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빈 崔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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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빈 崔氏
淑嬪 崔氏
숙빈 최씨의 무덤 '소령원(昭寧園)'
숙빈 崔氏의 무덤 ' 소령원 (昭寧園)'
朝鮮 肅宗의 後宮
이름
시호 火鏡(和敬)
身上情報
出生日 1670年 12月 17日 ( 1670-12-17 ) (陽曆)
死亡日 1718年 4月 9日 ( 1718-04-09 ) (47歲) (陽曆)
死亡地 朝鮮 漢城府 창의동 社가
父親 최효원
母親 南陽 洪氏
配偶者 肅宗
子女 3男
이영수(腰絶), 英祖 , 王子(腰絶)
陵墓 소령원 (昭寧園)
京畿道 坡州市 광탄면 소령원길 41-65

숙빈 崔氏 (淑嬪 崔氏, 1670年 12月 17日 ( 陰曆 11月 6日 ) ~ 1718年 4月 9日 ( 陰曆 3月 9日 ))는 朝鮮 肅宗 의 摠管 後宮이며, 英祖 의 生母이다. 本貫은 海州 (海州)이다. 肅宗 44年(1718) 3月 9日 49歲로 別世하자, 무덤을 京畿道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모시고 廟號(墓號)를 소령원 이라 하였다.

生涯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宣略將軍 忠武衛 副司果를 지내고 後日 增 領議政으로 追贈 최효원 (崔孝元)과 南陽洪氏의 딸로서 1670年 12月 17日 (陰曆11月 6日)에 태어났다. [1] 할아버지는 增 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과 增 大匡輔國 議政府 右議政에 追贈된 최태일이고, 曾祖父는 老人職으로 通政大夫를 지내고 事後 增 資憲大夫 吏曹判書와 增 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에 追贈된 최말정이며, 高祖父는 최억지이다. 外할아버지는 通政大夫를 지내고 增 崇政大夫 議政府右贊成 兼 判義禁府事에 追贈된 홍계남이며, 外할머니는 江陵金氏이다. 外할아버지 홍계남은 英祖 의 特命으로, 선비의 外할아버지라는 理由로 特別 贈職을 받았다 한다.

1936年 장봉선 等이 編纂한 井邑郡地 에 依하면 숙빈 崔氏는 井邑縣 태인면 에서 일찍이 父母를 잃고 孤兒로 자랐다 한다. 그때 인현왕후 의 親庭아버지 민유중 靈光 郡守로 任命되어 赴任하는 길에 태인의 대각교에서 남루한 少女를 發見하게 되었다. 민유중 의 夫人 宋氏가 불쌍히 여겨 데려다 키웠고, 仁顯王后가 王妃로 揀擇되어 入宮할 때 帶同시켰다고 한다. [2] 다른 說에 依하면 숙빈의 故鄕은 全羅南道 潭陽郡 昌平 마을이라고도 한다. [2] 그러나 外할아버지 홍계남(洪繼南)李 漢城 出身이었다 한다.

「英祖實錄?에 따르면 숙빈최씨가 태어난 곳은 여경방 서학동(現在의 서울 세종로 一帶)이다. 棲鶴洞은 말 그대로 西部의 學校 서학이 있는 洞네로서 여경방에 屬한 곳이었다. 영조는 이 곳 生家에 숙빈의 아버지 최효원과 外祖父 홍계남의 子孫이 代代로 살면서 팔지 못하게 했으니 꽤나 重視했음을 알 수 있다. 勿論 숙빈최씨를 위해 別途의 祠堂 毓祥宮(毓祥宮)을 세우고 諡號(諡號)를 올리는 等 追崇 作業을 마무리 한 뒤에 뒤늦게 生家 復元을 꾀한 것은 疑心할 餘地가 있다. 毓祥宮이 景福宮의 西北쪽人 北部 醇化房에 있었으므로 가까운 距離에 生家를 두고자 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숙빈 崔氏의 本貫은 海州 崔氏라고 하나 해주 崔氏의 始祖 최온(崔溫)의 몇대 後孫인가는 不分明하다. 숙빈의 直系祖上은 할아버지 최태일, 曾祖父 최말정, 高祖父 최억지의 이름이 傳하지만, 이들은 海州 崔氏 族譜에 실리지 못했고, 최온, 崔沖 과는 어떤 關係인지 알려진 것이 없다.

