警鐘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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警鐘
景宗
경종과 선의왕후가 묻힌 의릉
警鐘과 선의왕후 가 묻힌 義陵
第20代 朝鮮 國王
在位 1720年 6月 13日 ~ 1724年 8月 25日 (陰曆)
卽位式 慶熙宮 崇禎門
前任 肅宗
後任 英祖
조선국 王世子
在位 1690年 6月 16日 ~ 1720年 6月 12日 (陰曆)
前任 王世子 順 (肅宗)
後任 王世子 行 (驍將世子)
이름
利潤(李?)
廟號 警鐘(景宗)
시호 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
(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陵號 義陵 (懿陵)
서울特別市 城北區 畫廊로32길 146-20
身上情報
出生日 1688年 10月 28日 ( 1688-10-28 ) (陰曆)
出生地 朝鮮 漢城府 昌慶宮 취선당
死亡日 1724年 8月 25日 ( 1724-08-25 ) (35歲) (陰曆)
死亡地 朝鮮 漢城府 昌慶宮 環聚展
父親 肅宗
母親 희빈 張氏
配偶者 단의왕후 沈氏 · 선의왕후 魚氏
子女 없음

警鐘 (景宗, 1688年 11月 20日 ( 陰曆 10月 28日 ) ~ 1724年 9月 30日 ( 陰曆 8月 25日 ) )은 朝鮮 의 第20代 國王 (在位: 1720年 7月 6日 ( 陰曆 6月 13日 ) ~ 1724年 9月 30日 ( 陰曆 8月 25日 )이다. 肅宗 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희빈 張氏 이며 英祖 의 이福 兄이다.

生涯 [ 編輯 ]

誕生과 世子 冊封 [ 編輯 ]

1688年 (肅宗 14年) 10月 28日, 昌慶宮 취선당에서 肅宗 (肅宗)과 當時 鄭2品 소의(昭儀)였던 희빈 張氏 의 아들로 태어났다. 肅宗은 寵愛하던 張氏에게서 아들을 얻자, 後嗣를 근심하던 車에 매우 기뻐하였다. [1]

1689年 (肅宗 15年), 肅宗은 태어난지 100日도 안된 王子를 原子(元子)로 冊封하고 名號를 내리면서, 生母인 소의 張氏도 內命婦 政1品 희빈 (禧嬪)에 봉하였다.

己巳換局 [ 編輯 ]

이때 原子의 名號를 내리는 일과 희빈 張氏 의 處遇를 두고 政爭이 發生하였는데, 西人 인현왕후 가 아직 젊고 王子를 生産할 수 있는데 태어난지 얼마 안된 王子를 原子로 冊封하는 일은 時機尙早라며 反對하였다.

이에 肅宗은 還國을 일으켜 自身의 뜻에 反對하는 西人 을 大擧 失脚시키고 남인 을 起用하였다. 西人 山林 의 領袖이자 孝宗 , 顯宗 의 스승이었던 송시열 을 비롯해 김수항 等이 賜死되고 西人 政權이 崩壞하였다. 또한 當時 王妃였던 西人 出身의 인현왕후 가 廢位되고 [2] , 어머니 희빈 張氏가 王妃로 冊封되었다. [3]

1690年 (肅宗 17年) 6月 16日, 王世子에 冊封되었다. [4] 1696年 (肅宗 23年), 심호 (沈浩)의 딸 沈氏( 단의왕후 )와 婚姻하였다. [5]

甲戌換局과 무고의 玉 [ 編輯 ]

1694年 (肅宗 20年), 右議政 민암 肅宗 에게 西人 ( 老論 少論 )이 거짓 風聞을 지어내 人心을 洶洶하게 하고 奸惡한 짓을 꾸미려 한다는 函弛緩의 密告를 받았음을 傳하며 西人의 處罰을 請하였다. 西人에서는 인현왕후 의 復位 運動을 꾀하며 민암과 장희재 가 逆謀를 꾸미고 있다고 逆告變을 하였는데, 肅宗은 갑작스럽게 還國 을 일으켜 남인 政權을 무너뜨리고 西人을 再登用하면서 南人은 以後 政界에서 消滅하였다.

