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宗 (朝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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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宗
孝宗
효종과 인선왕후가 묻힌 영릉
孝宗과 인선왕후 가 묻힌 영릉
第17代 朝鮮 國王
在位 1649年 5月 13日 ~ 1659年 5月 4日 (陰曆)
卽位式 昌德宮 認定門
前任 人組
後任 顯宗
조선국 王世子
在位 1645年 9月 27日 ~ 1649年 5月 12日 (陰曆)
前任 소현세자
後任 王世子 年 (玄宗)
이름
이호(李淏)
시호 先聞장무신성현인名義정덕대王
( 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 )
尊號 欠薦達도광의홍열
( 欽天達道光毅弘烈 )
陵號 영릉 (寧陵)
京畿道 驪州市 능서면 영릉로 269-50
軍號 봉림大君(鳳林大君)
身上情報
出生日 1619年 5月 22日 ( 1619-05-22 ) (陰曆)
出生地 朝鮮 漢城府 警行方 향교동 本宮
死亡日 1659年 5月 4日 ( 1659-05-04 ) (39歲) (陰曆)
死亡地 朝鮮 漢城府 昌德宮 大造殿
父親 人組
母親 인열왕후 韓氏
配偶者 인선왕후 張氏
子女 1男 7女 (3男 8女)
顯宗 , 漕卒 大君 2名, 公州 1名
숙신공주 , 숙안공주 , 숙명공주 , 숙휘공주
숙정공주 , 숙경공주 , 숙녕옹주

孝宗 (孝宗, 1619年 6月 23日 ( 陰曆 5月 22日 ) ~ 1659年 6月 13日 ( 陰曆 5月 4日 ), 在位 : 1649年 ~ 1659年 )은 朝鮮 의 第17代 國王 으로, 人組 인열왕후 의 次男이다.

槪要 [ 編輯 ]

朝鮮의 第17代 國王으로, 는 號(淏), 本貫은 全州 (全州), 는 정연(靜淵), 는 죽오(竹梧)이며, 君號는 봉림大君 (鳳林大君)이다. 兄인 소현세자 와 함께 淸나라 에서 8年間 人質 生活을 하였다. 歸國 後 소현世子가 急死 하면서 仁祖에 依해 世子로 冊封되었다. 송시열 , 윤선도 , 송준길 의 文人이다.

1647年 (仁祖 25年) 父王 人組 를 代身하여 代理淸淨 을 施行하였고, 1649年 (仁祖 27年) 5月, 仁祖가 昇遐하자 昌德宮 認定門 에서 卽位하였다.

戚臣들과 西人 反正 功臣들을 牽制하면서 西人 山林 勢力을 登用, 金集 , 김상헌 , 안방준 等과 그들의 文人들을 積極 拔擢하였다. 以後 北伐論을 計劃하였으며 金堉 의 建議를 받아들여 大同法 을 施行하였으나 在位 10年만에 過勞로 議員의 診療를 받던 中 갑작스럽게 死亡한다. 孝宗의 死亡 當時 繼母인 自意對比 가 生存해 있었는데, 自意對比의 服喪 問題를 두고 禮訟 論爭 이 일어난다.

生涯 [ 編輯 ]

出生과 王子 時節 [ 編輯 ]

1619年 (光海君 11年) 5月 22日, 宣祖 의 孫子인 능양군 郡夫人 韓氏 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623年 (光海君 15年), 仁祖 反正 으로 아버지 능양군이 人組 로 卽位하면서 王子로 冊封되고, 1626年 (仁祖 4年) 봉림大君(鳳林大君)으로 封해졌다.

1627年 (仁祖 5年) 이인거의 亂 이 鎭壓되자 特別히 소무원종공신(昭武原從功臣) 1等에 책록되고 이듬해 유효립의 逆謀 를 摘發하고 寧社功臣을 冊封할 때에도 領事原從功臣(寧社原從功臣) 1等에 책록되었다.

