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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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미
2015年, 釜山國際映畫祭 開幕式에서의 조수미
基本 情報
本名 조수경
出生 1962年 11月 22日 ( 1962-11-22 ) (61歲)
大韓民國 慶尙南道 창원군視 동면 본포리 [1]
性別 女性
國籍 大韓民國
職業 聲樂家 , 歌手
장르 클래식 , 오페라
活動 時期 1986年~
學歷
家族 儒巾 (조카)
宗敎 天主敎 ( 洗禮名 : 消化데레사)
所屬社 SMI엔터테인먼트
웹사이트 조수미 - 公式 웹사이트
조수미 - 인스타그램
조수미 - 트위터
조수미 - 페이스북

조수미 (曺秀美, [2] 1962年 11月 22日 ~)는 大韓民國 리릭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聲樂家 이다.

初等學校 때 聲樂 을 始作하여 선화예술중학교 · 선화예술高等學校 를 거쳐 서울大學校 聲樂科 學科 開設 史上 最高 實技 點數로 首席 入學했다. [3] 1983年 이탈리아 로 留學을 떠나 로마 산타 체칠리아 音樂院 에 入學해 5年制 學校를 2年만에 超高速으로 卒業했다. 1985年 나폴리 콩쿠르에서 優勝을 차지하였으며, 1986年 트리에스테 의 베르디 劇場에서 《 리골레토 》의 '질다' 逆으로 첫 主演 데뷔했다. 1988年 베르디 오페라 《假面舞蹈會》에서 오스카 逆으로 플라시도 도밍고 等과 함께 錄音에 함께 參與하여 世界的인 名聲을 쌓을 수 있는 轉機를 마련하였으며 이 오디션에서 名 指揮者 카라얀 은 조수미에 對해 "神이 내린 목소리"라며 極讚했다. [4] 또한 主賓 메타 로부터 "100年에 한두 사람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의 主人公이다"라는 極讚을 받았다. 世界 5代 오페라 劇場 을 涉獵하면서 게오르그 솔티 , 主賓 메타 , 알프레드 크라우스 , 로린 마젤 等의 名 指揮者와 함께 魔術피리 等 여러 오페라에 出演했다. 1993年 게오르그 솔티 와 錄音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의 《 그림자 없는 女人 》은 그래미賞 클래식 오페라 部門 最高 音盤에 選定됐다.

1993年 이탈리아 最高 소프라노에게만 준다는 黃金기러기賞 을 受賞했고, 2008年에는 이탈리아人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國際 푸치니上 을 受賞했다. 2011年 基準으로 25年次 聲樂家로 1年에 300日 以上 世界 各地에 公演을 다니고 있다.

2019年5月6日에는 이탈리아 政府로부터 記事級 親善 勳章인 '오르디네 델라 스텔라 디 이탈리아'를 받으며 世界的인 聲樂家로서 韓國과 이탈리아 間 藝術的 交流에 이바지 한 공을 크게 認定받았다.

2021年 國際舞臺 데뷔 35周年을 맞은 조수미는 韓國人으로는 最初로 '아시아 名譽의 殿堂'에 選定되었다. [5]

生涯 [ 編輯 ]

어린 時節 [ 編輯 ]

慶尙南道 창원군 동면 에서 태어나 [1] 서울特別市 에서 자란 조수미는 어렸을적 글을 배우기 前에 피아노부터 쳤을 程度로 音樂 神童이었다. 그女의 父母는 조수미에게 4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켰다. 父母는 조수미가 똑똑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할머니는 조수미를 보며 "저렇게 아이가 靈惡하면 短命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父母는 "어떻게 하면 오래 살 수 있는지" 물었더니 "뭐든지 두드리라. 두드리면 나쁜 기운이 빠져나갈 것이다"라는 答辯이 돌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피아노를 두드리면 되겠다고 생각한 父母는 貰房살이를 하면서도 어렵게 돈을 마련하여 高價였던 피아노를 購入했다. 4살부터 어머니와 함께 피아노를 치기 始作한 조수미는 理由도 모르고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쉬지도 않고 하루에 8時間씩 피아노 練習을 했다. [6] 긴 練習이 지겨웠던 조수미는 어머니가 밖에 나가는 소리를 듣고 門을 열려고 하면 밖에서 門이 잠겨있을 程度였다. 놀고싶었지만 놀지 못해 不滿이 쌓인 8살의 조수미는 두 名의 男동생에게 "집을 나가겠다"고 말하고 家出했다가 돈도 없고 갈데도 없어 6時間만에 돌아왔다. [7] 어머니는 조수미에게 "너는 나처럼 한 사람의 아내로 사는 것보단 萬人에게 사랑받는 聲樂家가 되어라"고 가르쳤다. 어머니의 어렸을적 꿈이 聲樂家였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조수미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24時間 마리아 칼라스 音樂을 틀어놓았을 程度였다 [8]

學窓 時節 [ 編輯 ]