이 過程에서 廢位된 인현왕후 가 復位하고 희빈 張氏 가 王妃의 자리에서 내려와 빈(嬪)으로 降等되었는데, 희빈의 處遇를 두고 西人 內의 老論과 小論이 葛藤하였다. 희빈 張氏의 廢位를 反對하는 少論 은 以後 王世子(景宗)를 支持하였고, 仁顯王后의 復位를 支持하는 老論 숙빈 崔氏 蘇生이자 警鐘의 異腹同生인 연잉군 (英祖)을 支持하게 된다.

이러한 政局 속에서 1701年 (肅宗 27年) 인현왕후 가 昇遐하자, 희빈 張氏와 그 側近들이 仁顯王后를 詛呪하고 謀害하였다는 老論 숙빈 崔氏 의 告變이 있었고, 肅宗은 關聯者들을 鞠問하여 大大的으로 處罰하였으며 희빈 張氏 에게 自進을 命하여 師事하였다. [6]

險難한 卽位 過程 [ 編輯 ]

이이명 (1658-1722)
警鐘의 政敵이었던 老論 의 領袖로, 世宗 의 12男인 밀성군 의 後孫이기도 하다 李頥命은 辛壬士禍 때 處刑되었다.

어머니 희빈 張氏 老論 勢力에 依해 賜死되면서, 警鐘은 희빈 張氏의 政敵인 老論 의 壓迫속에 不安定한 世子의 地位를 維持하였다. 또한 後嗣도 두지 못했으므로 末年의 肅宗 은 老論의 領袖인 左議政 이이명 과 獨對(獨對, 왕이 史觀을 물리고 臣下와 단둘이서 만남 )하여 世子의 後嗣에 對한 言及을 하였으나, 史觀이 入試하지 못하게 한 채 이루어졌으므로 仔細한 內容은 알 수 없다. [7] ( 精油獨對 )

肅宗 이이명 의 獨對를 두고 史觀은 勿論 儒生들이 批判하였고 世子의 支持勢力인 少論 또한 李頥命과 肅宗의 處事를 批判하였다. 臥病 中이던 少論의 領中樞府事 윤지완(尹趾完)은 82歲의 老軀였으나 棺을 들고 上京해 君臣間의 獨對를 激烈하게 批判했다. [8]

獨對는 上下(上下)가 서로 잘못한 일입니다.
殿下께서는 어찌 上國(相國)을 死因(私人)으로 삼을 수 있으며
代身(大臣)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地位로서
임금의 使臣(私臣)이 될 수 있습니까?

肅宗 이이명 과의 獨對를 非難하는 代身들에게 辨明으로 自身의 意見을 傳하고, 自身의 病이 심해짐을 理由로 世子에게 代理淸淨 을 命하였다. [9] 肅宗 末年의 政爭은 警鐘을 支持하는 少論 과 연잉군을 支持하는 老論 勢力으로 兩分되어 對立하였는데, 肅宗이 죽고 警鐘이 卽位하면서 老論과 연잉군 은 政治的 危機를 맞이하였다.

1718年 (肅宗 44年), 世子嬪 沈氏가 죽자 單儀賓(端懿嬪)의 諡號를 내리고 卽位 後에 단의왕후 (端懿王后)로 追尊하였다. 같은 해 어유구 (魚有龜)의 딸 魚氏(魚氏, 선의왕후 )를 世子嬪으로 맞아들였다. [10]

治世 [ 編輯 ]

1720年 (景宗 卽位年) 6月 13日, 慶熙宮 崇情文에서 卽位하였다. 肅宗의 病身處分 以後 연잉군 (英祖)을 支持하는 老論 이 政局을 掌握한 가운데 警鐘이 卽位하였고, 王權은 不安定하고 微弱하였다.

平素 말數가 적고 自身의 意見을 剛하게 披瀝하지 못하던 警鐘에게 老論은 露骨的으로 不忠(不忠)한 모습을 보였는데, 代表的인 事例들이 희빈 張氏 의 追崇 問題와, 연잉군 의 王世弟 冊封 및 代理淸淨 奏請, 警鐘이 後嗣를 두지 못함을 운운한 '胃弱' 言及 事件이다.