1631年 (仁祖 9年) 長幼 의 딸 風眼夫婦인 張氏 (인선왕후)와 婚姻하였다. [1]

1635年 (仁祖 13年) 仁祖의 名으로 송시열 윤선도 等이 大君師傅(師傅)에 任命되어 봉림大君과 인평대군 을 가르쳤다. 그中 宋時烈은 淸나라 의 侵略을 當한 朝鮮 의 現實을 金나라 의 侵略을 當한 南宋 과 같이 보았고, 走者 의 思想이 이를 克服하는 解答이라 보았다. 宋時烈이 恒常 走者를 言及하자 孝宗은 '말마다 옳은 이는 오직 走者이며, 일마다 옳은 이가 오직 走者이십니까'라고 反問했다 한다.

世子 冊封 [ 編輯 ]

1636年 (仁祖 14年) 丙子胡亂 이 일어나자 仁祖의 名으로 아우 인평대군 을 비롯한 王族을 거느리고 江華島 로 옮겨 長期 抗戰을 꾀했다. 그러나 南漢山城 에 孤立되었던 仁祖가 이듬해 丁丑하성 을 決行, 淸나라 에 降伏함에 따라 三田渡의 屈辱 을 지켜보아야 했다. 以後 兄인 소현세자 홍익한 · 윤집 · 오달제 等 强勁 主戰論者들과 함께 淸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年동안 선양 에 머물렀다. [2]

淸나라 人質 期間 中 兄인 소현世子는 北京 에 到着한 아담 샬 等의 天主敎 宣敎師들과 만나 새로운 知識과 文物을 接見하였으나, 봉림大君은 人質 生活 내내 復讐心과 淸나라 를 征伐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는 淸나라 를 다녀간 朝鮮 人 商人들과 外交官, 譯官들을 통해 朝鮮에도 傳해졌고 父王 人組 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1645年 (仁祖 23年) 2月에 먼저 歸國했던 소현세자 가 그해 4月 갑자기 죽자 5月에 淸나라 로부터 돌아왔다. 仁祖는 世子가 죽자 世孫이 아닌 次男 봉림大君을 世子로 冊封하려 했다. 當時 大多數의 重臣들은 元孫의 世子 冊封을 主張했으나 國有將軍론(國有長君論)을 내세운 仁祖의 剛한 意志에 따라 尹6月에 世子로 冊封되었다. 世子의 物望에 오르자 처음에는 辭讓하였으나 거듭 勸告가 들어오자 世子위를 받아들였다. [3]

在位 期間 [ 編輯 ]

人事, 政治 改革 [ 編輯 ]

1649年 5月 13日, 仁祖의 뒤를 昌德宮 認定門 에서 卽位하였다. 卽位 直後 그는 仁祖 反正 의 反正功臣인 西人 功臣系列과 김자점 等의 外戚 勢力을 牽制하기 위해 새로운 人材들을 拔擢했다. 卽位 直後 自身의 大君時節 師父였던 송시열 송준길 을 拔擢했는데, 이들의 建議를 받아들여 西人 內에서도 非功臣인 山林 系列의 迎入을 推進하였고 金集 , 김상헌 , 안방준 等과 그들의 文人들을 積極 拔擢했다. 이 中 안방준 을 除外하고는 그의 迎入에 積極 呼應하여 朝廷에 出仕하였다. 또한 西人이었으나 亦是 非功臣 系列인 金堉 을 拔擢하였다. 金堉은 孝宗 在位期間 내내 大同法 實現을 위해 努力하였다.

또한 숭用山林 政策의 一貫性을 維持하기 위해 在野에 머무르고 있던 남인 性理學 者들의 迎入을 推進했다. 西人 中에서도 남인 에게 溫乾한 立場이던 심지원 원두표 의 建議를 받아들여 許穆 , 尹鑴 等에게 請要職을 除授하여 불러들이기도 했다.

