 日本으로 亡命하여 후쿠자와 유키치 에게 依託하였다.

明成皇后 閔氏 는 景祐宮으로 옮긴 다음 날 閔氏 戚臣 勢力으로부터 민영목 , 조영하 , 민태호 等의 暗殺 小食과 민영휘 의 負傷 消息을 接했다. 守舊派의 一員인 前 京畿監司 심상훈(沈相薰)을 通해 事件의 實相을 알게 된 閔氏 勢力이 淸나라 軍隊를 개입시켰고, 곧 滿洲에 駐屯中인 淸나라 軍士를 끌어들였다. 閔妃는 繼續 居處가 너무 狹小하다면서 昌德宮으로 還宮하자고 高宗 에게 닦달하였다. 넓은 昌德宮과 달리 景祐宮은 좁아서 警備하기가 쉽기 때문이었는데 王后 閔氏가 이를 트집잡고 나온 것이었다. 王后의 不滿에 高宗은 할 수 없이 조금 더 넓은 桂洞宮으로 옮기도록 하였으나 王后는 繼續해서 還宮을 要求했다. 그러나 明成皇后와 閔氏 一派가 淸나라와 內通한 것을 認識하지 못한 金玉均 等이 外部 收拾에 바쁜 틈을 타 閔氏는 警備를 책임지고 있던 다케조에를 졸라서 다시 還宮하였다. 뒤늦게 이 事實을 알게 된 金玉均은 다케조에에게 抗議했지만 다케조에는 "昌德宮으로 還宮해도 經費에는 問題가 없다."며 큰소리를 쳤다. 이미 王后의 强力한 要求로 飜覆이 어렵게 되자, 朴泳孝 等은 日本軍의 무라카미 中隊 兵力과 함께 國王 부처를 護衛하여 昌德宮으로 引率下였다. 그러나 해질 무렵 大闕 門을 닫으려고 하자, 宣人門 밖에까지 當到한 淸나라 支援軍이 妨害하여 兩側 사이에 交戰이 發生했다. 朴泳孝는 强勁하게 對應하자고 主張하였으나 金玉均과 다케조에는 妥協案을 하기로 決定, 闕文을 닫지 않고 闕 밖은 淸軍이 警備를 서고 闕 안은 日本軍이 지키는 것으로 靑軍 側과 合意했다.

10月 21日 아침이 되자 다케조에는 突然히 態度를 바꾸어 日本軍은 形便上 오랫동안 朝鮮의 闕 안에 머무를 수가 없다고 하면서, 그날 안으로 撤收하겠다고 通報했다. 갑작스러운 다케조에의 態度突變에 唐慌한 金玉均은 바로 日本公使館으로 달려가 다케조에와 談判을 벌여서, 開化 政權이 스스로를 保護할 수 있을 때까지 3日間 동안 撤兵을 미루고, 改革 事業의 推進을 위한 資金 調達에 協助한다는 約束을 받아 냈다. 그러나 다케조에는 撤兵을 强行한다.

21日 午前 淸나라 提督 宇宙油 (吳助維)는 都城이 平安하다는 便紙가 高宗에게 傳達되고 바로 위안스카이 가 600餘名의 兵士를 帶同하여 國王과의 接見을 要請했는데, 金玉均 等은 위안스카이의 接見은 許諾하나 淸軍이 大闕로 들어오는 것은 안 된다고 主張하여 물리쳤다. 그러나 그날 午後 위안스카이는 全 右議政 심순택 에게 淸軍 出動을 要請하게 하여 淸軍의 軍事的 行動에 對한 正當性을 억지로 確保한 다음, 마침내 5百名으로 構成된 한 部隊는 宇宙留意 指揮 아래 宣人門 쪽으로, 8百名으로 編成한 다른 部隊는 위안스카이 自身이 直接 指揮하여 敦化門에서 昌德宮 方向으로 進擊하여 宮闕 外郭을 지키고 있던 日本軍과 靑軍 사이에 交戰이 벌어졌다. 當時 昌德宮을 에워싸고 攻擊했던 人員은 朝鮮에 駐屯하고 있던 靑軍 全 兵力과 守舊派가 掌握했던 左右英 所屬 朝鮮 軍卒들에다가, 開化派가 日本과 結託하여 國王을 軟禁하고 있는 것으로 誤解한 一般 百姓들까지 加勢하여 엄청난 數의 大部隊를 이루었다. 그러나 宮闕을 守備하던 兵力은 日本軍 200名과 開化派 自體 動員 兵力 800名 程度로 그 數에서 이미 決判이 나 있었으며, 더구나 開化派의 兵力은 변변한 武器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

逃避 過程 [ 編輯 ]

淸나라 軍士와 朝鮮人 加擔者들과 開化派 , 日本軍이 交戰하는 사이 王后 閔氏는 淸나라軍 陣地를 통해 이미 北關王廟로 옮겨갔고, 高宗 도 뒤따라가려고 했기 때문에 新政府 主要 人士들은 할 수 없이 日本軍과 함께 이를 護衛하여 나다가다 途中에 各自의 判斷에 따라 方向을 달리하게 되었다. 홍영식 , 박영교 等과 士官 生徒 7名은 高宗과 함께 北廟로 가고, 金玉均은 박영효 , 서재필 , 서광범, 變數(邊洙), 이규완(李珪完) 等과 나머지 士官 生徒는 다케조에를 따라 日本 公使館으로 向했다. 洪英植 等은 開化派 中에서 比較的 溫乾한데다가 위안스카이 와 親分도 있고 戚臣 中에도 가까운 사람들이 많아서 國王을 따라가면 身邊은 安全할 것으로 믿었으나 그들은 北廟에 到着한 直後 그들 모두는 慘酷하게 殺害되고 말았다.

한便 日本 公使館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金玉均은 昌德宮 北門으로 빠져나가 옷을 變服하고 숨은 朴泳孝, 徐光範, 서재필, 變數 等 9名과 함께 仁川主宰 日本 領事館 職員 고바야시의 周旋으로 第一銀行支店長 기노시타의 집에 隱身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追擊대대代를 이끌고 오자, 기노시타의 配慮로 日本人 옷으로 갈아입고 박영효, 서재필, 徐光範과 10月 20日 午後에 다케조에와 함께 日本軍 의 護衛 아래 濟物浦에 碇泊中인 지토세마루(千歲丸, 천세환)에 乘船했다.

홍영식 , 박영교 를 處刑한 戚臣 勢力은 日本軍艦이 碇泊한 仁川으로 사람을 急히 보냈다. 隻身 勢力인 심순택 議政府 領議政 으로 하는 새로운 內閣 構成을 마치고 金玉均 等을 '오적'으로 規定하여 仁川 에 사람을 보내 다케조에 신이치로 에게 金玉均 等의 身柄을 引導해 달라고 要求했다. 다케조에는 金玉均, 朴泳孝, 徐光範 等 一行에게 배에서 내릴 것을 要求했다. 戚臣勢力의 追跡과 다케조에의 背信으로 자칫 배에서 내몰리는 狀況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信義없는 行動에 憤怒한 지토세마루 船長 쓰지 가쓰自負로 (?勝三郞)의 所信으로 一行은 목숨을 救하였다. 10月 21日 아침 仁川港에 碇泊 中이던 쓰지 船長의 지토세마루 號에 日本軍社들과 함께 乘船했다.

日本 亡命 生活 [ 編輯 ]

避身과 日本 亡命 [ 編輯 ]

日本公使 다케조에가 이들을 急히 避身시켰다. 김옥균, 박영효 , 이규완 , 정난교 , 서광범 , 變數 等 一行 9名은 昌德宮 北門으로 빠져나가 變服 後, 仁川 第一銀行支店長 기노시타의 집에 隱身했다. 仁川主宰 主潮日本領事館 職員 고바야시의 周旋이었다. 10月 12日 묄렌도르프 의 追擊代가 쫓아오자 日本人으로 꾸미고는 濟物浦港의 日本 國籍船 지토세마루 號(千歲丸)로 숨었다.

