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부사 요시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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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부사 요시모토
花房義質
出生 1842年 2月 10日 ( 1842-02-10 )
일본의 기 日本 오카야마番
死亡 1917年 7月 9日 ( 1917-07-09 ) (75歲)
性別 男性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國籍 일본 제국의 기 日本 帝國
職業 外交官
賞勳 대한제국 大勳位 李花大首長
하나부사 요시모토

하나부사 요시모토 ( 日本語 : 花房義質 , 1842年 2月 10日 ( 덴抛 13年 1月 1日 ) ~ 1917年 ( 다이쇼 6年) 7月 9日 )는 메이지 時代 다이쇼 時代 에 活動한 日本 帝國 의 外交官이다. 오카야마番 의 燔師이며 實業家이자 初代 오카야마시 腸을 歷任한 政治家이다. 樞密顧問官, 日本 赤十字社 社長을 歷任하였으며 作爲는 自作 이다.

生涯 [ 編輯 ]

오가타 考案 (?方洪庵)의 데키駐쿠 (適塾)에서 蘭學 을 배웠으며, 1867年 에는 유럽과 美國으로 留學을 가서 이듬 해에 歸國하였다. 1870年 부터 外國官御用卦(外?官御用掛)로 外務省에 出勤하였으며, 같은 해에 〈 淸日修好條約 〉의 締結을 위하여 淸나라 에 갔다.

1872年 에 日本 요코하마 항에 碇泊 中이던 페루 船積의 마리아 루스(Maria Luz) 號에서 淸나라 勞動者에 對한 虐待 事件(마리아 루스號 事件)이 發生하자 書記官으로 外務卿 소에지마 다네오미 를 補佐하였고, 仲裁 裁判을 위한 代理公使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에 派遣되었다. 訴訟 以後에는 日本과 러시아 의 國境 確定을 위한 交涉을 위해서 派遣된 全權公使 에노모토 다케아키 를 補佐하였다.

1877年 에 駐朝鮮 代理公使에 任命되었고, 朝鮮 政府가 釜山 두모진(豆毛?)에 稅關을 設置하자 1878年 8月 10日 부터 軍艦과 함께 釜山에 派遣되어 稅關의 撤去를 要求하였으며, 같은 해 12月 4日 에 朝鮮 政府가 正式으로 稅關을 撤去하게 하였다. 1880年 4月에 日本 政府는 朝鮮의 漢城 에 工事를 常住시키기로 決定하였고, 하나부사를 初代 公使로 임명하였다.

1882年 壬午軍亂 當時에 日本 公使館이 襲擊당하자 公使館을 脫出하여 日本으로 歸國하였고, 데라우치 마사打케 가 引率하는 日本軍과 함께 朝鮮에 건너와 〈 濟物浦 條約 〉을 締結시켜, 事件의 損害 補償과 함께 漢城에 日本軍 駐屯 等을 朝鮮 政府가 認定하게 한다.

1883年 부터 1886年 까지 러시아 駐在 特命 全權公使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에 主宰하였다. 以後에는 農商務次官, 皇室會計審査國葬, 宮內次官, 樞密顧問官, 日本 赤十字社 社長 等을 歷任하였다. 1896年 에 男爵의 爵位를 받았다.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