숙빈 崔氏의 外家 쪽으로는 外할아버지 홍계남은 南陽 洪氏 唐紅 홍은열 의 後孫이라고 各各 外祖父 홍계남의 墓碑文에 記錄되어 있으며, 外家 쪽으로는 外曾祖父 홍인백, 外高祖父 홍수정, 外5代祖 紅典까지 이름이 傳한다. 숙빈의 外할머니 江陵金氏는 홍계남 墓碑文에 江陵金氏 대봉(大鳳)의 딸이라고 하나 江陵金氏 時調 김주원 과 어떤 關係인지 알려진 것이 없다.

入闕 [ 編輯 ]

正確한 記錄은 없으나 7歲 때 무수리 로 宮에 入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다만 崔숙빈의 出身에 對한 異說 中의 하나로, 김용숙의 《朝鮮朝 宮中風俗 硏究》에는 高宗 의 後宮 삼축당 金氏 광화當 李氏 가 高宗에게 直接 傳해 들은 이야기라고 하여 숙빈이 本來 針房 出身이라는 說이 收錄되어 있다. 이 說이 說得力이 있는 理由는, 숙빈 崔氏가 7살에 入宮했다는 記錄이 있는데 [4] 7살은 普通 宮女들이 入宮하는 平均 年齡帶이고, 그렇기 때문에 崔氏가 針房 나인으로 있었다는 說이 어느 程度 可能性이 있다. 그女의 아들 연잉군 은 숙빈이 針房內人 時節 細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었다는 말을 듣고 平生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5] . 그렇지만 針房 나인의 境遇 宮女 職牒 中에서 두番째로 높은 序列이라 아들인 英祖가 身分 컴플렉스에 시달린 것에 비해서는 너무 높은 職責이라는 意見도 있어 確實하지 않으며, 오히려 針房內人의 시중을 들었던 각심이 出身이었다는 主張도 提起되었지만 確實한 證據는 없는 狀態이다. 英祖가 어머니의 身分 컴플렉스에 平生을 시달렸고 7살에 入宮했다는 두 가지 確實한 記錄만을 놓고 봤을 때에는 針房 나인으로 入宮하였다 인현왕후 廢黜視 같이 出宮 後 西人들에 依해 무수리로 再入宮한 것이 아닐까 推測되지만 歷史學者들은 7살에 入宮했다는 숙빈 崔氏 神道碑 記錄 自體가 英祖에 依해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또한 믿을 수 없다고 하는 立場이다.

後宮 生活 [ 編輯 ]

崔氏가 처음 承恩을 입은 時期는 明確하지 않으나, 肅宗 19年( 1693年 ) 처음 內命婦 種4品 宿願(淑媛)으로 冊封되었고 그해 10月 6日 아들 영수(永壽)를 낳으나 영수 王子는 두 달만에 世上을 떠났다. 妊娠週期가 10個月 程度 되는 것을 勘案한다면 1692年 겨울 程度에 肅宗과 因緣을 맺고 1693年 1月 初에 妊娠한 것으로 본다. 인현왕후 가 復位된 해( 1694年 ) 肅宗의 特命으로 種2品 熟議(淑儀)가 되었고 [6] 그해 9月 13日 연잉군(延?君) 金(昑)을 낳았는데 後날 朝鮮의 21代 임금인 英祖 이다. 肅宗 21年( 1695年 )에 種1品 貴人(貴人)이 되었고, 肅宗 25年( 1699年 )에는 斷種 의 復位(肅宗 24年(1698年) 記念으로 政1品 빈으로 봉해지면서 숙(淑)이란 揮毫를 얻어 숙빈(淑嬪)李 되었다.

