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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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

홍영식 (洪英植, 1856年 2月 5日 ( 1855年 陰曆 12月 29日 ) ~ 1884年 12月 7日 ( 1884年 陰曆 10月 20日 ))은 朝鮮 末期의 文臣, 外交官, 詩人이다. 舊韓末 開化派 政治人 이며 甲申政變 의 主役 [1] 으로, 字는 中肉(仲育), 號는 金石(琴石), 本貫은 南陽 (南陽)이며, 서울 出身이다. 韓國 郵便 , 郵票 制度의 先覺者이기도 하다. [2] [3] 開化派의 重鎭으로서 新設된 郵政總局의 總販(總辦)李 되어 落成式을 機會로 甲申政變 을 일으켰다.

1872年 七夕製 科擧에 合格하고 1873年 式年文科에 及第하여 奎章閣 의 여러 官職을 歷任했으며, 1881年 紳士遊覽團 의 一員으로 日本 을 視察하고, 日本 軍事施設에 對한 報告書 <日本陸軍 冢弟(總制)>, <日本陸軍 弔電(操典)> 等을 高宗에게 올렸다. 1883年에는 高宗의 特使 민영익 의 府使로 美國에 다녀와 國內에 農機械를 最初로 導入시켰다. 兵曹 參判 을 거쳐 1884年 3月 郵政局 總販에 任命되어 郵政局 設置에 專力하다가 김옥균 , 서재필 , 박영효 , 윤치호 等과 함께 政變을 謀議, 그해 10月 甲申政變 에 加擔하였으나 3日만에 失敗당하고 처형당했다.

1894年 甲午改革 으로 總理大臣 김홍집 (金弘集)等의 上疏로 復權되었다가 김홍집 의 失脚 以後 追奪되었다. 그 뒤 1910年 (隆熙 4年) 最終的으로 復權되어 大匡輔國崇祿大夫 奎章閣 大提學 (奎章閣大提學)에 追贈 되었다. 박규수 , 오경석 , 유홍기 의 文人이다. 諡號는 忠民(忠愍)이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盤 [ 編輯 ]

出生과 젊은 時節 [ 編輯 ]

손주를 안고 있는 1884年의 홍순목

洪英植은 1856年 2月 5日 後에 領議政을 지낸 아버지 홍순목 (洪淳穆)과 어머니 全州 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當時 左副承旨였던 아버지 홍순목 은 이미 死別하고 37歲에 再婚한 夫人 全州李氏에게서 둘째 아들로 洪英植이 태어났다. 홍순목에게는 큰아들 홍만식(洪萬植)이 있었으나 洪英植의 큰아버지 홍순경(洪淳敬)李 後嗣가 없이 죽자 1849年 홍순경의 養子로 入籍되었고, 1853年 夫人을 잃어 再娶를 하여 얻은 아들이 바로 홍영식이다. [3] 어려서는 몸이 病弱하여 자주 病을 앓았고, 8歲에 生母 全州李氏가 死亡하여 繼母에게서 成長하였다.

그가 7歲의 나이에도 英特하였기에 아버지 홍순목 의 赴任地의 異屬들은 장난 삼아 '내 아들'이라고 저희들끼리 弄談을 주고받았다. 이 弄談을 들은 그는 분하게 여겨 痛哭했다고 한다. 홍순목 縣監이 '웬일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끝내 弄談이야기를 말하지 않았다 한다. 衙前들의 弄談을 말했다가는 衙前들이 위태로워질 것을 念慮했던 것이라 한다. 내 아들이라고 말한 事實이 드러나면 큰 罰을 받게 될까봐 걱정하던 衙前들은 그가 끝까지 이를 말하지 않은 것을 보고, 以後 그의 性品에 눌려 以後 弄談을 삼가 했으며, 後날까지 忠心을 다하면서 그때 恩惠를 갚았다 한다.

少年 時節 [ 編輯 ]

스승 桓齋 박규수

그의 아버지 홍순목 흥선大院君 의 側近이었고 흥선大院君 의 付託을 받아 그의 아들 이재면 , 李在善 , 이명복 (後날의 高宗 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러나 洪英植은 박규수 오경석 의 門下에 가서 글을 배운다.