조수미는 錦城國民學校 에 入學해 初等學校 4學年 때 KBS 에서 主催한 全國 어린이 노래자랑에 나가게 된다. 週(週)大會에서 優勝을 하고 乘勝長驅 年末決選까지 進出했으나 6學年 女學生에게 밀려 準優勝에 그쳤으나, 거기서 人生을 변화시킨 한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선화예중의 敎師였던 유병무 였다. 中學校 進學을 앞두고 조수미와 어머니는 專攻을 聲樂이냐 피아노냐를 두고 苦悶 끝에 피아노로 決定했다. 聲樂은 變聲期를 거쳐야 하고 變成器 後에도 목소리가 아름다울지 自信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或 도움이 될까싶어 찾아뵌 유병무가 조수미의 목소리는 宏壯히 獨特하고 萬 名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목소리라고 聲樂을 積極的으로 勸하여, 聲樂으로 決定하였다. 聲樂을 强力하게 勸誘하고, 以後 變聲期에도 목소리를 잘 管理해준 先生님의 指導 德으로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다고 조수미는 回顧하고 있다. [9]

조수미는 · 高等學校 때까지는 비지스 를 즐겨 듣는 等 이나 알앤비 를 좋아했다. [10] 그러던중 女高時節 當時 韓國의 가장 有名한 소프라노이자 敎授인 서울大 이경숙 先生님께 레슨을 받게 되었고, 첫 만남에서 조수미의 노래를 들은 이경숙 先生님은 조수미를 끌어안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틀림없이 世界的인 聲樂家가 될거야" 1週日에 한 番씩 레슨을 받으며 조수미는 自身의 音을 發見하고 歌詞의 理解와 傳達의 重要性을 배웠다고 한다. [9] 以後 서울大學校 音大 入學試驗에서 歷史上 最高의 點數를 받고 入學했다. [11]

그러나 곧 나이트클럽 等을 다니면서 男子親舊와 보내는 時間이 많아져 成績이 急激히 떨어졌다. [12] 高等學校 때까지는 熱心히 工夫했으나 大學에 들어가자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 다른 길로 빠졌다. 當時 조수미에겐 사랑이 重要한 問題였다. K軍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大學時節에 처음 만났는데 처음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조수미는 먼저 다가가 사귀어 보고 싶다고 하자 女子親舊가 있다는 答辯이 들어왔고 조수미는 이에 屈하지 않고 求愛를 해 사귀는 데 成功했다. 조수미는 學業을 全部 제쳐두고 男子親舊를 만나는 데 온 時間을 쏟았고 어머니는 이런 조수미를 크게 걱정했다. 結局 學校에서 落第點數를 받고 쫓겨났다. 父母는 조수미를 불러놓고 "여기서 끝내기엔 아깝지 않느냐"며 앞으로 뭘 하고 싶냐고 묻자 조수미는 "K君과 結婚하고 싶다"고 對答했다. [7] 이에 衝擊받은 父母는 一方的으로 조수미의 留學을 決定해 버렸다.

떠밀려서 갔으나 留學간 以後로 男子親舊에게 連絡이 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連結된 電話에서 K君은 "이제 連絡하지 말라"며 離別을 通報했다. 유럽에 있을 理由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조수미는 바로 歸國하려고 했으나, 어머니가 "노래는 어떻게 할거냐"며 極口 말렸다. 조수미는 독하게 마음먹고 앞으로 戀愛를 絶對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5年동안 韓國에 들어오지 않고 工夫에 專念했다. [6] 조수미는 家族들과 헤어져 이런 곳에서 工夫해야 하는지 深刻하게 생각해보는 契機가 되었다고 했다. 아직도 K軍을 잊지 않고 있으며 그 時間을 所重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以後로 K軍을 만난 적은 없으나, 自身의 公演때 와서 보다가 간 것은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留學 生活 [ 編輯 ]

留學 生活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留學을 決定하고 飛行機票를 사야되는데 돈이 없어서 飛行機票를 사지 못해 留學이 取消될 危機였으나 遊學 3日 前 갑자기 돈이 들어올 일이 생기면서 가까스로 飛行機票를 救해 어머니가 준 단돈 300달러를 들고 留學길에 올랐다. 留學을 가서도 밥을 먹지 못해 招待받은 곳에서 飮食을 먹다가 싸갖고 가서 다음날 아침을 解決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날 貧血이 와서 길바닥에 쓰러져 病院에 갔는데 醫師가 "貧血 症勢가 深刻하다"며 노래보다 健康을 챙기는게 重要하다는 助言을 듣기도 했다. [6]