肅宗의 第1繼妃 仁賢王后 閔氏 (仁顯王后 閔氏)와는 親分이 두터웠으며, 인현왕후 의 事後 肅宗 에게 희빈 張氏 의 詛呪굿을 發告한 것으로 알려졌다. [7] 그 後 희빈 張氏가 私私되기 하루 前에 肅宗은 備忘記 를 내려 後宮이 王妃가 될 수 없다고 國法을 바꾸기에 이르었다. 肅宗이 이와 같이 國法을 내린 것은 희빈 張氏와 같은 事例를 防止하고자 했다는 肅宗의 意志였다고는 하지만 속내는 이미 西人의 領袖로 떠올라 西人의 實勢로 자리잡은 숙빈을 警戒하기 위해서였다. 희빈이 죽으면 迎賓과 숙빈이 다음 中前 候補였는데 迎賓은 名門家 蘇生에 子女가 없다는 點에서 유리한 적합한 王妃 候補였고, 숙빈의 境遇 出身이 未洽하여 缺格事由가 되었지만 아들인 연잉군을 낳았고 庶人들의 새로운 領袖로 떠오른 女人이라 庶人들의 勢力을 발板과 支持를 基盤으로 새로운 中前候補라 肅宗立場에서는 老論勢力의 支持를 받는 숙빈을 警戒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實際로 肅宗은 內命婦가 權力의 中心에 서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 肅宗은 희빈 張氏 寺社田 備忘錄을 내린 後 社事後에는 곧바로 處女間擇으로 새로운 中前候補를 찾기 始作하였는데 世子를 保護하기 위해 小論집안 出身의 女人 爲主로 찾기 始作했다. 小論집안의 女息으로 찾는 다는 것 自體가 老論의 追尊을 받는 숙빈을 警戒하고 믿지 않았다는 것을 證明하는 것이며, 다음 해 5月에는 梨峴宮 土木工事에 3個月 以上이 걸린다는 上疏를 無視하고 그대로 工事를 밀어붙여 完工에 맞춘 9月에는 中前 冊封을 完了하였고 10月에는 모든 後宮들의 品階를 높여주어 內命婦를 새롭게 改編하였는데 이와 같은 節次들은 숙빈최씨를 內命婦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肅宗의 徹底한 計算에서였다.

이런 狀況에서 숙빈의 闕 內에서의 影響力은 急激히 줄어들 것으로 보이며 自身의 位置에 對한 心理的인 壓迫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斟酌된다. 숙빈은 이時期에 前後로 出宮한 것으로 解釋될 수도 있으며 梨峴宮 出宮 後에도 肅宗은 숙빈과 單 한番의 往來도 없었고 暗行을 나갈 때에도 梨峴宮을 恒常 그냥 지나갔다. 그리고 歷代 임금들은 王室 至親이나 오래도록 內命婦의 後宮으로 있거나 寵愛가 깊은 後宮이 죽으면 하루동안 政務를 停止하며 哀悼를 했는데, 肅宗은 숙빈이 죽었을 때 當時 "祭需를 넉넉히 보내고 藝場하라"는 말만 있었을 뿐 하루동안 政務를 停止하며 哀悼하지도 않았다. 또한 숙빈의 墓자리를 알아보는 過程에서 肅宗은 두番이나 崔氏를 一般人보다 못한 取扱을 한 것도 모자라 明堂으로 墓자리를 定해서 올린 史觀을 귀양까지 보낸 程度로 매우 感情이 안좋았던 記錄이 (肅宗 44年 1718年 4月 20日1番째 記事, 肅宗44年 1718年 4月 29日 1番째記事) 實錄에 그대로 있는데, 이 記錄만 보더라도 숙빈에 對한 警戒와 感情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斟酌할 수 있다.

