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치구
(閔致久,
1795年
~
1874年
陰曆
12月 14日
)는
朝鮮
時代의 文臣이자 戚臣으로
흥선大院君
의 丈人이며,
여흥부大夫人
과 여흥부大夫人의 男동생인 閔升鎬의 아버지이고,
高宗
과 高宗의 兄인
이재면
의 外할아버지이다. 또한 高宗比 明成皇后의 親庭아버지
민치록
과는 10寸의 동항렬이 된다.
인현왕후
의 生父
민유중
(閔維重)의 後孫으로
인현왕후
의 男동생
민진영
(閔鎭永)의 4代孫이다. 官職은
輔國崇祿大夫
判敦寧府事에 이르렀으며 事後
議政府
領議政
에 贈職되었다. 本貫은 여흥. 字는 警칙(敬則)이며 諡號는 孝헌(孝獻).
生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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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淫書
로 官職에 올라 燕京에 派遣되는 使節團의 隨行員으로 다녀온 뒤 禁府都事, 沙果 等을 거쳐 旌善郡守를 지냈다.
덕흥大院君
의 後孫 理獄(李??)의 딸 全州李氏와 結婚,
여흥부大夫人
閔氏 等의 子女를 두다. 한便 사위가 되는 李昰應은 그의 妻家와 먼 親族間이 된다.
哲宗
때 延安府使(延安府使)를 지냈다.
[1]
그 뒤
1857年
(哲宗 8年)
仁川
府使
와
淸州
牧師
를 거쳐
1863年
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그해
12月
外孫子인 高宗이 卽位하자 工曹 參議가 되었다가, 1864年(高宗 1年)
5月
種2품으로 昇進하여 同知敦寧府事(同知敦寧府事), 同志
義禁府
紗를 거쳐
9月
漢城副左尹으로 나갔다가 그해
12月
말
共助
板書
(工曹判書)에 특진되었다.
1865年
1月
初
廣州府
留守
로 나갔다가 그해
7月
광주부留守로 在職 中 崇政大夫(崇政大夫)로 特別 昇進했으며,
1866年
高宗
과
명성황후
의 家禮 때는 嘉禮 情事(嘉禮正使) 李敬載(李景在)와 함께 家禮를 主管하는 家禮府使(嘉禮副使)에 任命되었다. 1866年 2月에는
翼宗
의 玉冊文 製作에 金寶 專門 書寫官으로 參與하고, 그해
3月
崇祿大夫
로 가자되었다. 다시 그해 輔國崇祿大夫로 昇進, 1868年 判義禁府事, 行 知中樞府事, 判敦寧 府使를 歷任하고
几杖
을 下賜받았다.
1869年
共助
板書
가 되었다. 아들이 없이 일찍 죽은 10寸 동생뻘 되는
민치록
에게 自身의 아들
민승호
를 養子로 入養보냈다. 이로서 閔升鎬는 高宗의 外叔에서 妻男이 되었다.
1874年
爆彈 테러로 아들
민승호
와 孫子가 死亡하자 그 衝擊으로 病을 얻어 몸져 누었고 12月 14日 病死했다. 事後 바로
增
議政府
領議政
에 追贈되었고 諡號는 孝헌(孝獻)이다.
家族 關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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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高祖父 :
민진영
(閔鎭永) -
민진후
,
민진원
의 異腹 동생
- 曾祖父 :
民握手
(閔樂洙)
- 할아버지 :
民白술
(閔百述)
- 아버지 :
民團縣
(閔端顯),
僉知
中樞府
社 歷任.
- 否認:
貞敬夫人
全州李氏
(全州李氏, ? ~
1873年
11月 17日
,
通德郞 理獄
(李??)의 딸.
慶源郡
이하전
의 姑母)
- 長女 :
여흥부大夫人 閔氏
(驪興府大夫人 閔氏,
1818年
-
1898年
,
흥선大院君
의 아내)
- 사위 :
흥선大院君 이하응
(興宣大院君 李昰應,
1820年
~
1898年
)
- 外孫子 :
高宗 이희
(高宗 李熙)
- 外孫子 :
興親王 이재면
(興親王 李載冕)
- 長男 :
민태호
(閔泰鎬)(민태호(閔台鎬)와는 同名異人)
- 次男 :
민승호
(閔升鎬,
1830年
-
1874年
,
민치록
에게 入寂)
- 三南 :
민겸호
(閔謙鎬,
1838年
-
1882年
)
- 孫子 :
민영환
(閔泳煥,
1861年
-
1905年
,
민겸호
의 長男)
- 次女 : 여흥閔氏 (
1859年
-
1942年
)
- 사위 : 大匡輔國勝록大父 右議政 兼 吏曹判書 신안주氏
주용선
, (
1853年
-
1925年
)
- 外孫子 : 신안주氏 勝록大父 行 吏曹參判
주양규
(
1904年
-
1999年
)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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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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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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