1868年 (高宗 5年) 그는 洋酒 조氏와 結婚하였으나 死別하고 後에 李氏와 再婚하였다. 1869年頃부터 박규수 의 門下生으로서 指導를 받으며 서재필 , 김옥균 , 김윤식 , 박영효 , 서광범 , 유길준 , 이동인 等과 서로 잘 알고 지냈다. 박규수 의 門下에서 淸나라 人 委員의 《海國圖志 海國圖志》, 淸나라 사람 서계여의 《瀛環志略 瀛環志略》 等 中國의 開花서와 朴趾源의 《燕巖集》 等을 읽으면서 開化思想을 形成해나갔다. 또한 오경석 의 門下에도 出入하며 글을 배웠다. 1876年 朴珪壽가 죽은 뒤에는 劉大致로 알려진 유홍기 等의 가르침을 받았다.

靑少年 무렵에 신문물을 接하면서 新學問에 熱中하면서 夫人 洋酒 조氏와의 關係는 多少 멀어졌고 保守的인 父親 홍순목 과는 恒常 相反된 意見으로 對立이 잦았다 한다. 그 中間에서 兄 홍만식 의 仲裁로 平穩을 維持하였다.

官職 生活 [ 編輯 ]

1872年 (高宗9年) 陰曆 7月 七夕製(七夕製)에서 高宗이 親히 主管하는 大科에 及第하였다. 바로 展示 應試 資格이 주어져 1873年 에는 그 해의 式年文科에 及第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홍순목은 아들에게 官職을 맡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判斷하여 高宗에게 建議하여 2年間 賜暇讀書 를 許諾받았다. 以後 1878年 4月 11日 ( 陰曆 3月 9日 ) 敎理, 1878年 12月 22日 ( 陰曆 11月 29日 ) 文學, 1880年 9月 13日 ( 陰曆 8月 9日 ) 喪禮, 1880年 陰曆 12月 參議로 昇進했다. [3] 以後 奎章閣 亭子·대교 等을 거쳐 奎章閣 直角 等을 歷任하고 承政院 , 承旨로 昇進하였다.

1880年 김홍집 이 修信使로 日本에 派遣되자, 그 隨行員이 되어 約 4個月間 日本 文物을 視察하고 歸國했다.

改革 開化 政策 [ 編輯 ]

見聞과 開花 活動 [ 編輯 ]

1883年 9月 美國 에 派遣된 朝鮮 의 報聘使節團원, 앞줄 왼쪽 두 番째, 세 番째와 네 番째는 홍영식, 민영익 , 서광범 . 뒷줄 왼쪽 세 番째가 유길준

.

그는 민영익 (閔泳翊)과도 가깝게 지냈다. 1881年 (高宗 18年)에 日本 紳士遊覽團 (紳士遊覽團)李 派遣되자 홍영식度 調査(朝士)로 選拔되어 紳士遊覽團의 一行으로 김옥균 , 박정양 , 어윤중 , 조준영(趙準永) 等과 함께 배便으로 日本 을 訪問, 視察하였다. 이때 박정양 의 隨行員으로 온 이상재 와도 交友하였다. 洪英植은 日本 의 軍事 施設을 視察하며 日本의 陸軍에 對한 報告書인 《日本陸軍冢弟 日本陸軍總制》, 《日本陸軍弔電 日本陸軍操典》 等을 作成했다.

1883年 9月 美國 에 派遣된 朝鮮 의 報聘使節團원(앞줄 오른쪽 첫 番째가 홍영식, 앞줄 왼쪽 두 番째는 민영익 , 뒷줄 가운데는 서광범 )

한便 日本 에서 1870年 代부터 施行되던 郵便 制度를 詳細히 檢討했을 뿐 아니라, 當時 日本人들이 釜山에서 멋대로 郵便制度를 實施하고 있는 것을 抗議하는 한便, 郵便制度에 對한 것을 自問하여 朝鮮이 郵便制度를 施行하도록 積極 도와줄 것과, 朝鮮에서 郵便制度가 施行되면 朝鮮의 制度에 따르겠다는 約束을 日本으로부터 받아냈다고 한다. 以後 1882年 에는 김옥균·朴泳孝·徐光範과 함께 國家의 改革 方案을 討論하였으며, 여러 官職을 歷任하였다.

歸國 後 統理機務衙門(統理機務衙門)의 軍務司부경리社(軍務司副經理事) 兼 總理局長으로 민영익 과 함께 軍務司 總理國(總理局)을 管掌했다. 1882年 弘文館 副提學 , 奎章閣 直提學, 奎章閣 副提學 에 任命되었으며, 그해 6月 壬午軍亂 이 發生했을 때는 副護軍으로 示威隊를 說得, 軍亂의 收拾을 맡아서 自進解散시켰다. 그해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李 新設되자 洪英植은 參議統理內務衙門事務(參議統理內務衙門事務), 參議軍國事務(參議軍國事務), 參議交涉通商事務(參議交涉通商事務) 等을 거쳐 李朝 參議 가 되었다가, 種2품으로 昇進하여 協辦交涉通商事務(協辦交涉通商事務)를 지냈다.