生涯 後半 [ 編輯 ]

숙빈은 丙申年(肅宗 42, 1716年)에 病患이 들어 史家로 나아가 治療하라는 肅宗의 名으로 3年동안 史家에 머물렀다. 그女는 오래도록 임금과 王妃의 安候를 거르게 됨에 恒常 未安한 마음을 가졌고, 조금만 差度가 있으면 곧 大闕로 갔다고 한다. [8] 戊戌年(肅宗 44, 1718年) 3月 9日 戊午日에 창의동 史家에서 49歲로 死亡하였다. 歲 內戰(왕, 王妃, 東宮)에서 中宮의 官員을 보내어 弔問하고 祭祀하되 부의가 特別히 두터웠고, 이 해 5月 更新일에 楊州의 高齡桐 甕匠리 西쪽 언덕에 예長(禮葬)으로 葬事를 지냈다. [9]

事後 [ 編輯 ]

그女의 아들 연잉군 金은 아들이 없던 警鐘의 王世弟 를 거쳐 王으로 登極하니, 바로 朝鮮의 第21代 王 英祖 (英祖)이다. 영조는 卽位 元年, 어머니 崔氏의 祠堂을 지어 숙빈墓(淑嬪廟)라 하였고, 英祖20年(1744年) 육상묘(毓祥廟)라고 올렸다가 다시 英祖 29年(1753年) 毓祥宮(毓祥宮)으로 昇格시켰다. 毓祥宮은 現在 七宮 에 合祀되어 있다. 墓所 또한 英祖 20年에 少領墓(昭寧墓)라고 올렸다가 29年에 소령원 (昭寧園)으로 다시 昇格시켰으며, 祠堂과 무덤에 窮戶와 援護를 올릴 때 함께 火鏡(和敬)의 諡號를 올렸다. 後日 여러 次例에 걸쳐 휘덕안純粹福(徽德安純綏福)의 尊號가 더 올려졌다. [10]

英祖 는 숙빈의 身分 上昇을 위해 많은 努力을 하였는데 特히 소령원에 있는 記錄과 神道碑에 記錄된 內容들은 英祖에 依해 記錄된 것이다. 여경방에서 태어났다고 記載한 記錄과 어머니의 身分 컴플렉스에 平生동안 시달린 英祖가 어머니가 7살에 入宮했다는 內容을 記載한 것도 歷史學者들도 告知고대로 믿지 않고 있다. 숙빈을 王后로 追尊하려고 試圖하였다가 老論系 禮學者들의 强勁한 反對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한 事例만 보더라도 영조는 어머니의 出生과 身分을 상승시키거나 造作하는데 많은 努力을 한 同時에 手段과 方法을 가리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숙빈은 歷代 後宮과는 달리 많은 尊號가 붙여져있는데 그 理由도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高宗 의 主張한 針房內人 泄道 高宗이 英祖의 直系後孫이라는 理由로 定說로 認定받지 못하고 있다.

英祖 29年 毓祥宮에 管制(官祭)를 지낸 後, 明나라 孝宗(孝宗)李 生母를 追尊하여 모비(某?)라 하였다가 다시 黃某(皇母)라고 稱한 禮에 따라 숙빈은 王의 私親(私親)李 아닌 선비(先?)로 정호되었다. [11] 英祖 는 살아生前 '私親은 恒常 小心(小心)하고 신중하였다.'고 자주 回顧했다. [12] 英祖 49年, 鎔鋼의 박흥조가 申聞鼓를 울려 소령원을 陵으로 봉하는 일을 請했으나 食糧을 주어 쫓아보냈다. [13]

그女의 墓는 소령원으로, 位置는 京畿 파주시 광탄면 소령원길 41-65이다.

漢城府 西北部 여경방 서학동 或은 反窮村 部落(現, 서울特別市 恩平區 )에는 그의 親庭아버지 최효원 , 外할아버지 홍계남 , 外從祖父 홍계웅 等의 墓所와 隣近에는 親祖父 최태일, 曾祖父 최말정 等의 墓所가 있다. 以後 이곳에는 최효원의 後孫들과 홍계남의 後孫들이 한동안 世居했지만, 後代의 行跡은 알려진 것이 없다.