卽位 初부터 孝宗은 過去 反正 功臣들과 外戚의 專橫과 改革案을 듣기 위해 널리 여러 衆論을 모으겠다는 뜻에서 丘言(求言) 政策을 펼쳤다. 이에 잠곡 金堉이 大同法 을 主張하고 김홍욱 이 이를 積極 支持하자 大同法 施行令을 내렸다. 이어 金堉으로부터 大同法 施行의 適任者로 推薦받은 김홍욱을 承旨(承旨)로 임명했다가 1651年 공충도 觀察使로 임명하여 忠淸道에서 大同法을 實施하게 했다. 그 뒤 忠淸道 紅酒 牧師로 있던 김홍욱은 上疏를 올려 '靑感染徹宵(請減鹽鐵疏)를 올려 瑞山·泰安 地方의 鐵物·소금 生産에 從事하는 사람들이 바쳐야 하는 稅金 負擔이 너무 過重해 鹽田業者들이 鹽田을 中斷하거나 도망가는 일이 많고 生産이 減縮된 實情에 있으니 이를 蕩減해 줄것을 靑'하였고 이를 孝宗이 全幅的으로 들어주니 百姓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1654年 (孝宗 5年) 6月 17日 김홍욱 홍우원 等이 소현세자 의 아들 경안군 석철의 釋放을 主張하는 上疏를 올렸다. 처음에 孝宗은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말을 그대가 능히 말하니 眞實로 嘉尙하다. 留念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여 그 上訴를 問題삼는 意見을 물리치고 特別하게 害를 입히지 않았다. 김홍욱은 홍우원 의 主張에 積極 同意하다가 이듬해 昭顯世子嬪 姜氏 의 獄事가 無辜임을 主張한다

北伐 計劃 [ 編輯 ]

淸나라에 當한 恥辱을 씻고자 北伐을 最優先 課題로 삼았던 孝宗은 卽位 後 政權을 掌握하고 있던 김자점 等 親淸派(親淸派)를 朝廷에서 몰아내고 김상헌 · 金集 · 송시열 · 송준길 等 서인계 大淸(對淸) 强勁派를 重用하여 北伐計劃을 推進했다. 이들은 請을 軍事的으로 膺懲하는 것은 軍部國(君父國)인 名에 對한 信者國(臣子國)의 當然한 義務라는 復讐設置(復讐雪恥)의 論理로 孝宗의 北伐을 이념적으로 支援했다.

아울러 이러한 北伐論은 兩란 以後 體制崩壞危機를 克服하기 위한 支配層의 內實자강책(內實自?策), 卽 '國家再造'(國家再造)라고 하는 對內的인 支配安定策의 意味를 갖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窮地에 몰린 金自點 等의 親淸勢力이 譯官(譯官) 이형장(李馨長)을 통해 一連의 北伐計劃을 淸나라에 알려 淸의 干涉을 誘導함에 따라 卽位 初期에는 積極的인 軍事計劃을 펼 수 없었다.

1651年(孝宗 2年) 朝鮮에 對하여 强勁策을 펴던 淸나라의 攝政王 도르곤 의 죽음은 北伐計劃을 추진시켜나가는 데 좋은 契機가 되었다. 이에 親淸派에 對한 士林勢力의 大大的인 攻勢가 始作되고 그해 12月에는 조귀인獄事(趙貴人獄事)를 契機로 金自點 等의 親淸派에 對한 大大的인 肅淸이 斷行되었다.

軍備 强化와 兵力 徵集 [ 編輯 ]

以後 本格的인 軍備强化가 推進되기 始作했는데 孝宗은 弛緩 (李浣)·유혁연(柳赫然) 等 武臣을 特採하여 軍事養成의 實際 任務를 맡겼다. 이러한 軍人士政策은 以前에 勳臣·宗戚(宗戚) 等을 임명하던 例와는 다른 破格的인 것으로 孝宗의 北伐 軍事强化策 中 가장 成功的인 것으로 評價받고 있다. 1652年 北伐의 先鋒部隊人 御營廳 (御營廳)을 大大的으로 改編·强化했으며, 禁軍(禁軍)의 騎兵으로의 轉換, 모든 禁軍의 內三廳(內三廳) 統合, 守禦廳 의 再强化 等 諸般 軍制改革을 통해 軍事强化策을 摸索했다. 이와 함께 禁軍의 軍額을 1,000, 御營軍을 2萬, 訓鍊都監君을 1萬으로 增額시키고자 했다. 御營軍은 많은 軍士를 確保하고 3名의 步麟蹄(保人制)를 통하여 財政的인 難點을 克服함으로써 軍事 增强에 成功했으나, 訓鍊都監 은 財政이 뒷받침되지 못하여 失敗했다.

