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용 (187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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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용
李埈鎔
운현궁 이화문
雲峴宮 李花紋
映宣群
在位 1907年 ~ 1910年
在位 1912年 ~ 1917年
前任 이재면
後任 이우
이름
別號 者는 京劇, 號는 石亭, 松亭, 別名은 무루孔子, 洋돼지
身上情報
出生日 1870年 7月 23日 ( 陰曆 6月 25日 )
出生地 朝鮮 漢城府 鍾路房 雲峴宮
死亡日 1917年 3月 22日 ( 1917-03-22 ) (46歲)
死亡地 日帝强占期 朝鮮 京城府 雲峴宮에서 兵士( 心臟疾患 等의 合倂症)
經歷 刑曹 參議 , 承政院 都承旨 , 成均館 大司成 , 輔國崇祿大夫 , 上輔國崇祿大夫 , (1912~1917)
父親 興親王 이희
母親 풍산 洪氏 否認(生母)
驪州 李氏 否認(繼母)
配偶者 初配 南陽 洪氏 否認
計杯 광산 金氏 否認
妾室 이옥경
妾室 전순혁
其他 親姻戚 堂조카 이우 , 이진완
宗敎 儒敎 ( 性理學 )
陵墓 흥원 (興園)
軍事 經歷
服務 大韓帝國 陸軍
服務期間 1907年 8月 14日 - 1910年 10月
指揮 大韓帝國 陸軍
映宣群 이준용 神道碑

映宣群 이준용 (永宣君 李埈鎔, 1870年 7月 23日 ( 陰曆 6月 25日 ) ~ 1917年 3月 22日 ( 陰曆 2月 29日 ))은 朝鮮 王族 , 文身 , 軍人 , 親日派 利子, 大韓帝國 의 皇族, 軍人, 敎育인 으로, 高宗皇帝 의 兄인 興親王 이재면 의 아들이자, 흥선大院君 의 嫡長孫이다. 本貫은 全州 로 者(字)는 京劇 (景極), 號는 石亭 (石庭) 또는 松亭(松亭). 別稱은 무루孔子 (無淚公子). 映宣群 (永宣君)의 爵位를 받았으며, 朝鮮 高宗 의 조카이자 政治的 라이벌이었다. 初期에는 反日的 性向이었으나, 晩年에는 神宮封境回 總裁 를 지냈다.

1886年 文科에 及第하여 官職은 上輔國崇祿大夫 에 이르렀다. 高宗 의 潛在的 代案者이자 競爭者였으며, 할아버지 흥선大院君 高宗 을 廢位시키고 완銀群 , 興親王 을 王으로 推戴하려는 祈禱를 하였으나 失敗했다. 以後 大院君은 그에게 期待를 걸고, 그를 王으로 推戴하려고 試圖하였으나 모두 失敗했다. 金弘集 內閣의 內部 協辦 ·統衛使 等에 登用되었고, 輔國崇祿大夫 로 昇進했다.

1894年 김학우 (金鶴羽) 暗殺 事件의 背後로 몰려 逮捕, 投獄 後 拷問을 받았으며 特使로 釋放되었다. 釋放된 뒤 駐車 日本 公使(駐箚日本公使)와 그해 11月 27日 陸軍參將(陸軍參將) 等을 지냈다. 이에 아울러 그는 乙未年 王世子 作爲 선양 波動 事件에도 間接 連累되었지만 高宗 의 다른 代案者와는 달리 그는 積極的으로 王位에 오르려는 試圖를 하여 高宗을 긴장시켰다.

乙巳條約 締結 以後 敎育, 王位 繼承을 斷念하고 啓蒙運動의 重要性을 力說하였다. 1912年 이희 공으로 降等된 아버지 興親王 이 죽자 준(埈)으로 改名한 뒤 공(公)의 地位를 相續받아 '李儁 공'(公)李 되었다.

朝鮮 末期와 大韓帝國 期에 反外勢運動과 反政府運動이 일어날 때마다 이준용은 果斷性이 不足한 高宗 과 病弱한 世子( 純宗 )를 大祭할 수 있는 人物로서 注目을 받았다. 그리고 이준용 自身도 淸日戰爭 中에 高宗을 廢位하고 直接 王位에 오르려는 政治的 野望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1] 이준용은 國家를 다스릴만한 資質과 能力을 兼備한 젊은 人材였기 때문에 흥선大院君 과 여러 政治勢力들은 그를 繼續 신왕으로 擁立하려 하였다. [2] 晩年에는 親日的 性向으로 變節했다. 윤보선 家門의 姻戚으로 윤보선 의 동생 윤원선 은 그의 庶女 이진완 [3] 과 結婚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映宣群 이준용은 1870年 7月 23日 ( 陰曆 6月 25日 ) 漢城府 鍾路房 운니동의 雲峴宮 에서 흥선大院君 의 嫡長子 興親王 이재면 과 풍산 洪氏의 長男으로 태어났다. 者(字)는 京劇(景極)이고 뒤에 成人이 된 뒤 이름을 準用이라 하고 雅號 는 石亭(石庭)과 松亭(松亭)이라는 雅號를 使用했다. 李儁이라는 이름은 1913年 9月 20日 에 改名한 이름이다. 高宗 이명복 은 그의 叔父였고, 완銀群 李在善 은 배다른 叔父였다. 그가 태어날 무렵 할아버지 흥선大院君 은 未成年者였던 叔父 高宗을 代身하여 攝政을 하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지 얼마 안돼 동생 이문용 이 태어났다. 그러나 이문용은 20歲의 나이에 일찍 夭折하고 말았다.

壬午軍亂 以前에 그는 흥선大院君 의 側近인 허욱 (許煜)을 獨先生으로 모시고 글을 배웠다고 한다. [4] [5] 그는 일찍부터 大院君의 食客이자 가인으로 活動했다. 허욱 壬午軍亂 때 兵士 服裝을 하고 大闕로 들어가 明成皇后를 가리켜 주는 役割을 맡았다가 軍亂이 鎭壓된 다음에 죽임을 當하였다. [4]

아버지 興親王 이재면

그는 어려서부터 記憶力이 좋고 총명했으며, 남달리 積極的이고 野心滿滿하였다. 김윤식 이 쓴 信徒悲鳴에 依하면 '이준용은 어려서부터 매우 怜悧하고 行動擧止가 신중하여 大院君이 매우 寵愛하였다'고 記錄해 놓았다. [6] 할아버지 흥선大院君 은 어려서부터 그의 그런 點을 눈여겨보았다. 아버지 이재면 보다도 實質的인 家長이었던 그의 할아버지 흥선大院君 이 特別히 그의 保護者 役割을 自任한 것은 그의 英特함 때문이었다.

少年期의 그는 할아버지인 興宣大院君의 影響을 받으며 成長했다. 破落戶 生活과 背信과 陰謀를 接한 그는 野心이 있었지만 쉽게 다른 사람을 믿지 않았고, 신중하고 생각이 깊은 少年으로 成長하였다. 그는 成年이 되거나 結婚하기도 前이었던 1880年 4月 7日 冠禮를 올려 成人으로 인정받고, 자를 京劇, 號를 石亭이라 지었다. 그해 6月 23日 ( 陰曆 5月 16日 )에 判書를 지낸 홍종석(洪鍾奭)의 長女 南陽洪氏와 婚禮를 올렸다.

高宗의 代案으로 指目되다 [ 編輯 ]

이준용의 保護者였던 흥선大院君 은 1873年 11月 權座에서 물러난 後부터 둘째아들 高宗 과 政治的으로 敵對關係에 놓여 있었다. 以後 大院君은 機會만 오면 언제나 탐탁지 않은 高宗 과 王后를 廢位하고 이준용을 王位로 앉히려 하였다. [4] 이때부터 그는 더욱 發言을 삼가고, 누군가 試驗할 때면 다른 말로 둘러대며 隱忍自重하였다. 배다른 三寸 李在善 이 처형당하고 아버지 興親王 이재면 조차 悠悠한 性格이라 大院君은 以後 이준용에게 큰 期待를 걸게 되었다.

興宣大院君은 그를 王位에 앉히려는 政變을 企圖했으나 번번히 失敗하였다. 이준용을 朝鮮 의 王位에 앉히고 興宣大院君 (自身은) 攝政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흥선大院君 의 깊은 意圖가 담겨 있었다. [4] 이 外에도 高宗政府에 反對하는 國內外 여러 政治勢力들이 高宗이나 順從의 代案者로서 이준용을 注目하였다. [7] 그래서 이준용은 15歲부터 30代 中盤頃까지 끊임없이 反政府 勢力들로부터 高宗과 太子 를 代身할 王才로서 注目을 받았다. [8] 이 때문에 그는 숱한 刺客과 被襲, 爆彈 테러의 威脅과 親高宗, 親民氏系 言官들의 주된 彈劾, 攻擊의 對象이 되었다. 그는 날렵하고 敏捷한 行動으로 테러와 暗殺의 威脅, 刺客을 避할 수 있었다. 初期에 그는 一方的으로 推戴되는 立場이었지만 그는 漸次 自身도 王이 될 수 있다는 뜻을 품게 되었고, 나라고 못할 것은 무엇이냐며 公公然히 不滿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의 총명함과 野心, 欲望은 그대로 所聞이 되어 퍼졌고, 이는 그대로 高宗 王妃 閔氏 의 귀에도 傳해졌다.

官僚 生活 [ 編輯 ]

1880年 代 初 그는 蔭職 으로 敎官 에 除授되었다. 甲申政變 直前 흥선大院君 東學 農民軍 集團과 開化派 集團 兩側의 注目을 받고 있었고, 이들은 各各 目的은 달랐지만 高宗 을 代替할 人物로 이준용을 落點하고 있었다.

1884年 12月 甲申政變 때 이준용은 開化派 에 依해 鄭9品 世子翊衛司 洗馬(洗馬)에 올랐으며, [8] 甲申政變 鎭壓 後 官職에서 물러났으나 그가 主導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責任을 추궁당하지는 않았다. 1885年 8月 童蒙敎官 (童蒙敎官)에 除授되었고, 1886年 忠良科 文科에 及第하여 奎章閣 大橋에 任命되었다. [9] 아버지 興親王 李載冕은 高宗 의 親兄이었는데도 高宗 은 兄에게 4代 以內의 가까운 王族에게 내리는 어떠한 爵位, 惠澤도 附與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 亦是 어떤 作爲도 받지 못했고, 一般 兩班家의 子弟와 같은 文班의 品階를 받게 되었다.

그는 말타기와 활쏘기 等에도 재주를 보였다. 1885年 8月 27日 童蒙敎官, 1886年 3月 29日 高宗이 明나라 崇禎帝 의 忌日을 記念하여 親히 主管한 忠良科 文科에 合格하여 務功郞으로 昇進, 弘文館 精子로 拔擢되었다. 以後 三社의 請要職을 거쳐 1887年 副司勇(副司勇)에 任命되고, 그 해 藝文館 檢閱(檢閱), 世子侍講院 說書(設書)를 지냈으며 6月 武官의 品階인 宣略將軍에 除授되었다가, 6月 11日 情3品 堂下官인 通訓大夫 로 昇進하여 弘文館 副應敎로 拔擢됐다. 그해 여름에 弘文館 副應敎, 電報局 注射(電報局主事)를 거쳐 다시 弘文館 副應敎가 되었다. 한때 할아버지 흥선大院君 高宗 의 첫 아들인 완화군 線이 태어나자, 완화군 에게 큰 期待를 걸었으나, 1880年 警 그가 疑問의 죽음을 當하자 완화군 代身 다시 그에게 期待를 걸게 되었다. 그러한 할아버지 흥선大院君 의 각별한 期待와 政治的 後援으로 因해 高宗 은 그를 警戒하기 始作했다.

君主의 代案子 [ 編輯 ]

할아버지 흥선大院君 , 이준용의 政治的 後見人

1次 推戴 試圖 [ 編輯 ]

推戴 試圖 [ 編輯 ]
朝鮮 의 內政을 干涉하던 最後의 中國人 위안스카이

1886年 淸나라 의 駐車 朝鮮 總理交涉通商辭意로 赴任한 위안스카이 高宗 을 내쫓고 이준용을 王으로 세운 다음, 大院君을 攝政으로 내세우려는 陰謀를 꾸민다. [10]

1886年 高宗과 명성황후 甲申政變 後부터 더욱 심해진 淸나라 의 干涉에서 벗어나기 위해 積極的인 親러 政策을 取하고 있었다. 이때 위안스카이 에 依해 다시금 高宗의 代案字로 考慮되었다. 위안스카이 1885年 10月 步政府 에서 還國한 흥선大院君 과 協議하여 1886年 初부터 高宗을 廢位시키고 이준용을 世子로 삼아 大院君을 攝政에 오르게 하려 하였다. [9] 高宗 러시아 美國 에 기대어 淸나라 를 牽制하려 하자 위안스카이 高宗 을 내쫓고 大院君을 내세우는 것이 淸나라 에 유리하다는 判斷을 했다. [10] 그러나 아들을 내쫓고 아버지를 王으로 세울 수는 없으므로 大院君의 嫡長孫 이준용을 選擇한 것이다. [10]

1886年 韓러密約事件 을 契機로, 淸나라 의 駐車朝鮮總理交涉通商司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任命된 위안스카이 (袁世凱)가 大院君 과 協力하여 高宗 을 廢位시키고 이준용을 朝鮮 國王 으로 擁立하려고 하였으나 [11] , 北洋大臣 李鴻章 (李鴻章)의 制止로 挫折되었다. [11] 그러나 위안스카이 는 隨時로 그에게 사람을 보내 影響力을 行使하려 한다.

