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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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집
金弘集
1880년 도쿄의 우치다 사진관에서 수신사의 신분으로 촬영한 사진
1880年 도쿄의 우치다 寫眞館에서 修信使 의 身分으로 撮影한 寫眞
朝鮮 의 內閣總理大臣 兼 代理執政공
任期 1895年 12月 17日 ~ 1896年 2月 11日
君主 高宗 李兄

이름
別名 金宏集(金宏集) (兒名)
경능(敬能) (자)
桃源(道園)·이정학재(以政學齋) (雅號)
충헌(忠獻) (諡號)
身上情報
出生日 1842年
出生地 朝鮮 漢城府
居住地 朝鮮 漢城府
死亡日 1896年 2月 11日 ( 1896-02-11 ) (53歲)
死亡地 朝鮮 漢城府
國籍 朝鮮
學歷 1867年 進士試 合格
1868年 謁聖文科 及第
經歷 文官, 總理大臣 , 文筆家
正當 穩健開化派 勢力
本館 慶州 (慶州)
父母 아버지 金榮作(金永爵)
어머니 昌寧 姓氏 否認(昌寧 成氏 夫人)
兄弟姊妹 김항집(兄)
김승집(兄)
配偶者 南陽 洪氏 夫人
子女 1男 1女
親姻戚 이시영 (사위)
宗敎 儒敎 ( 性理學 )
웹사이트 김홍집 - 두산世界대백과사전

김홍집 (金弘集, 1842年 ~ 1896年 2月 11日 [1] )은 朝鮮 後期의 文臣이자 思想家, 政治人 이다. 者(字)는 경능(敬能), 號는 도원(道園)·이정학재(以政學齋), 諡號는 충헌(忠獻), 本貫은 慶州 이다. [2]

1880年 修信使 一行으로 日本 을 訪問한 뒤, 신문물을 見學하고 돌아와 開花, 個項의 重要性을 力說하였다. [3] 한便으로 衛正斥邪派 系列 人士들도 重用하는 等의 政策을 펼쳤으나 急進 開化派로 몰렸고, 1884年 甲申政變(甲申政變) 鎭壓 後 右議政 , 左議政 等으로 全權大臣(全權大臣)李 되어 漢城條約(漢城條約)을 締結하였다. [4] 그 뒤 1896年 管制 改正 以後 東學 農民 運動 을 鎭壓하기 위해 끌어들인 日本側의 支援으로 總理大臣 이 되었으며, 總理大臣 在職 中 身分制 廢止, 斷髮令 等을 强行하는 한便, 함께 日本 의 도움으로 改革, 開放을 斷行한 뒤에는 親日派로 몰려 俄館播遷 때 乙未事變과 斷髮令에 憤怒한 百姓들에게 뭇매를 맞아 죽었다. [5]

元來 이름은 김홍집(金弘集)이었으나, 淸 高宗 (高宗) 乾隆皇帝 의 휘가 ‘홍력’(弘歷)이었기 때문에 이를 避하기 위해 金宏集(金宏集)으로 가운데 字(字)를 바꾸었다. [6] 朝鮮 末期의 文臣이자 獨立運動家, 大韓民國 副統領 을 지낸 李始榮은 그의 사위였다. 박규수 , 오경석 , 姜瑋 의 文人이다.

出生과 家計 [ 編輯 ]

1842年 李朝 參判 을 지내고 議政府 領議政 追贈 金榮作 (金永爵)과 政府인 姓氏(成氏)의 셋째 아들로 漢城府 에서 出生하였으며 [7] 한때 1845年에서 1848年까지 慶尙道 慶州 에서 暫時 3年間 幼年期를 보낸 적이 있다. 議政府 左議政 을 지낸 김명원 의 後孫으로, 肅宗 의 繼妃 인원왕후 의 親庭아버지인 경은부원군 김주신 의 5代孫이었다. [8] 曾祖父 김효대 共助 板書 를 지냈고, 從祖父 김사목 [9] 議政府 左議政 을 지냈다. 어머니 星氏는 雨季 成婚 의 後孫이다.