한便 1654年 3月 有名無實했던 令狀制(營將制)를 强化, 各 地方에 令狀을 派遣하여 直接 束伍軍 을 指揮하게 함으로써 地方 軍事力의 弱化를 是正하는 한便, 1656年에는 南方地帶 束伍軍에 보인(保人)을 支給하여 訓鍊에 專念하도록 했다. 1655年에는 能麽兒廳(能兒廳)을 設置하여 武將들에게 軍事學을 講義하기도 했으며, 平野展에 유리한 將兵檢(長柄劍)의 製作, 漂流해온 네덜란드人 하멜 을 통해 鳥銃 製作 等 武器의 改良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軍備强化에도 不拘하고 國際情勢가 好轉되지 않은 데다가 孝宗도 일찍 죽어 北伐을 實踐으로 옮기지는 못했으며 다만 淸의 要請에 따른 2次例의 나선 征伐 에서 軍備强化의 成果가 나타났다.

그러나 批判的인 視角도 存在한다. 史學者 이이화 는 이를 두고 '國家 危機를 招來할 수도 있는 莫重한 일을 推進하면서 國際政治의 力學을 正確히 計算하지 않은 채 鷄卵으로 바위를 치는 水準의 軍事力을 가지고 滿洲 벌판을 달릴 허황된 꿈에 부풀어 있었다. [4] 曉鐘을 비롯해 一部 支配勢力은 北伐 問題에 關한 限 거의 理性이 痲痹되었지만 民衆들은 別로 關心을 두지 않았다. [4] '는 評을 내리기도 했다.

經濟 政策 [ 編輯 ]

孝宗은 經濟再建에도 많은 努力을 기울였다. 當時 朝鮮社會는 여러 次例에 걸친 戰亂으로 進展(陳田)李 增加하고 農業生産力이 急激히 減少하는 한便, 農民들은 破産하여 琉璃(流離)하는 等 國家體制를 維持하기 힘들 程度로 經濟秩序·社會秩序가 崩壞 危機에 놓여 있었다.

孝宗은 이러한 危機를 賦稅制度의 改革, 農業生産力의 增大, 社會倫理의 强化로 克服하려고 했다. 于先 金堉 等의 建議를 받아들여 大同法 의 實施地域을 擴大해 1652年에는 忠淸道 , 1653年에는 全羅道 山君(山郡) 地域, 1657年에는 全羅道 沿海岸 各 고을에서 大同法을 實施했다. 이와 함께 傳貰(田稅)도 1結(結)當 4頭(斗)로 固定하여 百姓의 負擔을 크게 輕減시켰다.

한便 1655年에는 迅速(申?)이 編纂한 〈農家集成 農家集成〉을 刊行·普及하여 農業生産에 利用하도록 했다. 한때 軍備擴充에 必要한 同綴(銅鐵)의 需要를 충족시키기 위해 銅錢의 流通에 反對하기도 했으나 金堉의 强力한 主張에 따라 常平通寶 (常平通寶)를 주조·流通시키도록 했다.

강빈 復權 輿論과 김홍욱 장살 事件 [ 編輯 ]

孝宗은 卽位 初부터 反正功臣들과 外戚의 權力 濫用과 腐敗行爲를 牽制하기 위해 隨時로 丘言이라 하여 여러 臣僚들과 百姓들의 建議를 直接 듣는 政策을 펼쳤다. 1655年 김홍욱은 丘言에 依해 黃海監司로 在職 中, 강빈 獄舍의 造作을 歎願하여 人한재응支所(因旱災應旨疏)를 올려 민회빈 姜氏의 抑鬱함을 呼訴하였고, 민회빈 姜氏의 身元回復과 소현世子의 살아있는 셋째 아들 경안군 이석철 의 釋放을 要求하였다. [5] 이에 孝宗은 卽位 初부터 소현세자 問題에 對한 發言을 嚴禁하였는데 그 이야기를 꺼낸다며 김홍욱이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며 國文章을 열고 그를 直接 國文하였다.