家族 關係 [ 編輯 ]

神道碑 [ 編輯 ]

조선국 숙빈최씨信徒悲鳴竝書(朝鮮國 淑嬪崔氏神道碑銘?序)

綏祿大夫 金評位 兼 五衛都摠府摠管 新 朴弼成은 命을 받들어 짓다. 顯祿大夫 여산군 兼 五衛都摠府都摠管 新 放은 命을 받들어 쓰다. 綏德大夫 서평군 兼 오위도總報都摠管 新 要는 命을 받들어 塡刻하다.

우리 殿下께서 天命을 받아 王位에 오른 元年은 바로 前 숙빈 崔氏가 이미 돌아가신지 8年되는 해이다. 그리하여 유사가 事例를 살펴 碑石을 세우는 일을 請했다. 그 碑文은 文章을 擔當하는 臣下에게 命하지 않고 申 필성에게 命하셨다. 또 下敎하시길, “誇張된 말은 내가 取하지 않는 바이고 亦是 숙빈께서 平日에 操心하고 삼가는 뜻이 아니니 잘 생각하라.”고 하셨다. 新 필성은 命을 받들어 지루한 말이 御命을 받들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삼가 行錄을 살피노라.

숙빈 崔氏는 修養 崔 氏로서 曾祖는 말정으로 通政大夫였다. 할아버지인 태일은 벼슬하지 않은 儒生이었고, 아버지는 효원으로 忠武衛副司果를 지냈다. 어머니는 洪氏로 通政大夫 桂男의 따님이고, 顯宗 庚戌年(玄宗 11, 1670年) 11月 乙未 일에 빈을 낳으셨다. 兵塵年(肅宗 2, 1676年)에 選拔되어 宮으로 들어가니 겨우 7歲였다. 肅宗大王 19年 癸酉年(肅宗 19, 1693年)에 처음 宿願이 되었고, 甲戌年(肅宗 20, 1694年) 淑儀로 昇進되었으며 乙亥年(肅宗 21, 1695年)에 貴人으로 承繼했다가, 4年 뒤에 숙빈으로 封해졌으니, 나人으로서는 가장 높은 品階이다. 빈은 타고나신 資質이 沈着하고 진득하며 寡默하여 기쁨이나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두 內戰을 모시되,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고, 莊嚴하고 恭敬하며 삼가고 操心함으로 스스로의 몸가짐을 바로 하였다. 모든 妃嬪이나 宮人을 接할 때 恭遜하고 溫和하여 모두 그 歡心을 샀고, 임금께서도 마음속으로 애중히 여겼다. 仁賢王后와 혜순, 自耕 두 對備도 亦是 특별한 待遇를 했으나, 빈은 더욱 謙遜하고 두려워하였다. 더욱 남의 長短點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아, 옆에서 모시는 者들이 어쩌다 이런 일이 있으면 곧 꾸짖었으니 한 宮 안이 한결 같이 稱讚하였다. 빈의 兄弟 中에 軍門에 隸屬되었던 이들이 빈이 숙빈으로 봉해진 뒤로 그 職位를 辭退하였으니, 빈이 삼가 操心하는 마음에서 實로 그렇게 시켰던 것이다. 임금께서 처음에 梨峴宮을 빈의 史家로 삼았다가 辛卯 年에 內舍로 隸屬시켰는데, 빈이 임금의 뜻이 節約과 儉素와 節制에서 나온 것임을 알고, 交替하는 데 인색한 빛을 드러내지 않았다. 丙申年(肅宗 42, 1716年)에 病患이 들어 3年동안 史家에 머문 것은 임금님이 史家로 나아가 治療하라 命해서 였으나, 오래도록 임금의 安候를 거르게 됨에 따라 恒常 未安한 마음을 가지셨고, 혹 조금만 差度가 있으면 곧 大闕로 가셨으니 그 精誠과 恭敬이 이렇듯 變하지 않았다. 戊戌年(肅宗 44, 1718年) 3月 9日 戊午 일에 창의동 史家에서 돌아가시니 享年 49歲였고, 이 해는 肅宗 44年이다. 歲 內戰에서 中宮의 官員을 보내어 弔問하고 祭祀하되 부의가 特別히 두터웠으니 슬픔과 映畫가 함께 갖춘 것이 되었다. 이 해 5月 更新 일에 楊州의 高齡桐 甕匠리 西쪽 언덕에 局長으로 葬事를 지냈다.빈은 3男을 낳으셨는데, 우리 主上 殿下가 둘째이고 맏이와 셋째는 나시자마자 돌아가셨다. 우리 主上 殿下께서는 처음에는 연잉군으로 封해졌다가, 辛丑年(景宗 1, 1721年)에 王世弟로 冊封되었고 甲辰年(景宗 4, 1724)에 대筒을 이으셨다. 中宮殿下 徐氏는 領議政으로 贈職된 達成府院君 서종제의 따님이시다. 王世子 低下는 正賓 李氏의 小生이니 처음에는 敬意軍으로 封해졌다가 乙巳年(英祖 1, 1725年)에 世子로 冊封되었다. 王女 和順翁主는 어려서 出嫁하지 않았다.