少論 强勁派는 이런 老論에 맞서며 獄事를 일으켜 辛壬士禍 가 發生하였고, 이이명 을 비롯한 老論의 4大臣이 처형당하고 老論이 失脚하였으나 警鐘이 急逝하고 英祖 가 卽位하면서 老論은 復權하였다.

희빈 張氏 追崇 問題 [ 編輯 ]

1720年 (景宗 卽位年) 7月, 少論 을 中心으로 희빈 張氏 의 追崇 問題가 論議되었는데, 遊學 조중우가 上疏를 올려 희빈 張氏의 名號를 定하여 줄 것을 請하였다. [11]

 

遊學(幼學) 조중우(趙重遇)가 上訴하기를,  

"帝王(帝王)의 德의(德義)는 孝行에 지나침이 없고, 추보(追報)의 道理는 禮敬(禮經)의 밝은 訓戒이며,
어미가 아들로써 尊貴하게 되는 것은 《春秋(春秋)》의 臺의(大義)입니다.
이제 殿下께서 從事(宗社)와 新人(神人)의 週(主)가 되었는데,
낳아 주신 어버이는 오히려 名號(名號)가 없이 寂寞한 마을에 祠宇(祠宇)는 小組(蕭條)하고
한 줌의 무덤에는 풀만 荒凉합니다.
文武 조신(文武朝臣)의 2品官度 오히려 贈職(贈職)의 榮轉(榮典)이 있는데,
殿下께서는 堂堂한 千乘(千乘)의 尊貴한 몸으로써 唯獨 낳아서 길러 준 어버이에게는 綽號를 더함이 없으니,
무엇으로써 나라의 體統을 높이고 至極한 整理(情理)를 펴겠습니까?
神이 記憶하기로는 지난날 先大王( 肅宗 )께서 電荷의 整理를 洞燭하여 特히 天障(遷葬)을 許諾하셨고,
殿下의 뜻을 살피셔서 다시 望哭(望哭)하게 했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先大王의 陟降(陟降)하는 靈魂이 오늘날의 擧措에 對하여 반드시 어긋났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臣이 삼가 《璿源譜略(璿源譜略)》 1冊을 보니, 前後의 撰集에 있어 모두 稟議하여 叡裁(睿裁)하였는데,
희빈 (禧嬪)’ 두 글字를 일찍이 削除하지 않았으니, 先大王의 隱密한 뜻이 어찌 그 사이에 있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願하건대 特히 예관에게 命을 내려 빨리 名號(名號)를 定하여
至極한 整理를 펴고 나라의 體統을 높이소서."
? 《 景宗實錄 》 1卷,
景宗 卽位年(1720年 7月 21日) (甁술)

肅宗 희빈 張氏 의 綽號를 거두지 않고 天障과 望哭禮를 許可했던 것은 警鐘이 卽位한 後에 희빈을 追尊할 수 있도록 한 肅宗의 隱密한 뜻이었으니 희빈 張氏에게 마땅히 名號를 올려야 한다는 上疏가 빗발쳐 올라왔다.

이에 희빈 張氏를 師事하는데 一助하였던 老論 이 大大的으로 反對하자, 老論의 氣勢에 눌린 警鐘은 先王의 國喪 中에 論할 일이 아니라며 上疏를 올린 遊學 조중우를 邊方에 流配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 하려 했으나, 老論의 大臣들은 조중우를 鞠問할 것을 要求하였고, 警鐘은 이를 拒絶하였다. 하지만 老論은 조중우와 그 무리들을 押送해 鞠問하였고 조중우는 流配 가는 길에 死亡하였다. [12]

얼마 後, 成均館 醬의( 成均館 儒生 代表 ) 윤지술 [13] 이 章意義 權限으로 卷當( 成均館 儒生들의 同盟休學 )을 宣言하며 肅宗大王 指紋(誌文)에 肅宗 희빈 張氏 를 師事한 紳士年의 일( 무고의 玉 )을 漏落한 것을 非難하며 다시 記錄할 것을 請하였다. [14]

(肅宗이 희빈을 師事한) 紳士年의 處分 은 先王( 肅宗 )께서 國家 萬歲(萬世)를 念慮한 데에서 나온 것이며
前後 莊周(章奏, 上疏)의 批答에 誠意(聖意)를 보이신 것이 해와 별같이 밝으니
殿下께서 敢히 다시 마음에 다른 뜻을 품을 수 없는 것이며, 또 그것이 道理에도 當然한 일입니다
 
— 윤지술

인현왕후 의 오빠인 민진원 을 主軸으로 한 老論 은 윤지술의 意氣를 稱讚하며 그를 庇護하였으나, 윤지술은 國王의 生母를 망령되이 非難한 罪로 處刑되었다.