조수미가 산타 체칠리아 國立音樂院 入學 實技 試驗을 보러갔었을 當時, 演奏者가 오지 않았다. 敎授가 伴奏를 할 수 있는 學生을 찾았고 조수미가 손을 들었다. 敎授들은 조수미가 잘 칠 수 있을지 疑心하였으나 全部 韓國에서 배웠던 曲임을 確認한 조수미는 어렵지 않게 60名 學生의 曲을 全部 연주했다. 마지막에 自身의 次例에 노래를 伴奏에 맞추어 부르자 敎授들은 實力에 感歎하였고, 歷代 最高點數를 받으며 首席 入學하였다. [13]

留學時節에 조수미가 가장 苦生한 것은 집問題였다. 마당넓은 집에서 혼자 사는게 所願이었다. 노래소리를 理解해주는 집主人도 關鍵이겠거니와, 이웃들이 聲樂 留學生의 繼續되는 노래練習에 不滿을 提起하여 정작 어렵게 집을 求하고도 또 피아노까지 끌고 1年에 몇 次例는 移徙를 다니는 일이 反復되었다고 한다. 소리를 질러 목소리를 키워야 할 聲樂家가 소리를 죽여가며 노래를 부르고, 移徙한지 몇 달도 안 돼 짐을 꾸리며 노래할 空間 하나 없는 身世가 서러워 울기도 했다. 집問題 다음으로 苦生한게 交通이었는데, 學校까지 버스로 1時間쯤은 걸리는데, 이탈리아의 들쭉날쭉한 버스時間과 時도 때도 없이 막히는 交通에 한 番 나갔다오면 파김치가 되어 30分은 드러누워 있어야 精神이 들곤 했다. 中古車 한 臺 갖고 싶은 맘이 굴뚝이었지만 차마 집에 車 사달라는 얘기를 하지 못하다가, 스페인에서 열린 비냐스 國際 콩쿠르에서 優勝하고 그 賞金으로 가장 먼저 車부터 購入하였다. [9]

留學生活을 할때까지 조수미는 平生 聲樂家로 살아갈 確信은 없었다. 하지만 自身이 才能이 있다는 건 알고있었다. 다른 學生들은 3時間씩 練習해서 發表를 했지만 조수미는 레슨 直前에 5分만 봐도 樂譜가 외워질 程度였고 그렇게 해도 敎授들의 稱讚은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 平素대로 5分間 樂譜를 보고 레슨을 들어갔는데 敎授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樂譜를 찢더니 "내가 끝까지 모를줄 알았느냐, 5分前에 樂譜를 보고 들어온것 다 안다"며 크게 화를냈다. 이어 "너 自身이 떳떳하지 못한 데 그런 모습으로 어떻게 觀衆을 만날 수 있나"고 꾸짖었다. 조수미는 눈물을 흘리며 "이게 아니구나"라며 反省했다고 한다. 以前까지는 父母의 强要에 依해 音樂을 했으나 徐徐히 가슴으로 音樂을 느끼게 되면서 工夫도 熱心히 하게 됐다. [13] 그리하여 보렐리·발렌티니·베르곤치 敎授에게 師事하여 2年만에 早期 卒業을 하게 됐다. [9]

音樂 活動 [ 編輯 ]

2002年 유네스코 에서 世界의 平和 音樂人으로 指定되어 世界 平和 및 文化遺産 保存을 위해 活動하고 있다. 오페라 舞臺에는 1986年 Italy 베르디劇場에서 《 리골레토 》의 女主人公 Gilda로 데뷔했으며 그 後, La Scala Opera House(이탈리아), Metropolitan Opera House(뉴욕, 美國), Covent Garden Opera House(런던, 英國), Vienna National Opera House(비엔나, 오스트리아), 바스티유(프랑스), 잘츠부르크 Summer Music Festival(잘츠부르크, 오스트리아) 等 世界的인 오페라 舞臺에서 活動했다. 또한 뉴욕의 모차르트 페스티벌·카네기홀·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시카고 리릭 오페라·LA 오페라·디트로이트 오페라·미시간 오페라(美國), 퀘백·토론토(캐나다), 로마·베네치아·볼로냐·피렌체(이탈리아), 엑상 플로방스(프랑스), 바르셀로나·세비야·빌바오(스페인), 베를린 오페라(獨逸), 런던(英國), 부에노스아이레스(아르헨티나) 等 世界 有數의 오페라 舞臺에서 活躍 中이다. [13]