이튿날 大韓帝國 外務督辦 조병호(趙秉鎬), 仁川監理 홍순학(洪淳學) 等을 帶同한 묄렌도르프의 追擊代가 다케조에 公使에게 逆賊 一行을 내놓으라 要求했다. 배안에서 이 光景을 지켜보던 一行은 품고온 毒藥甁으로 自殺을 覺悟했다. 우물쭈물하던 다케조에 公使가 倍로 되돌아와서는 一行에게 亦是 내릴 수밖에 없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船內 日本人 乘客들이 혀를 차며 꾸짖는 한便, 船長 쓰지 가쓰自負로 亦是 工事만 믿고 이들을 태웠는데 이제 와서 下船시키자 하면 이들을 죽이자는 것 밖에 더 되느냐며 叱咤했다.

내가 이 배에 朝鮮 開化黨 人士들을 乘船시킨 것은 公使의 體面을 尊重했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다케조에 신이치로 公使의 말을 믿고 某種의 일을 圖謀하다가 잘못되어 쫓기는 模樣인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이들더러 배에서 내리라는 것은 都大體 무슨 道理인가? 이 배에 탄 以上 모든 것은 船長인 내 責任이니 人間의 道理로는 到底히 이들을 배에서 내리게 할 수 없다.

다케조에가 우물쭈물하자 쓰지 船長이 直接 묄렌도르프에게 '그런 사람들은 탄 적이 없고 國際法 上 船舶은 該當 國家의 領土로 治外法權이며, 搜索을 强行하면 外交 問題로 삼겠다'며 追擊臺를 물리쳤다. 開化黨은 奇跡的으로 살아남았다. [15]

日本 亡命 生活 中의 김옥균

한便, 金玉均의 아버지 김병태 天安 監營에 投獄돼 獄死하고 동생 김각균(金珏均)은 慶北 永川 近處까지 도망쳤다가 逮捕돼 大邱 監營에서 獄事當했다. 어머니 宋氏와 女同生은 飮毒 自殺했고, 아내 柳氏는 7歲된 딸과 沃川郡 의 官奴가 됐다. 그의 첩 宋氏는 獄中에서 살려고 淫行(淫行)을 했다는 所聞도 있었다.

10月 24日 金玉均 一行은 濟物浦港을 떠났는데 그 때까지 4日間 배의 密室에 숨은 채였다. 10月 27日 濟物浦港을 나온 지 3日 後에 나가사키 를 經由해 도쿄 로 가 오랫동안 후쿠자와 유키치 의 집에서 지냈다. 더以上 弊를 끼칠 수 없었던 그들은 貰집을 얻어 合宿하며 疲困한 亡命生活을 始作했다. 朝鮮 政府는 끊임없이 亡命地에 있는 그들을 죽이려고 했고 淸나라 亦是 日本에 그들의 送還을 要求했다. 朝鮮 朝廷은 甲申政變 때 日本이 입은 被害를 補償하는 漢城 條約 을 締結하면서 金玉均 等의 新兵 引渡를 거듭 要求했으나, 日本이 政治犯은 國際法上 引渡하지 않는다며 送還을 拒否했다. 開化派 의 存在는 東洋 3國 사이의 뜨거운 감자였으며 淸日戰爭 에서 日本이 勝利하기 以前에 日本 政府에서 負擔이 됐다. 이런 理由로 後日 金玉均이 竊盜에 流配를 가는 等 開化派는 日本 內에서도 찬밥 身世였다.

開化黨에게 思想的으로 많은 影響을 주고 交流가 깊었던 前 日本 總理 이노우에 가오루 는 後日 回顧錄에서 치토세마루 號의 船員 쓰지 逃走路(?藤十郞)가 朴泳孝 一行과 나가사키 項에서 헤어질 때 日本式 이름을 各各 지어줬다 回顧했다. [4] 곧 그들에게 들이닥칠 刺客을 念慮해 이같이 했다고 한다.

當身들이 日本에서 亡命 生活을 하게 되면 朝鮮 이름을 가지고는 살기가 不便할 것이오. 그러니 내가 記念으로 이름을 지어 주고 싶소. [4]

金玉均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 박영효 에겐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岐永春), 이규완 은 아사다 料(淺田良), 유혁로 는 야마다 유이치(山田唯一), 정난교 는 나카하라 유조(中原雄三)라고 지어줬다. [4] 金玉均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 外에도 그는 이와타 美와(岩田三和)라는 假名도 使用했다.

亡命 生活 初盤 [ 編輯 ]

亡命 直後 그는 간사이 地方에 머물렀으며 이때 야마토 의 히가시히라노初(東平野町)에 살고 있는 야마구치 신타로의 집에 暫時 起居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야마구치의 어머니 糯米와 關係를 맺어 다음 해 男子 아이가 태어났다. [16]

10月 27日 金玉均은 周邊의 挽留에도 이노우에 가오루 를 만나려고 하였으나 不遇한 處地의 亡命客으로 利用價値가 없어진 그를 이노우에는 만나주려 하지 않았다. 日本의 背信에 憤怒한 金玉均은 甲申政變의 經緯와 日本 側의 關與를 滿天下에 알리겠다고 나섰으나 日本側에서는 朝鮮에 送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日本은 1885年 4月 淸나라 톈진 條約 을 締結하고 朝鮮에 駐屯中인 軍士를 共同으로 軍隊를 撤收하기로 한 後 朝鮮 問題에서 當分間 손을 떼었다. 不遇한 政治亡命客人 金玉均 一行을 日本은 부담스러워했고, 金玉均은 鬱憤과 鬱火를 겨우 다스리고 居處에 隱身하며 自身의 改革運動을 回顧하는 갑신일록(甲申日錄)을 쓰면서 延命하였다.

日本 亡命 中에도 그는 朝鮮으로 쳐들어가 閔氏 政權을 打倒하기 위해 努力하였다. 한便 21世紀 韓國의 言論人인 김충식 은 刺客 密派의 原因을 그가 스스로 自招했다고 보았다. "刺客 密派의 原因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玉菌에게도 歸責事由가 있다. 性格이 急한 玉菌은 日本에 와서도 명성황후 政權을 顚覆하려 切齒腐心했다. [17] "는 것이다. 그는 후쿠자와의 도쿄 집에서 두어 달 머물다 요코하마의 外國人 居留地 야마테초로 집을 얻어 나갔다. 이 地域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 公園’으로 이름지어진 데서 알 수 있듯 港口가 내려다보이는 景觀 좋은 곳. 開港 以來 外國人들이 모여 살았고 只今도 外國人 墓地가 남아 있다. 現在 韓國의 요코하마 總領事館이 야마테초에 韓國式 建物로 들어서 있다. [17]

10年間의 亡命生活을 통해 金玉均은 日本 高位層 人士들과 緊密한 交流를 하게 된다. 그 中 한名인 도야마 미쓰루 는 後날 명성황후 를 暗殺하는데 參與한 浪人 組織의 하나인 '겐요사'를 組織하기도 했다.

야마테초에서 玉菌은 겐요샤 (玄洋社)라는 右翼 集團의 壯士들과 接觸했다. 겐요샤는 도야마 미쓰루가 만든 組織이다. [17] 朝鮮에는 그가 軍士를 이끌고 쳐들어 올 것이라는 所聞이 播多했고, 閔氏 政權은 刺客을 보내 그를 除去하려 했다.

年金 生活 [ 編輯 ]

그의 日本亡命生活 後見人이자 戀人이었던 日本人 게이샤 스기타니 오타마

1886年 7月부터 그는 2年間 絶海孤島人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에 流配된 데 이어 1888年 8月~1890年 4月 홋카이도 에 軟禁을 當한다. 그는 이 무렵 두 名의 日本人 게이샤와 戀人關係였는데, 이들 게이샤들은 金玉均이 자주 出入하던 술집에서 만나게 되어 그의 金錢的, 精神的 後見人이자 戀人關係로 發展하게 된다.

삿포로에 살던 金玉均은 持病인 류머티즘 을 治療하기 위해 種種 하코다테 의 溫泉旅館에 들렀는데, 거기서 스기타니를 만나 愛人關係로 發展한다. [18] 7月부터 2年間 絶海孤島人 오가사와라섬에 流配된 데 이어 1888年 8月~1890年 4月 홋카이도에 軟禁을 當한다. 스기타니 다마의 元來 이름은 ‘오타마(小玉)’. 하코다테 圖書館이 所藏 中인 寫眞에는 ‘봉래精銳기옥녀(蓬萊町藝妓玉女)’라는 記錄이 남아 있을 뿐이다. [18] 게이샤였던 오타마는 곧 金玉均의 財政的 後見人의 한사람이 되었고 바로 戀人關係로 發展하였다.