조중우와 윤지술은 少論과 老論의 立場을 代表하여 各其 다른 생각으로 소를 올린 것이었는데, 조중우는 妄靈되게 肅宗 의 뜻을 臆測하며 恩惠를 憑藉하고 大義(大義)에 어긋난 罪로, 윤지술은 어머니와 아들의 끊어질 수 없는 의(義)를 卑下하며 軍部를 욕보인 罪로 處刑된 것이다. [15]

1722年 (景宗 2年) 辛壬獄事 민진원 과 老論을 逐出한 警鐘은 비로소 어머니 희빈 張氏 를 玉山部隊빈(玉山府大嬪)으로 追贈하였다. [16]

胃弱 言及 事件 [ 編輯 ]

寶物 第1491號  연잉군 肖像
警鐘의 異腹同生인 英祖 의 연잉군 時節의 肖像畫로, 21歲때의 모습이다.

警鐘은 어려서부터 肥滿이었으며 잔病 치레를 하였는데, [17] 卽位 後에도 後嗣가 없자 老論 은 警鐘의 異腹同生인 연잉군 을 王世弟(王世弟)로 冊封할 것을 請하였고, 警鐘은 연잉군을 王世弟로 冊封하였다. [18]

이에 淸나라 에 奏請使를 보내어 稅制 冊封을 承認받고자 하였는데, 이때 警鐘이 胃弱 (?弱)하여 後嗣를 이을 수 없고, 左右의 媵妾(后妃)에게서 後嗣를 보지 못했다는 部分이 王을 侮辱하였다 하여 奏請 府使 윤양래와 書狀官 兪拓基가 邊方에 圍籬安置 되었다.

 
"國本(國本)을 미리 세우는 것은 宗廟(宗廟)를 重하게 여긴 까닭입니다.
따라서 使臣(使臣)의 任務를 附與받은 사람은 事理에 依據해서
晋州(陳奏)하여 期於이 準許(準許)를 받는 것이 事理에 當然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番 諮問(咨文)을 撰述하여 들여올 적에
敢히 '胃弱(?弱)'하다는 두 글字를 聖宮(聖躬, 賃金)에게 放恣하게 덧붙였다가,
그들과 묻고 答할 때에는 다시 위질(?疾)이라는 말로 陳述했습니다.
그리고 '左右의 媵妾(?妾)' 等이라는 말을 捏造하여 꾸며서 賃金을 마구 誣陷했으니,
이것이 어찌 臣下로서 敢히 마음먹을 수 있는 것이며 입에서 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中略)
아! 너무도 通分합니다.
設使 우리 聖像(聖上)께서 果然 그들이 말한 것과 같은 疾患이 참으로 있다 하더라도
臣下된 者의 道理에 있어 眞實로 外人(外人)에게 말하여 漏泄시키는 것은 不當한 짓인데,
더구나 없는 것을 있다고 捏造하여 우리 賃金을 誣陷하는 말을 만들어
다른 나라에 가서 드러내면서 돌아보고 꺼리는 마음이 없었으니,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살면서 어떻게 敢히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賃金을 無視한 不渡(不道)韓 言行으로 國家를 욕보인 無禮한 짓을 한 罪를
嚴重히 懲討(懲討)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請컨대 돌아온 奏請 府使(奏請副使) 윤양래(尹陽來)와 書狀官(書狀官) 유척기(兪拓基)를
아주 먼 邊方에 圍籬 安置 시키소서."
? 《 景宗修正實錄 》 3卷,
景宗 2年(1722年 靑 康熙(康熙) 61年) 6月 19日 (妊娠)

辛壬獄事 [ 編輯 ]

肅宗 의 뒤를 이어 卽位한 警鐘은 연잉군 을 王世弟로 冊封하여 後嗣를 圖謀하라는 老論 의 奏請속에 1721年 (景宗 1年) 陰曆 8月, 異腹 동생인 연잉군을 王世弟로 冊封하였다. [18]

以後 한발 더 나아가 老論 은 稅制의 代理淸淨 을 建議하였고, 少論 側에서는 老論 의 不純한 意圖를 指摘하였다. 警鐘은 별다른 立場 表明을 하지 않다가 목호룡 의 告變이 터지면서 公論을 모아 還國을 試圖하여 老論 勢力을 不忠(不忠)과 反逆으로 몰았다.