조수미의 첫 앨범은 아델레 伯爵夫人役을 맡은 《오리伯爵》( 로시니 )으로, 1989年에 필립스에서 출반되었다. 그 後 두番째로 카라얀의 마지막 錄音이 된 《假面舞蹈會》( 베르디 )가 오스카役을 맡아 도이치 그螺毛폰에서, 피오릴라役을 맡은 《이탈리아의 터키人》( 로시니 )이 1992年 필립스에서 출반되었다. 그리고, 모짜르트의 《 魔術피리 》는 3年동안 3個가 錄音되어 나왔는데 이는 世界的으로 類例가 없는 일이다.이는 조수미가 이미 에라토사와 魔術피리 錄音契約을 한 狀態에서, 데카와 契約中이던 게오르그 솔티 가 조수미에게 오디션을 要請하고 오디션 後 솔티가 積極的으로 에라토를 說得하여 조수미를 自身의 錄音에 참여시켜 可能하게 된 일이다.(보통 한 會社와 오페라 全曲을 錄音한 歌手는 3-5年間 他社의 같은 오페라를 錄音할 수 없는게 契約의 條件이다) 솔티는 "75歲인 自身의 마지막 魔術피리가 될지도 모르는 錄音에 내가 그토록 願했던 목소리의 밤의 女王과 함께 하고 싶다"는 便紙를 에라토社에 보내, 結局 頑强하던 에라토社의 許諾을 맡아내었다. [9] 그리하여 데카와 에라토 레이블로 1991,92,93年에 各各 게오르그 솔티,Armin Jordan,Arnold Ostman의 指揮로 3個의 魔術피리 音盤이 나오게 된다. 게오르그 솔티는 조수미에게 "내가 만난 最高의 밤의 女王”이라는 讚辭를 보내기도 했다. [14]

조수미의 첫 獨唱앨범은 《Carnaval(카르喇叭)》 [15] 로 ' 조안 서덜랜드 '의 男便이자 世界的 指揮者인 '리처드 보닝'의 指揮로 1994年 데카레이블로 나왔는데, 보닝이 選曲한 프랑스 오페라의 잘 알려지지 않은 高音의 프랑스 아리아 13曲인데, 워낙 高難易度의 技巧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레코딩 過程에서 人工的(機械的) 造作이 있었을 것이라 誤解하였다고 한다. [16] 以後 活潑한 錄音活動으로 國際舞臺 데뷔 20年次인 2006年 基準 솔로앨범 10個를 包含 48個의 앨범을 出班하였다. [17] 조수미는 또 《不仁別曲(不忍別曲)》 - 드라마 許浚, 《나 가거든》 - 드라마 명성왕후, 《사랑의 記憶》 - 드라마 朱蒙 等과, 로만 폴린스키 監督의 映畫 《The Ninth Gate》(1999)의 OST, [18] 美國드라마 OST [19] 에 參與하는등 다양한 領域에서 錄音活動을 하였다. 2002年 韓日 월드컵 公式 應援歌 조수미의 "Champions"는 國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조수미의 아버지는 한名밖에 없는 딸에 對한 사랑이 至極했다. 집안이 힘들었던 時節 糖尿病으로 苦生하면서도 힘든 내色을 하지 않았다. 2006年 파리 에서 重要한 獨唱會가 있던 날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消息을 듣고는 짐을 싸서 바로 歸國하려 했으나 어머니가 "많은 사람들과의 約束을 지키는게 너의 本分이고 노래를 해서 그 音樂會를 아버지께 바치는게 너의 本分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렵게 파리 公演을 마치고 나니 눈물이 흘러내렸고 앵콜曲으로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Oh Mio Babbino Caro)>와 韓國歌曲 <그리운 金剛山>을 부른 後, 觀客들의 拍手가 그치지 않자 "故國에서 아버지 葬禮式이 열리고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노래를 바친다"며 슈베르트 의 <아베마리아>를 슬픔을 삼키며 마지막 曲으로 불렀다. [6] 노래를 마친 조수미는 눈물을 보이고, 파리 샤틀레劇場 을 메운 聽衆들은 모두 起立拍手를 보냈고 그들中에는 눈물을 흘리는 觀客들도 적지 않았다. [20]

사람들이 조수미를 보며 "어떻게 하는지 보자"는 눈빛으로 生疏하게 보았다. 오페라 配役에서도 東洋人이라는 理由로 不利益이 있었다. 金髮머리의 유럽型 外貌가 必要한데 조수미가 適合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依해 캐스팅이 除外된 境遇가 있었다. 1986年 公演을 하면서 느낀것은 韓國이라는 나라가 어디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大部分이었다는 것이다. 空港에서 與圈을 提示하면 韓國을 몰라 이것을 說明하느라 飛行機가 제때 못뜨는 境遇가 있을 程度였다. 이에 조수미는 "韓國이 빨리 커야되겠다. 韓國에 좋은 일이 있도록 나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한다. [13] 그래서 조수미는 韓國에서 國際的인 行事가 있으면 다른 스케줄을 뒤로하고 優先的으로 오길 願했으며, 이를 理解하지 못한 外國人 매니저와 싸우는 일도 잦았다. 조수미는 "自己 나라의 色깔을 풍기는 사람이 眞正한 藝術家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13]

조수미는 平凡한 聲樂家로 남기보다는 스스로를 '엔터테이너'(노래뿐 아니라 아니라 衣裳, 세팅 等 아티스트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주는,늘 새로운 音樂으로 音樂的 才能을 마음껏 펼치는 萬能音樂人)이고 싶다고 한다. "正統 聲樂에서 벗어난 '外道'에 對해 保守的인 분들은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지만 20年間 正말 自信感을 갖고 했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結果는 어떨까에 對해 생각해 본 적은 없다"고 하며, 韓國人에게 가장 사랑받는 아티스트로 남는 것이 가장 큰 바램이라고 한다. [21] 實際 그女는 2006年 國內 聲樂家 最初로 試圖 [22] 되는 바로크音盤 《Journey To Baroque》를 出班하고, 2010年엔 獨逸歌曲 앨범 《Ich Liebe Dich》를 出班, 그리고 스웨덴 民謠 《Bred Dina Vida Vingar》'(2008), 스페인의 民謠 《Hijo De La Luna(달의 아들)》(2011)를 出班하는등 다양한 音樂的 스펙트럼을 保有하고 있다.