臣이 엎드려 생각하건대, 빈께서는 그 性品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몸가짐은 賢淑하고 삼가셨을 뿐 아니라 鎭重하고 和睦하시며 溫順하고 化順하시었다. 肅宗의 은혜로운 待接을 받은 30年 동안 勤儉으로 지내어 스스로 謙遜하셨고, 榮譽롭고 貴해졌다 하여 조금도 간직한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宮中 안에 있으며 화락한 德 있는 뜻과 敦篤한 성실한 생각이 至極하시니 그 아름다움이 사책이나 첩지를 빛낼 수 있은 卽, 하늘의 福을 맞아 聖人이 낳으시어 熱誠들의 큰 바람을 잇고 國家 千萬年의 福을 비는 것이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神이 實相을 敍述하는 글에 있어서 事實대로 쓰고 華麗한 修飾을 하지 않음은 아마 임금님의 뜻을 體得하고 또한 본받는 것이 될 것이다. 名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特異한 資質을 모두어서, 이미 賢淑하시고 또 英特하셨다. 깊으신 德은 어려서부터 비롯하였다. 일찍이 임금님의 사랑을 입어 謙遜함과 溫順함으로 받드셨도다. 精誠이 마음에 쌓여 믿음이 內戰에 充滿하였다. 이에 큰 福을 받아 우리 임금님을 誕生하셨다. 點은 큰 福으로 들어맞았고 하늘이 우리 나라를 度왔도다. 아름답게 빛남이여 福이 길이 이었도다. 착하고 경사스러운 兆朕이여 이에 밝히고 法 받도다. 鬱蒼한 저 언덕에 豐盛한 碑石 있도다. 머리 조아려 名을 짓노니 無窮토록 龜鑑으로 삼으리.

皇命 崇情祈願後 98年 乙巳年(英祖 1, 1725年) 月 日 세움.

