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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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
沈相薰
出生 1854年
朝鮮
死亡 1907年
大韓帝國
性別 男性
國籍 조선의 기 朝鮮 대한제국의 기 大韓帝國
職業 吏曹判書 , 度支部 代身, 軍部大臣 , 內部大臣 , 參政大臣, 中樞院 議長
所屬 守舊黨
父母 아버지 : 심응택(沈應澤) - 工曹判書
어머니 : 餘興 閔氏 (驪興 閔氏) - 흥선大院君 의 丈人이자 高宗 의 外祖父 工曹判書 민치구 (閔致久)의 딸
配偶者 安東 金氏
子女 兩者 : 심이섭(沈理燮, 承旨) - 尋常葉(沈相燁)의 아들
심영섭(沈瑛燮, 江陵府使)
심장섭(沈璋燮, 內部 參書官)
심경섭(沈瓊燮)
심규섭(沈珪燮, 攝通禮) - 參政大臣 한규설 의 사위
賞勳 대한제국 大韓帝國 建國 功臣 勳1等 太極章 (1902年)
대한제국 大勳位 李花大首長 (1908年)

심상훈 (沈相薰, 1854年 ~ 1907年 )은 朝鮮 末期의 文臣으로 守舊黨 의 一員이다. 本貫은 靑松 (靑松), 字는 순가(舜歌), 諡號는 忠肅(忠肅)이다.

守舊黨 에 屬한 人物이었으며 1884年 甲申政變 이 일어났을 때 開化黨 의 支持者로 僞裝하고 景祐宮 으로 가서 명성황후 와 連絡을 取해 開化黨 의 眞相과 政變의 祕密 等을 알려주고 淸나라 의 兵力 派遣을 許諾할 것을 提議하였다. 1896年 에는 俄館播遷 이 일어나자 守舊派 內閣의 度支部 大臣이 되었다. 그러나 獨立協會 의 彈劾 對象이 되었고 1898年 에 替直處分을 받게 되었다.

家計 [ 編輯 ]

同志돈녕부社 심의현(沈宜絢)의 孫子이며 工曹判書 심응택(沈應澤)의 아들이다. 흥선大院君 의 丈人인 민치구 의 外孫子로서, 흥선大院君 이 姨母夫이고 高宗 皇帝 의 姨從四寸이며 명성황후 의 親族이다.

生涯 [ 編輯 ]

1874年 ( 高宗 11年) 增廣 文科 에 及第하여 弘文館 敎理, 奎章閣 直角, 司憲府 掌令 等을 거쳐, 1882年 壬午軍亂 이 일어나자, 장호원 에 避身하고 있던 명성황후 의 密啓를 宮中에 傳達하여 淸軍을 끌어들여 흥선大院君 을 淸國으로 拉致하게 함으로써 壬午軍亂을 진정시키는 데에 큰 役割을 하였고, 1884年 吏曹 參議, 軍國事務參議(병조참의), 同志經筵官史를 거쳐, 甲申政變 이 일어나자, 京畿道 觀察使(京畿 監査)로서 또다시 淸軍을 끌어들여 獨立黨의 革新政府를 전복시키는 데에 가장 重要한 役割을 擔當하였으며, 같은 해에는 忠淸道 觀察使(忠淸 監査)로 나아가 東學敎徒들의 彈壓에 앞장섰다. 以後에, 吏曹參判, 협판내무부사(吏曹參判), 弘文館 副提學, 奎章閣 直提學, 地境捐館舍, 工曹判書 , 吏曹判書 , 刑曹判書 , 右參贊, 宣惠廳 製造, 校正廳 堂上, 掌禮院頃, 度支部 代身(戶曹判書) 兼 議政府 撰定(議政府 贊成) 兼 宮內府 代身 서리 兼 軍部大臣 서리 兼 陸軍 部長 等을 지내고, 1897年 大韓帝國 이 建國되자, 大韓帝國 初代 度支部 大臣이 되었고, 以後에, 宮內府 特進官, 量地衙門 (土地測量官廳)의 總裁官, 軍部大臣 (兵曹判書) 兼 內部大臣 서리 兼 度支部 代身 서리 兼 護衛摠管 서리 兼 特命 全權公使를 거쳐, 內部大臣 (吏曹判書), 議政府 撰定을 지냈다. 1899年 議政府 參政大臣, 法規 敎定所 議定官, 量地衙門 總裁 兼 典圜局 管理官 兼 表勳院 議定官, 陸軍 部長 兼 元帥府 軍務局 總長, 太醫院卿을 거쳐, 1901年 議政府 參政大臣, 度支部 代身 兼 鐵道院 總裁 兼 惠民院 總裁, 元帥府 軍務局 總長 兼 度支部 代身 兼 軍部 代身 서리 兼 忠淸北道 觀察使 兼 中央銀行 總裁 兼 持戒 監督을 지냈다. 1904年 議政府 參政大臣, 議政府 贊政, 판돈녕原絲를 거쳐, 러일戰爭 當時, 議政府 參政大臣, 1905年 日本 特派 大使, 大韓帝國 中樞院 議長, 禮式院 禮式頃, 議政府 參政大臣 兼 饌母館, 管制 이정소 議定官, 軍部大臣 을 거쳐, 經理遠景으로 있을 때, 乙巳條約 이 締結되려고 하자, 민영환 , 조병세 等과 함께 景福宮에 들어가, 高宗 앞에서 乙巳條約 締結 反對 上疏를 올렸으나, 끝내 乙巳條約이 締結되자, 閔泳煥과 趙秉世의 뒤를 이어 自決하려 하였으나, 高宗의 挽留로 自決을 抛棄하였다. [1] 1906年 表勳院 總裁, 江原道 觀察使, 侍從武官長, 帝室 財政 會議 議員(皇室 豫算 會議 委員), 1907年 宮內府 代身, 宮內府 特進官, 經理院頃 兼 陪從武官腸 署理 等을 지냈다. 1907年 ( 純宗 卽位年) 8月 7日 宮內府 特進官으로 있다가 別世하니, 鄭1品 大匡輔國崇祿大夫 영돈녕元士에 追贈되고, 忠肅(忠肅)이라는 諡號가 내려졌다. [2]