조수미는 國內 클래식 演奏者들 中 斷然 獨步的인 앨범 販賣 記錄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累積 앨범 販賣量 100萬張 以上 클래식 아티스트는 조수미와, 팝페라 테너 임형주 單 2사람 뿐이다. [23] 조수미는 2000年 發賣한 첫 크로스오버 앨범 《Only Love》가 100萬張 販賣를 突破한 클래식 史上 前無後無한 記錄을 가지고 있다. [24] 또, 94年 發賣한 韓國歌曲집 '새야새야'가 40萬張以上 販賣되는등 [25] 수많은 앨범을 메가히트시킨 演奏者이다.

조수미는 오페라에서 配役을 맡기보다는, 獨唱會나 콘서트와 같이 觀衆과 一對一로 만나면서 舞臺에 서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데뷔 25年 車가 지난 近來에 이르러서는 오페라의 出演보다는, 音盤作業과 더불어 主로 獨唱會나 콘서트를 통한 全世界 演奏旅行을 다니고 있다. [26]

評價 [ 編輯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가 1912年에 作曲한 < 樂小小의 아리아드네 > '體르非네打의 노래'는 最高音으로 20分이 넘도록 쉬지 않고 불러야 하는 高難度 曲이어서 슈트라우스는 이 曲을 부르는 것이 不可能하다고 생각하여 樂譜의 一部를 修正했었다. 그러나 1994年 조수미는 世界 最初로 修正되지 않은 原本으로 부르는 記錄을 남겼다. [27] 프랑스 리옹에서 日本系 美國指揮者 켄트 나가노와 錄音하여 出班 [28] 했는데, 조수미는 이 錄音이 젖먹던 힘까지 다 써버릴 程度로 가장 힘든 錄音이었다고 著書에서 적고 있다. 또한 조수미는 東洋人 最初로 國際 콩쿠르 6個를 席卷했고, 世界 5大 오페라 劇場에서 主演으로 公演한 東洋人 最初의 프리마돈나로 이 記錄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1993年에는 東洋人 最初로 이탈리아 黃金 기러기賞(격년제)을 受賞했다. [13]

20世紀 最高의 指揮者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그女의 목소리는 神이 주신 最高의 膳物이다"라고 말했다. 카라얀은 또한 "韓國에서 배웠다니 놀랍다. 韓國에도 그렇게 뛰어난 先生들이 있단 말인가? 韓國은 대단한 나라이다"라고 感歎했다. [29] 뉴욕 메트로 폴리彈 劇場 오페라 뉴스는 "그女의 노래는 이미 批評을 넘어섰다"고 極讚했다. 프랑스 르 몽드紙는 "料亭도 그女의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고 評價했다. [30] 2008年엔 르네 플레밍 , 안젤라 게오르기우 와 함께 世界3代 소프라노로 選定되어 베이징 올림픽 行事에 參與했다. [31]

기타 [ 編輯 ]

조수미는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많이 놀고 讀書하고 自然과 함께 지내면서 아름답고 純粹하게 자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적 놀지 못했던 조수미는 아직도 곰人形 같은 장난감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 性格이 形成되는데, 자연스럽고 깨끗하게 커야 한다는 것이다. 藝術이란 것은 아름다운 魂이나 생각이 音樂을 통해 나타나 사람들의 귀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3]

조수미는 목젖이 없다. 조수미가 목이 아프면 찾아가는 醫師가 있는데 이 意思가 어느날 "조수미가 노래를 잘하는 理由를 알겠다. 목젖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32] 조수미는 平素에 外貌에 別로 神經쓰지 않으며 化粧氣 없이 便하게 다닌다. 그래서 옆집사람이 조수미인줄도 모르고 練習하는 소리를 듣고 音盤소리가 크다고 抗議하는 境遇도 있었다고 한다. [33] 조수미는 수많은 公演을 해왔음에도 不拘하고 恒常 떨린다고 말한다. 조수미는 이러한 緊張을 풀기 위해 빨래를 한다고 말했다. 빨래를 하면서 노래에 對한 생각을 한다. [34] 조수미는 音樂人으로써, 韓國人으로써 많은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고 싶으며 그런 機會가 感謝하다고 말했다. 또한 "藝術家로써 깨끗한 사람이 되고싶다"고 말했다. 조수미는 "善하지 않고 지저분한 사람의 노래는 아무리 잘해도 感動이 오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世上을 純粹하게 살고 싶고 그런 마음이 노래에 나타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조수미는 韓國의 노래를 앙코르로 부르는 境遇가 많다. 조수미는 "藝術家는 結局 令監의 源泉을 준 故國의 폼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라고 생각한다. 聲樂家로 成功한 조수미는 그러나 "다시 태어난다면 그냥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結婚해서 아이를 낳고 오순도순 女子로서 完璧한 幸福을 맛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8]