金集 은 直言을 한 선비를 해쳐서는 안된다며 김홍욱의 赦免을 請하는 上疏를 올렸고, 송시열, 송준길 等이 김홍욱의 釋放과 容恕를 請하는 上疏를 올렸으며 이어 김홍욱 救命 輿論을 造成했다. 잠곡 金堉 亦是 김홍욱의 發言으로 刑問을 加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釋放을 歎願하였다. 남인 側에서도 김홍욱의 救命과 釋放 輿論이 나타났다. 홍우원, 許穆 等은 김홍욱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釋放을 建議했다. 重臣들의 挽留와 山林의 反對, 金集 과 그 門下生들의 赦免 歎願書와 救命 努力에도 不拘하고 直接 義禁府 에 秋國葬을 열어 拷問을 繼續하였다.

그러나 소현세자 一家의 無罪가 立證 되면 自身의 地位가 위태로워진다고 判斷한 孝宗에 依해 김홍욱을 國文끝에 長살로 殺害하였다. [6] [7] 죽음에 이르러 "言論을 가지고 殺人하여 亡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8] 1654年 남인 홍우원은 弘文館 修撰이 되었는데 홍우원은 搪塞을 超越하여 김홍욱의 赦免, 復權輿論을 奏請하였다. 그는 소현世子의 빈 姜嬪(姜嬪)獄舍의 虛僞임을 直言하다 杖殺당한 김홍욱의 身元(伸寃)과 復權을 主張하다가 罷職당하였다.

김홍욱의 장살 事件 以後로 朝野는 洶洶해졌고 그때까지만 해도 孝宗의 正統性에 疑問을 提起하지 않던 西人 남인 에서는 소현世子의 아들을 世孫으로 삼아 王位를 傳해야 되는데, 孝宗이 王世子가 된 것이 아니냐 하는 輿論이 나타났다. 소현世子의 아들들이 살아있는 가운데 王位 繼承의 正統性 問題는 爆發力을 안고 있었고, 이 問題는 그의 死後 禮訟 論爭 에서 윤선도 가 다시 言及함으로써 도마에 오르게 된다.

曆法 및 書籍 編纂 [ 編輯 ]

1654年 (孝宗 5年) 改正된 曆法(曆法)인 時憲曆 (時憲曆)을 使用하였다. [9] 時憲曆은 24節氣의 時刻과 1日間의 時間을 計算하여 製作한 것으로 西洋의 天文學을 土臺로 制定한 淸나라의 曆法이다.

1654年 (孝宗 5年), 《 仁祖實錄 》을, 이듬해 〈 國朝寶鑑 國朝寶鑑〉을 編纂하고 刊行했으며, 1656年에는 소혜왕후 가 編纂한 〈 內訓 〉과 김정국(金正國)이 지은 〈警民編 警民編〉을 刊行·普及하여 戰亂으로 흐트러진 社會倫理의 再正立을 試圖하기도 했다. 1657年 에는 《 宣祖實錄 》을 《 先祖修正實錄 》으로 改編·刊行했다.

最後 [ 編輯 ]

最後 및 陵墓 [ 編輯 ]

1659年 (孝宗 10年) 5月 初부터 過勞로 인하여 政事를 볼 수 없는 狀況이 이어지자, 孝宗은 鍼을 맞는 것이 어떻겠냐는 意見을 臣下들에게 물었다. 臣下들은 一時的으로 挽留하는 듯 했으나 孝宗이 이에 對해 同意하여 침을 맞게 된다. 그런데 御醫 人 신가귀의 診療를 받던 途中 失手로 침을 잘못 놓게 되어 出血이 發生한다. 出血을 멈추려 갖은 試圖를 하였으나 오히려 出血은 더욱 심해졌다. 結局 當日 過多出血로 인한 쇼크로 갑작스럽게 死亡하였다. 또한 孝宗에게 시침하였던 語義는 手顫症 이 있었다고 한다. 신가귀는 顯宗 臺에 敎兄에 處해졌다.