연잉군을 支持하던 老論의 4代身 김창집 , 이이명 , 이건명 , 조태채 와 50餘名의 高官들이 死刑당하고 그 一族이 流配, 投獄되는 等 연잉군은 커다란 支持 勢力을 잃었으며, 1722年 (景宗 2年) 김일경 等의 使嗾를 받은 박상검(朴尙儉)과 問遺도(文有道)의 陰謀로 生命의 威脅을 받기도 했다.

辛壬士禍 少論 强勁派가 政局을 主導하였으나 警鐘은 病弱했고, 警鐘 비 선의왕후 는 祕密裏에 사람을 시켜 다른 宗親의 아들 中에 養子로 삼아 後嗣를 이으려고 하였다. 少論의 威脅 속에서, 老論 과 완論派 小論은 연잉군을 積極的으로 支持하였고, 警鐘의 庇護 아래 연잉군은 不安定하지만 王世弟의 자리를 維持하였다.

警鐘의 在位 期間 4年은 老論 少論 의 政權 다툼으로 政治가 潛潛할 날이 없던 時期였으므로 特別한 業績 또한 남기지 못했다. 이 時期에 獨島 가 朝鮮의 領土임을 밝혀 놓은 남구만 의 《 약천집 》이 發刊되었고, 西洋의 것을 模倣한 消火器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最後 [ 編輯 ]

死亡 [ 編輯 ]

警鐘은 어려서부터 잔病치레가 많았고, 肥滿한 몸집 [17] 에 몸에 熱과 火가 많고 形容할 수 없는 病을 앓거나 다시 回復되는 일이 反復되었다. [19]

予有奇疾, 十餘年來, 差復無期, 乃先朝之軫念。

내게 十餘 年 前부터 異常한 病이 있는데 조금도 回復될 期約이 없으니
이는 곧 先王( 肅宗 )께서 근심하던 바였다.

 
— 《 景宗實錄 》 5卷, 景宗 1年(1721年 10月 10日)

1724年 (景宗 4年) 여름부터 警鐘은 消化不良과 泄瀉等으로 8月에는 거의 1달間 제대로 食事를 못할정도로 狀態가 좋지 않았다. 그러던 陰曆 8月 19日 저녁에 게醬과 감을 먹고는 갑작스럽게 狀態가 惡化되어 24日에는 意識不明 狀態에 빠진다. 이에 稅制(英祖)가 人蔘과 附子를 使用할것을 强勸하고, 語의 이공윤이 反對했지만 稅制의 强勸에 警鐘에게 人蔘과 附子를 處方한다. 그러나 稅制의 處方에 警鐘의 狀態는 더 惡化되어 8月 25日 昌慶宮 環聚情에서 昇遐하였다. [20] 警鐘이 昇遐하기 前, 게醬 , , 人蔘茶 等을 水剌로 든 일이 있어 [21] , 警鐘의 釋然치 않은 죽음을 두고 英祖 卽位 初에 景宗 毒殺說이 流布되었다. 이는 李麟佐의 亂 羅州 掛書 事件 때도 言及되면서 英祖의 在位 期間 내내 正統性과 關聯한 아킬레스腱으로 남게 되었다.

廟號와 시호 [ 編輯 ]

廟號 警鐘 (景宗)이며, '卿(景)'은 思索(思索)을 좋아하고 크게 國事를 念慮함을 일컫는다. 諡號는 德門益무筍人選孝 (德文翼武純仁宣孝)이다.

陵墓 [ 編輯 ]

陵은 義陵 (懿陵)으로 서울特別市 城北區 석관동 에 位置하며 景宗과 繼妃 선의왕후 의 動員上下陵(同原上下陵)의 形態이다. 위쪽에는 警鐘이, 아래쪽에는 선의왕후의 陵이 造成되어 있다.