조수미는 數字 槪念이 없는게 苦悶이라고 말한다. 한때는 호텔에서 묵는데 커피 두盞을 시킨것이 호텔側의 錯誤로 2,222盞을 시킨것으로 計算이 되어 高額의 利用料를 支拂할뻔했으나 매니저가 알아차리고 抗議한 적도 있었다. [35]

조수미의 改名 前 이름은 ‘조수경’이다. 英語 表記와 外國人의 普遍的인 發音上 "卿"은 發音이 조금 어려웠기 때문에 이름을 조수경에서 조수미로 바꾸게 되었다. [36]

1997年 韓國의 外換危機 發生 直後 當時 駐佛 韓國大使는 프랑스 大企業 總帥들을 한 자리에 모으려 했지만 쉽지가 않자 로마의 조수미에게 協助를 要請했는데,평소 時間이 없다는 理由로 招待를 拒絶하던 大企業 會長들이 조수미의 獨唱會가 곁들어진 저녁 食事엔 夫婦同伴으로 參席했다고 하는 逸話가 있고, 또 그女의 熱烈한 팬인 英國 에드워드王子 夫婦의 포르투갈 公式訪問에 特別 招請되어 포르투갈 大統領과 主要閣僚, 英國 王室 家族等이 參席한 獨唱會에서 兩國 民謠와 韓國歌曲을 부른 적도 있을 程度로, 유럽內 조수미의 人氣가 대단했다. 포르투갈에서는 그女의 앨범 'Only Love'가 히트하며 2000年 포르투갈 最高 人氣 아티스트로 選定된 바 있다. [37]

조수미는 로마에 居住中이며, 유튜브 인터뷰 映像을 보면 이탈리아語 , 프랑스語 , 英語 를 流暢하게 驅使하며, 유럽에서 通用될 수 있는 言語는 大部分 疏通이 可能하다고 하며, 러시아語까지 驅使 可能하다고 한다. [38]

데뷔 直後 南아메리카 共和國 12個 都市 巡廻公演과 파리 콘서트를 앞두고, 서울을 한겨울에 찾았다가 얻은 至毒한 感氣로 조수미는 南아메리카 公演 2回째에 日程을 取消하고, 以後 毒感에 氣管支炎에 사랑니통에 食中毒 等이 겹치며 소리가 나오지 않아 몇 個月 程度를 노래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그 때 조수미는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게 그토록 끔찍한 일인지 몰랐고, 여기가 내 人生의 끝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한다. 以後 조수미는 "한 달동 안 노래하지 못하는 것과 一 年 내내 노래만 하는 것 中에서 하나를 고르라면 斷然코 一 年 내내 노래하는 쪽을 選擇할 것이다"라고 말할 程度로 조수미는 노래부르는 것이 즐겁다고 한다. [39]

유튜브에도 있는 조수미가 카라얀 앞에서 노래를 하는 有名한 映像 은 '짤즈부르크의 카라얀'이란 題目으로 카라얀 死亡 以後 出班된 비디오이다. 1987年에 다큐멘터리로 撮影되었으며, HVS와 LaserDisc에서 編輯하였다. 映像에서 조수미와 듀엣을 부르는 女子는 이탈리아의 世界的인 메조 소프라노 'Cecilia Bartoli'이며, 조수미가 밤의 女王 'O zittre nicht"를 부를때 옆에 앉아 있는 男子는 이탈리아의 바리톤 "lucio gallo"이다. 다같이 新人級인데 카라얀은 다른 두 사람은 제쳐 두고 조수미와만 繼續 對話를 하는데 카라얀이 조수미를 얼마나 寵愛했었는지 알 수 있다. 이 映像으로 조수미는 國際舞臺에서 認知度가 단박에 뛰게 된다.