實學者 桓齋 박규수 의 門下에서 글을 배웠다. [10] 1867年 定試 進士試 에 合格하여 眞사 가 되고 [11] , 成均館 에 들어가 儒生으로 受學하였다. 成均館 齋生 時節 成績이 優秀하여 바로 戰時에 應試할 資格이 주어졌다.

初期 活動 [ 編輯 ]

1867年(高宗 4年) 經過定試 (慶科庭試)에 及第하여 이듬해 承政院 事變假注書에 任命되었다. 그러나 몇 달 뒤 아버지 金榮作이 死亡하여 喪을 치르느라 辭退하였고, 아버지의 脫喪이 있던 1870年 다시 어머니 昌寧 姓氏의 喪을 當하여 다시 3年喪을 더 치렀다. [2]

父母의 脫喪을 마친 1875年 五位 의 副司果(副司果, 種6品)를 거쳐 흥양현 縣監 으로 나갔다가 1877年 謝過(司果, 情6品)를 歷任했다. [2] 1878年 以後 戶曹參議, 工曹參議, 兵曹參議, 禮曹參議를 두루 지냈다. 그 뒤 光陽 縣監(光陽縣監)을 거쳐서 1880年 禮曹 參議로서 第2次 修信使 로 任命되어 58名의 使節團을 이끌고 日本 帝國 을 다녀왔다. [12] 歸國 以後, 西洋 近代의 技術的 成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日本의 文物制度를 배워야 한다고 主張하면서 調査視察團 의 日本 派遣을 常住하게 하였다. [13]

修信使 [ 編輯 ]

1880年 여름 禮曹 參議 였던 金弘集은 總 58名의 一行을 이끌고 2次 修信使 로서 日本에 갔다. 隨行員은 이조연 , 이용숙 (李容肅) 等이었으며 [14] 윤웅렬 [15] , 지석영 [16] 과 같은 人物들도 同行하였다.

金弘集 一行은 1880年 7月 日本 機船 지토세마루(千歲丸) 篇으로 釜山港 을 통해 도쿄 로 到着했다. [17] 金弘集이 이끈 2次 修信使는 朝鮮과 日本 사이의 海關稅 徵收, 濟物浦 의 開港, 米穀 輸出 禁止, 日本 公使의 서울 駐在 等을 議論하기 爲한 것이었으나, 日本은 金弘集이 全權을 委任받지 않았다는 理由로 公式 交涉을 拒絶하였다. [3]

金弘集은 日本의 交涉 拒絶로 인한 懸案 處理를 하느라 日本을 仔細히 觀察하기 어려웠지만 日本의 變化를 살피고 朝鮮의 富國 强兵을 이루어야겠다는 開化黨 의 認識만은 分明히 하고 있었다. [18] 朝鮮은 마지막 通信社 以後 한 世紀가 지나서야 다시 日本에 使臣을 派遣하고 있었지만 朝鮮의 傳統的 外交 方針은 事大交隣이었고 中國을 宗主國으로 認定하면서 獨自的인 國家로서 存立하는 한便 周邊의 다른 國家에 對해서는 朝鮮 中心의 秩序를 要求하여왔다. 日本에 對해서도 派遣되는 使節은 日本의 貢物에 對한 答禮를 보내는 形式인 回禮使(回禮使) 等의 名稱이 쓰였다. 이러한 名稱이 修信使로 바뀐 것 自體가 朝鮮의 立場에서는 큰 變化였다. [19] 그러나 1次 修信使는 서로의 書契 問題 의 餘波가 아직 남아 있어 格式 問題를 따지느라 제대로 된 業務를 遂行하지 못하였다. 朝鮮이 通信使를 派遣하며 보였던 文化的 優越感도 對日外交의 問題가 되었다. 反面 2次 修信使 金弘集은 日本의 發展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立場으로 旣存의 使臣들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18]