심상훈의 立脚과 심상희 義兵大將의 歸順 [ 編輯 ]

俄館播遷을 起點으로 하여 1896年 義兵 運動의 性格이 달라졌다. 義兵의 優先的인 目標價 高宗의 景福宮 還宮이었기 때문에 義兵은 親러 開化派 政權을 反對하고 親러 改革을 反對하였다. 이에 따라 親日 開化派 政權이 아니라 親러 開化派 政權이 義兵을 鎭壓하게 되었다.

親러 開化派 政權이 義兵을 鎭壓하게 되면서는 俄館播遷 以前 義兵部隊에 參與하였던 親러 開化派 명성황후 支持勢力이 義兵을 解散하거나, 의진으로부터 離脫하였다. 驪州 義兵을 背後에서 操縱하였고, 이춘영 義兵에 아들을 들여보냈던 심상훈度 徐徐히 의진을 離脫해갔다.

심상훈은 柳麟錫 義兵部隊에서 먼저 離脫하였다. 이춘영 義兵部隊에 심상훈, 홍계훈, 민승호 집안에서 심리섭, 홍병진, 이근영 等을 들여보낸 事實은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이들은 이춘영의 從事였다가 나중에는 柳麟錫의 宗師가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심리섭(심이섭, 심상훈의 兩者)李 1896年 3月 16日에, 홍병진은 3月 19日에 이승휘(孟山 고을 원을 지냈고 忠州 烏甲에 居住)와 함께 各各 유인석 部隊를 떠나서 서울로 갔다. 그後 심리섭은 先柳委員이 되어 4月 11日 義兵 解散을 要求하는 同時에 解散하지 않을 境遇 外國軍隊가 攻擊할 것이라고 脅迫하는 書信을 유인석 部隊에 보냈다. 이근영은 언제 떠났는지 確認되지는 않지만 4月 25日 심리섭, 이근영, 홍병진, 이승휘 等 4名이 함께 堤川으로 내려와 그 다음날 官軍側 大將 長期렴과 함께 나타났고, 4月 28日에는 勅諭를 가지고 義兵部隊로 들어왔다.

심리섭 等이 의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한때 이춘영 義兵의 背後勢力이었던 심상훈이 漸次 러시아 쪽으로 기울고, 4月 22日 度支部 代身에 任命된 것과 無關하지 않을 것이다. 유인석이 ‘逆黨’으로 看做하는 이범진 等으로부터 심상훈이 度支部 代身에 任命되었으니, 그의 아들이 義陣에 머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심상훈의 度支部 任命 한 달餘 前에 의진을 떠난 심리섭은 度支部 代身 任命과 同時에 先柳委員이 되어 다시 내려왔다. 義兵側에서는 심상훈을 義兵에 끌어들이기 위해 심상훈과 작은 아들을 臺場所로 불러들였고, 5月 4日 심상훈은 유인석 義陣에 와서 하룻밤을 묵고 갔다.