孝宗이 갑자기 昇遐하자 唐慌한 朝廷에서는 제대로 對應하지 못했고, 殮襲을 하는 동안 屍身의 腐敗와 藥물의 副作用 等으로 屍身이 갑자기 부풀어오르는 現象이 나타났다. 이러한 일을 두고 毒殺說이 提起되었다. 孝宗의 國葬을 主管하던 송시열 , 송준길 等은 念意를 다시 마련하는 한便 새로 棺槨을 짤 수 없자, 旣存의 棺槨에 나무를 잘라 連結하여 이어붙여 새로 梓宮을 마련하였다.

陵은 京畿道 驪州市 世宗大王面 에 位置한 영릉 (寧陵)이다.

廟號와 시호 [ 編輯 ]

廟號는 孝宗 (孝宗)이며 諡號는 흠천달도광의홍렬선문장무신성현인명의정덕대왕 (欽天達道光毅弘烈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이다. 歷代 임금의 諡號는 恒常 '孝' 字로 끝나는데 孝宗은 廟號에서 '孝' 者를 使用했기에 重複해서 쓸 수 없어 이를 使用하지 않았다. [10]

諡號의 境遇 처음엔 熱門義務神聖知人(烈文毅武神聖至仁)이라고 했지만 列聖朝의 揮毫를 犯했다 하여 先聞장무신성현인으로 고쳤으며 [11] 以後 英祖 때 名義정덕의 尊號를, [12] 高宗 때 欠薦達도광의홍열이라는 尊號를 더했다. [13]

家族 關係 [ 編輯 ]

出生 死亡
朝鮮 第17代 國王 孝宗大王
孝宗大王
1619年 6月 23日 ( 陰曆 5月 22日 )
조선 朝鮮 漢城府 警行方 本宮
1659年 6月 13日 ( 陰曆 5月 4日 ) (39歲)
조선 朝鮮 漢城府 昌德宮 大造殿

父母 [ 編輯 ]

本館 生沒年 父母 備考
仁祖大王
仁祖大王
全州 1595年 - 1649年 原從大王
元宗大王
[14]
인헌왕후 丘氏
仁獻王后 具氏
第16代 國王
인열왕후 韓氏
仁烈王后 韓氏
淸州 1594年 - 1635年 書評府院君 한준겸
西平府院君 韓浚謙
會散夫婦인 昌原 黃氏
檜山府夫人 黃氏

王妃 [ 編輯 ]

시호 本館 生沒年 父母 備考
王妃 인선왕후 張氏
仁宣王后 張氏
효숙王大妃
孝肅王大妃
덕수 1619年 - 1674年 신풍부원군 長幼
新豊府院君 張維
靈駕夫婦인 金氏
永嘉府夫人 安東 金氏

後宮 [ 編輯 ]

爵號 本館 生沒年 父母 備考
安貧 李氏
安嬪 李氏
慶州 1622年 - 1693年 이응헌
李應憲
未詳
肅宗 12年(1686年) 安貧으로 封爵
熟議 熟議 金氏
淑儀 金氏
未詳 未詳 未詳 《全州李氏對官》 船員世界 本系
宿願 宿願 鄭氏
淑媛 鄭氏
未詳 未詳 未詳 《全州李氏對官》 船員世界 本系

王子 [ 編輯 ]

軍號 이름 生沒年 生母 配偶者 備考
1 ▨▨大君
▨▨大君
[15]
1637年 - 1642年
1638年 - 1642年
仁宣王后 張氏
2 현종대王
顯宗大王

?
1641年 - 1674年 仁宣王后 張氏 명성왕후 金氏
明聖王后 金氏
第18代 國王
3 ▨▨大君
▨▨大君
[16]
1645年 - 1645年 仁宣王后 張氏

王女 [ 編輯 ]