美國 使節團 派遣 [ 編輯 ]

조日修好條約 宴會記念도, 건너便 가운데가 김옥균 , 왼쪽 끝의 無關福을 입은 이는 홍영식
(安中植 作, 1883年)

1883年 (高宗 20年) 6月 , 그 前해에 締結된 朝美修好通商條約 에 따라 美國 의 使節이 漢城府 를 訪問하고 돌아간 뒤, 그해 6月 美國 의 使節에 對한 答辯으로 朝鮮 政府에서 美國 報聘社 (報聘使)가 派遣될 때 그는 報聘府使 兼 全權部代身에 任命되어 報聘社 兼 全權大臣 민영익 의 府使(副使) 資格으로 민영익 , 서재필 等과 함께 美國에 派遣되었다. 6月 5日 報聘社(報聘使) 全權代身 閔泳翊을 隨行, 全權副大臣으로 出國하였다.

報聘社는 從事官으로 徐光範이, 隨行員으로 유길준, 고영철, 變數, 현흥택, 최경석 等이 任命되고, 그밖의 侍從武官들과 隨行員들 淸나라 사람 誤禮堂이 함께 出發하였다. 홍영식, 민영익 과 一行은 釜山 에서 배를 타고 日本 을 經由 도쿄 를 經由할 때에 日本人 오카모토(宮岡恒次郞)를 通譯官으로 參與 시키고, 案內兼 祕書로 美國人 퍼시벌 로웰 (Percival Lowell, 韓國名 盧月(魯越))을 雇用하였다. 太平洋을 건너 9月 2日 샌프란시스코 에 上陸하였다. 一行은 汽車를 타고 시카고 를 거쳐 9月 15日 워싱턴 D.C 에 到着하였다.

美國 訪問과 農機械 導入 [ 編輯 ]

當時 美國 大統領 체스터 아더(Chestter A Arthur)는 뉴욕 에 滯留하고 있어 민영익, 洪英植과 一行은 뉴욕 애비뉴 호텔로 가서 아더 美國 大統領의 接見을 받고 國書를 奉呈하게 된다. 이때 이들 使臣은 大統領이 있던 房 門 앞에 돗자리를 깔고 큰 절을 올려서 체스터 아더 大統領을 비롯한 美國 官吏들을 唐慌하게 하였다. 이는 곧 美國 과 外信 記者들에 依해 大書特筆되어 揷畵로 실리게 되었다.

美 國務省은 이들 視察團에게 護衛 將校를 配置했는데, 홍영식에게는 國防省 海軍情報局의 테오도어 메이슨(Theoodore A. Mason) 美 陸軍 大尉, 海軍圖書館의 조지 폴크(Georg C. Foulk) 中尉를 配置하여 修行과 紹介를 擔當하게 했다. 洪英植은 美國 國防省을 視察, 好술(護術)과 武術, 武器 等을 案內를 맡게 하였으며, 一行과 함께 都市와 公共機關을 視察하고 10月 12日 다시 체스터 아더 美國 大統領을 만나 歡談한 後 作別하고 歸國했다.

洪英植은 고영철, 최경석, 外國人 로웰, 오에當(吳禮堂), 오카모토 等을 거느리고 10月 16日 워싱턴 을 出發하여 11月 샌프란시스코 에서 배便으로 日本 도쿄 를 거쳐 1883年 11月 20日 歸國하고, 11月 21日 高宗에게 報告書를 提出하였다. 美國 에서 列車와 버스를 보고 衝擊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美國 워싱턴 D.C 를 視察하면서 機關車와 버스를 目擊했고, 農作物을 收穫 자르는 機械를 보고 그해 11月 에 歸國하여 美國 에서 신품종의 農作物과 農機械를 導入할 것을 朝廷에 상주하였다. 그리고 로웰의 勞苦를 高宗에게 報告했으며 高宗은 그를 國賓으로 招待하라고 指示를 내렸다. 王室의 招待에 힘입어 로웰은 12月 20日 다시 朝鮮을 訪問하였다. 以後 開化에 깊은 關心을 가지고 있던 그는 開港 運動을 積極 主導한다.

