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범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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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범선
禹範善
出生地 朝鮮 忠淸道 丹陽
死亡地 日本 히로시마縣 구레
配偶者 사카이 羅카(酒井ナカ)
子女 膝下 2男
長男 우장춘 (園藝育種學者)
次男 우홍춘(韓國系 日本人)
宗敎 儒敎 ( 性理學 ) → 佛敎
服務 朝鮮 官軍
服務期間 1876年 ~ 1895年
最終階級 朝鮮 陸軍 參領
指揮 朝鮮 官軍 第2大隊長

우범선 (禹範善, 1857年 5月 24日 ~ 1903年 11月 24日 )은 朝鮮 大韓帝國 의 무신 및 軍人 兼 政治家이며, 乙未事變 當時 朝鮮人 協力者이자 명성황후 殺害에 加擔한 朝鮮 時代 末期 高位 人士의 一員이었다.

日本 亡命 後에 大韓帝國 政府의 指示를 받은 僞裝 密偵 刺客 고영근 에 依해 暗殺됐다. 大韓民國 의 農生物學自認 우장춘 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生涯 [ 編輯 ]

武人 家門에서 태어났다. 7살 때부터 漢學을 배웠고, 1876年 過去 武科 試驗에 及第한 뒤 黃海道 地域에 配置 받아 勤務하다가, 1881年 別技軍 이 創設되었을 때 여기에 參加하였다. 우범선은 日本의 使嗾로 創設된 新式 軍隊인 別技軍 에 參與하면서부터 日本 을 背後로 둔 開化 勢力과 가깝게 지냈으며 이로 因해 명성황후 의 閔氏 戚族들과는 對立하여 유배당하기도 했다.

1894年 日本軍이 閔氏 勢力을 失脚시킨 뒤 開化派가 執權하자 軍國機務處 에서 甲午更張 에 參與했으며, 1895年 日本의 主導로 訓鍊隊 가 創設되었을 때 이두황 (李斗璜), 이주회 等 親日派 軍人들과 함께 大隊長을 맡았다.

이 무렵 명성황후 의 反日, 親러 路線으로 러시아 勢力의 得勢가 豫想되었고, 이에 反撥한 日本 公使인 미우라 고로 는 訓鍊隊의 幹部들과 함께 명성황후 弑害 計劃을 세웠다. 우범선은 訓鍊隊 軍人 動員의 責任者였으며 명성황후 의 燒却된 屍身을 마지막으로 處理하는 過程에도 加擔했다. 1896年 2月 11日 高宗 이 王命으로 우범선, 유길준 , 曺喜昖 , 醬粕 (張博), 權泳臻(權濚鎭), 이두황 , 이범래(李範來), 이진호 (李軫鎬) 等에 對한 逮捕令을 내렸다. 2月 15日 高宗 은 우범선 等에 對한 斬首 命令을 내렸다. 이때 그는 逮捕를 避해 隱身한 狀態였다.

그러나 이듬해 俄館播遷 으로 인해 親日 김홍집 內閣이 沒落한 以後, 그는 日本으로 避身했다. 元來 진작에 나이가 차도록 未婚 獨身이던 그는 도쿄 에서 亡命 生活을 하다가 日本 女子 사카이 羅카(酒井ナカ)를 만나 結婚하였다. 當時 미우라가 우범선에 對해 “사람은 좋지만 언제 被殺當할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評하였음에도 請婚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結婚 後 1903年 구레 로 移徙한 뒤 집들이를 하던 날 다른 事件으로 亡命해 있던 고영근 에게 僞裝 接待를 받고 結局 暗殺되었다. 그의 享年이 47歲였다. [1]

大韓民國 農學 發展의 基礎를 닦은 有名한 育種學者人 우장춘 (禹長春)은 우범선이 도쿄에서 사카이 나카와 結婚하여 낳은 아들로서, 우범선과 사카이 나카가 結婚할 때 日本 僧侶인 回雲師 住持勝 아라이가 우범선이 被殺되면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을 키워주기로 했던 約束대로 키워주게 된다. [1]

參考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

  1. 임종국 (1991年 2月 1日). 《實錄 親日派》. 反民族問題硏究所 엮음. 서울: 돌베개. 46~47쪽쪽. ISBN   8971990368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