그러나 이준용 亦是 王位에 推戴하려는 試圖에 呼應했다. 위안스카이 等의 推戴 計劃이 있자, 그도 이를 위해 그는 王室과 政府로부터 親러, 半 勢力을 一掃하려는 政治的 陰謀를 公公然히 推進하였다. [9] 위안스카이 等의 介入에 한때 그는 鼓舞되었으나 失敗한다. 더구나 명성황후 와 閔氏 戚族들의 腐敗相으로 社會不滿이 澎湃했고, 壬午軍亂 等이 發生하면서 自身도 임금이 되지 말라는 法이 있느냐 하는 意圖를 公公然히 드러냈다.

그러나 그의 發言과 行動들은 곧 高宗 명성황후 系列의 臣下들의 情報網에 捕捉됐고, 그의 쿠테타 祈禱는 失敗한다. 1887年 6月 務功郞 弘文館 說書 兼 競演 春秋館 記事觀이 되었다가 바로 啓功郞 으로 昇進하여 弘文館 亭子 兼 競演 春秋館 記事官, 奎章閣 檢校大橋 知製敎 世子侍講院 說書를 兼職했다. 1887年 藝文館 檢閱, 弘文館 副應敎를 지냈고, 理解 12月 어머니像으로 3年間 喪服을 입었다. [9]

그 期間 中에도 이준용은 東學 農民軍 이나 開化派 人士들과 꾸준히 接觸하고 있었다. 박영효 의 側近이나 유길준 等은 特히 그의 집을 자주 往來했고, 이는 명성황후 側 人士들의 諜報網에 捕捉된다. 以後 弘文館 藝文館 의 여러 職責을 거쳐 通政大夫 로 昇進, 成均館 大司成, 弘文館 大提學, 承政院 都承旨 에 올랐다. 그러나 그에 對한 高宗 명성황후 側의 監視는 繼續된다.

高宗과의 競爭, 爆殺 威脅 [ 編輯 ]

1889年 脫喪 後, 그해 2月 다시 通訓大夫 弘文館 副應敎로 復職했다. 10月에는 折衝將軍에 任命되었다가 다시 通政大夫로 變更 任命되었다. 1890年 9月 司僕寺 情을 거쳐 承政院 同副承旨 로 拔擢, 以後 刑曹 參議 , 成均館 大司成 (大司成) 等을 거쳐 1891年부터 1896年 6月 까지 弘文館 副提學 , 奎章閣 直提學 , 承政院 都承旨 , 1892年 李朝 參議 等의 要職을 맡았으며 [12] 周邊의 이준용 推戴 勢力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와 同時에 이준용은 劍客과 爆殺 等의 刺客들의 暗殺 威脅에 隨時로 시달리게 되었다.

1890年 代 以後 叔父인 高宗 의 政治的 競爭者로 浮上하였고, 興宣大院君의 寵愛를 받아 1894年 쿠데타 陰謀 事件에 連累되었다. 刺客을 보내 김학우 를 暗殺한 嫌疑로 喬桐島에 流配되었다가 2個月 만에 特典으로 釋放되어 할아버지 大院君과 함께 麻浦 공덕리 의 別莊인 아소정 에 起居하였다. 1895年 10月(陰曆 8月) 乙未事變 當時에 흥선大院君 의 入闕을 相議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13] 以後 이준용은 명성황후 의 側近 및 閔氏 系列 一族으로부터 暗殺 威脅에 시달린다.

1892年 봄 雲峴宮에서 火藥이 터지고 여러 建物에 裝置된 火藥이 發覺된 事件이 發生하였다. 漢學者 梅泉 黃玹 명성황후 를 背後로 指目하였다. 그에 依하면 雲峴宮 의 爆彈테러 事件은 명성황후 흥선大院君 一家를 爆殺하기 위해 벌인 것이라고 하였다. [12] 이때 흥선大院君 의 舍廊채와 이재면 과 이준용 富者의 居處에도 爆藥이 裝置되어 있었으나 多幸히 點火되지 않은 狀態에서 發覺되었다. 이는 1874年 흥선大院君 명성황후 의 오라비인 민승호 에게 爆藥을 보내 一家를 暴死시켰던 前例에 對한 政治的 報復劇이었다. [12] 以後에도 이준용은 路上에서 刺客들의 追擊을 받았으나 날렵하게 따돌리기도 했다.

1892年 李朝 參議 奎章閣 直提學, 李朝 參議 , 折衝將軍 行龍驤衛副護軍, 護軍 等을 거쳐 그해 12月 17日 承政院左副承旨 兼 經筵參贊官 奎章閣直提學, 12月 18日 에는 다시 都承旨 奎章閣 直提學으로 改正되었다. 1894年 7月 嘉善大夫로 昇進하고 競演冬至使에 任命되었다. 그 해 宗正卿 兼 禮曹參判이 되었다가 同知義禁府事를 거쳐 다시 李朝 參判 (吏曹?判)으로 任命되었다.

1894年 8月 17日 否認 南陽洪氏가 死亡했다. 곧바로 그의 再婚 夫人이 揀擇, 落點되어 12月 25日 에 김재정(金在鼎)의 딸과 再婚하였다. 夫人像으로 辭職한 그는 1894年 8月 27日 護衛部長이라는 職銜을 받았다.

명성황후 廢位 祈禱와 失敗 [ 編輯 ]

甲午更張 初頭에 흥선大院君 과 이준용은 高宗 廢位의 前哨作業으로서 명성황후 肺서 作業에 着手하였다. 1894年 6月 22日 부터 흥선大院君 명성황후 肺書의 趣旨를 적은 文件을 日本 公使 오토里에게 提示하였다. [14] 그러나 日本 側에서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日本 이 쉽게 움직이지 않자, 그는 사람을 보내 日本 公使館 側과 交涉하며 그들의 支持를 求하기도 했다. 그러나 日本 公使館은 그의 密使가 訪問했는데도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준용도 6月 22日 부터 24日 까지 日本 公社 오토里 工事를 說得하기 위해 日本 公使館을 두 次例 訪問하였다. 그러나 스기무라 書記官 日本 公使館 職員들의 强力한 反對로 흥선大院君 과 이준용의 意圖는 失敗하였다. [14] 흥선大院君 6月 24日 이준용을 별入直에 임명하여 高宗 명성황후 에 對한 監視를 한層 强化하였다. [15] 7月 初 高宗은 甲午更張 을 斷行한다. 이때에도 이준용은 꾸준히 日本 公使館을 訪問하여 명성황후 廢黜의 正當性을 力說하며 協助해줄 것을 付託했다. 7月 12日 禮曹 參判 (禮曺參判)에 任命됐다. 甲午更張을 전후해서 大院君과 이준용은 명성황후 를 攻擊, 廢庶人하려는 陰謀를 꾸몄으나 日本 領事館에서 呼應하지 않아 水泡로 돌아가고 만다.

할아버지 흥선大院君

7月 15日 그는 宗正卿 , 親舊 統衛使 政府 堂上 , 內務衙門 協辦 에 任命되었다. [15] 大院君은 高宗 명성황후 를 監視하는 役割을 큰아들 이재면 에게 맡기도, 孫子 이준용을 宗正卿 , 親軍衛統衛使 兼 政府 堂上, 內務衙門 協辦 으로 임명한 것이다. [16] 이 中 宗正卿은 宗親 의 指導者라는 象徵的인 官職이었고, 統衛使 는 首都의 가장 强力한 軍營 中의 하나인 統衛營 을 다스리는 總責任者였으며 [15] , 內務衙門 協辦 內務部 의 次官으로 全國 地方官을 다스리는 權限과 漢城府 一帶의 警察權 에 對한 統帥權을 지닌 자리였다. [15] 이어 7月 17日 軍國機務處 가 이준용을 軍國機務處 議員 에 差下할 것 [15] 을 高宗에게 建議하였다. [17] 이 무렵 內務大臣 이 자주 交替되었으므로 內務大臣 臨時 署理가 되어 그는 事實上 內務大臣(長官級)의 役割까지 代身 遂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준용의 權限 擴大를 憂慮하고 있던 高宗 은 斷乎한 態度로 允許하지 않았다. [17] 바로 그는 日本 駐車 全權公使(日本駐箚全權公使)에 任命되었으나 拒否하고 赴任하지 않았다. 이에 大院君은 7月 19日 에 이준용을 내무대신서리 에 임명하여 內政을 完全히 掌握하게 하였다. 이 무렵 내무대신이 자주 交替되었으므로 그는 內務大臣(長官級)의 役割까지 代身 遂行하게 되었다. [17] [18] 高宗과 閔氏 勢力의 牽制와 監視는 한層 强化되었고, 그는 祕密裏에 東學 農民軍 側에 사람을 보내 情報를 주고 받았다.

2次 推戴 試圖 [ 編輯 ]

쿠테타 祈禱 [ 編輯 ]

1894年 7月 17日 軍國機務處 가 이준용을 軍國機務處 議員에 임명할 것을 高宗에게 建議하였지만 이준용의 權力擴大를 憂慮하고 있던 高宗 은 斷乎히 拒絶하였다. 이에 大院君은 7月 19日 그를 내무대신署理에 임명하여 內政을 掌握하게 했다. [19]

大院君派가 農民軍을 上京시키고, 淸國軍을 끌어들여 日本 君을 擊退하고 開化派를 除去하여 政權을 掌握하려는 計劃은 當初 이준용, 이태용, 박준양의 時局對處 論議 속에서 그 輪廓이 짜여졌다. [20] [21] 當時 박준양은 이준용에게 官職을 쉬고 外國으로 나가 10年 동안 見聞을 넓혀 名望을 얻은 以後에 돌아올 것을 勸하였다. 그 동안 高宗은 老衰하게 되고 王世子(純宗)도 그다지 큰 德이 없으니 그때에 外國 名望과 國內의 關心은 自然히 이준용에게 쏠릴 것이고, 그러면 그다지 努力하지 않고도 權力을 쥘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20] 그러나 이태용은 큰일을 圖謀할 境遇에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의 期待가 모두 大院君을 向하고 있고, 더욱이 東學軍이 大院君을 받들겠다는 主張을 펴면서 蜂起하고 있는 只今, 그들로 하여금 數十萬 大衆을 動員하여 올라오게 한다면 眞實로 사람들의 무리가 하늘을 이긴다고 하듯이 日本軍隊가 비록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이태용은 이준용에게 한便으로 日本軍을 挽留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다른 한便으로 밤을 재촉하여 群衆을 올라오게 한다면 손바닥을 뒤집듯이 일이 쉬워질 것이라고 提案하였다. [20]

두 사람의 提案을 이준용은 大院君에게 알렸고, 大院君은 이태용의 안을 支持하여 박동진과 박세강에게 數十萬 大衆을 糾合하여 速히 올라오게 하였다. [20] 이준용 亦是 사람을 糾合하고 物資를 動員하였다. 한便 그는 閔氏 政權의 開花 政策에 不滿을 품은 李杭魯 , 최익현 系列의 人士들에게도 꾸준히 사람을 보내 協助를 要請했고, 攘夷와 妥協하지 않겠다는 條件下에 性理學 者들의 同意를 얻어냈다.

東學農民軍과의 內通 [ 編輯 ]

한便으로 이준용은 東學軍 에 사람을 보내 連結을 試圖했다. 7月 內務部 協辦에서 以後 그는 美國人 法律顧問인 그레이트하우스(Greathouse, C.) 및 르장드르(LeGendre, C. W.)와 接觸하여 反日親衛隊의 編成을 圖謀하는 한便, 大院君의 後援下에 密使를 地方으로 派遣하여 湖南地方의 儒生과 東學農民軍, 그리고 평양부 에 駐屯 中인 淸나라 軍隊에 直接 連絡, 內通하여 도움을 要請했으며 日本 軍을 逐出하고 京城 의 親日內閣을 顚覆하고, 高宗을 逐出하려고 企圖했으나 失敗했다. 8月 侍講院輔德(侍講院輔德)에 任命되다.

이에 따라 大院君과 함께 大院君派의 中心이었던 이준용은 官職을 內務協辦에서 統衛使로 옮겨 兵權을 掌握, 不時의 兵力 使用에 對備하고 多數의 壯丁들을 모아 大闕 內에 隱匿하여 日本軍隊가 北進하여 兵力이 허약해진 틈을 노려 農民軍과도 內外 相應하여 擧事하려고 하였다. 農民軍이 금강에 이르러 그 氣勢가 놀랄만하면 이준용은 이들을 討伐한다는 名分으로 [22] 兵力을 일으켜 漢城을 占領한다는 計劃이었다. 1890年 代 初盤 전봉준 은 한때 雲峴宮 에서 흥선大院君 의 門客 生活을 하였다. [23] 이준용은 이런 因緣으로 전봉준 等과 連結을 試圖하며 東學 農民軍 을 利用할 計劃을 세운다.