郵便의 先驅者 [ 編輯 ]

1881年 紳士遊覽團 日本 에 派遣할 때 홍영식度 이에 參加하게 되었는데, 當時 視察 對象은 病制였으나, 洪英植은 郵便 에도 특별한 關心을 보였다고 한다. 그것은 “日本 郵便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마에지마의 自敍傳인 《郵便創業淡》에 洪英植이 驛遞國에 찾아와서 郵便에 關한 일들을 質問하여 모든 書類를 贈與하고 職員으로 하여금 郵便實務를 說明시키고 自身도 洪氏를 만나 郵便 制度를 說明하고 朝鮮에도 빨리 郵便을 開設할 것을 勸告하였다고 한다. [3]

1883年 1月 12日 ( 1882年 陰曆 12月 4日 ) 創始된 交涉통상아문에 近代式 遞信機關人 우정사(郵程司)가 設置되자 洪英植은 우정사 擔當 協辦이 되었다. [3] 1883年 陰曆 9月 報聘社의 府使로 美國에 갔을 때는 뉴욕의 郵遞局과 電信局을 視察하였으며, 歸國 後 高宗에게 郵便 業務의 開設을 建議하였다. [3] [2] 同時에 美國 滯留 中 홍영식에게는 特別히 高宗 의 特使 資格이 任命되었다. 1884年 초에는 咸鏡北道 病魔水軍節度使 兼 按撫使로 任命되어 赴任했다가 며칠만에 協辦軍國事務로 轉任되어 다시 되돌아왔으며, 兵曹 參判 에 任命되었다. 1884年 4月 22日 ( 陰曆 3月 27日 ) 郵政總局을 創設하게 되었고, 郵政局總辦(郵政局總辦)에 任命되었으며, 11月 18日 ( 陰曆 10月 1日 ) 서울·仁川 間에 近代式 郵便制度의 實施를 보았다. [3]

當時 郵政總局 이 새로 設置된 建物은 宣祖 兆에 典醫監(典醫鑑)으로 지은 建物로 高宗이 하사한 것이다. 이어 그는 分局을 濟物浦 에 最初로 設置하고 急한대로 外國人과 交通이 잦은 仁川 , 釜山 等에 臨時로 郵政局 分局을 設置했다. 또한 박정양 이 推薦한 이상재 를 濟物浦 友情局長으로 임명하였다. 바로 郵票의 도완을 그려 문위郵票(文位郵票) 5種을 日本 印刷所에서 印刷, 注文하였다. 그 가운데 5門, 10門 等 2種이 1884年 10月 國內에 들어 왔다. 그러나 25門, 50門, 100文은 미처 國內에 搬入되지 못하였다. 郵便 業務 取扱壯丁의 制定, 人力과 裝備 等 準備를 거쳐 11月 18日 ( 陰曆 10月 1日 ) 最初로 漢城과 濟物浦分局, 仁川分局 間에 郵便物 交換을 開始하였다.

前身 導入 契約 [ 編輯 ]

1882年 陰曆 12月 부터는 덴마크 美國 의 前身會社들과 交涉하여 덴마크 對北部 前身會社와 契約을 締結하였다. 1883年 (高宗 20年) 1月 24日 덴마크 對北部 前身會社에 約定을 許可하고 契約, 朝鮮 에 電信 通信線 設置 工事를 始作한다.

또한, 日本 규슈 의 西北쪽 海岸에서 쓰시마섬 을 連結하여 朝鮮 의 釜山海岸에 이르기는 戰線을 設置하고, 다시 釜山 에서 國內로 電線을 連結하여 全身을 設置하는 工事를 締結하기 위해 다시 日本 과 朝鮮과 日本間의 朝官 條約(條款條約)을 1月 24日 日本 과 締結, 署名하였다.

生涯 後半 [ 編輯 ]

甲申政變 [ 編輯 ]

1884年 咸鏡北道 兵馬 水軍節度使 兼 按撫使에 任命되었다가 곧 內職으로 돌아와 協辦軍國事務로 轉任되었으며 兵曹 參判 이 되었다. 그해 3月 郵政總局 (郵政總局)이 設置되자 郵政局 總販(總辦)李 되어 郵政事業을 擔當했다. 그는 김옥균 等과 擧事를 計劃하였다. 그러나 巨事가 綻露나자 期日을 앞당겨 郵政局 落成式으로 定하게 된다.