景宗 毒殺說 [ 編輯 ]

警鐘이 갑작스럽게 死亡하자 兵士가 아닌 毒殺 當한 것이라는 陰謀論이 단의왕후 의 男동생 審幽玄 等 少論 過激派를 통해 돌기 始作했다. 少論 過激派는 연잉군이 語義의 警告를 無視하고 올린 人蔘, 富者를 먹은 뒤 景宗이 死亡한 點 [22] 을 注目해 연잉군이 警鐘을 毒殺했다고 主張했다.

景宗 事後 이 毒殺說은 少論 을 中心으로 擴散되어 김일경 의 謀議 事件을 始作으로 利川해의 亂動, 청주성을 中心으로 벌어진 李麟佐의 亂 , 羅州掛書事件 等 오랜 時間 英祖의 正統性 是非問題로 飛火되었다.

이 中 羅州掛書事件 의 主謀者 신치운 (申致雲)은 英祖 가 自身을 親鞠할 때 '神은 甲辰年(1724年)부터 게醬 을 먹지 않습니다.'라며 景宗 毒殺說을 間接的으로 云云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영조는 憤痛해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23]

1754年 (英祖 30年), 영조는 本人은 警鐘의 죽음과 無關하다는 內容을 《 闡義昭鑑 》에 記錄하기도 하였다.

家族 關係 [ 編輯 ]

出生 死亡
朝鮮 第20代 國王 警鐘大王
景宗大王
1688年 11月 10日 ( 陰曆 10月 28日 )
배론 朝鮮 漢城府 昌慶宮 취선당
1724年 9月 30日 ( 陰曆 8月 25日 ) (35歲)
배론 朝鮮 漢城府 昌慶宮 環聚情

父母 [ 編輯 ]

本館 生沒年 父母 備考
肅宗大王
肅宗大王
全州 1661年 - 1720年 현종대王
顯宗大王
명성왕후 金氏
明聖王后 金氏
第19代 國王
法帽 인현왕후 閔氏
仁顯王后 閔氏
餘興 1667年 - 1701年 여양府院君 민유중
驪陽府院君 閔維重
은성夫婦인 宋氏
恩城府夫人 宋氏
? 1689年 廢位
? 1694年 復位
희빈 張氏
禧嬪 張氏
玉山部隊빈
玉山府大嬪
忍冬 1659年 - 1701年 杖刑
張炯
坡平 尹氏
坡平 尹氏
? 1689年 王妃 冊封
? 1694年 빈으로 降等
? 1701年 무고의 玉 으로 賜死됨


王妃 [ 編輯 ]

시호 本館 生沒年 父母 備考
整備 단의王后 沈氏
端懿王后 沈氏
靑松 1686年 - 1718年 靑銀府院君 심호
靑恩府院君 沈浩
영원부否認 朴氏
靈原府夫人 朴氏
繼妃 선의왕후 魚氏
宣懿王后 魚氏
경순왕對備
敬純王大妃
函鐘 1705年 - 1730年 含怨府院君 어유구
咸原府院君 魚有龜
완릉夫婦인 李氏
完陵府夫人 李氏
[24]

警鐘이 登場하는 作品 [ 編輯 ]

드라마 [ 編輯 ]

各州 [ 編輯 ]

  1. 肅宗實錄 》 19卷, 肅宗 14年 10月 27日 (病人)
    王子가 誕生하다
    王子가 誕生하였으니 소의 張氏 (昭儀 張氏)가 낳았다.
  2. 肅宗實錄 》 21卷, 肅宗 15年(1689年 靑 康熙(康熙) 28年) 5月 4日 (己亥)
    王妃 閔氏를 廢하여 西人으로 삼는다는 敎書를 頒布하다
  3. 肅宗實錄 》 22卷, 肅宗 16年(1690年 靑 康熙(康熙) 29年) 10月 22日 (己卯)
    희빈 張氏를 王妃로 冊封하다
  4. 肅宗實錄 》 22卷, 肅宗 16年(1690年 靑 康熙(康熙) 29年) 6月 16日 (乙亥)
    原子를 王世子로 봉하다
  5. 肅宗實錄 》 30卷, 肅宗 22年(1696年 靑 康熙(康熙) 35年) 5月 20日 (乙亥)
  6. 肅宗實錄 》 35卷, 肅宗 27年(1701年 靑 康熙(康熙) 40年) 10月 10日 (癸亥)
    禮曹로 하여금 自進한 張禧嬪의 喪葬의 祭需를 參酌하여 擧行하라고 下敎하다
  7. 肅宗實錄 》 60卷, 肅宗 43年(1717年 靑 康熙(康熙) 56年) 7月 19日 (辛未)
    代身 獨對時 承旨와 史觀이 입시하다
    微視(未時)에 임금이 다시 熙政堂 (熙政黨)으로 나가서 左議政(左議政) 이이명 (李?命)에게 다시 入試(入侍)하라고 命하였다.