東學 農民軍의 指導者 전봉준 . 그는 1890年 한때 흥선大院君 가의 食客이었다.

東學農民軍과 事前에 計劃을 짠 뒤, 이준용이 討伐을 名分으로 部隊를 構成하면 東學農民軍은 빠진다는 計劃이었다. [22] 이준용은 이들을 討伐한다는 名分으로 出陣命令을 얻어, 軍兵과 數百 名의 歷史(力士)를 帶同하고 果川, 水原 사이에 個部하여 오히려 일을 꾸며 合勢 回軍하여 서울로 들어와 사람들이 놀라고 王이 避難할 때를 타서 한便으로는 그 部下인 統衛營 兵隊 [22] 를 動員하려 했다.

大院君과 이준용의 計劃은 "農民軍이 再起하면 그 討伐을 핑계로 軍士를 일으켜서 開花政府를 顚覆하고 政權을 잡으려던 것으로 再起病을 促求하는 密使를 보냈던 것 [24] "이었으며, 또 萬一 日本軍이 東學農民軍을 鎭壓하러 내려가게 되면 卽刻 解散하였다가 그 해 11月,12月 頃에 江이 結氷하기를 기다려 淸國病이 오게 될 形便이 되면 協力하여 日本軍을 擊退하고 政府를 更新하고 새로운 王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이준용이 이끄는 桶衛兵 英대로써 王室을 掌握하고, 다른 한便으로는 下手人들을 指揮하여 김홍집, 曺喜昖, 김가진, 김학우, 안경수, 유길준, 이윤용 等을 죽이고 政府를 顚覆하여 政權을 掌握한 뒤 高宗을 上王으로 推戴하고, 王妃와 太子를 廢하여 이준용을 王位에 올리기로 決定하였다. [22]

이들은 올라온 大衆을 한便으로는 서울 近方에 配置하고, 다른 한便으로는 서울로 들여보내 鍾路에 都會시켜 萬人疏廳을 設置하고 書札을 政府에 投與하여 各國 公館에 照會시킨다는 計劃을 세우기도 하였다. [25] 그러면 한두 사람의 일이 아니고 數十萬 名의 일이고 또 外國에 어떠한 害를 끼치는 [22] 일도 아니기 때문에 外國에서도 아무 말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25] 일이 이루어지면 使臣을 密派하여 淸國軍에게 알려 앞으로의 是非에 對備하게 하고, 萬一 日本軍이 먼저 움직이면 一旦 四方으로 흩어졌다가 94年 10月 中에 淸國軍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힘을 합쳐 挾攻하면 日本軍을 擊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25]

그리고 大院君派의 사람을 中心으로 新政府를 構成하여 박준양을 領議政 에, 이태용과 金某를 各各 左議政, 右議政에 앉히려고 하였으며, 고운정을 忠淸感謝나 嶺南監査에, 그리고 高宗株를 全羅監査에 임명하려고 하였다. [25] 그러나 이러한 이준용과 其他 親大院君派 人士들의 陰謀는 日本 公使館의 諜報網에 捕捉된다.

開化派 暗殺 企圖 [ 編輯 ]

1894年 9月 상순 許曄, 이병휘 等에 依해 大院君과 이준용의 陰謀가 綻露나자, 危機를 느낀 大院君은 開化派인 警務使 이윤용 의 官職을 剝奪하고 이어 開化派 暗殺을 고종주, 김국선 等에게 擔當시켰다. [26] 以後 이준용은 고종주, 김국선 等에게 接近을 試圖한다.

고종주는 1895年 當時 46歲로 顯陵參奉을 歷任했다. 1894年 雲峴宮 에 往來하여 이재면 과는 親하였다. 1894年 10月 初부터 이준용은 고종주가 湖南에 居住하고 있었던 것을 契機로 고종주에게 湖南에 가서 農民軍 [27] 을 불러 올 것을 자주 勸하였다. 이때 이준용은 고종주가 許諾하면 大院君에게 알려 神的(信蹟)을 얻어 農民軍 消耗에 便하게 해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26] [28] 이준용이 東學 農民 運動 의 農民軍과도 內通을 試圖한 情報를 日本 側에서도 入手하게 되었다. 日本 側에서 이준용을 불러 反日 行爲를 했는가 與否를 集中 追窮하였다.

1894年 10月 中旬 以後 日本 側은 흥선大院君 과 이준용이 抗日活動을 展開한 證據들을 가지고 追窮하며 良人에게 公職 辭退를 要求하였다. 當時 朝鮮政府는 高宗이 平壤 의 廳長들에게 보낸 密書를 日本側이 問題삼지 않는다는 條件으로 大院君의 逐出에 同意했다. 이에 흥선大院君 이노우에 가오루 (井上馨) 日本 公使에게 自身이 推進한 抗日運動에 對해 謝過하고 孫子 이준용의 將來 敎育을 付託하였고, 이준용도 自身이 시골 사람들과 부주의한 接觸을 하였다고 하며 東學指導部와 連帶하려던 事實을 婉曲하게 認定하였다. [29] 內務協辦 兼 親軍統衛使(親軍統衛使)·내무대신서리 等으로 任命되어 人事權과 軍事權을 掌握하였으나 軍國機務處의 反撥로 內務協辦職을 辭退하게 되었다.

政變이 失敗로 돌아가자 10月 以後 조용히 지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特派日本報聘大使(特派日本報聘大使)에 任命되었으나 赴任하지 않았다. 그해 10月 26日 이준용은 高宗 에게 統衛使 職을 辭職할 意思를 밝혔고, 11月 21日 受諾되었다. 12月 17日 박영효 가 내무대신이 되면서 內務大臣署理職을 喪失하였다. [30] 그는 宗正卿의 職位와 五衛都摠府 都摠管職을 維持했다.

外延 擴大 試圖 [ 編輯 ]
유길준 . 이준용의 김학우 暗殺事件으로 開化派 一部를 敵으로 돌렸으나, 兪吉濬은 包攝하게 된다.

뒤에 乙未事變 當時 흥선大院君 等과 함께 명성황후 除去에 同調한 유길준 은 이준용의 主導로 大院君派로 包攝되었다. 大院君은 軍國機務處 內에 自己波인 박준양, 이태용, 이원경을 앉히고 이준용을 中心으로 유길준 等을 끌어들여 勢力 擴張에 注力하였다. [31] 이준용은 大院君과 함께 隨時로 日本 公使館에 出入했지만 全的으로 日本을 信賴하지는 않았다. 日本 外에도 그는 美國 , 러시아 , 英國 側의 勢力도 끌어들이려 不斷히 努力했다. 이는 日本 公使館의 本國 報告書에도 드러난다.

요즘의 佇眷爭奪로 大院君 및 그의 孫子인 이준용과 김가진 과 같은 日本 파 사람들과의 사이가 漸次 벌어지고 있어서 日本派 사람들은 한便으로 國王과 王妃에 依支하고 한便으로는 隱密히 우리나라(日本)의 聲援을 믿고 있는 것 같으며, 이준용은 日本派와 겨루기 위해 갑자기 이선득을 끌어들여 러시아 와 英國人 等과 結託하려고 試圖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兩 派閥間의 隔離는 박영효 가 일으킨 刺戟으로 해서 顯著히 그 道를 높여 이준용은 마침내 美國과 英國人을 끌어들여 一團의 친위병을 組織하려는 地境에 이르고 있으며 오직 總理 代身 金宏集 만이 中間에 서서 자못 苦心하고 있지만 微力하여,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駐韓日本公使關 記錄 5>> 40쪽, 1894年 9月 17日 駐韓 日本公使 報告 [31]

不過 1894年 7月 까지만 해도 開化派를 暗殺하려 했던 이준용은 꾸준히 사람을 보내 유길준 等 一部 開化派를 包攝하는데 成功한다. 그밖에 프랑스 淸나라 公使館 側에도 사람을 보내 自身을 支持해 줄 것을 呼訴하였다. 그러나 公使館과 外交使節團의 反應은 冷淡하거나 無關心이었다.

逮捕와 收監 [ 編輯 ]
東學 農民軍 의 沙鉢通文(檄文)

이준용은 꾸준히 사람을 보내 東學 農民軍 과 連結을 試圖했다. 東學 農民軍이 寒性까지 올라오면 自身은 鎭壓한다는 名分下에 擧兵을 하고, 世人의 耳目을 생각해 形式的으로 싸우는 척을 한다. 그 뒤 無能한 王과 腐敗한 代身들을 剔抉한 뒤 東學 農民軍은 自進 解散해서 돌아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計劃은 이준용이 갑자기 逮捕됨으로써 水泡로 돌아간다.

1895年 3月 24日 開化派인 김학우 를 暗殺했다는 嫌疑로 法務衙門에 체포당하였다. [30] 宮中의 명성황후 勢力과 內部大臣 박영효 等과 法部大臣 서광범 等이 서둘러 巡檢 數十 名을 雲峴宮으로 보내어 大院君 夫婦가 보는 앞에서 이준용을 두들겨 패고 捕縛하여 警務廳으로 押送하였다. [32]

김학우 暗殺 事件이 터지자 朴泳孝의 執事 出身 이규완(李圭完)李 逮捕와 搜査를 맡았다. [33] 흥선大院君 東學軍 이 손잡고 閔氏 政權 打倒를 計劃하자 그는 이준용을 直接 逮捕하기도 했다. 1895年 3月 23日 警務官 이규완이 指揮하는 30餘 名의 巡檢은 遲滯없이 大院君의 私邸인 雲峴宮 을 덮쳤다. 大院君은 이규완의 말을 듣고 震怒하였다.

이런 못된 것이 다 있나.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宮內府 宗正卿 이 무엇이 답답하여 逆謀를 꾀한다더냐. 너희는 宗正卿이 住商과 叔姪間임을 丁寧 모르느냐? 當場 물러가렸다. [34]

이규완은 물러서지 않고, 흥선大院君 에게 김학우 를 暗殺하고 改革黨을 一網打盡하려 한 者가 이준용이라고 대들었다. 이규완은 大院君 夫婦가 보는 앞에서 이준용을 두들겨 패면서 捕縛했다. [35]

侍生은 御命을 施行하고 있사옵니다. [34]
네 이놈, 뉘 앞에서 그따위 터무늬없는 말을 입에 담느냐. 當場 물러가지 못할까! [34]

그는 卽時 '大逆不道의 罪人이니라, 當場 끌어내어 捕縛하렸다. [34] '라고 命하였다. 大院君의 激怒도 王命 앞에서는 無力할 수밖에 없었다. [34] 警務官 이규완의 一喝이 있자 巡檢 들은 遲滯없이 이준용을 끌어내어 捕縛했다. [34] 宮內府 代身 이재면 은 끌려가는 아들의 뒷모습 을 茫然自失 바라봤다.

警務廳에 와서도 이준용은 갖은 拷問과 暴行을 當하였다. [32] 이를 機會삼아 명성황후 는 이준용을 除去하려 한다.

監獄에 收監된 뒤에도 그는 甚한 毆打와 拷問을 當했다. 박영효 서광범 等은 이준용 逆謀事件을 利用하여 大院君派를 一掃하려는 意圖에서 이준용과 그 黨與들을 死刑에 處하려 하였다. [30] 또한 閔氏 勢力에서는 이 事件을 契機로 拷問, 刑問을 假裝해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타고난 體力 德에 그는 끝까지 버티며 嫌疑를 否認하였다. 그러나 그를 김학우 暗殺 事件의 背後라 端正한 一部 開化勢力은 大院君을 죽일 수는 없었으므로 이준용을 死刑시키려 하였다.

收監과 拷問 [ 編輯 ]

박영효

黃玹 매천야록 에서 審問官들 中의 한사람인 박영효 명성황후 의 使嗾를 받고 그를 죽이려 했다고 記錄했다. 黃玹 에 依하면 ' 박영효 는 仲弓( 명성황후 )의 校誌를 받아 이준용을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拷問을 加하여 監獄을 옮기고, 大院君을 反逆罪로 다스리려고 하므로 部隊夫人( 여흥부大夫人 閔氏 )은 雲峴宮 으로 들어가 自決하려고 하였다. 이때 박영효 等은 事態가 尋常치 않게 돌아가자 사람들의 輿論이 두려워 不得已 (이준용의) 刑量을 減해 주었다.'는 것이다.