그는 1884年 陰曆 3月 27日 郵政局 總販에 任命되어 郵政局의 設立에 專力하였다. 開化政策이 민씨政權에 依해 壁에 부딪히고 명성황후 等은 一部 急進派를 除去하려 했다. 이에 그는 김옥균 , 박영효 等과 함께 一擧에 戚臣들을 除去하고 政權을 掌握할 것을 謀議하였다. 그리고 그는 同調者들을 糾合하기 위해 王室 人士들을 包攝하는 方案을 내세웠다. 1884年 7月 日本 에 派遣되었던 士官生徒 14名이 歸國하자 박영효 , 김옥균 等과 政變을 謀議하였다. 그러나 擧事 計劃이 새어 나가자 다시 郵政局 落成式으로 擧事 일을 바꾸었다. 그해 8月 新式 軍事 訓鍊을 警戒한 守舊派의 反撥로 調鍊局이 縮小, 有名無實化되고 一部 史觀들이 解任되면서 그는 이들을 郵政局 으로 받아들일 것을 上奏하여 郵政局에서 臨時로 머물게 한다.

1884年 10月 17日 郵政局 個國鳶을 契機로 甲申政變 을 일으켰다. 王과 王妃는 景祐宮 으로 避身하고, 守舊派 大臣들은 王命으로 入闕하라는 命이 떨어진 뒤 殺害되었다. 高宗과 閔妃 內外를 扈從하던 그는 政變이 成功하자 親衛英 左右領事(左右營使) 兼 右捕將(右捕將)에 任命되었다가, 곧 右議政을 거쳐서 甲申 內閣의 議政府 左議政 이 되었다. 그러나 淸나라 軍隊의 介入으로 政變이 3日 만에 鎭壓되고 만다.

甲申政變의 失敗와 最後 [ 編輯 ]

家族 寫眞
(뒷줄 左路부터 홍만식 , 아버지 홍순목 , 홍영식, 동생 홍정식 順)

1884年 12月 4日 開化派 主導로 甲申政變 이 斷行되었고, 12月 5日 에는 새 內閣의 右議政 을 거쳐서 左議政 이 되었으나 淸나라의 駐屯으로 失敗하였다. 淸나라軍이 都城을 占領하자 洪英植과 박영교가 임금 內外를 시종하고, 나머지 政變 擧事者들은 避身케 했다. 박영교(朴泳敎)와 함께 끝까지 임금을 護衛하다가 甲申政變이 失敗로 돌아가면서 洪英植은 靑軍에게 殺害되었다. [3] 그는 大逆罪人(大逆罪人)으로 死刑되었는 說도 있다. [4]

또한 1884年 12月 17日 父親 홍순목과 兄 洪萬植은 모든 官職에서 삭탈되었다. 그날 父親 홍순목의 命令에 따라 一家 20餘 名은 毒藥을 받고 集團 自殺하고, 홍만식 은 스스로 自首해서 살아남았으나, 1年이나 服役했다. [3] 아버지 홍순목 은 이것이 어떻게 살아갈 것이나며 自己 孫子(洪英植의 아들)을 毒殺한 다음 王宮을 向해 3倍를 올린 뒤 自決하고, 繼母 亦是 自決하였다. 夫人 李氏와 妾 韓氏도 自決하였다. 그의 동생 홍정식(洪正植)은 이름을 홍정표(洪正杓)로 바꾸고 겨우 살아남았다. [5]

事後 [ 編輯 ]

그의 屍身은 박영교 等의 屍身과 함께 大逆罪로 孥戮型을 받아 四肢가 分割되어 各道에 梟示되었다. 東大門 밖에 버려진 屍身은 後에 누군가가 收拾하여 角度로 보내진 分割된 다른 屍身들과 함께 祕密裏에 暗葬하였다. 後에 刑 홍만식 에 依해 京畿道 平澤郡 신장 에 弛張되었으며, 後에 다시 京畿道 廣州郡 초월면 쌍룡리의 野山에 安葬하였다. 5歲 된 아들은 죽었으므로, 後에 그의 親族 洪萬植의 아들 홍성겸을 養子로 삼았다.

沒收된 漢城府 의 그의 집은 西洋式 醫療機關이었던 濟衆院 敷地와 建物로 使用되었다. [6] 그 뒤 京畿道 廣州郡 초월면 쌍룡리의 墓所는 1903年 (光武 6年) 兩者 홍성겸에 依해 京畿道 驪州郡 흥천면 문장리 山82番地로 移葬되었다. 그의 墓所《 홍영식 先生 墓 》는 大韓民國 에 와서 驪州郡의 鄕土遺跡 第7號로 指定되었다. 碑石은 1977年 2月 13日 遞信公務員訓鍊所 所長 정규석이 세우고 碑文을 썼다.

