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승호
(閔升鎬,
1830年
~
1874年
陰曆 11月 28日
)는
朝鮮
時代의 文臣으로, 민치록의 兩者이며,
명성황후
의 量오라버니이다. 여흥부大夫人 閔氏의 親同生으로
흥선大院君
의 妻男이자 高宗,
興親王
의 外三寸이기도 하다.
1874年
11月
흥선大院君
이 權座에서 逐出된 直後 閔氏 政權의 首長이었으나 疑問의 暴死를 當한다. 本貫은
餘興
으로 字는 福慶(復卿), 諡號는 衷情(忠正)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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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敦寧府
判事와
共助
板書
를 지낸
민치구
와 夫人 全州 李氏의 次男이었다. 外家 쪽으로는 道正宮으로
덕흥大院君
의 後孫이었다. 누이인
여흥부大夫人
이
남연군
의 넷째 아들
흥선大院君
과 婚姻하면서 王室의 近親(近親)이 되었다.
本來
민치구
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11寸 아저씨뻘 되는 明成皇后의 生父
민치록
의 養子로 入養되었다.
[1]
이에 여양府院君
민유중
의 奉祀孫 資格으로 哲宗 12年(
1861年
申遺骸)에
淫書
로 官職에 올랐다.
[2]
1863年
누이의 아들(
高宗
)이 王으로 卽位하였다. 高宗 1年(
1864年
)
文科
에 丙科로 及第하여 같은 해 弘文館 敎理(종5品)을 除授받았고, 곧 應敎(正4品), 傳한(종3품), 奎章閣 直閣(正3品), 嘉禮都監 副提調(正3品 堂上)로 破格 昇進을 거쳤다.
高宗 3年(
1866年
), 量누이同生인
명성황후
가 王妃로 冊封되면서
李朝
參議
(正3品 堂上)으로 任命되었으며,
1867年
1月
好調
參判
에 昇進되었다. 그 뒤
刑曹
板書
,
兵曹
板書
等을 歷任하였다.
日本
이 國書를 보내 와서 國交를 要請하였을 때 興宣大院君이 國交 樹立에 反對하자 그에 맞서 贊成하였고
1874年
11月
興宣大院君이 失脚하자 閔氏 族黨의 守令이 되었다.
1874年
陰曆 11月 28日
身元未詳의 僧侶가 그에게 膳物이라며 進上品을 갖다 바쳤고, 이것을 들고 와 開封하던 中 箱子 안에 들어있던 火藥이 터지면서 민승호, 閔升鎬의 아들, 養어머니 監考黨 閑散李氏 等이 모두 그자리에서 死亡했다. 閔升鎬는 죽기전 雲峴宮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雲峴宮......"이라고 말했다.
[3]
그 뒤 代를 잇기 위해
민태호
(閔台鎬,
민치구
의 長男과는 漢字가 다른 同名異人)의 아들
민영익
을 養子로 들였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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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宗
은 민승호에게 忠情이란 諡號를 내렸다. 그에겐 뒤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閔妃는 가까운 親戚을 排斥하고 寸數가 좀 먼
민태호
의 아들
민영익
을 養子로 삼겠다고 했다.
[4]
그러자
민태호
는 反對하였고 그의 동생
민규호
가 兄을 脅迫했다. "千의(왕후의 뜻)를 어찌 敢히 어기겠습니까? 養子를 보내어 함께 富貴를 누리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민태호
의 아들 閔泳翊은
민승호
의 養子로 들어갔고, 뒤이어
민규호
는
李朝
判書 兼 都統使가 되었다.
[4]
以後
1892年
봄 雲峴宮에서 일어난 爆彈 테러가 閔升鎬의 죽음이 興宣大院君과 關聯이 있다고 여긴 明成皇后의 報復이라는 主張이 있다.
[3]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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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親曾祖父 :
民白술
(閔百述) - 민진영의 孫子
- 量曾祖父 : 민백분(閔百奮)-
민진후
의 孫子
- 養祖父 : 민기현(閔耆顯)
- 養父 :
민치록
(閔致祿,
1799年
~
1858年
)
- 養母 : 監考黨(感古堂)
寒山 李氏
(韓山李氏, ?~
1874年
)
- 女同生 :
명성황후
- 否認 : 광산金氏(光山金氏, 庚寅年 ~ 己未年 4月 23日) - 김재정(金在廷)의 딸
- 否認 : 沿岸金氏(延安金氏, 壬寅年 ~ 丁卯年 2月 11日) - 金正秀(金鼎秀)의 딸
- 否認 : 덕수李氏(德水李氏, 신해年 ~ 己未年 7月 1日) - 이민성(李敏星)의 딸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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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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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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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카
민영환
의 諡號도 그의 諡號와 같은 忠情公이다. 그러나 一般的으로 閔忠正公이라 하면
민영환
이 더 많이 指目된다.
민승호를 演技한 俳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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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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