도쿄 滯在 1個月 동안 이들은 日本 政府의 極盡한 待接을 받으며 日本의 近代化 된 모습을 두루 살폈다. 金弘集 一行은 日本의 鐵道와 自動車, 衛生狀態 等을 살피고 日本의 發展相에 크게 놀랐고 日本이 提案하는 近代化 計劃에 同調하게 된다. 이는 나중에 그를 親日派 로 分類하는 原因이 되었다. [20] 그러나 이들이 無條件的으로 日本의 앞잡이가 된 것은 아니다. 金弘集은 日本 內의 征韓論 흐름을 觀察하고 高宗 에게 報告하였다. [21]

朝鮮策略 [ 編輯 ]

이언을 件내준 황준헌

金弘集은 公式的인 使節 任務에서는 별다른 成果를 얻지 못하였으나 週日 淸國 公使館 參贊官이었던 황준헌 으로부터 《 朝鮮策略 》을 받아 調整에 紹介하였다. [22] 원 題目이 《私擬朝鮮策略》(私擬朝鮮策略, 朝鮮의 策略에 對한 個人的 見解)인 황준헌의 《朝鮮策略》은 傳統的인 事大交隣의 外交 政策을 버리고 中國, 日本, 美國과 共히 外交 關係를 맺어 러시아 의 南下政策에 對抗해야 한다는 內容을 담고 있었다. 이는 國益을 위한 自主的 外交를 勸하는 只今으로서는 常識的인 內容이었으나, 當時 朝鮮에서는 큰 衝擊을 주었다. 더욱이 이러한 近代的 外交 政策을 推薦한 사람이 淸나라의 官僚였기 때문이다. [23] 《朝鮮策略》은 對러 共助 外交를 얻기 위해 美國을 지나치게 美化하였다는 批判이 있다. 當時 淸나라 立場에서는 持續的인 南下 政策을 펼치는 러시아가 가장 時急한 外交的 懸案이었지만, 그에 對應하기 위해 美國을 마치 아무런 利益을 바라지 않는 友好國으로 그린 것은 이미 필리핀을 비롯한 東南아시아 地域에서 霸權 競爭을 벌이고 있던 美國의 實際를 糊塗한 것이었다. [24]

金弘集은 황준헌으로부터 정관잉 (鄭觀應)의 《 이언 (易言) 》도 건내받아 들고 왔다. 《易言》은 萬國公法 을 비롯하여 友情體系, 干拓과 가뭄 對策 等 西洋의 여러 制度를 紹介하는 一種의 百科事典 敵人 冊으로 題目은 "쉬운 說明"이라는 뜻이다. 西歐의 文物을 되도록 쉽게 紹介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25]

統理機務衙門 [ 編輯 ]

高宗은 김홍집으로부터 건내받은 《朝鮮策略》을 外交 政策에 導入하기로 하고 널리 配布하는 한便 1881年 調査視察團 을 日本에 派遣하여 새로운 文物을 보다 仔細히 觀察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高宗의 이러한 政策은 衛正斥邪派 의 反撥을 불러일으켰다. [13] 各地의 上疏가 쏟아지자 金弘集은 辭職하였는 模樣새를 取하였으나 調整 改革으로 統理機務衙門 이 新設되자 다시 復歸하였다. [26]

金弘集은 《朝鮮策略》에 바탕을 둔 朝美修好通商條約 의 交涉 責任者로서 活動하였다. 以後 金弘集은 朝鮮의 外交 政策 責任者가 되었다. 朝美通商修好條約을 採決하면서 그 동안 日本이 拒否하던 關稅 問題도 함께 解決하였다. 2次 修信使로 派遣되었을 當時 修信使의 委任 權限 問題를 핑계로 日本은 關稅 協定을 맺지 않았다. 그러나 朝美通常修好條約에 關稅 條項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金弘集은 萬國公法을 根據로 日本에게 同一한 條件을 受容할 것을 促求하였다. 그 結果 1883年 朝日通商章程 은 關稅 條項을 包含하게 되었다. [27] 그러나 近代的 國際法制에 未熟하였던 朝鮮과 金弘集은 如前히 日本에게 最惠國 의 特權을 주고 말았다. [28]