그女의 이름은 當時 金玉均의 後援者였던 미야자키 道텐(宮崎滔天)의 著書 ‘33年의 꿈’을 통해 알려지게 됐다. 이 冊에 따르면 스기타니는 金玉均이 1894年 中國 상하이 에 건너갔다가 洪鍾宇에게 암살당한 以後 도쿄에서 치러진 葬禮式에 參席했다. 미야자키가 葬禮式場 한구석에서 슬피 우는 그女에게 말을 건네자 “나는 女人의 몸. 線인(先人·김옥균)의 思想은 모르지만, 그 사람을 尊敬하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18] 在日 史學者 금병동(琴秉洞)은 그의 著書 ‘金玉均과 日本’(2001年版)에서 “스기타니는 24~25歲 程度의 美人이었으며, 두 사람 關係는 當時 하코다테에서 모를 사람이 없을 程度로 有名했다”면서 “1890年 金玉均이 홋카이도에서 年金에서 풀려나 도쿄로 돌아올 때 함께 上京해 도쿄에서 살림집을 꾸리고 살았다”고 紹介했다. [18] 스기타니는 金玉均이 상하이로 건너간 뒤에도 金玉均을 위해 따로 밥床을 차려놓고 그의 無事歸還을 위해 佛供을 올리다가 訃音을 傳해들은 것으로 돼 있다. 스기타니는 朝鮮이 日本에 倂合된 後인 1916年 미야자키 道텐과 再會했을 當時에는 이미 한 實業家의 夫人이 돼 있었다고 한다. [18]

이때 김옥균에게는 또다른 日本人 戀人이 있었는데 亦是 다른 술집에서 만난 게이샤人 마쓰盧 羅카(松野なか)였다. 나카에게서는 딸 1名이 태어났는데 이름은 사다(さだ)였다. 그 뒤 1884年 도쿄 로 돌아오자 그는 淸나라 로 亡命을 企劃한다.

朝鮮 刺客 浸透 [ 編輯 ]

1次 金玉均 暗殺 未遂 事件 [ 編輯 ]

1885年 6月 高宗 명성황후 의 密命을 받은 장은규(一名 장갑복)가 日本으로 건너왔다. 장은규는 의친왕 의 生母 貴人 張氏 의 親庭오빠였다. 장은규가 장귀인의 오라비라는 것을 안 유혁로는 그를 警戒할 것을 金玉均에게 提案했고, 金玉均은 장은규를 避함으로써 1次 暗殺 企圖는 未遂로 돌아갔다. 그러자 朝鮮 朝廷에서는 譯官 出身의 穩健 開化人士人 池運永 을 刺客으로 派遣하였다.

統理機務衙門 主事로 勤務 中 密旨를 받은 池運永은 1886年 2月 23日 仁川 을 出發하여 나가사키 를 거쳐 고베 에 到着한다. [19] 그러나 金玉均은 池運永度 刺客임을 看破하였다. 金玉均은 當時 고베를 떠나 도쿄에 隱居 中이었다. 도쿄에 到着한 池運永은 이세강 (伊勢勘) 旅館에 投宿하며 隣近에 살고 있는 金玉均에게 便紙를 보내 面談을 要請했다. [20] 두 사람은 過去 같이 勤務한 적이 있었기에 도쿄까지 찾아와 한番 만나자고 하는 池運永의 提議에 金玉均이 應할만도 했지만 金玉均은 書信을 보내 池運永의 面談 提議를 拒絶했다. [20] 장은규 一派를 相對한 유혁로는 池運永度 刺客으로 疑心하고 이를 金玉均과 박영효 에게 傳했다.

池運永의 停滯에 疑惑을 느낀 金玉均은 拒絶하는 答信을 보낸다. [21]

나는 國事犯이므로 만나면 도리어 귀찮아질 것이네. [22]

金玉均은 유혁로 等에게 池運永이 가져온 거沙金 5萬 엔을 喝取할 것을 提案한다. 金玉均은 함께 있는 同志 유혁로, 신응희 , 정난교 等에게 池運永에게 接近하여 그가 工作費로 가져온 5萬 엔의 돈을 빼앗자고 提案한다. [22] 세 사람은 池運永을 만나 不平을 늘어놓았다. [22]

金玉均은 甲申政變 의 同志들로 日本에 같이 亡命해 있던 유혁로, 정난교, 신응희 等을 池運永에게 接近시켜 池運永이 刺客임을 證明하는 證據를 잡도록 했다. [20] 유혁로 等은 池運永을 만나 異國에서 떠돌고 있는 自身들의 身世를 恨歎하면서 金玉均을 非難하는 等 金玉均에게 큰 不滿이 있는 것처럼 僞裝했다. [20] 池運永은 유혁로 一行과 2,3個月 以上 만나면서 信賴하게 되었다.

2次 金玉均 暗殺 未遂 事件 [ 編輯 ]

그러던 어느날 池運永은 一行에게 金玉均을 處置하면 亡命者의 身世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說得하면서 自身은 國王의 密旨를 받들어 金玉均을 죽이기 위해 왔으므로 諸君은 自身을 도우라고 本色을 드러냈다. 池運永은 그 證據로 高宗의 勅書를 보여주었다. [23]

명여로 特次도해포적사(特差渡海捕賊使)인 바 臨時計劃을 一任 便宜요, 危局事務(爲國事務)도 驛位田卷(亦爲全權)하니 물乏擧行(勿乏擧行)할 社

이 사람은 命을 받은 特次도해포적사이니 臨時計劃은 便宜로 一任하며 나라를 위하는 일 亦是 全權을 委任하니, 朝鮮의 臣民이라면 逼迫하지 않고 擧行하도록 하라.
 
— 大君主모(大君主募)

發行 日子는 1896年 5月 로 되어 있고 國王의 玉碎(大君主모)까지 찍힌 이 勅書의 眞僞 與否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바다 건너의 逆賊을 逮捕하는 特命을 附與한다"고 되어 있다. [23] 게다가 김옥균 殺害에 成功한 者에게는 5千 엔을 支拂한다는 支拂保證서도 가지고 있었다. 池運永은 漢城 에서 품고 온 非수도 보여주었다. [23]

유혁로 等 3人은 池運永을 捕縛한 뒤 毆打, 威脅해 가지고 있던 勅書와 匕首 等을 빼앗았다. [23]

女性 遍歷 僞裝 [ 編輯 ]

亡命 直後 그는 야마토의 히가시 히라노初의 야마구치 신타로 의 집에 暫時 生活하였다. 이때 신타로의 어머니 糯米와 關係, 이듬해 아들이 태어났다. 以後 그는 自重하였지만 도야마 미쓰루의 勸告로 다시 女子를 찾았다.

朝鮮에서 刺客이 派遣되자 도야마는 그에게 일부러 술과 女色에 耽溺하라고 勸告했다.