앙드레 金 과의 因緣도 有名하다. 가난한 藝術家인 조수미는 한 벌에 數百 萬원을 呼價하는 드레스 代身 市場에서 原緞을 끊어 演奏會用 衣裳을 만들어 입어야 했다. 1988年 첫 歸國獨唱會에서, 公演場에 온 앙드레 金은 아름다운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은 초라한 드레스를 입은 조수미를 보고, 조수미에게 直接 連絡을 하여 앞으로 드레스를 만들어주겠다고 提案을 했다. 그 約束은 20年이 넘게 이어졌고 世界 舞臺에서 조수미는 앙드레 金의 衣裳을 입고 노래했고,그간 입은 드레스가 200벌이 넘는다고 한다. 조수미의 韓國 公演이 있을 날이면 舞臺 中央 第一 앞자리에는 앙드레 김을 위한 자리가 恒常 準備되었고, 公演이 끝나 커튼 콜을 할 때면 조수미는 오래前부터 自身을 後援해 준 앙드레 金을 紹介하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도록 했다. 2010年 앙드레 金이 世上을 떠나자, 조수미는 앙드레 김을 哀悼하는 마음을 담아 憲政公演을 열었고,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를 불렀다. 앙드레 金이 世上을 떠났을 當時 조수미는 海外에 머물고 있었는데, 한걸음에 韓國으로 들어와 故人의 殯所를 찾았고 오랜 時間 머물며 슬픔에 잠겨 있었다. [40] 조수미는 韓國 디자이너의 韓國美가 넘치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公演하는 것이 늘 자랑스러웠으며, 公演이 끝나면 드레스가 너무 예쁘다고 어느 디자이너의 作品이냐고 물어보는 境遇가 많았다고 著書에 적고 있다.

조수미는 2016年까지 未婚이며, 개 2마리와 함께 살고있다(요크셔 테리어&셰퍼트). 90年代에 結婚을 約束했던 프랑스 男子도 있었으나 成事되지는 않았고, "내 人生에서 나의 목소리와 音樂은 많은 사람들에게 屬해있으며, 또한 現實的으로도 늘 旅行을 다니기 때문에, 한 男子에게 眞情으로 所屬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代身 sns를 통해 사람들과 사랑을 나눈다고 한다. 그女는 트위터에 자잘한 것들도 올린다고 한다. 조수미는 pescatarian(고기는 生鮮만 먹는 菜食主義者)으로, 動物保護와 權利向上(特히 개)을 위해 힘을 쓰고 있으며, 關聯機關에 數 次例 寄附를 하기도 했다. 그女는 兒童關聯機關과, 그 外 여러方面에 寄附를 꾸준히 하고 있기도 하다. 조수미는 成大 保護를 위해 매운 飮食을 避하며, 드레스를 입어야 하는 體型 維持를 위해 감자튀김과 같은 飮食도 避한다. 좋아하는 飮食은 피자, 파스타, 쌀밥, 리소토 等이다. [41]

蹴球 熱血팬으로 알려져 있으며 2002年 FIFA 월드컵 때 "Champions"라는 월드컵 應援歌를 發表하여 旋風的인 人氣를 끌기도 하였다. [42]

篤實한 가톨릭 信者인 조수미는 2014年 8月 敎皇 프란치스코 의 訪韓時 聖母大祝日 미사 前 歡迎行事에서 넬라 판타지아 等 總 3曲을, 敎皇執典 미사 中 가톨릭 聖歌 '生命의 糧食'을 부르는 榮譽를 안았다. [43]

平昌冬季올림픽의 名譽弘報大使人 조수미는 平昌 패럴림픽 開幕式에서 歌手 소향과 함께 平昌 패럴림픽 主題歌인 "平昌, 이곳에 하나로(Here as One)"을 불렀다.

2021年에 KAIST 文化技術大學院의 招聘敎授가 되었다. [44]

略歷 [ 編輯 ]

  • 2012年 12月: PETA 弘報大使
  • 2012年 5月: 2014 仁川 아시안게임 弘報大使
  • 2011年 5月: 2013 順天灣國際庭園博覽會 弘報大使
  • 2010年 7月: 2018平昌冬季올림픽誘致委員會 弘報大使
  • 2010年: 大韓赤十字社 親善大使
  • 2007年 8月: 麗水엑스포 弘報大使
  • 2006年 12月: 平昌冬季올림픽 名譽弘報大使
  • 2002年: 世界博覽會誘致委員會 弘報大使
  • 2002年: 外交通商部

受賞 內譯 [ 編輯 ]

音盤 [ 編輯 ]

放送 [ 編輯 ]

드라마 [ 編輯 ]

  • 2011年 KBS2 《드림하이 시즌1》- 特別出演

藝能 [ 編輯 ]

著書 [ 編輯 ]

  •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1997年, ISBN   978-89-7919-085-4
  • 《조수미의 아름다운 挑戰》 2007年, ISBN   978-89-7919-781-5
  • 《꿈꾸는 프리마돈나 조수미》 2010年, ISBN   978-89-7919-941-3

各州 [ 編輯 ]