爵號 生沒年 生母
親父母
配偶者 備考
1 숙신공주
淑愼公主
1634年 - 1645年 仁宣王后 張氏 肅宗 1年(1675年) 숙신공주로 追贈
2 숙안공주
淑安公主
1636年 - 1697年 仁宣王后 張氏 익평位 홍득기
益平尉 洪得箕
3 숙명공주
淑明公主
1640年 - 1699年 仁宣王后 張氏 청평位 심익현
靑平尉 沈益顯
4 숙휘공주
淑徽公主
1642年 - 1696年 仁宣王后 張氏 仁平位 정제현
寅平尉 鄭齊賢
5 ▨▨公州
▨▨公主
[17]
1643年 - 1644年
1644年 - 1644年
仁宣王后 張氏
6 숙정공주
淑靜公主
1646年 - 1668年 仁宣王后 張氏 동평位 정재륜
東平尉 鄭載崙
7 숙경공주
淑敬公主
1648年 - 1671年 仁宣王后 張氏 興坪位 원몽린
興平尉 元夢鱗
8 숙녕옹주
淑寧翁主
1649年 - 1668年 安貧 李氏 金評位 朴弼成
錦平尉 朴弼成
養女 의순공주
義順公主
[18]
1635年 - 1662年 金림軍
錦林君
[19]
郡夫人 劉氏
郡夫人 柳氏
예친왕 도르곤
睿親王 多爾袞
[20]

孝宗이 登場하는 作品 [ 編輯 ]

小說 [ 編輯 ]

  • 《牡丹꽃이 모랑모랑 피어서》- 이정연 役


北伐論에 對한 批判 [ 編輯 ]

이이화는 孝宗의 北伐論을 허황된 꿈이라 批判하였다. 그에 依하면 孝宗은 國家 危機를 招來할 수도 있는 莫重한 일을 推進하면서 國際政治의 力學을 正確히 計算하지 않은 채 鷄卵으로 바위를 치는 水準의 軍事力을 가지고 滿洲 벌판을 달릴 허황된 꿈에 부풀어 있었다. [4] 曉鐘을 비롯해 一部 支配勢力은 北伐 問題에 關한 限 거의 理性이 痲痹되었지만 民衆들은 別로 關心을 두지 않았다. [4]

燕巖 朴智元 亦是 그의 위에 또 임금이 있다며 嘲弄했다. 明나라 의 皇帝가 그의 임금이라는 것이다. '우리 先王에게는 또 임금이 있었는데 대명(大明) 天子가 곧 우리 賃金의 임금이다. 先王에게는 臣下가 있었는데 試閱 領報(英甫)였고 千字에 충성함이 그 賃金에 충성함과 같았다. 先王에게는 怨讐가 있었는데 오직 저 建州衛 (建州衛)라. 어찌 내 사사로운 怨讐이랴? 큰 나라의 怨讐이지. [4] '라고 諷刺했던 것이다.

박시백의 朝鮮王朝實錄 孝宗­-玄宗 實錄에서는 孝宗의 北伐政策이 政治的 名分이 包含된 防禦 中心의 現實的인 政策이라는 推測도 있다. 봉림大君 時節에 볼모의 身分으로 淸나라의 軍隊와 함께 大陸을 누비면서 그들이 北京을 征服하는 過程을 지켜보았고, 自身의 兄嫂인 강빈과 그女의 아이들이 政治의 非情함에 죽어가는 過程을 지켜보면서 現實의 利害關係에 對해 잘 알게 된 그가 果然 當時 東아시아의 最强國이었던 淸나라에 對한 征伐을 推進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淸나라는 朝鮮의 現況에 對해 集中的으로 監視했다고 하는데, 이 亦是 北伐을 推進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當時 山林 勢力은 소현세자나 世孫이 寶位를 이어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고, 강빈의 逆謀事件에 對해서도 不信하였었다. 卽, 曉鐘에게 있어 金自點 等 親淸派는 友好勢力이었고, 山林勢力은 批判勢力이었다는 것이다. 孝宗은 이러한 狀況을 보면서 親淸派와 손을 잡기보다는 地方에서 後學을 養成하며, 떠오르고 있는 山林勢力과 손을 잡기로 했는데, 山林勢力을 끌어들이기에 가장 좋은 名分인 北伐論을 擇했다는 것이다. 實際로 北伐과 關聯한 大部分의 政策(江華島에 堡壘를 세우거나, 남한산성 等을 保守)들은 征伐을 위한 것보다는 長期的으로 防禦戰을 벌이는 性格에 가까웠다.