다른 審問官人 서광범 亦是 그에게 拷問을 加하였다. 黃玹 에 依하면 '이준용이 國文을 받을 때, 서광범 도 그를 審問하였는데, 그에게 온갖 慘酷스러운 拷問을 加하여 발가락과 손가락이 (몸에서) 모두 떨어져 나갔다. 이때 이준용은 高喊을 지르며 말하기를, "나를 빨리 죽여 주시오. 더 以上 할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光景을 본 獄卒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고, 이 所聞을 들은 사람들도 팔뚝을 걷어붙였다.'라고 한다. 박영효 , 서광범 等은 그에게 拷問을 加하며 東學 農民軍 을 背後에서 操縱한 것을 集中 追窮하였다. 그러나 刑問을 當하면서도 그는 東學 과의 連繫 疑惑을 끝까지 否認하거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義禁府 에 投獄된 뒤 20餘日 間 酷毒한 審問을 當하고 開化派 서광범 이 主宰하는 特別法院에서 裁判을 받았다. 그러나 裁判廷에 선 이준용은 끝까지 嫌疑를 認定하지 않았다. 그 結果 이준용 等 6人이 帶域謀反罪, 김학우 殺人罪, 謀殺罪 等의 罪目으로 逮捕되어 死刑 絞殺型을 宣告받았다. 이준용은 이에 不服했고, 孫子의 死刑 判決 消息을 接한 흥선大院君 은 이준용 救命 運動을 한다. 박영효 , 서광범 等의 拷問 過程에서의 虐待와 惡刑으로 同情 輿論이 造成된데다가 興宣大院君은 執權前 閭巷人들과의 親分이 있는 點을 活用, 天下長安과 閭巷人들을 通해 市場에 사람을 보내 이준용이 抑鬱하게 投獄되었음을 알리게 하였다. 이 무렵에도 이준용은 사람을 시켜 유길준 等과도 交涉을 試圖하였다.

1895年 4月 19日 서광범 이 主審이고, 李在汀 (李在正)과 조신희(趙臣熙)를 陪席判事, 檢事 안녕수(安寧洙), 김기룡(金基龍)의 立會下 열린 公開特別裁判에서 이준용은 2等級 降等되고, 終身流配刑을 받았다. 그러나 判決 直後 高宗 이 特命을 내려 이준용의 兄을 流配刑 10年으로 다시 낮추었다.

刑執行 減刑과 流配 [ 編輯 ]

이준용의 無罪를 確信하고 있었던 大院君은 雲峴宮 에서 나와 民家에서 籠城을 벌이며 民心의 呼應을 얻으려고 하였다. [32] 日本人들이 刊行하던 '漢城신보'에는 이준용 事件을 警務廳 發表대로 報道하면서 政府의 强勁措置를 擁護하는 글을 실었다. [32] 흥선大院君 은 어떤 代價를 주고서라도 孫子를 求하기 爲해 이노우에 가오루 公使와 各國 公使들을 찾아가 切迫한 付託을 하였고 [30] , 大院君의 付託을 받은 이노우에와 各國 公使들은 이준용에 對한 溫乾한 處罰을 呼訴하였다. [30] 唐慌한 外交使節團이 自身의 安全保障을 위하여 이노우에 日本 公使에게 壓力을 加하여 이준용을 釋放 [32] 케 하라고 하였다. 이준용에 對해서는 內務大臣 박영효 와 법무대신 서광범 이 極刑說을 主張하였지만 減刑설이 通過되어, 死刑에서 兄이 減量된다.

1895年 4月 19日 特別法院에서 終身流刑을 宣告받았 [25] 다. 이 期間 中 이준용은 裁判과 拷問에 시달림당했다. 흥선大院君 은 繼續 孫子인 그의 釋放을 위해 交涉했으나 失敗하고 만다.

特別法院에서 審理를 받은 이준용은 4月 19日 다음과 같은 罪名을 宣告받았다. '卽 東學徒를 利用하여 國王과 王太子를 죽이고 開化派 閣僚들을 殺害하고 現 政府를 전복시켜 王位를 簒奪하고자 한 이준용, 박준양, 이태용 等은 逆도율謀反罪 이고, 김학우 暗殺計劃과 實行에 加擔한 고종주, 전동석 等은 人命율謀殺罪에 各各 該當하나 김학우 暗殺에 있어서는 이준용의 直接的인 關聯 證據는 없다고 判決했다. [36]

政府 內에서도 이준용 事件을 두고 意見 對立들이 있고 하여 [32] 結局 그는 死刑을 면하고 流配 10年型으로 決定되었다. 4月 19日 高宗 의 特別 赦免措置로 江華府 喬桐島 에 10年 流配刑을 받았다가, 6月 2日 釋放되었다. [30] 그러나 다시 投獄되었고 1895年 6月 12日 다시 特別赦免되었다. 9月 1日 中樞院 1等衣冠 勅任官 3等에 任命되었으나 3日만인 9月 4日 辭退하였다.

乙未 事變 前後 [ 編輯 ]

乙未事變 當時 浸透한 日本人 浪人들

1895年 10月 8日 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 가 弑害된 뒤 日本의 도움으로 [13] 釋放되었다. 釋放 直後 할아버지 흥선大院君 은 사람을 보내 失敗에 對備해, 孫子인 이준용에게 명성황후 除去의 失敗를 對備해 日本으로 도망가 있으라고 했다. 그러나 이준용은 日本으로 亡命하지 않고 江華郡 喬桐島에 머무르다가 漢城府 로 갔다.

釋放과 同時에 그는 漢城으로 돌아와 김홍집 內閣에 拔擢되어 內部 協辦 , 統衛使에 登用되었다. 日本 公使의 强要로 日本으로 留學하고, 駐車(駐箚) 日本 工事가 되었다. [13] 이때까지는 極烈한 排日主義者였으나 뒤에 親日派로 變節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37]

10月 22日 明成皇后 葬禮式의 指紋書寫官(誌文書寫官)에 任命됐고, 11月 1日 宮內府 特進官 勅任官 이 되었다. 그러나 11月 12日 政府의 名으로 領選使 腸(營繕司長) 박용화 (朴鏞和)·注射(主事) 어윤적(魚允迪)과 함께 日本 으로 出國했다. 12月 도쿄 에 到着, 以後 도쿄의 日本公使館에서 별다른 活動 없이 駐日本 大韓帝國 工事로만 活動하였다. 그러나 高宗 等은 그 亦是 乙未事變 에 관여된 것으로 看做했다.

政治的 沒落 [ 編輯 ]

大韓帝國 樹立 以後 [ 編輯 ]

遊覽과 日本 亡命 [ 編輯 ]

1897年 8月 日本 도쿄를 떠나 배便으로 英國 런던 에 到着했다. 以後 유럽 遊覽길에 올라 英國과 프랑스 兩國의 文物을 視察한 뒤 유럽 各地를 遊覽하고 1899年 1月 다시 돌아와 日本 지바縣 (千葉縣) 기타兆 情(北條町)에서 閑居하였으며, 1898年 안경수 의 쿠데타 事件에 連累되어 亡命 狀態로 歸國하지 못하다가 1907年 高宗 이 日帝에 依해 强制로 揚輝하고 純宗 이 卽位하자 돌아왔다.

명성황후 도 죽었으므로 이준용은 早期에 歸國하려 하였으나, 高宗 等의 反對로 失敗했다. 1898年 1月 8日 할머니 여흥부大夫人 의 死亡을 契機로 歸國하려 했지만, 더 새로운 文物을 보고 오라는 理由로 大韓帝國 調整이 拒絶, 歸國에 失敗했다. 아버지 興親王 은 그에게 사람을 보내 野心을 斷念하고 조용히 지낼 것을 慫慂하기도 했다. 또한 그의 政治的 後見人이었던 할아버지 흥선大院君 도 이미 죽고 없었다.

日本으로 亡命한 그는 日本 으로 들어온 西歐의 文物을 見學, 見習하였다. 그러나 그는 醫學과 解剖學, 自動車 等의 導入의 必要性은 認識했지만 基督敎 思想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朝鮮 朝廷에서는 이준용을 除去할 刺客들을 派遣하였다. 이준용은 日本으로 派遣되는 朝鮮人 刺客들을 避해 隨時로 居處를 바꾸어가며 隱身하였으며 日本 政府 側에 政治亡命客 申請과 身邊保護를 要請했고, 日本 은 이를 받아들였다.

嚴尙宮의 貴妃, 王妃 冊封 反對運動 [ 編輯 ]
순헌황귀비 嚴氏

日本 亡命 直後부터 貴人 嚴氏 의 빈 冊封을 反對하고 나섰다. 이어 高宗 명성황후 의 빈자리를 代替할 人物로 嚴尙宮 을 擇하고 그女를 皇后로 格上시키려 試圖한다. 그러나 이를 接한 이준용은 亡命 韓人들에게 이를 알리며 反對 運動을 準備한다.

1899年 4月 이준용은 日本 亡命客들이 벌인 嚴尙宮의 王妃 冊封에 對한 反對 運動에 加擔하였다. [38] 그는 유길준 , 권동진 , 조중응 및 其他 2~3人과 함께 論議한 結果 身分이 낮은 嚴尙宮 을 王后로 삼는 것은 國家를 위태롭게 하는 措置라는 理由를 들어 嚴尙宮 의 王后 冊封을 反對할 것을 決意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意思를 담아 宮內府 代身 이재순 에게 忠告書를 보내기로 하였다. [38] 이준용은 嚴尙宮의 出身 成分이 寒微하다는 理由로, 王室의 威信에 關聯된 問題라며 嚴尙宮의 皇后 冊封을 反對하였다.

또한 이준용은 아버지 興親王 에게 書翰을 보내 嚴尙宮 같은 微賤한 小生이 國王의 寵愛를 얻은 것을 奇貨로 奸臣輩들이 벼슬을 얻기 위해 嚴尙宮 을 王妃로 冊封하려 祈禱하고 있으니, 이러한 때에 王室에 관계된 이들은 反對意思를 分明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준용이 嚴尙宮 의 王妃 冊封 反對運動을 積極的으로 벌인 것은 [38] 嚴尙宮 이 自身의 아들 皇子 이은 의 權力 承繼를 위해 日本 에 亡命中인 이준용과 李堈 等을 極力 排斥하였기 때문이다. [39] 그러나 이런 處地에서 이준용의 嚴尙宮 王妃 冊封 反對運動은 도리어 그의 身邊에 威脅 要因으로 作用할 수밖에 없었다. [39]

嚴尙宮과 그의 側近들은 高宗 에게 이준용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告했고, 명성황후 의 暗殺에 이준용이 介入되었다고 確信하던 高宗은 이준용 除去를 決心한다. 그러나 日本政府에서는 政治 亡命客이라는 理由로 이준용을 積極的으로 擁護하였고 高宗은 密旨를 내려 刺客들을 日本 도쿄로 派遣했지만 失敗한다. 이준용 亦是 洋돼지라는 別名과 달리 巨軀에 比較해서 相當히 敏捷하게 움직였고 武藝 實力까지 갖추고 있었으므로 刺客을 따돌리고 숨는데 成功했고, 高宗 의 이준용 除去 計劃은 번번히 水泡로 돌아갔다.

3次 推戴 쿠테타 試圖와 挫折 [ 編輯 ]

그러나 國內에서는 이준용을 擁立할 쿠테타 가 다시 企圖되고 있었고, 1899年 에는 이준용 推戴 關聯 逆謀가 3件이 摘發되었다.

이준용이 日本 에서 다시 活動을 開始할 때 쯤에 벌어진 장윤상 發言 事件과 御用船 事件은 高宗 政府를 刺戟하기 充分했다. [39] 參奉 장윤상 이 自身이 日本 에서 이준용을 모셨다고 하면서 1899年 1月 이준용이 歸國하면 高宗 代身 國王이 되거나 大統領 에 오를 것이라고 말하였다. [39] 이는 訛傳되어 " 박영효 가 反逆하여 이준용을 推戴하고 高宗을 太上皇으로 만드르 것이라"는 所聞으로 번져나갔다. 이에 1899年 4月 12日 所聞의 발原子人 장윤상 은 絞殺型에 處해졌고, 그 事實을 알고도 告發하지 않은 理由로 遊學 신현표 와 全 巡檢 이지현 은 태 1百 臺에 終身刑을 宣告받았다. [39]

또한 3月 御用船 等이 日本 에서 그를 모셔다가 現 政府를 顚覆하고 民主國體 를 模倣해 大統領制 를 實施하려 한다는 嫌疑로 逮捕되었다. [39] [40]

反政府 人士들이 이준용을 大統領으로 推戴하려 한다는 所聞이나 움직임은 高宗에게 相當한 衝擊을 안겨주었다. 장윤상 事件과 御用船 事件이 處理된 直後인 1899年 6月 高宗을 廢位하고 이준용의 擁立을 企圖했다는 告發에 따라 윤태영 等 3人이 逮捕되었는데. [39] [41] , 이는 高宗 政府가 이준용 推戴謀議에 알레르기反應을 보이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1900年 다시 안경수 의 逆謀 事件에 連累되었다. 1900年 안경수 , 권형진 을 處刑 直前 良人을 審問하는 過程에서 1894年 7月 에 이준용이 明成皇后와 世子宮을 處斷하려 하였고, 이러한 逆謀 事件은 結局 乙未事變 으로 이어졌다는 陳述이 나왔다. [42] 이에 高宗 政府의 高官들人 김성근 , 신기선 , 조병식 , 윤용선 , 민종묵 等과 쟂야의 儒生들은 1900年 6月부터 逆謀를 恣行한 이준용을 日本 에서 불러다가 處刑하자는 上訴를 되풀이하여 올렸다. [43] 6月 3日 宮內府 協辦 兼 大臣署理 윤정구 (尹定求)의 彈劾이 있자, 高宗 은 勅令을 내려 이준용의 宮內府 特進官職을 剝奪했다.