金玉均의 女子關係는 亂雜하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亡命 直後 야마토의 히가시 히라노初 1465番地에 있는 야마구치의 집에 暫時 寄食하는 동안, 야마구치의 어머니 糯米와 깊은 關係를 맺었다. 이듬해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24]

朝鮮에서 김을 죽이려 刺客을 보내자 그의 身邊이 걱정된 나는 그에게 忠告했다. 日本 枯死(古事) 中 오이시憂恥가 교토에서 기라의 諜者를 放心시킨 內容을 引用하면서, 憂國的 行爲를 버리고 酒色에 빠진 바보 시늉을 해보라고 勸했다. 그랬더니 그가 每日같이 도쿄 柳라쿠初의 旅館에서 시바우라의 溫泉場까지 들락거리며 紅燈街를 彷徨했다. [24]
 
— 도야마 미쓰루의 證言

半쯤은 刺客의 칼끝을 무디게 하기 위해 일부러, 半쯤은 亡命流浪에 지치고 지쳐 自暴自棄의 心情으로 도쿄의 淪落街를 徘徊하였다. [24]

박영효와의 訣別 [ 編輯 ]

金玉均의 酒色(酒色) 放縱은 홋카이도 流配時節에도 例外가 아니었다. 그가 오타루에서 사귄 妓生도 玉菌의 아이를 낳았다. 그女는 自己가 낳은 아이는 勿論 다른 女子의 蘇生까지 거두어 玉菌의 도쿄 쓰키지 집에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24]

박영효 는 이런 金玉均을 싫어하고 지겨워했다. 亡命 同志들의 名譽를 떨어뜨리는 짓이라고 批判도 했다. [24]

玉菌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는 無能한 자야. 제멋대로 行動하는 放蕩兒地. 도쿄에서 朝鮮 사람, 日本 사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쓰듯하고 말이지. 結局 甲申革命이 失敗한 것도 그런 엉터리 指導者 때문일세. 그를 믿고 설익은 靑年들이 性急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 꼴이 난 걸세. 그렇다고 玉菌이 眞짜 리더였나? 나와 洪英植이 다 했지. [24]

美國으로 亡命한 尹致昊가 도쿄에 들렀을 때도 朴泳孝는 金玉均을 激하게 非難했다. [24]

朴泳孝는 溫順하고 沈着한 데다가 世上事를 멀리하였으나 金玉均은 銳敏하고 多才多能한 데다가 世上의 交際도 넓었다. [25] 朝鮮에 있을 때에는 朴泳孝의 門閥이나 身分이 높아 金玉均을 凌駕하였으나 日本에서는 오히려 거꾸로 金玉均의 地位가 높아져 自然히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 金玉均을 남겨둔 채 朴泳孝가 美國을 떠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25] 이광린은 朴泳孝가 金玉均을 두고 서광범 , 서재필 萬 데리고 美國으로 갔던 理由도 金玉均과 朴泳孝의 氣質 差異로 理解하였다.

淸나라 亡命 [ 編輯 ]

日本 自由黨系 武士들의 擧事 綻露 [ 編輯 ]

1885年 말 金玉均의 處所를 자주 出入하던 日本 自由黨 界 武士들이 오사카 에 모여서 "朝鮮 討伐을 위해 武裝 集團을 派遣하자"는 陰謀를 꾸미다가 發覺되었다. [21] 이들의 朝鮮 征伐 主張은 日本 社會에 話題가 되었고, 이는 곧 征韓論으로 發展한다.

이 일은 日本의 大陸 侵略 勢力의 先鋒隊가 企圖한 陰謀로 金玉均은 全혀 알 理가 없었지만, '오사카 事件'은 金玉均을 排斥하려는 무리들의 惡意에 찬 宣傳에 좋은 口實을 提供했다. [21]

金玉均이 日本人 장사대(壯士隊)를 이끌고 朝鮮에 侵攻할 計劃을 세우고 있다. [21]

이 이야기가 日本은 勿論 淸나라 調整에까지 傳해져, 淸나라의 리훙장 은 金玉均 一行을 단단히 拘束해두라고 日本 政府에 要求했다. 이 事件을 契機로 日本 政府는 慇懃히 金玉均에게 日本에서 떠날 것을 慫慂했다. [21] 그러나 朝鮮 政府가 그를 刺客을 보내 除去하려는데 그를 내치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같다는 후쿠자와 유키치 이노우에 가오루 의 反對로 日本 追放은 謀免하였다.

暗殺 威脅과 淸나라 亡命 [ 編輯 ]

亡命客 金玉均은 '이와타 슈사쿠'(岩田周作)란 이름으로 10年間 日本 各地를 放浪하였으며, 淸나라 를 꺼리는 日本 政府에 逮捕되어 오가사와라 에, 이어서 홋카이도 에 流配되었다가 뒤에 釋放되어 도쿄 에 歸還했다.

朝鮮 朝廷에서는 그를 除去하기 위해 끊임없이 日本으로 刺客을 派遣하였다. 첫 刺客人 장은규 는 金玉均의 敏捷한 對應으로 暗殺이 失敗하자 "金玉均이 自由黨 系列 武士들과 結託하여 朝鮮을 侵攻하려 한다."라는 所聞을 퍼뜨려서 이른바 '오사카 事件'을 일으켰을 뿐, 金玉均의 身邊에 危害를 加하지는 못했다. 이 事件으로 國際的인 問題가 되자 日本 政府는 金玉均에게 日本을 떠나 달라고 要請했지만 그는 쉽게 떠날 수 없었다.

朝鮮은 두 番째 刺客人 池運永 을 보냈다. 그러나 池運永은 오히려 金玉均은 이를 日本 言論에 알려 日本 警察에 逮捕되었다. 金玉均은 이 事實을 擧論하며 外務大臣 이노우에에게 身邊 保護를 要請하는 便紙를 보냈다. 事件이 日本 新聞에 報道되자 日本 政府는 池運永을 朝鮮에 送還하고, 김옥균에게는 日本과 朝鮮의 友好에 妨害가 된다면서 日本을 떠나 달라고 公式的으로 要求했다. 金玉均은 이에 抗議하며 이노우에를 相對로 한 文書를 公開하고 日本 新聞에 高宗 에게 보내는 長文의 上疏와 淸나라의 北洋大臣 리훙장 앞으로 事件의 責任을 따지는 公開 書翰을 揭載하였다.

淸나라에서는 抗議하였고 金玉均의 發言이 外交的인 問題가 되자 日本 政府는 1886年 7月 에 그를 오가사와라섬에 强制로 軟禁했다. 이때 同行한 同志는 利潤과 한 사람뿐으로, 이곳에서 金玉均은 2年 동안 失意의 나날들을 보냈다. 濕한 氣候와 惡條件을 견디지 못하여 年金 解除나 年金地域을 옮겨줄 것을 呼訴하여 金玉均은 1888年 홋카이도 로 移送되었다가 1890年 에 釋放되었다. 오가사와라섬에서는 消日 삼아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때 만난 와다 엔지로라는 靑年이 그를 追從하여 상하이에서 죽는 瞬間까지 同行하게 되었다.

年金에서 解放되어 도쿄로 돌아온 金玉均은 한동안 放蕩한 生活을 하다가, 淸나라로 들어가 實權者 리훙장 과 談判을 짓기로 했다. 리훙장에게 連絡이 닿자 마침 日本 駐在 公使로 새로 赴任한 리훙장의 아들 里徵房 은 自身의 아버지가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便紙를 건네주었다. 김옥균으로서는 日本에서의 거듭된 再起의 努力이 모두 水泡로 돌아가자 아직도 朝鮮에 큰 影響力을 갖고 있는 淸의 實權者를 만나서 協助를 얻어 보려 했다. 淸나라行을 決心한 金玉均은 스스로 막일을 다니며 費用을 마련하는 한便 百方으로 旅費를 調達하기 위해 努力하다가 오사카의 한 後援者에게서 經費를 支援해 주겠다는 連絡을 받게 되었다. 同僚들은 그의 身邊을 걱정해서 祕密裏에 行動하고 여러名의 隨行員과 함께 가도록 勸했으나, 그는 日本人 와다 엔지로와 심부름꾼 한사람만 데리고 떠났다. 그러나 金玉均의 移動 情報는 곧 朝鮮朝廷의 間者에 依해 朝鮮朝廷으로 傳達된다.

亡命 挽留와 暗殺者의 潛入 [ 編輯 ]

홍종우 肖像畫

1894年 2月 리훙장 과 談判을 지으려고 淸나라 상하이 로 건너갔다. 3月初 그가 오사카驛 에 到着하자 朝鮮에서 온 刺客人 이일직 홍종우 가 마중을 나왔다. 이일직은 淸나라와 日本을 往來하면서 藥材商을 하는 사람이고, 洪鍾宇는 프랑스 留學生이며 自身의 親戚이라고 거짓으로 紹介했다. 그들은 平素부터 金玉均의 行跡을 잘 알고 있고 그들은 獄菌을 尊敬해 왔기 때문에 그들이 淸國行 經費를 提供하겠노라고 말했다.

