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 (朝鮮 端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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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定順王后
朝鮮 端宗의 王妃
在位 1454年 1月 22日 ~ 1455年 尹6月 11日 (陰曆)
前任 소헌왕후 沈氏
後任 정희왕후 尹氏
朝鮮의 王大妃
在位 1455年 尹6月 11日 ~ 1457年 6月 21日 (陰曆)
前任 厚德王大妃 閔氏 (원경왕후)
後任 自省王大妃 尹氏 (呈戱王后)
이름
別號 의덕왕大妃, 魯山君否認, 老産否認
시호 정순(定順)
尊號 宜德(懿德)
揮毫 端良제경(端良齊敬)
身上情報
出生日 1440年
死亡日 1521年 7月 17日 ( 1521-07-17 ) (陽曆)
家門 여산 宋氏
父親 輿梁府院君 송현수
母親 여흥부夫人 餘興 閔氏
配偶者 斷種
子女 없음
陵墓 사릉 (思陵)
京畿道 南楊州市 진건읍 사능리 107

定順王后 宋氏 (定順王后 宋氏, 1440年 ~ 1521年 7月 17日 ( 陰曆 6月 4日 ))는 朝鮮 斷種 (端宗)의 整備이다. 시호 端良제경정순왕후 (端良齊敬定順王后)이다. 輿梁府院君 송현수(礪良府院君 宋玹壽)의 딸로, 本貫은 여산 이다.

김종서 의 事後 1454年에 揀擇令에 따라 王妃敎書를 받고 卽位하였다. 男便 端宗이 降等되면서 郡夫人 (君夫人)으로 格下되었다가, 官婢가 되었다. 以後 世祖 는 그를 奴婢이지만 아무도 犯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냈다. 男便 斷種 의 冥福을 빌다가 死亡하였으며, 그의 陵의 소나무는 東쪽 方向으로 굽는다는 傳說이 있어 話題가 되기도 했다.

中宗 때부터 復位가 擧論되다가 송시열 , 김수항 의 거듭된 建議로 1698年 ( 肅宗 24年)에 端宗과 함께 復位되어 王后로 追封되었다.

世宗 의 王子 영응대군 의 否認 帶方郡夫人 宋氏 는 그의 姑母이자 媤叔母이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本貫은 여산 으로 全羅北道 井邑郡 태인면(現 칠보면 [1] )에서 태어났으며, 판돈녕府使 等을 歷任하였고 영돈녕府使로 追贈된 輿梁府院君(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 송현수 를 따라 漢城府 로 移徙하였다.

王妃 揀擇과 廢妃 [ 編輯 ]

性品이 恭遜하고 儉素해 可히 宗廟를 永久히 保存할 수 있는 人物이라 하여 揀擇되었는데, 그 背景에는 姑母가 靈應大軍의 夫人이라는 點이 크게 作用하였다. 1454年 2月 19日(陰曆 1月 22日)에 열넷의 나이로 한 살 年下였던 斷種 과 婚姻하여 王妃에 冊封되었다. 1455年, 端宗이 首陽大君(世祖)에게 王位를 一任하고 上王이 되자 王大妃가 되어 宜德(懿德)의 尊號를 받았다. 그러나 1457年, 성삼문 , 박팽년 死六臣 이 推進하던 端宗 復位 運動 이 發覺되자 上王 端宗은 魯山君(魯山君)으로 강봉되어 寧越로 流配되었고, 의덕왕大妃는 軍部人이 되어 宮에서 쫓겨났다.

奴婢로 轉落 [ 編輯 ]

親庭마저 風飛雹散 난 狀態였던 그는 東大門 밖 숭인동 靑龍寺 近處에 草庵을 짓고 侍女들과 함께 살았다. 宋氏는 侍女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染色業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를 안 世祖가 집과 食糧 等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한便, 그를 가엾게 여긴 洞네 兒女子들이 朝廷의 눈을 避해 그의 집으로 먹을 것을 건네주고자 市場을 組織하는 일도 있었다.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는 귀양 가는 斷種과 定順王后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으로 傳해지는데, 結局 두 사람은 이승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端宗이 끝내 流配地인 寧越에서 生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夫君의 죽음을 傳해 들은 宋氏는 每日 아침 저녁으로 큰 바위를 올라 寧越을 向해 痛哭을 하며 端宗의 冥福을 빌었다. 以後 世祖 는 그에 對해 '身分은 奴婢이지만 奴婢로서 司役割 수 없게 하라'는 命을 내려 아무도 犯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냈다. 정업원은 府君을 잃은 後宮들이 出宮하여 餘生을 보냈던 곳이다.

後日, 英祖 가 親히 洞망봉(東望峰)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日帝强占期 때 洞망봉 近處 地域이 採石場으로 쓰였으며 그 바위는 깨어져나가버렸다. 2011年 現在, 서울 鍾路區 駱山 近處인 이곳 洞망봉 南쪽에는, 桐망정이라는 이름의 精子가 들어서 있다. [2]

한便 朝鮮 말의 文章家이자 歷史家인 김택영 은 自身이 지은 野史에서 " 신숙주 가 그를 自身의 種으로 달라고 했다."라고 主張했는데, 이에 對해서는 反論이 많아 事實 與否는 알 수 없다 [3]

죽음과 그 以後 [ 編輯 ]

그는 世祖의 曾孫이자 端宗의 宗孫뻘인 中宗 (中宗) 16年인 1521年 7月 7日 ( 陰曆 6月 4日 ), 81歲의 나이로 恨 많은 生을 마감했다. 中宗의 在位 初期, 士林派 조광조 等에 依해 復位가 主張됐으나 中宗은 이를 拒否했다. 그 뒤 顯宗 때부터 송시열 김수항 等은 端宗과 그의 復位를 거듭 建議했다. 그들은 世祖의 斷種 殺害는 側近들의 誤導에 휘둘린 것이며 本心은 斷種 殺害에 있지 않았다고 主張했다. 그 建議로 1698年 12月 7日 (肅宗 24年 陰曆 11月 6日 ), 端宗과 그는 復位되어 시호 를 받고 宗廟 永寧殿 에 神位가 모셔졌다.

그의 別世 때에는 大君夫人의 格에 따라 치러진 葬禮로 競技도 楊州郡 (楊州) 軍將리(群場里, 現在의 南楊州市 진건읍 사릉리)에 埋葬됐다. 端宗과 그의 復位로 宗廟 에 配享되면서 陵號를 사릉 (思陵)이라 했는데 이는 抑鬱하게 殺害된 男便을 私募(思慕)한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그의 墓所 뒤便에 심은 나무들이 斷種 의 陵인 章陵 쪽을 向해 고개숙여 자란다는 傳說이 한 때 傳해졌다. 巫俗의 神의 한 名으로 崇拜됐는데, 巫俗에서는 그를 宋氏夫人 神이라 부른다.

家族 關係 [ 編輯 ]

定順王后가 登場하는 作品 [ 編輯 ]

映畫 [ 編輯 ]

드라마 [ 編輯 ]

小說 [ 編輯 ]

  • 《永永 離別 永 離別》, 김별아, 창해, 2005, ISBN   897919689X

關聯 文化財 [ 編輯 ]

參考 文獻 [ 編輯 ]

  • 《朝鮮史 이야기 1》, 朴榮圭 便, 주니어김영사, 2005年 9月 30日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前任
소헌왕후
( 현덕왕후 )
朝鮮 歷代 王后
1454年 陰曆 1月 2日 ~ 1455年 陰曆 6月 11日
後任
정희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