美國과 通商條約의 實務 責任者를 거치면서 金弘集은 朝鮮의 外交 專門家로 浮上하였다. 以後 造營 通商 條約 조영하 와 함께 全權을 委任받고 採決하게 된다. [29] 獨逸 亦是 金弘集이 實務 責任으로 通商 條約을 맺었다. 이렇게 여러 나라와의 外交에 有効適切한 手腕을 發揮하여 ‘비오는 날의 나막신’에 比喩되곤 하였다. [30]

壬午軍亂의 收拾 [ 編輯 ]

1882年 7月에 일어난 壬午軍亂 은 다양한 問題가 얽히고 섥힌 複雜한 問題였다. 傳統展 軍事 體系를 革罷한 뒤 舊式 軍人에 對한 處遇가 劣惡해 진 것이 表面的 原因이었지만, 政治的으로는 명성왕후 를 앞세운 餘興 閔氏 戚族 勢力과 흥선大院君 을 비롯한 衛正斥邪派 의 對決이었고, 文化的으로도 開花 에 對한 拒否感의 表示였다. [31]

13個月 동안 給與가 밀려있던 訓鍊都監 의 軍人들이 蜂起하여 始作된 壬午軍亂은 곧바로 閔氏戚族에 對한 反撥과 興宣大院君 復歸를 위한 衛正斥邪派의 쿠데타로 變換되었다. 그러나 淸나라가 介入하여 오히려 興宣大院君을 붙잡아 가버린 뒤 衛正斥邪派는 힘을 잃고 閔氏 戚族이 復歸하였다. 淸나라는 이를 빌미로 朝鮮에 對한 干涉을 强化하였다. [32]

1883年 淸나라 監禁 時期의 興宣大院君

衛正斥邪派의 上疏로 辭職하였던 金弘集은 壬午軍亂의 뒷收拾으로 國內問題가 複雜한 狀況에서 다시 起用되었다. 1882年 京畿道 觀察使로 再修되었고 [33] , 以後 淸나라 에 派遣되는 眞珠紗(陳奏使)에 眞珠紗 조영하 (趙寧夏)와 함께 晉州 府使로 톈진(天津)에 派遣되어 흥선大院君 의 釋放을 交涉하고, 朝鮮 政府의 興宣大院君 釋放 運動을 仲裁하여 北洋大臣 (北洋大臣) 리훙장 을 說得시키는데 成功했다. 이어 리훙장의 幕僚인 마젠衝 (馬建忠), 저우푸(周馥)을 說得하여 貿易協定인 造淸商民水陸貿易章程 (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議政, 調印했다. [34] [35]

列强과의 外交 交涉을 비롯한 壬午軍亂 收拾의 功을 認定 받아 金弘集은 1883年 奎章閣 直提學 을 거쳐 [36] 1884年 知春秋館事 [37] , 禮曹判書 [38] , 漢城府 判尹 [39] 等의 여러 要職을 거쳤다. 이 사이에도 金弘集은 協辦交涉通商事務와 督辦交涉通商事務 等의 外交 實務 責任者를 지냈다. [40]

甲申政變 [ 編輯 ]

開化黨 [ 編輯 ]

19世紀 以後 朝鮮의 狀況은 밖으로는 여러 나라의 異樣船 이 登場하고 안으로는 洪景來의 亂 을 비롯한 各種 民亂이 끊이지 않는 不安한 時期였다. 興宣大院君은 兩班들에게도 軍布를 附加하여 租稅를 改革하고 書院을 革罷하여 士林의 根據地를 없대는 等 刷新策을 세워 政局의 安定을 圖謀하였는데, 이는 基層 民衆들의 要求가 어느 程度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그러나, 旣存의 法制의 固守와 斥和碑 로 대표되는 鎖國 政策으로는 變化하는 世界에 對應하기에는 力不足인 狀況이었다. [41] :230 - 231

北學派 實學者였던 朴智元 의 孫子였던 박규수 제너럴셔먼호 事件 當時 배를 불태우며 强勁하게 對應하였지만 [42] 스스로는 北學派의 主張인 通商開國論의 立場을 取하고 있었다. [43] 朴珪壽는 第2次 阿片戰爭 으로 베이징 이 英國 프랑스 聯合軍에 占領된 以後 淸나라에 使臣으로 派遣되어 西歐 列强의 힘을 直接 經驗하였고 兩廡 運動 에 影響을 받아 朝鮮 亦是 自强 運動과 開化 運動이 必要하다고 생각하였다. [44] 朴珪壽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그의 舍廊房에 모여 形成된 것이 開化黨 으로 1874年부터 김옥균 , 박영교 , 박영효 , 서광범 , 오경석 等이 中心이 되어 活動하였다.