金玉均은 한눈에 그들이 自身을 죽이려고 하는 刺客임을 알아보았지만 이들을 逆利用하려는 생각으로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金玉均이 눈치챈 것을 알자 이일직은 洪鍾宇가 同行하며 金玉均을 도와줄 것이라고 말해 그의 疑心을 줄이려고 했다. 그러나 事實은 金玉均이 상하이 로 떠난 것을 確認한 後에 박영효 까지 暗殺하려는 計劃이 세워져 있었다. 이일직은 朴泳孝를 暗殺하러 갔다가 그가 敏捷하게 日本人의 집에 숨어버리는 바람에 그를 찾다가 日本警察에 逮捕되었다. 日本警察의 搜査 結果 이들을 指揮한 민영소의 四柱가 밝혀지기도 했다.

그 해 2月 金玉均이 후쿠자와 유키치 가 묵고 있던 도쿄 隣近의 休養地 하코네 로 찾아갔을 때 후쿠자와는 中國行을 相議하는 金玉均에게 危險하다며 挽留했다. 그의 對答은 '虎狼이 굴' 云云이었다. [16] 玉菌은 도야마와 바둑을 두며 時間을 보내고 오사카 驛까지 同行한 도야마가 中國行을 걱정하여 그에게 상하이行의 理由를 묻자 金玉均은 도야마에게 “虎狼이 窟에 들어가지 않고는 虎狼이를 잡을 수 없다”고 豪言했다. [17] 도야마는 挽留를 斷念한 듯, 玉菌에게 ‘李鴻章에게 膳物로 갖다주라’며 뭔가를 내밀었다. 最高의 日本刀로 치는 교토의 散調(三條)칼 한 자루였다. 이 日本刀는 상하이에서 玉菌이 살해당하자 임자를 잃고 말았다. 그래서 보디가드 와다가 所重하게 챙겨 도야마에게 鄭重히 돌려줬다. [17]

金玉均은 그동안 危險하다며 中國行을 挽留하는 日本人 知人들에게 입버릇처럼 '虎狼이 굴' 比喩로 答하고 있었다. [16] 3月 10日 오사카에 到着한 金玉均은 旅人宿에 宿所를 잡아놓고 中國 入國 節次를 밟으면서 도쿄에서 즐겨 치던 撞球도 치고 骨董品店에 들려 中國에 가지고 갈 膳物도 샀다. [16] 3月 10日 오사카 驛에서 헤어진 도야마 미쓰루와는 14日과 16日 두 次例 다시 만난다.

暗殺 過程 [ 編輯 ]

洪鍾宇가 金玉均에게 接近한 方法은 簡單했다. 프랑스 料理 솜씨도 어찌나 氣가 막혔던지 金玉均의 日本 親舊들 입맛까지 당길 程度였다. [26] 開化派 性向에 프랑스 留學까지 갔다 온 洪鍾宇는 金玉均에게 魅力的인 人物이었다. 이듬해 상하이 에 있는 호텔 뚱허양행(東和洋行)에서 리볼버 拳銃으로 金玉均을 狙擊, 暗殺하였다.

金玉均은 홍종우를 完全히 自己 사람으로 생각했다. 洪鍾宇는 그만큼 暗殺 意圖를 徹底히 숨기고 僞裝 接近에 完璧하게 成功했다. 洪鍾宇는 이렇게 해서 金玉均을 상하이로 꼬여냈고 擧事를 '깨끗이' 處理했다. 그리고 自身이 왜 金玉均을 除去했는지 淸國 側 警察署에서 辯論하였다. [26]

나는 朝鮮의 官員이고, 金玉均은 나라의 逆賊이다. 金玉均의 生存은 東洋 三國의 平和를 깨뜨릴 憂慮가 있다. [26]

洪鍾宇는 金玉均을 暗殺한 첫 番째 理由로 公務라고 밝혔다. 金玉均 暗殺은 첫째로, 公務다. 御命을 받든 것이다. [26] 두 番째 理由로는 金玉均이 東洋 平和에 威脅的인 人物이라는 것이었다.

最後 [ 編輯 ]

윤치호

1894年 3月 中旬 警 상하이에 到着한 金玉均 一行은 外國人 居住地 안에 있는 한 旅館에 投宿하였다. 投宿한 다음 날 午後, 金玉均 一行은 거리를 구경하기로 하고 午前에는 各自 用務를 보았다.

1894年 3月 27日 午後, 윤치호 상하이 에 滯留하면서 지냈을 때 尹致昊는 金玉均과 홍종우 一行을 받아들였다. 金玉均은 尹致昊에게 "리훙장의 養아들 里徵房의 招請으로 오게되었다. [7] [27] 經費는 홍종우라는 者가 대고 있다."고 말하자, 尹致昊는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洪鍾宇는 (朝鮮에서 보낸) 스파이 같으니 操心하라"고 警告했다고 한다. 그러자, 金玉均은 "그가 스파이日 理가 없다."고 答했다 한다. [7] [27] 金玉均이 日本 亡命 時節, 斷髮을 하고 이와타 슈사쿠로 改名한 데 反해 洪鍾宇는 파리 滯留 時節 늘 韓服을 입고 다녔다. 金玉均은 日本을 朝鮮의 나아갈 모델로 보고 日本의 도움을 받아서 近代化를 推進하려고 했었으나, 洪鍾宇는 西歐 文明을 익히면서도 그 속에 숨겨진 帝國主義의 野心을 警戒했다. [28]

3月 27日 金玉均은 人便으로 尹致昊에게 午後 1時 半에 自身이 宿泊하고 있는 童話洋行(淸國 상하이 호텔)으로 와서 함께 갈 곳이 있다는 內容의 便紙를 急히 보낸다. 그러나 尹致昊는 學校 일이 바쁘다는 理由로 金玉均의 提案을 辭讓한다. 3月 28日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온 金玉均은 疲困하다고 寢臺에 누우면서, 와다에게 日本에서 타고 온 배의 事務長인 마쓰모토에게 傳할 말이 있으니 그를 불러달라고 했다. 와다가 나가자 金玉均의 周圍에 아무도 없음을 눈치챈 刺客 洪鍾宇가 때를 놓치지 않고 金玉均을 向해 리볼버 拳銃을 發射하였다. [7] [27] 그는 곧 日本人 隨行員들에 依해 病院으로 옮겨졌지만 午後 4時 頃 死亡한다 (홍종우를 보낸 곳은 守舊黨 또는 閔氏波라는 意見도 있다). 當時 그의 나이 享年 44歲였다.

尾行의 그림자를 豫想한 尹致昊는 金玉均의 暗殺 消息을 接하고 隨時로 居處를 移動하였다.

剖棺斬屍와 復權 [ 編輯 ]

公開 剖棺斬屍 [ 編輯 ]

金玉均 暗殺 當時 日本의 어느 新聞社에 실린 記事와 揷畵

事件이 發生하자 淸나라 상하이 警察은 홍종우 를 逮捕하고 金玉均의 死體는 日本人 와다 엔지로의 要請에 따라 日本으로 引繼하기로 했다. 日本 領事館에 引繼된 屍身은 日本人 知人과 그의 追從者가 손톱과 발톱을 잘라내 封紙에 담아 遺品으로 도쿄 로 보냈다. 그런데 日本 政府는 朝鮮 開化派의 存在를 껄끄럽게 여겨 갑자기 態度를 바꾸어 홍종우와 金玉均의 死體를 淸나라에게 넘겼고, 淸나라 政府는 洪鍾宇의 犯行을 朝鮮人 相互間의 問題라고 하여 다시 朝鮮에 引繼하였다.

1894年 (高宗 32年) 4月 27日 有害가 船舶으로 옮겨졌고, 4月 28日 朝鮮 에 到着한 그의 屍身은 서울 楊花津 에서 公開的으로 陵遲處斬 을 當하고, 머리는 梟示된 後 사라졌다. 嚆矢 (梟示)된 그의 목에는 '母斑(謀反) 大逆不道(大逆不道) 罪人 玉菌(玉均) 當日 楊花津두(楊花津頭) 陵遲處斬'이라고 쓰여진 커다란 천이 나부끼고 있었다.

1894年 4月 28日子 日本 示唆新譜 에는 楊花津에서 玉菌의 屍身을 斬屍하는 光景을 다음과 같이 報道했다.

