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베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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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 러시아語 : Карл Ива?нович Ве?бер , 獨逸語 : Carl Friedrich Theodor von Waeber 카를 프리드리히 테오도어 폰 베버 [ * ] , 文化語 : 칼 웨베르, 1841年 6月 17日 ~ 1910年 1月 8日 )는 러시아 帝國 의 外交官으로 1885年부터 1897年까지 週(駐)朝鮮 러시아 公社로 勤務하였고, 高宗 의 個人的인 親舊이기도 했다.

'位牌'(韋貝)라는 韓國語 이름이 있으며, 웨베르라고 불리기도 한다. [1]

外交官 生活 [ 編輯 ]

獨逸 작센州 라데보일 에 있는 베베르와 그의 夫人과 아들의 墓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大學校 를 卒業하고 바로 러시아 外務省에 들어갔다. 첫 赴任地는 베이징 이었고, 1882年 에는 톈진 러시아 帝國 公使로 赴任하였다. 그는 1884年 兆로 修好 通商 條約 을 締結을 할 때 署名을 했으며, 그 이듬해 韓國의 첫 러시아 工事로 任命을 받아 漢城 에 赴任하였다.

그는 乙未事變 의 主體를 흥선大院君 이라며 眞實을 隱蔽하고자 했던 日本에 抗議하였으며, 高宗에게 러시아 公使館을 避身處로 提供해 俄館播遷 을 성공시켰다. 곧 이어 이완용 을 筆頭老漢 親러 內閣을 組織하는데 큰 影響을 끼쳤다.

1895年 7月 러시아는 日本을 의식하여 베베르를 멕시코 駐在 公使로 轉補키로 하고 後任에는 時페이예르로 交替하기로 決定하였는데, 高宗은 이 消息을 듣고 베베르를 留任시켜 달라고 便紙를 써 剛한 信賴를 나타내었다. 後任인 時페이예르가 赴任하기 위하여 漢城에 到着했으나 駐日 러시아 公使가 空席이 되어 러시아 外務省은 突然 時페이예르를 도쿄 主宰로 派遣하였고, 베베르는 漢城에 남게 되었다. 그는 2年間 더 서울에 머무르다가 상트페테르부르크 로 돌아갔고, 1910年에 숨을 거두었다.

各州 [ 編輯 ]

  1. 文化日報 (1997年 2月 9日). “[政治] 韓末 웨베르 工事에 對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 《文化日報》. 2012年 9月 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