開化黨이 漸次 많은 사람들과 連結되면서 金弘集 亦是 開化黨과 關係를 맺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朝鮮이 世界 여러 나라와 通商條約을 맺고 開化되어야 한다는 點에 同意하였지만, 그 方向과 速度가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다. 金玉均을 代表로 하는 急進開化派는 法律과 制度를 바꾸는 政變도 不辭한다는 立場이었고 이에 反해 金弘集 等의 穩健開化派는 西洋의 技術을 導入하되 法制는 傳統의 것을 漸進的으로 改善한다는 立場이었다. [45] 이들 사이의 差異는 初期에는 그리 크게 浮刻되지 않았지만, 壬午軍亂의 收拾過程에서 淸나라가 大院君을 拉致한 事件에서 政治的 見解 差異가 드러나게 되었다. 淸나라는 通商條約人 造淸商民水陸貿易章程 의 專門에 朝鮮이 淸나라의 屬邦(屬邦, 隸屬國)이라 明示할만큼 朝鮮과 外交를 傳統的인 事大 關係의 延長線으로 두고자 하였다. [46] 淸나라가 大院君을 사로잡아 가자 金玉均 等은 朝鮮의 主權을 侵害當했다고 激烈히 反撥하였지만, 金弘集은 衛正斥邪派의 巨頭인 大院君이 사라지는 것에 별다른 不滿을 提起하지 않았다. [44]

甲申政變 [ 編輯 ]

김옥균

김옥균 等의 急進開化派는 平素에도 制度의 革罷를 主張하였고, 外交 關係에서도 淸나라의 影響力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평화로운 方法만으로 開化를 實現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이들은 "忠義系"라는 祕密結社 를 組織하여 機會가 닿는다면 언제든 權力을 잡고자 하였다. [47] 43 名으로 이루어진 忠義系는 같은 開化派로 分類되던 金弘集 等의 穩健開化派에게도 알리지 않은 祕密 組織이었다. 金玉均은 이 外에도 서재필 等 14名의 士官生徒, 박영효 가 이끌던 別技軍 , 윤웅렬 의 咸鏡道 軍士를 모아 모두 1千餘 名의 兵力으로 甲申政變을 일으켰다. [48]

金玉均은 청불戰爭 으로 淸나라의 兵力이 朝鮮을 向하지 못할 것이라는 判斷으로 1884年 12月 4日 새로 만들어진 郵政局 의 落成式을 機會로 삼아 甲申政變을 일으켰다. 政變을 일으킨 直後 發表한 內閣은 急進開化派와 國王의 宗親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들이 國王 中心의 制度 革罷를 意圖下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淸나라가 兵力을 앞세워 政變을 彈壓할 境遇 日本의 支援을 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實際로는 3日 만에 鎭壓되는 동안 日本의 별다른 支援을 받지 못하였고, 少數 엘리트의 陰謀로 進行된 政變은 一般 民衆의 支持도 얻지 못하였다. [46] 金弘集은 郵政局 落成式에 아무런 낌새도 모르고 參與하였다가 政變에 휘말리게 되었다. [49]

金弘集은 金玉均 等과 별다른 連絡조차 주고 받지 않았지만 甲申政變의 失敗는 開化派 全體에 對한 危機로 불거졌다. 甲申政變의 渦中에 淸나라와 日本은 漢城에서 交戰을 벌였고, 日本軍의 死傷者가 發生하였다. 서울의 民衆들 亦是 日本에 對한 反感을 드러내며 日本公使館을 불태웠다. 甲申政變의 主役들은 自身들의 行動을 淸나라의 干涉에서 벗어나기 위한 自主的인 活動이라 主張하였지만, 政變에 日本軍이 動員되는 것을 본 民衆들은 “外國의 軍事를 불러들여 軍部(君父)를 威脅하였다.”고 여겼다. [49]