金의 屍身을 棺에서 끄집어내 땅위에 놓고 切斷하기 쉽게 목과 손, 발밑에 나무板子를 깔았다. 목을 자르고 난 다음에 오른쪽 손목 그다음 왼쪽 팔을 잘랐다. 이어 兩 발목을 자르고 몸통의 등 쪽에서 칼을 넣어 깊이 한 치 길이 여섯 치 씩 열 세 곳을 잘라 刑罰을 마쳤다.

屍身을 조각조각 떼어서 八道에 보내어 저자거리에 내다 걸게 하고, 목은 大逆不道玉菌(大逆不道玉均)이라고 커다랗게 쓴 懸垂幕과 함께 楊花津 刑場에 梟首해 놓았다. 이 끔찍한 刑罰은 賃金(高宗)의 이름을 빌려서 閔妃와 민영익 의 十年을 벼르다 벌인 徹底한 復讐劇이었으리라. 아! 그렇게 조각조각 잘려진 屍身은 그 後 어떻게 處理되었을까? 어느 期間동안 저자거리에서 구경거리로 내 보인 다음엔 누군가 조각屍身을 다 모아서 葬禮를 치러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屍身을 處理할까?
 
示唆新譜 1894年 4月 28日子

그의 家族 亦是 緣坐制 로 處罰이 建議되었고, 生父 김병태는 처형당하고 母親 等은 飮毒 自決하였다. 또한 이 事件으로 그의 가까운 親戚들은 行列字를 菌에서 逵路 바꾸기도 한다.

홍종우 가 돌아오자 高宗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았다고 한다. [26] 金玉均의 죽음은 곧바로 東北亞 情勢의 外交的으로 擴大되었고, 金玉均이 日本에 亡命해 있을 때, 利用價値가 없다고 判斷했던 日帝는 곧바로 二重的인 態度를 보이면서 言論媒體 等을 통해 金玉均의 죽음을 哀悼하고 追慕하는 等 雰圍氣를 이끌어내고, 淸日戰爭 을 向한 日本帝國의 國民感情으로 발전시키는 데 利用했다.

甲申政變 의 失敗를 본 靑年支社 박중양 은 憤怒하였다. 特히 박중양은 金玉均을 誘引해서 暗殺한 朝鮮 朝廷을 殘忍하다며 指彈하였다. '金玉均은 日本 東京에서 亡命生活을 하다가 洪鍾宇의 誘引(實際로는 袁世凱( 위안스카이 )의 東洋 平和 主張 意見으로 誘引)으로 上海에 나가게 되어 洪鍾宇에게 암살당했다. 人面獸心의 홍종우를 論할 必要도 없지만은 金玉均의 屍體가 京城으로 到着했을 때 鍾路시상에서 목이 잘리고 四肢를 分裂하였다. 이런 行事가 野蠻人들에게도 없을 것이다. [29] '라며 憤慨하였다. 開化派 人士들을 先覺者로 보고 尊敬했지만 그들 家族들의 悲慘한 最後와 陵遲處斬, 緣坐制 等의 惡刑을 目擊하면서 박중양은 朝鮮이란 나라가 存在할 價値가 있는 나라인가에 일찍부터 疑問을 품게 되었다.

日本의 糾彈 [ 編輯 ]

金玉均의 剖棺斬屍는 外國人 記者들과 프랑스 人, 日本人 , 美國人 等에 依해 外國으로 報道되었다. 그런데 이같은 朝鮮 政府의 措處에 日本 知識人層의 輿論이 들끓기 始作하였다. [30] 후쿠자와 유키치 等 朝鮮에 好意的이었던 日本 自由主義 者들의 憤怒는 增幅되었다. 朝鮮人들은 反文明的인 野蠻人들이며 이와 같은 朝鮮人들의 非人道的인 테러 行爲, 生命 輕視 現象을 放置해야 되는가 하는 主張이 日本의 開化 知識人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始作했다. 후쿠자와 유키치 , 이노우에 가오루 等은 바로 朝鮮人들의 野蠻性과 暴力性을 糾彈하였다.

金玉均이 처음 日本으로 亡命했을 때부터 日本 政府는 金玉均을 冷待했었다. 그를 國外로 追放하려 했던 日本人들이 이番에는 金玉均에게 加刑한 朝鮮 政府를 誹謗하고 나섰다. [30]

日本의 知識人들은 김옥균 追悼會 또는 김옥균 記念會 , 김옥균 硏究會 等을 組織하여 連日 追慕 모임을 갖는 것이었다. 日本側의 記錄에 依하면 1894年 4月 21日 에는 간다니시키 情(神田錦町)의 金휘館(錦輝館)에서 '金玉均 事件 演說會'가 열렸고 [30] , 여기서 朝鮮 政府의 野蠻性을 大大的으로 聲討하였다. 4月 23日 에는 日本 政界 有力者 1百餘 名이 모여서 '對外硬派懇親會'라는 모임이 理事쿠社 혼간지 에서 열렸는데 대단한 盛況이었다고 되어 있다. [30]

아오야마의 外人 墓地에 서 있는 김옥균 墓와 碑石에는 박영효 가 碑文을 짓고 이준용 이 글씨를 쓴 것으로 되어 있지만, 實狀 그 碑文은 유길준 이 쓴 것이다. [31] 後날 歷史가 兼 作家 신봉승 은 이를 두고 '참으로 공교롭게도 이때 兪吉濬은 朝鮮에서의 또 다른 쿠데타에 連累되어 日本 政府 로부터 오가사와라섬 茅島 에 流配되어 있었다. 金玉均이 幽閉되었던 바로 그 絶海孤島에서 金玉均의 碑文을 써야 하는 兪吉濬의 心情은 錯雜함을 넘어서 아픔이었을 것이다. [31] '라고 評하였다.

復權 [ 編輯 ]

金玉均의 夫人 柳氏는 딸 1名과 함께 官婢가 되어 끌려갔다. 한便, 김옥균에게는 正室 夫人의 딸 外에도 1894年 3月 社다라는 딸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다. [32] 1895年 11月 甲午改革 으로 開化黨 內閣이 들어서자 법무대신 서광범 과 總理大臣 김홍집 의 上疏로 赦免·復權되었고, 俄館播遷 後 復權이 取消되었다가 純宗 때인 1910年 다시 復權되어 奎章閣 大提學 에 追贈되었다. [27] 諡號는 충달이다.

事後 [ 編輯 ]

그가 日本 에 남긴 머리카락과 衣服을 金玉均의 護衛役이었던 와다 엔지로 에게 祕密裏로 넘겨 받으며 미야자키 道텐 에 依해 아사쿠사 혼간지 로 安置한 뒤 祭祀를 지냈다. 그의 戀人인 오타마는 後日 어느 日本 人 企業人과 結婚하였고, 그의 다른 戀人인 마츠노 나카는 딸 社다를 데리고 行商과 勞動을 하면서 겨우 生計를 이어갔다. 1910年 (隆熙 4年) 韓日 倂合 以後 朝鮮에서는 그가 生存하여 改革政策을 펼쳤더라면 韓日 倂合 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輿論이 나타나면서 再評價되기 始作하였다. 유길준 , 박영효 , 윤치호 等은 그가 암살당하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韓日 倂合 을 막았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暗葬한 墓所는 韓日 合邦 以後 忠淸南道 牙山郡 영인면 아산리 143番地(現, 아산시 영인면 아산리 143番地)로 移轉되었다.

日本 에서는 朝鮮 을 開花하려다가 抑鬱하게 犧牲된 先覺者로 追慕되었다. 1920年 初부터 金玉均을 追慕하는 여러 追悼 모임이 開催되었고, 1935年 에는 金玉均을 기리는 團體를 組織하자는 日本 知識人들의 自發的인 運動으로 그와 親한 親舊들과 知人들을 中心으로 古筠會를 結成하고 機關誌로 '古筠'을 發行했다. 古筠會議 初代 理事長은 이노우에 가쿠고로였다. 그가 日本人 女人에게서 얻은 딸 사다는 이 古筠會議 會合과 古筠會가 主管하는 各種 모임에 參席, 種種 非와를 읊고 연주하였다. 사다는 도요바시 出身 言論人이자 印刷業者인 스즈키 이치고로 (鈴木市五?)와 結婚했는데, 一部 김옥균 追從者들과 觀覽客들이 그女에게 謝禮金과 對한 封套를 준 것이 스즈키 집안에 傳해지고 있다.