그러나 高宗 은 그때마다 允許하지 않았다. 그러자 平理院 學部 에서 外部에 照會하여 1900年 6月 19日 에 週 日本 工事 이하영 에게 이준용을 卽刻 잡아서 돌아오게 하라고 하였다. [43] 그러나 이준용은 歸國을 拒絶했다. 6月 20日 이하영 은 "이준용이 꼼짝하지 않고 듣지 않으니 잡아서 돌려보낼 길이 없습니다"라고 報告하였다. [43] [44] [45]

乙巳條約과 歸國 [ 編輯 ]

1901年 동생 이문용 의 死亡 消息을 接했지만 그는 동생의 殯所를 訪問할 수 없었다. 政府에서 自身을 잡아다 死刑 할 것을 認知한 이준용은 長時間 隱身하였다. 1901年 (光武 4年) 6月 3日 特進官職에서 解任되었다. 結局 그는 高宗이 一齊 에 依해 强制 退位당한 뒤에야 歸國할 수 있었다. 이준용은 그대로 日本에 書信을 보내 亡命 申請을 냈다.

이준용의 日本 生活에 對해 그의 信徒碑文을 後日 執筆한 김윤식 은 이준용이 政治問題에 關與치 않는 超然한 姿勢를 보였다고 하였다. 當時 韓國人 亡命 國事犯들은 도쿄 에 모여 大韓帝國 의 政治 問題를 가지고 밤낮으로 論難을 벌이며 悲憤慷慨하고 恨歎을 禁치 못하였으나, 이준용만은 "門을 닫아걸고 訪問客을 謝絶하고 朝廷의 得失을 말하지 않았으며, 오직 흥선大院君 夫婦의 床에 달려가 哭하지 못함을 終身의 恨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46]

1904年 3月 이토 히로부미 가 日本 政府 特使로 朝鮮에 派遣되었다. 그는 이토의 訪問으로 自身의 歸國이 成事되리라 期待했으나 오히려 高宗은 그를 죽이기 위해 送還해줄 것을 이토에게 請하였다. 高宗 日本 特使 이토 히로부미 1904年 3月 來韓하자 亡命者 中 要人을 海外로 追放하거나 邊方에 誘致시킬 것을 提議하여 同意를 얻어냈다. [47] 高宗이 指名한 要因은 이준용, 박영효, 이규완, 유길준, 曺喜昖, 醬粕, 이범래, 이진호, 조희문, 구연수, 이두황, 신응희, 권동진, 정난교 等 14名이었다. 그러나 日本은 高宗에게 約束한 亡命者 處分을 履行하지 않았다. [47]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自身이 王 또는 皇帝位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 希望하고 있었다. 그러나 1905年 乙巳 保護 條約 이 締結되면서 그는 挫折하게 된다.

乙巳條約 으로 韓國 을 實質的인 植民地로 編入한 日本 의 外務大臣은 1906年 2月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痛感에게 在日 韓國人 亡命者들의 問題를 韓國政府와 協議하도록 하였다. [48] 그러나 高宗은 李堈을 비롯한 15名의 [49] 歸國은 許諾하면서도 反逆陰謀와 乙未事變 에 連累된 이준용, 박영효 等 14人의 歸國은 決斷코 許諾하지 않았다. [50] 이에 이토 痛感은 박영효 를 于先 歸國시키고 나머지 亡命客들을 도한시키기 위해 努力하였다. [51]

1905年 乙巳 保護 條約 이 締結되려 하자 그는 國內에 있는 유길준 박영효 等에게 乙巳條約만은 안 된다는 內容의 便紙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便紙는 이들에게 傳達되지 않았다. 乙巳 條約 이 締結되자 그는 挫折하였고 以後 日本 帝國 의 눈치를 보면서 適當히 協力해야 하는 處地가 되었다. 大韓帝國 이 成立된 지 10年이 넘도록 이준용과 그의 아버지 이재면 은 어떠한 作爲와 禮遇를 받지 못했는데 이는 그들에 對한 高宗 의 미움이 端的으로 드러났던 것이고, 이재면 이나 이준용도 그렇게 解釋하였다.

1907年 6月 에 이준용은 朝鮮 痛感 이토 히로부미 에게 累次 專門과 書翰을 보내 歸國을 도와달라고 要請함과 同時에 日本 政府의 實力者들에게도 自身의 早速한 歸國 實現을 힘써 달라고 懇請하였다. [50] 萬若 그것이 實現되지 않으면 박영효 의 境遇처럼 任意대로 歸國하겠다고 宣言하였다. [52]

1907年 7月 20日 또는 7月 22日 高宗이 退位하자 그는 바로 歸國했다. 그러나 高宗은 日本 政府 側에 이준용의 歸國으로 政局混亂을 부추길 憂慮가 있다며 이준용의 歸國을 反對한다는 意思를 打電했으나 무시당하였다.

歸國 直前 [ 編輯 ]
招待 朝鮮 痛感 이토 히로부미
(그의 歸國을 周旋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痛感의 거듭된 要請에도 不拘하고 高宗 은 이준용의 歸國을 强力히 反對하였다. [50] 그 理由는 사람들을 煽動하고 惑世誣民하며 社會 混亂을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토 痛感은 이준용에게 一旦 釜山 에 當到해 있으면 自身이 박영효 의 境遇처럼 힘써 보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토는 內閣 會議 를 통해 안경수 , 권형진 의 의옥사건에 對한 이준용 連累件이 無罪임을 決定하였다. [53]

이로써 이준용은 私服 日本人 京釜 1人과 巡檢 2人의 保護下에 7月 14日 釜山港 에 到着하였다. [50] 이는 正式 歸國이 아닌 密入國이었다.

純宗 卽位 前날인 1907年 7月 19日 京城府 에 到着한 이준용은 身邊 安全을 위해 鄭雲復 과 함께 진고개 日本人 旅館 에서 1泊한 後에 雲峴宮 으로 되돌아갔다. [54] [55] 이로써 他意로 韓國을 떠났던 이준용은 12年 7個月間의 海外 亡命生活을 마감하고 韓國 生活에 들어갔다. [50] 그러나 亡命과 避身, 隱身 等으로 그는 診療時期를 놓쳐 病院에 가지 못했다. 제때 診療받지 못하여 腎臟病 心臟病 이 隨時로 그를 괴롭혔고 結局 이는 그의 죽음의 原因이 되기도 한다.

歸國과 作爲 授與 [ 編輯 ]

映宣群 烽軍 敎旨 ( 1907年 9月 12日 )

그러나 開化派 가 高宗 內閣을 顚覆하고 大統領 或은 副統領 으로 推戴할 人物의 物望에 그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는 것 亦是 親民氏系 人士들이 그를 攻擊하는 口實을 마련했고 이는 高宗 이 늘 그를 警戒하게 했다. 退位한 後에도 順從의 病弱함을 念頭에 두던 高宗은 退位 以後에도 그를 甚하게 警戒하고 사람을 붙여 監視하였다.

이준용은 1907年 歸國 後 大院君 의 祠堂을 拜謁할 때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슬퍼하는 氣色도 없어서 周邊으로부터 무루孔子(武淚公子)라는 嘲笑를 받았다 [56] 쿠데타 失敗와 暗殺 威脅, 亡命 等으로 고단한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기에 그는 家族이나 親戚들에 對해 怨望과 不滿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不滿을 털어놓을 때마다 그는 異常한 사람 取扱을 받기 일쑤였고, 나중에는 家族, 親戚에 對해 相當히 冷淡한 態度를 取하게 된다.

1907年 7月 27日 김옥균 에게 충달공 의 諡號가 내려졌다. 이날 김옥균 시호 追贈 記念式에 參席한 來賓 [57] 의 한사람으로 김옥균 鳶試演 式場에 參席했다. 김옥균 의 復權과 시호 記念式에 一時的으로 參席한 뒤 그는 永久 歸國하게 된다. 그러나 退位한 뒤에도 高宗은 그를 疑心, 警戒했고, 潛在的 王位繼承權者로서의 地位를 剝奪하려 努力했다. 8月 13日 純宗 의 特命으로 罪名이 削除되었다.

1907年 8月 14日 從一品 崇政大夫 (崇政大夫)의 資稟을 받고 大韓帝國 陸軍 參將 (參將)李 되었으며, 9月 12日 映宣群(永宣君)의 爵位를 받았다. 11月 大韓帝國 陸軍 部長 (副將)과 日本 派遣 特別 報聘社 切斷에 任命된 아버지 興親王 을 遂行하여 報聘大使隨行員의 職責으로 日本 에 다녀왔다. 純宗 은 그를 復權시켰지만, 內心 그를 警戒하였다.

1907年 8月 17日 太皇帝 高宗 은 後嗣가 없는 純宗 의 皇太子로 英親王 이은 을 決定하였다. [54] [58] 이는 自身의 王位를 繼續 威脅했던 이준용과 [50] 의화군 을 牽制하려는 高宗의 意圖와 이준용波와 이강파가 得勢하면 自身의 實權이 蠶食될 것을 憂慮한 이완용 의 政略이 맞아떨어진 結果였다. [59] 이로써 長期間 海外 亡命生活 中에 끊임없이 潛在的 王位繼承者로서 待遇와 注目과 牽制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李堈 은 猝地에 純宗 의 동생이자 皇太子 의 叔父라는 地位로 格下되었다. [59]

그해 12月 에 李花 臺數長(李花大綏章) 1908年 9月 徐渻 臺數長(瑞星大綬章)을 次例로 授與 받았다. 1908年 延興社의 建立에 同參한다. 延興社는 1908年頃 折骨(寺洞)에 開場된 劇子으로 映宣群 이준용과 中樞院 顧問 이지용이 함께 建立한 것 [60] 이다. 1908年 醫兩軍 이재각 (義陽君 李載覺)李 總裁로 있는 上空勤務社 (商工勤務社)의 總顧問에 選出되었다. 1909年 12月 中區 全東(典洞) 等地에서 유길준 을 代表로 하는 常務組合(商務組合)의 拷問이 되었다.

敎育, 啓蒙 活動 [ 編輯 ]

多方面의 冊을 多讀했고, 開化派들에 依해 入手된 西洋의 書籍들을 읽고 獨逸 프리드리히 大王 이나 프랑스 루이 14歲 , 이탈리아 의 統一과 가리발디 , 프랑스 大革命 等의 存在를 接하게 된 이준용은 敎育의 重要性을 力說하기 始作했다. 西歐 文明의 威力을 認識한 그는 朝鮮도 日本과 같이 西歐의 文物을 積極的으로 받아들이고 생각의 틀을 바꿔나간다면 西洋 列强과 같은 富國强兵을 達成할 수 있다고 展望했다.

1908年 그는 政府 高官들이 多數 參與한 大同學會나 嗜好興學會에 加擔하여 活動하였다. 大同學會에는 創立모임에 會員으로만 參與하였으나, 嗜好興學會에는 多少 熱誠的으로 加擔하였다. [61] 그는 嗜好興學會의 氣管支의 創刊號에 민영휘 , 김윤식 , 김가진 , 신기선 等 大官들과 함께 畜舍를 실었다. 또 記號興學會 會員으로서 1908年 10月 아버지와 함께 每年間 每月 50원을 嗜好興學會에 補助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補助 活動은 1909年 1月부터 嗜好興學會月報의 發行이 中斷된 1909年 7月 까지 繼續되었다. 나아가 이준용은 嗜好興學會月報에 敎育의 重要性을 强調하고 師範敎育을 勸奬하는 2篇의 論說을 寄稿하였다. [61] 1908年 부터 1909年 全國的으로 講演을 다니며 敎育과 個項의 重要性을 力說하기도 했다.

4次 執權 試圖와 挫折 [ 編輯 ]

그러나 1909年 까지도 그는 執權에 對한 希望을 놓지 않았다. 日帝 側의 機密 보고 資料에 依하면 " 1909年 2月 頃에 그는 政權을 掌握하려는 野心에서 親日派 이근호 · 이근택 兄弟와 자주 謀議하며 이완용 을 代身해서 自身이 受賞 이 되려는 期待를 품고 미리 日本의 여러 大官들과 麵食을 쌓아두기 爲해 早晩間 日本으로 건너가리 위해 準備하고 있었다 고 한다. [62] [63] 또한 1909年 7月 이지용 · 김윤식 等과 政友會의 結成을 計劃한 바가 있었다. [62] [64]

그런데 그가 結成하려던 政友會는 正當 의 性格을 標榜하며 日本 式 이름을 본뜬 團體로서 痛感政治가 强化되면서 舊來的 秩序가 흔들릴 것을 憂慮한 國內 政治勢力들이 勢力結集을 통하여 權力秩序를 維持하려는 努力의 一環이었다. [62] 이러한 事實들로 미루어 韓國이 日帝의 保護國으로 轉落한 統監府 時期에 大多數 韓國의 有力人士들처럼 이준용도 日本 의 後援下에 政權을 掌握하여 韓國을 統治해 보려는 意欲을 나타냈던 것으로 보인다. [65] 그러나 乙巳保護條約 以後 日本 은 이미 韓國의 日本 倂合이 豫想되었고, 그는 結局 挫折했다.

