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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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갑 (趙秉甲, 1844年 5月 15日 ~ 1912年 5月 23日 [1] )은 朝鮮 後記, 大韓帝國 , 日帝强占期 初期의 文臣이고 腐敗한 貪官汚吏이자 東學農民運動 의 原因 提供 關聯者이다. 本貫은 洋酒 (楊州)이다.

生涯 [ 編輯 ]

조규순 의 庶子, 조두순 의 서조카로 알려져 있다. 1892年 古阜 郡守 在職 中 管內 農民 들을 强制로 動員해 萬石洑 를 쌓았다. 그는 이곳의 물을 받는 논에 첫해에는 수세 를 물리기 않겠다는 約束을 어기고 收稅를 徵收하였다. 以後 趙秉甲의 暴政에 激忿한 農民들은 1894年 1月 官衙를 襲擊하고 萬石洑를 헐었다. [2] 그 뒤 自身의 母親喪 때 扶助金 2000兩을 거둬주지 않았다는 理由로 전창혁 [3] 에게 棍杖型을 加하여 때려죽였다. [4]

趙秉甲은 惡行, 惡政(惡政)으로 굶주린 住民들을 搾取하는 것으로 惡名높았다. 無辜한 이를 잡아다 온갖 罪를 뒤집어씌워 保釋金을 支拂하게하는가 하면, 大同米를 쌀 代身에 돈으로 거두고 그것으로 低質의 쌀로 交換해 中央에 上納하고 差額은 橫領, 着服했다. 이는 전봉준 等 農民들의 反撥을 招來했고 東學 農民 革命 을 招來하였다. 全羅道 古阜 地域에서 始作된 東學 農民 革命 은 周邊地域으로 霎時間에 擴大됐다. [5]

中央 政界에 든든한 背景을 갖고 있었던 그는 東學 農民 運動 으로 1年餘 동안 當時 康津郡 古今島 에서 謹愼 하는 척하다가 復權 되었다. [6] 그 뒤 東學 敎主 최시형 에게 死刑을 宣告하는 高等裁判官으로 昇進하였다. [6]

같이 보기 [ 編輯 ]

家計 [ 編輯 ]

民主黨 조기숙(노무현 政權 當時 靑瓦臺 弘報首席)의 曾祖父

  • 祖父 : 조진익(趙鎭翼)
  • 조某 : 潘南朴氏, 박종악의 딸
    • 아버지 : 조규순 (趙奎淳), 태인 郡守를 지냄
    • 어머니 : 未詳
      • 兄님 : 조병섭(趙秉燮) 敎官, 조두순(趙斗淳)에게 入養
      • 兄님 : 조병협(趙秉協, 1830~?) 大橋
      • 前妻 : 全州 李氏 이병양(李秉兩), 判書 이병문 (李秉文)의 딸
        • 長男 : 조강희 (趙岡熙, 1889~?)
          • 孫子 : 조중완(趙重完)
      • 後妻 : 靑松 沈氏, 府使 심영규(沈永奎)의 딸
        • 次男 : 조찬희(趙瓚熙, 1880~?) 眞사 歷任
        • 長女 : 김태규(金泰圭)에게 媤집 감
      • 아래의 아들들은 어느 配偶者와의 사이에서 낳은 子息인지 正確히 알 수 없음.
        • 三南 : 조창희(趙昌熙, 1876~?, 生員試 及第 [7] )
        • 사남 : 조승희(趙昇熙)
        • 오남 : 조정희(趙晶熙) [8]

關聯作品 [ 編輯 ]

各州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