1926年 10月 10日 에는 京城박문서館에서 민태원 에 依해 《오호 古筠擧事 - 김옥균實技》 (京城 박문서館, 1926)가 出刊되었다. 그러나 곧 販賣禁止措置 되었다. 그의 一代記를 다룬 이 書籍은 解放 以後에 公式 販賣되었고, 1947年 에는 민태원에 依해 《甲申政變과 김옥균》 (國際文化協會, 1947)李 出刊되기도 했다. 光復 以後에야 그가 逆賊이라는 視角이 사라지고 革命家라는 評價가 나타나기 始作하였다.

1920年代 末 野談 運動家 김진구 는 “金玉均 全集 刊行會”를 組織하고, 雜誌에 김옥균 關聯 글을 發表하였다. 甲申政變 을 韓國近代史의 ‘劃時期的一大革命’(劃時期的一帶革命)으로 描寫하고, ‘民衆本位’라 하면서 民의 熱烈한 希望, ‘排淸獨立’(拜聽獨立), ‘開化進取’(開花進取)를 甲申政變의 性格으로 規定하였다. 《學生》誌에 金玉均의 最後를 壯烈하게 劇化한 戱曲 ‘臺舞臺의 崩壞’를 連載한 後 朝鮮時代極硏究會를 만들어 巡廻 公演하였다. 時代劇을 民人 啓蒙의 手段으로, 爲人을 大衆歷史 敎育의 素材로 삼아 金玉均 等 甲申政變에 參與한 人物들을 英雄化해, 金玉均에 對한 否定的 認識 代身 革命家로 浮刻시켰다. [33] 1989年 2月 22日 公州郡廳의 主導로 忠淸南道 公州郡 정안면 광정리(現 公州市 정안면) 所在 生家 터를 整備하고, 復元된 生家 앞에 追慕碑를 建立하였다.

思想과 信念 [ 編輯 ]

박규수 , 오경석 等으로부터 신문물을 接하고 西方에 文明國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는 富國强兵을 위해서는 開花(開化)를 해야 나라의 復興과 發展을 꾀할 수 있다고 主張했다. 그는 性理學 者들의 閉鎖的인 衛正斥邪論(衛正斥邪論)을 反對, 批判하였지만 族閥體制로 變質되는 閔氏 政權을 支持하지도 않았고, 外勢의 强要에 依하여 無分別하게 開放하는 것도 批判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여는 것은 世界的인 흐름이기 때문에 朝鮮이 스스로의 힘을 기르고 外勢의 侵略을 막기 위해서는 朝鮮 스스로 開港을 하여 外國의 先進文物과 長點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金玉均은 처음에 平和的 手段에 依한 改革運動(改革運動)을 推進했으나, 閔氏 一族의 腐敗와 淸나라 와 結託한 閔氏 一派의 壁, 淸나라 의 影響力 等에 부딪히자 위로부터의 漸進的인 改良主義에는 限界가 있음을 認識하고 쿠데타를 祈禱, 準備하게 된다.

評價와 批判 [ 編輯 ]

肯定的 評價 [ 編輯 ]

김옥균

開化思想에 徹底히 心醉하여 스승 유홍기 中인 身分임에도 그에게 尊待말을 썼다고 傳해진다. [8] 以後 甲申政變의 失敗로 照明되지 못하거나 否定的으로 評價되어 왔으나 2007年 以後 뉴라이트 等 一部 團體에서 '韓國 近代化를 빛낸 先覺者'로 높이 評價하는 視角이 나타나고 있다. 뉴라이트의 見解에 따르면 金玉均, 朴泳孝 等의 急進 開化派 가 旣存에 淸나라에 바치던 朝貢制度와 門閥制度를 廢止하는 等 改革을 試圖했다는 點을 評價, 韓國 近代化를 빛낸 先覺者로 보기도 한다. [34] [35] [36]

그는 閔氏 一派의 外交 政策에 對한 閉鎖的인 衛正斥邪 主張도 反對하면서도 外勢의 强要에 依하여 어쩔 수 없이 無分別하게 開放하는 것도 排斥했다고 한다. [7] 實際로 처음에 그는 平和的 手段에 依한 改革 運動을 推進했으나 淸나라 와 結託한 閔氏 勢道政權의 壁에 부딪히자 不得已 쿠테타 的인 方法을 動員하여 變革을 試圖했으나, 民心의 支持를 받지못한 채 위로부터의 改革을 試圖했다는점에서 限界를 드러냈다. [7] 그의 生家 터에는 追慕碑가 設置되었으며, 1976年 忠淸南道 記念物 13號로 指定되어 공주시가 管理하고 있다. [6] 日本 도쿄 아오야마 公園墓地 外國人 墓域에 머리털과 옷을 묻은 무덤이 있다.

否定的 評價 [ 編輯 ]

그는 淸나라 에 對한 事大主義나 明나라 或은 中國에 對한 事大主義와 外勢의 介入을 批判하면서도 甲申政變 當時에는 日本 에 依支하게 되었는데 外勢에 依存했다는 點이 批判의 對象이 되고 있다. 또한 事前 準備가 緻密하지 않았던 點과 政變의 主體 勢力이 너무나 허약했던 것도 批判의 對象이 되고 있다. 또한 그때까지 朝鮮 에서 守舊派(守舊派)의 後見勢力人 淸나라 等의 影響力이 朝鮮 社會 內에 莫强했다는 點을 認識하지 못한 것 亦是 批判의 對象이 되고 있다.

家族 關係 [ 編輯 ]

그外 것들 [ 編輯 ]

  • 洪鍾宇의 金玉均의 暗殺 事件은 淸日戰爭 의 原因을 提供하게 된다. 金玉均 暗殺 計劃을 미리 感知한 쪽은 日本 政府였다. 그러나 暗殺을 애써 沮止하지 않았다. 한때 金玉均을 近代化의 先驅者 云云하며 全幅的으로 支援한 日本 이었지만, 金玉均이 淸國 의 干涉에 막히며 政變에 失敗하고 朝鮮 刺客에게 쫓기는 몸으로 轉落하자 찬밥 對하듯 했다. 그런데 金玉均이 상하이 에서 홍종우 한테 암살당하자 日本 政府와 言論은 一齊히 호들갑을 떨기 始作했다. 마치 암살당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그를 哀悼하고, 義捐金을 모으고, 屍體 收拾 問題를 協議하는 等 재빠르게 움직였다. [26]
  • 한便 朝鮮 은 金玉均 暗殺이 國家의 傾斜라고 큰 意味를 附與했다. [26] 洪鍾宇가 돌아오자 高宗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맞았다는 逸話가 있을 程度였다. 홍종우 는 單番에 實力派 皇室 官僚로 浮上한다. 그로서는 프랑스에서 외롭게 工夫하며 朝鮮을 近代國家로 발돋움시키겠다는 決然한 意志를 實行에 옮길 좋은 機會였을 것이다. [26] 상하이에서 暗殺 事件이 일어난 것은 淸에 不幸이었다. 日本은 金玉均이 日本人이나 다름없고, 日本 旅館에서 事件이 일어난 만큼 事件 管轄은 日本에 있다고 主張했다. 暗殺을 放置한 淸國 政府를 猛非難했다. 그러나 淸은 洪鍾宇의 身元을 確認한 다음 朝鮮 政府의 要求대로 홍종우 와 김옥균 屍身을 朝鮮에 넘겼다. [26]
  • 朝鮮 은 日本의 속내를 꿰뚫지 못했다. 萬國公法과 같은 허울 좋은 世界 共存論을 盲信한 나머지 帝國主義가 浸透하리라는 豫想은 미처 하지 못했다. 朝鮮 侵略, 나아가 大陸 侵略의 機會를 虎視眈眈 노리던 日本에게 金玉均 暗殺 事件은 대단한 好材였다. 金玉均 暗殺 事件은 長期的으로는 朝鮮 合倂, 當場에는 靑果 戰爭을 벌일 수 있는 기막힌 名分이 되었다. 決定的으로 그해 東學 農民 運動 이 일어나 淸과 日本은 朝鮮 政府의 要請에 依해 正面으로 부딪힌다. 이것이 바로 淸日戰爭이다. [26]
  • 金玉均은 貴族 階級으로 權力 이 莫强한 것은 勿論이며, 經濟的으로도 富裕해서 下人을 많이 保有했다. 讀書 , 바둑 을 꽤 즐겨했다고 하며, 그래서 下人들이 晋州 를 깎아서 바둑알을 만들었다. 西洋 의 비싼 鄕愁 도 收集했다는 記錄이 있다.
  • 金玉均은 政治人 으로서는 점잖은 性格이었으며 나서는 것을 蔑視했다. 그가 貴族 이니 나대는 것들을 淺薄하게 여기는 것은 當然하다. 兩班보다는 賤民들이 人氣를 끌었으니. 末年에는 밖에 나갈 때는 가마 , 馬車 萬 탔고, 扈衛武士를 百餘 名씩 대리고 다녔다는 記錄이 있다. 權力이 莫强한 時節에는 國王 과 비슷하게 行次 때는 國民(나라의 百姓)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했기에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 韓國思想家 評傳에 그의 皮膚가 白玉같이 희며 腎臟이 約 170cm이 었다고 적혀져 있다. [37]
  • 6.25戰爭 을 일으킨 金日成 北韓 初代 主席은 김옥균 急進開化派를 높게 評價하고 尊敬했다. 그리고 北韓 김일성의 아들 金正日 도 金玉均의 貴族的인 性品을 따라하려고 했다는 記錄이 있다.