    이에 李頥命이 承旨(承旨) 남도규(南道揆)·假注書(假注書) 이의천(李倚天)·記注官(記注官) 김홍적(金弘迪)·記事官(記事官) 權適(權??)과 함께 闔門(閤門) 밖으로 나아갔다.

    조금 있다가 사알(司謁)李 와서 임금의 分付를 傳하면서 이이명 혼자만 입시하라고 命하였다.

    (中略)

    承傳色에게 請하여 承旨와 史觀이 只今 바야흐로 바로 들어가려 한다는 內容으로 隱密히 품(稟)하게 하였으나 賃金이 答하지 않았다.

    남도규 等이 또 承傳色을 시켜 承旨와 史觀이 結局 바로 들어가겠다는 뜻을 急히 奏達하게 하고 걸음을 옮겨 나아가려 할 즈음에 賃金이 비로소 입시하라고 許諾하였으므로, 마침내 次例대로 나아가 俯伏(俯伏)하였다. 賃金이 이르기를,

    "承旨는 누구인가?"

    하니, 李頥命이 아뢰기를,

    "남도규입니다."

    하였다. 賃金이 이르기를,

    "大臣이 獨對(獨對)韓 境遇는 예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承旨와 史觀이 極力 爭論하면서 함께 入試(入侍)한 것은 매우 옳은 일이다."

    하였다.

    이때 이이명(李?命)은 이미 물러나와 自己의 자리에 俯伏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날 賃金 앞에서 있었던 이야기는 드디어 傳하지 못하게 되었다. 임금이 이어 여러 臣下들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命하고 나서 時任(時任)·原任(原任) 代身만 부르게 하였다.

  8. 肅宗實錄 》 60卷, 肅宗 43年(1717年 靑 康熙(康熙) 56年) 7月 28日 (競進)
  9. 肅宗實錄 》 60卷, 肅宗 43年(1717年 靑 康熙(康熙) 56年) 7月 19日 (辛未)
    眼疾로 國事를 世子에게 淸淨케 하다
  10. 肅宗實錄 》 62卷, 肅宗 44年(1718年 靑 康熙(康熙) 57年) 9月 13日 (戊子)
  11. 景宗實錄 》 1卷, 景宗 卽位年(1720年 靑 康熙(康熙) 59年) 7月 21日 (甁술)
    張氏의 名號를 定하여 줄 것을 請하는 遊學 조중우의 上疏
  12. 景宗實錄 》 1卷, 景宗 卽位年(1720年 靑 康熙(康熙) 59年) 7月 24日 (己丑)
  13. 인현왕후 의 조카 민우수의 妻男
  14. 景宗實錄 》 2卷, 景宗 卽位年 9月 7日(1720年 靑 康熙(康熙) 59年) (辛未)
    醬의 윤지술이 指紋에 紳士年·丙申年의 일을 記錄할 것을 請하다
  15. 景宗實錄 》 2卷, 景宗 卽位年(1720年 靑 康熙(康熙) 59年) 12月 28日 (更新)
  16. 景宗實錄 》 10卷, 景宗 2年(1722年 靑 康熙(康熙) 61年) 10月 10日 (壬戌)
    張氏를 追尊하여 玉山部隊빈으로 삼다
  17. 承政院日記 》 477冊 (脫抄本 25冊) 肅宗 39年(1713年 靑 康熙(康熙) 52年) 4月 9日 (丙辰)
    이이명 이 말하기를,

    "王世子의 健康은 前보다 나아졌으며, 春秋가 한창 젊을 때이나 일찍이 肥滿이므로 이것이 念慮되며, 다리의 痛症은 實로 憂慮하는 바입니다."