乙巳勒約 以後 [ 編輯 ]

乙巳 保護 條約 以後 그는 政治 活動을 自制하고 敎育, 啓蒙活動에 나섰다. 1908年 (隆熙 2年) 記號興學會 贊무部長과 大同學會 의 會員으로 活動하였다. 그해 9月 上空勤務社(商工勤務社) 總顧問에 推戴되었다. 1909年 12月 20日 常務組合(商務組合) 顧問에 被選되었다.

1909年 부터 1910年 까지 親日 團體인 神宮封境回 總裁를 맡아, 韓國의 建國 始祖인 檀君 乙 日本 建國神話에 登場하는 아마테라스 에 附屬되는 構圖로 神宮에 함께 配置하여 韓國 歷史를 日本 歷史에 종속시키려는 計劃을 세우고 이를 推進한 바 있다. 1909年 10月 大韓醫師總合所 總裁에 選出되었고, 12月 日本赤十字社와 日本愛國婦人會 韓國支部가 主催한 이토 히로부미 逝去 50日 記念追悼會에 參席하였다. 1910年 2月 朝陽俱樂部 總裁, 3月 에는 私立 丁日旅宿 (貞一女塾) 財團 總裁에 推戴되었고, 그해 5月 大韓赤十字社 有功寺院에 選任되었다. 6月 에는 神宮建築地를 發刊하여 主要 人士들에게 配布했다.

1910年 (隆熙 4年) 輔國崇祿大夫(輔國崇祿大夫)에 昇進, 다시 그 해 8月 5日 宗親으로 가장 높은 者品인 上輔國崇祿大夫 (上輔國崇祿大夫)로 가자(加資)되었고, 마지막으로 8月 27日 大韓帝國 最上位 勳章인 金尺大首長(金尺大綏章)을 받았다.

日本 으로부터는 메이지 天皇 으로부터 勳1等 욱일장을 授與받았다. [66] 한때 皇帝가 되리라는 希望은 絶望과 挫折로 變했고, 그는 讀書와 擊毬, 講演과 談論 等으로 消日하였다. 日本에 對한 積極的인 抵抗 代身 그는 敎育과 啓蒙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無識한 사람을 知的으로 깨우는 것만이 只今으로서는 最善의 方法이라 呼訴하였다.

1910年 8月 5日 情1品 上輔國崇祿大夫 에 任命되었다.

日帝强占期 活動 [ 編輯 ]

韓日合邦 直後 [ 編輯 ]

아버지 興親王 이재면 의 神道碑

1910年 10月 韓日 合邦 以後 이준용도 王孫의 待遇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諦念했고 술로 歲月을 보냈다. 韓日 倂合 條約 締結 後에는 詔勅에 따라 아버지 이재면이 이희 공(李熹公)에 封해졌고, 1911年 7月 宗戚 執事(宗戚執事)에 任命되었다.

韓日倂合 뒤 日帝는 누구보다도 먼저 그에게 恩賜金을 주었다. 日帝는 그에게 16萬 8千원의 恩賜金을 支拂해 주었다. 1910年 8月 中樞院 顧問職을 받았고, 그의 不實 이옥경은 總督府 幹部나 高位 將星과 어울려 親日行脚을 벌이기도 했다. [67] 乙巳條約 締結 以後 그는 挫折했으며, 韓日 合邦을 전후해서는 모든 것을 諦念한 狀態였다. 失意에 빠진 그는 1910年 12月 까지 집밖을 出入하지 않고, 自己 房에 틀어박혀 蟄居하였다. 12月 28日 日本 메이지 天皇 으로부터 日本 陸軍 所長 에 任命되었다.

1911年 2月 朝陽俱樂部 (調陽俱樂部)의 後援 團體로 正樂유지회 가 組織될 때, 유길준 , 이지용 , 윤치오 等과 함께 創立 發起人의 한 사람으로 參與하였다. [68] 1911年 6月 16日 正樂유지회의 財團 總裁가 되었다. [69] 1912年 日本 政府로부터 韓國倂合記念章 을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 별다른 職位나 惠澤은 없었고 神宮封境回 라는 團體의 代表職만을 갖고 있었다. 健康이 좋지 않았던 그는 1912年 4月 病이 發病하여 總督府 議員(總督府醫院)에 入院하였다. 9月 9日 아버지 이재면 이 死亡했다. 아버지 이재면 이 死亡한 뒤에도 그는 殯所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이 때문에 아저씨뻘 되는 이재완 等에게 호된 叱責을 當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國王 의 親兄인 아버지가 自己 아들의 身元을 要請하지 못하고 刺客들의 日本 行도 막지 못한 點, 日本 亡命 中에 아버지이 充分한 經濟的 支援을 해주지 못했고 집안을 제대로 經營하지 못한 데 對한 失望感 等이 複合的으로 作用한 것이었다. [70] 自身의 暗殺威脅과 暴力, 김학우 暗殺 事件 當時 죽음의 危機, 日本 으로 浸透한 朝鮮 刺客들로부터 自身을 지켜주지 못한 아버지에 對해 怨望을 품은 그는 오히려 家族과 親戚들이 해준 것이 무엇이냐며 反撥했다. 그 뒤 3年喪을 擧行하였지만 形式的이었고, 小祥과 對象 때 高宗과 德壽宮(純宗) 等이 費用과 禮官을 보내 致祭하였지만 그는 形式的으로 應答하였다.

9月 9日 午後 李太王 이 된 高宗 이 아버지 이재면의 殯所를 찾았을 때, 그는 자리를 避하였다. 高宗의 問喪 情報를 미리 傳해들은 그는 자리를 避했고 神經戰을 避하였다. 이재면의 屍身은 金浦(金浦)에 埋葬했다가 後에 楊州郡 화도면 마석(磨石) 우리(隅里)에 墓地를 마련하고 이장하였다. 이어 일찍 죽은 동생 이문용 의 墓所도 마석으로 이장하였다. 이는 後日 興宣大院君의 墓所와 은신군墓, 落薦君墓가 함께 移葬되면서 雲峴宮 墓域이 되었으나 後날 모두 化粧되어 納骨墓가 된다.

아버지 이재면의 死亡으로 1912年 9月 20日 이준용은 李儁(李埈)으로 改名하고 아버지의 功位 를 繼承하여 李儁 공 (李埈 公)이라는 呼稱을 받았다. [71] 3年喪 期間 中에도 그는 자유롭게 出入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外部 活動을 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는 氣色이 없는 그는 祕方의 對象이 되었다.

朝鮮 의 王家는 子孫이 貴한 탓에 몇 사람만 王族의 待遇와 特權을 받았다. [67] 한便 이준용은 高宗 의 조카로 直系王孫이 아니었으나 王族 待遇를 받은 것은 親日的 性向 때문이었다는 說도 있다. 日帝는 그에게 旭日동화장(旭日桐花章)이라는 勳章을 주었는데 그는 이를 壁에 걸어놓고 절을 하며 恩惠에 感激했다 한다. [67]

쓸쓸한 萬年 [ 編輯 ]

이준용

乙巳條約 以後 1909年까지도 王이 되려 하였으나 모든 計劃은 霧散되었다. 더以上 이준용은 政界의 中心人物度 아니었고 形式的이나마 王族의 禮遇를 받을 뿐이었다. 의친왕 系列 亦是 警戒를 받으면서 그 亦是 要注意 人物로 낙인찍혀 監視와 警戒의 對象으로 轉落하였다. 亡命과 逃避生活 等으로 甚해진 肺病 心臟 疾患 等은 더욱 惡化되었고, 그를 失意에 빠지게 했다. 그러나 그는 鬱憤을 숨기고, 自身의 感情을 外部로 드러내지 않는 處身을 했다. 1913年 9月 20日 改名 申請을 하여 바로 許諾받고 이름을 李儁으로 고쳤다. 1914年 1月 7日 庶祖母 徐氏(徐氏)가 死亡하자 日本 帝國 으로부터 葬禮費로 400원을 支援 받았다.

1914年 5月 3日 쇼켄 皇太后 의 死亡으로 國葬이 擧行되자, 來賓의 한사람으로 出國, 京城 에서 배便으로 日本 도쿄 를 訪問하고 1914年 6月 8日 에 歸國했다. 1915年 2月 日本 다이쇼 天皇 卽位를 祝賀하는 賀禮客으로 出國, 도쿄 에 다녀왔다. 그러나 그는 失意에 빠졌고 누구도 그를 慰勞하지 못했다.

兩者 이우
(四寸동생 의친왕 의 次男)

晩年에는 病席에 누워서 살다시피 했다. 1915年 5月 20日 다이쇼 天皇 으로부터 親히 日本軍 陸軍 中將 에 任命되었다. 그러나 그해 9月 11日 病으로 金剛山 으로 療養을 갔고, 陸軍 中長職을 辭退하였다. 그의 夫人 金氏 亦是 1915年 6月 病을 앓아 朝鮮總督府 가 特別히 病院에 入院하고 日本人 醫師와 사토(佐藤)라는 誠意 專擔 看護師를 配置해주었다. 1915年 8月 朝鮮總督府 市政 5周年 朝鮮物産공진회 京城協贊會에 500원을 寄附하였다.

아들이 없던 그는 1916年 妾인 전순혁 (全順爀)李 懷妊瑕疵 아들을 期待하였으나, 1916年 5月 18日 그에게서 딸 이진완 (李辰琬)을 보았다. 當時까지도 딸의 이름을 짓지 않는 일이 普通이었지만, 그는 庶女 딸이 태어나자 直接 딸의 이름을 진완이라 지었고, 그때까지도 이름이 없던 첩 全氏에게 順革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또한 이준용은 特別히 要請하여 첩 전순혁의 居處를 雲峴宮 近處에 마련해주고, 그 居處에 警衛隊를 配置하고 日誌를 記錄하게 했다. 結局 아들이 없어 1917年 四寸 동생 의친왕 의 次男 이우 를 養子로 삼았고 [72] , 1917年 陽曆 3月 22日 (陰曆 2月 29日)에 病으로 死亡했다. 當時 그의 나이 享年 47歲였다. 이에 兩者 이우가 家計와 世襲 共委를 이었다.

韓日合邦 直後에도 數年間 純宗 은 形式的이나마 兩班들에게 諡號를 내렸고, 諡號를 받지 못한 官僚나 學者들은 斜視(私諡)라고 하는 私的인 시호 를 올렸으나 이준용에게는 順從의 諡號도, 司試도 一切 아무것도 追敍되지 못했다.

事後 [ 編輯 ]

처음에는 1917年 4月 5日 흥선大院君 의 墓가 있던 京畿道 高陽郡 용강면 공덕리(現 서울特別市 마포구 孔德洞) 我所當 近處 高陽郡 용강면 淋漓 律動(栗洞, 後日 공덕동에 編入)에 安葬되었다가 1966年 京畿道 楊州郡 화도면 창현리(現 南楊州市 화도읍 창현리) 산 23-2番地 興親王陵, 興宣大院君墓(山 22番地) 近處 왼쪽 아래에 移葬되었다. 後에 2001年 後孫들이 遺骨을 火葬하여 흥선大院君 墓 入口, 神道碑 오른쪽 언덕에 納骨墓로 造成되었다. 이때 京畿道 廣州郡 세촌面 收穀에 安葬되었던 本部인 南陽洪氏의 墓도 化粧되어 같이 安葬되었다.

神道碑 門은 雲養 김윤식 (金允植)이 짓고, 해평군(海平君) 윤용구 (尹用求)가 썼으며, 김성근 이 글字를 썼다. 碑石은 遺失되어 1945年 解放 以後 다시 金允植의 글과 김성근의 글씨體를 본따서 다시 碑石을 세웠다. 아버지 이재면의 居處는 雲峴宮 의 영로당이었고, 그의 生涯 晩年에는 이준용이 이어서 居住하였다. 그가 居處하던 雲峴宮 의 泳路黨은 1917年 그의 아들 映宣群 이준용이 오랜 病치레 끝에 死亡하자, 이준용의 계실 광산 金氏가 그의 主治醫에게 事例로 주었다 한다. 이 主治醫는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 의 가문 사람이었다 한다.

이준용의 神道碑는 1919年 5月 에 세워졌지만 1945年 以後 누군가에 依해 破壞되었고, 1948年 旣存의 글씨와 筆跡을 模寫하여 다시 세웠다.

그의 養子 이우 1945年 日本 히로시마 에서 原子爆彈 에 被爆을 當해 死亡했다. 이우는 이청 , 異種 의 두 아들을 두어 後孫이 이어지고 있다. 異種 1966年 美國 留學中에 交通事故로 死亡했고, 이청이 雲峴宮 의 堂主로서 家計를 이어가고 있다.

2006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調査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106人 名單 에 아버지 이재면 과 함께 包含되었다. 그러나 신궁봉경회라는 團體의 幹部로만 있었던 點과 積極的인 親日行爲를 하지 않은 點 等은 論難의 餘地가 있다.

受賞 經歷 [ 編輯 ]

評價와 批判 [ 編輯 ]

權力을 꿈꾼 野心家라는 評價와 함께 有能한 人物이라는 評價가 常存한다.