(原文: 我 殿下受命踐?之元年乃 先淑嬪崔氏旣卒之八年也因有司考例陳請 命樹麗牲之石其文則不以 命詞臣而以 命臣弼成旣又 敎曰誇張之辭屢所不取亦非 先嬪平日小心謹愼之意其念哉臣弼成承 命悸恐屢辭終不獲 命則謹稽行錄崔氏系出首陽曾祖諱末貞階通政祖諱泰逸學生考諱孝元行忠武術副司果?洪氏通政繼南女也以 顯廟庚戌十一月己未生 嬪丙辰選入宮甫七歲」肅宗大王十九年癸酉始拜 淑媛甲戌進 淑儀乙亥陞 貴人越四年己卯封 淑嬪女官極品也 嬪天姿沈凝簡默喜怒不形於色奉侍 兩殿夙夜靡懈莊敬戒愼戰兢自飾其接諸嬪?宮人旣遜旣和俱得其?心 上心重之奧我 仁顯王后?我 惠順慈敬大妃亦殊遇之 嬪益自謙畏尤不喜言人短長侍御者或有言輒加誨責一宮之內翕然稱美焉 嬪同氣之籍軍門者自 嬪封爵辭?其任 嬪謹愼之心實使之然也 上初以梨峴宮爲 嬪私第辛卯 命屬之內司 嬪知 聖意出公節儉克?不色吝自丙申?疾三載次淹間有因 上命出第調治而久闕承 俟常懷靡安或少出間輒?詣闕雖在疾病而其誠敬之不替如此戊戌三月九日戊午卒于彰義洞私第春秋四十九寔 肅宗四十四年也三殿遣中宮吊祭?賜特厚哀榮備至以是年五月庚申禮葬于楊州高嶺洞瓮場里枕酉之原 嬪生三男惟我 主上殿下序居第二伯季生?天我 殿下初封延?君辛丑? 王世弟甲辰誕承大統 中宮殿下徐氏 贈領議政達城府院君宗悌女也 王世子邸下靖嬪李氏所誕初封敬義君乙巳進? 儲副王女和順翁主幼未下嫁竊伏念 嬪柔嘉其性淑愼其儀敦重?穆溫恭和順承 寧考思遇垂三十戴而勤儉自持卑巽以牧閔敢以榮貴少移所守肆惟 壺?之間德意之融洽誠信之篤之於無間可」以輝暎?管儷美?牒則其?迎天篤生聖人承 列聖艱大之投綿 宗?千億之祚者其必有由然矣臣於?實之文寧質無華庶有以仰體 聖意而仍又繼之以銘曰」天鍾異姿 旣淑且靈 塞淵其德 ?自穉齡 夙被 睿眷 承以巽順 誠心內蘊 孚洽宮壹 乃膺禎? 誕我 聖躬 卜?大橫 天佑吾東 丕承丕顯 祚命靈長 善慶之徵 厥理式章 鬱彼崇岡 有碑斯豊 稽首綴銘 用詔無窮」皇明崇禎紀元後九十八年乙巳 月 日建)

숙빈 崔氏가 登場하는 作品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숙빈 崔氏 信徒悲鳴(淑嬪崔氏神道碑銘)
  2. 李永春, 《英祖의 어머니, 숙빈 崔氏》 (한국학중앙연구원 出版部, 2013) 62페이지
  3. “韓國歷代人物綜合情報시스템 :숙빈최씨” . 2015年 1月 2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5月 18日에 確認함 .  
  4. 숙빈 崔氏 信徒悲鳴(淑嬪崔氏神道碑銘)
  5. 김용숙, 《朝鮮朝 宮中風俗 硏究》
  6. 《朝鮮王朝實錄》, 肅宗 27卷, 20年(1694 甲戌 / 靑 康熙(康熙) 33年) 6月 2日(戊戌) 1番째記事
  7. 《朝鮮王朝實錄》, 肅宗 27年 神社(1701,康熙 40) 9月23日 最終記事
  8. 숙빈 崔氏 信徒悲鳴(淑嬪崔氏神道碑銘)
  9. 숙빈 崔氏 信徒悲鳴(淑嬪崔氏神道碑銘)
  10. 《朝鮮王朝實錄》
  11. 《朝鮮王朝實錄》, 英祖 80卷, 29年(1753 戒喩 / 靑 乾隆(乾隆) 18年) 10月 22日(癸卯) 1番째記事
  12. 《朝鮮王朝實錄》, 英祖 1卷, 卽位年(1724 甲辰 / 靑 雍正(雍正) 2年) 9月 21日(辛酉) 2番째記事
  13. 《朝鮮王朝實錄》, 英祖 120卷, 49年(1773 繫辭 / 靑 乾隆(乾隆) 38年) 尹3月 28日(定해) 2番째記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