甲申政變이 失敗로 돌아간 뒤 朝鮮은 金弘集 等을 交涉 代表로 하여 日本과 漢城 條約 을 맺게 되었다. 애初 朝鮮의 目的은 政變에 軍事的 支援을 한 日本을 糾彈하고 責任을 묻기 위한 것이었으나, 오히려 日本이 自國 軍人의 死傷者 發生과 公使館 火災의 責任을 朝鮮에게 묻는 模樣새가 되었다. 結局 漢城條約을 통해 朝鮮은 오히려 日本에게 謝罪하는 國書를 보내게 된다. [49]

金弘集은 漢城 條約 以後 辭任하였으며, 判中樞府事로 한때 限職에 머물러 있었다. 한便 個項의 重要性을 力說하고, 老論 北學派 少論 等을 重用하여 그는 開化派로 몰렸다. 그러나 開港의 重要性을 力說하는 同時에 최익현 의 文人인 박병철(朴炳哲) 等의 老論 衛正斥邪系列 性理學者들을 重用하였다.

漢城條約이 成事된 뒤 判中樞府事로 밀려났다가 1887年 다시 議政府 左議政 에 任命되었으나 衛正斥邪派 의 反撥과, 地方 儒林들의 賣國奴라는 糾彈 輿論으로 곧 辭職했다. 以後 判中樞府事로 轉任되었다가 1889年 에 行 水原府 留守 로 左遷되었다.

金弘集 內閣 [ 編輯 ]

第1次 金弘集 內閣 조각 [ 編輯 ]

1894年 東學革命이 일어나 日本 勢力의 浸透가 表面化되자 그 힘을 빌어 第1次 金弘集 內閣을 組織, 總理大臣이 되었다. 그해 東學 農民 革命 이 일어나자 명성황후 가 淸나라軍을 끌어들였고, 朝鮮에 浸透를 바라던 日本軍은 淸日 戰爭 을 일으키기 며칠 前인 陰曆 6月 21日 (陽曆 7月 23日 )에 景福宮을 襲擊하고 武器庫를 奪取하는 等 金弘集 一派를 支援하였다. 한便 金弘集은 日本 調整과 親하다는 理由로 陰曆 6月 末부터 第1次 金弘集 內閣 을 組織하고 總理大臣 이 되어 甲午改革 을 斷行하였다. 改革機構로 軍國機務處를 設置하고 總裁가 되었으며, 大院君을 불러들여 民衆의 不滿을 緩和하고자 하였다.

總理大臣으로 그는 惡習을 廢止하고 科擧制 廢止, 銀本位制의 新式貨幣制度 採擇, 議政府와 宮內府의 管制 施行, 度量衡制度의 採擇 等의 改革을 斷行했다.

2次 內閣 組織과 改革 活動 [ 編輯 ]

淸日 戰爭 의 結果 日本이 得勢하자 甲申政變으로 日本에 亡命갔던 强力한 親日派 朴泳孝가 立脚한 第2次 金弘集, 朴泳孝 聯立 內閣이 成立되었으며, 이때 軍國機務處를 없애고 1次 內閣때부터 作成한 草案을 完成, 새로운 法令인 洪範 14兆 (洪範十四條)를 直接 樹立하여 高宗으로하여금 發表하게 하였다. 이어 8衙門을 7部로 고치고, 脂肪 8度를 23部로 바꾸고 敎育立國調書를 發表하여 師範學校를 設立하였다. 그러나 財政難과 박영효 · 서광범 等과의 對立, 유길준 等의 消極的 協力 等으로 支援 勢力이 없어 內閣은 곧 瓦解되고, 朴泳孝가 逆謀事件으로 日本 亡命하고 朴定陽 內閣이 誕生하였다.