  18. 景宗實錄 》 4卷, 景宗 1年(1721年 靑 康熙(康熙) 60年) 8月 20日 (無人)
    領議政 金昌集 · 左議政 이건명 · 判中樞 府使 趙泰采 等의 請에 따라 연잉군을 王世弟로 삼다
  19. 景宗實錄 》 15卷, 景宗 4年(1724年 靑 雍正(雍正) 2年) 8月 2日 (妊娠)
    賃金이 東宮(東宮)에 있을 때부터 걱정과 두려움이 쌓여 마침내 形容하기 어려운 病을 이루었고, 해를 지낼수록 깊은 痼疾이 되었으며, 더운 熱氣가 위로 올라와서 때로는 昏迷(昏迷)韓 症狀도 있었다.
  20. 景宗實錄 》 15卷, 景宗 4年(1724年 靑 雍正(雍正) 2年) 8月 25日 (乙未)
  21. 景宗實錄 》 15卷, 景宗 4年(1724年 靑 雍正(雍正) 2年) 8月 21日 (辛卯)
    藥房에서 두侍湯 및 藿香正氣散을 進御할 것을 請하다
    藥房에서 入津(入診)하고 여러 議員들이 임금에게 어제 게醬[蟹醬]을 進御하고 이어서 生감[生?]을 進御한 것은 義가(醫家)에서 매우 꺼려하는 것 理라 하여, 두侍湯(豆?湯) 및 藿香正氣散(藿香正氣散)을 進御하도록 請하였다.
  22. 景宗實錄 》 15卷, 景宗 4年(1724年 靑 雍正(雍正) 2年) 8月 24日 (甲午)
    意識을 잃자 人蔘茶를 올리다
    비와 눈이 내렸다. 임금의 患候(患候)가 疲困하고 危殆함이 더욱 甚하고 脈(脈)李 낮아져서 힘이 없었다.
    (中略)

    이광좌 가 問候(問候)를 하였으나 임금이 對答하지 않자, 稅制(世弟, 英祖 )가 울면서 말하기를,

    "人蔘(人蔘)과 富者(附子)를 急히 쓰도록 하라."

    하였고, 李光佐가 삼다(參茶)를 올려 임금이 두 番 服用하였다.

    이공윤(李公胤)李 李光佐에게 이르기를,

    "三多를 많이 쓰지 말라. 내가 處方한 藥을 進御하고 다시 三多를 올리게 되면 基(氣)를 능히 움직여 돌리지 못할 것이다."

    하니, 稅制(世弟, 英祖 )가 말하기를,

    "사람이란 本是 自己의 意見을 세울 곳이 있긴 하나, 只今이 어떤 때인데 꼭 自己의 意見을 세우려고 人蔘 藥劑를 쓰지 못하도록 하는가?"

    하였다.

    조금 지나자 임금의 안시(眼視)가 多少 安定되고 콧등이 다시 따뜻하여졌다.

    洗劑가 또 말하기를,

    "내가 醫藥(醫藥)의 理致를 알지 못하나, 그래도 人蔘과 富者가 陽氣(陽氣)를 능히 回復[回陽]시키는 것만은 안다."

    하였다.

    (中略)
  23. 英祖實錄 》 84卷, 英祖 31年(1755年 靑 乾隆(乾隆) 20年) 5月 20日 (癸巳)
    신치운을 訊問하다
    신치운 (申致雲)을 新聞하였다.
    (中略)

    신치운이 말하기를,

    "聖上께서 이미 이처럼 疑心하시니, 신은 自服을 請합니다.

    신은 甲辰年(1724年)부터 게醬 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神의 易心(逆心)이며, 심정연의 흉書 亦是 신이 한 것입니다."

    하니, 賃金이 憤痛하여 눈물을 흘리고, 示威(侍衛)하는 장사(將士)들도 모두 마음이 떨리고 痛憤해서 곧바로 손으로 그의 살을 짓이기고자 하였다.

    (中略)
  24. 中宗 의 6世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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