金日成 의 評價

  1. 우리에게 朝鮮歷史를 배워주던 先生들은 大體로 金玉均을 親日派로 規定하였다. 解放後 우리 나라 學界에서도 오래동안 金玉均에게 親日派라는 딱紙를 붙이였다. 그가 政變準備過程에 日本사람들의 도움을 받은것이 親日의 標的으로 되였다. 우리는 이것을 공정한 評價라고 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歷史學者들에게 金玉均의 改革運動에서 人民大衆과의 結合에 注意를 돌리지 않은것은 勿論 잘못이다, 그렇지만 日本의 힘에 依據하였다고 그것을 親日로 評價하면 虛無主義에 떨어진다. 그가 日本의 힘을 리용한것은 親日的인 改革을 斷行하자는데 目的이 있은것이 아니고 當時의 力量關係를 綿密히 打算한데 기초하여 그것을 開化黨의 便에 유리하게 轉換시키자는데 있은것이다, 當時로서는 不可避한 戰術이였다고 말해주었다. - 金日成 《世紀와 더불어》 中
  • 아들 金泳鎭 (金英鎭)은 朝鮮總督府 中樞院 參議를 지냈으며, 傍系 後孫 김익진 (金翼鎭)은 大檢察廳 檢察總長을 지냈으며, 김영무는 國內 最大 로펌 金앤張 創業主다. 그래서 김영무가 김옥균 急進開化派 記念館에 關與하고 있다.
  • 金玉均先生遺墟는 國家寶物로 忠淸南道 아산시 영인면 古筠길 41에 있다. [38]

著述 作品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 〈開化派의 改革運動〉
  • 김형광, 《朝鮮人物展》 (시아출판사, 2007)
  • 金基鎭, 靑年 김옥균(韓國文學代表作選集 16) (문학사상사, 1993)
  • 조재곤, 그래서 나는 金玉均을 쏘았다- 朝鮮의 運命을 바꾼 金玉均 暗殺事件 (푸른역사, 2005)
  • 유영익, 《甲午更張 硏究》(일조각, 1990)

大衆 媒體 [ 編輯 ]

各州 [ 編輯 ]

  1. 아들은 平安道 觀察使를 지냈던 金泳鎭 이다.
  2. 第9張 朝鮮王朝의 鬱陵島·獨島 再開發 政策 -月間 朝鮮 2011年 6月號
  3. '프라하의 戀人'과 김옥균, 北村을 걷다 , 《오마이뉴스》, 2008年 5月 18日 作成.
  4. 신정일, 《똑바로 살아라》 (다산초당, 2011) 328페이지
  5. 現在 忠淸南道 公州郡 정안면 광정리
  6. 公州市, `김옥균 先生 遺品 찾습니다' , 《 聯合뉴스 》, 2006年 1月 24日 作成.
  7. 《人物로 보는 造船社》,p 437~p464
  8. 代案敎科書 韓國 近·現代史(敎科書포럼 저, 圖書出版 기파랑, 2008.3.24) 40쪽.
  9. 權知: 科擧 合格者로서 成均館, 承文院, 校書館, 訓鍊院, 別侍衛 等에 나누어 配置되어 任用 待機 中인 見習 官員
  10. 박영효 亦是 漢城 判尹에서 競技도 光州 留守로 左遷됐다.
  11. 歷史問題硏究所, 《역사비평 第17號:1992 여름號》 (역사비평사, 2007) 274페이지
  12. 北岳山岳會, 《歷史에 비춘 韓國 近現代人物》(白山出版社, 1999) 82페이지
  13. 신봉승, 《朝鮮王朝 500年/24. 王朝의 悲劇》 (금성출판사, 2010) 128페이지
  14. 김옥균, 歷史의 革命家 時代의 異端兒 p94, 박은숙 지음, 너머북스 發行
  15. 亡命 事件은 1942年 7月 조용만 의 短篇 小說 배 안에서 의 素材가 됐다.
  16. 이종각, 《刺客 고영근의 명성황후 復水器》(동아일보사, 2009) 274페이지
  17. [列島의 韓國魂 ⑪] 風雲兒 김옥균 日本 亡命 10年의 軌跡:絶海孤島 오가사와라에 남긴 두 글字, ‘精管(靜觀)’! (3)
  18. 朝鮮 亡命客 설움 달래준 日 게이샤의 純情野話 朝鮮日報 2005年 11月 29日子
  19. 이종각, 《刺客 고영근의 명성황후 復水器》(동아일보사, 2009) 259페이지
  20. 이종각, 《刺客 고영근의 명성황후 復水器》(동아일보사, 2009) 260페이지
  21. 이은직, 《朝鮮名人傳 3》 (정홍준 驛, 圖書出版 일빛, 2005) 202페이지
  22. 이은직, 《朝鮮名人傳 3》 (정홍준 驛, 圖書出版 일빛, 2005) 203페이지
  23. 이종각, 《刺客 고영근의 명성황후 復水器》(동아일보사, 2009) 261페이지
  24. [列島의 韓國魂 ⑪] 風雲兒 김옥균 日本 亡命 10年의 軌跡:絶海孤島 오가사와라에 남긴 두 글字, ‘精管(靜觀)’! (5)
  25. 이광린, 《開化期의 人物》 (연세대학교 出版部, 1993) 137페이지
  26. 朝鮮의 運命을 바꾼 金玉均 暗殺 事件 오마이뉴스 2005年 11月 24日子
  27. 김삼웅, 《親日政治100年史》(東風, 1995年) 43쪽.
  28. ‘그래서 나는 金玉均을 쏘았다’…암살자 홍종우와 김옥균, 果然 누가 옳았는가 쿠키뉴스 2005年 11月 25日子
  29. 民族問題硏究所, 《民族問題硏究 9卷》(民族問題硏究所, 1996) 15페이지
  30. 신봉승, 《신봉승의 造船社 나들이》 (답게, 1996) 287페이지
  31. 신봉승, 《신봉승의 造船社 나들이》 (답게, 1996) 288페이지
  32. “保管된 寫本” . 2013年 12月 1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8月 21日에 確認함 .  
  33. 김태웅 (2003年 12月). “日帝 强占期 김진구(金振九)의 活動과 內鮮一體論”. 《歷史學硏究所》 (歷史硏究 學術저널) (13).  
  34. JOINS | 아시아 첫 인터넷 新聞
  35. 討論이 있는 인터넷新聞 - 데일리안
  36. donga.com[뉴스]-[社說]歷史認識의 地平 넓힐 뉴라이트 代案 敎科書
  37. 韓國思想家 評傳 : 김옥균
  38. 金玉均先生遺墟(金玉均先生遺墟)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