  1. 第11回 議政府國際音樂劇祝祭, 名譽委員長 조수미 그女의 모든 것과 만나다!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京畿北部綜合뉴스
  2. 韓惠進 (1995年 3月 9日). “世界的 소프라노 曺秀美氏 故國舞臺 다시 선다”. 京鄕新聞 . 15面.  
  3. 조수미 홈페이지 - Sumi Jo - Biography Archived 2007年 12月 21日 - 웨이백 머신
  4. 소프라노 조수미 "女子로 살고 싶어요" 每日經濟 2007年
  5. “聲樂家 조수미, 韓國人 最初'아시아 名譽의 殿堂' 入城” . 《京鄕新聞》 . 2021年 12月 8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1] 過去 內容 찾기])]
  6. 무릎팍' 소프라노 조수미, "殘忍하다. 슬픔 이기고 노래한다는 건…" 마이데일리 2008年 12月
  7. 조수미 '무릎팍道士'서 '베사메무쵸' 熱唱 '눈길' 아시아經濟 2008年 12月
  8. 조수미 "다시 태어난다면 平凡하게 살고 싶다" 韓國經濟 2009年 5月
  9. 조수미의 아름다운 挑戰 Archived 2014年 2月 22日 - 웨이백 머신 조수미 著書 2007年 12月
  10. 네이버 뮤직 2008年 4月
  11. 조수미 告白, "내 生涯 가장 幸福한 때는 첫사랑 時節" Archived 2014年 2月 24日 - 웨이백 머신 브레이크뉴스 2008年 12月
  12. 조수미, 서울音大時節 첫사랑과의 戀愛로 '落第點數' Archived 2014年 2月 24日 - 웨이백 머신 맥스뉴스 2008年 12月
  13. mbc 《黃金漁場》 <무릎팍道士> 2008年 12月 10日
  14. 데뷔20年 소프라노 조수미 京鄕新聞 2006-9-25
  15. 네이버 뮤직
  16. 조수미의 삶과 音樂과 特徵 Archived 2014年 2月 23日 - 웨이백 머신 Shanghai Timeout magazine 2014-02-03
  17. 조수미 뷰티플 챌린지 映像 中 유튜브 映像. 2007年.
  18. 조수미 폴란스키映畫 사운드트랙 參加 聯合뉴스 1999-04-07
  19. 조수미,美드 《밀드레스 피어스》 OST 參與 聯合뉴스 2011-04-10
  20. 조수미 2006年 파리公演 DVD 유튜브 映像
  21. 서울 公演 앞둔 조수미 聯合뉴스 2005-07-05]
  22. 네이버 뮤직 앨범紹介
  23. 임형주 데뷔 15年만에 累積.. 스포츠韓國 2013.12.16
  24. 2001 文化界 決算 韓國日報 2001.12.16
  25. 조수미,장영주 協演 聯合뉴스 1997.02.20
  26. 데뷔25周年 맞은 소프라노 조수미 聯合뉴스 2011.01.09
  27. 獨逸 歌曲은 제 音樂 人生의 所重한 젖줄이죠" 韓國經濟 2008年 12月
  28. Adriane auf Naxos 아마존뮤직
  29. 神이 내린 목소리 ‘조수미’& ‘AAM’ 이 온다. ‘暴風이 몰아치고’, 가슴이 뛴다 世界日報 2008年 12月
  30. 소프라노 조수미,議政府예술의전당서 '봄의 왈츠'公演 뉴시스 2007年 4月
  31. 조수미 世界 3代 소프라노 資格, 베이징올림픽 特別舞臺 오른다 東亞日報 2008年 8月
  32. 조수미, "아이는 아이답게 純粹하게 자라야 한다고 생각 osen 2008年 12月
  33. 무릎팍道士’조수미,″化粧 지우면 洞네 아줌마(?)″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詩앤非뉴스 2008年 12月
  34. 조수미 “고무掌匣 빨래板 旅行 必需品!” tv리포트 2008年 12月
  35. '조수미무릎팍', 數字槪念 때문에 커피 2,222盞 計算書 Archived 2016年 3月 5日 - 웨이백 머신 아트뉴스 2008年 12月
  36. 蹴球? 完全 미치죠 토티에 푹 빠졌어요 東亞日報 2010年 4月
  37. '特派員코너'유럽內 조수미의 人氣 韓國經濟 2001-05-29
  38. 데뷔20年 맞는 聲樂家 조수미 서울新聞 2005-12-28
  39. 조수미의 아름다운 挑戰 Archived 2014年 2月 22日 - 웨이백 머신 조수미 著書 2008年 12月
  40. 조수미와 앙드레김의 因緣 Archived 2014年 2月 21日 - 웨이백 머신 現代카드 現代캐피탈 블로그 2011.08.26
  41. 華麗한 女人의 素朴한 삶 Archived 2014年 3月 6日 - 웨이백 머신 The Straits Times(Singapore:英文)2014年 2月.
  42. Champions - Sumi Jo
  43. 조수미 敎皇歡迎行事 유튜브 關聯映像 2014年 8月.
  44. 朝鮮日報 (2021年 10月 14日). “소프라노 조수미, 카이스트 敎授 돼 工大生 가르친다” . 2021年 10月 15日에 確認함 .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深層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