肯定的 評價 [ 編輯 ]

그는 '無骨好人에 가까운 아버지 이재면 보다는 能力과 野心이 남달랐던 祖父 흥선大院君 을 닮았다. [73] '고 한다. 25~27歲頃의 이준용은 周邊으로부터 有能한 人物이라는 評을 받았다. 日本 工事 오토里 게이스케 (大鳥圭介)는 이준용을 宗親 中에서 가장 有爲의 氣像이 넘치는 人物 , 當年이 겨우 25歲에 不過하지만 대단한 氣像을 지닌 人物 이라고 評하였다. [73]

日本 니치니치(Nichi Nichi) 新聞의 서울 特派員도 이준용을 '朝鮮에서 가장 才能있는 젊은이' 中의 한사람이라고 말했다. 東京 主宰 英國 工事 사토 警 (Sir. Ernest Wstow)도 1896年 2月 日本 도쿄 에서 그를 面談한 後에 有能한 人物이라는 評을 내렸다. [73] 懦弱하고 優柔不斷한 性格의 高宗과 英親王 , 健康이 나빴던 純宗과는 다른 積極的인 性格을 높이 評價하기도 한다.

批判 [ 編輯 ]

初期에는 反日·排日主義者였으나 뒤에 妥協, 變節한 것에 對한 批判的 視角이 있다.

親日 行跡 論難 [ 編輯 ]

2006年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調査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106人 名單 에 包含되었다. 1910年 8月22日 韓日合倂條約 締結 親日 團體 總裁職을 遂行했던 點 [74] [75] [76] 이 그가 親日派로 指目된 理由였다. 그러나 興親王의 親日 行跡이나 恩賜金 守令이 日帝에 依한 懷柔策이지 興親王의 自發的인 行跡은 아니라는 異見이 提起되어 왔다.

2007年 1月 18日 그의 孫子 李某氏가 自身의 增ㆍ祖父의 行爲를 親日行爲로 規定한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의 決定을 取消해 달라며 訴訟을 提起했다. [77] 親日反民族行爲 眞相糾明委員會가 日帝强占下 反民族行爲 眞相糾明에 關한 特別法에 根據해 舊韓末 自身의 曾祖父와 祖父의 行跡을 親日行爲로 規定해 發表하자, 2006年 11月 憲法上 保障된 人格權 等 基本權을 侵害當했다며 憲法訴願審判을 請求했다. [75] [78] [79]

1月 18日 서울行政法院에 따르면 李氏는 訴狀에서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위가 曾祖父와 祖父의 行爲를 日帝强占期下에서의 親日反民族 行爲로 決定한 根據法律人 反民族特別法이 違憲이기 때문에 이 決定은 效力이 없어 取消돼야 한다"고 主張했다. [77]

李氏는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위의 決定이 違憲이라는 點에 對해서는 追後 提出할 違憲審判提請申請書에서 仔細하게 밝히겠다고 덧붙였다. [77] 그러나 2009年 10月 5日 그의 孫子가 낸 訴訟은 大韓民國 大法院에서 却下되었다.

2009年 10月 5日 裁判部는 "親日反民族行爲 決定을 通한 後孫의 人格權 侵害는 法律條項 自體에 依한 것이 아니라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의 調査에 따른 決定과 飼料의 公開라는 具體的인 執行行爲를 媒介로 發生하는 것이고 이에 對해서는 行政訴訟으로 救濟받을 수 있는 것"이라며 이같이 決定했다. [74] [76] "사자(死者)인 調査對象者에 對한 親日反民族行爲 決定이 있으면 死者와의 關係를 통해 스스로의 人格上을 形成하고 名譽를 지켜온 後孫의 人格權도 制限된다는 點을 認定하면서도, 이는 一般 行政訴訟의 方法으로 救濟받을 수 있다는 理由로 基本權 侵害의 直接性을 否認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75]

裁判部는 "이 事件 親日反民族行爲 決定은 該當 法律 條項 自體에 依한 것이 아니라 糾明委員會의 調査結果에 따른 決定과 이에 隨伴되는 調査報告書 및 飼料의 公開라는 具體的인 執行行爲를 媒介로 비로소 發生한 것"이라며 "이는 一般 行政訴訟의 方法으로 救濟받을 수 있는 것이므로 李氏의 審判 請求는 基本權 侵害의 直接性을 認定할 수 없다"고 밝혔다. [79]

이어 "親日反民族行爲 決定으로 인해 調査對象者 및 그 後孫의 人格權이 制限받게 되더라도 이는 附隨的 結果에 不過할 뿐 이것을 두고 一種의 刑罰로서 數値型이나 名譽刑에 該當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따라서 請求人의 基本權 侵害의 可能性을 認定할 수 없다. [79] "는 것이다.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發表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도 收錄되었다.

그러나 그가 日帝 侵略을 露骨的으로 讚揚하지 않았다는 點, 親日團體인 神宮封境會에 參與한 것과, 日本의 神을 모시는 神社에 檀君 記者 , 李成桂 를 配享한 것이 積極的인 親日行爲인가의 與否 等은 論難의 餘地가 있다.

思想的 側面 [ 編輯 ]

敎育 入國論 [ 編輯 ]

이준용은 나라를 살릴 수 있는 方法은 敎育이라 보았고, 敎育의 重要性을 主張하였다. 따라서 그는 國稅가 나날이 기울어가고 民生이 나날이 困窮해지는 暗黑의 狀況을 打開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敎育을 重視해야 한다고 보았다. [61] 그렇게 해야만이 韓國 이 文明의 進步의 領域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主張이었다. [61]

그는 1893年 부터 東學 農民 運動 期間 中에는 東學軍 과 連帶하여 開化派 들을 逐出하고 除去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外國人들과 接觸하게 되면서 外國의 文物을 받아들여서 좋은 것은 取해야 된다는 것으로 생각을 변화시켰다.

이준용은 自身의 敎育論을 直接 實踐에 옮겼다. 그는 1908年 에 宗戚 自制의 日本 留學을 建議하였다. [80] 이에 따라 이재곤 · 민병석 · 윤택영 의 子弟들과 他姓의 家門에서 80餘名의 留學生이 選拔되었다고 한다. [81] 그 뒤에도 海外 留學과 見聞의 重要性을 主張하여 一般 兩班家와 平民의 子弟들도 海外 留學의 支援을 構想하였다. 또한 그는 1908年 봄에 이지용 , 이재극 等과 함께 經書禹 北部 季冬에 皇族 子弟들의 敎育을 위해 돈명학교 (敦明學敎)를 設立하였다. [80]

처음에는 皇族들의 子弟들을 對象으로 했다가 漸次 門戶를 開放하여 兩班家 子弟들, 平民 民間人의 兒童들 100名 程度가 受學하게 되었다. 學校의 運營資金이 不足하자 設立 當時 數千원을 하사했던 純宗 1909年 2月 侍從官을 보내 이준용, 이지용, 이재극 等 學校 關係者 30名과 함께 돈명學校의 發展方向을 協議하도록 하였다. [80] [82]

1909年 6月 이준용은 自身이 所有한 田畓을 抵當잡혀 돈 2萬餘 원의 資金을 마련해 가지고 돈명學校를 建立하기 爲한 方案을 皇族들과 論議하기도 하였다. [80] [83]

實力 養成論 [ 編輯 ]

그는 人材 採用에 障壁을 없애야 한다고 力說했다. 朝鮮 社會의 崩壞 原因을 門閥과 學脈에 依한 人材 採用이 原因이라 생각하였다. 特히 明成皇后의 親族에 否定的인 認識을 가졌던 그는 少數 門閥에서 官職과 權力을 獨占하여 實力있는 人材의 採用이 어렵다고 判斷했다. 또한 어느 學統, 學派 等 學緣에 依한 밀어주고 당기기식 官職 登用 亦是 참된 人材의 採用을 어렵게 만드는 障礙物이라고 判斷했다.

이준용은 敎育의 重要性을 强調한 한 論說에서 韓國 民族의 優秀性은 天賦的인 것으로서 決코 歐美人들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剛한 自負心을 드러냈다. [61] 그럼에도 不拘하고 現在 韓國 國民들이 民生의 方道를 모르고, 옛날 習慣만을 追從하고 固陋함을 便히 여겨서 이웃나라로부터 비웃음을 사는 것은 모두 近代 敎育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61]

그는 社會進化論 敵 文明論에 期待下 論理를 展開하는 가운데, 資質이 優秀한 韓國民이 無知와 貧弱을 벗어나 文明富强의 境地에 到達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敎育할 學校를 設立해야 하며, 學校를 제대로 運營하기 위해서는 舊來의 傳統的 敎育機關이 아닌 近代的 人材들을 글러낼 師範學校를 세워 敎師를 養成해야 한다고 力說하였다. [84]

政變 祈禱 [ 編輯 ]

흥선大院君 이 王으로 推戴하려던 아버지 興親王 이나 三寸 李在善 과는 달리 그는 直接 王位에 오르려는 試圖를 했다. 할아버지 興宣大院君이 自身을 王으로 推戴하려 한다는 것을 確實하게 認知한 以後 그는 王位에 오르려는 積極的인 試圖를 보이기도 한다.

1894年 以後 乙巳保護條約 以前까지만 해도 그는 王位에 오르려는 野心을 公公然히 드러냈다. 그러나 乙巳條約 締結 以後 王 또는 皇帝가 될 수 있는 可能性이 사라지면서 失望하게 된다.

무뎌진 家族愛와 個人主義 [ 編輯 ]

日本 亡命 以前부터 自身을 政治的으로 利用하려던 사람들에 對한 怨望과 不信이 깊어졌고, 이는 그의 性格을 個人主義 敵 性向으로 變身시켰다. 또한 長期間의 亡命生活 中 家族愛가 무뎌졌는데, 自身을 死地로 내몬 할아버지 흥선大院君 과 自身을 지켜주지 못한 父母 內外에 對한 怨望과 憎惡, 그리고 自身에게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自身의 行實을 非難하는 親戚들에 對한 憎惡와 挫折과 懷疑感, 幻滅感에 몸부림쳤다.

長期間의 日本 亡命生活을 하던 이준용은 1907年 歸國 後 大院君 의 祠堂을 拜謁할 때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슬퍼하는 氣色도 없어서 周邊으로부터 무루孔子(武淚公子)라는 嘲笑를 받았다고 한다. [56] 또한 1912年 아버지의 臨終을 맞을 때에 그리고 葬禮를 치를 때에도 아들로서 精誠을 다하지 않았다고 批判을 받기도 하였다. [56] [85] 또한 이를 指摘하는 一家들과 舌戰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逸話들은 이준용이 가슴 속에 지니고 있는 悔恨들을 잘 보여준다. [56] 거기에는 數次例 이준용 自身을 앞세워 政權을 掌握하려 했던 흥선大院君 의 政治的 野慾, 列强들의 發展相에 逆行하는 흥선大院君 의 統治戰略에 對한 [56] 半減과 拒否感, 乙未事變 直前 大院君이 入闕을 위해 自身의 日本 留學을 日本人 들에게 許諾한 事實, 國王 의 親兄인 아버지이 自己 아들의 身元을 要請하지 못하고 刺客들의 日本 行도 막지 못한 點, 日本 亡命 中에 아버지이 充分한 經濟的 支援을 해주지 못했고 집안을 제대로 經營하지 못한 데 對한 失望感 等이 複合的으로 作用한 것이었다. [70]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준용이 10餘 年 동안 日本 에서 젊은날의 大部分을 生命의 威脅에 떠는 不安한 나날들을 보냈던 個人的인 쓰라린 經驗이 그의 感情과 家族愛를 무디게 만든 가장 重要한 要因이었던 것으로 判斷된다. [70] 日本 에까지 刺客을 보내 自身을 暗殺하려 했던 朝鮮 調整과, 自身의 家族, 親戚들이 自身을 暗殺하려던 刺客들을 막아주지 못한 것에 對한 것도 家族과 親戚, 祖國에 對한 그의 怨望과 背信感과 幻滅感, 不信을 增幅시켰다.

家族 關係 [ 編輯 ]

朝鮮 王室과 雲峴宮 家計도

系譜 :    朝鮮 王室    興宣大院君의 4代祖    雲峴宮


異種
第16代 人組
已往
소현세자
二號
第17代 孝宗
俚謠
인평대군
이연
第18代 顯宗
李煜
福녕軍
耳順
第19代 肅宗
釐革
議員軍
利潤
第20代 警鐘
泥金
第21代 英祖
이훤
연령군
이숙
안흥群
履行
晉종
이선
莊祖
이온
落薦群
이진익
離散
第22代 正祖
異人
은언군
李瑱
은신군
이병원
理工
第23代 順調
李珖
電界大院君
耳垢
남연군
이영
文鳥
異變
第25代 哲宗
이창응
興녕群
이재원
완림軍
이기용
自作
李珖
의친왕의 7男
이환
第24代 憲宗
이정응
興완군
이재완
婉順軍 · 侯爵
이달용
侯爵
이해선 이철주
이최응
흥인군
이재긍
完營群
이지용
伯爵
이해충 이영주
伯爵
이하응
흥선大院君
이재면
興親王
이준용
映宣群
이우
의친왕의 2男
이청
長男
餘興 閔氏
여흥부大夫人
풍산 洪氏
情實
南陽 洪氏
情實
朴燦柱
박영효 의 孫女
異種
次男
驪州 李氏
繼室
광산 金氏
繼室
전순혁
消失
이진완
庶女
윤원선
윤치소 의 3男
이문용
次男
全州 李氏
長女
金仁圭
全州 李氏
次女
김두한
朱氏
消失
全州 李氏
三女
김규정
이희
第26代 高宗
이척
第27代 純宗
餘興 閔氏
명성황후
餘興 閔氏
순명효황후
해평 尹氏
순정효황후
寧越 嚴氏
순헌황귀비
이은
醫민태자
李瑱
長男
마사코
義民太子妃
耳垢
次男
利原
의친왕 9남의 長男
줄리아 멀록
1982年 離婚
慶州 李氏
貴人
이선
완親王
덕수 張氏
貴人
李堈
의친왕
沿岸 金氏
의친왕費
樹冠當 鄭氏
側室
이건
長男
이충
長男
요시코
1951年 離婚
이옥자
長女
이기
次男
函開封
側室
李甲
9男
淸州 양氏
貴人
이덕혜
덕혜옹주
소 마사에
소 다케유키
伯爵
全州 李氏
長女
조경호
全州 李氏
三女
조정구
계성月
消失
李在善
완銀群
이주용
全州 李氏
次女
이윤용
男爵

後室 전순혁 과 사이에서 둔 庶女 이진완이 成人이 될 때까지 唯一하게 生存했다. 後嗣가 없어 의친왕 의 次男 이우 를 養子로 삼았다.