生涯 後半 [ 編輯 ]

親日 疑惑 [ 編輯 ]

法律과 制度를 바꾸고 日本의 變化된 官制와 服飾을 朝鮮에 導入하려 했다. 또한 陽曆의 使用과 郵便 制度를 實施하기도 했다.

그러나 一說에는 金弘集은 自身이 軍國機務處의 總裁를 兼任하면서 總裁補佐 名目으로 日本 公使館 職員 4~5名을 끌어들여 이들에게 實質的인 權限을 附與하는 等 親日賣國行爲에 앞장섰다 [50] 는 主張도 있다.

自殺 未遂 [ 編輯 ]

이어서 들어선 박정양 內閣이 列强에 接近하려는 政策을 쓰자, 日本은 이를 警戒했고 그는 이 사이 日本側과 接觸하였다. 朴定陽 內閣이 새로 勢力을 뻗기 始作한 龜尾 列强에 親近하려는 政策으로 기울어지자 日本 帝國은 1895年 乙未事變 을 일으켜 명성황후 를 죽인 後 第3次 金弘集 內閣 을 組織하였다.

10月 8日 王妃가 암살당하자 金弘集은 自決하려 하였다. 때마침 金弘集을 訪問했던 유길준 은 그럴 必要 없다며 金弘集을 極口 말렸다.

大監 좀 고정하십시오. 大監께서 돌아가신다 해서 모두가 收拾된다면 모르지만 王妃는 이미 慘變을 當했고 事態는 벌어졌습니다. 우리가 거꾸로 一擊을 當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事態를 收拾하는 데 努力하는 것도 忠節이 될 것입니다. 大監께서는 그 뒤에 가서 돌아가셔도 늦지 않으니 제발 좀 固定하시고 深思熟考해주시기 바랍니다. [51]
有功 그대가 말하는 뜻은 다 알아요. 하지만 우리는 只今까지 우리나라의 保全과 改革을 위하여 모든 屈辱을 참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番 事態만은 絶對로 저들을 容恕할 수가 없어요. 世祿之臣으로 또 一國의 重臣된 自家 國母의 慘變을 보고 어찌 살아서 陛下와 萬百姓을 對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유공의 處地와 다릅니다. 유공은 어떤 難局이라도 克服해서 앞으로 이 나라를 건져야 할 使命이 있지만 내가 할 일은 이제 내 스스로 죽는 일 밖에 없습니다. [51]

兪吉濬은 어렵게 金弘集을 說得하여 自殺하려는 것을 말리고 大闕로 데려갔다. 1895年 10月 9日 明成皇后 暗殺事件이 일어난 뒤 金弘集을 首班으로 內閣이 改編 되었다.

沒落과 最後 [ 編輯 ]

金弘集 內閣에서는 日本의 壓力 外에도 斷髮令 强行 等 急激한 改革을 實施하다가 性理學者 들의 反撥로 全國的인 義兵 蜂起와 集會를 惹起하였고, 1896年 (建陽 1年) 러시아의 勢力이 增大하여 드디어 俄館播遷 이 일어나 金弘集 內閣이 崩壞되고 친러파 內閣이 組織되었다. 그와 同時에 金弘集은 많은 大臣이 被殺될 때 賣國 親日黨의 頭目으로 몰려 光化門 에서 親러派 軍人들과 群衆들에게 殺害되었다. 著書로는 '이정학재일록 (以政學齋日錄)'이 있다. 當時 그의 나이 享年 54歲였다.

殺害된 屍身은 光化門 밖에 梟首되었고, 屍身은 屠戮되어 角度로 보내졌으며, 百姓들은 需給에 돌을 던졌다 한다. 매천야록 에 依하면 그의 屍身을 씹는 者까지 있었다고 傳한다. 그의 家族들에게도 緣坐制 가 適用되었는데, 이시영 에게 시집간 딸 等 이미 出嫁한 딸들만이 緣坐制 를 避하였다. 漢城府 私邸에 있던 夫人은 連坐되어 官婢로 끌려갈 것을 豫想하고 아들을 죽이고 自殺하였다.