심리섭 等이 義兵을 떠난 時期는 이춘영의 戰死, 김백선의 處刑, 민의식의 離脫 以後로서 명성황후 勢力이 義陣에 남아 있지 않을 때였다. 게다가 柳麟錫은 俄館播遷의 基本 性格을 權力爭奪戰으로 보았고, 따라서 俄館播遷으로 인해 달라진 것이 거의 없으며 義兵과 敵對的 關係라고 보았다. 이에 따라 柳麟錫은 이범진, 이완용, 이윤용, 박정양 等 俄館播遷 主謀者들을 ‘逆黨’ 또는 ‘力道(逆徒)’로 보고 그들에 對해 反對意思를 分明히 하고 있었다. 俄館播遷에 對해 否定的으로 對하고, 俄館播遷 勢力과 敵對的 關係가 되어가자 俄館播遷 以後 柳麟錫 義兵은 周圍로부터 協助가 끊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유인석 部隊는 軍需物資 調達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柳麟錫 義兵이 이범진 等을 逆黨으로 몰아 執權勢力과 敵對的 關係가 되는 狀況에서 皇后 支持勢力으로 親러的 性向을 가지고 있는 이들로서는 더 以上 義兵部隊에 머물러 있을 必要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驪州 義兵大將 심상희는 심상훈이 度支部 代身에 任命된 4月 22日과 비슷한 時期에 歸順하였다. 심상희는 俄館播遷 直後인 2月 18日에 내려진 義兵 解散 宣諭詔勅과 2月 27日에 내려진 義兵解散 宣諭詔勅을 받아들이지 않고, 2月 29日에 義兵 解散 不可와 逆賊 處斷을 主張하는 上疏를 올렸지만 4月 中旬頃에 이르러 結局 宣諭詔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심상희와 部下 포군들은 4月 16日부터 5月 5日 사이에 歸順하여 冠袍群(官砲軍)이 되었고, 심상희는 1903年(光武 7年) 6品 中樞院 議官(大韓帝國 國會議員)에 任命되었다.

家計도 [ 編輯 ]

  • 7代祖 : 心속(沈涑) - 增領議政
  • 6代祖 : 心得縣(沈得賢) - 淸風府使
  • 5代祖 : 審둔(沈鈍) - 症吏曹參議
  • 高祖父 : 心惱地(沈腦之) - 症吏曹參判
  • 曾祖父 : 審능목(沈能穆) - 症吏曹判書
  • 祖父 : 심의현(沈宜絢) - 능주牧師 · 冬至돈녕부社
  • 조某 : 坡平 尹氏(坡平 尹氏)
    • 아버지 : 심응택(沈應澤) - 工曹判書
    • 어머니 : 餘興 閔氏(驪興 閔氏) - 흥선大院君 의 丈人이자 高宗 의 外祖父 工曹判書 민치구 (閔致久)의 딸
      • 姨母 : 餘興 閔氏(驪興 閔氏) - 工曹判書 민치구 (閔致久)의 딸
      • 姨母夫 : 흥선大院君
        • 姨從四寸 : 高宗皇帝
        • 本人 : 심상훈 (沈相薰) - 參政大臣(大韓帝國 首席 副總理) · 中樞院 議長(大韓帝國 國會議長) · 元帥府 軍務局 總長(大韓帝國 合參議長) · 中央銀行 總裁(大韓帝國 韓國銀行 總裁)
        • 否認 : 安東 金氏(安東 金氏)
          • 兩者 : 심이섭(沈理燮, 承旨) - 尋常葉(沈相燁)의 아들
          • 며느리 : 우봉 李氏(牛峰 李氏) · 坡平 尹氏(坡平 尹氏)
          • 아들 : 심영섭(沈瑛燮, 江陵府使)
          • 아들 : 심장섭(沈璋燮, 內部 參書官)
          • 며느리 : 광산 金氏(光山 金氏) - 吏曹判書 김영철 (金永哲)의 딸
          • 아들 : 심경섭(沈瓊燮)
          • 며느리 : 寒山 李氏(韓山 李氏) - 刑曹判書 이승순(李承純)의 딸
          • 아들 : 심규섭(沈珪燮, 攝通禮)
          • 며느리 : 淸州 韓氏(淸州 韓氏) - 參政大臣 한규설 (韓圭卨)의 딸

垂訓 [ 編輯 ]

1902年 大韓帝國 建國 1等 功臣에 책록되고, 1908年 大勳位가 되었다.

參照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