기타 [ 編輯 ]

뮈텔 에 依하면 그는 20代 때에는 普通 體格이었으나 30代 後半에 歸國했을 때는 뮈텔 主敎 도 그를 몰라 봤을 만큼 肥大한 體格으로 變해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陽(洋)돼지'라고 불렸고, 章程 2名 以上이 끄는 人力車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86] [87] 이는 한때 敏捷하고 날렵함으로 高宗의 代案字로 指目되었고, 高宗과 閔氏 戚族系列이 보낸 刺客이나 暗殺의 威脅을 謀免한 것, 英特했던 少年期와는 對照的으로 變한 故意 모습에 對한 輕蔑과 嘲弄의 意味도 담겨 있었다.

後날 그의 死後 그의 姻戚이 되는 윤치호 도 그가 洋돼지 라는 別名을 얻었다고 記錄해 놓았다. [88] [89] 윤치호 는 그가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가마나 巧者 위에 앉아있으면서 아랫사람들에게만 빨리 올라가지 못하느냐고 재촉한다며, 걸어서라도 올라갈 생각은 못한다고 嘲弄하기도 했다.

그의 繼妃 광산 金氏는 뒷날 兩者 이우 日本 因果의 結婚을 被害 박영효 의 庶孫女 朴燦柱 와 結婚하는 것을 한때 反對하기도 했다. 이는 박영효 가 이준용을 處刑하려 했던 點 때문인지, 박영효 의 孫女가 嫡孫이 아니라 庶孫女라서 反對한 것인가 與否는 不確實하다.

雲峴宮 主人들의 肖像畫 中 흥선大院君 은 生前인 1869年, 1880年, 興親王 은 1880年에 肖像畫가 그려졌다. 그러나 映宣軍은 影幀을 남기지 않아 事後 1918年 그의 寫眞을 보고 肖像畫가 그려졌다.

明成皇后 暗殺 企圖 疑惑 [ 編輯 ]

흥선大院君 外에도 이준용 亦是 明成皇后와 世子를 除去하려는 陰謀를 꾸몄다는 疑惑이 提起되어 있다.

안경수 권형진 을 調査하여 處刑하는 過程에서 1894年 7月 에 이준용이 明成皇后와 世子宮을 處斷하려 하였고, 이러한 逆謀 事件은 結局 乙未事變 으로 이어졌다는 陳述이 나왔다. [42] 高宗 皇帝 는 이준용 亦是 乙未事變 의 主要 背後 中의 한사람으로 疑心했다. 명성황후 廢黜과 除去 陰謀에 꾸준히 加擔한 點과 명성황후 系列에 依해 暗殺 未遂가 있었던 點 等을 勘案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乙未事變 에 直接 協力했거나 加擔했다는 根據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준용을 演技한 俳優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資料 [ 編輯 ]

  •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2006年 12月). 〈이준용〉 (PDF) . 《2006年度 調査報告書 II - 親日反民族行爲決定理由서》. 서울. 898~912쪽쪽. 發刊登錄番號 11-1560010-0000002-10. 2007年 10月 10日에 原本 文書 (PDF)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6月 26日에 確認함 .  
  • 오영섭 (2007年 4月). 〈高宗의 潛在的 代案者로서 一生을 살아간 이준용〉. 《韓國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 (1)》. 서울. 309~342쪽쪽.  
  • Korean―Japanese Politics behind the Kabo―Ulmi Reform Movement
  • 1894 to 1896(Young I. Lew, The Journal of Korean Studies 3, 1981)
  • 李相伯, 東學黨과 大院君, 《歷史學報 17·18合集》, 1962)

參考 文獻 [ 編輯 ]

  •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2007, 京仁文化史)
  • 朝鮮文友會, 《朝鮮신사보감》 (朝鮮文友會, 1913) 9~10쪽
  • 小田省吾 便, 이희공實技·李儁共實技 (李王職, 1943) 1~59쪽
  • 石坡學術硏究院, 《興宣大院君 飼料휘편 (前4卷)》 (현음사, 2005)
  • 유영익, <이준용>, <이준용擁立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246~247쪽
  •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4)
  • 김제방, 《흥선 大院君·明成皇后》 (지문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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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역사연구회, 1894年 農民戰爭硏究 4 (역사비평사, 2003)
  • 한국역사연구회, 1894年 農民戰爭硏究 5 (역사비평사, 2003)
  • 연갑수, 《高宗代 政治變動 硏究》 (일지사, 2008)
  • 유영익, 《甲要警長 硏究》(일조각, 1990)
  • 慧門, 《朝鮮을 죽이다》 (東國大學校出版部, 2009)
  • 이선근 , 《大院君의 時代》(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 黃玹 , 《매천야록》 (黃玹 지음, 허경진 옮김, 한양출판社, 1995)
  • 이선근 , 《大韓國史 6》 (신태양사, 1973)
  • 國史編纂委員會 篇, 高宗時代社 2~3 (國史編纂委員會, 1969)

各州 [ 編輯 ]

  1.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11쪽
  2.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10~311쪽.
  3. 이준용의 첩 전순혁의 所生으로 그의 唯一한 血肉이기도 했다.
  4.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12쪽.
  5. 精巧, 大韓季年史 上 (國史編纂委員會, 1971) 16쪽
  6.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12p
  7.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12쪽.
  8.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13쪽.
  9.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14쪽.
  10. 朴榮圭, 朝鮮의 王室과 外戚 (김영사, 2003) 450
  11. “保管된 寫本” . 2016年 3月 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2月 11日에 確認함 .  
  12.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15쪽.
  13. 한영우 (2001年 10月 20日). 《明成皇后와 大韓帝國》 初 1刷판. 서울: 효형출판. 34쪽쪽. ISBN   89-86361-57-4 .  
  14.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16쪽.
  15.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17쪽.
  16. 高宗 實錄, 1894年 7月 15日
  17.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18쪽.
  18. 뮈텔, 《뮈텔 主敎 日記》1 (한국교회사연구소 譯註, 1986) 314~315pp
  19.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17~318쪽.
  20. 한국역사연구회, 《1894年 農民戰爭硏究 5》 (역사비평사, 2003) 241페이지
  21. 駐韓日本公使關記錄 8 58~60쪽
  22. 한국역사연구회, 《1894年 農民戰爭硏究 5》 (역사비평사, 2003) 242페이지
  23.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230쪽
  24. 歷史問題硏究所, 歷史批評:1997年 겨울號 (역사비평사, 1997)167페이지
  25. 한국역사연구회, 《1894年 農民戰爭硏究 5》 (역사비평사, 2003) 243페이지
  26. 1894年 農民戰爭硏究 5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出版社 歷史批評史 | 2003) 239
  27. 東學 農民 運動에 參與한 農民軍을 말한다.
  28. 이준용 空超, 1895年 3月 26日子, 고종주 秒差問目과 3月 27日 再次問目
  29.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20~321쪽.
  30.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21쪽.
  31. 1894年 農民戰爭硏究 5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出版社 歷史批評史 | 2003) 238
  32. 조성기, 《唯一한 評傳》 (작은씨앗, 2005) 37페이지
  33. [뉴 다큐 | 잃어버린 近代를 찾아서] 飛上한 時代 특별한 재주 아쉬운 죽음
  34. 신봉승, 《朝鮮王朝 500年 24. 王朝의 悲劇》 (금성출판사, 2010) 356페이지
  35. 포럼 編輯部, 《푸른 꿈을 꾸다》 (포럼, 2007) 185페이지
  36. 韓國民族運動史學會, 《安重根과 韓人民族運動》 (국학자료원, 2002) 114
  37. 〈이준용〉 . 《엔싸이버 百科事典》 . 2008年 9月 4日에 確認함 .  
  38.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27쪽.
  39.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28쪽. 認容 誤謬: 잘못된 <ref> 태그; "oh328"李 다른 콘텐츠로 여러 番 定義되었습니다
  40. 駐韓日本公使關 記錄 13, '御用船 等 捕縛 云云에 對한 回答' 241페이지
  41. 駐韓日本公使關 記錄 13, '高宗廢位... 윤태영 外 3人 逮捕' 448페이지
  42. 精巧, 《大韓季年史》 下 65~66쪽
  43.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29pp
  44. 精巧, 《大韓季年史》 下 66~70쪽
  45. 駐韓日本公使關 記錄 14, '이준용에 對한 拿捕, 召喚의 訓令 等 寫本 送付件', 356쪽
  46.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23쪽.
  47. 서해문집,《來日을 여는 歷史 26號》 (서해문집, 2006) 56페이지
  48. 國史編纂委員會, 《高宗時代社 6》 (國史編纂委員會, 1969) 435
  49.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32쪽.
  50.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33쪽
  51. 國史編纂委員會, 《高宗時代社 6》 (國史編纂委員會, 1969) 444~445
  52. 서영희, 大韓帝國 政治史 硏究, 372~373쪽
  53. 國史編纂委員會, 《統監府文書 3》 (國史編纂委員會, 1998) 39~40, 336
  54. 國史編纂委員會, 《高宗時代社 6》 (國史編纂委員會, 1969) 635
  55. 國史編纂委員會, 《高宗時代社》 (國史編纂委員會, 1969) 641
  56.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41쪽.
  57. 그래서 나는 金玉均을 쏘았다(조재곤 지음 出版社 푸른역사 | 2005) 109페이지
  58. 國史編纂委員會, 《高宗時代社 6》 (國史編纂委員會, 1969) 641
  59.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34쪽
  60. 우리들의 잃어버린 신명:傳統劇 (허은 지음 出版社 敎保文庫 | 1999) 169
  61.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55pp
  62.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37pp 認容 誤謬: 잘못된 <ref> 태그; "oh337"李 다른 콘텐츠로 여러 番 定義되었습니다
  63. 조선통감부文書 6, '이준용의 政權掌握運動車 도일準備說件', 39쪽
  64. 大韓每日申報, 1909年 8月 1日子, 政友會 組織
  65.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37~338pp
  66.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34쪽.
  67.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20:우리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 (한길사, 2004) 135페이지
  68. 송방송, 《增補韓國音樂統社》 (민속원, 2007) 534쪽
  69. 송방송, 《增補韓國音樂統社》 (민속원, 2007) 535쪽
  70.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42쪽.
  71. 李儁으로 이름을 改名한 것은 1913年이다.
  72. 그의 夫人 광산 金氏가 高宗 의친왕 을 찾아가 付託한 것에 依해서였다고 한다.
  73.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10쪽.
  74. http://news.nate.com/view/20091005n08047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75. http://news.nate.com/view/20091005n08088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76. http://www.ytn.co.kr/_ln/0103_200910051412251653
  77.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523704
  78. http://www.fnnews.com/view?ra=Sent1201m_View&corp=fnnews&arcid=00000921782211&cDateYear=2009&cDateMonth=10&cDateDay=05
  79. “保管된 寫本” . 2014年 1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1年 2月 25日에 確認함 .  
  80.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36쪽.
  81. 黃玹, 《매천야록》(김준 驛) 775쪽
  82. 조선통감부 文書 10, 돈名學校 發展方案 摸索件
  83. 조선통감부 文書 6, '이준용의 學校 設立 計劃' 189쪽
  84.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37쪽.
  85. 尹孝貞, 《韓末祕史》 (교문사, 1995) 159~160
  86. 오영섭 《韓國 近現代史를 수놓은 人物들(1)》(오영섭 저, 한영희 發行, 2007.4, 京仁文化史) 310쪽.
  87. 뮈텔, 《뮈텔主敎日記》 4 (한국교회사연구소 譯註, 1998) 184쪽
  88. 윤치호, 《尹致昊 日記》 (김상태 便역, 역사비평사, 2001) 601~602페이지
  89. 이준용의 첩 전순혁의 딸 이진완은 尹致昊의 堂조카 윤원선과 結婚한다.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김홍집
朝鮮 攝政
1894年
後任
박정양
前任
이재면
(興親王)
第3代 雲峴宮 宗主
1912年 ~ 1917年
後任
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