12月 20日 다시 朝鮮을 訪問한 로웰은 朝鮮에서 約 3個月間 滯留하면서 朝鮮의 政治, 經濟, 文化, 社會 等을 百科事典 形式으로 仔細히 記錄했다. 2年 뒤 1885年, 그는 이 記錄을 整理하여 '고요한 아침의 나라 朝鮮'(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라는 題目의 冊을 내놓았는데, 序文에 홍영식에 對한 追慕글이 있다.

1894年 甲午改革 때 總理大臣 김홍집 (金弘集), 유길준 等의 거듭된 喪主로 身元, 復權되었으나 金弘集 內閣 의 失脚으로 追奪되었다가, 純宗 大匡輔國崇祿大夫 奎章閣 大提學 追贈 되고, 忠民(忠愍)의 諡號가 내려졌다.

著書 [ 編輯 ]

  • 編著, 《日本陸軍 弔電 (日本陸軍操典)》
  • 編著, 《日本陸軍 冢弟 (日本陸軍總制)》

家族 關係 [ 編輯 ]

兩者 홍성겸에게서 홍현기, 홍응기 等의 孫子가 태어났지만 모두 6·25 때 失踪되고, 홍응기의 아들 홍석호와 딸 홍해진이 外할아버지 심호섭에 依해 養育되었다 한다. 養孫子 홍응기가 京城府 中央高等普通學校(現 중앙중·高校)에 다닐 때는 特別히 박영효 가 뒷바라지를 했다 한다. 6·25 戰爭 以後 量孫子며느리 심재봉은 親庭아버지인 忠南 唐津郡 合德面 운산리 심호섭의 집에 내려가 홍석호와 홍해진 等은 外祖父에 依해 養育되었다 한다.

  • 할아버지 : 홍종원(洪鍾遠)
    • 큰아버지 : 홍순경(洪淳敬)
    • 아버지 : 홍순목 (洪淳穆, 1816年 ~ 1884年 , 諡號는 文益)
    • 어머니 : 全州李氏
    • 繼母 : 이름 未詳
      • 兄님 : 홍만식 (洪萬植, ? - 1905年 11月 27日 (陰曆 11月 1日) , 諡號는 衷情), 큰아버지 홍순경의 養子로 감
      • 동생 : 홍정식(洪正植) - 다른 이름 홍정표(洪正杓)
      • 否認 : 洋酒 조氏(? - 1875年 )
      • 後妾 : 韓氏(? - 1884年 ), 飮毒 自殺
      • 否認 : 李氏(? - 1884年 ), 飮毒 自殺
        • 아들 : 이름 未詳, 1879年 ~ 1884年 독살당함
        • 兩者 : 홍성겸(洪性謙)
        • 養孫子 : 홍현기(洪賢基)
        • 養孫子 : 홍응기(洪應基)

評價와 批判 [ 編輯 ]

그는 手腕이 있었고 海外 事情에 밝았다 한다. 그는 門閥도 좋았고, 性品도 모나지 않고 學識이 該博하고 溫厚, 淳朴하여 누구에게나 尊敬을 받았다고 한다. 한便 梅泉 黃玹은 《매천야록》에서 洪英植을 건방지다고 酷評하였다. [3] 그는 書藝와 詩에 能하였으며 서재필 윤치호 는 그가 詩를 지을 때 앞 時調의 끝部分 뒷 時調의 끝部分을 絶妙하게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고 하였다. 박영효 는 그가 김옥균 과 함께 政變 計劃을 構想한 '某의 總覽의 第 一人者'라고 評하기도 했다.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各州 [ 編輯 ]

  1. '프라하의 戀人'과 김옥균, 北村을 걷다 - 오마이뉴스.
  2. [友情이야기]愚草(郵票)를 아십니까 - 뉴스메이커 776號( 2008年 5月 27日 者)
  3. 近代 郵便은 언제 始作됐나 : '郵便, 郵票, 郵遞局 이야기' - 노컷뉴스, 2006年 4月 21日 者(김선경 記者).
  4.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 〈開化政策과 그 反響〉 , 홍영식.
  5. 신정일, 《똑바로 살아라》 (다산초당, 2011) 327페이지
  6. 김상태 / 서울대病院 病院歷史文化센터 敎授 濟衆院 네이버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