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하
(趙寧夏,
1845年
6月
~
1884年
12月 5日
)는
朝鮮
의 文臣, 무신, 戚臣,
政治가
,
是認
이다.
者(字)
는 기삼(箕三)이고
號(號)
는 惠人(惠人)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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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本貫은
풍양
(?壤)으로
新訂皇后
조氏의 親庭 5寸 조카이며
조성하
(趙成夏)는 東甲의 6寸 兄이다.
事大黨
의 重要 人物이며, 6寸 兄
조성하
와 함께
哲宗
때 不遇한 處地에 있던
흥선大院君
(興宣大院君)을 만나 交分을 쌓았으며,
흥선大院君
과 5寸 從姑母
趙大妃
를 連結시키는 架橋 役割을 하였다.
哲宗
때인
1863年 庭試 文科에 丙科15 등위로 及第
하였다.
奎章閣
大橋(待敎)를 지냈다.
趙大妃
의 寵愛를 받아
1865年
大司成으로 特進하였다.
1873年
戶曹判書
로 있을 때,
민승호
等 閔氏 一族과
최익현
(崔益鉉) 等 一部
山林
過度 結託하여
흥선大院君
의 實情을 彈劾하여 興宣大院君의 失脚과, 闕內 大院君 勢力의 追放에 앞장섰다.
이 해
高宗
의 親庭(親政)李 宣布되면서 大院君이 失脚하자 捕盜大將·訓鍊大將 等을 지냈다.
1875年
禁衛大將(禁衛大將)이 되고, 訓鍊大將을 거쳐
1876年
知經筵事, 工曹判書 等을 지냈다.
1880年
吏曹判書가 되고, 그 뒤 兵曹判書 等 要職을 지내면서 事大黨(事大黨)의 實力者가 되었다.
1882年
全權臺官으로
日本
의
하나부사 요시모토
를 接見하였으며, 全權大臣이 되어 韓美·韓英·韓獨 修好 條約을 各各 締結하였다. 이 해
壬午軍亂
으로
흥선大院君
이 執權하자,
靑
에 가서 兵士를 要請함으로써 壬午軍亂의 主動者를 索出하였으며, 또한 大院君을 請으로 拉致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閔氏 勢力이 다시 政權을 잡게 되었다. 이 해 다시 陳奏使로 請에 가서 外交 擔當 顧問으로 獨逸人
묄렌도르프
를 招聘, 入國하게 하였다.
末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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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年
陰曆 3月 17日
弘文館 提學이 되었고,
[1]
辦理統理衙門事務(辦理統理衙門事務), 獨판通商事務(督辦通商事務), 都統使(都統使) 等을 거쳐 禮曹判書에 赴任되었으나, 이듬해
甲申政變
때 殺害되었다.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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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祖父 : 朝暾(趙暾) - 量高祖父
趙曮
(趙?)의 兄
- 曾祖父 : 조진완(趙鎭完)
- 祖父 : 조민영(趙敏永) - 조병석의 生父
- 養祖父 : 조장영(趙章永) - 조민영의 큰兄이며 조병석의 養父.
- 生父 : 조병석(趙秉錫)
- 兄님 : 조강하(趙康夏)
- 아우 : 조창하(趙昌夏) - 叔父 조병탁(趙秉鐸)의 養子가 됨.
- 量高祖父 :
趙曮
(趙?)
- 量曾祖父 : 조진관(趙鎭寬)
- 養祖父 :
조인영
(趙寅永)
- 養父 : 조병기(趙秉夔) -
조만영
(趙萬永)의 차자
- 妻 :
龍仁 李氏
이교현(李敎鉉)의 딸 增 貞敬夫人
- 妻 :
全州 李氏
이해석(李海錫)의 딸 貞敬夫人
이정숙
(李貞淑)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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