事後 [ 編輯 ]

그는 開化派 가 沒落하면서 逆賊으로 斷罪되었고, 1910年 韓日 倂合 後에는 親日派 의 得勢를 불러온 逆賊으로 斷罪되어 再評價받지 못하였다. 1945年 解放 後 사위 이시영 에 依해서 復權 輿論이 造成되었고, 1960年 대 가서야 改革 努力에 對한 硏究와 評價가 始作되었다.

墓地는 京畿道 坡州郡 壬辰面에 安葬되었으나 韓國戰爭 京畿道 高陽郡 벽제면 대자리(現, 高陽市 德陽區 대자동)로 이장하였다. 《 김홍집 先生 墓 》는 1986年 6月 16日 고양시의 鄕土遺跡 第24號로 指定되었다.

著書 [ 編輯 ]

  • 이정학재일록 (以政學齋日錄)

家族 關係 [ 編輯 ]

  • 高祖父 : 김후연(金後衍)
    • 曾祖父 : 김효대(金孝大)
      • 祖父 : 김사식(金思植)
        • 生父 : 金榮作(金永爵, 1802年 - 1868年 )
        • 生母 : 昌寧 姓氏(? - 1870年 )
          • 兄님 : 김항집(金恒集, 腰絶)
          • 兄님 : 김승집(金升集)
          • 否認 : 南陽 洪氏
            • 아들 : 김경희(金敬熙)
            • 長女 : 慶州金氏
            • 사위 : 이시영 (李始榮, 1868年 - 1953年 )
              • 外孫子 : 이규봉(李圭鳳)
              • 外孫子 : 이규홍(李圭鴻, ? - 1951年)
              • 外孫子 : 이규흥(李圭興)
              • 外孫子 : 이규열(李圭烈, ? - 1953年)
              • 外孫婦 : 서차희( 1910年 - ?)
          • 동생 : 김증집(金證集)
      • 外할아버지 : 성재순(成載淳)
        • 丈人 : 홍재선(洪在善)

思想과 信念 [ 編輯 ]

그는 恒常 朝鮮이 發展하려면 先進 外國과 提携해야 한다는 開花 交流史上의 確固한 信念과 異常을 披瀝하였다. 그의 開化思想의 特徵은, 開化는 必然的으로 실현시켜야 하지만, 急進的 方法으로는 不可能 하며 漸進的 方法만이 所期의 成果를 거둘 수 있다고 主張하였다.

評價 [ 編輯 ]

김홍집 行實이 그가 主張한 바와 엇갈리는 바가 많아서 ‘親日派 愛國者’로 表現되곤 한다. [30] 日本 勢力을 利用하여 朝鮮을 改革하려 했던 政治家라는 評價와 함께 日本에 이용당한 親日派라는 評價가 共存한다. 또한 그가 죽기에 앞서 “一國의 總理로 同族 손에 죽는 것은 千名”이라는 말을 남겼기 때문에 責任感 있는 政治人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乙未事變을 幇助한 點 과 高宗에게 明成皇后를 '西人'으로 陛下는 詔勅에 署名하도록 限 强要한 點 等은 如前히 그의 政治的 基準에 對한 論難으로 남아있다.

또한 舊韓末의 激動의 소용돌이 속에서 3次의 內閣을 이끌며 開港과 社會 安定을 위해 努力하였으나, 外勢의 挑戰을 自力으로 克服해야 한다는 主張을 實踐하기도 前에, 政局의 混亂으로 群衆에게 殺害되는 悲劇을 甘受해야 했다는 視角도 있다.

같이 보기 [ 編輯 ]

金弘集을 演技한 俳優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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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영익, 《甲午更張 硏究》(일조각,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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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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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정성희, 朝鮮 末期 亂世를 살다간 最高의 政治外交가 김홍집, 네이버케스트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前任
심순택
朝鮮 攝政
1894年
後任
이준용
前任
박정양
朝鮮 攝政
1895年 12月 17日 - 1896年 2月 11日
後任
윤용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