卽, 孝宗의 北伐政策은 한창 떠오르는 勢力이었던 山林 勢力과 손을 잡기 위해 擇한 것이었으며, 北伐 政策의 實際는 長期的인 防禦戰을 念頭에 두었던 現實的인 政策이었다는 것이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承政院日記 》 33冊 (脫抄本 2冊) 仁祖 9年(1631年 名 숭정(崇禎) 4年) 9月 13日 (甲申)
    鳳林大君吉禮於梨峴宮。 (中略)
    봉림大君 (鳳林大君)의 吉禮(吉禮)를 梨峴宮(梨峴宮)에서 擧行하였다.
  2. 仁祖實錄 》 34卷, 仁祖 15年(1637年 名 숭정(崇禎) 10年) 2月 8日 (無人)
    舊왕이 撤軍하면서 王世子와 貧窮, 봉림大君과 夫人을 데려가자 電送하다
  3. 仁祖實錄 》 46卷, 仁祖 23年(1645年 靑 脣齒(順治) 2年) 9月 27日 (乙亥)
    봉림大君을 王世子로, 夫人 張氏를 世子嬪으로 冊封하다
  4. 이이화, 《韓國史 이야기 13:黨爭과 政變의 소용돌이》 (한길사, 2001) 95페이지
  5. 그에 依하면 甚한 가뭄이 昭顯世子嬪을 師事한 데에서 起因한다고 主張하고 그 圓筒함을 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6. 이덕일,《黨爭으로 보는 朝鮮歷史》(1997, 石筆) 249~251 페이지 參考
  7. 이덕일,《黨爭으로 보는 朝鮮歷史》(1997, 石筆) 163 페이지 參考
  8. 성암서원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9. [朝鮮王朝實錄 孝宗實錄 10卷] 孝宗 4年 1653年 1月 6日 ........自甲午年, 一依新法, 推算印行爲當
  10. 顯宗實錄 》 1卷, 玄宗 卽位年(1659年 靑 脣齒(順治) 16年) 5月 11日 辛未 1番째記事
  11. 《현종개수실록》 1卷, 玄宗 卽位年(1659年 靑 脣齒(順治) 16年) 5月 11日 (辛未) 2番째記事
  12. 《英祖實錄》 51卷, 英祖 16年(1740年 靑 乾隆(乾隆) 5年) 6月 22日 (辛卯) 2番째記事
  13. 《고종실록》 40卷, 高宗 37年(1900年 對한 光武(光武) 4年) 2月 19日 (陽曆) 2番째記事
  14. 宣祖 의 第5男. 정원군(定遠君)
  15. 承政院日記 》 81冊(脫抄本 4冊) 仁祖 20年(1642年 名 숭정(崇禎) 15年) 4月 19日 (戊午)
    藥房 都提調 李聲九(李聖求), 副提調 서경우가 아뢰기를,

    “삼가 들으니 봉림大君 房(鳳林大君房)의 王손(王孫)은 끝내 목숨을 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聖上께서 氣候를 調攝하시는 中인데 이런 놀랍고 슬픈 일을 當하시니, 必是 더 傷할 念慮가 있습니다. 神들이 至極히 區區한 念慮를 이기지 못하여 敢히 와서 문안드립니다.”

    하니, 前과 같다고 答하였다.

  16. 仁祖實錄 》 46卷, 仁祖 23年(1645年 靑 脣齒(順治) 2年) 9月 9日 (정사)
    世子嬪 張氏가 私邸에서 分娩하다
  17. 《審貫祿 (瀋館錄) 卷7, 辛酉 (申濡) 지음
    甲新年(1644年) 3月 13日, 洋弓(兩宮)李 義州 (義州)에 머물렀다.

    봉림大君(鳳林大君)의 태어난지 數個月 된 딸이 瀋陽 에서 나와 義州로 向하던 길에 義州性 밖에서 卒逝하였다.

  18. 淸나라 도르곤 이 朝鮮의 王女 및 大臣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려 求婚勅書를 보내 婚姻을 要求하자, 孝宗은 宗室 金림軍 의 딸을 公主로 삼아 도르곤에게 시집보냈다.
  19. 成宗 의 13男 익양군 의 曾孫子
  20. 누르하치 의 14男

註解 [ 編輯 ]

前任
광해군
朝鮮 代理淸淨
1647年 ~ 1649年
後任
警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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